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없애버리려는 자만이 비평할 수 있다.


                                                                  ㅡ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에서 인용




인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질서를 세우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기에, 모든 이들을 굴복시키고 배제시키는 완벽한 독재란 그 자신마저도 독재의 희생양으로 만든다. 자신의 세계를 제외하고는 모든 곳을 인간이 살 수 없는 사막으로 만드는 것은, 사막에 들어온 사람이나 사막을 떠나는 사람 모두에게 필요한 오아시스마저도 마르게 하기 때문에,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그렇게도 강조했던 어떤 시작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곳에 머물 수 있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뿐이다. 카네티도 자신을 노예로 만들었던 칼 크라우스의 실체가 모든 존재를 죽이는 완벽한 독재라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그의 유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음과 같은 성찰과 함께.





나는 이때부터 개개의 인간에게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시켜주는 언어적 형상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또한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를 하고는 있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또 그들의 말은 다른 사람들의 말과 충돌하여 튀어나가는 일종의 반동체라는 사실과 언어가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의 수단이라는 견해보다 더 큰 환상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상대방은 우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면 그는 더욱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외치면, 그들도 되받아 외친다. 이렇게 되면 문법 속에서 초라한 삶을 꾸려나가는 감탄사들이 언어를 지배하게 된다. 여기저기서 외침의 소리들이 마치 공처럼 이리저리 튀면서 지면에 떨어진다. 다른 사람들 안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란 거의 없고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그러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 아름답고, 추하고, 고상하고, 천박하고, 성스럽고, 속된 온갖 종류의 말들이 모두 이 떠들썩한 말들의 저수지로부터 끄집어내어 사용한다. 그리고는 그 말들이 알아들을 수 없게 될 때까지, 그리고 완전히 다른 어떤 것, 즉 그것이 전에 의미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 될 때까지, 그 말들을 되풀이해서 사용한다. 언어의 왜곡은 창세기적 혼돈에까지 이른다.



결국 칼 크라우스는 세상의 모든 것을 들으려 했던 그의 자발성과는 달리, 그의 언어 사용은 그에게도, 그의 추종자에게도 어떤 자발성도 허용하지 않았다. 비트켄슈타인과 한나 아렌트가 누누이 강조했듯이, 말과 언어는 경험의 산물이며 모든 사유의 출발점인데 칼 크라우스의 강연과 글들은 그 자체로는 너무나 완벽했기 때문에 어떤 추가적 경험도, 무궁무진한 사유의 자유도 허용되지 않았다. 톱니바퀴처럼 맞아 떨어져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그의 세계는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릴 운명이었다.





칼 크라우스가 살아 있는 동안 이런 치명적 모순을 깨달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완벽한 독재를 꿈꾸는 절대 권력은 피지배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하고자 하는 의지의 일반적인 감퇴현상”을 초래하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복종이 아니면 어떤 권위도 누리지 못하고, 지속되는 어떤 질서도 세우지 못한다. 자기 것이 아닌 것으로 타인을 현혹하고 흥분상태로 만들어 자신의 추종자로 만드는 독재자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 피지배자들은 자신만의 밀실에서도 독재자가 가하는 공포와 폭력에 압도당해 어떤 사유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에 노예나 가축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설사 독재자가 무엇을 이루었다 해도 남의 것을 차용해 끌어 모은 추종자의 에너지ㅡ자발적인 희생으로 포장지만 실제로는 착취당한 것ㅡ로 이룬 업적이기에, 그것은 단지 신기루일 뿐이다.



카네티의 고백성사는 이렇게 종결되는데, 그가 《말의 양심》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모든 창조의 근원인 사유의 자유가 사라지면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영원한 휴면상태인 죽음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의 노예였다가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힘겹게 자유인으로 돌아온 카네티 같은 깨달음이 없으면 ‘모든 창작은 인식의 조급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필자를 현대의 쓰레기로 전락시킨 폭력적인 세계와 혼돈의 시대, 1%의 희망 때문에 99%의 절망을 감내해야하는(조셉 콘래드의 소설에서 인용) 운명을 이해하고자 시작한 모든 지적 여정이 칼 크라우스와 비슷한 필자도 이것이 두려웠다.





