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국 사회의 많은 부분은 예측 가능한 경력 향상, 임금의 꾸준한 증가로 그 특징이 규정되는 안정된 고용 관계 위에 토대를 두고 세워졌다. 내 집을 갖고, 자녀를 대학에 보내며, 공동체와의 유대 관계를 통해서 안정감을 찾는 등, 직장 밖에서의 삶의 질은 고용에 대한 위협과 불확실성을 제거함으로써 향상되어왔던 것이다.


                                                             ㅡ 카펠리, 로버트 퍼트남의 《나 홀로 볼링》에서 재인용




지난 일요일에 방송된 '김제동의 톡투유'에서,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는 지인이의 부모와 방청객으로 참여한 한 어머님의 얘기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안타까움과 절망, 희망과 힐링의 연속이었다. 필자는 지인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얘기들을 (상당히 재미없지만) 사회적 자본이란 관점에서 다루어보고자 한다. 지인이의 현재를 응원하는 마음과 미래를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사회적 자본이 탄탄할수록 잘 돌아가는 민주주의가 탐욕의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제어할 수 있었을 때 평생고용(이 글에서 말하는 평생고용이란 한 직장에서의 근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과 국민복지, 사회안전망이라는 공생의 제도가 자리를 잡았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 추구였지만, 직원들은 물론 가족과 사회 전체의 이익도 고려하며 공생의 삶이 가능했다. 이 때문에 국민이 존엄하고 탈락자를 방치하지 않고, 시민이면 누구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합의하고 조정해 실제적 결과를 이끌어내는 정치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평생고용(과 평생교육)에 기반했기 때문에 사회적 자본을 형성하는 다양한 공동체 활동 참여와 자원봉사나 헌혈처럼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개인은 안정된 직장과 수입으로 인해 평생에 걸친 삶의 계획을 세울 수 있었고, 그런 안정감에서 나오는 사회적 신뢰는 다양한 협력과 평화로운 공존을 이룰 수 있었다.



노동(감정노동과 가사노동 같은 비물질노동 포함)의 가치와 연륜이 인정되는 이런 사회는 일정 수준 이상의 사회경제적 분배가 이루어져 민주주의를 확장시키는 정치적 자유가 더욱 공고해졌고, 법 앞의 평등이나 정의실현이라는 열린사회의 실현이 가능했다. 국가 차원의 복지가 미흡해도 사회경제적 약자를 위한 지역 공동체와 사회가 작동할 수 있었다.





이런 세상을 전복해버린 것이 모든 영역에서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이 작동하도록 체제를 완전히 바꿔버린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완전히 압도하던 시절인 19세기로 돌아가자는 것이 신자유주의이니 평생고용을 기반으로 구축된 세계를 파괴하는데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단 40년 만에 평생고용에 기반한 안정적인 세상은, 생산 증대와 이익 독점만 신경 썼을 뿐, 평생고용이나 누진적 조세제도처럼 부의 재분배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됐던 무한경쟁의 19세기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부와 권력의 불평등이 심해졌고, 사회적 자본은 적은 위험도 막아줄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다.



‘경제가 곧 대기업의 이익’을 말하는 시대가 도래했고, 민주주의는 독점 자본과 권력이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위에서 찍어 누를 수 있는 국가공권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변질됐다. 벤야민의 말처럼 ‘야만적이지 않은 문명은 없다’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한 억압과 착취의 시대가 고착화됐다. 지인이 같은 장애인들은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고 형편없는 감호시설로 보내졌다(미셀 푸코의 《광기의 시대》에 자세히 나와있다).  





