독자분들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편지를 써서 병 속에 넣은 후 바다로 떠나보내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병 속에 편지를 넣은 주인공은 병이 어디로 갈지, 누구한테 갈지, 도중에 병이 깨져 사라지거나 영원히 바다를 떠돌지 알 수 없습니다. 미지의 누군가를 향해 말을 걸었지만, 운이 좋아야 병을 주운 사람이 편지를 읽을 수 있는 동시대의 사람일 수 있지, 반대의 경우라면 해독 불가능한 나만의 독백으로 그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병 속의 편지'를 통해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다룬 철학자이자 사회과자들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현재의 독일을 만들어낸 양대 학파 중 프랑크푸르트 학파(나머지 하나는 프라이부르크 학파로 신자유주의의 원형이자 질서자유주의 또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정립했다)의 1세대인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21세기 최고의 석학으로 꼽히는 영국의 지그문트 바우만입니다. 



유대인으로 히틀러의 나치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자 미국으로 망명한 아도르노는, 정착할 수 없는 미국사회의 방랑자이자 소외자로서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을 다룬 《미니마 모랄리아》를 통해, 90대 후반의 고령을 이끌고도 활발한 저작활동을 하고 있는 바우만은 근대이성의 산물인 현대성 대한 고찰로 유명한 《유동하는 공포》에서 '병 속의 편지'라는 비유를 통해 지식인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인류의 위대한 철학자들인 두 사람은 47세의 나이로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 발터 벤야민(필자가 아는 한 산문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는지 보여준 최고의 철학자이자 사회과학자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긴 좌우를 막론하고 20세기 말과 21세기의 철학자와 사회학자, 미학자, 정치학자들 중에 미셀 푸코와 발터 벤야민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보편적인 정의와 최선의 유토피아가 있다고 믿는 노엄 촘스키, 철저하게 약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본 하워드 진, 미국에서는 나오기 힘든 좌파지식이지만 미국 특유의 낙관론에 기대는 경향이 있는 리처드 도티, 존 롤스처럼 합리적 토론를 통해 민주적인 합의에 이르는 길을 탐구한 위르겐 하버마스 등은 벤야민이나 푸코에 인색하지만, 그들의 위대함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시련이 닥쳐도 결국에는 자유와 정의의 왕국이 도래할 것이란 '결과의 낙관론'을 믿는 사람들은 희망의 전도사로 최후의 승리를 주창하기 때문에 미셀 푸코와 발터 벤야민처럼 지금/현재의 삶을 중시하는, 그래서 비폭력적인 저항을 지지하는 진보좌파 지식인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은 저항과 투쟁을 반길 혁명가는 없기 때문입니다.  





석학들의 판단이야 어떻든, 이번 글에서는 90이 넘은 나이에도 열정적인 사회참여와 집필을 보여주고 있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의 도움을 받아 '병 속의 편지'가 지식인에 대해 지니는 알레고리(은유 또는 비유)를 다루고자 합니다. 영국이 배출한 최고이 석학 중 한 명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위대한 휴머니스트이자 정직한 철학자이며 불굴의 사회학자였던 마르크스와 아도르노, 브르디외를 인용하며, '병 속의 편지'에 담긴 지식인에 대한 비유에서 두 가지 추정을 제시합니다. 



(병 속에 담긴) 그 메시지가 종이에 써서 병에 넣어 띄워 보낼 만큼 가치가 있다는 추정. 그리고 그것이 발견되어 읽혀질 시점(비록 그 시점을 미리 확정할 수는 없지만)에 아직도 가치가 남아 있으리라는(발견자가 그것을 해독하고 연구, 이해, 적용하기만 한다면) 추정.



이런 두 가지 추정은 어떤 지식인이 자신의 사상에 대해 '들을 준비도 뜻도 없는 동시대 사람들과 말을 섞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을 때, 그래서 '정해지지 않는 미래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에게 메시지를 맡기는 일'이 낫다고 여겼을 때 가능합니다. 이는 어떤 지식인이, 특정할 수 없는 미래의 시공간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사상을 들어줄 것이며, 이해할 수 있으며, 연구하고 발전시켜 후대에 전해줄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라도 동시대의 사람들에게서 아무런 호응도 받지 못하고, 토론을 거쳐 인정받거나, 검증 절차를 거쳐 진리의 영역으로 들어서거나, 심지어는 맹렬한 반박이라도 받지 못하면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시대에 엄청난 핍박과 박해를 받은 위대한 마르크스가 "아무튼 나는 말했고, 나의 영혼은 구원받았다"고 말한 것처럼, 체념에 빠져 똑같이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물론 마르크스처럼 위대하고 방대한 추상을 펼칠 수 있는 지식인도 없겠지만, 전복적이라고 할만큼의 혁명적 변화가 없으면 공멸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재의 상황을 고려하면,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라 행동해야 할 때라는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민주적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고, 영국에서 마르크스주의자 제레미 코빈이 노동당 당수가 된 것에서 보듯 혁명의 기운은 전 세계적으로 분명하게 대두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병 속의 편지'는 영원한 가치를 믿는 사람, 보편적인 진리를 믿는 사람, 지금 진리를 찾고 가치를 지키려 애쓰게 만드는 우려가 계속되리라 의심하는 사람이 쓸 수 있는 편법이다. 그 병 속의 메시지는 좌절이란 일시적일 뿐임을, 그리고 희망은 계속될 수 있음을 입증하고, 가능성의 패배하지 않음과 그런 가능성을 가로막는 적들의 허약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바우만은 지식인의 역할이 치열한 비판정신을 잃지 않는 것에 있다는 아도르노의 성찰을 따라갔습니다.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살해 위협에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던 아도르노가 너무나 흥청망청이고 더없이 풍요롭고 지독히 이중적인 미국에서의 경험이 정신적 부적응에 가까웠던 것도 고려해야지만, 완벽하게 고립된 지식인이 이런 자세를 견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뻔뻔하고 파렴치할 정도의 표절이 넘처나고, 권력과 자본의 돈에 빌붙어 살며, 파벌을 만들어 그들만의 왕국을 구축하기에 바쁜 이 땅의 지식인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요. 



"모든 철학이 죽었다"는 비트켄슈타인의 절망적인 선언이 나왔던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철학과 사회학이 죽어버린 시대가, 신자유주의 통치술과 거대 미디어의 세상이자, 생각 자체가 사라진 채 끊임없이 이동하고 접속하며, 단 한 번의 클릭으로 자신의 과거를 삭제하고, 현재의 나를 끝없이 업그레이드하는 모발일기기의 특징으로 대변되는 시대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을 대량학살한 홀로코스트의 행정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가, 인류사의 최대 악으로 지탄받던 나치의 핵심인물 중 한 명이었던 아이히만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ㅡ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를 출간한 뒤, 좌우로부터 융단포격을 받았던 것을 떠올리면 동시대의 주류에서 벗어난 사상을 꿋꿋하게 밀고 나가는 것은 고립을 자처하는 어리석은 선택이자, 학문적으로 자살행위에 다름이 아닙니다(신자유주의의 특징 중 하나가 악의 평범함이다. 모든 분야에서 타락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좌우의 융단포격을 받은 한나 아렌트가 자신의 사상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것처럼, 그래서 그녀가

《인간의 조건》에서 지식인(모든 개인도 마찬가지이지만)에게 주어진 삶이 사막처럼 척박하고 황량해도 끝끝내 시작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비판이론을 업으로 삼고 있는 지식인이라면 '병 속의 편지' 같은 편법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부르디외가 《세계의 비참》의 추고에서 말한 것을 지식인(특히 철학과 사회학을 전공하는)이라면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사회적 세계를 연구하는 데 인생을 바칠 기회를 얻은 사람은, 세계의 미래가 걸려 있는 투쟁 앞에서 무관심하거나 중립적으로 있을 수 없다.         

 


부정적 세계화가 돈이 되는 지역들을 전 지구적 시장으로 끌어들여 뼈속까지 빨아먹고 있는 지금/현재, 돈이 되는 것은 모두 다 전문화돼 일반인들은 접근할 수도 없고, 전 지구적 지배계급과 거대 자본 및 초국적기업에 봉사하는 지식에는 국경이 없어졌습니다. 세계화의 주역들을 위해 치외법권적 지위를 누리며 계급화된 엘리트로 자리매김한 현대의 지식인들은 부정적 세계화를 위해 시민을 소비자로 변질시키는 상징제작자와 상징조작자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부정적 세계화의 정도가 심화된 대한민국에서는 족벌신문과 정권의 나팔수를 자처하는 방송들을 맴돌며 정치권만 기웃거리는 사이비 지식인들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영혼도 철학도 없는 그들은 오로지 돈과 권력만 쫓아 불나방 같은 행태를 서슴지 않습니다. 지식인의 업무가 현실비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과 권력의 맛에 길들여진 이들은 사실과 진실은 물론 진리와 공리마저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 가치와 진실 여부는 전혀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이 지식의 이름으로 홍수처럼 밀려오는 디지털 세상에서 지식인이 할 일이란 자신의 사상이 경고하는 미래상이 틀리기를 바라면서 부정적 세계화의 현실과 사회비판에 물러섬이 없어야 합니다. 성장과 개발이 불러온 현실이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비대칭적 종말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망가져 버렸지만, 모름지기 철학과 사회학을 업으로 삼고 있는 지식인이라면 실낱 같은 희망을 잉여에서 쓰레기로 버려지는 시대의 난민에게 제공하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박근혜 정부가 무서울 정도로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지금, 지식인이라면 지그문트 바우만이 《유동하는 공포》의 마지막에 했던 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사회경제적 평등과 돈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진보좌파의 가치가 민주주의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확고하게 믿는 지식인이라면 더욱더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정보와 지식이 오픈된 디지털세상이라고 해도 지식인이 해야 할 역할이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신자유주의의 천국인 미국과 영국에서 샌더스와 코빈이 각광받고 있다는 것은 대중들 사이에서도 거대한 전환에 대한 열망과 욕구가 용암을 내뿜고 있다는 뜻이기에, 이 땅의 지식인들도 다음과 같은 진단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목숨으로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부산대 교수의 죽음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됩니다.  



