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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사드의 정치학, 전쟁은 여성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광복 이후 이땅의 진보 진영의 최대 아킬레스건은 여성, 특히 질서와 안전, 가족을 중시하는 주부였다. 정확한 통계치를 살펴봐야겠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민주진보 진영은 주부의 표를 얻는데 실패해왔다. 가부장적 질서가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현실에서 남북 분단이 기본으로 자리잡았고, 남성 위주의 압축성장에 휩쓸리다 보니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었다 해도 본질적 차원에서 주부의 표는 보수적 가치를 향했다. 





경쟁이 극단화되고, 패자부활전이 주어지지 않으며, 기술 발전에 따른 성장만능주의가 위험사회의 도래로 귀결되면서 질서와 안전, 가족을 중시하는 주부의 보수적 성향은 더욱 강화됐다. 나이가 많을수록 이런 성향은 더욱 강화되기 마련이다. 수많은 주부들이 천하의 사기꾼 이명박의 거짓말과 폭정을 지켜봤으면서도 박근혜에게 또다시 속았던 것도 한국적 특수성과 위험사회의 도래가 만든 비극적 결과였



대통령에 당선된 이래, 박근혜의 폭정이 광기의 영역에 들어섰다 해도 주부의 성향이 바뀌었다는 실증적 연구결과나 여론조사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250명의 고등학생을 포함해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참사의 후폭풍도 주부의 성향에 변화를 주었다는 연구결과는 (필자가 아는 한) 나온 것이 없다. 박근혜의 폭정이 임계점을 돌파해도, 이념적 접근이 극도의 거부감을 일으키는 현실에서 주부의 성향을 바꿀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진보 진영의 무능함과 고리타분함도 한몫했고, 남성적 패미니즘에 정복당한 대중문화의 영향력이 유난히 큰 한국적 상황도 무시할 수 없었다. 대중문화에 녹아든 남성적 패미니즘의 정화인 '아빠 어디가'와 '슈퍼맨이 돌아왔다' 등의 대히트와 2NE1의 인기가 소녀시대를 넘지 못했던 것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진보 진영이 무엇을 내세우던 주부의 표를 얻는 것은 난공불락의 영역이었다. 위대한 촛불소녀와는 달리 앵그리맘을 진보적 가치를 연결하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헌데 이런 난공불락의 영역에 확실한 균열을 불러온 것이 사드 배치다. 작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성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볼 수 있듯이, 전쟁과 여성은 상극에 가깝다. 나치 독일에 저항해 전쟁에 참여한 수많은 여성들의 다양한 기억과 경험을 담아낸 이 책을 보면, 여성의 애국심이 남성에 못하지 않지만 전쟁과 여성이 공존한다는 것은 물과 기름을 섞는 것과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세월호유족들의 얘기를 담은 《금요일에 돌아오렴》에서 자식을 잃은 어머님들의 인터뷰도 《전쟁은 여성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 담겨있는 수많은 참전 여성들의 인터뷰와 상당히 유사하다. 전쟁은 그 본질상 여성과 상극이어서, 전략과 전투의 방식이 바뀐다 해도 전쟁이 여성과 공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쟁을 상징하는 사드 배치가 여성, 특히 주부에게 격렬한 저항을 불러온 것은 필연적 결과라 할 수 있다. 



총장의 일방통행에 반대했던 이대생 200여 명을 제압하기 위해 무려 1,600명의 경찰을 동원한 것이 전체 이대생과 졸업생, 학부모의 분노를 촉발시킨 것도 여학생을 상대로 한 무자비한 전쟁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교내에 경찰이 상주해서 학생들을 감시하고 제압했던 박정희와 전두환 독재 이후(정확히 1982년 이후) 교정은 공권력이 들어올 수 없는 평화의 공간이었는데, 이런 불문률이 무너졌으니 그들에게는 전쟁에 버금가는 두려움이었으리라.   



마찬가지로 성주군민과 김포시민만이 아니라 이땅의 주부들에게는 사드가 똑같은 두려움을 일으키는 전쟁에 다름아니었다. 평생을 새누리당에 표를 준 그들에게도 사드 배치란 안보라는 명목으로 넘어가기에는 피부에 와닿는 전쟁이어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필자의 어머님처럼 한국전쟁이란 북한에 대한 적개심만이 아니라 미공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자신의 가족과 친척을 잃었던 참혹한 기억이기도 했다(김태우의 《폭격-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을 참조).



사드 배치는 거의 모든 세대의 주부에게 전쟁을 연상키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표를 준 여성대통령 박근혜의 일방적 결정으로 이루어졌다. 성주군민과 김포시민은 물론, 대구경북 지역의 반발을 예상하지도 못했다는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반응처럼, 전시 상황을 전제로 하는 사드 배치는 하늘이 무너져도 막아야 할 것이었다. 무상급식 중단도 전시에나 있을 법한 것이어서 사드 배치와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이상에서 살펴봤듯이 사드 배치는 한국의 정치지형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올 혁명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사드 배치의 후폭풍은 한국 특권층의 부패하고 타락한 민낯을 낱낱이 까발리고 있는 '우병우 게이트'보다 내년 대선의 승패를 가를 핵심사안으로 자라났다. 대량의 페트리어트 미사일 구매나 핵잠수함 보유처럼, 사드의 대안을 찾는 작업도 순탄치 않을 것은 남북평화에 대한 갈망이 어느 때보다 강해졌기 때문이다. 



김종인 같은 자가 '전략적 모호성' 같은 지랄염병을 떨지 않는다면 내년 대선에서의 승리는 물론, 미국의 한반도 국방정책인 '영원한 전쟁상태를 유지하는' 지난 70년의 휴전협정에서 '전쟁의 종료'라는 평화와 공존의 종전협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어쩌면 핵무기 없는 한반도의 실현과 평화적이고 민주적 방식의 통일로 가는 길은 사드 배치에 반발한 주부들의 저항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세월호참사의 노란리본과 사드 배치 반대의 파란리본이 손을 잡을 때, 대한민국은 전쟁을 부추기는 자들의 선동과 무한경쟁, 극단적 불평등, 노골적인 차별의 헬조선에서 사람이 먼저인 사람사는 세상으로 방향을 틀 수 있다. 인류 역사에 가장 참혹한 기록이자 잊어서는 안되는 기억인 《전쟁은 여성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인용한 글들로 글을 마칠까 한다. 



엄마가 즐겨 쓰시던 속담이 생갔나. 엄마는 '총알은 바보고 운명은 악당이다'라는 말을 자주 하셨어.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그 속담을 인용하셨지. 총알 한 개와 사람 한 명이 있다고 칠 때, 총알은 저 좋은 데로 날아가버리면 그만이지만, 사람은 운명의 손아귀에 휘둘린다면서. 


순간 스치는 고통의 표정 앞에서 간혹 나도 모르게 '사람은 고통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 아닐까'라는 불손한 생각을 품을 때가 있다. 그리고는 나 자신에게 흠칫 놀란다…… 길은 오로지 하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것.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