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부터는 텔레비전과 신문으로 대표되는 제도권 언론의 영향력을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의 SNS와 아고라와 오늘의유머 같은 각종 커뮤너티와 그룹들의 네트워크가 넘어설 수 있을지 시험해보려고 합니다. 지난 4년 6개월 동안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4년정도는 아고라에도 올렸습니다. 6개월 전부터는 오늘의유머에도 글을 올리기 시작했고, 두 달 전부터는 페이스북에도 올리고 있습니다. 





제가 아고라에 올린 글 중 19만의 조회수를 기록한 것이 최고였습니다. 글이 퍼날라지는 것을 감안하면 100만 명 정도가 읽었을 것이라 추산됩니다. 하위 99%가 상위 1%의 착취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필자의 모든 글이 이 정도에 이를 수 있고, 저 말고도 10명 정도의 논객들이 비슷한 조회수를 기록할 수 있다면 쓰레기들의 현실왜곡과 이익 독점에 맞설 수 있는 민주주의의 공론장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정도에 이르면 미네르바처럼, 저와 논객들도 국정원과 정치검찰의 수중으로 넘어가겠죠. 그들은 초법적 코걸이와 귀걸이를 가지고 있어서, 어디에 걸던 저와 논객들을 법정으로 끌고가 재기불능의 만신창이로 만들겠지요. 아고라가 정권의 집중포화에 굴복해 조회수 1만도 넘기기 힘든 상황을 감안하면 오유에서 몇 만의 조회수를 올린다 해도 그저그런 찻잔 속의 태풍도 되지 못합니다.  



제가 페이스북으로 활동 영역을 넓힌 것은 제 고정관념을 깨뜨린 하나의 글 때문입니다. 제 건강 상의 문제와 티스토리의 폐쇄성 때문에 일일방문객이 천 명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떨어진 상황에서 한 편의 글이 6,000명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한 것입니다. 블로그의 유입경로를 살펴보니 페이스북 이용자들의 방문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글이 페이스북에서 통하지 않을 것이란 고정관념 때문에 그곳에서의 활동은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연동에 그쳤습니다. 





게다가 제 글에는 광고가 실려있어서 페이스북 이용자들이 반기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2천만원이 넘은 도서구입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서 광고를 실었는데, 이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분들이란 4년 동안 저를 지켜본 애독자와 6~10명 사이를 오갔던 후원자를 빼면 페이스북에선 거의 없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 상위 1%의 광고와 협찬에 따라 재갈거리는 쓰레기들의 무비판적 보도와 노골적인 왜곡에 맞서는 글을 쓰면서 광고비용으로 도서를 구입하는 제가 그들과 무엇이 다른지 헷갈리기도 했습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실정 때문에 조기 레임덕에 빠진 박근혜를 지켜주기 위해 엽기적이고 선정적이며 폭력적인 사건·사고만 다루는 쓰레기들의 보도에 맞서, 하위 99%를 지옥으로 내모는 것들의 실체를 밝히는 필자의 글들이 보다 많은 조회수를 기록할 수 있다면, 저보다 뛰어난 논객들도 주 활동무대를 페이스북으로 옮기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불의하고 부정한 상위 1%의 천국을 무너뜨리려면 SNS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절대적입니다.  



제가 두 달 동안 페이스북에 전념한 결과, 페친의 네트워크만으로 쓰레기 언론을 상대할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래서 가능하면 많은 그룹에 가입했습니다. 그럴수록 제 글의 중복 노출이 많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반발(이유도 모른 채 일부 기능의 정지를 당했다)도 심해지리라 생각하지만, 한 분에게라도 더 노출될 수 있다면 상위 1%의 압도적인 힘에 맞설 수 있는 꿈의 네트워크가 구축될 수 있으리라 믿게 됐습니다.      



사이버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커뮤너티와 그룹이 존재합니다. 그들의 숫자는 하위 99%의 열망과 희망, 절망과 체념이 동시다발적으로 공존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푸코가 말했듯이, 그들은 그들만의 세상에서 상위 1%와 다양한 저항점을 형성하면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저항의 지평선을 넓히는데 성공했습니다. 다양한 기호와 지향에 따라 파편화되거나 정예화된 이들을 보다 촘촘하게 연결할 수 있다면 혁명적 변화도 가능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제도권 언론에서는 종적을 감춘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 역사교과서의 국정화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저항, 위안부협상을 받아들일 수 없는 청춘들의 희생적인 소녀상 지키기, 이재명과 박원순 시장의 활약상과 정치철학 및 복지실험, 노동개악에 맞서 힘겨운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백남기 농민의 근황, 말도 안 되는 법 해석에 의해 법외노조로 전락한 전교조의 투쟁, 한국 정치사의 혁명을 이뤄낸 10만 명을 넘은 온라인입당 러시, 표창원에서 시작된 바람몰이가 김병기를 거쳐 조응천에 이르러 화룡점정을 찍은 대박행진 중인 문재인의 인재영입, 정의당과 노동당과 녹색당 등의 진보정당의 활약상 등은 페이스북과 트위터에서만 접할 수 있었습니다.



필자가 어떤 형태로든 연대의 필요성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은 하위 99%의 진실과 정의는 이곳에 있었고, 넘칠 만큼 많은 호응을 얻고 있지만, 그것들이 각개전투나 게릴라전에 머물러 있음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의도적으로 뿌려지는 음란성 글들과 영상들이 커뮤너티와 그룹를 채우는 것들이 싫고, 특화된 내용만 다루려는 의도는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페이스북을 떠도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들이 각자도생의 파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든 돌파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회원이 늘어나면 커뮤너티 브레이커가 등장하기 마련이듯이, 촘촘한 연결이 늘어나 네트워크의 촘촘함이 강화되면 그것에 따른 반작용도 커지는 것은 불변의 진실입니다. 수많은 커뮤너티가 이런 과정을 겪으며 분열되고 폐쇄적으로 변한 것은 이해의 조정보다 갈등의 조성이 더 빠르고 쉽기 때문입니다. 상위 1%라는 체제의 지베엘리트들이 원했던 '구더기 무서워 장 못담그는 일'들이 일본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을 극복할 방법이 없는 필자로서는 단 하나의 선택만 유효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지난 2달 동안 페이스북에 집중하면서 조회수를 늘릴 수 있었던 노하우를 모든 논객들에게 오픈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의 콘텐츠가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늘어나 상위 1%에 맞서는 하위 99%의 힘이 커질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블로그만 고집하는 논객들의 보다 열린자세가 필요하다고 믿게 됐고요.    