한 때 자살만 생각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에 처했던 필자는 모든 지적 여정을 홀로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그 방향과 사유가 올바른지, 원하는 목표에 이를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보니 수많은 분야의 책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다. 한 마디로 내 지적 여정은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잡식성 특징을 띠었다. 어떤 책을 읽다가 인용에 많이 나오는 책들을 구입해 읽었고, 신문에 나오는 신간들 중에서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들을 구입해 읽었다. 그 과정에서 나만의 세계가 구축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나, 누구하고도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기에 그것이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특히 카네티가 칼 크라우스에게 사로잡혔던 것처럼, 필자 역시 위대한 저자들에게 사로잡혀서 한 동안 그들의 세상에서 머물러 있어야 했다. 수많은 석학들의 사유와 성찰은 나에게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도록 만들었고, 지적 여정의 곳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고, 서로 충돌하는 부분에서 극심한 혼란을 주었다. 필자가 몇 번 집필에 도전했다 접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인식의 조급함의 결과였고, 끝내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체 하던 일을 접어야 했다. 나는 석학들의 사유와 성찰을 내것으로 녹여내, 완전히 새로운 창조물을 내놓기에는 준비가 부족했던 것이다.    




P.S. 신경숙의 표절논란을 지켜보면서 더욱 참담했던 것은 그녀를 옹호하는 평론가들의 주장이 너무나 형편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작가들이 제대로 된 창작물을 내놓게 하려면 평론가가 제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평론으로 먹고 살기 힘든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론의 기본도 갖추지 못한다면 한국 문학은 발전할 수 없습니다. 작가와 평론가의 선순환적 구조가 구축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7.22 08:21 신고

    문제가 왜 생겼냐는 원인을 풀어 생각해보면
    답이 나옵니다
    읽은 기억은 없고 기억을 믿을수 없고..
    대단한 모순입니다

    • 늙은도령 2015.07.22 15:59 신고

      표절에 해당하는 부분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글의 끝에 이런 저런 책의 도움을 받았다거나, 인용을 밝히면 됩니다.
      소설과 시는 창조의 작품입니다.
      앞선 위대한 작가들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겠지만, 신경숙의 경우는 그 정도가 지나칩니다.
      그래서 문제인 것입니다.

  2. 耽讀 2015.07.22 13:09 신고

    누구나 표절할 수 있지만, 누구도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생각하면 저 역시 자유롭지 못하는 삶입니다.
    자신을 향한 채찍질, 끝없는 지적 훈련을 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표절할 수밖애 없습니다.

    • 늙은도령 2015.07.22 16:00 신고

      표절은 밝히면 됩니다.
      " "로 표시하면 그대로 옮겼음을 말하고 ' '로 표시하면 수정해서 인용했음을 말합니다.
      얼마든지 표절이 아닌 인용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작가에게 표절은 어떤 이유로도 용서될 수 없는 최악의 범죄다. 제대로 된 사과와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신경숙의 표절논란이 영원히 끝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번 글은 엘리아스 카네티의 《말의 양심》을 읽고 쓴 것이라, 신경숙의 표절논란과 직접적 연관은 없다. 하지만 이 글을 올리게 된 이유는 표절논란에 대한 그녀의 대응이 뻔뻔함을 넘어, 그녀를 옹호하는 평론가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신경숙이 진정한 작가라면, 그것도 대단히 성공한 작가라면 진심어린 사과와 그에 합당한 대가를 피해서는 안 된다.






창작은 언제나 인식의 조급함이다.


                                           ㅡ 헤르만 브로흐, 엘리아스 카네티의 《말의 양심》에서 재인용




198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갑자기 각광을 받기 시작한 엘리아스 카네티는 1960년경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발표한 에세이를 연대순으로 묶어 《말의 양심》을 발간했다. 불가리아에서 태어난 카네티는 스페인계 유대인으로서 근대이성의 수도라 할 만한 빈에서 공부를 했지만, 바로 그 위대한 근대이성이 만들어낸 모든 성취들을 총동원해 유대인을 학살했던 나치의 광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그는 작가로서 평생을 권력과 죽음에 천착했다.



