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채널을 지향하는 시네프에서 스티븐 호킹과 제인의 만남과 사랑, 결혼생활, 이혼까지 다룬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을 시청했다. 아인슈타인 이후 최고의 입자물리학자로 평가받은 그는 '제2의 아인슈타인'이라는 영예를 얻었을 정도로 입자물리학에서는 독보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빛도 통과할 수 없는 블랙홀(별의 생성과 종말 모두에 관여하며, 아인슈타인이 예언했지만 최근에야 입증된 전자파에 대한 이해에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에서도, 인류가 발견한 가장 완벽한 이론인 '열역학 제2법칙'이 작동한다는 것을 밝힌 '호킹 복사'는 그의 천재성이 얼마나 높은지 말해준다. 

 

 

 

 

말년의 아인슈타인은 우주에 존재하는 네 가지 힘(물리법칙의 모든 것)을 하나로 합쳐 창조법칙의 모든 것을 풀어내는 '대통일이론'을 세우는데 몰두했지만 끝내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쳤다. 제2의 아인슈타인인 호킹도, 와인버거와 서스킨드, 그린 등처럼 대통일이론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입자물리학으로 접근하면 한계에 봉착하는 것이 현재의 상황인데, 중력을 양자역학적으로 풀어낸 끈이론(11차원으로 4개의 힘을 합쳤지만 증명할 수 없는 수학적 해의 하나인 M이론 포함)도 대통일이론에 이르지 못한 상태이다. 

 

 

끈이론과 정보이론이 이끌고 있는 최근의 우주론은 이들의 연구에 비하면 공상과학소설에 가깝다. 필자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등수학들이 총동원된 이유도 있지만, 그들의 이론들을 인간의 능력으로는 증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공상과학소설이라 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필자가 분노하는 것은 세계 최고의 천재들이라는 이들의 이론들이 인간과 지구를 대단히 하찮은 것으로 추락시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라마찬드라 박사가 말했던 것처럼, 과학의 발전이라는 것이 인간과 지구를 계속해서 하찮은 존재로 만드는 과정이지만 최근의 우주론에 이르면 하찮다 못해 사라져도 되는 존재로 격하됐다. 이들은 우주의 종류와 수가 무한대이기 때문에 인간과 지구도 무한대로 존재하기 때문에 인류와 지구가 사라진다 해도 초미세먼지 하나가 사라진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주장한다, 작고한 호킹이 그렇게도 인류의 멸종을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물론 리처드 도킨스처럼 인간이 진화의 마지막 단계가 아닌 최고의 지능을 지닌 다음이나 그 다음 단계의 존재를 위한 중단 단계, 또는 바로 직전 단계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이들이 말하는 다음, 그 다음의 존재는 무엇이 될지 알 수 없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특이점을 돌파한 초인공지능이라는 과학적 합의ㅡ인류의 99.99999%는 제외한 채ㅡ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신과 동등한 수준에 이른 초인공지능을 인간이 창조했다는 것에 만족하라고 인류에게 말한다. 

 

 

인간을, 특히 인간의 몸을 하찮게 여기는 이들이 우리가 존경하고 최고라고 떠받드는 불세출의 천재들이다. 이들의 연구에 우리의 혈세가 바쳐지고 있으며, 정말로 엿 같게도 그 선두에 자리한 존재가 인간이 아닌 구글과 페이스북이라는 IT공룡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모두가 플랫폼으로 이용하면서 지불하고 있는 돈과 시간, 재능 등을 독점하는 구글과 페이스북의 반인류적 탐욕이다. 그들이 만들고 인공지능은 모든 이용자들이 남긴 데이터에 기반하며, 그렇게 축적된 빅데이터를 이용해 세계 최고의 천재들이 마스터 알고리즘을 만들고 있다.

 

 

호킹 부부의 사랑을 다룬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이 소중했던 것은 최고 천재들에게 바치는 인간이 만든 최후의 영화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는 앞으로도 만들어지겠지만 20~30년 후에는 인공지능이 만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공지능이 특이점을 돌파하더라도 인간보다 뛰어난 존재가 되지는 않겠지만, 우주적 차원의 빅데이터를 이용할 수준에 이르면 돈이 되지 않는 인간적인 것들을 빼면 과학과 철학까지 인공지능에게 넘겨주어야 하니 영화를 만드는 것은 식은죽 먹기보다 못해진다. 

