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외부에 나가 파괴행위를 하는 데 아주 익숙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면 전투보다는 건설에 더 시간을 쏟을 겁니다.


                                                    ㅡ 피터 시아렐리 전 미 육군 기갑부대 사령관, 《쇼크 독트린》에서 재인용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와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보면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돌풍을 일이키는 이유를 알 수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두 편의 영화에서 무너진 유일제국의 뒤틀려진 피해의식과 일그러진 애국심을, 이민자들의 대량 유입에 의해 세상의 주변부로 밀린 백인남성의 입장에서 다루었는데, 트럼프 돌풍의 상당부가 이런 백인들의 정서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스트우드는 <그랜 토리노>에서 소위 아이비리그 출신으로 미국 정계와 재계, 군부, 종교, 허리우드, 언론 등을 독식하고 있는 슈퍼엘리트(라이트 밀스가 정의한 ‘파워엘리트’의 21세기 버전)의 정반대에 서있는 저학력‧중하위층 산업노동자이며, 계속해서 시대의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는 백인남성의 피해의식을 다루었다. 



교묘하게 포장했지만 이들은 청교도적 가치에 따라 가족과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자식들은 모두 떠났고, 얼마 안 되는 자신의 재산만 노리는 등 남은 것이란 미국식 산업자본주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차 한 대(그랜 토리노)와 집 한 채 뿐이다. 제국의 중심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그들은 더 이상 물러날 때가 없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모든 것과 단절한 채 지내면서도, 미국적 정신과 가치의 부활에 한 줌의 희망을 남겨둔다.



뿌리 깊은 인종적 편견은 새로운 이웃으로 자리한 베트남 이주자 가족에 대한 구원의식으로 대체된다. 주인공의 비극적 죽음(종말론적 영웅의 죽음은 희생과 구원이란 명분으로 포장될 때 가장 울림이 크다)은 극도의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은퇴한 백인노동자가 가족도 아닌 인종적 타자에게 희망을 두는 것으로 그려진다. 퇴락한 아메리칸 드림의 21세기 버전이 존재할 수 있다면 이런 식으로라도 되살아나기를 희망한다. 



특히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맞춰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순간, 주인공은 가장 폭력적인 방식을 유도하는 비폭력적 저항의 희생자로 대치된다. 그를 죽인 폭력배들(이들은 <아메리칸 스나이퍼>에서 이라크 스나이퍼로 대체된다)은 가해자이기 전에 미국식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피해자임에도 그것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시함으로써 백인남성 산업노동자의 피해의식을 극대화한다.





이런 극단적인 폭력의 대물림과 비극의 패러독스는 <아메리칸 스나이퍼>을 통해 일그러진 애국심으로 한 단계 올라선다. 한층 젊어진 주인공은 (제국의 허상과 치부를 폭로한 카트니라 피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제국의 종말을 표상했던 9.11사태와 이라크 전쟁으로 ‘back to the future'를 감행한다. 제국의 범죄는 완전히 배제한 채 일방적인 시각으로만 영화를 이끌어가면서도 전통적인 가족애를 강조하는 이율배반적 관점을 유지한다. 



이 때문에 이라크의 젊은 어머니와 어린 아이의 저격도 서슴지 않는 주인공은 뒤틀려진 피해의식이 애국적 저격으로 포장된다. 주인공의 가족애와 대비되는 저격수로써의 잔인함은 애국이라는 절대교리에 의해 추호의 죄의식도 부가하지 않는다. 이스트우드는 9.11테러의 근원에 자리한 ‘정치적 자본주의’와 제국적 탐욕을 위한 대량학살과 일방적인 침략전쟁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도 하지 않은 채 미국의 피해와 분열만 부각시킨다.



존 웨인(미국 건국의 주역을 대표한다)의 변종이자 뒤틀린 대변인을 자처하는 크린트 이스트우드는 미국이란 나라가 백인의 이주와 정착, 건국과 제국에 이르는 전 과정이 절대적 약자(원주민, 흑인노예, 백인 하인, 여성, 이주민 등)에 대한 일방적 폭력이었음에도 이에 대한 반성적 성찰에는 단 한 컷도 할애하지 않는다. 이스트우드에게는 제국의 몰락과 부활만 중요할 뿐,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배제된다. 