머리를 스치는 여러 가지 부작용들이 있기는 하지만 '종잇장도 맞들면 가볍다'고 했습니다. 다양한 논객들이 다양한 분야에 대해 다양한 관점의 글을 쏟아낼 수 있다면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것이 수십 수백 배에 이를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필자가 글을 쓰는 목적이 평생 동안 읽은 책들(약 3,000권)과 상당히 특별했던 현실경험들을 통해 배우고 깨우친 것들을 나눠드리는 것이기에, 이에 동참하는 뛰어난 논객들이 늘어난다면 반칙과 특권이 사라진 상식과 원칙이 살아있는 사람이 먼저인 세상이 도래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닐 포스트만이 말했듯이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적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과학기술의 발전은 상위 1%에 힘과 돈을 몰아주는 적으로 많이 쓰였지만, 우리의 선한 의지와 정의 실현의 열망에 따라 친구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인간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문화지체를 피할 수 없지만, 최종적 결정은 우리가 내릴 수 있기 때문에 인간만이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NJ원시 2016.02.04 19:26 신고

    도령님이 보시기에, 페이스북과 블로그의 각각 장단점은 무엇인가요?

    • 늙은도령 2016.02.04 19:43 신고

      블로그는 소수라도 고정독자를 확복할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쓸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긴 글도 가능하고, 논리적 접근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티스토리는 이용자수에서 페이스북에 너무나 뒤떨어집니다.
      다음에서 특별히 다뤄주지 않으면 일일방문객이 천 명을 넘기는 것도 하늘에서 별따기입니다.
      꾸준한 노력이 있어도 수백 명에 머물기 일쑤입니다.

      페이스북은 그것에 비해서 나와 공통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그룹에 글을 올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 파급력은 매우 높습니다.
      저의 일일방문객이 하루에 42000명에 이른 적도 있습니다.

      무조건 페이스북 활동을 늘리십시오.
      글의 질도 중요하지만 목표는 더 많은 사람에게 이 시대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전하는 것이라면 페이스북은 하나의 오아시스입니다.
      님과 생각이 비슷한 그룹들을 검색해 가입하고 글을 올리기만 하면 됩니다.

  2. NJ원시 2016.02.04 19:51 신고

    도령님...아 답변 들으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페이스북도 일일방문객 숫자를 알 수가 있나보죠? 4만 2천명이면 어마어마한데요?

    여튼 정보 공유 감사합니다. 도령님의 블로그를 제 링크에 첨가해두겠습니다.

    보시기에, 블로거들 중에서, 추천하시고 싶은 사이트가 있으면, 몇 개 추천해주세요. 저도 링크해 두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6.02.04 20:54 신고

      추천할 블로그는 제 링크의 상위에 위치한 분들입니다.
      총선까지는 미친듯이 달려가야 하기 때문에 블로그거들을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총선이 끝나면 블로그 방문자를 늘릴 수 있는 방법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3. NJ원시 2016.02.04 21:01 신고

    옙 감사 합니다

  4. 공수래공수거 2016.02.05 08:28 신고

    그래서 방문자가 폭발적으로 늘으셨군요
    도령님의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으면 합니다

  5. 조남주 2016.02.07 17:06

    공감을 넘어 감동입니다~^^

  6. 식스파이 2016.02.18 00:24 신고

    좋은 글 늘 감사하게 보고 있습니다.

  7. 시골잔차 2016.07.11 20:48

    훌륭한 글 감사하게 보고 있습니다^^

  8. BC 2016.11.01 11:37

    페이스북 링크는 혹시 없을까요?
    검색해봐도 나오지가 않아서..

  9. 참교육 2016.11.08 08:24 신고

    선생님 대단하십니다.
    선생님 같은 분의 뜻이 전해서 세상이 자유와 평등을 실현되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10. 2018.01.18 22:49

    선생님 훈입니다 새해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몇번이나 통화시도 해봤으나 해외여서 잘 터지지가 않더라구요
    그래서 늦게나마 이렇게 인사올립니다 몸 건강히 2018년도 소망하시는일 이뤄지길 기원합니다
    요즘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통찰력(직관력)과 그 통찰을 접목시키는 능력이 성공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요??
    아직 멀었지만 특별한 제주가 없는 제가 갈고 닦을수있는 유일한 장점이 저 두가지라고 생각이 되는데 기술적인 한계를 경험하고 있습니다ㅎㅎ
    선생님과 구체적인 사업을 구상하고 실행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아직 수행이 부족한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저번에 말씀하신 선생님 본인의 장점이라고 말씀하신 직관력과 그것을 항목에 접목시키는 유연한 사고, 이 두가지에 매우 큰 공감을 했었는데요...
    올해안으로 선생님과 조그마한 사업이라도 본격적으로 논의 할수있게 노력하겠습니다

  11. 타리 2018.02.03 23:11 신고

    페이스북을 통해 방문자를 늘리는 방법이 요지인데,
    저는 그보다 글에 써주신 늙은도령님의 취지가 마음에 와닿습니다.
    영향력 있는 논객이 10명 20명 되고 수만 수십만에게 진실을 알려간다면
    세상이 조금씩 바뀌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라는걸요.
    저는 취미만 올리고 저품질 먹었는지 네이버유입도 없어서 일방문 천명뿐인 블로그인데
    그래도 가끔 적폐놈들에게 화가 치밀면 정성들여 글을 쓰곤 합니다.
    (문재인 세월호 고의지연, 중국방문 홀대 등등 사건때)
    그때 똑같은 생각을 하는거 같아요.
    내가 쓴 글을 10명 100명이라도 본다면, 나같은 사람이 점점 늘어나서 모두가 행동을 한다면
    그러면 썩은 쓰레기들을 처단하는 날이 좀 더 빨라질거라고요.



