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밖에도 작은 마을 단위의 시장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유럽 전체를 넘어 전 세계에 적용될 자유시장(정확히는 자기조정 시장) 개념을 그렸던 18세기 경제학자들의 고전경제학이 지닌 치명적인 오류와 그것에서 출발한 시장 실패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뉴턴역학과 다윈의 진화론에 경도된 고전파경제학자는 인간 이성과 도덕률에 대한 지나친 믿음과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자연의 법칙(칸트가 말한 기계로 부터 나온 신에 기원한다)에 함몰돼 자기조정 시장의 허구성과 자본의 폭력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부족했고 진보(양적 성장)의 필연성에 함몰됐다.
또한 천사의 모습으로 다가와 ‘빚도 자산’이라는 무한대의 신용 창출을 부추긴 사탄의 후예들과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유지될 수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경험의 부족, 비용-편익적인 면에 매몰된 공리주의의 범람, 결국에는 잘 될 것이라는 결과의 낙관론에 빠져 동원 가능한 수단에 집중하면서 천연자원을 바닥내고, 생태계를 파괴한 성장지상주의, 기술공학적으로 생각하는 관료제의 본질과 속성에 대해서도 살펴봐야 한다. 국가이성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관료제와 중상주의, 중농주의, 도시의 발전과 확대, 경제표의 등장과 통계학과 관방학(내치)의 발전 등과 함께 한 근대국가의 탄생도 살펴봐야 한다.
이성이라는 종교가 불러온 과학기술 분야 전문가들의 무책임하고 탈윤리적이며 관료화된 파벌 행태, 채점을 통해 등수를 매기는 교육의 등장과 진화를 거부하는 식물화, 부르주아의 세력화가 능력주의로 변질되며 무한경쟁이 확대되는 경향 등이 모든 개인들로 하여금 탐욕의 춤을 추게 만들었고, 결국에는 신용을 창출한 극소수 고리대금업자의 수중에 모든 것이 넘어가도록 진행된 필연적 귀결도 들여다봐야 한다. 통제와 관리기술의 발전에 따른 삶-정치의 등장과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확장도 살펴봐야 한다.
이런 수많은 원인과 결과들이 쌓이고 쌓여 민주주의에 대한 시장의 우위는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무모하기 그지없었던 존 로크가 개인의 소유권을 신의 이름으로 불가침한 것으로 만들면서 시작된 부의 불평등과 그에 따른 인류의 퇴행은 이제 ‘더는 나빠질 것이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노인은 죽지 않고, 여성은 소비되고, 남성은 퇴행하고, 아이는 태어나지 않으며, 자연은 파괴되고, 생명의 다양성은 파국에 이르렀다.’ 이것이 근대이성이 현대(성)를 창출하며 지구에 던져버린 결과의 낙관론이 초래한 현실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 필자의 결론이다.
부분적으로 닫힌 세계인 지구에서 부와 권력의 원천인 한정된 자원의 소유권을 독차지하려는 갈등의 폭발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다고 해서 ‘공짜 점심은 없다’거나, ‘더 이상 사회의 구제는 없다’거나, ‘적자생존이 진화의 법칙’이라거나, ‘자연의 상태의 인간이란 모두가 모두에게 늑대’여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그치지 않는다거나,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해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은 지상최고의 거짓말 중 슈퍼울트라 거짓말에 속한다.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면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기 때문이며, 모두에게 책임을 져야할 근거인 공정한 분배가 행해지고 공평한 기회가 주어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칼 포퍼의 지적처럼, 수없이 많은 대량학살과 자원을 둘러싼 전쟁으로 얼룩진 인류의 역사란 소수의 승자와 강자를 위한 대량학살과 인종청소와 야만적 폭력의 역사였다. 개인에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마저 박탈해서 이익의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빅데이터 구축과 활용(이것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다면 구글 관련 책들을 보기 이전에 제임스 베니거의 《통제 혁명》부터 봐야 한다)을 처음 생각한 사람들 중에 한 명이었던 필자가 인류의 위대한 현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조금은 거칠고 조잡하며 비약에서 자유롭지 못할망정 갈수록 심해지고 빈번해지는 미세먼지를 뚫고 걸어가는 심정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려 한다.
그런 과거로의 여행 속에서 현재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라도 생긴다면, 그래서 최소한의 탈출구를 찾을 수 있다면, 그 이상의 바람은 없을 것이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때로는 무모할 수 있는 충동으로 인해 뜻하지 않는 기적을 이루고는 한다. 설사 기적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세상을 향해 저항할 수 있는 무엇이라도 건질 수 있다면 과거로의 여행을 못할 것도 없고, 반드시 해야만 한다.
이제는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필요한 시간이다. 인류가 진보한 모든 분야에서 파국적 퇴행이 진행되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주에서 유일하게 진화된 생명체가 살고 있는 지구의 엔트로피(무질서도)가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인정해야 한다. 앞으로도 이 '작고 푸른 별'에서 살아야 하는 미래 세대들을 위해 파시즘적 속도로 달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기차’부터 멈춰 세워야 한다. 당장 브레이크를 당겨라! 너무 늦었지만 파국적 퇴행을 이끌고 있는 자들을 향해 미래세대의 이름으로 분노해야 하며, 목숨을 걸어서라도 투쟁해야 한다. 나만 살겠다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브레이크를 있는 힘껏 당겨 기차를 세워야 하는 이유는 넘치도록 많다.
이 정도면 속을 만큼 속았다. 경제가 성장했음에도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핍박해졌는지, 부모를 공양하고 자식을 교육하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워졌는지, 가망도 없는 노후대책을 세우기 위해 20대부터 비정규직을 전전해야 하는지, 노인빈곤율과 자살률과 이혼율이 왜 이렇게 높아만 가는지, 평균수명은 늘었지만 왜 이렇게 만성질환에 시달리는 기간이 늘어났는지,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왜 이렇게 폭발적으로 늘어나는지, 하우스푸어와 렌트푸어가 왜 이렇게 늘어나기만 하는지, 아무리 많은 스펙을 쌓아도 왜 취직이 안 되는지, 고생고생을 해서 이 자리까지 올랐는데 왜 다음 번 별도의 통지가 있을 때까지만 나의 자리가 유효한 것인지,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왜 이렇게 많은 공포들이 나를 엄습하는지, 힘겹게 쟁취한 민주주의가 왜 끝도 없이 퇴보하는지, 이제는 멈춰 서서 세상을 향해 물어야 하고, 원인을 파악해 최소한의 해결책이라도 찾아야 한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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