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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썰전 안희정, 행정가로서의 성공이 독이 된 것일까?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이번 글은 쉽게 풀어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썰전에 나온 안희정을 보며 느낀 점은, 이런 단어의 조합이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경험적 이상주의자나 공리주의적 이상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독재정부를 받아들일 수 없어 한 번은 퇴학, 한 번은 자퇴를 통해 고등학교를 두 번이나 그만뒀고, 노무현과 함께 정치를 했던 안희정이, 그의 말로는 가장 보수적인 성향의 충청도에서 행정(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최대의 효용을 창출하는 것이 목적)을 맡은 경험으로 인해, 그리고 성공적인 결과를 도출해낸 자신감으로 인해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경험적 이상주의자 또는 공리주의적 이상주의자라가 됐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보수 성향의 정치인과 공무원, 도민과 유권자들로 가득한 충청도에서 진보 성향의 정치인이 살아남으려면, 그것도 성공한 행정가로서의 직업정치인으로 거듭나려면, 자신에게 불리한 정치현실과 행정환경을 인정하고 들어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선거를 통해 도지사에 뽑혔다는 법적 근거를 내세워, 자신의 정체성(진보적 자유주의)을 고집했다면 안희정은 다른 지역의 단체장에 비해 충청도 내에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서로 다르며, 때로는 충돌나기도 하는 개인의 선호를 모두 다 반영할 수 없기 때문에 포괄적이며 전체적으로 행복의 총량을 늘리는 미래의 결과에 방점이 찍혀있는 공리주의적 정의를 나타내는 명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착취당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을 실현함으로써 가장 성공한 지자체장에 오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경험, 서로 충돌하는 신념에 기초해 집권하는 것이 목표인 정치인(정당 소속)보다는 공익과 복지의 최대화에 방점이 찍힌 행정가로서의 경험이 '대연정과 선의'의 발언까지 이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정치보다는 행정에 방점이 찍히면,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공리주의적 사고에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으로 대표되는 공리주의는, 과거의 행태보다는 미래의 결과를 중시하기 때문에 행정의 영역에서는 절대적인 영향력(정치의 영역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과거의 행위(정부나 정당, 정치인을 포괄한)를 바로잡는 것보다는 최대다수의 국민에게 최대의 복지(행복)를 제공하는 것이라는 미래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것이 공리주의적 사고의 특성인데, 과거의 행위마저 '선한 의지'에서 출발했다면 문제될 것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안희정의 입장에서는 이명박근혜의 부역자와 자유한국당과의 대연정(약자라고 할지라도 강자의 방법을 쓰면 엄정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이재명의 주장이 정반대에 위치한다. 하지만 이재명의 주장대로라면 약자가 쓸 수 있는 방법이란 거의 없다. 그가 말한 강자의 방법이란 것이 연대를 통해 강자와 맞서는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이재명이 말한 강자의 방법과 촛불집회는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약자가 힘을 합쳐 강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더라도 똑같은 방식이며, 그래서 프롤레타리아의 폭력혁명 다음에 완벽한 유토피아인 자유의 왕국이 도래하는 것이다)도 가능한 것입니다. 문재인이 안희정의 선의에는 분노가 빠졌다고 일침을 가했지만, 공리주의적 사고에 빠져있는 안희정이 문재인의 적절하고 날카로운 비판에 발끈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고요.  



행정으로 구현되는 거의 모든 정치철학의 전제와 배경에는 공리주의적 사고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위 99%의 부와 소득을 상위 1%로 이전하는 반동적 계급혁명인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신고전파경제학)를 제외하면, 최대다수의 구성원에게 최대의 복리를 제공하겠다는 공리주의적 사고는 결과를 중시(효용)하는 행정의 영역에서는 절대적 지위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의 최대행복(투자 대비 산출의 효용)을 측정할 수 없지만, 개개인이 자신의 선호에 따른 최대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줌으로써 이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이 공리주의자의 주장입니다.  



복지 쾌락주의(Welfare hedonism)에서 출발한 공리주의가 그것에 대한 비판들에 의해 '비쾌락주의적인 정신상태의 효용'과 '선호의 충족', '충분한 정보에 바탕을 둔 선호들'까지 영역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것도 개개인의 만족도를 직접 측정하는 대신 개개인의 만족도를 극대화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간접적인 방식을 취함으로써 행정을 통해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들을 망라하게 됐습니다(프롤레타리아의 혁명에 의해 궁극적 자유가 실현되는 마르크스의 무계급사회인 '자유의 왕국'도 공리주의적 이상향이다). 