유시민의 트윗처럼, 없는 셈 쳐야 하는 박근혜를 국민의 분노로부터 구하기 위한 기레기들의 마녀사냥이 시작됐다. 살아있는 권력의 노예를 자처하는 정치검찰이 성완종 리스트를 없던 일로 되돌렸고, 당청정의 비호 아래 황교안의 인사청문회가 끝났으며, 책무를 포기한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내렸으니, 이제는 여왕 구하기를 위해 기레기들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 때 완벽하게 가동됐던 ‘박근혜 여왕 구하기’의 노하우를 살려 희생양을 찾는 것이다. 메르스 대란을 만들었던 대통령과 청와대, 방역당국의 무능력과 무책임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삼성서울병원에게 돌리고, 국민의 불안과 공포는 박원순에게 돌리면 가장 완벽할 터였다.



새누리당2중대 소리를 듣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포문을 열었으나, 삼성서울병원 관계자(원장도 아닌 감염내과 과장이다!)가 국가의 책임이라고 맞받아쳤다. 삼성서울병원은 삼성공화국의 오명을 벗기 위한 상징적인 존재라, 삼성서울병원을 비판하려는 야당의원의 책임 추궁에 ‘예, 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삼성서울병원의 경영진은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땅에 처박힌 위상으로도 계산 불가능한 피해를 입었는데, 메르스 대란의 희생양까지 하라는 야당의원의 다그침에 오만불손하고 제멋대로인 삼성서울병원 관계자가 곱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어차피 목가지가 잘릴 그로서는 이판사판의 심정이었으니, 정부를 향해 ‘빅엿’을 먹인 것이리라(그렇다고 소송을 피할 수 없다).





국민의 질타에 대국민사과를 하고, 억울한 피해자에게 충분한 보상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메르스 대란의 시비는 가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차피 삼성공화국이란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경제적으로 수천억은 넘을 브랜드 가치의 폭락을 최소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리라. 병원관계자들이 반드시 감춰야 할 무엇이 있었던가, 아니면 정부로부터 어떤 압력을 받았던 것이 있었던가?



기레기들이야 광고와 협찬이면 오체복지할 놈들이니, 이미 레임덕에 빠진 식물 대통령과 청와대를 향해 모든 죄를 뒤집어쓸 수 없다는 분명한 경고를 보낸 것이다(오만의 극치일까, 정말로 억울한 것일까, 둘 다일까? 하여간에 뻔뻔하고 재수없다!!). 어쩌면 상당수 국민이 박원순 시장이 삼성서울병원을 폐쇄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표출하는 상황까지 고려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삼성서울병원 관계자의 반발은 즉시 효과가 드러났다. 여왕 구하기에 돌입한 기레기들의 희생양 찾기가 삼성서울병원에서 방향을 틀어 다시 박원순 시장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메르스 대란의 진원지도 평택 경찰의 감염(4차감염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미스터리한 음성판정)을 기점으로 평택성모병원으로 되돌아갔다(대체 이 정부가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제 삼성서울병원을 폐쇄하지 못하는 책임은 박원순 시장에게 넘어갔다고 봐야 한다. 삼성서울병원을 폐쇄하면 서울아산병원을 비롯해 확진환자가 나온 모든 대형병원들도 폐쇄해야 하는 것(이럴 경우 의료대란을 피할 수 없다. 공공의료가 형편없는 상황에서 이것은 최악의 선택이다)은 고려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삼성서울병원 의사의 의식불명(유병언의 시신처럼 참으로 미스터리하다)은 박원순의 책임으로 돌리기에 최상의 자원이다. TV조선과 채널A, MBN에서는 ‘스트레스’ 운운하기 시작했다. 박원순 때리기에 앞장섰다 한발 물러섰던 YTN도 다시 박원순 때리기에 합류했다. 연합뉴스는 두 종편과 YTN만큼 심하지는 않지만 메르스 대란을 메르스 광풍(김무성은 지역경제 살리기, 문재인은 광폭행보)이라며 새롭게 설정된 프레임을 충실히 따랐다.



기레기들은 메르스 전염의 대체적인 경로를 파악한 이후에나 이루어진 박근혜의 사진 정치와 방미도 연기한 눈물겨운 국민 사랑(헐!), 김무성 대표와 장관들의 현장 방문을 보도하기 바쁘다. 한국인의 메르스 공포를 비아냥거리는 미국 보수매체의 저질 보도(결혼식 사진이 연출됐다는 설도 있다)를 퍼 나르고 서울시공무원시험 강행을 비판하며 박원순을 맹폭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메르스 공포가 과대포장된 것이며, 치사율도 감기보다 못한 1.1%(jtbc가 거짓임을 밝혔다)에 불과한데, 대권을 노린 박원순 시장(과 이재명 시장 등)이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경제가 마비될 정도로 불안과 공포가 확산됐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해경과 유병언 일족에서 막아낸 것처럼. 



삼성서울병원 관계자의 강력한 반발에 화들짝 놀란 기레기들은 창백한 얼굴로 돌아서며 박근혜 여왕 구하기의 진짜 작전명인 ‘박원순 희생양 만들기’에 집중하고 있다, 이재명 시장을 MSG로 만들어 음식 곳곳에 뿌려가면서. 이럴 때면 어디선가 반드시 나타나는 어버이 연합의 박원순 규탄 데모를 후식으로 제공하며.      



삼성서울병원이 메르스 대란의 책임소재를 끝까지 밝힐 생각이 아니라면, 집단적 단기기억상실증에 의해 지배되는 여론은 얼마든지 변할 수도 있다. 세월호 참사가 해상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로 재정의되고, 세월호특위가 세금도둑이 되고, 세월호 유족이 자식을 팔아 한몫 챙기려는 파렴치한 부모가 되고, 종국에는 종북세력의 조정을 받는 체제전복세력으로 빨간색이 칠해진 것처럼. 



기레기들의 박원순 죽이기가 도를 넘었다. TV조선과 채널A, YTN이 주도하는 박원순 죽이기는 '썰전'에서 강용석의 상식 이하의 발언들과 맥을 같이 한다. 정부방송 KBS는 시청료 인상을 위해 박근혜 띄위기에 여념이 없고, 황교안의 인사청문회에서 보고서 채택이 이루어지자 야당의 분열상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耽讀 2015.06.12 07:40 신고

    종편을 볼 때마다 과연 저들 정신은 건강할까라는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상대편에 대해 건강한 비판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써는 단어들도 극단적입니다.

