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의 정규직 과보호론은 한마디로 말해 자본과 재계(오너와 경영진 및 대주주)의 입장만 반영한 편향된 주장입니다. 석유를 대체할 만한 먹거리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자본(기업)이 이익을 높일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 정규직의 인건비(정확히는 정규직의 권리고 최후에는 노동의 권리가 될 것이다)를 최소화하는 것밖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본(기업)의 역사는 최대 이익을 거두기 위해 투자되는 비용을 최소화하는 역사였습니다. 특히 지난 40년 동안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자본(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 밖의 모든 것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고, 최후의 장벽으로 남은 것이 정년이 보장되는 정규직입니다.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바늘공장’의 예를 들며 분업이 불러오는 생산의 확대가 자본(기업)의 이익을 최대화한다는 것이 밝혀진 이래, 포드 자동차의 자동화시스템으로 발전하면서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졌습니다. 자본(기업)의 이익은 비례해서 늘었지만 노동자의 임금은 줄어들었습니다.



기술 발달에 따른 자동화는 노동의 질을 숙련노동에서 비숙련노동으로 만들었습니다. 노동의 질은 갈수록 떨어졌고, 이는 임금 하락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한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었던 남성노동자가 줄어들었고, 저임금 여성‧청소년노동자가 노동현장에 투입됐습니다.





고든 레어드가 《가격파괴의 저주》에서 자세히 다루었듯, 중국처럼 세계의 공장을 자처하는 저소득 국가들의 등장은 자본(기업)에게 저임금노동자를 무한대로 공급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외국노동자의 수입도 동일한 효과를 발휘함에 따라 임금하락과 높은 실업률은 일상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자본의 폭주를 견제하며 노동자의 권익을 지켰던 노조의 힘은 급속도로 나빠졌습니다. 네그리가 《혁명의 만회》에서 자세히 다루었듯이 신자유주의 세력들에 의해 노조는 더 이상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할 수 없을 만큼 무력화됐고, 대형사업장 노조들은 기득권의 일부가 됐습니다.



최근에는 인간이 지닌 지적‧경험적 오류를 줄여주거나 대체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의 발전과 이를 장착한 디지털컴퓨터가 일반화되면서 화이트칼라(전문직 포함)의 지식노동까지 위협받고 일자리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기술의 발달이 새로운 일자리 창출로 연결되지 않는 것이 고착화됐습니다.





데이터의 저장용량을 무한대로 늘리고 있는 반도체의 발달로 빅데이터 구축이 가능해졌고, 이를 활용하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의 발달로 수십 년의 경험으로 구축된 노하우까지 대체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최고급 지식노동자까지 컴퓨터의 조작자나 보조자의 역할로 격하됐습니다.



이렇게 기업 활동의 대부분이 자동화됨에 따라 제레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이 현실화되기에 이르렀고, 비정규직이 느는 만큼 정규직의 임금도 줄어들었습니다. 컴퓨터 클라우딩 시스템과 사물인터넷의 현실화는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지 않기 때문에 ‘노동의 종말’을 더욱 부추길 것으로 보입니다.



니콜라스 카가 《유리감옥》에서 “GE와 애플 같은 기업들이 미국으로 일부 제조업을 다시 옮기고 있다는 소식조차 무작정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이기 힘들다. 제조업이 되돌아오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인간 없이도 대부분의 제조업 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은 ‘고용없는 성장’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말해줍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액체근대》에서 자세히 다루었듯이 자본(기업)은 이런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노트북과 스마트폰, 테블릿PC, 자가용비행기, 핵심인력 등만 있으면 노동에 구애받지 않고 세계화의 과실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노동이 필요했던 시절의 자본(기업)은 전설의 영역으로 사라졌습니다.



무한경쟁에 승자독식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의 폭주는 비정규‧파견‧임시직에 아웃소싱까지 활성화시키는데 정치권력을 포획하는데 성공했고, 이제 자본(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남은 것은 정년과 그에 따른 임금상승이 보장되는 정규직의 자유로운 해고와 임금뿐입니다(2편에서는 반론, 3편에서는 대안을 다루겠습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4.04 08:26 신고

    정책입안자나 결정권자가 한번이라도 을의 입장,비정규직 입장에서
    생각하고 정책을 세운다면 분명 달라질텐데....
    참 안타깝습니다

  2. 뉴론♥ 2015.04.04 08:36 신고

    전 비정규직도 좋아요 취직만 할수 있다면요

  3. 참교육 2015.04.04 12:42 신고

    자본주의는 영원한까?
    이 담론은 끝이 없습니다.
    결국 자본의 영원한 승자일 수밖에 없다는 채념이 약자를 더더욱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4. 공유의 플랫폼 2015.04.05 00:01 신고

    무엇이 정답일수는 없지만 적어도 국가라는 것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기회가 균등하게 돌아가야 된다는 담론에는 동의해야 될것 같아요.