다가오는 세기는 궁극적인 재앙의 시대가 될 것이다. 아니면 지식인과 민중 사이에 새로운 협약이 이루어지는 시대가 될 것이다. 희망을 갖자. 이 두 개의 미래에 대해, 아직도 우리에게 선택의 기회가 남아 있으리라고.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9.16 08:42 신고

    돈보다 사람이 먼저다 라는 말에 저도 공감합니디다
    이 정권은 반대이기 때문에 싫어할수밖에 없습니다

    고현철 교수의 고귀한뜻도 지켜내야할 가치입니다

    • 늙은도령 2015.09.16 15:44 신고

      네, 지식인들이 제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금은 제 한몸 지키기에 급급합니다.

  2. 백순주 2015.09.17 09:14 신고

    '해독 불가능한 나만의 독백'을 하고 있었습니다. 너그러운 듯 다시한번 설명해 주는 배려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 쯤 됐다 싶어 답을 다그쳤습니다.
    저만 모르고 있었습니다.남들은 관심조차 없었다는 것을요.

    관심은 희생에서 비롯된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 늙은도령 2015.09.17 15:14 신고

      누구를 설득하려고 하면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요.
      하지만 꾸준히 얘기하다 보면 듣는 사람도 비슷한 얘기를 접할 때 자신도 모르게 님의 얘기를 떠올리게 되고, 그런 과정을 몇 번이나 거쳐야 변하기 시작합니다.
      설득이나, 설명이나, 진실과 진리로 가는 길은 오랜 고통이 따르는 힘든 일입니다.
      말을 잘 이해하는 사람도 만날 때가 있고, 아닐 때도 있습니다.
      화학실험에서 똑같은 조건으로 했는데 결과가 다르게 나올 때처럼요.

      관심은 희생이기도 하지만 노력이고 사랑입니다.
      노하우가 쌓일 거에요.
      그러면 설득력이 높아지고, 진심이 전달될 것입니다.
      art of love처럼요.

    • 백순주 2015.09.18 08:01 신고

      관심어린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쓰다보니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네요.
      이 말 뜻이 진심어린 말이었군요. 호호.

    • 늙은도령 2015.09.18 10:44 신고

      허허.. 그러네요.
      만일 상업광고가 사라진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수천 배는 좋아질 것입니다.
      우주적 차원으로 소비하는 사회는 광고로 움직이니까요.

      남을 설득한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따기 입니다.
      인간은 뇌의 구축이 거의 끝나는 16세 전후가 되면 설득당하지 않는 경우가 99.99%입니다.
      수많은 노인들이 박정희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박정희와 인생을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가능하면 진실에 가까운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은 말해주는 사람의 몫이 아니기에.



기술이 인류의 삶과 문화에 미치는 영향은 수없이 많은 석학들이 다루었던 것이지만, 과학과 기술공학의 발전과 정보통신기술의 영향을 가장 잘 파악해낸 닐 포스트만의 《테크노폴리》와 니콜라스의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과 《유리감옥》, 바우만의 《액체근대》, 라이언의 《감시사회의 유혹》 등을 중심으로 다루어보는 것이 더욱 오늘날의 현실에 다가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광속으로 움직이는 ‘가벼운 경제’의 시대에서는 세상의 변화를 모두가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이르러서야 날아오른다’는 헤겔의 주장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문화에 대한 기술-경제적 발전의 영향력은 위대한 서사시인 호메로스가 《오디세이》에서 보여준 것처럼, 신화(지배권력의 정통성을 창출함과 동시에 피지배자에 대한 지배와 착취에 초월적 정당성으로 미화되기 일쑤다)와 계몽의 변증법(인류가 파멸에 이를 때까지 계속돼야 멈출 영원한 진보가 핵심이다)이 뒤엉켜 있는 고대의 신화적인 서사에서 그 전형을 찾을 수 있는데, 그런 서사의 끝에 이른 현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서사는 의미만 다룰 뿐, 그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문화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 완벽한 성찰을 보여준 미셀 푸코가 《감옥의 역사》에서 보여준 구조주의적 인식들을 차용해 벤야민의 역사인식 개념을 활용하려고 한다. 



비록 아도르노는 벤야민의 역사개념이 ‘비변증법적’이라고 비판했지만, 보편적 도구인 텔레비전과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일상화된 정보사회에서 《미디어의 이해》의 저자, 마셀 맥루한이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말한 것이 진리라면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적용한 방식이 현 시대를 이해하는 데는 보다 적절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바우만이 《액체근대》에서 진보의 모든 성과와 폐해들이 모두 녹아내려 높은 온도의 액체처럼 유동하는 상태가 현대성을 대표하는 상황에서는 ‘지금시간’에서 하나의 이미지를 끌어내 거기에 포함된 모든 내용(역사라는 시공간이 압축되어 있는 씨앗)을 다루어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면 속도가 공간을 극한까지 압축하면서 지배 권력의 원천이 유지되는 세상에서, 그 파시즘적 속도에 맞춰 시대 전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란 단 한 명도 없다.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무엇도 알지 못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마르크스가 말했던 뒤집힌 세상이 다시 한 번 뒤집히고 있으며, 그 다음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의 유동적인 상황에서 오직 비대칭적 종말만이 확실하게 예약되어 있을 뿐이다.



역사주의가 보편사에서 그 정점을 이루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유물론적 역사서술은 방법론적으로, 어떠한 다른 종류의 역사보다 바로 이러한 보편사와 비교해 보면 아마 가장 뚜렷이 구별될 것이다. 보편적 세계사는 아무런 이론적 장치도 갖고 있지 않다. 보편사의 방법론은 더해지는 방식이다. 그것은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 사실의 더미를 모으는 데 급급하다. 유물론적 역사서술은 이와는 반대로 하나의 구성의 원칙에 근거를 둔다. 사유에는 생각들의 흐름만이 아니라 생각들의 정지도 포함된다. 사유는, 그것이 긴장으로 가득 찬 상황 속에서 갑자기 정지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상황에 충격을 가하게 되고, 또 이를 통해 그 상황은 하나의 단자로 결정된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역사적 대상에 다가가되, 그가 그 대상을 단자로 맞닥뜨리는 곳에서만 다가간다. 이러한 단자의 구조 속에서 그는 사건의 메시아적 정지의 표시, 달리 말해 억압받은 과거를 위한 투쟁에서 나타나는 혁명의 기회의 신호를 인식한다. 그는 균질하고 공허한 역사의 진행 과정을 폭파하며 그로부터 하나의 특정한 시대를 끄집어내기 위해 그 기회를 포착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한 시대에서 한 특정한 삶을, 필생의 업적에서 한 특정한 작품을 캐낸다. 이러한 방법론에서 얻어지는 수확은, 한 작품 속에 필생의 업적이, 필생의 업적 속에 한 시대가, 그리고 한 시대 속에 전체 역사의 진행 과정이 보존되고 지양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파악된 것의 영양이 풍부한 열매는, 귀중하지만 맛이 없는 씨앗으로서의 시간을 그 내부에 간직하고 있다...메시아적 시간 모델로서 전 인류의 역사를 엄청난 축소판으로 요약하고 있는 지금시간은 우주 속에서 인류의 역사가 이루는 앞의 모습과 엄밀하게 일치한다.