    • 늙은도령 2015.06.12 15:12 신고

      미국의 보수방송을 보면 이렇게 합니다.
      폭스 TV 등에서 배워오는 것으로, 보수주의자들은 당연시 여깁니다.
      보수의 의식구조는 진보와 다릅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5.06.12 08:28 신고

    그나마 요즘 그래도 JTBC가 나은것 같더군요
    5시 정치부 기자~~.가 그래도 핵심을 짚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늙은도령 2015.06.12 15:12 신고

      그나마 jtbc가 있어 다행입니다.
      하나의 방송만 제자리를 찾으면 힘이 배가되는데 그게 안 되네요.

  3. 로키. 2015.06.12 12:18 신고

    우리나라 언론은 어디까지 썩어있을까요..

  4. 『방쌤』 2015.06.12 13:06 신고

    정말 어이가 없어서 이제는 헛웃음도 안나오더라구요
    기사에 올라와있는걸 보고는 들어가서 보지도 않았습니다
    안봐도 이제 뻐~~~~~언 하거든요

  5. 프리뷰 2015.06.12 16:38 신고

    빨리 공개했으면 이런 상황까지 안왔을것을....
    정말 실망입니다.

  6. 민주청년 2015.06.12 21:19 신고

    제목보고 팍 공감이 되네요.

  7. 평택사는 사람 2015.06.12 22:08

    더 무서운 것은 이걸 믿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정치와 사회현상에 관심없는 분들의 경우 대부분 동조하며 적어도 30퍼센트 내외로 투표에 반영되곤 하죠...

    • 늙은도령 2015.06.12 22:13 신고

      그래서 우리가 더 많이 투표장에 나가면 됩니다.
      지금은 정권을 바꿔야 한다는 열망이 큰데, 그것을 반드시 투표로 이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들과의 논쟁에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8. 울티 2015.06.12 22:49

    미쿡에서 입국허가 안 났나요 ㅎㅎ

    • 울티 2015.06.12 22:51

      짜고치는 고스톱을 왜치는지 알겠네요 ㅎㅎ

    • 늙은도령 2015.06.12 22:58 신고

      그럼요, 오바마가 바보가 아닌데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를 만나겠습니까?
      미국의 언론들이 오바마를 어마어마하게 비판할 텐데...
      입국허가를 받지 못한 것이 맞습니다.
      연기를 허락받은 것이지요.

  9. 하늘이 2015.06.12 23:31

    하늘의 섭리하심이 있기를 ~이 나라에 드리워진 어두운 기운이 거두어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ᆞ

  10. 하늘이 2015.06.12 23:34

    결국 사람들의 깨어 있지 못하는 의식이 모두가 혼란 스더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ᆞ
    이곳 부산도 자꾸 확산되어 가고 있고 전국구로 뚫렸습니다 ᆞ

    • 늙은도령 2015.06.13 00:15 신고

      답답한 것은 이 놈의 정부가 국민의 목숨을 우습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한 명이라도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상의 목표이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방역당국이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박근혜 정부는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이처럼 혼란이 커진 것입니다.




문제는 텔레비전이 오락물을 전달한다는 점이 아니라 모든 전달하는 내용이 오락적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ㅡ 닐 포스트만의 《죽도록 즐기기》에서 인용




인터넷과 SNS가 보편화된 지금에도, 거의 모든 정치학자들과 언론‧방송학자들은 텔레비전이 정치에 미친 영향이 측정불가능할 만큼 크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인터넷과 SNS에 익숙한 세대가 사회의 주축을 이루면 다른 판단이 나올 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텔레비전의 영향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인터넷과 SNS 상에서 다루어지는 컨텐츠의 원천이 거의 다 TV에서 나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해 다루었기에 이번 글에서 그에 대한 근거를 대는 것은 필요없으리라 봅니다. 





신자유주의 통치술이 일반화된 미국과 일본, 한국에서는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정치행위의 상당 부분이 돌아갑니다. 《죽도록 즐기기》의 저자, 닐 포스트만의 주장처럼 텔레비전은 자본과 권력의 광고와 협찬, 지원 등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의 정수입니다. 권력과 자본을 위해 돌아가는 신자유주의 통치술과 텔레비전이 한 몸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국민의 의식수준을 형편없이 떨어뜨린다고 해서 ‘바보상자’로 불리는 텔레비전이 처음 도입됐을 때, 정치인과 언론학자들은 전혀 다른 예상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텔레비전이 만들어낼 세상에 대해 온통 장밋빛 전망만 내놓았고, 정치의 수준과 민주주의가 한 단계 높아질 것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쏟아냈습니다. 방송생태계가 망가질대로 망가진 대한민국의 현실을 감안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칭찬들이 난무했습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주니어(대통령의 아들) : 텔레비전이 정치를 집안으로 가져옴으로써 ‘국가정책을 이끄는 사람들과 정책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나라 전체에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유권자에게 더 지적이고 일치단결된 행동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들은‧‧‧스스로 더 많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오린 던랩(최초의 뉴욕타임스 텔레비전 기자) : 카메라가 ‘정치의 빛과 그림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술책을 부리기가 더 어려워졌다. 그 어느 때보다 말과 얼굴 표정의 진정성이 중요해졌고, 정치 지도자들 또한 우리는 투명하고 지적인 정치가 열리는 순간을 앞두고 있다. 정치 후보들이 ’과거 정치인들이 역사를 바꾸고 만들어낸 호텔밀실이 아니라 국민의 앞에서 지명될 것이다.


토마스 듀이(1944년 194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 텔레비전은 엑스레이다. 정부의 사업을 모르고 있다면 그 날카로운 광선과 극명한 사실성을 오래 버틸 수 없다. 정치 운동에서 건설적인 진보를 이뤄낼 것이다.


제조업체 : 최초의 텔레비전 출시를 알리는 신문광고 중에는, 텔레비전이 보통 사람들에게 정치를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상품의 이점으로 강조한 광고가 많았다(리처드 생크먼의 《우리는 왜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가》에서 인용).