<황야의 무법자>와 <더티 해리>의 주인공이었던 이스트우드와 <용서받지 못한 자>와  <밀리언달러 베이비>,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의 감독으로서의 이스트우드는 미국의 역사 전체에서 줄기차게 이어져온 폭력과 정복의 악순환에 갇혀 있을 뿐, 어떤 반성적 고찰도 보여주지 않는다. 폭력에 대한 그의 강박적인 영상의 수사들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만드는 것에만 집중돼 있어서 제국의 범죄와 몰락의 본질에는 천착하지 않는다. 




이스트우드는 두 편의 영화에서 저학력‧중하위층 산업노동자이자 제국의 숨은 주역이었던 두 명의 백인을 통해 뒤틀어진 피해의식과 일그러진 애국심을 종말론적으로 연결시킨다. 두 명의 주인공이 미국적 정신과 가치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는 점에서 제국의 범죄는 면죄부를 받는다. 



사회적 불의에 대한 분노는 정의를 갈구하고 실현하는 출발선이지만, 그것이 분명한 적이 있는 피해의식을 매개로 하면 극단적인 폭력으로 변질되기 일쑤다. 미국의 대표적인 히어로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양 극단을 왔다갔다 하는 ‘배트맨’과 ‘람보’가 가장 대표적인 예로, 이것이 정치적 영상으로 표출될 때 극우적 민족주의(히틀러가 대표적)가 힘을 얻기 마련이다.



뒤틀려진 피해의식과 일그러진 애국심이 교차하는 곳에 폭발 직전의 분노가 자리하는데, 이것을 노골적으로 파고든 극우 정치인이 부동산재벌 트럼프다. 그는 배트맨의 부와 람보의 폭력성을 소유하고 있어 제국의 주역이자 시대의 피해자인 저학력‧중하위층 백인남성과 노동자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끌어낼 수 있다. 



이들은 미국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기존의 후보에게 직설적으로 공격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에 열광한다. 현실정치에서 총으로 대표되는 미국 백인남성의 전통을 사용할 수 없지만, 트럼프가 자신들의 언어를 통해 기존 정치인의 신물나는 거짓말을 박살내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트럼프의 발언은 미국의 전통을 중시하는 백인남성의 총과 같다. 





이들에게 거침없고 폭력적이며 정제되지 않은 트럼프의 발언들은 상위 1%의 슈퍼엘리트와 제국의 적들을 향하기에 즉각적인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극도의 불평등과 구조적 차별이 난무하는 현실의 부정의를 통쾌하게 까발리는 그의 언행은 위선과 거짓으로 점철된 슈퍼엘리트의 정치경제적 담합에 치명적인 카운터펀치처럼 다가온다.



트럼프의 돌풍은 허리우드와 거대언론들이 포장해온 미국의 현실이 얼마나 부조리하고 병들어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레이건을 지도자의 롤모델로 삼고 있는 티파티(미국 독립운동의 불씨를 지폈던 보스턴 차사건에서 따온 이름)가 이들의 카타르시스에 동참하면 트럼프 돌풍은 오바마 다음의 백악관 주인이 극우‧인종차별의자의 몫이 될 수도 있다.  



극우 언론제국을 건설한 루퍼트 머독이 트럼프 돌풍을 폭스TV를 통해 확대재상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극우세력의 입장을 주도하고 있는 3개의 종편이 한국판 트럼프를 만들어 박근혜 다음의 청와대 주인으로 만들지 말라는 법도 없다. 남북한의 극한 대립을 부추긴 것이 3개의 종편이었다는 점에서도 드럼프 돌풍의 한국판이 다음 대선에서 재현될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8.24 08:39 신고

    트럼프의 돌풍이 어디까지,언제까지 이어 질런지
    두고 봐야겠네요
    JTBC 사주의 움직임 주시 해 봐야 합니다

    • 늙은도령 2015.08.24 16:03 신고

      트럼프와 홍석현이 관계가 있나요?
      아니면 손석희를 자를 것이라는 것인가요?

