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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구조적 부정의의 피해자, 하우스와 랜트푸어



“주택 소유 여부에서 취약한 존재가 되는 일반적인 원인은 복합적이고, 대규모에 상대적으로 장기적이다. 공적이고 사적인 여러 정책과 규범적인 규칙과 관행에 따른 수많은 개인의 행위가 이러한 상황에 기여한다.”

 

                                                                                             ㅡ 아리리스 영의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에서 인용

 

 

 

위의 인용문은 한계상황에 이른 수많은 하우스푸어와 랜트푸어를 시장의 논리에 따라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일 수 없는 구조적 부정의에 대한 성찰을 제공한다. 주거형태에 대한 개인의 선호와 취향에서 이익집단의 마케팅과 정부의 부동산활성화정책과 기준금리 인하를 통한 대출 장려까지 온갖 요인들이 쌓여서 구축되고 견고해진 구조적 부정의는 개인의 선택과 행위에 거부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특히 무려 15~40개월에 걸쳐 형성된 욕망이라 이름의 투기가 나라 전체를 삼켜버리는 광기에 이르면 누구던지 부동산거품을 키우는 대열에 합류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거품은 전 계층을 휩쓸고 나며, 가격이 떨어지는 지점에 이른다. 그때는 이미 거품이 터지기 시작한 것이며, 시장참여자들의 패닉이 밀물듯이 밀려온다. 집값이 수직의 자유낙하를 시작하면 제일 먼저 대출은행들이 공황증상을 일으킨다. 



그들은 전방위로 대출금 회수에 들어가고, 이미 패닉 상태에 빠져있는 채무자들은 원금 상환은커녕 이자도 내기 힘든 상황으로 내몰린다. 집값이 폭락했기 때문에 대출금 상환이 불가능해졌고, 연체가 늘어나자 이자도 천정부지로 솟았기 때문에 결국 월급과 집을 차압당할 수밖에 없다. 그 다음의 과정은 차마 글로 옮기지 못할 만큼 참혹하다. 한 평의 공간도 자기 것이 없는 채무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하우스푸어로 전락한다. 



거품, 패닉, 붕괴로 이어지는 금융위기의 역사를 파헤친 킨들버거의 성찰도 이와 똑같은 결론을 내놓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투기적 매입으로 이익을 얻는 것을 기업과 개인이 지켜보면서, 선행자 따라하기 과정이 나타나”는 것은 거품형성과 붕괴의 과정에서 반드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IMF 외환위기 때 경험했던 이런 현상은, 집권세력의 총선 승리를 위해 모든 쓰레기 언론들이 침묵하고 있어서 그렇지, 이미 진행 중인 상태다.

 

                     

                                                        부동산거품은 2000년도부터 시작됐다

 


이것 때문에 “친구가 부자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사람들의 안락과 판단력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없다”는 명제가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하우스푸어와 랜트푸어는 부동산거품의 광기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 때 거기에 휩쓸려 뒤늦게 막차를 탄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참고 도 참았다 자신만 뒤쳐지는 불안감 때문에 무리한 대출을 끼고 광기에 합류하는데 그때는 이미 거품이 터지고 있는 단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들은 킨들버거의 분석처럼, 모두가 참여한 아파트거품의 광기에 휘말려 판단력을 잃은 사람이자, 자본주의체제에서 지위경쟁에서 뒤쳐진다는 두려움에 언젠가는 터지기 마련인 거품에 동참하게 된 사회경제적 약자가 대부분이다. 거의 모든 하우스푸어와 렌트푸어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요인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구조적 부정의의 피해자들이다. 쓰레기 언론들도 거품 형성의 공범이기에 거품이 터져서 패닉에 이르러야 비로소 진실을 보도한다, 면피 용으로.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 금융위기를 다룬 라구잠 라잔과 스티글리츠, 모리스 같은 좌우의 세계적 경제석학들이 이구동성으로 불법적인 브로커까지 동원해 약탈적 대출을 자행한 금융기관과 이를 부추긴 토건족이 주요광고주인 쓰레기 언론들, 대출을 늘리라고 은행을 압박한 몰지각한 정치인들, 정책과 제도를 통해 부동산활성화를 진두지휘한 정부에게 삶의 마지막 공간마저 잃게 된 하우스푸어와 랜트푸어를 양산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정치적 책임과 사회적 정의의 관점에 따르면 수많은 학자들이 “공정한 사회라면 어떤 사람이 물질적 불이익에 처했을 때, 그 불이익의 얼마만큼이 그 또는 그녀가 내린 선택의 결과며, 또 얼마만큼의 그 또는 그녀가 통제할 수 없는 환경의 결과인지”를 따져서, 후자의 경우에 속하는 피해자에게는 사회나 국가 차원의 구제가 이루어져야 한다는데 일치된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국가와 경제주체들의 관리실패와 탐욕의 폭주 때문에 개인이란 존재는 먼지에 불과한 거대한 경제위기가 닥쳐올 때는 전자와 후자를 가릴 것 없이 일괄적인 대규모 부채탕감과 채무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출구전략이 존재하지만, 중요한 것은 투기대란의 피해자들이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삶의 질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이나 사회가 하우스푸어와 랜트푸어의 한계상황을 개인적 책임으로 돌리려면, 구조적 부정의(국가적 차원에서 발생한 광기 어린 부동산거품)를 이용해 이익을 챙긴 자들과 거품 형성을 주도한 세력과 집단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물려야 한다. 대출자들이 너무 커서 죽일 수 없다면, 피해자들이 너무 작아도 죽일 수 없어야 한다. 약탈적 대출로 큰 번을 벌었던 금융기관과 이를 부추긴 토건족과 언론, 정치인, 광기를 관리하지 못한 국가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을 때만이 비로소 공정한 정의와 형평성을 맞출 수 있다.