이런 잘못된 예측 때문에 정치와 텔레비전의 불륜은 모든 가정을 파탄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텔레비전 시청자가 정치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게 됨에 따라 모든 정치인들은 텔레비전에 노출되는 숫자가 늘어날수록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국민을 이분법의 노예로 만들려던 박정희가 흑백TV를 포기하고 컬러TV를 허용한 것도 시대적 변화를 더 이상 거역할 수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통치수단으로써의 텔레비전의 위력에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이재명이 연상된다).  



시청자인 국민은 그렇게 정당(계급과 계층적 이익을 대변하는, 즉 나의 이익을 대변해주는)과 정치인과의 직접적인 대면으로부터 멀어져갔고, 현장에 있는 느낌 때문에 방과 거실에 고립된 유권자로 파편화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루스벨트, 케네디, 레이건, 부시, 오바마, 트럼프에 이르기까지 1930년대 이후의 미국 대통령들은 텔레비전과의 불륜을 포기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정당의 후보를 선출하는 전당대회에서도, 심지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알려야 하는 무소속 후보도 정치의 맨 앞자리를 차지한 시청자를 향해 뜨거운 구애를 해야 했습니다. 정치는 그렇게 시민들을 능동적 참여의 현장이 아닌, 자신의 방과 거실로 물러난 채 카메라 앵글 속의 정치인의 언행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유권자로 변화시켰습니다. 정치인과 유권자 사이에 텔레비전이 들어섬에 따라 정치는 오락화되고 개인화됐으며, 이미지 마사지에 속아 철저한 검증에서 멀어졌습니다.



하지만 일방적이고 즉각적인 이미지 전달을 통해 생각하는 능력을 갉아먹는 ‘바보상자’라는 텔레비전의 본질에는 추호의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자본과 권력의 논리대로 움직이는 텔레비전은 맹자와 플라톤이 그렇게도 걱정했던 ‘무지하고 우둔하고 멍청한’ 국민들을 양산했습니다(TV를 많이 보지 않는 1020세대는 다르다). 아주 간단한 정치조작과 상징조작, 정보와 이미지 왜곡에 쉽게 넘어가는 그런 국민 말입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텔레비전의 지각방식이 인쇄를 통한 지각방식에 철저하게 적대적이고, 텔레비전을 통한 의사소통은 모순과 하찮음을 조장하고, '진지한 텔레비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텔레비전은 오직 한 가지 소리(오락의 소리)만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즉, 텔레비전은 시청자가 생각하지 않도록 만듬으로써 (의심하는 기능을 마비시키며) 방송의 지배력을 높입니다. 대한민국을 말아먹고 있는 종편의 성공도 똑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게다가 “텔레비전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린 시청자란 있을 수 없고, 텔레비전 없이 지내야 할 정도로 열악한 빈곤도 존재하지 않으며, 텔레비전의 영향을 받고 변질되지 않은 수준 높은 교육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우리 모두는 카메라가 잡은 제한된 각도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브라운관에 비치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이 없는 집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라면, 정치의 하향평준화는 극단에 이르렀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텔레비전 시청자들에게는 보는 것이 곧 믿는 것과 동일시됐으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우리의 속담처럼 국민들은 스크린의 포로가 됐습니다. 시청자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정치인의 표정과 동작, 말과 호흡까지 지켜봤기 때문에 그가 본 정치인이 그 정치인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인간이란 동물이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이 되는 방향으로 진화해온 것도 텔레비전의 성공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시청률조사와 동일한 메커니즘을 가진 여론조사의 활용은 “1950년대와 1960년대, 대중이 대단히 무지하고 비합리적이며 우리 정치가 신화에 의해 이끌려가고 있다는 증거가 축적되기 시작하던 바로 그 시기에, 정치 시스템은 과거 어느 때보다 대중에게 직접적인 지배권을 주는 방향으로 재편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조작되기 일쑤인 여론조사가 정치의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지위로 격상된 것입니다. 



“일단 여론을 과학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해지자 아무도 그것이 파악해야 하는 것인지 당위를 묻지 않았”고, “여론조사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 됐습니다. 최근에는 대중을 넘어 국민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고 두려워하고 바라는지를” 알기 위해 매주 다양한 여론조사가 이루어지고, 어떤 필터링도 거치지 않은 채 텔레비전을 통해 국민의 안방과 거실을 점령해버렸습니다. 



과학적이라는 전제가 붙어있기에, 일단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면 정치인들은 그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박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어서 정치적 자살행위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특정 사안과 이슈에 대해 명확한 의견이 없는 국민들은 여론조사기관에서 작성된 질문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임에도, 이에 대한 객관적인 검증도 없이 여론조사결과는 전파를 타고 시청자에게 전달됩니다.



조작되기 일쑤인 여론조사를 권위의 원천이자 시청자를 조정하는 핵심 수단으로 장착한 텔레비전은 정치의 수준을 갈수록 하향평준화시켰습니다. 광고와 협찬의 지원 하에 모든 것을 오락화하는 텔레비전은 출발의 시점부터 시청자들을 더 멍청하게 만들도록 설계됐지, 똑똑하거나 현명하게 만들도록 설계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방송종사자들은 시청자에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프로그램이 최악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국민들이 권한을 책임 있게 행사할 가능성이 적어진 바로 그 시점에 (권력과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기 일쑤인 여론조사와 텔레비전이 일반화됨에 따라)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권한이 국민들'에게 넘어가면서 정치의 하향평준화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텔레비전의 보급을 막을 수 없는 일이고, 여론조사를 하지 않도록 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은 피할 수도 없었습니다.  





토크빌의 성찰처럼 “국민이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지는 것처럼, 미디어 또한 수준에 맞는 미디어만 가질 수 있”게 됐습니다. “만약 대중이 정치인들이 유포하는 신화를 기꺼이 수용하는 미디어를 원한다면, 우리는 바로 그런 미디어를 가질 수 있”으며, 이명박근혜 9년 동안 친일수구세력의 영구집권을 위한 종편들과 보도채널(연합뉴스TV), 지상파3사의 활약은 무소불위의 경지에 오르기도 했었습니다.