      트럼프의 돌풍은 미국이란 나라의 특수성을 넘어 전 세계로 극우세력에게 퍼져갈 가능성도 있습니다.

  2. 불루이글 2015.08.24 20:45 신고

    정말 예리 하신 분석 감탄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세부적으로 파고들어가는 영화의 짜임새를 별도로 한다면, 저출산‧고령화의 필수적인 결과인 이민과 다문화 문제를 다룬 세 개의 영화가 있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토리노>와 웨인 크래머의 <크로싱 오버>, 장 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 형제의 <로나의 침묵>이 그것입니다.





해리슨 포드가 주연인 <크로싱 오버>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하나로 묶어 풀어내는 관계로, 영화의 짜임새가 허술하고 어지러운 블랙버스터에 가깝습니다. 한 편의 영화에 너무 많은 것을 다루려고 했던 것이 패인이지만, 이민의 나라인 미국에서도 불법이민과 다문화가 그리 녹녹치 않은 문제로 부각했음을 보여줍니다.



로마시대 이후로 사라졌던 노예제도를 부활시킨 유일한 나라가 미국이며, 경제가 나빠지자 노예해방의 이름으로 그들을 더 싸게 부려먹었던(노동유연화의 기원) 나라가 미국임을 고려하면, 불법이민과 다문화가 ‘아메리칸 드림’에 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하자 또다시 그들을 내치고 있는 미국 특유의 DNA가 <크로싱 오버>에는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를 경제적으로만 평가하는 미국 백인의 시각에서 제작된 <크로싱 오버>를 압축하면, “중산층 이상에게는 ‘아메리칸 드림’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저임금 노동자로 써먹던 노동자들이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고, 치러야 할 비용과 대가도 그만큼 커졌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로싱 오버>가 미국 특유의 위선이 스크린 뒤에서 작동하고 있다면, <그랜토리노>는 한 발 더 나아가 미국 백인 노동자가 이민과 다문화의 피해자가 됐다고 선언합니다. 그의 시각에서 보면 돈을 향해서만 달려가는 가벼워진 미국의 변화가 마뜩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미국적 가치의 핵심인 가족도 불편한 존재일 뿐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보수와 수구 사이에 위치한 미국 백인의 시각으로 이민과 다문화 문제를 풀어갑니다. 곳곳에 폭력을 배치해놓고, 그 폭력에 맞서야 함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랜토리노>를 통해 자신의 본질이 <용서받지 못한 자>보다는 <더티 해리>에 가깝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영화에는 이민과 다문화가 왜 사회적 문제로 부각됐는지 전혀 다루지 않은 채, 은퇴한 미국 백인 노동자의 시각에서만 영화를 이끌어갑니다. 어린 베트남 이민자 남매와 나이와 인종을 뛰어넘는 우정은 이민과 다문화 문제를 극대화하기 위한 드라마적 장치로 볼 수 있습니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처럼.





파시즘적 속도로 달려가는 미국의 변화는 은퇴한 백인 노동자에게 야만적 폭력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탐욕에 눈이 먼 파시즘적 속도에 맞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정의와 노동의 가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희생적이어서 영웅적으로 그려지는 자신만의 구원의식이자 현실도피적 결단입니다.   



하지만 한 쪽의 시각만 반영된 정의와 가치는 부분적인 정의에 불과할 뿐임에도, 반폭력적 메시지를 언제나 극단적인 폭력을 통해서만 그려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강박관념은 은퇴한 백인 노동자가 미래의 화해와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비극적 희생밖에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는 제조업을 포기하고 아이디어와 금융산업 위주로 돌아선 시대의 피해자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이민자 폭력조직을 두려워해야 하는 사회적 약자는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극적 결말이 전달할 수 있는 미학적 위대함에 크게 감명받을 터이지만, 바로 그 마지막 장면이 그 이상의 폭력을 담아낼 수 없다는 반동적인 메시지 때문에 가장 폭력적입니다. 