작가는 권력의 횡포에 맞서 시대의 수호자가 돼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일주일 전에 한 무명작가의 기록을 보게 됐다. 그 무명작가의 기록에는 “모든 것은 끝장이 났다. 내가 진정한 작가라면 전쟁을 저지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라고 적혀 있었다. 어쩌면 압도적인 권력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일개 작가에게 너무나 많은 책임을 지운, 그래서 상당히 오만하게 비칠 수도 있는 이 기록에는 또다시 인류를 공멸의 위기로 내모는 제2차 세계대전을 막을 수 없었던 무명작가의 무력함이 절절하게 묻어나온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다 기록하지도 못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니 발발하게 됐으니, 거대한 악의 번성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무명작가의 고뇌란 자기 자신을 향해 돌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느 무명작가의 비통한 기록을 ‘흥분과 초조의 상태’에서 읽은 카네티는 작가라는 사람에 대해 진지한 고민에 빠졌고, 무명작가의 기록이 작가의 길을 선택한 사람으로서 “말로 포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옹호하려는 의지이자 또 어떠한 실패도 자기 스스로가 속죄하려는 의지”임을 깨닫게 됐다. 





작가는 보통사람보다 말과 언어의 연금술에 뛰어난 사람이지만, 그 화려한 연금술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작가의 진정성은 존재할 수 없다는 어느 무명작가의 기록은 “업적과 전문성의 세계, 줄곧 정상만을 향하여 온갖 힘을 경주하는 세계, 정상을 향한 목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부수적이지만 다양하고 본질적인 것을 경멸하고 말소시키는 세계, 자기 파괴의 수단을 증가시킬 뿐 초기의 인간이 획득한 특성을 강한 한 질식시키는, 생산이라는 일반적 목적에 방해요소가 되기 때문에 점점 더 변신을 금지하는 세계(이는 견고한 근대, 무거운 경제 위주의 생산자 사회에 적용된 것이지만)”에서 삶과 죽음을 천착하는 작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카네티는 ‘문학의 종언’이 난무하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보다는 후세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산재해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면서도, “자기 시대에 예속된 맨 밑바닥에 있는 종”이자 ‘끊임없이 짖어야 하는 개’이기도 한 작가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모름지기 작가라면 “그가 자기 시대에 저항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성찰한 카네티가 처음부터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바라기라도 한 사람처럼 다가와 그의 정신세계를 정복했지만, 결국에는 반기를 들고 자신을 방어하도록’ 만든 칼 크라우스의 말의 항연에 빠져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마저 부인하기도 했다.



죽음의 증인이자 시대의 고발자로서 10여 년에 걸친 사유를 묶어낸 《말의 양심》의 세 번째 에세이가 ‘칼 크라우스ㅡ저항의 학교’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이 에세이에서 자신이 세운 세계에 갇혀 그 밖의 모든 세계를 부정하는 말과 언어의 독재자이자 정신의 파괴자였던 칼 크라우스(벤야민과 아도르노도 크라우스를 인용할 정도)의 포로였음을 고백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어떻게든 살아남은 대중에게 남긴 ‘후유증·악덕·살인·탐욕·기만·활자의 오식’까지도 찾아내, 대중의 도마 위로 올려서 현장에서 즉결처분하도록 만드는데 탁월한 재주 지닌 칼 크라우스에게 빠졌다가 힘겹게 빠져나온 자신의 경험을 통해 카네티는 다음과 같은 고백성사에 이른다.