민주주의가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최상의 체제로 굳어진 현실에서 국민에게 제대로 된 정보와 사실(진실)이 전달되면 최상의 선택을 할 것이라는 국민신화에 도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국민에게 왜곡된 정보와 사실(진실)을 전달하는 쓰레기 방송들의 일탈과 막장질을 막으려면 텔레비전 시청을 최소화하고, 가짜뉴스를 필터링하는 습관을 키우고, 정치 참여를 늘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텔레비전이 삶의 일부가 된 사람들이 당분간 줄어들지 않을 것이란 점에서 이런 비관적 전망은 마냥 부인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이것에 더해 인터넷과 SNS가 텔레비전의 콘텐츠를 확대재상산하는데 머물고, 정치적 영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고 집단적 결정을 이루는 하위정치의 공간이자 민주주의의 학습장으로 발전하지 못하면 민주주의의 후퇴는 피할 수 없습니다(우리는 노무현의 죽음에서 집단적 성찰에 들었고 촛불혁명으로 이를 극복하는 과정이다). 



인터넷과 SNS가 양질의 콘텐츠를 생산하고, 정치적 양극단에 위치한 사람들의 감정적 배설과 언어 폭력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작동불능의 상태에 이를 것입니다. 반대의 결과를 이룩할 경우에는 민주주의는 보다 넓어지고 단단해질 것이며, 수많은 정치철학자들과 석학들이 모델링한 진정한 민주주의로서의 참여·직접민주주의가 한 발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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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와 이재명처럼 결격사유와 하자가 많은 인간들이 지도자급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미디어의 위력을 말해줍니다. 안철수는 TV 예능프로그램이 만든 허상이었지만 '안철수 현상'이란 새정치의 주인공으로 포장되고 인식될 수 있었습니다. 이재명은 촛불집회와 각종 광고를 통해 자신의 업적을 뻥튀기하고,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이미지 세탁에 성공할 정도로 선전과 선동의 도구로 미디어를 활용하는데 도를 튼 정치선동가(히틀러와 스탈린가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인류의 발전과 민주주의의 확장은 그 빌어먹을 1%의 희망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명박근혜 9년의 역주행도 그 빌어먹을 1%의 희망 때문에 촛불혁명으로 타올 수 있었습니다. 깨어난 시민의 행동하는 양심이 1%의 희망으로 99%의 절망을 대체하는데 성공한 것이지요. 이재명도 안철수처럼 미디어(텔레비전)가 만든 허상의 정치인임을 깨닫게 된다면 작금의 지지율도 역전시킬 수 있습니다. 문프가 주도하고 있는 평화협정 체결은 말할 것도 없고요.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5.28 08:38 신고

    TV 의 순기능이 많은데 역기능적인 부분이 순기능을
    압도해 버립니다
    그것을 보는 국민들이 걸러 볼줄을 알아야 하는데 곧이 곧대로 보고
    믿으니 종편을 비롯 모든 방송들이 진실을 외면하고
    사실을 호도하기 급급합니다

    수구 언론에 반하는 방송들이 나와야 합니다

    • 늙은도령 2015.05.28 14:42 신고

      네, 텔레비전이 정치를 망치는 것은 미국, 한국, 일본 등입니다.
      유럽은 덜한 편인데 유독 한국은 미국만 쫓아갑니다.

  2. 耽讀 2015.05.28 08:43 신고

    진보는 종편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나이든 사람과 보수만 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식당이나, 병원을 가면 하루 종일 종편에 틀어줍니다.
    진보는 종편이 만들어질 때, 허가 반대 외칠 것이 아니라 진보언론과 진보세력이 온힘을 다 해 채널 하나라도 개설해야 했습니다. 조중동 중 하나라도 탈락시켜고, 그 중 채널 하나를 확보했다면 언론지형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 늙은도령 2015.05.28 14:44 신고

      보수 반동이 너무 진행돼 진보적 가치를 근본적으로 다시 살리고 재정립하지 않으면 이런 상태로 계속갈 것입니다.
      작은 소규모 공동체를 계속해서 만드는 것이 최상인데,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에 치이다 보니 아무것도 못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요즘은 절망적입니다.

  3. 달빛천사7 2015.05.28 09:31 신고

    요즘은 1인 미디어가 많긴 하지여 블로그 미디어가 제일 낳긴하네요 .

  4. HowlS 2015.05.29 03:18 신고

    공감하고 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5. 최홍대 2015.05.29 11:51 신고

    이명박 대통령이 저렇게 가볍과 의미없게 보일줄이야..국민수준이 그랬던것 같아요.

    • 늙은도령 2015.05.29 14:37 신고

      그렇지요, 우리는 경영과 정치를 혼동하기 쉬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6. evitamins 2015.05.30 06:08 신고

    공감하고 갑니다. 좋은글 읽으러 종종 놀러오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7. CheekyNaru 2015.05.30 18:42 신고

    잘보고 갑니당~!!

  8. 아줌 2015.05.30 19:38

    정몽준 아들이 어느정도는 옳은 말을 한듯...요. 국민수준에 딱 맞는 통령... 미디어를 갖고있죠....

  9. 그렇지? 2015.05.31 03:34

    동감입니다

    • 늙은도령 2015.05.31 03:47 신고

      네, 걱정입니다.
      보수 반동은 미국에서만 성공한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성공했습니다.

  10. Abricot 2015.05.31 11:39 신고

    여러모로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네요.

  11. 썸띵 2015.06.17 14:42

    오타나셨어요. 마지막에서 세번째 문단에 가길을 가질로 바꾸셔야 해요. 정독했는데 사실이고 지금도 하향평준화되는 중이라 씁슬하네요. 오락물을 많이 볼 수 밖에 없는 구조도 한목 한 것 같아요.(낮은 임금에 비해 값비싼 외부활동), 저조차도 이제는 이런 장문 읽기를 꺼려한다는게 정말 무섭고 부끄럽네요. 초등생부터 이런 내용의 교육을 받으면 정말 좋겠어요.독서도 많이 하고요..

    • 늙은도령 2015.06.17 00:57 신고

      네, 수정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오타는 저의 한계이니 이렇게 정독하시는 분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독서는 이제 정말로 필요한 것이 됐습니다.
      인류는 퇴화하는 쪽으로 발전의 방향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12. specialist 2015.07.20 22:42

    항상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한번쯤 왜 이럴까 하고 생각하면 여지없이
    그에 대한 현상을 분석하시고 글을 주시네요...
    답답한 사람들 훈계하고 상대하시느라 피곤하실텐데 대단하십니다. 이말밖에는...ㅎㅎ

    • 늙은도령 2015.07.20 23:00 신고

      아닙니다, 저도 꾸쥰하 공부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볼 수 있으니 노력하는 것이지요.