별도의 글로 다루겠지만, 관료주의적 정신과 기술공학적 사고는 주어진 현실을 가장 효율적으로 개선하는 데만 목표가 있기 때문에 지금시간의 이미지에서 과거에서부터 이어져온 역사의 시간들을 하나씩 살펴봄으로써 현재를 이해하는 원천(그것은 미래의 결과로 나타나지만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 미래의 결과란 지금시간에서는 단순한 예측일 뿐이어서 미래의 영역에 남겨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언제나 미래의 풍요를 위해 지금시간으로서의 자신을 착취의 대상으로 인정하는 지배세력의 도구가 된다)으로 작용하는 벤야민의 접근방식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관료, 즉 공무원들과 기술공학적 사고에 익숙한 전문가는 오직 미래의 결과만 보고 현재를 파악한다. 그들은 오직 과거의 결과로서의 현재를 기반으로 해서 모든 사유를 출발시키기 때문에 사회적 가치판단을 하지 않으며, 따라서 계몽적 변증법이 명하는 데로 무한한 진보를 위해 현재의 문제를 푸는 데만 열중한다. 이런 가치중립적이고, 효율성과 경제적 편익만 따지는 사고방식은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인류를 예측불가능한 미래의 파국으로 내몰곤 한다(물론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극히 드물고 그것 역시 자본의 수중에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이들은 진보의 흐름이 영원하다고 보기 때문에 폭주하는 기차를 멈춰 세운 후에 무엇이 잘못됐는지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목적지로 가는 다음 역까지만 중요하고, 거기까지 가는데 필요한 비용-편익 분석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최대화하는 데만 집중한다. 계몽적 변증법이 고착화시킨 결과의 낙관론이 이들의 인식과 행태를 결정하며, 그 밖의 것들은 시대에 뒤진 것이라고 폄하한다. 달리 방법이 없지 않느냐는 이들이 내세우는 최후의 변명이자 전매특허이고, 따라서 기술공학적 처리과정에서 발생하는 치명적 부작용은 진보의 길에서 나오는 부수적 피해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런 기술공학적 사고가 지배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은 ‘탐욕의 삼위일체’가 손을 잡는 과정에서 교묘하게 이루어졌다. J. M. 케인즈가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에서 신자유주의의 선조들에 책임을 묻는 근거로 사용한 “사회가 부유하면 할수록 실제생산과 잠재생산과의 사이의 간격은 클 것”이며, “따라서 경제체계의 결점은 더욱 명백하고 또 포악한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는 기술-경제적 발전의 부작용을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또한 신자유주의의 대부 중 한 명으로 회자됐던 밀턴 프리드먼이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자유주의는 대내적으로 경제문제에서 국가의 역할을 줄이고 개인의 역할을 늘리기 위한 수단으로 자유방임을 지지했으며, 대외적으로는 세계 각국을 평화롭고 민주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유무역을 지지했다”며,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와 자유롭지 못한 정치제도의 조합도 분명 가능하다”고 말한 것에서 유추하는 것도 정치경제적 시각에 한정되기 때문에, 초위험사회가 도래한 현실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기술-경제적 발전을 국민국가와 자본과 함께 주도해 온 기술공학적 사고가 시장 만능의 산업사회의 지배적 사상으로 자리 잡게 된 결정적 순간은 칼 폴라니가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에서 가장 잘 포착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실제로 인간은 그러한 이론이 요구하는 만큼 이기적이지 않다. 시장의 원리가 인간이 물질적 재화에 의존하고 있음을 부각시키기는 했지만, 인간이 단지 ‘경제적’ 동기 때문에 노동하는 것은 아니다...인간은 여전히 놀랄 만큼 ‘복합적인’ 동기들에 근거해 행동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복합적인’ 동기는 자신과 타인들에 대한 의무를 포함할 수 있고 또 노동 자체를 은근히 즐기는 것도 포함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것은 현실에서 작동하는 동기들이 아니라 현실에서 작동하는 것이라고 가정된 동기들이며, 심리학이 아니라 영업적 사회의 이데올로기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여러 관점들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에 기초하고 있다. 일단 사회가 그 성원들의 일정한 행동 양식을 예측하게 되고 지배적인 사회 제도들을 통해 그 행동 양식을 대충 강제해내기에 이르면, 인간 본성에 대한 견해들은 그 행동 양식의 이념형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명예와 자부심, 공민으로서의 책무와 윤리적 의무, 심지어 자기 존중과 도덕마저도 생산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졌고, 의미심장하게도 ‘이상적’이라는 함축적인 단어로 요약되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어지게 되었으니, 하나는 굶주림과 이익에 가까운 것이며 다른 하나는 명예와 권력에 가까운 것이다. 전자는 ‘물질적’인 것이며 후자는 ‘이상적’인 것이다. 전자는 ‘경제적’인 것이며 후자는 ‘이상적’인 것이다. 전자는 ‘합리적’인 것이며 후자는 ‘비합리적’인 것이다. 공리주의자들은 이 두 쌍의 말 묶음을 확실히 정리했으며, 인간 성격의 경제적 측면에 합리성이라는 신비로운 후광을 씌우기에 이르렀다. 모두 오로지 이익만을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하도록 되었고, 혹시 누군가가 자신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기를 거부한다면 반사회적일 뿐만 아니라 미친 사람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불루이글 2015.07.21 09:05 신고

    오!
    정말 도령님의 지식의 부요함에 감탄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런데 솔찍히 말씀 드리자면 부끄럽게도 저는 너무 심오해서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도령님이 쓰신 글이니 좋은 글이 틀림이 없다고 확신 합니다.

    저는 같이 공감 할 자질이 없지만 이해하고 공감하는 분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줄로 믿으며 대신 공감 버튼 눌러 드립니다.

    감사 합니다.

    • 늙은도령 2015.07.21 15:51 신고

      이 글은 출판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인데 퇴고를 못했습니다.
      최근에 읽은 것들 때문에 상당 부분 수정해야 합니다.
      써 놓은 양이 너무 방대해 고민입니다.

  2. 백순주 2015.09.04 10:17 신고

    공감을 눌러 드릴 수가 없습니다. 열어보고 한 줄 읽고는 후회했습니다.
    대학 1학년 전공수업시간이 떠오릅니다. 적성도 관심도 없는 커트라인에 맞춰 지원한 대학수업이란 게 온통 외계어 뿐이었으니까요. 교수님은 알고 수업을 하고 계신지 의심까지 들었습니다.
    위편삼절이라고 했던가요? 100번 읽으면 뜻이 저절로 통한다고 했나요?

    죄송합니다. 말이 많네요.

  3. 아오타케 2016.05.17 23:12

    외국인 학자 이름 나열이 뭐가 그리 중요하며, 그들의 학설이 세상을 대표합니까?
    식당 건물이 멋있고, 인테리어가 멋있다고 음식맛이 좋습니까?
    물 엎질렀다고 탓하지만 말고, 물이 엎질러지지 않게 하려면 어쩌면 좋은지 그 방법을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알려 줍시다.
    그것이 현대 지식인들의 지향점이어야 하는데, 엎질렀다고 주먹질만 해대고 있으니...
    어느 보약이든... 부작용은 있는 법입니다. 당신이 서 있으면 발밑에 밟힌 초목 벌레가 있을 테고, 서 있는 그늘밑에는
    활동 중지된 미생물이 주먹질 하고 있을 겁니다.
    사람 사는 것 쉽습니다. 어린아이들 같이 천진난만.. 어린아이들 같이 상식대로만 살면 되는 겁니다.

  4. 시골잔차 2016.07.11 20:34

    저의 무식함이 처절히 탄로 났습니다.

    무슨 말인지 넘 어렵네요 ㅎㅎ

    담에 또 정독해야겠습니다.

    딱딱한 음식이 이에 이롭듯이 , 어려운 글이 뇌를 단련하지 않겠습니다.

    저의 뇌를 각성시켜주셔서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ㅎㅎ

    • 늙은도령 2016.07.11 23:13 신고

      이 글은 지식인을 자처하는 자들에게 한방 먹이려고 쓴 연재글입니다.
      원래는 출판을 목표로 했던 것이고, 퇴고를 거치지 않은 압축본입니다.
      지식인들의 지적사기를 고발하고자 하는 목적이라 어렵게 썼지만, 인공지능을 공부한 뒤 이 작업이 별로 유용하지 못함을 알게 됐습니다.
      시간이 되면 쉽게 풀어낼 생각입니다.
      본격적으로 쓸 때를 대비해 굵지한 것만 다루었기 때문에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시간이 주어질지 걱정이지만.....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비상사태’가 상례임을 가르쳐준다.


                                                                ㅡ 발터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인용




박근혜 대통령의 작심발언이 있고 난 뒤에 유신시대를 방불케 하는 일들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무려 40년 만에 대통령 모독죄가 부활하질 않나, 검찰은 빅 브라더를 자처해 공개된 장소라면 상시 감시를 하겠다고 하질 않나, 캐나다 교민의 시위를 거대한 차량으로 가로막지 않나, 민주주의를 뿌리 채 부정하는 일들이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벌어지고 있습니다.





'독재란 국법이 정지된 곳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나치의 공법학자로 악명 높은 칼 슈미트가 《정치신학》이나 《독재론》 등을 통해 정립했고, 한국에서는 박정희의 유신헌법을 통해 구현됐습니다. 대통령에 대한 모독이 도를 넘었다는 발언이 나오자마자, 검찰이 놀라운 민첩성으로 인터넷 명예훼손 전담팀을 구성해 상시적 감시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헌데 검찰은 대통령에 대한 모독이 도를 넘는 기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치의 파시즘과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연구를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합법과 불법의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독재는 압도적인 권위(공권력)에 의해 정치적 정당성을 얻기 때문에,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결정하는 기준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객관적이고 명분화된 기준이 없으면, 통치자의 기분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될 수 있습니다. 통치자가 그건 코걸이야 하면 귀걸이도 코걸이가 됩니다. 통치자가 얼굴을 찡그리면 범죄가 되고, 얼굴을 붉힐 정도면 중죄가 됩니다. 박정희의 유신시절에 쏟아져 나온 긴급조치 1~9호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때는 시민이 세 명만 모여도 집시법 위반으로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



박근혜가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로 확정됐을 때, 필자가 걱정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제가 박근혜 대 문재인의 대결이 박정희 대 노무현의 대결이라는 글을 썼을 때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았지만, 사람은 아이로 태어나서 환경에 의해 길러진다는 것이 결코 헛된 말이 아님은 너무나 많은 사례들로 새삼스럽게 언급한다는 것이 창피할 정도입니다.