 

 

필자는 루게릭병에 걸린 호킹보다는 고통이 덜하지만 백일 이후에 소아마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래 평생 동안 그에 못지 않은 육체적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 너무나 많은 병에 걸려 건강했던 기억이 10년도 되지 않지만 영화를 보면서 자신의 병과 남은 시간을 알게 된 호킹의 충격이 절절하게 다가왔다. 그는 의사의 예상보다 50년 이상을 더 살았고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자식을 셋이나 두었지만 평생을 사랑한 여자를 놓아주는 장면에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제인은 2년 정도만 남았다는 호킹을 돌보며 박사 학위와 교수직까지 받도록 도왔다. 3명의 자식을 키우면서도 아이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일들을 훌륭하게 해냈다. 이것은 사랑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인은 모성애를 넘어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호킹을 돌보고 세 아이를 키웠던 것이다. 결혼에는 사랑말고도 의무와 책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녀는 호킹의 성공과 자식의 육아 및 교육 등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거나 자기투자라는 것을 모조리 포기해야 했다. 그녀는 너무나 지쳤고 운명처럼 새로운 남자가 나타났다.    

 

 

호킹보다는 제인이 보여준 사랑의 위대함을 그려낸 영화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여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을 것이라는 나만의 생각 때문에 결혼은 꿈도 꾸지 않았던 필자에게는 호킹의 선택이 낯설지 않았다. 그는 제인을 놓아주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자신을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자 결심을 굳힌다. 이제는 제인에게 끝없는 희생이 아닌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놓아주어야 했다. 호킹은 제인을 영국에 두고 미국으로 떠난다. 

 

 

페미니즘에 관한 책들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성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필자에게는ㅡ우리나라 페미니스트들 중에 주디스 버틀러나 낸시 프레이저, 호미 바바의 저서들을 완전히 이해하는 분들이 있다면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ㅡ여성에 대한 이해가 터무니없이 부족했었다. 그러나 호킹의 선택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나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었다. 사랑의 위대함이 희생의 위대함과 같아서는 한쪽의 희생만 강요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호킹의 첫 번째 부인인 제인 같은 여성을 만나지 못했다. 아니 만나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는지 모른다. 하루 16시간 정도를 공부하는 고시 준비 때문에 건강이 악화된 후, 필자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소아마비보다는 선친처럼 간이 망가진 것과 극심한 수면장애ㅡ지금은 거의 완치한 공장장애로 발전했다ㅡ때문에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런 질곡의 삶으로 끌어들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어떤 여성이든지 유혹할 수 있었지만 깊은 관계로 발전할 것 같으면 나는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제인이 보여준 위대한 사랑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대단히 똑똑하고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즐비한 집안이라 그들 사이에서 버티기도 힘들었다. 땡전 한 푼 없이 시작해 8개월만에 신화에 근접했다는 소리를 들었던 통신사업에 실패한 이유도 건강 때문이었다. 소아마비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지만 형편없는 체력과 일찍 일어나지 못하는 수면장애는 사업을 함에 있어 치명적인 약점이자 한계였다, 모질지 못한 성격도 한몫했지만. 

 

 

 

 

박사 학위 10개 정도는 따고도 남을 만큼 많이 공부했음에도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것 이상을 하지 못한 것도 결혼을 포기한 것과 동일한 이유 때문이다. 간경화가 간암으로 넘어갔다는 판정을 받고, 2년 정도의 생존가능성을 의사로부터 들었을 때 추호의 슬픔도 느껴지지 않은 것도 산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깨어있는 모든 시간이 지옥이었다. 오로지 수면장애와 공황장애를 약하게 만들어주는 향정신성 약물을 복용했을 때만 통증과 미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헌데 내가 받은 첫 번째 진단명이 우울증이었다, 할렐루야!).