사이버세상에서의 모든 활동은 그 배후에 어마어마한 양의 디지털(전자) 흔적을 남깁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던 데이터 정장장치(서버)에는 우리의 활동이 전자화된 기록으로 남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어디를 주로 방문하고, 어떤 것을 보고 사는지 모든 것이 기록됩니다.





이런 기록들을 축적해 데이터마이닝(분류화, 차별화, 파일화 등)을 거치면 개인의 이념적 성향과 기호, 취향만이 아니라 소득 수준, 소비 여력, 소비 패턴 및 주기까지 개별화된 상세자료들이 나옵니다. 우리가 무심코 머물렀다 간 것들까지 낱낱이 분석되기 때문에 우리의 욕망까지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발전하면 파리저가 말한 ‘필터 버블(인터넷 기업들이 개인 정보를 분석하여 필터링한 정보만을 제공하는 것,《친애하는 빅브라더》에서 인용)’에 이릅니다. 



우리가 똑같은 단어를 가지고 구글 검색을 해도 서로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집에서 PC와 노트북으로 검색해도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이는 같은 사람이 PC를 썼을 때와 노트북을 썼을 때 각기 다른 디지털 흔적, 즉 다른 정보를 찾고 다른 활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검색어가 똑같더라도 PC의 디지털 흔적과 노트북의 디지털 흔적에 따라 차별화되고 범주화된 검색 결과가 나옵니다. 





아마존이나 예스24에서 책을 구입할 때 추천목록과 선호목록이 제시되는 것도 ‘필터 버블’의 한 형태입니다. 이런 방식의 마케팅은 거의 전 분야에 퍼져서 이제는 일상처럼 받아들입니다. 나와 누군가의 개인정보가 축적된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파리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개인화된 필터는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에 의해 스스로 선전이 주입된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보이지 않는 자동 프로파간다를 제공한다. 그것은 우리를 미지의 어두운 영역에 도사린 위험을 의식하지 못하도록 놔둔 채 익숙한 사물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증폭시킨다.



이런 추천목록과 선호목록을 바우만은 ‘범주화된 욕구’라고 했는데, 우리는 이것 때문에 충동구매나 처음의 욕구보다 더 많은 것들을 구매하게 됩니다. 소비자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을 넘어 새로운 소비를 창출(필터 버블)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소비자들이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원하는 최적의 주기까지 분석해 추천과 선호목록을 제시합니다.





이런 범주화는 소비만 늘리는 것이 아니라 결제금액에 따라 소비자의 등급을 매겨 불량소비자들을 걸러내는 데도(역마케팅) 사용됩니다. 아이쇼핑을 많이 하는 사람, 소득 대비 실제 쇼핑을 많이 하는 사람, 소비 여력이 바닥난 사람, 승진했거나 보너스를 받은 사람 등등, 온갖 정보를 가공해 소비자를 나눕니다. 인공지능의 발달로 이 모든 것들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담당자(직원)의 수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막대한 포인트 적립기금이 조성됩니다. 기술 발전으로 직원수가 줄어들지만 소비자의 혜택이 늘어나기 때문에 일자리 감소는 이슈화되지 않습니다. 신문이나 TV광고처럼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마케팅은 손실비용이 막대하지만, 매일같이 갱신돼 갈수록 고도화되는 타겟마케팅은 손실비용이 거의 없습니다. 축적된 정보가 많을수록, 그래서 구매확률을 높일수록 마케팅비용은 줄어듭니다.



즉, 거대통신사나 카드회사 등에서 제공하는 막대한 포인트 적립금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담긴 전자기록(빅데이터)을 활용하는 대가로 나온 것입니다. 이들은 우리의 개인정보를 활용하는 대가를 지불하지도 않고, 자신의 마케팅 비용으로 차용해서 이윤을 극대화합니다. 부의 축적이 이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직원수의 감소에 따른 인건비와 복지비용 등이 줄어들고, 마케팅 비용 감소로 이익이 늘어납니다. 



기업이 제공하는 막대한 포인트 적립금은 무한대로 쌓이는 우리의 전자기록을 인공지능형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거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데서 나옵니다. 우리는 소비를 하면서도 사업자에게 마케팅비용까지 지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필터 버블’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포인트를 사용했기에 개인적으로 볼 때 이익이 늘어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소비가 늘어난 것(반대로 얘기하면 적금이 줄어든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초기 프로그램 구축비용만 있으면, 포인트 적립금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습니다. 서버비용은 컴퓨터 클라우딩 기법(소비자 PC의 저장장치를 활용할 경우에는 서버비용도 줄어들기 때문에 일종의 지적사기라 할 수 있다)으로 대체할 수 있기 때문에 사업자의 이익은 끝없이 늘어날 수 있습니다. 노동부터 소비까지 생존의 사이클이 한 바퀴 돌 때마다 부의 양극화는 커져가고 불평등은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악화됩니다. 



막대한 포인트 적립금 배후에 숨어있는 것이 감시사회의 본질입니다. ‘필터 버블’을 수용한다는 것은 차별되고 범주화되는 우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하고, 타겟마케팅에 걸려들어 필요 없는 소비나 과소비를 하게 되면 기술을 독점하는 자나 집단에 대한 자발적 복종(디지털 노예)의 단계까지 이른 것을 말합니다. 매년 임금이 인상돼도 소비의 양이 늘어나면 늘 부족함에 시달리게 됩니다(만족의 결핍)



특히 추천목록과 선호목록은 자신의 과거와 타인의 선택에서 배제되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더욱 무섭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철학이나 신념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면서도 타인과의 거리를 고려하기 마련입니다. 내 취향을 분석한 추천목록과 비슷한 타자의 취향을 분석한 선호목록은 선택의 자유를 축소시켜버립니다(인간의 변덕 때문에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추세에서 뒤쳐지는 느낌만큼 두려운 것도 없다). 





