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

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 ㅡ 진실을 마주할 용기2



‘탐욕의 삼위일체’가 주도한 문명의 재구축은 홉스가 바랐던 최고주권의 《리바이어던》에 근접하면서도,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와 ‘환상의 짝꿍’을 이룬 자유주의(푸코가 말한 통치술로의 자유주의)를 지배적 이념으로 끌어올렸다. 부분적 진리에 불과한 진보에 대한 대책 없는 낙관론이 보편적 진리가 됐고, 성장의 독점으로 발생한 불평등과 위험의 확대는 국가와 사회의 책임에서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겨졌다. 



이런 방식으로 ‘진보의 낙관론’에 절대적 권리를 부여한 ‘탐욕의 삼위일체’는 산업혁명의 발생지 영국을 거쳐 천혜의 조건을 갖춘 미국에 정착하면서 ‘자유민주주의’라는 체제을 건국이념으로 정립하면서 유일제국의 탄생을 알렸다. 풍요만 생각하면 되는 천혜의 땅에서 미국의 지배엘리트(WASP, 앵글로색슨계 미국인 프로테스탄트)은 국가를 기업화 했고, 기업과 개인의 이윤 추구 행위를 신의 영역에 올려놓음으로써 민주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압도적 우위를 확보했다.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다룬 1929년의 경제대공황은 ‘탐욕의 삼위일체’가 해체될 최대의 위기였지만 뉴딜정책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고비를 넘긴 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같은 국지적 전쟁들과 세계적 차원의 파시즘적 개발을 통해 거뜬히 재기에 성공했다. 계산이 불가능한 천문학적인 비용과 수천만 명에 달하는 죽음, 회복불가능한 환경파괴의 대가로 부활한 ‘탐욕의 삼위일체’는 제조업의 생산량을 폭발적으로 늘린 노동 분업(포드자동차의 노동 분업이 분기점)을 전 세계적 차원으로 분산배치한 포스트포디즘을 단행하면서 전 지구적 시장구축을 위한 성장과 개발의 엔진을 본격적으로 가동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전성시대를 만들어낸 포스트포더니즘의 본질은 저임금 노동력을 착취하고 산업의 위해요소를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이전한 것으로, 식민지 팽창(제1차 세계화)에 이은 제2차 세계화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세계의 공장으로서 중국이 환경오염을 동반한 저임금노동의 천국으로 등장했지만, 매년 중국을 뒤덮고 있는 스모그가 한반도를 거쳐 미국까지 공습함으로써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성장의 대가는 위험의 확산이었고 노동착취에 따른 부의 불평등이었다.



1, 2차 오일쇼크와 미국의 강 달러 전략 때문에 국가부도 직전에 이른 소련연방이 해체되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무너지자, 자유시장 자본주의 진영에서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라는 어리석은 선언들이 속출했다. 속빈강정이자 속물들의 경연장이었던 ‘제3의 길’은 무차별적인 성장 엔진의 출력 향상에 상당한 기여를 했을 뿐, 인류를 위한 제의 길은 찾지 못했다. 



석탄을 대체한 석유의 에너지혁명과 석유의 정제기술의 발전 및 플라스틱의 탄생으로 자본주의 전성시대는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였지만, 전 세계적인 성장이 가속화됨에 따라 인류와 자연은 각종 위험에 노출되는 부작용을 감수해야 했다(울리히 벡의 《위험사회》와 《글로벌 위험사회》를 보라). 핵발전의 급속한 확대도 위험의 확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지구온난화를 가속화시켜 인류의 공멸을 걱정해야 할 처지까지 내몰렸다.  



인류를 부흥시킨 석유의 역사(에너지전쟁의 역사)는 자본주의 전성시대의 역사이자, 제국주의와 유일 제국이 전 세계를 착취하는 탐욕의 역사였다. 인류(특히 미국, 최근에는 중국이 가세)가 석유를 사용함에 있어 미래세대의 사용과 자연에 미치는 영향을 염두에 두면서 속도 조절에 성공했다면, 지금 같은 파국적 결과를 초래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에너지 혁명과 대규모 채굴은 언제나 파괴를 동반했고, 그 핵심에 '물보다 싼 석유'가 자리하고 있으며, 높은 이율로 개발비용을 제공한 거대 자본(특히 영미의 거대 금융업체)과 석유 확보를 위해 전쟁을 일삼은 군산복합체의 탐욕으로 얼룩졌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산업의 내부에서는 숙련된 남성 노동자의 퇴출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그 빈자리들이 저임금 여성 노동자들과 어린 청소년들로 대체되고 있었다.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을 장려하는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인류 역사상 비정규직 알바로 평생을 전전하는 세대가 탄생했다. 이는 뒤늦게 서구의 모델을 좇아가는 신흥국과 가난한 나라에서 선진국까지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으며, 자본주의적 노예의 등장과 세습자본주의로 이어지고 있다. 지배적 산업의 형태도 중후장대한 제조업 중심의 무거운 경제에서 과학기술과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따라 가벼운 경제와 서비스 산업 위주로 재편되고 있다 . 