시장자유주의 우파라는 공통점으로 이어진 이명박근혜 정부가 평생고용에 기반한 사회체제를 집중공략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 결과 고용의 불안정과 부의 불평등, 위험의 사회화가 일상화됐고, 용산참사와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자살, 세월호 참사, 경주리조트 붕괴, 메르스 대란처럼 막을 수 있었던 비극들이 계속해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쟁이 클수록 효율성과 생산성이 높아진다고 배웠고,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승자독식을 이룩한 개별기업 차원에서만 진실인 신자유주의 신화를 무너뜨리지 않는 한 제2, 제3의 용산참사와 세월호 참사, 메르스 대란 등은 더욱 빈번하게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배제되고 격리되고 위험에 노출될 확률이 높은 지인이와 부모에게는 하루하루가 두려움과 절망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소비만 하고 살 수 있도록 진화하지 않았고, 오늘만 사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사회는 불안정해지고 위험해지며, 효율성과 생산성도 하락하고, 상호신뢰와 이타심, 호혜성 등의 사회적 자본도 구축될 수 없다. ‘김제동의 톡투유’에서 지적장애아(지인)의 부모가 세상이 공격적이고 배타적이 됐다고 말한 것도 사회적 자본을 파괴시킨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축적된 결과다.



우리 모두가 지인이의 부모가 될 수 있고, 지인이가 걸어가야 할 길을 밝힐 수 있고, 지인이와 함께 걸어갈 수 있으려면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를 거둬내야 한다. 권력과 자본이 사회적 자본을 파괴하고 서로가 서로에 대해 영원한 타인이자 물리쳐야 할 적으로 인식시킬 때 인간은 일베처럼 짐승 이하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부의 재분배가 뒤따르지 않는 경제성장이란 말에 속지 말라. 1%의 식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나눠주는 것을 민생이라고 포장하는 말에 속지 말라. 경쟁과 불평등을 강조하기 위해 공짜점심이 없다는 말에 속지 말라. 타인의 것을 빼앗는 성공을 미화하기 위해 실패는 개인 책임이라는 말에 속지 말라. 극소수의 무임승차를 부각시키는 복지담론에 속지 말라. 상위 1%에 부와 권력과 기회가 독점되고, 그 폐해는 하위 99%에게 전가되는 세상은 그런 새빨간 거짓말들이 보편적 진리인양 호도되면서 이루어진 결과다.



하물며 생존선 근처의 삶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을 지옥으로 만드는 이런 세상이 지인이의 미래를 어떻게 보장할 수 있단 말인가? 신뢰와 협력, 호혜성의 문화를 높이는 평생고용이 인류의 자산 중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다시 깨닫게 됐을 때, 인류는 비로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서 벗어나 공존과 상생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 



누진적 증세는 언급도 하지 않은 채 임금피크제와 일자리 나누기를 얘기하기 전에, 비정규직의 확대 적용과 노동유연화를 통한 경영효율성을 주장하기 전에,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신뢰, 이타적 협력과 평등한 자유를 구축할 수 있는 소득 보장과 복지 제공이 가능하도록 만들 때 우리 모두는 지인이의 가족이 되고 친구가 되고 동료가 된다.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탄생으로 인해 차별받지 않을 때, 불평등하게 주어진 조건과 공정하지 못한 경쟁이 현재를 넘어 미래의 삶까지 결정하지 않을 때, 개인으로서나 조직의 일원으로서나 노동의 대가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삶의 질이 보장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고, 지인이의 동료나 친구로서 삶이라 길을 동행할 수 있다.   




P.S. 로버트 퍼트남과 수많은 석학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필자 역시 마찬가지로, 태어났을 때부터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체험한 밀레니엄 세대들이 사회의 주류가 됐을 때 사회적 자본이 다시 회복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아래로부터 더 많은 정의와 평등, 협력이 이루어질 때 생존선 이하의 각자도생에서 벗어나 존엄한 존재로서의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7.21 08:27 신고

    불편한 시선을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얼굴에서 묻어 나올수 있는 따뜻한 배려가 진정으로
    필요할때입니다

    • 늙은도령 2015.07.21 15:16 신고

      세상이 갈수록 험악해지는 것이 자본주의의 끝물에 나오는 현상이라 이를 어떻게 극복할까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 백순주 2015.09.06 08:01 신고

    세종에 중증 장애학생들을 위한 '세종누리학교'가 조용히 첫 개교를 했습니다. 개발이 한참인 중심에서 벗어나 산 아래턱에 일찌감치 터를 잡았습니다. 일선 학교에서는 장애아들이 예체능 과목만 통합운영 되고 있습니다. 나머지 주요과목은 '개별학습실'에서 공부합니다.