  5. Aa 2017.11.09 10:40

    일반적인 헬조센의 기업의 인력중 90%가 해고도 못하는 잉여인력인걸 모르나? 미국기업들은 정규직 해고시 해고사유도 대야하는 의무가 없는 반면, 헬조센에선 고용한 후면 게으르고 무능한게 입증이 되도 해고를 못하는게 현실. 쓸모없는 인력을 해고하지 못하는 헬조센 기업들은 그만큼 경쟁성이나 변화에 대한 대처능력이 떨어지고, 회사 전체의 임금도 하향 평준화되지.



발터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인용한 어느 생물학자의 말에 따르면 ‘지구의 역사에서 인류가 만물의 척도로 존재했던 시간을 24시간으로 환산하면 마지막의 2초에 불과하며, 문명화 기간은 그 마지막 1초의 5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한다. 인류는 그 찰나 같은 시간 동안 진보의 이름으로 고삐 풀린 과학기술과 모든 분야의 전문 지식을 총동원해 지구상의 모든 자원과 노동을 착취해 지구를 공멸의 위기로 내몰았다.





생물다양성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지구에 존재했던 종들의 90% 이상이 그 마지막 2초 동안에 멸종됐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기상이변을 속출시키고 있는 지구온난화도 그 임계점인 2℃ 상승에 근접해가고 있다(하랄트 벨처의 《기후전쟁》을 보라). 예측불가능해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전 지구적 재앙은 국가의 부와 지역적 특성에 따라 차별화되고 순차적으로 일어날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도 인류가 대오각성 하는 것을 근거로 한 것에 불과하다. 최근에는 이산화탄소가 불러올 지구온난화의 사회적 비용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5배 이상 크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의 대가》에서 대륙과 국가, 사회, 계급, 개인에 이르기까지 사상 최고의 빈부격차가 벌어진 이유를 설명한 후에 인류에게 남은 시간이 몇 년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심각한 전망을 내놓기까지 했다. 자크 아탈리는 10년 전에 이런 현상을 예상이라도 했듯이 《인간적인 길》을 내놓았고, 많은 지도자들이 ‘제3의 길’도 가보았으나 상황은 그들이 생각하고 바랐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보수 경제학자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을 통해 부의 불평등이 어떻게 심화됐는지 방대한 자료와 지독히 간단한 공식으로 입증했다. 



토마스 만 이래로 끈질기게 인류를 유혹하고 현재의 문제에 한 발 물러서게 만드는, 우리 모두의 유토피아로 가는 길은 언제나 자본과 권력이 선취해 자신의 신무기로 만들기 때문에 파편화된 개인에게는 나쁜 결과로 귀결되기 일쑤였다. 유토피아가 보여주는 달콤함이란 미래에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거야라는 현실도피의 한 형태로 나타나거나 억압과 착취에 순응하도록 만든다(특히 네그리의 《혁명의 만회》와 나오미 클라인의 《슈퍼브랜드의 불편한 진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래리 바텔스의 《불평등 민주주의》를 보라).





대체 인류 역사의 마지막 2초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정확히 말하면 그 2초의 만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최근의 250년 동안, 더 정확히 말하면 전체주의적 자본주의의 정수인 부정적 세계화(신자유주의)의 30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었기에 인류의 문명은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성장과 개발이 꾸준히 이루어진 인류 진보의 과정에서 대체 무슨 일들이 있어 인류는 비대칭적 종말을 걱정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을까?



영원한 진보를 추동하는 과학과 기술-경제적 관점이 어떻게 테크노폴리화 되면서 세상을 파국의 상황으로 내몰고 있는지 살펴볼 때 우리는 그 이유의 일단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직선적인 성장만 인정하는 지배와 착취의 사회철학이자 사회공학인 계몽의 변증법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소외가 급진적 자살관이나 자아의 완전한 고립과 타자에 대한 적대적 배척으로 이어지는지 확인해봐야 한다.