맨 처음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군중의 효과가 갖는 급진성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모든 사람이 사건의 문제점을 정확히 알고 있고 또 이미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반대하고 있었으면서도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것이 고발되고 단죄되기를 그렇게 잘 설명할 수 있었을까? 모든 고발자들은 법조문에서 느낄 수 있는 이상스러울 정도로 견고한 어투로 행해졌으며 또 그 고발들은 결코 중단된다거나 끝나는 일이 없이 마치 몇 년 전부터 시작되어 앞으로도 한결같이 동일한 어조로 계속될 것처럼 들렸다. 그 어투는 법의 영역에 근접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으며 또 모든 것은 이미 건드릴 수 없는 확실한 기존의 법률과 같은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따라서 거기에는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아무도 긁어 상처를 내거나 낙서를 할 수 없는 화강암처럼 단단하고 당연한 것이었다.



카네티는 그렇게 칼 크라우스의 ‘법률’ 속으로 빠져들었고, 스스로 예속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일체의 이단을 인정하지 않는 칼 크라우스의 ‘법률’은 그의 것이 아닌 앞선 사람들ㅡ셰익스피어, 클라우디우스, 괴테, 네스트로이, 오펜바하 등ㅡ의 글이나 말에서 빌려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사용한 것들이었다. 그는 이것들을 연사로서의 특출한 능력으로 버무려 관중을 선동하고 그들의 정서를 파고들어 공공의 적을 만든 다음에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즉결심판을 통해 그의 추종자들을 양산했다.



카네티가 칼 크라우스의 최대 장점으로 들었던 ‘청각적 인용’ㅡ연설 중에 특정 인물의 글이나 말에서 일정 부분만 때내 그들의 의도를 왜곡함으로써 관중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악의적인 인용ㅡ도 길거리나 광장, 술집과 같은 곳에서 들었던 대중의 말들과 모든 종류의 신문에서 읽었던 문장들을 그의 연설 중에 적재적소에 써먹는 차용능력을 말한다. 일반의 작가와 지식인들과는 달리 세상의 모든 얘기를 귀를 기울였고 그것을 하나도 버리지 않았던 칼 크라우스는 이런 ‘청각적 인용’을 통해 ‘도덕의 영역과 문학의 영역을 하나로 결합’함으로써, 그가 연설하는 중에 나왔던 “힘없는 자들에 대한 연민과 다정함, 힘 있는 자들을 추적하는 살인적인 대담성, 정신박약증의 가면을 벗김으로써 사물을 꿰뚫어보려는 욕망, 자신의 주위에 거리감을 만들어주는 오만함”이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다(2부로 이어집니다). 




P.S. 칼 크라우스는 플라톤에 비견될 만큼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철학자이자 선동가였고, 연설가였으며 정치인이었고, 탁월한 작가였고 시인이었습니다. 유럽 석학들의 저작들을 보면 칼 크라우스를 인용하는 것이 많이 나옵니다. 마르크스보다 위대했던 블랑키처럼, 우리나라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20세기 초의 유럽을 뒤흔들었던 인물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7.22 08:17 신고

    표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신경숙건은 표절 맞습니다

    왜 인정을 안 하는지 모르겠더군요

    칼 크라우스..기억하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5.07.22 15:54 신고

      원래 신경숙처럼 유명하고 성공한 사람이 표절을 여러 번 한 것이 발견되면 어느 나라에서건 절필을 선언합니다.
      우리나라는 기본적인 도덕과 윤리가 존재하지 않는 탐욕의 국가가 됐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합니다.
      신경숙이 사과를 하려면 제대로 하고 자신이 벌었던 돈을 가난한 문인을 위해서 쓰던지, 여러 가지 대가를 치를 방법이 있었는데 그녀는 최악의 사과와 휴식만 말했을 뿐입니다.

  2. 왜 그냥 2015.07.22 08:40

    자기 이름만 내걸고 글 못 쓰나.
    신경숙 일 있고 여기저기 이름없던 사람들 이름만 떠올라.
    점잖은 양반들은 말을 아끼더라.

    • 늙은도령 2015.07.22 15:56 신고

      창피해서 말을 아끼는 것입니다.
      저도 우리나라 최고의 소설가 시인들을 여러 분 알고 있습니다.
      연륜이 높으신 그 분들은 너무나 참담해 얘기조차 안하는 것입니다.
      소설이 나오면 계속해서 표절논란이 일어났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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