죽음을 미화하는 것이 폭력을 유발하는 극단적 선택이라면 거기에는 진실된 의미의 정의도, 진정한 화해도, 반성적 구원도 없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려낸 반폭력적 저항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폭력에 맞서는 비폭력적 저항은 일체의 폭력을 부정하는 것에서 양화가 악화를 해체하는 것입니다.  





‘그랜토리노’는 미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1972년형 포드사 중형차로, 미국 백인 노동자의 자존심이자, 갈수록 퇴색하고 있는 미국 특유의 ‘빌어먹을’ 애국심을 상징합니다. 은퇴한 미국 백인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랜토리노>는 잘 만든 영화이며, 이민과 다문화의 문제점을 제대로 파고든 수작입니다.



하지만 은퇴한 백인 노동자를 들어내면 <그랜토리노>는 반유대주의를 조장하는데 앞장 선 나치의 선동적인 영화를 떠올립니다. 세계를 지배하거나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최상위 0.1%를 다룬 《슈퍼클래스》에서도 미국의 슈퍼엘리트(특히 부시 부자의 행정부에서 일했던 고위관료들)와 어울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토리노>는 보수적인 미국 백인의 이데올로기를 가감없이 드러낸 폭력적 영화입니다. 동시에 미국적 보수화가 일반화된 이명박근혜 정부의 7년 동안, 우리 사회가 이민과 다문화를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시각이 얼마나 보수화됐는지 간접적으로 말해줍니다. 백인과의 결혼은 국제결혼이고 중국 동포나 동남아인과 결혼하면 다문화 결혼이 되는 것부터 보수적입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는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모든 것이 나쁠 때는 어떤 것도 문제가 된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준 <크로싱 오버>와 <그랜토리노>에 비하면, <로나의 침묵>은 유럽에서도 심각한 국가적 사안으로 떠오른 이민(불법이민)과 다문화 문제를 절대적 약자인 이민자의 입장에서 그려낸 명작입니다.



‘모든 것에 값이 매겨져 있는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과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영화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로나의 침묵>은 불법이민과 다문화 문제가 부정적 세계화의 결과이자, 일단 거기에 발을 들여놓으면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는 한 탈출할 방법이 없음을 영상미학으로 보여줍니다. 소비사회는 돈이 없고, 소속이 없지만 삶의 매 순간이 폭력에 노출되는 것과 같습니다.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파멸시킬 때까지 탐욕의 질주를 멈추지 않을 ‘자기조정 시장’의 폭력적 허구성을 해부했다면, 다르덴 형제는 <로나의 침묵>을 통해 ‘자기조정 시장’의 필연적 결과인 소비사회의 파국적 종말을 그려냈습니다.





허리우드 키드였던 필자는 허리우드 영화의 포로였고, 지금도 비슷한 상태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민과 다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에 관한 한 <그랜토리노>와 <크로싱 오버>를 <로나의 침묵>과 비교해보면 문화적으로도 미국에 종속된 대한민국의 현실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이르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샤를리 에브도가 당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갈수록 늘어나는) 테러도 문제의 근원을 파고들어가다 보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이슬람 원리주의가 아닌, 프랑스의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불법이민과 다문화 문제가 탐욕의 소비사회와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고 있는 정치경제적 혼란과 인간성 파괴의 냉혹한 현실, 표현의 자유를 악용한 자본주의적 탐욕입니다.



앞의 두 영화를 본 분이라면 다르덴 형제의 철학이 녹아있는 <로나의 침묵>도 보기를 바랍니다. 그 후에 시간적 여유가 되면 지그문트 바우만이 현대인에게 말을 건네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의 ‘39번째 편지 : 로나, 침묵의 소리’를 꼭 읽어보면 현대의 소비사회와 부정적 세계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저녁노을* 2015.01.27 06:48 신고

    하나도 보질않은 영화네요.
    함께 살아가는 우리이길 바라는 맘입니다.

    잘 보고가요

    • 늙은도령 2015.01.27 17:10 신고

      저도 우연히 보게 된 영화들입니다.
      사회적 문제를 다룬 영화를 원래부터 좋아해서...

      물론 다른 영화들도 좋아합니다.
      시간이 없을 뿐이지요.