개발은 왜 진행될수록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높아지는지, 개발의 결과가 지구적 차원의 퇴행으로 이어지는지, 이런 부정적 사례들이 가시적인 형태로 널려 있는데 왜 시민이라는 계몽된 인간들은 동물적 쾌락과 철저한 순응에 빠져드는지, 그런 악순환의 고리와 구조에 대해서도 살펴봐야 한다. 분명 세상은 발전해왔다고 하는데 인간 생존의 조건인 삶의 궁핍함과 초라함은 자기 파괴적 단계에 이르렀으니, 그 모순된 현실(개발의 역설)에 대해 근본적인 부분까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필요하다면 인류의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살펴볼 필요도 있었다. 그리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인류가 저지른 일은 인류가 아니면 풀어낼 수 있는 존재가 없고(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보라), 과거에 대한 반성적 고찰 없이 매번 처음일 수밖에 없는 현재를 미래에 투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성장과 개발은 파괴적 결과로 이어지며, 존재하는 모든 것이 파멸에 이를 때까지 탐욕의 질주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가, 지구를 이토록 망쳐놓은 인류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자연의 대반격 앞에서 빈곤과 결핍의 중하위층부터ㅡ물론 상류층도 피해를 면할 수 없지만, 최소화할 수는 있다ㅡ회복 불가능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근원적인 모순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파멸을 피하려면 과학과 기술-경제적 발전과 관료제 등에 의해서 진행되는 진보의 신화인 근대이성의 기원부터 시작해 최근의 30년 동안에 벌어진 일들을 해체적이고 구조적인 시각에서 살펴봐야 한다. 동시에 국가의 전체화하는 경향과 개인화하는 경향을 살펴봐야 하고, 푸코로 대표되는 사건 위주의 단절과 분절, 충돌과 상호연관 및 권력 작동으로서의 통치술의 변천과 같은 미시적 접근, 스티글리츠가 《불평등의 대가》와 피케티 교수가 《21세기 자본》에서 다룬 것처럼 거시적인 접근도 해야 한다. 


 

특히 독일에서 시작돼 영국과 미국에서 변형된 시장 중심의 자유민주주의를 살펴봐야 하고, 타락한 방송과 신문을 대체하고 있는 포탈의 역할에 대해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한다. 미국이라는 방패막이를 이용해 거대금융집단과 초국적기업들, 미국의 NSA와 CIA처럼 각국의 국가정보기관들이 인류를 감시하고 지배적 이익을 유지하려는 빅데이터 구축과 그것의 군사와 외교와 통상 및·경제적 활용에 대해 고민을 하고, 그에 따른 프라이버스 침해 문제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이런 일들은 사회적 차원을 넘어 전 세계적 차원의 협력이 필요하지만, 최소한 고발이라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감시사회의 등장은 현재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되돌릴 수 없는 수준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이는 구글과 똑같은 꿈을 꿨던 필자가 장담할 수 있다). 개인의 행동이 예측되기 시작하면 감시사회는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의 내밀한 삶 깊숙이 파고들어 전제적 행태를 보일 수 있고, 최소한 경제적 필요에 의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거의 모든 악의 근원인 미국의 연방정부(연방준비제도를 포함한)를 장악하고 있는 전 지구적 통치엘리트와 UN 및 각종 국제기구와 국제사법제도, 월가와 런던의 금융 세력들, 이들의 그림자로 전체를 조율하고 있는 극소수의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들과 모든 것을 쇼로 만들어버리는 대중매체와 영상산업, 권력과 자본의 시녀와 나팔수 역할에 충실한 언론(특히 방송)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자아와 전체를 통일시켜ㅡ이것은 책략이라는 술수가 내재해 있는 이성의 특성상 불가능한 일이고, 후대에 의해 위대한 칸트의 관념론이 비판받은 이유다ㅡ이성의 지배를 공고히 한 칸트의 관념론을 넘어, 주체와 객체에 대한 치열한 공방 속에서 더 이상 생각을 밀고나갈 수 없어서, 계몽에 의해 완성된 시민인 자아(주체와의 차이에서 나오는 특수성의 담지자)에 대해서 전체로서의 사회(또는 체제로서의 객체로 보편성과 영원성의 담지자)의 우위를 선언한 헤겔의 변증법적 낙관론, 오직 노동자의 구원에만 집중해 자본에게 세계를 석권하는 길을 열어준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의 극단의 모순을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탄생한 이상, 자본주의와 운명을 달리 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주의 영향력은 특히 학문적으로, 여전히 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치밀한 분석력과 통찰력은 현대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대 사회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는 필수다.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해명과 자본주의 세계화와 계층화에 대한 정확한 비판은 탁월하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전 지구로 확장되면서 부자와 빈자, 부국과 빈국의 차이는 더욱 커지고 있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인간소외, 물신숭배, 생산과 소비의 과잉, 공황의 문제 등도 지금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이를 해결하려면 싫든 좋든 마르크스를 탐구하고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사회과학자라면 마르크스에 신세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듯, 마르크스에게는 독보적인 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2005년, BBC방송은 전문가들에게 설문조사를 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사상가를 뽑았다. 단연 1위는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주의가 비록 현실에서 다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자본주의를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비판했고 여러 대안을 세울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유주의 정치철학자인 이사야 벌린은 "일부 결론상의 오류가 있었지만 마르크스 사상이 갖는 중요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면서 "그의 사상은 역사, 사회를 바라볼 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인간의 인식을 높여주며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고 강조했다.(위키백과에서 인용)