 

 

이런 상황에서 책을 쓰거나, 팟캐스트를 하거나, 방송을 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너무 많은 공부량으로 해서 책을 내기도 힘든 상황에 처했다. 어느 수준에서 어느 정도의 성찰을 담아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담고 싶은 것은 넘쳐났지만 한 편에 담을 방법도 없었고, 여러 편으로 나누기에는 건강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공부를 하는 중에 뇌가 살아나고 그에 따라 건강이 좋아지는 기적을 접한 후에야 집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방송을 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궁찾사 집회와 문파 집회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면서 호킹의 삶과 선택들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제인 같은 사랑을 만났고 결혼했으며 이혼 후에도 친구로 지내는 것이 너무 부러웠다. 제인 같은 여자를 만났다면 인생 전체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떨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호킹이 인공지능에 의한 인류의 멸종에 그렇게도 경고의 말들을 남긴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 1년 반 동안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 관련 학문들을 집중적으로 파고든 필자는, 최초의 복제자를 만들어낸, 그래서 단백질에 기반한 인간의 진화가 가능했던 이유를 신체에서 찾는다.

 

 

뇌라는 최고의 작품도 신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과학의 발전이 신체를 하찮은 것으로 만드는 것에 호킹은 참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평생을 수많은 병마와 싸워야 했던 필자의 삶은, 육체라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 과정이었기에 호킹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같이 자살만 생각했던 시절에 1초의 여유도 주지 않는 육체의 고통 앞에서는 정신적 고통이란 하찮은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유발 하라리는 정반대의 과정(게이라는 고달픈 경험도 더해졌을 것이고)으로 육체의 소중함에 눈을 떴지만 나는, 어쩌면 호킹이 그랬을 수도 있었으리라 짐작하는 나는 육체의 고통을 통해 지금에 이르렀다.

 

 

호킹의 《시간의 역사》는 나에게 우주를 보는 눈을 뜨게 해준 책이다. 리처드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3권과 100여 권에 이르는 물리학과 우주론 책들을 읽게 만들어준 최고의 책이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그의 물리학 지식이 부러웠는데 <사랑에 관한 모든 것>을 시청한 이후에는 제인 같은 위대한 여성을 만난 것이 더 부러워졌다. 제인이 없었다면 호킹도 없었다. 인간을 너무 사랑했던 스티븐 호킹은 떠났지만 그가 남긴 사랑의 열매들이 영원할 것을 기원해 본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나무 2019.01.13 02:49

    늘 건강하시기를 기도할께요~

  2. 청운 2019.01.14 04:17

    한 번 만나 이야기 하고 싶네요. 전 서울과 양평을 오갑니다. 제 동선에 계실까요?

  3. 나무 2019.01.15 01:11

    산본... 같은 지역주민이시네요~^^

 

 

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그를 바보라고 불렀다, 다른 말로는 그의 일생을 표현할 수 없어서. 영화 <변호인>은 노무현이라는 사람의 ‘거대한 전환’에 관한 짧고 투박한 이야기다. 국가의 폭력과 불의를 압축하는 사건과 마주쳤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던 속물 변호사의 위대한 변화에 관한 이야기다. 3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되풀이되는 국가의 폭력과 불의에 저항해야 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영화의 완성도와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반감, 문재인 의원을 중심으로 한 참여정부 인사들의 정치적 부활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변호인>을 평가절하 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변호사 시절의 노무현을 일방적으로 미화했다며 영화의 가치를 폄하할 수도 있다. 러닝타임에 얽매여 서둘러 끝낸 결말이 <죽은 시인의 사회>의 표절이 아니냐고 비난할 수도 있다. 

 

 

모든 것에는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ㅡ예고편에서 캡처  

 

 

영화적으로 볼 때, 프란시스 코풀라 감독의 <대부> 시리즈 1편과 2편처럼 전반부에는 속물 변호사 노무현의 성공과 야만적 국가의 폭력을 교차하는 방식으로 다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국가의 야만적 폭력에 마주쳐 현실에 눈 뜨는 중반부에는 인권변호사 노무현과 압도적 힘을 가진 국가가 공작을 벌여 변호사 자격을 박탈하는 과정이 교차 편집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그러나 <변호인>에는 국민의 자유와 삶의 질을 보장해야 하는 국가(정부)가 권력을 사유화해 국민을 사지로 내모는 압도적인 폭력에 대한 고발과, 깨어나는 시민으로서의 저항의 역사가 들어 있다. 정권의 안위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조작됐고, 그때마다 얼마나 심한 고문이 자행됐으며, 얼마나 많은 국민이 희생됐는지, 독재정권의 악마성이 들어 있다. 