  2. 공수래공수거 2015.01.27 08:31 신고

    저도 영화에 관심을 가진지 얼마 되지 않아
    생소한 영화들입니다

    다운 로드가 가능한지 한번 찾아 보겟습니다

    • 늙은도령 2015.01.27 17:10 신고

      로드가 다 가능한 영화입니다.
      저는 영화팬으로서의 세월이 40년이라....

  3. 꼬장닷컴 2015.01.27 08:40 신고

    본문과 관계없는 댓글 죄송합니다만..
    크린트 이스트우드 정말 오랜만인데 세월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아무튼 오늘 권하신 영화/책 기억해 두었다가 기회가 되면 봐야 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5.01.27 17:12 신고

      네, 합리적 보수로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정말 멋있었는데, 최근에 들어와서 합리적을 떼려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너무 보수적 관점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4. 耽讀 2015.01.27 10:02 신고

    다문화 시대에 들어선 우리들이 새겨야 할 영화 같습니다. 우리 역시 백인만 외국인으로 생각하고 동남아와 흑인은 외국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지극히 개인 판단입니다.

    • 늙은도령 2015.01.27 17:13 신고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종적 차별은 같은 피부일 때 더 강한데, 세계화시대에서 가난한 나라의 이민자면 그것이 더욱 심해집니다.

  5. 달빛천사7 2015.01.27 10:39 신고

    아직 보지는 않았는데 이번주에 보죵 좋은하루되세염.

  6. 덕산 2015.01.27 12:31

    그랜토리노라는 영화를 봤던 기억으로는 감동적인 면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뭔지모를 불편함이 있었던것이 기억이 나네요.
    우선 내 주위에 있는 외국인과 외국인 노동자의 위치를 한번 둘러볼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 늙은도령 2015.01.27 17:14 신고

      네, 인간을 인간으로 볼 때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집니다.
      자본주의는 계급을 없앴지만 너무나 많은 계층을 만들어 차별을 세분화했습니다.



한국판 '포레스트 검프’라 할 수 있는 ‘국제시장’을 두고 벌어지는 각종 논란을 보고 있자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중병에 걸렸는지 알 수 있습니다. ‘포레스토 검프’는 빈곤의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인 미국에서만 가능한 영화라면 ‘국제시장’은 일제가 남겨놓은 분단의 고통을 안고 있는 한국에서만 가능한 영화입니다.





기술 발전에 따라 전체주의화하는 성향이 있는 국가와 경제성장이 유일한 가치인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대단히 성공한 나라입니다. 일제 강점기를 건너 띈 채 흥남철수에서 시작되는 ‘국제시장’은 지나치게 과장된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경제규모 14위에 오른 경제성장의 역사를 다뤘습니다.



언제나 뛰어나 연기를 보여주는 황정민과 오달수가 이끌어가는 ‘국제시장’이 산업화의 숨겨진ㅡ또는 정치적으로 동원되거나 그 이유 때문에 지나치게 축소된 이름 없는 주역들에게 바치는 헌사임은 그래서 당연합니다. 오로지 빈곤에서 벗어나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그분들에게 저 또한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경의를 표합니다.



그들의 삶을 수십 년 간 지켜본 필자이기에, 그들의 헌신과 희생이 한국을 경제규모 14위의 선진국으로 만든 진정한 동력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극소수의 승자나 강자의 기록이 아닌 절대다수의 패자와 약자의 기록이어야 한다면, 한국 산업화는 그들의 피와 땀, 희생의 기록입니다.





헌데 말입니다, 지금의 한국을 만든 그들의 대부분이 이제는 벗어날 수 없는 빈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 빈곤이 그들이 그렇게 지키려 했던 자식과 손주들에게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노인빈곤과 복지는 남아프리카공화국보다 못하다는 통계가 나왔고, 자식들은 낀 세대로 외면받고 있으며, 손주들은 88만원 세대나 삼포세대라고 불립니다.