세계사적 사건인 스탈린의 굴락과 히틀러의 아우슈비츠, 일본에 떨어진 두 발의 원자탄과 홀로코스트의 발전된 재현인 베트남전쟁, 소비지상주의와 ‘테러와의 전쟁’을 증거를 조작(한국의 국정원처럼 미과 영국의 정보기관이 조작하고 양국의 최고지도자였던 부시와 블레어가 요구했던)해서 제멋대로 선언한 9.11사태에 대한 부시 정부의 일방주의, 폭력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이자 우월한 인종으로서의 백인의 천국을 꿈꾸는 신보수주의자에 대해서도 살펴봐야 한다.



또한 미국의 악마성을 가장 잘 드러낸 2008년 신용붕괴와 대마불사를 확인한 천문학적인 보조금 지급, 무기력한 유럽을 상징하는 장기적인 경제위기, 독일의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제3제국을 떠올리게 만드는 뒤집혀진 유럽, 역사의 비극은 더 큰 단위로 되풀이될 뿐이라는 3.11 일본 제1원전 폭발, 군국주의적 재무장을 통해 1등 국가로 재도약하려는 아베의 광기어린 부활, 부정적 세계화에 대항할 수 있는 대항세력의 힘이 너무나 미약함을 입증한 시애틀 세계화포럼 반대시위와 2012년의 ‘성난 사람들’의 ‘점령하라 운동’의 초라한 결말 등에 내재돼 있는 인류사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부정적 세계화에 적극적인 나라일수록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과 그들의 그물망이 지구 전체를 덮을 정도로 커졌고 촘촘해졌으며 가벼워졌고 그래서 그만큼 유연해졌기 때문에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곳곳에서 지구온난화가 심해짐에 따라 더욱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기상이변과 사막화, 물 부족 사태와 바다 산성화, 전 방위적인 생태계파괴 등이 파시즘적 속도로 이루어낸 무차별적인 개발과 성장의 역설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한다. 성장하고 개발할수록 지구는 파괴되고 불평등이 늘어난다면 그래야 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봉포스트 2015.01.19 20:48 신고

    아..유익하면서도 재밌네요.
    잘 읽다 갑니다!

  2. 참교육 2015.01.19 21:20

    자멸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자연파괴에 대한 보복이 곧 밀어 닥칠 것입니다.
    자업자득입니다.

    • 늙은도령 2015.01.19 22:15 신고

      자업자득이지만, 상위 1%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구온난화의 피해가 극단화되지 않는 한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는 1%에서 대부분의 생존자가 나올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음에도......

  3. base 2015.01.20 01:55

    안녕하세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도령께서 영화평을 하신 어느 시점에 제가 '설국열차'를 언급했더니 마르크스로 답변하시더군요. 그런데 요즘 점점 더 그 영화가 생각난는지 모르겠습니다. 건강하세요 그래야 훌륭한 글로 애국하시고 저 같은 사람이 살 만한 가치와 의미와 희망을 가지거든요. 오늘 한 잔 했습니다.

    • 늙은도령 2015.01.20 02:50 신고

      설국열차의 엔진은 자본주의를 말합니다.
      신성한 엔진이란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말하고요.
      맨 뒷 칸에서 앞 칸으로 가는 과정은 신분상승의 사다리가 사라진 상태에서 계층의 피라미드를 거슬러 올라가는 혁명을 말합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가 포함돼 있는데 그 핵심에는 마르크스가 있습니다.
      아울러 프랑스혁명의 정신이 내재돼 있습니다.

      님의 댓글을 보니 설국열차에 대한 감사평을 길게 써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되는 대로 한 번 시도해볼 가치가 있어 보이네요.

  4. 공수래공수거 2015.01.20 08:47 신고

    제 수준을 뛰어 넘는 글이십니다

    인간은 자연을 이길수 없고 이기려 하는 방법을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 라고 저 나름대로 이해합니다^^

    • 늙은도령 2015.01.20 13:42 신고

      네, 공존이 중요합니다.
      공생과 함께요.
      과학기술의 발달이 미진할 때는 크게 일을 벌이면 안 되는 것이지요.
      이 글은 출판을 목적으로 쓰는 글이기 때문에 조금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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