 

 

<변호인>에는 돈을 잘 벌던 변호사가 그때까지 이룬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부와 권력, 기회의 독점에 따른 극도의 불평등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파괴하는 현 대한민국에 대한 정치적 성찰이 들어 있다. 왜 이 시대에 노무현 같은 바보가 필요한지, 그것도 여러 명이 필요한지 이 시대의 절박한 요구가 들어 있다.

   

 

예고편에서 캡처

 

 

나 아렌트의 말처럼 국가의 폭력이 “착취와 억압조차 사회가 돌아가게 만들고 나름의 질서를 확립”시키는 사건에 직면했을 때, 변호사 노무현은 현실을 직시했으며 분노했고 저항했다. 그는 정의의 담지자인 법의 언어로 국가의 폭력에 맞섰으나, 자신의 의뢰인을 지켜내지 못했고 변호사 자격마저 박탈당했다.

 

 

영화의 끝에선 작은 희망의 불씨를 볼 수 있었지만, 국가의 폭력이 무력해졌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일어선 변호사들이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과 함께 한다고 해서 국가의 폭력이 사라진다는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았고, 정치적 해석도 끝까지 피해갔다.

 

 

어쩌면 제작진과 관계자들은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을 믿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전반부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함으로써 변호사 노무현의 변화에 무게를 실어주는 방식이 다소 거칠고 설득력이 떨어졌지만, 직선으로 부딪치는 후반부의 노무현이 그 시절의 절박함을 이 시대의 경험들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예고편에서 캡처

 

 

이처럼 <변호인>은 아직도 서슬이 퍼런, 아니 최근에 들어서는 퍼렇다 못해 이글거리는 국가의 폭력이 두려워 자기검열의 흔적ㅡ영화에서 편집돼 사라진 부분들ㅡ이 곳곳에 묻어나는 시대의 아픔이 반영된 영화다. 그 증거는 영화의 맨 처음에 나오고 이것 때문에 필자는 영화를 보는 내내 목에 걸린 국가의 폭력이라는 가시에 불편함을 금할 수 없었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그 첫 번째 화면에 ‘실제 인물에서 모티브를 얻었지만 내용은 허구’라는 자막은 <변호인>에 가해졌을 유무형의 정치적 압박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사상 최고의 속도로 흥행기록을 가라치우고 있는 <변호인>의 흥행몰이를 외면하거나, ‘한국영화 전성시대’나 ‘2,000만 배우 송강호’로 평가절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영화 <변호인>도, 교묘한 방식의 압박과 회유에 시달렸을 제작진도, 인권변호사 노무현을 잊지 못해 상영관을 찾은 관객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국가 폭력의 희생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영화를 시작하는 한 줄의 자막이 보여주고 있다. 같은 이유로 해서 영화의 엔딩에 실제의 사건이 어떤 결말로 이어졌는지 자막처리를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예고편에서 캡처

 

 

영화 <변호인>이 진정으로 말하는 것은 ‘이 영화는 허구’라는 안전장치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우리네 현실의 팍팍함이다. 법정의 노무현은 시리도록 아려서 꽃처럼 아름다운 인물이었을지언정 우리네 삶은 여전히 국가의 폭력에 둘러쌓여 있다. 영화는 이것을 말해주려 했다. 달라진 것은 보다 세련되고 민주적 절차를 이용하는 국가 폭력의 진화 뿐이다.   

 

일각에서 말하는 ‘성공한 법정영화’라는 평가는 <변호인>의 가치를 최대한으로 축소시키는 의도적인 폄하다. 이는 마치 <화려한 휴가>를 시대에 휩쓸려버린 사랑이야기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또는 <부러진 화살>을 어느 또라이 교수의 법정투쟁기로 제한하는 것이다.   