    특수교육학개론 수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엔 두 부류의 엄마가 있다고 합니다. 장애아 엄마와 비 장애아 엄마.
    왜 이들이 무서워지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우린 그 이면보다 보여지는 현상에 집중해서 얼굴을 찌푸립니다.
    무엇이 화나게 하는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 들여다 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그렇습니다.

    존엄한 존재로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날은 함께이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 늙은도령 2015.09.06 09:12 신고

      네, 대단히 중요한 얘기입니다.
      소비지상주의가 극에 이르면 외모에 대한 호불호가 너무나 강해집니다.
      보기에 좋은 것만 쫓게 되고, 그것이 성형이나 지나치고 너무 어린나이부터의 화장 등에 매달리게 만듭니다.
      남성도 이제는 화장과 성형을 주저하지 않으니 외모에 대한 강박이 더욱 커졌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외국인들과 얘기하면 한국여성은 너무 날씬하다고 합니다.
      참으로 무서운 얘기인데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소비지상주의는 외모를 가꾸는 것을 부추기고 젊음에 집착하게 해서 멋있게 늙은 것을 회피합니다.
      이것이 쌓이면 세대간 갈등의 원인도 되고, 노인을 경시하는 것, 늙지 않기 위해 더욱 소비하고 성형하고 화장하게 만듭니다.
      결국 노후자금을 만들 수도 없고, 상위 1%만 좋은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까지 소비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장애아들에게 복지를 제공하고 통합교육을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자본주의의 무서움이 이것입니다.
      예쁘고 아름답고 보기 좋으면 좋은 상품으로 인정되듯이....



선거가 정치적 갈등에 한계를 설정한 것처럼 전국노동관계자위원회는 경제적 갈등에 한계를 설정했다.


                                                                           ㅡ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 2》에서 인용




최저임금제를 시행하는 어떤 나라건 최초의 도입기준은 노동자의 최저시급이 생활이 가능한 수준에서 결정돼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런 도입기준은 10세 전후의 어린이까지 노동착취의 대상으로 삼은 자본의 탐욕이 노동자 폭동의 주요원인으로 작용하자 체제의 안전(자본에게 중장기적으로 유리하다)을 지켜야 하는 정치권의 중재로 제시된 것이다.





사실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우리 모두는 케인즈 학파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경제가 안정됐었던 1945~73년에는 최저임금이라는 것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경쟁과 독식보다는 협동과 공존을 중시했던 그 시기에는 부자와 기업에 대한 세금이 높아서 노동자의 대부분이 중위소득(국민을 소득순으로 늘어놓을 때 정확히 중간에 위치한 소득) 근처에 몰려 있었다.



이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때맞춰 유동성 함정에 빠진 케인즈 체제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슈퍼리치와 금융 산업은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를 전면에 내세웠고, 대처와 레이건의 당선으로 이어짐에 따라 케인즈 체제는 종지부를 찍었다.



이때부터 부자와 기업에 대한 대규모 감세가 단행됐고, 그에 따라 복지체제의 축소와 노동자임금의 하락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협동과 공존을 위한 평등에 빨간색을 칠한 채, 경쟁과 독식을 위한 자유(방임)를 효율성 증대와 경제성장의 지고지순한 가치로 끌어올렸다.





규제완화의 핵심인 노동유연화가 대세가 됨에 따라 노동자의 복지만이 아니라 임금까지 지속적으로 떨어졌다. 법과 공권력, 용역을 동원한 노조의 파괴와 맞물린 비정규직의 확대는 노동자 임금을 하락시킨 것을 넘어, 열악한 일자리를 놓고 저임금노동자들 간의 피 터지는 싸움을 초래했다.



이런 과정에서 노동자의 계급의식은 종적을 감추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거대사업장의 노조는 각자도생으로 돌아섰고, 비정규직을 위한 노조의 결성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최저임금이 생활임금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했다.