‘이 고생을 우리 후손이 아니고 우리가 해서 다행’이라는 ‘국제시장’의 주역들 중 과연 몇 %가 그들의 피와 땀, 희생에 걸 맞는 대가를 받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삶을 누리고 있을까요? 국가는 세계 최고의 빈곤국ㅡ전쟁이 끝난 해의 통계니 그럴 수밖에 없다ㅡ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음했다지만, 그들과 그들의 가족과 후손은 그에 합당한 삶의 질을 누리고 있을까요?





‘국제시장’이 산업화 주역들에 대한 헌사로서 충분한 영상미를 담아냈지만, 여전히 고달프고 힘겨운 그들의 현실은 담아내지 않았습니다. 윤제균 감독이 오로지 그들에 대한 헌사만 얘기하고 싶었다면, 그는 대단히 성공한 결과물을 내놓았습니다, 한국을 분배가 아닌 성장의 관점에서만 보면 대단히 성공한 나라인 것처럼.



'포레스토 검프'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 '람보'와 '록키' 등을 영화적 재미로만 볼 수 없었던 것은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을 영화적 재미로만 볼 수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흥남철수부터 낙동강 넘어까지 이어진 피난행렬 때 미국 B-29의 무차별 폭격에 제 모친의 친척어른들이 돌아가신 것처럼, 현대사의 질곡을 넘기지 못한 분들도 많고 노력의 대가를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분들은 더더욱 많기 때문입니다. 

      



P.S. 영화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과포장된 ‘해운대’와 비교하면 ‘국제시장’이 낫지만, 윤제균 감독이 한국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평가는 동의하기 힘드네요. 윤 감독이 보수의 아이콘이 될 가능성은 상당히 높지만, 아직까지는 영화로 보여주는 철학적 깊이와 인간에 대한 이해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비해 너무 떨어집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참교육 2014.12.30 05:08

    성장과 분배... OECD 몇법째니 국민소득 얼마니 한느 수치 노름... 민초들에게는 그림 속에나 있습니다.
    분배없는 성장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림의 떡입니다.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나 작품들이 좀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4.12.30 05:50 신고

      네, 그런 영화가 잘 만들어진 형태로 나왔으면 합니다.
      문제는 제작비와 상영관 확보인데 박근혜 정부 4년차를 넘어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국제시장과 정반대의 시각에서 현대사를 다루고 싶은 영화사가 있다면 제가 시나리오도 써줄 생각이 있습니다.
      영화광이었고 지금도 영화광인 저로서는 정말 녹여내고 싶은 한국 현대사의 내용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4.12.30 08:27 신고

    국제 시장 영화를 가지고 보수층에서 이용하는듯 합니다
    제가 보는 메시지는 "아버지"였는데...

    선글라스를 끼고 보면 당연히 원래의 색깔을 차단합니다
    만일 윤제균 감독이 그러한 의도였다면 영화의 많은 부분을
    다르게 표현할수도 있엇을겁니다

    보수들이 변호인에 대항하고픈 마음으로 이 영화를 이용한다는
    느낌입니다
    거기에 진보들도 덩달아 춤추고 있습니다

    • 늙은도령 2014.12.30 11:32 신고

      영화가 잘못됐다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는 잘 만들었고 산업화 주역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그분들이 가난하고 자식과 손주들이 빈곤의 대물림에 처한 상황을 말한 것이지요.
      우리는 그런 부분을 강조해 노인빈곤과 청년실업을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 대한 찬사가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면 지금보다 수천 배 더 해야지요.
      헌데 이 영화는 그분들에 대한 헌사로서는 최고이지만, 그것으로 또 다른 현실에 복종하도록 만듭니다, 그분들을.
      전 그것이 답답할 것입니다.

  3. 바람 언덕 2014.12.30 12:09 신고

    요즘 논란이 많네요, 이 영화.
    보질 않아서 글로 옮기진 않았습니다만, 대충 보니.
    어떤 내용인지 감이 잡히더군요.
    .
    .
    .
    올해도 하루 밖에는 안 남았네요.
    마무리 잘 하시고, 멋진 새해 맞이하시길...

    • 늙은도령 2014.12.30 12:11 신고

      영화는 좋은 영화입니다.
      헌데 영화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그들에게 바치는 헌사라면 그것으로 충분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헌사가 갈등을 더 부추기는 원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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