헌데 20세기도 아닌 21세기가 14년이나 흐른 지금에서 창피를 무릅써야 할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UN에서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한 날, 국내에서는 인권의 핵심 가치인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 국가공권력에 의해 자행되고 있습니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나오는 빅 브라더가 따로 없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김기춘 비서실장에서 황교안 법무부장관을 거쳐 김진태 검찰총장으로 이어지는 사정라인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나치의 살해위협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탄식이 생각납니다. 두 사람이 《계몽의 변증법》을 쓴 것도 그 탄식에서 비롯됐기 때문입니다.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예로부터 금지가 오히려 마약 같은 독극물로의 접근을 부추겼듯이 이론적 상상력의 차단은 정치적 광기에 길을 활짝 열어준다.



“마음에 드는 것은 허용된다”라는 말이 진리라면, 그 반대인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도 진리입니다. 근대의 민주주의가 탄생하던 순간부터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면 민주주의는 독재나 전체주의로 넘어간다고 했습니다. 어떠한 기준도 제시하지 않은 대통령의 발언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독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검찰은 ‘문제가 될 수 있는 글은 쓰지 않으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는 검찰의 이런 발언은 독재국가에서나 나올 법한 것입니다. 검찰의 발언대로 ‘문제가 될 수 있는 글’이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된다면, 법치주의의 원리에 따라 검찰은 ‘문제가 될 수 있는 글’의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해야 합니다.





만일 검찰이 기준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검찰의 발언이 문제가 되는 것’이어서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할 대상은 문제의 발언을 한 검찰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상위법인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주권재민과 제21조, 표현의 자유에 따라 검찰에게 요구합니다. 민주주의의 근간이자 헌법에 나와 있는 기본권을 제한하려면, 그 기준부터 제시해야 합니다.



검찰이 제시하는 기준이 민주주의와 헌법에 합당하면 그에 따라 글을 쓰면 되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으면 법적 처벌을 받으면 됩니다. 또한 검찰이 기준이 헌법에 위배되면 헌재에 위헌여부를 묻는 소송을 제기하면 됩니다. 국민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를 처벌하려면, 피의자의 방어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문제가 있는 글의 기준’을 제시해야 합니다.



쓴다는 것, 쓸 것이 생겨 쓴다는 것이 내 모든 것이기에 아고라에 올리는 글을 쓰며 자체 검열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에도 반하고 제 양심에도 반합니다. 따라서 검찰에게 다시 한 번 요구합니다. ‘문제가 되는 글의 기준’을 제시하고, 최소한 민주적이고 헌법정신에 어긋나지 않은 선에서 기준의 실효성을 따질 수 있도록 법적용의 구체적 예들을 제시해주십시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중용투자자 2014.09.26 21:17

    허참. 7시간 어디갔냐고 물어봤더니 모욕발언이라고 사이버 검열을 강화한다니 어처구니가 없네요. 소송비용 없는 사람은 소신것 글도 못쓰겠네요. 대한민국만 시계가 거꾸로 가는 듯합니다.

    • 늙은도령 2014.09.26 21:49 신고

      대통령이 국민을 설득해야지 찍어누르려 하면 답이 없습니다.
      유엔 기조연설에서 인권을 그렇게 강조하면서 국내에선 기본권과 인권을 억압하는 일이 벌어지는 이런 모순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2. 숲속의친구 2014.09.26 21:58 신고

    저와 같은 소시민들은 잘은 모르지만,
    무언가 잘못되면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런 요즘입니다.

    • 늙은도령 2014.09.26 23:30 신고

      제가 답답한 것은 통치자와 정치인들이 기득권이 아닌 절대다수의 서민들을 위해 일하게 만들어야 함에도 선입관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통계가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그래서 경제규모가 커질수록 불평등이 늘어났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통치자와 정치인들이 소수의 기득권에게 유리하게 정치했기 때문입니다.
      부와 기회의 불평등이 갈수록 늘어나는데, 왜 이것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지, 어떤 정권이 들어서건 절대다수의 서민들을 위해 정치하라고 요구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민주주의는 사회경제적 평등이 일정 수준까지 이르러야 가능합니다.
      그런 수준이 돼야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습니다.
      헌데 자본주의(신자유주의)는 극소수에게 부를 몰아줍니다.
      낙수효과가 이루어진 것이 없다는 것은 진보와 보수 경제학자 모두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불평등의 수준이 극도로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부정하는 경제학자는 없습니다.
      결국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위해 부의 재분배에 적극적인 정부가 들어서야 우리 모두의 행복이 증진된다는 뜻입니다.
      최소한 자신의 이익부터 챙기고 나서 이념을 얘기하고 정당을 얘기해도 되는데 그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학에 가까운 멍청하기 그지없는 짓입니다.
      지금까지 민주정부가 10년이었고, 나머지 60년은 보수정부였습니다.
      그 결과가 부와 기회의 불평등이라면 어느 쪽에 책임이 많겠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이익과 행복, 삶의 질을 포기한 채 정신적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답이 나옵니다.
      결과는 거짓말을 못합니다.
      세월호 참사도 대한민국의 경제에 어울리지 않는 폐선을 수입해서 서민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한 후진국형 사고입니다.
      세월호 운행되는 동안 누가 돈을 벌었는지 확인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할 수 있습니다.
      청진해운과 유병언 일가가 돈을 모은 과정이 그 답이고, 관료들이 챙긴 돈이 그 답입니다.
      중하위층의 지갑을 털어 상위층들이 나눠가진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와 싸워야 합니까?
      자신이 어떤 계층에 속하고 있는지 그것만 확인하면 답이 나옵니다.
      민주주의란 내 권리를 국가로부터 보장받는 대신 권력을 소수의 정치인에게 위임한 제도입니다.
      내 권리가 우선이고, 그래서 내가 자유롭게 말하고 살 수 있는 것을 지향하는 체제가 민주주의입니다.
      정말 답답합니다.
      몇 시간만 시간을 내서 인터넷 검색만 해도 답이 나옵니다.
      불평등에 관해 검색만 몇 번하면 답이 나옵니다.
      대통령이 뭐 중요합니까?
      내가 힘들면 다 필요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이기주의나 개인주의라는 게 이런 것입니다.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일수록 이것을 추구해야 하는데 정반대의 행동을 합니다.
      보수란 개인의 소유권이 시민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을 만큼 국가에 보장하라고 요구하고, 내 자유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헌데 우리나라 보수라고 하는 사람들은 정반대로 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바로 그런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줄어드는 나라가,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해지는 나라가 북한이 아닙니까?

      님처럼 고마운 분들 때문에 더 힘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자유에는 선천적으로 주어지는(그래서 불평등하기 일쑤입니다) 자연법적인 자유가 있는데 이를 사적 자유라 합니다.
      반대로 제도에 의해 불평등을 줄이는 과정에서 나오는 자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입니다.
      첫 번째 자유는 보수의 가치입니다.
      기득권들이 보수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두 번째 자유는 진보의 가치입니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진보적이었던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헌데 권력과 자본과 손 잡은 언론과 지식인들이 이를 왜곡했습니다.
      1% 대 99%의 사회는 이렇게 해서 출현하게 됐습니다.
      인류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수없이 많은 자원을 사용한 대가로 지금에 이르렀지만, 그 혜택의 대부분이 1%에 집중됐습니다.
      이렇게 되면 99%는 혁명을 제외하면 삶의 노예가 됩니다.
      생존의 본능보다 강한 것이 없어서 단 몇 푼의 돈이라도 벌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기득권의 요구대로 움직이는 노예가 됩니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도 이런 현실을 부정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권력자와 자신을 동일시해서 자신과 가족의 삶이 좋아진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많이 나올 수 있었다면 1 대 99라는 것은 나올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힘을 내서 글을 써야 하는 이유이고, 저를 후원해주는 분들에 대한 보답입니다.
      정의로운 세상을 향한 몸부림이고요.

  3. 노자경 2014.09.26 22:27

    짝짝짝 !!!! 속 시원한 글 감사합니다
    울화가 치미는 이 시절에 도령님의 글로 위안받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늙은도령 2014.09.26 23:22 신고

      수없이 많은 정치학과 경제학, 사회학, 철학, 심지어는 과학에서도 박 대통령과 검찰이 하는 일이 민주주의에 반한다는 것은 명백히 나옵니다.
      보수와 진보를 가릴 것이 없습니다.
      특히 보수일수록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보수의 가치에 합당합니다.
      진보는 약간의 자유를 희생하더라도 사회경제적 평등을 일정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헌데 자신이 보수 성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지하는 행태란 전체주의나 권위주의 독재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런 나라들의 특징이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철저하게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박 대통령과 검찰의 행태는 독재와 전체주의 사이에서나 성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건 민주주의와 헌법을 유린하는 행위입니다.

  4. 파시즘미워염 2014.09.27 06:35

    정부는 국민의 기본권인 의사표현의 기준을 제시하여 헌법에 명시된 자유로운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라!