특히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가장 완벽하게 시행하고 있는 이명박근혜 정부 7년6개월 동안 최저임금은 사실상 후퇴를 거듭했다. 최저임금의 절대액수와 인상률은 이 땅의 비정규직을 노예로의 삶으로 이끌어갔다. 그들은 생존의 긴급함 앞에서 어떤 저항의 연대도 할 수 없었다.





국가의 경제규모는 커지고, 수출기업의 흑자액은 늘어났지만, 주요 업무를 제외한 상당수의 업무를 아웃소싱과 파견 및 해외로 돌려버림에 따라 비정규직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에 따라 최저임금의 생활임금으로의 회복을 위한 투쟁도 먼 나라 얘기처럼 돼 버렸다.



서울과 순천시 등 일부 지자체는 조례를 개정해 최저임금의 생활임금화를 실시하고 있지만, 정부의 조세 정책 때문에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차체로서는 실시하기 힘든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복지와 연금의 부족으로 영세자영업자가 난립하는 것까지 고려하면 최저임금의 생활임금화는 여기저기서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시장자유주의 우파의 최대 성공사례). 



이처럼 최저임금이 생활임금은커녕 생존임금 선에서 머물며, 노동자의 기본적인 삶도 불가능하게 만든 출발점에는 신자유주의적 감세가 자리하고 있다. 세계경제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과 미국의 두 지도자가 18~19세기의 경제학(자본의 노동착취가 가장 심했던 시기)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으니 최저임금이 생활임금을 보장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신화에서도 삭제됐다.





한국에서는 IMF 외환위기와 이명박근혜 정부의 등장으로 최저임금의 생활임금화는 무산됐다. 심지어 법정월급의 하한선보다 더 적은 것이 최저임금의 현실이 됐다. OECD가입국 중 사회복지지출이 꼴지인 것까지 더하면 비정규직의 삶은 생존선 이하에서 결정되기 일쑤였다.



내일 내년도 최저임금이 결정된다.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6천원 초반에서 결정될 것 같다고 한다. 최저임금의 월급 적시를 제외하면 어떤 소득도 거두지 못한 상태에서 투표로 결정난다고 하니, 자본친화적인 공익위원들이 6천원을 넘길 공산은 거의 없다고 볼 수밖에 없다.



최저임금이 6천원 수준에서 결정되면, 증세 없는 복지와 줄푸세만 밀어붙이는 박근혜의 승리가 또 하나 더해진다. 국회법 개정안 폐기와 61개 법안의 통과로도 모자라, 최저임금의 인상을 최소화하고 유승민도 쫓아낼 수 있게 됐으니, 7월 8일은 박근혜가 정치적 승리를 확고히 한 날로 기록될 것이다.





복지 없는 증세가 허구라고 말한 유승민이 원내대표에서 쫓겨난 날, 최저임금이 6천원 초중반에서 결정되니 우연치고는 참 얄궂기 만하다. 신자유주의를 추종하는 대통령이 제왕적 권력을 휘두르는 나라에서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하면 노동자의 가난은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이 또 한 번 입증됐다.    



복지가 형편없는 나라인 대한민국에서 최저임금이라도 생활임금을 보장해야 하는데, 자본과 재계를 위한 가짜 민생만 중시하는 박근혜 정부 내에 양대 노조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힘으로 최저임금을 생활임금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교조는 법외노조로 추방됐고, 공무원노조는 정치적 중립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제1야당까지 무력하니 '노동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내수경제를 살리려면 복지를 늘리던지 최저임금이나 근로자임금을 올리던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줄푸세의 여왕, 박근혜가 그것에 동의할 가능성은 제로다. 유권자로서의 현명한 선택을 넘어, 깨어있는 시민으로서 연대해서 행동하지 않으면 서민을 위한 나라도 없을 수 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참교육 2015.07.08 05:15

    근로자는 있어도 노동자는 없습니다.
    자본이 만든 세상. 친일 후예들이 지배하는 세상... 이런 세상에는 노동자가 아닌 노예만 있을 뿐입니다.