고용의 질과 조건을 열악하게 만든 노동유연화와 직장을 구하기 위한 이동의 거리가 넓어지면서 가족과 사회가 붕괴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국민국가의 독점적인 주권도 전 세계적인 시장권력으로 넘어가고 있다(노무현 전 대통령은 모두가 아는 이 추악한 비밀을 최고 지도자가 공식적으로 발설했다는 이유로 ‘탐욕의 삼위일체’에 빌붙어 사는 집단들의 융단폭격에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다.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서는 후반에 다루겠다). 



성장과 개발이 전 세계적인 규모와 파시즘적 속도로 이루어질수록 자원은 고갈되기 시작됐고, 자연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이에 따라 대기의 질은 급속도로 나빠졌고, 화학비료의 대량사용에 따라 토지의 오염과 물의 산성화가 빠르게 진행됐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이 모든 부정적 결과들이 치명적인 지구온난화와 광범위한 사막화, 대규모 개발이 초래한 환경오염에 따른 수질 악화(물 부족 사태의 핵심)로 집결되고 있다. 기상이변의 속출은 국가적 차원에서 대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부정적 세계화에 따라 기업과 국가간 경쟁이 전 지구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저임금의 고착화와 노동유연화에 따른 상시적 구조조정과 대량실업이 보편화됐다. 이 때문에 새로운 빈곤과 결핍에 시달리는 사회계급이 탄생했고, 부와 위험의 불평등한 분배가 기회의 불평등과 합쳐져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이익의 독점을 위해서는 단 한 발도 양보할 생각이 없는 ‘탐욕의 삼위일체’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의 직전까지 지구라는 행성과 말하지 못하는 자연과 그저 죽어갈 뿐인 동식물과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인간의 조건까지 최악으로 내몰고 있다. 





가족과 사회의 몰락은 특히 여성과 아이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고, 성 평등이란 미명 하에 경제적 불평등과 취업의 불안정을 동반하는 이혼이 증가일로에 있다. 대중매체와 손잡은 성산업의 발달은 상업적으로 포장되고 고무된 인스턴트 sex를 성해방으로 대체했고, 상시적이고 일방적인 피임만 번창시키는 부작용을 속출시켰다. 사랑이라는 개념은 결혼이라는 개념처럼 거추장스럽고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적인 것이 됐다. 



인류라는 추상적이고 공간적인 개념을 동시대의 정치·경제·문화적 개념으로 바꾸는데 성공한 매스미디어의 화려한 비상은 자신의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선정적인 타국의 사건들과,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차이를 반영하지 않은 경험들을 실시간으로 안방과 거실로 전달함으로써 스크린 상에 보이는 것과 자신의 현실 간의 심각한 인지부조화를 양산해냈다. 인류를 소비지상주의에 매몰되고 순간적인 쾌락에 함몰되도록 만든 것은 매스미디어가 만든 최대의 업적이다. 



TV와 인터넷, 스마트폰의 등장은 과학기술 발전의 필연적 결과였지만, 국가와 사회, 가족의 몰락과 해체에 가속도를 붙였다. ‘탐욕의 삼위일체’는 마이다스의 손이어서 그들의 손이 스쳐간 곳들은 모든 부를 뺏긴 채 하나같이 폐허의 공간으로 변해버렸다. 공격 일변도의 남근과 근육질로 대표되던 남성의 권력은 임금이 줄어들고, 실업의 기간과 횟수가 늘어나면서 초라하게 찌들어졌고, 그만큼 자본과 초국적기업의 금고는 가득 채워졌다. 자궁으로 대표되는 여성의 권력은 경력단절과 양육권이라는 빈곤의 위험성에 무방비로 노출됐고, 그만큼 자본의 금고는 더욱더 채워졌다





이 모든 것이 서로의 성에 대한 자유와 평등의 이름으로 진행됐는데, 남성은 노년에 대한 두려움과 sex파트너에 대한 비용증가와 근육질의 연성화로 말년의 외로움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어둠의 심연으로 떨어졌다. 여성은 성적 자기결정권이 강화되고, sex파트너의 숫자는 늘었지만 항시적인 피임과 낙태의 증가, 건강의 악화와 만성적인 스트레스(정반대도 있다)에 시달리게 됐다. 