 

 

<변호인>은 인간 노무현에 대한 예찬이 아니다. <변호인>은 영화라는 매체를 빌려 국가의 폭력을 고발한 직선적인 영화다. 그래서 사악한 폭력의 으뜸이자 절대악이었던 나치에 대한 뼈저린 후회와 뒤늦은 성찰에서 나온 명제, ‘처음에 저항하라, 그리고 결말을 고려하라’라는 말을 <변호인>에 그대로 따온다면 ‘첫 화면의 자막을 기억하라, 그리고 마지막 장면과 비교하라’라 말할 수 있으리라.

 

 

많은 부분이 편집됐거나, 아니면 잔혹한 실화를 모두 담아낼 수 없어서 러닝타임이 턱없이 부족했던 <변호인>의 흥행이 어디까지 이이질지 알 수 없지만 이것 하나만은 잊지 마시라, 국가의 폭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시대는 지금 깨어있는 시민들의 연대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참교육 2015.12.19 08:05 신고

    권력과 폭력은 본질이 같습니다.
    행사를 정당성인가 아닌가에 따라 폭력이 되기도 하고 권력의 행사가 되기도 합니다.
    교육을 통해 본질을 가르쳐 주지 않아 사람들이 헷갈려 하고 있습니다.

    • 늙은도령 2015.12.19 15:45 신고

      합의에 의한 허용된 폭력이지요.
      이것이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에 따라 이루어질 때는 공권력이고, 박근혜처럼 이용하면 야만공권력이 됩니다.
      국가의 폭력이 이럴 때 최고에 이르지요.

  2. 덕산 2015.12.19 08:28

    내일은 또 어떤일이 일어날지란 걱정을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권력이 잘못된 방향으로 쓰여질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실감하고 살고 있습니다.

    • 늙은도령 2015.12.19 15:48 신고

      제일 걱정은 이명박 8년 동안 한국경제마저 말아먹었다는 것입니다.
      부채가 너무나 급격히 늘어 내년 후반부터 몰아닥칠 경제위기를 중하위층은 버텨낼 재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재벌들이 사상 최고로 임원수를 줄였고, 사업을 매각하고, 포기하고, 방어 위주의 경영으로 돌아섰습니다.
      IMF를 능가하는 구조조정을 피할 수 없는데 그것이 내년말이냐, 박근혜의 임기가 끝나는 해이냐의 차이만 남았습니다.
      암담합니다.
      저의 형제처럼 어떤 경우에도 최고의 자리에서 성공할 수 없는 분들이 정말 걱정입니다.

  3. 공수래공수거 2015.12.19 08:29 신고

    헌법 조항을 외치던 그 감동을 아직 생생히 기억합니다^^

    • 늙은도령 2015.12.19 15:49 신고

      아... 그리운 노무현 대통령....
      문재인이 이제 그의 돌파력을 흉내내려 하고 있으니 기대해봐야죠.

  4. 바람 언덕 2015.12.19 12:16 신고

    오늘 이 시대는, 그리고 나는 누구를 변호하고 있는 것인지...



오늘 캐치원에서 ‘크로싱오버’라는 영화를 받습니다. 미국에 불법적으로 입국한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영주권과 시민권을 얻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죽음과 추방, 이별과 정착, 검붉은 희망이 교차하는 이 영화는 아메리칸드림으로 대표되는 유토피아에 대한 인간의 슬픈 열망을 담았습니다. 



유토피아를 향한 인간의 끈질기고 모진 희구는 죽음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해, 각종 고통과 비극으로 점철된 인생에서 벗어나려는 인간 해방과 구원의 열망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최후의 낙원인 유토피아가 세상과 인생의 비극과 모순들이 만들어낸 이를 수 없는 도피처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유토피아가 아닌 현재의 미국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아메리칸드림으로 대표되는 기회와 축복의 땅이라는 ‘크로싱오버’는 그 이면에 자리한 회색빛 현실로 인해 너무나 척박한 희망과 풍부한 절망과 여밀 수 없는 아픔에 대해 얘기합니다. 영화는 희망으로 포장된 절망의 박스를 채워갑니다.