    • 늙은도령 2015.07.08 15:58 신고

      그렇지요, 이제는 노예의 삶만 남았습니다.
      싸워야죠.
      소리치고 떠들고 저항하고 거부해야 합니다.
      민중의 역사란 늘 아래로부터의 저항이었습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5.07.08 09:05 신고

    최저 임금을 현실화해야 하는건 당연합니다

    그리고 수 많은 중소기업들의 영향을 정부가 대기업들이 흡수해 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중소기업들이 불법을 저지를판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입국할때 최저 임금 교육을 받고 들어옵니다
    최저 임금을 못 받으면 바로 노동부에 고발하라고 합니다

    이 불합리한 구조를 위에서부터 바꿔야만 합니다

    • 늙은도령 2015.07.08 15:58 신고

      개혁은 절대 아래서부터 해야지 위에서 하면 말짱도루묵이 됩니다.
      민주주의는 개혁이나 권력, 권한, 권위가 밑에서부터 올라가야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제 자리를 찾습니다.

  3. 목요일. 2015.07.08 11:19 신고

    우리모두 자본주의의 노예라고 할수도 있겠네요

  4. 『방쌤』 2015.07.08 11:24 신고

    정치,,,별개의 것이 절대 아닌데 말이죠
    무슨 거창하고 어마어마한 것들을 바라는게 아니라
    밥은 제대로 먹고 살수있게 해달라는 것인데
    그 마저도 저버리는 정부가,,, 과연 누구를 위한 정부일까요,,,
    남은 시간이 너무 길어 마음이 더 답답합니다

    • 늙은도령 2015.07.08 15:56 신고

      싸워야 합니다.
      떠들고 불평하고 저항하고 소리쳐야 합니다.
      그래야 저들이 움직입니다.

  5. 가난한여행자 2015.07.09 02:28 신고

    이명박 ,박근혜 7년.... 아직도3년 지옥같네요

    이명박은 나라를 수익모델로 해 나라를 금전적으로 거덜나게하고,, 박근혜는 전제 군주 여왕 코스프레하다 나라 정신을 추락시키고

    국민들은 각자도생을믿고 ,자기만 피하면 된다고 조금 가진것 유지하려고하니...이것 순시간에 도둑놈변해 대낮에 !!

    이상태로 가다가 , 전국민 90%가 하위층으로 떨어질것 같네요


    김대중, 노무현때 나라,국민이 상승하는 기운이였다가 ,, 국민들이 악마들한테 속아서 찍고보고. 정신까지 잃은것 같네요

    이.박은 지도자가아닙니다 ,,,,장사꾼, 연극배우입니다


    우리나라 복도없지 ,,, 모든것이 발전하려고 할때 저런것들이 나타나 , 태클을 걸어 넘어 뜨리는지?

    저세력에 저항레 앞장 설 지도자들이 ..야당 .재야학자 들이 저들과 동업자인지 의심이드네요
    이엄중한시기,,민주주의사망, 국민들 노예화 에 중간적인 말만하네요...


    제가 젊은 시절 ,유명한 재야 학자 .정치인 들을 교류한적 있는데, 이들의 학벌의식 ,엘리트의식을 보고 깜짝 놀랬습니다
    지금 4.19. 386민주세력들이 지지멸멸한 이유도 대중과 멀어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는 철학과 문학이 부재하고 권력,신분상승으로만 이용한것 같네요


    지금은 야당에서 회색분자들을 축출하고 , 집토끼를 단속하고 , 대여투쟁을 해야 할때입니다

    그리고 국민들에게 박근혜& 새누리당 무능 ,아집,을 알려야합니다


    이러다가 다음에 총선 , 대선 ..저악마들이 집권하면 우리나라는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자원이없고 인구많은 나라에서 중산층이 무너지면 ,,,상상할수없는 빈국으로 떨어집니다

    2%가 모든부를 갖는 나라,,그리고 나머지는 ,,


    ....자다가 일어나 두서없이 써봅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 늙은도령 2015.07.09 02:34 신고

      힘내십시오.
      일단 정권부터 탈환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무엇이라도 되지 지금 상태로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포기만 하지 마시지요.