    • 늙은도령 2014.09.27 16:25 신고

      박근혜가 최악의 수를 뒀습니다.
      그녀는 이것으로 급격히 레임덕에 빠져들 것입니다.

  5. 공수래공수거 2014.09.27 09:02 신고

    비판적인 글을 쓰시는 분들에 대한 도전이고 협박입니다

    종편들 참...어떻게 안 되나요.보다 보다 욕 나옵니다

    • 늙은도령 2014.09.27 16:26 신고

      박근혜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권을 탈환해야 함이 분명해졌습니다.
      물러날 수 없지요.

  6. 내조국 2014.09.27 10:45

    늙으도령인지 미친놈인지 모르지만 글이 많이 잘못 치우쳐 있네. 친일파 .

    • 늙은도령 2014.09.27 16:27 신고

      대한민국 현대사라는 연재를 보십시오.
      친일파라고요?
      내가 하는 일이 친일부역자를 우리나라에서 걸러내는 것인데...



제가 연재하고 있는 ‘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는 16~17세기 사이에 발아해서 19세기에 최고조에 이른 근대이성이 인류 문명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다루는 문명 비판서입니다. 우리가 현대성이라 하는 것도 근대이성이 배출한 산물이기 때문에 근대이성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입니다.



헌데 인류에게 미래의 희망을 얘기했던 근대이성이 내놓은 결과란 인류 문명의 퇴행이었고, 현대성으로 넘어간 뒤에는 총체적 종말을 향한 최악의 결과ㅡ비인간적인 문명ㅡ만 양산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세상을 얘기한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지옥도를 그리는 것 같아 글을 쓰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을 정도입니다.



많은 분들이 연재하고 있는 내용을 읽는 것 같지 않지만, 소수의 독자라도 제 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틈나는 대로 근대이성과 현대성의 철학적 이해를 제공해야 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상당히 어려운 내용이라 쉽게 풀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근대이성의 탄생부터 시작해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철학과 사회학, 과학적 개념들을 설명할까 합니다.



이 부분은 제가 연작으로 기획했던 책 중에서 5번째에 해당하는 것이었는데, 정기후원을 받기로 마음을 정한 이상 이곳에 먼저 글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리 쉽게 풀어내도 상당히 어려울 수 있으니 근현대의 철학에 관심 있는 분들만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근현대 철학을 다루는 가운데 고대 그리스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학파의 철학도 일부분 다루게 될 것입니다. 너무 어렸을 때 읽어서 확실하지 않지만,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동양의 철학들(6권의 목표입니다)도 일부 다루게 될 것입니다. 아직도 몇 백 권의 책을 더 읽어야 하지만, 근대이성에서 현대성으로 넘어가는 부분은 필요한 책을 거의 다 섭렵했기 때문에 글을 쓰는 데는 문제가 없을 듯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근대이성의 철학적이고 사회학적 산물인 계몽에 대해서 다룰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불고 있는 인문학 열풍은 계몽적인 기획이 너무 강해 그 의도가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기 때문에 제일 먼저 계몽의 철학부터 다루어 보겠습니다. 위험을 등에 지고 살 만큼 불확실성이 커진 세상에서 계몽만큼 기득권에게 유리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근대이성의 산물인 계몽의 철학을 이해하려면 베이컨과 데카르트, 파스칼, 칸트, 니체, 라이프니치, 헤겔, 스피노자, 쇼펜하우어 등을 다루어야 하는데, 이 중에서도 칸트는 제일 먼저, 제일 많이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이 어디까지 갈 수 있으며,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 그 한계를 정한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근대까지의 서양철학이 일체의 변화ㅡ기독교 유일신의 선험적 모델인 이데아의 세계에서 멀어지는 것ㅡ를 타락으로 본 플라톤의 철학과 사상에 대한 각주였다면, 칸트는 변화의 끝을 정함으로써 그것을 끝내버린 철학자입니다. 칸트에게서 이상적인 삶을 구축하는 계몽철학이 나온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인식(認識) 및 실천(實踐)의 객관적 기준을 선험적(先驗的) 형식에서 찾고, 사유(思惟)가 존재(存在)를, 방법(方法)이 대상(對象)을 규정한다고 하였다. 도덕의 근거를 인과율이 지배하지 않는 선험적 자유의 영역에서 찾고, 완전히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도덕적 인격의 자기 입법을 도덕률로 삼았다.



위의 인용문은 위키피디아에 나온 칸트에 대한 설명의 일부인데, 이는 너무나 도식적이고 형이상학적이어서 계몽을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합니다. 그래서 아래의 인용문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 나오는 내용으로, 필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칸트를 다루고 있어 우리의 출발점으로는 제일 적합할 것 같습니다.



계몽의 철학을 변증법적으로 다룬 이 책은 ‘계몽’을 다룬 (제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이 책을 중심으로 칸트가 정립한 계몽철학을 다루되, 푸코와 아렌트의 도움을 더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해 최대한 쉽게 풀어보도록 하겠지만, 그 출발은 조금 어렸습니다.



게다가 이번 글을 아래의 인용문을 올리는 것에서 그칠까 합니다. 제가 인용문을 쉽게 풀기 전에 한 번 읽어 보시고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제가 다음 글에서 이 인용문을 설명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계몽철학이 쉽게 다가올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제 설명에 반박도 할 수 있을 터이고요.



계몽은 칸트에 따르면 “스스로에 기인한 미성숙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인데, 미성숙이란 다른 사람의 인도 없이는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수 없는 무능력이다.” “다른 사람의 인도가 없는 오성”이란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오성이다. 이 말은 즉 자신의 독자적인 일관성을 근거로 인식을 체계화한다는 것이다. "이성의 대상은 오직 오성과 이의 합목적적 사용이다." 이성은 “오성 행위의 목표로서 어떤 집합적 통일체”를 설정하는데 이것이 “체계”다. 체계는 개념의 위계질서를 수립할 것을 요구한다.


라이프니츠나 데카르트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칸트에게서도 ‘합리성’이란 “좀더 높은 유와 좀더 낮은 종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체계적 상관관계를 완수하는” 데 있다. 인식의 “체계화란 하나의 원리에 입각한 수미일관성이다.” 계몽이란 의미에서 ‘사유’란 통일적인 학문적 질서를 만들어내고 원리들ㅡ이것이 자의적으로 설정된 공리이건, 내재적인 이념이건, 최상의 추상화이건 관계없이ㅡ로부터 사실 인식을 도출해내는 것이다. 


“논리의 법칙”들은 질서의 내부에 가장 보편적인 관계들을 만들어내며 이 관계들을 정의한다. 통일성이란 하나의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데 있는 것이다. 모순율은 체계의 핵심이다. ‘인식’이란, 원리들 밑에 다른 일체를 포섭함으로써 성립한다. 인식이란 체계 속에 분류해 넣는 판단과 동일한 것이다. 체계적이지 못한 사유는 종잡을 수 없는 것이거나 권위적인 사유다. 


이성은 오직 체계적 통일성이라는 이념, 즉 개념적으로 고정된 상관관계에 기여할 뿐이다. 사람들이 붙잡고 싶어 하는 모든 ‘내용적 목표’란, 그것이 이성의 통찰일지라도 계몽의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광기나 거짓, 합리화에 불과하다. 철학자들이 이런 결론을 희석시키기 위해 인간적이고 우호적인 감정을 내보이면서 갖은 애를 쓴다고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성이란 “보편자로부터 특수자를 이끌어내는 능력”이다. 보편자와 특수자가 같은 성질이라는 것은 칸트에 의하면 “순수 오성의 틀”에 의해 보증된다. 이 말은 즉 지각 작용을 이미 오성에 일치하게 구조화하는 지적 메커니즘의 무의식적 작용을 일컫는 것이다. 주관적 판단이 행하는 사물의 이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물이 자아 속으로 들어오기 전에 사물에는 객관적 질로서 오성이 이미 새겨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틀이 없다면, 즉 간단히 말해 지각 작용에 지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어떤 인상도 개념으로 나아갈 수 없고, 어떤 범주도 실례와 어울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체계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수렴하는 사유의 통일성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학문이 의식하고 있는 과제는 이러한 ‘사유의 통일성’을 생산하는 것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중용투자자 2014.09.04 10:16

    '서양철학자들은 역사를 고대-중세-근대로 나누어진 마르크스 사관으로 보는데 이는 우월감에서 오는 것이다' 는 도올 선생의 말이 생각나네요 ^^

    • 늙은도령 2014.09.11 20:53 신고

      마르크스가 아니라 많은 철학자나 사회학자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죠.
      유럽 중심주의적 표현인 것은 확실합니다.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출발은 둘 다 비슷합니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자본주의적 해석이 들어가면서 많이 달라졌기도 했지만, 그 근본에는 경제규모의 확장을 불러온 근대이성이 있습니다.

      사실 자본주의라 함은 마르크스가 말한 것이 가장 정확하지도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유대인의 신용창출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만나 이루어진 것입니다.