영화에 나오는 불법체류자들 중에서 퇴색된 유토피아에 정착한 누구도 행복한 시민이 되지 못합니다. 일부에게는 희망의 약속을 열어주지만 거기에도 가혹하거나 영원히 감추어야 할 비극적 대가(가족의 해체와 죽음, 추방, 연인과의 이별 등)가 뒤따랐습니다. 관계는 망가졌고 사랑은 깨졌고 신뢰는 무너졌습니다.



거의 모든 종류의 유토피아가 좌절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유토피아를 꿈꿉니다. 기술 발전과 국가 간의 차이에 따라 드림의 종류도 다양해졌고, 이 땅에서는 아메리칸드림을 모방한 코리안드림이 형성돼 이주노동자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종 뉴스와 다큐멘터리, 시사교양프로그램 등을 통해 보고 듣는 코리안드림은 각박한 현실의 고단함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드라마 ‘미생’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전도된 유토피아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대우상사와 삼성물산을 합쳐놓은 듯한 ‘미생’은 영업을 전문으로 하는 대기업의 얘기여서 많은 분들에게는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러나 그들의 일원이 되고 싶은 유토피아이기도 합니다. 



장그래는 '우리 회사'라는 곳에서 선배와 동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꿈꿉니다. 계약직 사원인 그에게는 정규직으로서 '우리 회사'의 발전을 위해 함께 일하는 것이 젊은 날의 유토피아적 소망일 것입니다. 그가 정규직에 되던 되지 못하던, 그는 현실적 한계상황에 내몰리면서도 꿈꾸는 권리는 아직 잃지 않고 있습니다. 청춘이라서 아픈 것이 아니라, 터무니없는 꿈이라도 꿀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아픈 것이지요. 



장그래는 경제가 어렵다고, 기업이 힘들어한다고ㅡ누구와 무엇 때문에 경제와 기업이 어려워졌는지 따지지도 않고ㅡ계약직 정규직을 만들어 노동유연화를 활성화하겠다는 박근혜 정부와 집권 여당의 대기업 사랑은 장그래 같은 수많은 기간제 계약직들을 계약직 정규직으로 바꿔놓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기존의 수많은 정규직들이 계약직 정규직으로 추락할까요?   



삶이란 바로 그 1%의 빌어먹을 희망이 99%의 압도적인 절망을 수용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삶이 숱한 실패와 좌절로 얼룩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심지어 성공한 것에서도 우리는 압도적인 절망에 직면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다음의 국면과 이어질 수도 있는 국면과, 그 이전에 그칠 수도 있는 국면에서는.



그렇게 단위가 커갈수록, 시간이 쌓일수록, 체력이 떨어지고 능력의 한계에 이를수록 성공의 가능성은 작아지고 줄어들며 퇴색됩니다. 실패의 확률은 정반대로 늘어나고 쌓이고 완고해집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내려놓거나 비워내는 법을 배워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망적인 현실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현명해져가고, 자신과 삶과 타협함으로써 행복해지는 법에 대해서 배워갑니다. 우리는 희망과 성공이 아닌 체념과 절망을 통해 성숙해집니다. 인생은 분명 비극입니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가끔씩은 행복해지는 비극입니다. 자신과 삶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하지 않으면 이런 지혜도 얻지 못하는 압도적인 비극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에 열려있는 삶으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갖고, 그보다 더 갖고, 넘칠 정도로 가져서 세습화된 부의 제국을 구성한들, 그렇게 영속되는 가문의 삶을 이루려고 해도 그들은 인생의 비극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최고의 회사에 오른 애플회장 잡스의 때이른 죽음이나,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의 심근경색(사실상의 죽음)을 떠올려보면 우리는 부의 제국도 절대 유토피아로 이르는 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에 이어 제왕적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박근혜라고 해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인간 박근혜와 대통령 박근혜 사이에는 너무나 거대한 간격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처럼.



인간이 철학을 잃어버리고, 자본주의와 과학기술 및 계몽의 이성ㅡ이 모두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ㅡ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유토피아를 열망하는 한 우리는 1%의 빌어먹을 희망을 위해 99%의 압도적인 절망을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모진 게 삶이고, 삶은 일단 낚아챈 먹이는 놓아주는 법이 없으니까요. 