  6. 꿈나라논리 2015.07.09 13:24

    최저임금 만원으로 올리고 비정규직 정규직만들고... 노조가 하자는대로 하면 삼성이나 현대도 10년 못가서 망하고 한국경제는 붕괴될겁니다
    최저임금 만원이 한국경제 현실에서 맞는 이야기 인지... 도대체 현실을 알고 말하는 것인지 ...온라인이니까 아무렇게나 무책임하게 떠들어도 되는 것인지...
    경영이나 경제 회계를 좀 안다면 당신처럼 무책임하게 떠들지 않을거요
    알바생을 고용하고 있는 편의점이라도 운영해보시요 최저임금이 만원으로 현실화되면 편의점은 100% 망할겁니다 지금도 개고생하는 편의점주들은 전부 한강으로 갈겁니다
    당신같은 사람들을 원망하면서 ...
    현실을 깨닫고 삽시다 !!! ㅉㅉ

    • 늙은도령 2015.07.09 20:43 신고

      왜 편의점 주인을 위해서 알바생들이 희생해야 합니까?
      그들에게만 권리가 있습니까?
      편의점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면 정리해야죠.
      아니면 정부에게 요구해야지요, 편의점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라고.
      님처럼 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등쳐먹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영원히 살자고요?
      누구를 희생시켜가며 자신은 살고자 하는 것만큼 악한 것이 없습니다.
      왜 편의점주는 알바생만 희생시키려 합니까?
      그리니 맨날 당하고만 사는 것입니다.



많은 젊은 세대들은 어떤 일이 벌어지던 간에 무조건 새누리당을 찍는 사람들을 보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심지어는 자신의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도 그러하다며 이념적 편향성에 대해 진저리를 친다. 이 때문에 가족 간의 대화는 더욱 줄어들고, 그것도 아니면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는 정치 얘기를 꺼내려 하지 않는다. 



친구들과 만나도 좀처럼 정치 얘기는 하지 않는다. 사회를 비판하고 정치인들을 욕해도 이념적 성향이 들어가는 것은 입에 올리지도 않는다. 마샬 맥루한이 《미디어의 이해》에서 밝힌 것처럼 '핫'이란 개념과 '쿨'이란 개념이 뒤바뀌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미디어가 발전할수록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도 이런 경향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 네 권의 책만 읽어도 세상을 보는 눈이 생긴다.



하지만 우리의 삶 자체가 정치라는 사실은 시대가 아무리 흘러가도 변할 수는 사실이다. 심지어 인간이란 자신 안에서도 몇 개의 자아가 존재하기 마련이어서, 행위로 이어지는 것들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이 아무런 갈등없이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시에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우선 순위를 정하는 과정이 선행된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선택했을 때는 다른 것은 포기해야 한다. 이것을 기회비용이라고 하는데, 인간은 홀로 있을 때조차 무엇을 할 것인지 선택의 과정을 거치고 이것이 곧 삶에서의 정치다.   



우리는 이런 선택과 행위의 과정을 욕구에 대한 최고의 효율성(최대의 쾌락이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라고 하며 경제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다. 심지어 자해(이것이 극에 달하면 자살에 이른다)마저 처해진 상황에서 최고의 효율성(최대의 쾌락으로, 부정적이거나 마이너스 쾌락도 존재한다)을 찾기 위한 것으로 설명되기 일쑤다. 그리고 이것은 불편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분명한 진실을 담고 있다.

 

 

 

헌데 정치라는 것이 서로 다른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과 집단 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이며 이를 위해 동원 가능한 자원을 골고루 배분하는 행위라는 것이 현대 정치학의 주류이론이다. 우리가 경제라고 알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정치에 속한다.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정치적인 것을 경제로 대체하는 정치권의 언어와 이를 뒷받침해주는 미디어의 왜곡에 판단의 기준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이것이 장기간에 걸쳐 일어나면 인간은 판단의 기준이 고정되며, 삶에서의 실천으로 이어지는데, 바로 이것이 편향된 이념의 밑바탕을 이룬다. 