제2장. 폭주하는 기차를 멈춰라




통합 자체가 결국에는, 서로를 근절시키려 드는 권력 집단들로 분화되기 위한 이데올로기임이 입증된다. 거기에 밀려드는 사람은 자신을 잃어버린다...그들은, 모두는 ‘전체’를 위한 미래의 희생자라는 것을 스스로 만들어내고는 그 전체를 자신으로부터 떼어내어 그와 비슷하지만 저 바깥에 있는 것에 전가시킴으로써만 참아낸다.


                                                                                             ㅡ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인용



격렬한 정당 경쟁 자체가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증거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가지지 못한 자들’의 정당이 승리할 때 이들이 혜택을 본다는 증거는 상당히 많이 발견되었다.


                                                                                                  ㅡ 래리 M. 바텔스의 《불평등 민주주의》에서 인용





MIT공대나 캘리포니아 공대 출신의 수학자와 NASA에서 일했던 최고의 프로그래머들이 금융업계로 이직해 만들어낸 금융공학이 2008년 금융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이 금융공학을 통해 만든 파생상품(서브프라임 모기지증권이 대표적)이 수천 수만 번의 다단계 판매를 통해 부풀려지면서 미증유의 거품이 형성됐고, 이것이 터지며 최소 수십 조 달러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돈이 허공 속으로 살아진 것이 2008년 월가 발 금융붕괴의 전말이다. 



미국의 월가와 영국의 금융단지에서 발행된 파생된 상품이 지구를 몇 바퀴나 돌며, 무한대의 가지치기를 거듭했으니 첫 출발 때는 몇 억 달러 정도에 불과하던 것이 수십 조 달러에 이를 만큼의 뻥튀기가 이루어진 것이다. 경제전문가들이 불완전한 자료를 가지고 추산한 것이 수십 조 달러였으니, 거품이 폭발했을 당시의 금액이 수백 조 달러에 이른다고 주장해도 이것에 대한 반박할 수 있는 금융업체나 정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만큼 첨단의 공법들을 들고나온 자들이 일처리가 엉망진창이었다는 뜻이다. 탐욕은 수학적 계산마저 혼돈 속으로 빠뜨린다.    



유대인 고림대금업자들이 수천 년 전부터 사용했던 신용 창출의 방식이 금융공학이라 미명 하에 현대화됐을 뿐, 근본적으로 2008년의 금융붕괴는 신용의 대붕괴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에서 세계 금융계를 지배하는 가문으로 성장한 로스차일드가의 자본 축적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적은 돈이라도 수없이 회전시키면 큰 돈으로 만들 수 있는ㅡ하버드 비즈니스스쿨(MBA)의 첫 번째 수업이 이것이다ㅡ신용 창출이란 본질적으로 악마성을 내포하고 있다. 



채권자에게 이자라는 불로소득을 만들어주는 신용 창출은 원금(대출, 채권, 증권, 주식, 펀드 등)의 회전수에 따라 이익의 크기가 결정되기 때문에, 최대한 회전수를 늘려 거품을 키우는 악마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리먼 브라더스에서 시작된 거품의 폭발이 다차원적인 메트릭스처럼 퍼져가며 수십 조 달러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돈ㅡ이런 표현이 너무나 빈약하다ㅡ을 증발시키는 미증유의 금융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헌데 이들의 악마성에 철퇴를 내리쳐야 할 오바마 정부는 처벌은 고사하고 최악의 범죄 집단인 금융업체와 거대 투자은행들을 살리기 위해 수백 조에 이르는 공적자금을 쏟아부었다. 대한민국 1년 예산의 두 배에 이르는 공적자금을 투입하고도 무너진 경제가 살아나지 않자, 오마바 정부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무제한적인 양적완화에 들어갔다. 이들은 기축통화국의 지위를 이용해 천문학적인 유동성을 풀고ㅡ중국과 일본, 한국과 아랍의 국부펀드 등이 미 재무부가 발행한 부실채권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유동성을 마련한다ㅡ사실상의 제로금리를 통해 주가를 올리는 데는 성공했다. 



대신 부실채권을 매입한 국가들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금융위기가 전파됐고, 1929년에 발생한 대공황보다 더욱 치명적인 경제대침제가 도미노 현상처럼 발생했다. 최근에는 유럽을 거쳐 남미와 중국으로까지 경제위기가 전염된 상태며, 아시아의 신흥개발국가들에서도 경제위기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증상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미 월가를 지배하고 있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의 악마적 탐욕에 전 세계가 끝을 모르는 총체적 난국에 처한 것이 2008년의 신용 대붕괴다. 



이처럼 전 세계에 치명타를 입힌 신용 대붕괴의 주범들은 그때보다 더욱 부자가 될 수 있었지만, 그 피해는 미국 이외의 국가들ㅡ정확히는 각국의 국민들ㅡ이 뒤집어썼다. 이것이 신용 대붕괴의 결과이자, 월가가 이끄는 미국의 본 모습이며, 제국 특유의 악마성이며, 상대가 없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타국의 돈을 해적질을 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특히 미국의 쥐꼬리만한 원조를 받은 대가로 미국의 정치경제적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과 한국, 대만과 필리핀의 피해가 가장 크다.  



미국은 이것으로도 부족해서 년간 수천 억에 이르는 덤핑관세ㅡ세부적인 내용에 들어가면 100% 해적질임을 알 수 있는데, 일본은 알아서 기고 유럽은 맞대응을 하기 때문에 중국과 한국, 대만의 수출기업들이 주요 타겟이다ㅡ를 부과하고, 미국의 국내법에 불과한 슈퍼 301조를 발동해 공공연히 무역보복을 자행하고, 최근에는 초국적기업들을 동원해 특허소송을 남발하고 있다.       



전 세계를 장기적인 경제위기에 빠뜨린 신용(금융) 대붕괴는 레이건 정부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적 정책들(대규모의 지속적인 감세와 복지 관련 재정의 대규모 축소 및 연방정부의 업무를 민영화하는 것이 핵심이다)과, 아버지에서 아들로 격세집권한 부시 정부의 친기업적ㅡ특히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인 2개의 전쟁을 통해 대박을 터뜨린 군산복합체와 초국적 석유기업ㅡ이고, 월가와 백인 상류층을 위한 친금융적인 정책 때문에 발생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달리 말하면, 자유주의와 자유시장과 자본주의로 구성된 ‘탐욕의 삼위일체’의 실질적 지배자들이 유일 제국 미국의 연방정부(특히 재무부와 국방부, 연방준비제도와 각종 정보기관)를 장악하면서 만들어낸, 자본주의 역사상 최악이자 최대 규모의 폰지사기(일종의 다단계 사기로 각국의 실물경제를 담보로 자행됐다.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의 정치자금에 휘둘리는 미국 정계의 악마성은 그 끝을 알 수 없다)라 할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전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신용 거품을 만들고도, 그것이 터지기 직전까지 쓰레기보다 못한 파생금융상품을 팔아먹었으니, 2008년의 신용 대붕괴는 인류 역사상 최악이자 최대 규모의 금융사기였다. 유일 제국 미국의 연방정부와 월가가 일으킨 신용(금융) 대붕괴는 1, 2차세계대전에서 발생한 것보다 더한 피해를 인류에게 남겼다는 것이 경제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블랙홀의 권위자인 마틴 리스는 《인간 생존확률 50:50》에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그에 따른 영향으로 1억 8,700만 명이 전쟁과 학살, 박해, 기아로 죽었다”고 했으니, 2008년의 신용 대붕괴가 인류에게 얼마나 큰 범죄였는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문제는 전 지구적 차원의 난개발(거의 대부분의 빚으로 진행됐다) 때문에 이것만으로 인류가 치러야 할 피해를 특정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양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세계경제의 성장동력이 충분했기 때문에 그 피해를 단시일 내에 만회할 수 있었지만, 2008년의 신용(금융) 대붕괴는 인류의 성장동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장기간에 걸친 전 지구적 피해를 예측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이에 대한 통계수치들은 여전히 진행 중인 경제대침체가 끝나야 나오겠지만, 그 시기가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수도 있어, 전설 속에서나 계량화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20세기가 19세기부터 시작된 유럽의 제국주의와 좌우의 전체주의 정권 및 냉전시대로 이어진 전쟁범죄와 대량학살로 얼룩진 폭력의 세기였다면, 최소한 21세기의 전반부는 사적독점을 이룬 거대 금융·투기자본의 무차별적인 고리대금업과, 부정적 세계화를 주도한 초국적기업들이 일으킨 정치경제적 폭력으로 얼룩진 세기로 기록될 것이다. 21세기는 이제 14년이 흘렀을 뿐인데도 20세기에 발생한 피해의 총량과 맞먹는 피해들을 양산하고 있다. 



특히 전 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된 '개발과 성장의 역설'이 초래한 지구온난화와 수질 오몀 및 대지의 사막화는 지구에 생명체가 서식하기 시작한 이래 5번째의 종말을 걱정할 만큼 심각한 상황이다. 이런 돌이킬 수 없는 지구물리학적 피해는 핵발전의 위험과 폭력시장의 확대까지 초래해 수억에서 수십억 명에 이르는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빈국일수록, 사회경제적 약자일수록 그 피해가 치명적일 지구물리학적 피해는 거의 대부분 상위 5%에 속하는 부국과 부자들이 일으킨 것이어서, 지구적 차원의 정의는 영원히 실현불가능한 것으로 굳어졌다.      