헌데 말입니다,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경제규모가 커질수록, 매스미디어와 정보통신기술이 발전할수록 인류의 삶은 황폐해지고, 관계는 단절되고, 전쟁과 테러는 줄어들지 않고, 직장과 직업은 불안해지거나 단기화되고, 범죄와 이혼이 늘어나고, 불평등과 차별은 강화되고, 가족은 해체되고 결혼은 선택이 됐으며 비혼의 가장들이 늘어났을까요? 



현실이 이러함에도 여전히 유토피아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미몽의 종교와 돈과 권력에 휘둘리면서 우리는 해방과 구원을 꿈꾸게 됐을까요? 왜 인류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으로 해서 파멸과 종말을 두려워하면서도, 역사가 시작된 이래 단 한 번도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라는 환상의 세계를 꿈꾸지 않은 적이 없을까요?  



인류의 역사는 분명 해방의 역사였는데 우리는 더욱더 현실과 기술의 노예로 전락하게 됐을까요? 무엇이 우리를 이리로 끌어왔을까요? 어떤 것들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을까요? 전 지구적 차원에서 빚을 내고, 자연과 자원을 고사와 고갈 직전까지 끌어다 썼으면서도 수십억 명이 절대 빈곤선에서 허덕이고, 기본적 자유과 권리마저도 행사할 수 없는 세상이 됐을까요? 



노동의 완전한 종말을 고하는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에 열광하며 덜 떨어진 미래학자와 테크노 낙관론자의 장밋빛 전망에 한 가닥 희망을 두는 것일까요? 일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 호모 루덴스의 세상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없는 최저생활에 만족하라는 기본소득에 최후의 희망을 두는 것일까요? 그밖의 다른 미래도 얼마든지 가능한데 쉬운 타협을 선호하는 것일까요? 우리 모두의 삶이 그렇게 싸구려가 아님에도‥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4.12.02 08:21 신고

    미생이 요즘 화제입니다
    전 예전 생각이 날까봐 일부러 안 볼려고도 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뉴스를 보면 이상한 나라에 와 있는듯한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날씨가 추워졌는데 건강 유의하세요^^

    • 늙은도령 2014.12.02 16:28 신고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건강을 생각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있지만....

      건강하시죠?

  2. 백순주 2015.09.19 05:09 신고

    저는 선생님의 글을 상당부분 이해하지 못하므로(지식이 짧아서요) 공감할 수 있는 제 나름의 방법을 하나 찾아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은 내려놓거나 비워내는 법을 배워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망적인 현실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마음에 와 닿는 한 귀절을 찾아내 제 생각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 또한 이미 학습된 선택이었다니 절망스럽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사오기전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결정했습니다.
    이 곳에 와서 제가 느끼는 행복은 '불편함'인는데도 아이들이 행복해하니 저도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소비가 줄어(마땅히 뭘 살 곳이 없습니다) 좋다고 말합니다.그것이면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결정을 합리화 하는 과정입니다.

    행복을 찾습니다.갈망합니다.
    그러다 현실에 안주합니다. 변명합니다. 지지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해지고 적응하고 살면 그만이지 했는데...
    행복하려면 비워내고, 내려놓으라 했는데...

    • 늙은도령 2016.01.20 05:29 신고

      저는 위대한 석학들의 철학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무던하게 살려고 합니다.
      구태여 행복이나 그런 것들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삶이란 답이 없어서 평범해도 화려해도 가난해도 부유해도 나름의 재미가 있습니다.
      꼭 성인이 되고자 하지 않습니다.
      저는 저를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나를 높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너무 행복한가를 묻지 않다보면 그런 대로 하루는 흘러가더군요.
      하긴 저는 워낙 최악의 상황을 오랫동안 유지해 더 나빠질 가능성(그것은 곧 죽음을 말했기에)은 별로 없습니다.
      혹시 그것이 빨리 와도 지금의 삶이 덤으로 주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저 하는 일에 충실하는데만 신경을 집중합니다.
      꼭 행복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독한 아픔과 슬픔도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거든요.
      뭐,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에 집착하면 할수록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포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어떻게든 살아있다는 것, 지독히 힘들지만 그것 이상을 할 방법이 없다면 그쯤에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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