 

    

                                  

                       국과수의 DNA분석이 아니라 텔레비전에 나온 이 사진이 유병언의 죽음을 확정했다.



특히 텔레비전의 보편화와 일반화가 이루어진 이후로는 이런 경향이 더욱 강화되었다. 텔레비전은 콘텐츠를 보내는 쪽에서 일방적인 전달만 하기 때문에 그것을 수용하는 입장에서 선택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보는 것이 믿는 것과 같음은 인간이란 존재의 기본조건이기 때문에 텔레비전이 전달하는 것들에 많이 노출될수록 콘텐츠를 전달하는 측의 입장에 더욱 경도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시청자의 인식은 가랑비에 옷 젖듯이 텔레비전에서 전하는 것에 조금씩 젖어들고 길들여지게 된다. 이것이 심해지면 심리학에서 말하는 확인 편향의 오류가 발생하고, 이것이 무의식이나 의식의 전반에 쌓이고 축적되서 견고하게 굳어지면 거의 모든 콘텐츠를 이념의 잣대로 바라보게 된다. 세상이 바뀌어 텔레비전이 전하는 콘텐츠의 내용이 조금씩 바뀌어도 이미 굳어져 버린 인식의 틀로 받아들이고 해석한다. 



자신이 보고 믿고 익숙한 것들만 받아들이고 강화하는 확인 편향의 오류 때문에 어떤 콘텐츠가 주어져도 해석의 작용은 변함없는 편향을 보여준다. 또한 인간이란 과거의 기억들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그때가 좋았다는 생각에 경도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과학기술의 발전 때문에 삶의 조건과 환경이 빠르게 변하는 사회일수록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일종의 문화지체가 일어나는 것이다. 



박정희나 전두환 시절의 독재가 지금보다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에 속한다. 그들은 특히 어느 집에나 있을 정도로 보편화되고 일반화된 텔레비전을 통해 세상을 보고 받아들인 최초의 세대들이었다. 아래의 인용문은 닐 포트스만의 《죽도록 즐기기》에 나오는 내용 일부인데, 텔레비전에 길들여진 세대의 확인 편향 오류, 즉 이념적 편향성과 경도된 인식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이것이 6.4지방선거의 결과를 갈랐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도, 진실과 거짓의 문제도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확인 편향 오류가 만들어내는 집단적인 인식의 편향성은 어떤 것으로도 바로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서 자신이 하늘처럼 떠받드는 사람이 흘리는 눈물이나 고뇌에 찬 결단은 이념적 편향성에 불을 당기는 미디어 세대들의 절대 마약이다. 정치적 프레임 설정이나 전환이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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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텔레비전은 지식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에 관한 방법론까지 지시하는, 초매체적 지위에까지 올랐다...우리는 더 이상 그 기계장치에 매료되거나 어쩔 줄 몰라 하지 않는다. 또한 텔레비전의 경이로움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며, 텔레비전 수상기를 특별한 공간에만 한정시키지도 않는다. 우리 모두는 카메라가 잡은 제한된 각도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브라운관에 비치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심지어 텔레비전이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도 뒷전으로 밀려나버렸다.



                                       

                                          현재 이런 장면은 텔레비전을 타지 못한다.


 

마치 눈과 귀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고 묻듯이, 그러한 질문 자체를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그래픽과 전자혁명으로 유발된 가장 큰 골칫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 전달된 세계가 우리에게 낯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보인다는 점이다. 낯설게 느끼는 감각을 상실했다는 것은 길들여졌다는 신호이며 길들여져 온 만큼 변해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화는 이제 텔레비전의 인식론에 거의 다 길들여졌다. 즉, 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 규정되는 진실, 지식, 사실을 너무도 철저하게 받아들이기에 쓸모없는 것들이 중요한 것인 양, 그리고 모순된 것들이 대단히 합리적인 양 우리 안에 가득 들어앉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회적 관습이나 제도 중 일부가 시대적 규범과 잘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면, 이제는 시대적 규범을 문제라기보다는 본래의 관습이나 제도가 이상하거나 잘못되었다고 여긴다......자유민주주의와 자유 시장경제라는 최적의 기후조건에서 텔레비전은 모든 잠재력을 영상기술로 끌어낼 수 있었다...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것은 그저 방송 프로그램이 좋아서 원할 뿐이다. 여기서의 논점은 텔레비전이 오락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으로 인해 모든 경험적 표현이 자연스럽게 오락적 형태를 띠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온 세상과 교감을 유지하지만, 이는 인격이 사라진 무표정한 방식일 뿐이다. 문제는 텔레비전이 오락물을 전달한다는 점이 아니라 모든 전달하는 내용이 오락적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이런 장면은 더더욱 텔레비전을 타지 못한다.                                                     