                                                



월가와 초국적기업들로부터 정치자금을 후원받아 미국의 대통령에 오른 오바마가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을 쏟아 부은 덕분에 폭락했던 주가가 회복되고, 슈퍼리치들의 금고는 다시 채워졌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중하위층으로 흘러들어가야 할 낙수효과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결과 미국의 부와 기회의 불평등은 OECD 가입국 중 한국과 함께 최상위를 차지하고, 내부적으로는 역사상 최고의 불평등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  



IMF 부총재였고,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경제학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스티글리츠 보고서》와 IMF 수석연구원이자 현 인도은행 총재인 라구람 라잔의 《폴트라인》, 찰스 모리스의 《미국은 왜 신용불량국가가 됐을까》처럼 신용 대붕괴를 다룬 수많은 책과 연구에 잘 나와 있듯이, 신용 대붕괴에 의해 재산의 대부분을 날려버린 것도 모자라 죽을 때까지 갚기도 힘든 빚더미의 수렁에 빠진 미국의 중하위층과 여타 국가의 중하위층의 삶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빈곤층으로 떨어진 하층민의 수는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신용 대붕괴가 일어났었다는 사실조차 모두 잊어버린 상황에서.




  1. 태봉 2014.08.24 19:26

    폭주하는 기차의 끝은 어떤 모양일까요? 과연 그 해결책은 무엇이고 실현가능할까요?

    • 늙은도령 2014.08.24 20:35 신고

      조세제도를 바꾸고 공정거래가 가능하게 만들면 지금보다 몇십 배는 좋아집니다.
      우리는 당장이라도 좋아질 수 있습니다.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으면 됩니다.
      조중동과 방송이 문제입니다.

  2. 동의합니다 2014.12.12 01:47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탐욕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경제적 불평등은 결코 해소되지 않을 것입니다.

    건강한 정신이 건강한 육체를 만들 듯
    올바른 가지관을 가지지 않는 한
    더불어 함께 잘 살자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이며
    부의 불평등은 영원히 대물림이 될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기성세대는 그나마 어떻게든 넘겨 왔지만
    앞으로 이 나라를 짊어 질 젊은 세대들은
    얼마나 힘든 세상을 살까 하는 생각에
    참으로 마음이 무거운 요즘입니다.

    모두가 조금이라도 남을 돌아 볼 줄 아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좋은 제안이 담긴 유익한 칼럼 계속 부탁합니다.

    • 늙은도령 2014.12.12 03:22 신고

      네, 조금만 덜 갖고 나누면 됩니다.
      성장의 결과가 미래세대에게 어려움을 넘겨주는 것이라면 당장이라도 성장을 멈춰야 합니다.
      좀 느리고 불편하더라도 천천히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고, 공존과 공생의 묘를 찾아내지 않으면 인류는 종말을 피할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위기는 인간이 만든 것이니, 인간이 풀어내야 합니다.
      정치가 바로 서야 합니다.
      민주주의가 축소되고 왜곡되는 것을 막으려면 정치가 바로 서야 합니다.
      모든 불평등은 반민주적 결과들입니다.



"모든 철학이 죽었다"는 비트켄슈타인의 절망적인 선언이 나왔던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철학과 사회학이 죽어버린 시대가, 신자유주의 통치와 거대 미디어의 세상인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생각 자체가 사라진 채 끊임없이 이동하고 접속하며, 단 한 번의 클릭으로 자신의 과거를 삭제하고, 현재의 나를 끝없이 업그레이드하는 모바일기기의 특징으로 인해 지금-당장이라는 소비지상주의가 만연된 시대적 특징을 감안하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비판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의 지식인들이 현실비판에서 멀어지면 화석의 존재처럼 변해버린 존재의 근거마저 사라져버립니다. 포기는 쉽고, 타협은 탈콤하며, 전향은 부를 제공합니다. 지식인이 꼭 가난할 필요는 없지만, 비판정신을 잃을 만큼 많은 부를 쫓아가면 나태한 정신이 비판정신을 부패시키기 일쑤입니다. 타협과 타락의 시작은 늘 비슷한 것에서 비롯되기 마련입니다.  





유대인을 대량학살한 홀로코스트의 행정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그녀도 유대인이다)가, 인류사의 최대 악으로 지탄받고 있는 나치의 핵심인물 중 한 명이었던 아이히만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ㅡ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를 출간한 뒤, 좌우로부터 융단포격을 받고 자신의 주장을 더 이상 펼치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면, 동시대의 주류에서 벗어난 사상을 꿋꿋하게 밀고 나가는 것은 자살행위에 다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좌우의 융단포격을 받은 한나 아렌트가 자신의 사상을 끝까지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지식인의 역할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지식인(모든 개인도 마찬가지이지만)에게 주어진 삶이 사막처럼 척박하고 황량해도 끝끝내 시작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을 철회하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며, 휴머니즘을 가득한 정치철학의 부활을 위해 끝까지 노력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한국 지식인의 표상이었던 리영희 교수와 최근에 생을 달리한 신영복 교수가 그렇게 살았지만, 그들의 뒤를 이을 행동하는 지성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한국의 지성사는 각자도생의 퇴로에서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김대중과 노무현에 필적하는 지도자가 나오지 않는 것도 결국은 언론과 지식인의 권력과 자본에 대한 치열한 비판이 종적을 감췄기 때문입니다.  



비록 큰 돈을 벌 수도 없고, 권력과 자본과 결탁한 사이비 지식인들과 다른 관점을 지닌 올바른 지식인들에 의해 많은 공격에 시달리겠지만, 비판이론을 업으로 삼고 있는 지식인이라면 '병 속의 편지' 같은 편법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부르디외가 《세계의 비참》의 추고에서 말한 것을 지식인(특히 철학과 사회학을 전공하는)이라면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사회적 세계를 연구하는 데 인생을 바칠 기회를 얻은 사람은, 세계의 미래가 걸려 있는 투쟁 앞에서 무관심하거나 중립적으로 있을 수 없다.         

 


부르디외의 성찰처럼, 이번에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슴에 단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를 기리는 벳지를 달고 다니는 것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여지가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인간의 고통 앞에서는 중립이란 없다"고 말한 것은 동일한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과 지상에서의 삶을 구원해야 하는 성직자와, 인류에게 무엇이 진실이고 정의인지 알려야 하는 지식인들은 인간에 사랑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헌데 교황이 '죽음의 문화'라고 말한 부정적 세계화가 지구의 곳곳을 가로지르며 전 지구적 시장으로 끌어들여 뼈속까지 빨아먹고 있는 지금/현재, 돈이 되는 것은 모두 다 전문화돼 일반인들은 접근하기 힘들고, 그들의 주장을 이해하기도 힘듭니다. 전 지구적 지배계급과 거대 자본 및 초국적기업에 봉사하는 지식에는 국경이 없어졌고, 지식인들도 비슷하게 행동합니다. 세계화의 주역들을 위해 치외법권적 지위를 누리며 계급화된 엘리트로 자리매김한 현대의 지식인들은 부정적 세계화를 위해 시민을 소비자로 변질시키는 상징제작자와 상징조작자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부정적 세계화의 정도가 심화된 대한민국에서는 족벌신문과 정권의 나팔수를 자처하는 방송들을 맴돌며 정치권만 기웃거리는 사이비 지식인들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영혼도 철학도 없는 그들은 오로지 돈과 권력만 쫓아 불나방 같은 행태를 서슴지 않습니다. 지식인의 업무가 현실비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과 권력의 맛에 길들여진 이들은 사실과 진실은 물론 진리와 공리마저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 가치와 진실 여부는 전혀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이 지식의 이름으로 홍수처럼 밀려오는 디지털 세상에서 지식인이 할 일이란 자신의 사상이 경고하는 미래상이 틀리기를 바라면서 부정적 세계화의 현실과 사회비판에 물러섬이 없어야 합니다. 성장과 개발이 불러온 현실이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비대칭적 종말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망가져 버렸지만, 모름지기 철학과 사회학을 업으로 삼고 있는 지식인이라면 실낱같은 희망을 잉여에서 쓰레기로 버려지고 있는 현 시대의 난민과 미래세대에게 제공해야 합니다. 



비판이론을 평생의 업으로 삼은 지식인이라면, 지그문트 바우만이 《유동하는 공포》의 마지막에 했던 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사회경제적 평등과 돈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진보좌파의 가치가 민주주의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확고하게 믿는 지식인이라면 더욱더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깨어 있고 행동하는 시민에서 소비하는 개인으로 파편화된 일반인들이 비판이론을 정립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진리와 정의 및 자유와 평등에 대한 부단없는 탐구와 기득권의 탐욕을 고발하고 경고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지식인들이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비전을 제시할 수 없다면,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폭력적인 현실은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득권의 탐욕에 지식인이 침묵하면 언론도 침묵하고, 교육도 무너지고 권력은 오만방자해집니다. 그럴 경우 바우만의 마지막 희망과 프란치스코 교황의 호소도 아무런 역할을 못할 것입니다. 