남성 위주의 경제구조가 여전하기 때문에 저임금 노동과 경력 단절에 따른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고, 확실하게 유전자의 반을 전달했다는 생물학적 판타지(자녀에게 투사된 슈퍼맨콤플렉스와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대표적)에 사로잡힌 부모들은 자녀에 대한 과잉투자라는, 그래서 자본의 금고만 채워주는 집착과 빈곤의 악순환에 빠져들었다. 



사회는 대중매체와 인터넷에 의해 공적인 기능이 해체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드라마와 영화, 예능과 토크쇼, 리얼리티쇼, 스포츠경기 결과와 돈이 되는 모든 분야에서 성공한 대중화된 스타들의 자질구레한 일상과 스캔들에 빠져들었다. 각종 오락 프로와 리얼리티쇼의 득세는 연예인과 스타를 넘어 소시민의 사적인 일상까지 대화의 주제로 끌어들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치적이고 사회경제적인 공적 공간이 사적인 것들로 채워지기 시작함으로써 지배엘리트와 피지배층의 분리(정치혐오와 무관심의 폭증)가 본격화됐다. 공적인 것들이 사적인 것들에 점령됨에 따라 공적 공간으로서의 정치적인 것들과 서민의 안정망으로서의 사회는 존재의 근거를 상실했다. 시민정신이란 존재할 수 없고 시민단체마저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시대로 접어들어 민주주의마저 작동 불능의 상태로 내몰리고 있다.  





전 지구적 시스템을 구축한 시장권력에 맞설 수 없는 국가(정부)는 주권의 행사를 국내로만 돌려 ‘탐욕의 삼위일체’가 남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만 전력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자유와 진보(성장과 개발)의 이름으로 행해졌고, 사회민주주의의 퇴조와 함께 복지의 축소가 뒤를 따랐다. 사회와 국가의 쇠퇴로 사회경제적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반이 해체되고 자유의 공간마저 파고들어 기본적 권리마저 침식시켰다.



거의 모든 장벽들을 제거한 ‘탐욕의 삼위일체’의 폭주는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두려워했던 것들(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커지면서 정치적 자유마저 박탈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전체주의적 성향과, 이기적인 성향의 강화에 따른 공적 이슈에 대한 국민들의 무관심)을 현실화시켰으며, 유일제국 미국의 몰락과 유럽의 경제위기, 식민지 경험이 있거나 ‘자원의 저주’를 겪고 있는 나라에서 항시적 내전상태가 고착되고 있다. 



이밖에도 어제까지 이웃이었던 사람들에 대한 인종청소를 동반하는 항시적인 국지전과 ‘탐욕의 삼위일체’를 비난하면서도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테러리즘의 무한 확장(미국이 주도하고 있다)이 거대한 폭력시장을 양산하고 있다. 집단과 집단, 집단과 개인, 개인과 개인 간의 끊임없는 갈등과 분쟁들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어디서도 안심할 수 없는 공포가 유동하는 세상이 도래했고, 부의 불평등과 위험의 불평등은 교차하거나 중첩됐고, 그에 따른 비대칭적 종말(빈국과 빈곤층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이 전 지구적 경향으로 퍼져나갔다.





이제 세상은 구글 회장 슈미트가 ‘수없이 많은 인공위성이 하늘을 날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광기 어린 선언처럼, 개인의 사생활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절대 권력자 빅브라더의 출현을 목도하고 있으며(특히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과 《유리감옥》을 보라),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예언한 쇼비즈니스 세상도 보편적인 현상으로 일상화됐다(특히 닐 포스트만의 《죽도록 즐기기》를 보라). 



모든 파국의 징후들과 상시적인 내전상태, 무차별적인 자살 테러들이 ‘오늘의 뉴스’를 점령하고, 모든 것을 오락화하는 공적 공간의 사적화가 강화됨에 따라 정치의 실종과 사회의 몰락이 동시에 일어났다. 저임금 비정규·파견·임시직과 장기 실업이 일반화되고, 승자독식과 성공지상주의가 당연시되고, 실패의 책임에 이어 위험과 공포의 재분배가 개인화된 세상에서 ‘탐욕의 삼위일체’는 1%에 의한 99%의 배제와 소외를 만연시키고 있다. 



슈퍼클래스로 불리는 1% 내에서도 하위 0.9%는 ‘다음번 별도의 통고가 있을 때까지’만 그들만의 리그에 머물 수 있다. 이 상태로 신자유주의적 가치가 계속된다면 인류의 부는 0.1%의 수중에 집중될 수밖에 없고, 나머지 99.99%는 소득과 자산의 차이에 따른 자본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경제규모가 커지고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인류의 삶은 퇴행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