 

텔레비전 세계에서 오락은 모든 담론을 압도하는 지배이념과 같다. 무엇을 묘사하든, 어떤 관점에서 전달하든, 가장 중요한 전제는 즐겁고 재미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 '재미' 때문에 매일같이 뉴스에서 재난이나 잔혹한 장면을 접하면서도, 뉴스진행자가 하는 한마디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에 걸려들고 만다...이 모든 것들이 방금 본 장면을 슬퍼할 필요가 없음을 암시한다...이들은 읽는 뉴스를 편집하거나 라디오 청취 방송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기 위한 뉴스를 TV로 내보내고 있을 뿐이다. 이들도 자신들이 사용하는 매체가 이끄는 대로 따라 갈 수밖에 없다. "믿을 만한 텔레비전"이란 설명이나 언어표현이 뛰어나다는 것과는 무관하게, 그저 생생한 이미지가 어떻게 보이는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다.


 

텔레비전에 관한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텔레비전'이라는 말 그대로 사람들은 '본다'는 점이다. 또한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순간순간 생동감 있게 바뀌는 수백만 가지 동영상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시각적인 만족감을 주기 위해 사고력을 억누를 수밖에 없는 TV매체의 본질이다. 즉, 텔레비전은 쇼비지니스적 가치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여강여호 2014.07.27 14:50 신고

    대학시절 전공수업 교재였던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를 요기서 보게 되네요.
    어떤 내용이었는지 깜깜하지만요..ㅎㅎ..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과 민주주의의 발전이 정비례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즘 미디어에서 보듯 그런 믿음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민주주의의 진보를 정비례하게 만드는 것은 역시 국민들의 분노일 것입니다.
    여기에 정치는 생활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상식이겠지요.

  2. 백순주 2015.09.18 11:00 신고

    우아~ 글이 매력적이예요. 짜임새 있고, 간결하고, 막힘없고... 독서력의 힘인가요? 새삼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이 보고 믿고 익숙한 것들만 받아들이고 강화하는 확인 편향'의 오류를 저지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지요? 매체를 멀리하는 것이 방법은 물론 아닐테고요. 뇌가 익숙한 것을 선택한다고 하던데요. 습관처럼.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데 뭘 배워야 하는지 그런 시각이 필요할텐데...의문이 끊이질 않습니다.
    글은 명쾌한데 저는 머물러 있으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도령님 심정이시지요?ㅋㅋ

    • 늙은도령 2015.09.18 11:14 신고

      제가 글에 올린 책들을 보면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저는 세상을 종합적으로 보기 위해 다방면의 책을 읽었습니다.
      어려서 읽은 것들은 기본적인 철학을 구축했다면 지난 10년 동안 읽은 책들은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런 자아의 구축이 일정 수준 이상 완성되면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습니다.
      결국은 책을 많이 읽고, 사유의 양을 늘리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연습을 멈추지 않고, 거울뉴런이 최대로 발달할 수 있도록 관계를 늘려야 합니다.

      인터넷에 올리는 글로는 계략적인 것만 쓸 수 있습니다.
      제가 지적공동체를 만들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지적검증부대를 만들어 사이비들을 걸러내고, 정치경제적 지배엘리트의 논리를 까발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위 90%는 무조건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 백순주 2015.09.19 04:32 신고

      고맙습니다. 그렇게 해 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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