다가오는 세기는 궁극적인 재앙의 시대가 될 것이다. 아니면 지식인과 민중 사이에 새로운 협약이 이루어지는 시대가 될 것이다. 희망을 갖자. 이 두 개의 미래에 대해, 아직도 우리에게 선택의 기회가 남아 있으리라고.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뉴론7 2014.08.20 05:51 신고

    잘보고 감니다. 좋은하루되셔염

  2. 태봉 2014.08.20 08:41

    좋은 날이 올거라 희망해 봅니다
    잘 보고 가요 화이팅~~!!^^

  3. 유머조아 2014.08.20 15:58 신고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무척 철학적이십니다..

  4. 새벽을기다리며 2014.08.20 17:38

    좋은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십시오.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는 한 사회의 대중이 오도된 사고방식이나 정세판단을 하고 있을 때 그것을 깨우쳐야 하는 것은 언론과 지식인의 최고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ㅡ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인용



최근에 들어 자신들만 옳다는 박근혜와 그의 환관들의 권력에 취해 그들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제대로 된 보도를 내보지 않고, 이에 침묵하는 이 땅의 지식인들을 보며 하나의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것은 사회학을 업으로 삼고 있는 이 땅의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저의 생각입니다. 어떤 보도와 지식도 그것이 가장 필요로 할 때 이루어지고 제시되지 않으면 죽은 것이며, 비겁한 것이고, 쓸모없는 것입니다. 



쓰레기라는 소리가 가장 정확한 한국의 언론들과 자신의 동굴 속으로 숨어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고 외치는 것은 자기 변명이자 권력과의 타협이며,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최악의 행태입니다. 저는 이번 글에서 이 땅의 침묵하는 지식인들을 향해 제 생각을 석학들의 성찰에 도움을 받은 풀어보고자 합니다. 저의 생각은 그들의 성찰을 이리저리 조합한 정도에 불과하고 거기에 숟가락 하나만 얻은 것임을 먼저 밝혀둡니다.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편지를 써서 병 속에 넣은 후 바다에 떠나보내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병 속에 편지를 넣은 주인공은 병이 어디로 갈지, 누구한테 갈지, 도중에 깨지거나 영원히 바다를 떠돌지 알 수 없습니다. 운이 좋다면 병을 주운 사람이 편지를 읽을 수 있는 동시대의 사람일 수도 있지만, 몇 시대가 지난 다음이라면 편지의 내용이 해독 불가능한 것으로 버려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병 속의 편지'를 통해 지식인의 자세와 역할에 대해 다룬 철학자이자 사회과자들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현재의 독일을 만들어낸 양대 학파 중 프랑크푸르트 학파(나머지 하나는 푸라이부르크 학파로 신자유주의의 원형인 질서자유주의 또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정립했다)의 1세대인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21세기 최고의 석학으로 꼽히는 영국의 지그문트 바우만입니다. 아도르노는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을 다룬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바우만은 근대이성의 산물인 현대성 대한 고찰로 유명한 《유동하는 공포》에서 '병 속의 편지'라는 비유를 통해 지식인의 비판정신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누가 받을 지도, 도중에 사라질 지도 모르는 병 속의 편지를 가지고 지식인의 비판정신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시대에 뒤쳐진 어리석은 짓일 수도 있습니다. 정체불명의 인문학 강의가 넘쳐나는 한국에서 별로 읽어주는 사람도 없는 글을 쓰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짓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지식을 검색하고 인용하면서도, 표절이 넘쳐나는 세상이 한국이니 모든 책을 직접 보고, 오랜 성찰을 통해 나온 글을 쓰는 것보다 어리석은 짓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0이 넘은 나이에도 열정적인 사회참여와 집필을 보여주고 있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의 도움을 받아 '병 속의 편지'가 지식인에 대해 지니는 알레고리(은유 또는 비유)를 다루어보는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고 진정성을 담은 호소에 화답하는 차원에서라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의 화두가 불통이 아닌 소통이고, 그것에 기초한 연대와 합의의 도출이라면 더욱더 그러할 것입니다.   



영국이 배출한 최고의 석학 중 한 명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위대한 휴머니스트이자 정직한 철학자이며 불굴의 사회학자였던 마르크스와 아도르노, 브르디외를 인용하며, '병 속의 편지'에 담긴 지식인에 대한 비유에서 두 가지 추정을 제시합니다. '병 속의 편지'를 통해 지식인의 비판정신과 비판이론에 대해 얘기하려면 다음의 두 가지 추정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병 속에 담긴) 그 메시지가 종이에 써서 병에 넣어 띄워 보낼 만큼 가치가 있다는 추정. 그리고 그것이 발견되어 읽혀질 시점(비록 그 시점을 미리 확정할 수는 없지만)에 아직도 가치가 남아 있으리라는(발견자가 그것을 해독하고 연구, 이해, 적용하기만 한다면) 추정.



이런 두 가지 추정은 어떤 지식인이 자신의 사상에 대해 '들을 준비도 뜻도 없는 동시대 사람들과 말을 섞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을 때, 그래서 '정해지지 않는 미래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에게 메시지를 맡기는 일'이 낫다고 여겼을 때 가능합니다. 이는 어떤 지식인이, 특정할 수 없는 미래의 시공간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사상을 들어줄 것이며, 이해할 수 있으며, 연구하고 발전시켜 후대에 전해줄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리영희 교수가 생전에 누누이 말했던 것처럼,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라도 동시대의 사람들에게서 아무런 호응도 받지 못하고, 토론을 거쳐 인정받거나, 검증 절차를 거쳐 진리의 영역으로 들어서거나, 심지어는 맹렬한 반박이라도 받지 못하면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시대에 엄청난 핍박과 박해를 받은 위대한 마르크스가 《자본론》과 수많은 저작들을 통해 시대를 통렬히 비판한 후에 "아무튼 나는 말했고, 나의 영혼은 구원받았다"고 말한 것처럼, 일종의 체념에 빠져드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병 속의 편지'는 영원한 가치를 믿는 사람, 보편적인 진리를 믿는 사람, 지금 진리를 찾고 가치를 지키려 애쓰게 만드는 우려가 계속되리라 의심하는 사람이 쓸 수 있는 편법이다. 그 병 속의 메시지는 좌절이란 일시적일 뿐임을, 그리고 희망은 계속될 수 있음을 입증하고, 가능성의 패배하지 않음과 그런 가능성을 가로막는 적들의 허약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지식인의 역할이 치열한 비판정신을 잃지 않는 것에 있다는 아도르노의 성찰을 따라가며, 바우만은 위의 인용문을 재언급했습니다. 물론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살해 위협에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던 아도르노가 너무나 흥청망청이고 더없이 풍요롭고 자유롭지만, 자유민주주의에 집착하며 다른 이념적 지향에 대해 집단적인 폭력도 서슴지 않는 미국의 이중적 행태에 크게 실망한 영원한 이방인으로서의 정신적 부적응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렇다 해도 머나먼 이국에서 완벽하게 고립된 지식인이 이런 자세를 견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뻔뻔하고 파렴치할 정도로 표절이 넘처나고, 권력과 자본의 돈에 빌붙어 살면서도, 이런저런 사적 인연을 동원해 거대한 파벌을 만들어 그들만의 왕국을 구축하기에 바쁜 이 땅의 지식인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거짓이 더욱 그럴싸한 진실 같은 시대에서 초라해 보이는 진실을 외치는 일은 사막에서의 예언자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겠지요. 


 


P.S. 지그문트 바우만의 명복을 빕니다. 그의 저작들에 너무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저로서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현대를 관통하는 성찰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누구보다도 탁월했던 바우만의 신작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정말로 아쉽고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의 저작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저의 행복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90세가 넘어서도 치열하게 성찰했던 바우만에게 경의를 표하며, 영면에 들어 편안하기를 기원합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Croaton 2014.08.02 16:36 신고

    인류는 결국 진보합니다. 먼 고대에서부터 보자면 정말 막장 같은 시대도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모든 것을 딛고서 진보했고, 현재는 비록 이름 뿐이지만 민주주의까지 왔습니다.

    인류가 이렇게도 느려터지게 진보하는 이유는 의식의 변(전)환이 없어서입니다.(물론 제 생각) 그러나 개미가 기어가도 세월은 오래 걸릴지언정 결국은 42.195 미터를 돌파합니다. 당대에서 안되면 그 다음대에서라도 돌파하고야 맙니다.

    다만 서글픈 것은 모든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음에도 그것을 꽃피우지 못하는 우리 이웃들이죠. 지금 당장 행복하게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딴나라 이야기라고 말하는 깨어나지 못하고 잠 자고 있는 동포들입니다.

    어려서 만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만화의 내용 중에서 아스트랄이라는 세계가 나오는데 그 아스트랄이라는 세계에서는 무엇이든 꿈꾸고 소원하기만 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가난한 이와 소외 받은 이가 있고 또한 권력을 행사하는 이와 거기에 빌붙어서 민중을 탄압하는 나쁜 넘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세계에 사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능력에 대한 가능성을 이야기하면 화를 낸다는 것입니다.

    그 만화를 본지가 40년은 된 거 같은데.. 지금 돌이켜보면 인간 사회가 원래 그러했나보다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러나 이 전체적인 것을 보기 위해서는 그 곳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그 아스트랄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이나 처지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이 없겠지만 거기에서 빠져 나와서 완전히 제 3자로써 볼 때에라야 문제가 뭔지.. 해결책이 뭔지.. 이런 게 보일거라고 생각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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