공리주의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이 네 가지 방식에 대한 각각의 정치철학적 비판ㅡ특히 자유주의적 비판이 확고하게 제시됐지만, 보수 성향의 충청도라면 이런 비판들은 아무런 힘을 가질 수 없습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효용에 대한 공리주의적 네 가지 옵션(설명방식)은 모두 다 비판에 직면해 상당한 영향력을 상실했지만, 물질적 풍요를 맹신하는 한국적 행정에서는 최고지도자가 구현할 수 있는 최대치에 가깝습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18년 6개월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 고도성장을 통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에 근접한 것(국민을 만족하는 노예로 만드는 물질적 풍요의 증가)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풍요만이 아니라 정신적 풍요를 넘어 충분한 정보까지 주어진 상태에서의 개인적 선호까지 만족시켜준다면 공리주의적 행정에 반대할 구성원은 찾기 힘들 것입니다. 진보적 직업정치인이 보수적인 충청도에서 최고행정가로서 성공적인 결과를 도출했다면 그 경험적 확신(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철학적 구분에 연연하지 않는 행정적 성공의 경험들이 축척된 것)은 이전의 모든 것들을 바꿀 수 있을 만큼 강렬했을 것입니다. 대통령이 되면 '선의에 기반한 대연정'을 하겠다고 말한 것도 이렇게 해서 나왔다고 봐야겠지요. 



미래의 결과를 중시하는 공리주의는 과거의 잘못을 단죄하기보다는 미래의 번영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청산세력과의 연정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드 배치 관련해서도, 위안부협상에 관련해서도 공리주의적으로 접근하면 기존의 결정을 가지고 최대의 이익을 끌어내는 점에 집중하게 됩니다. 세월호참사에 대한 정부의 대처에서도 진상규명에 따른 책임자 처벌보다는 재발방지에 방점이 찍힐 수 있습니다.  



오늘의 썰전에서 안희정이 보여준 것도 이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안희정이 말하는 '정의의 실현'(민주주의의 목표)이 정치보다는 행정적 경험에 기반함은 오늘의 썰전은 물론, 그외의 프로와 '즉문즉답' 등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강조한 것이기도 하고요. 성공의 경험들은 확신을 강화하고, 그것은 아무리 민주주의를 강조한다 해도 엘리트주의적 면모(철인정치를 주장한 플라톤이 가장 엘리트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보수주의자였다)를 보이기 마련입니다.  



'성공한 행정가로서의 함정'이라는 것이 있다면 안희정에게 적절하지 않을까 합니다. 민주주의와 정치를 신념와 가치에 기반한 적극적인 참여(토론을 통해 합의에 이르지 못했을 때 집회와 시위, 여론전 등을 통해 자신의 뜻을 실현하는 시민불복종과 정치행위까지 포함)를 통해 정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결과지향적 공리주의로 접근하면 '전체주의의 기원'으로서의 플라톤적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도 괘찮은 결정처럼 보입니다. 자유가 늘어나는 만큼 개인의 책임과 리스크도 늘어나는 법이니까요(예를 들면 직업 선택의 자유가 늘어나면 직업을 가지지 못할 리스크도 늘어난다). 위험과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만족하는 노예로도 충분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동의하지 않겠지만, 엘리트적이면서도 보수적인 성향을 보인다는 점에서 안희정과 이재명은 동일합니다. 첫 번째로 안희정과 이재명은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최대의 복지를 창출하기 위해 행정가(특정 지역의 최고 권력자)로서 지속적인 성공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자기확신이 강한 엘리트주의적 성향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로 안희정은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효용을 중시하는 공리주의적 결과에 집중하고, 이재명은 폭력적 혁명을 통해 결과적 평등를 중시하는 구좌파적 사고(이재명과 손가혁의 조합이 가능한 것도 이 때문)와 상당히 근접하다는 점에서 보수적입니다(가난한 사람들이 보수정당에 투표하는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서 연원한다). 