                         

                                     이런 거대한 변화에 저항할 수 있는 개인은 없다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주머니를 털어 소수의 상류층을 슈퍼리치로 만들고, 극소수의 대기업들을 초국적기업으로 만드는 구조적 부정의의 희생자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지만, 박근혜 정부는 노동개악과 재벌민원법을 강행 처리하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니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다. 박근혜에게 하우스푸어와 렌트푸어는 정책과 시장의 실패가 아닌 개인의 책임으로만 보이는 모양이다. 



하우스푸어와 랜트푸어는 구조적 부정의가 만든 대표적인 케이스고, 이는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도 한 번 이상 발생한 일이다. 우리가 부정한다고 해도 개인이 “법 망 안에서 개별적으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행위 과정도 구조적 부정의를 발생”시키며 “그 과정을 거치면서 누군가는 상당한 혜택을 얻는 반면” 어떤 이들은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는다. 또한 “대다수 개인이 규칙을 따르고, 자기 일에만 신경 쓰고, 합법적인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믿는 거대한 규모의 사회적 과정이 구조적으로 봤을 때 바람직하지 못한 의도치 않은 결과를 야기”하기도 한다.

 

 

우리 모두에게 일정한 책임이 있는 이런 광범위한 구조적 부정의의 대표적인 피해자인 하우스푸어와 랜트푸어를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려버리면, 소득원이 막혀버린 사회경제적 약자들은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그런 나라에서 구조적인 부정의에 맞서 평등하고 공정한 정의를 실현할 방법이란 폭력적인 혁명밖에 없다.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 않게 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면, 정부가 직접적인 보상책을 제시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에서 “인간 행동에 대한 도덕적 고려의 한가운데 자아가 있고, 행위에 대한 정치적 고려의 중심에 세계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일정 부분 짊어져야 할 '정치적 책임은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고통에 주목해 해결책을 제기하는 것이 거대한 규모로 축적된 구조적 부정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작은 나비의 날개 짓이 종국에는 거대한 태풍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개개인의 작은 행위들이 쌓이면 하나의 형식이나 경향이 생기고, 이것이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과정을 통해 영역을 넓혀 가면 개인이 종속되는 하나의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모든 사회와 국가에 지배적 구조란 있기 마련이며 이는 소수의 이익과 다수의 피해자를 양산하는 구조적 부정의를 구축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하우스푸어와 랜트푸어가 이런 사회나 국가의 구조적 부정의의 피해자들이란 인식을 분명히 하면 비로소 그들에 대한 구제책이 공론화될 수 있다. 박근혜 정부가 이를 무시한 채 재벌의 민원을 입법화한 일방적인 경제활성화와 노동개악을 강행하다면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없다. 하우스푸어와 랜트푸어는 정의의 실현과 정치적 책임에 관계되는 우리 모두의 문제며, 국가를 운영하는 정부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



물론 대규모 탕감책이 도덕적 해이와 연결될 수 있는 부작용은 있다. 누군가는 이익을 챙겼을 것이고, 대규모 탕감으로 추가로 돈을 벌 수도 잇을 것이다. 하지만 극소수에 불고한 이들은 나중에라도 확인해 바로잡을 수 있으니, 몇 명의 무임승차자 때문에 수십만 명을 길거리로 내몰 수는 없는 일이다. 투기 열풍을 조장한 정부와 은행, 언론과 전문 투기꾼들은 그에 상응하는 처벌이 주어져야 하며, 형량 감면이나 성역을 두어서도 안 된다. 



하위 99%의 국민을 헬조선으로 내몰고 있는 두 가지 구조적 요인 중 하나가 높은 집값(나머지는 사교육비)이기에, 하우스푸어와 렌트푸어를 헬조선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주는 것이 정치의 몫이다. 민주주의란 정치가 상위 1%가 아닌 하위 99%의 국민을 먹여살릴 때만이 제대로 돌아간다. IMF 환란은 비교될 수도 없을 정도의 거대한 경제위기를 코앞에 둔 지금, 정부와 정치권은 하우스푸어와 렌트푸어를 위한 구제방안(대규모 부채탕감과 기본소득 제공)을 당장 내놔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주거개념의 공영화가 절실히 요구되며, 그럴 때만이 N포세대의 비극을 막을 수 있고, 구조적 부정의의 희생양 양산을 막을 수 있다. 청소년과 청춘의 미래가 암울한 나라는 무조건 망한다. 하우스푸어와 렌트푸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이 시대의 절대과제며, 청춘이 헬조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이다(다음 글에선 사교육비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