이재명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의 확장성은 아무리 많은 토론을 한다 할지라도 절대 늘어나지 않을 것입니다(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로 다룰 생각). 이재명의 확장성은 그가 구좌파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정당 지지자들로의 확장이 최대치일 것이기 때문에 당내 경선은 물론 본선에 진출한다 해도 전국적이고 계층적인 확장성은 세 명의 후보 중에 가장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재명이 구좌파적 접근보다 신좌파적 접근에 눈을 뜨면 엄청난 폭발력을 보일 수 있을 수도 있겠지만, 현재의 정치철학을 고집하면 대통령보다는 진보민주정부의 노동부 장관에 적합할 것 같습니다.   





이 두 사람에 비해 문재인은 탈물질주의적이고 개인적이며 자유주의적인 신좌파(조기숙 교수가 주장하는 신좌파로 엄격하게 구분하면 진보적 자유주의를 말한다. 구좌파의 프롤레타리아는 현재의 정규직에 가깝지 비정규직에 가깝지 않다. 구좌파적 의미에서의 노동자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구좌파는 패미니즘과 연동되는 부분이 협소하지만, 신좌파는 패미니즘과 광범위한 연동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확장성이 크다. 문재인이 패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도 이래서 신좌파적이다. 유럽에서 양성평등지수가 높은 것은 70년대를 풍미한 신좌파의 패미니즘운동 때문이었다)에 가깝습니다. 



정치철학적으로 구분하면 상당수가 신좌파(진보적 자유주의)에 포함하는 19~20대의 유권자들이 안희정과 이재명에 비해 문재인에 대한 지지율이 높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신좌파는 '차이의 정치'와 '인정의 정치'를 넘어 개인적 선호에 따라 환경과 생태, 남녀평등, 소수자 권리, 동물권 등을 주장하기 위해 경제성장을 포기할 수 있다는 것까지, 탈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정치로 발전했는데 안희정과 이재명에게는 이것이 부족합니다. 안희정이 이재명보다는 신좌파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선의에 기반한 대연정'과 '기본소득과 청년배당'을 들고나온 두 사람의 지지율이 10%대에서 정체된 것도 변화된 정치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문재인도 일정 부분 이런 면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두 사람보다는 낫습니다. 



아무튼 선택의 각자의 몫입니다. 그렇다 해도 문재인과 안희정, 이재명이 하나의 정당에서 경쟁하고 공생하는 것을 보면 더불어민주당의 정치철학적 스펙트럼이 엄청나게 넓은 것은 확실합니다. 특히 정의당 후보였으면 가장 적절했을 이재명이 더불어민주당의 경선에서 2위를 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진보정당의 미래만 놓고 보면 암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민노당 의원들에게 집권을 하려면 세상을 보는 눈이 보다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고 충고한 것이 생각나는 오늘의 썰전이었습니다.




P.S. 권위와 권위주의가 다르고 민주화와 민주주의가 다르듯이, 보수적 성향과 보수주의는 다릅니다. 마르크스는 모두가 평등해지는 '자유의 왕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단일한 이익을 공유하는 계급으로서의 노동자)를 교육하고 조직해서 폭력혁명을 일으키게 하는 공산당과 전위를 필수요소로 봤는데, 둘의 공통점은 권위주의적 위계서열(보수적 성향)을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극소수의 자본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려면 절대다수의 프롤레타리아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권위주의적 위계서열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그러하듯이, 마르크스주의가 기독교(일신교)의 교리처럼 권위주의적이고 교조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전체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점에서 (마르크스적) 구좌파와 신좌파는 동일하지만, 역사의 필연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탈물질주의를 중시하는 신좌파가 역사의 필연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물질주의와 계급적 이해를 중시하는 (마르크스적) 구좌파와 다른 점도 여기에 있습니다. 벌레와 짐승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일베가 전체주의적 폭력성을 당연시하는 박사모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극과 극이 통하는 것처럼 수단과 과정에 있어 일베와 박사모, 구좌파는 상당히 유사하지만, 마르크스의 성찰과 레닌-스탈린의 성찰이 목표로 하는 세상 또는 체제(전자는 민주주의, 후자는 전체주의)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런 인지부조화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유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마르크스의 부활이 정답으로 보이는 부분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로 다루겠습니다. 1~2년 전의 필자처럼, 이완배 기자가 가끔씩 정치경제학적 오류에 빠지는 것도 이 때문인데 그것까지 쉽게 풀어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