인류의 문명이 디지털기술과 첨단기기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발전해왔기 때문에, 그에 따라 위험을 등지고 사는 위험사회로 접어든지 오래됐기 때문에 감시사회를 피할 순 없습니다. 이 때문에 위험사회의 동반자처럼 등장하기 마련인 감시사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적절한 대처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모르모트와 비슷한 삶을 살게 됩니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기술의 편리함에 빠져버리면 극소수에게 이익이 독점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시대의 본질).



우리가 어느 선까지 감시사회(소비의 극대화가 목표)를 허락할지는 집단적 의사가 반영돼야 하기 때문에 정치적 선택의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특히 부의 불평등과 양극화를 완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조세정의에 이르면 정치적 선택의 중요성은 더욱 커집니다. 촛불혁명 이후의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갈지 고민해야 합니다.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보다 많은 토론이 필요하며, 기술 발전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람에 천착해야 합니다. 사람이 먼저라는 문프의 철학이 정치적 구호로 그치지 않게 하려면 기술 발전이 초래하는 미래상에 대해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을 초라하게 만드는 기술에 열광할수록 사람이 먼저인 세상은 절대로 도래하지 않습니다. 기술전체주의의 전 단계인 감시사회는 수명 증가에 따른 1인가구의 증가와 타자에 대한 신뢰가 줄어들수록 더욱 극성합니다. 



개인정보 제공과 포인트 적립금, 그리고 감시사회… 행복하신지요?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달빛천사7 2015.04.22 06:48 신고

    잘 모르던 부분인데 새롭게 알아가네요 애드센스가 업데이트 되서 요즘 머리가 아프네요

    • 늙은도령 2015.04.22 17:36 신고

      저든 아예 그대로 사용합니다.
      뭐, 돈이 덜 되더라도 더 이상 신경쓰기가 싫어서요.

  2. 耽讀 2015.04.22 08:20 신고

    상상만해도 끔찍합니다.
    이제는 사생활도 없고, 비밀도 없습니다.
    권력은 모든 정보를 다 알고 있습니다.

    • 늙은도령 2015.04.22 17:37 신고

      정말 디지털 감시사회는 위험수위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전자적 기록이 쌓이면 기존의 업체들만 득이 됩니다.

  3. 공수래공수거 2015.04.22 08:42 신고

    저도 어떨때는 깜짝 깜짝 놀랍니다

    발가벗겨진 기분을 가끔 느끼기도 합니다

    • 늙은도령 2015.04.22 17:38 신고

      네, 이제는 되돌리기에는 힘들 정도로 감시체제가 확립됐습니다.
      향후 인공지능이 발전하면 정말 상상도 못할 일들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4. 머무는바람 2015.04.22 12:24 신고

    생각지도 못한 부분인데 정보 감사드립니다.

    • 늙은도령 2015.04.22 17:43 신고

      디지털 사회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제가 통신사업을 할 때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든 것들이 지금 와서 생각하면 빅브라더를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5. 루비™ 2015.04.22 12:51 신고

    오오...제가 전혀 모르고 있던 부분을 상세히 설명해 주셨네요.
    너무 감사드리며.....오후도 즐거운 시간 되세요~~

  6. 나비오 2015.04.22 17:24 신고

    지금 자판을 치면서도 사실 많이 불안해요
    어디까지 들여다 보는 것인지.... 말이죠 ㅠ

    • 늙은도령 2015.04.22 17:46 신고

      전자기록은 파기하지 않은 한 영원히 남습니다.
      우리의 변덕까지 분석해낼 수 있다면 그때는 절대 감시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7. 에쏘 2015.04.22 18:07

    좋은글 감사드려요- 저도 그랬지만 감시사회라는 인식 자체도 갖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 듯 해요.. 맞춤형 광고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 늙은도령 2015.04.22 21:28 신고

      네, 제가 사업할 때 매일같이 생각하던 것이었지요.
      지금 구글이 하고 있는 일을 구글보다 1~2년 정도 먼저 생각하고 사업화를 진행했는데 최근에 들어 현실이 됐습니다.
      감시사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할 필요가 있습니다.

  8. 참교육 2015.04.22 20:32 신고

    무서운 세상입니다.
    우리같은 사람들은 그런 것을 전혀 모르고삽니다.
    무식하면 용감한 것인가요?...ㅋ

    • 늙은도령 2015.04.22 21:28 신고

      그래서 제 같은 사람들이 글을 씁니다.
      님이 교육에 대해 글을 쓰는 것처럼 말입니다.

  9. 하시루켄 2015.04.22 23:10 신고

    영화 제목은 기억이 안나지만 사람의 생활이 모조리 컴퓨터에 의해 지배당하는 내용의 영화가 있었는데 그영화가 떠오르네요.
    요즘에는 어디에 접속만 하면 개인정보가 줄줄 새나간다고 하니 겁도 나지만 그렇다고 인터넷 없이 살기는 또 힘들어 졌으니... 참 난감합니다.

    • 늙은도령 2015.04.22 23:14 신고

      그렇기 때문에 기록을 지울 수 있거나, 수집하지 못하게 하는 법률이 제정돼야 합니다.
      또한 불법적인 방식으로 개인정보를 사용하면 징벌적 과징금을 물릴 수 있어야 합니다.
      감시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면 사회적 합의를 통해 어디까지 감시를 허용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슈퍼갑질이자 잘못된 관치의 전형인 단통법 때문에 아사 직전까지 내몰렸던 대리점들의 수난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단통법은 이통사들에게 똑같은 보조금만 지급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통신업계의 1위 사업자인 SK텔레콤에 절대적으로 유리뿐만 아니라, 번호이동과 고객유치로 먹고사는 대리점들의 수입원에 치명타를 입혔습니다.





통신시장에서 점유율이 떨어지는 후발 및 하위사업자는 요금 할인과 보조금 지급 등의 다양한 마케팅을 동원하지 않으면 1위 사업자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대리점들에게 다양한 형태의 보조금을 제공하면서 호갱을 하는 데에도 다 이유가 있으며, 그것마저 없다면 대리점을 통해 신규 일자리 창출과 소득원의 제공이란 불가능해집니다.



통신기술과 휴대폰(이하 스마트폰) 보급률이 거의 한계점에 이른 상황에서 단통법의 시행은 기존의 체제를 화석화시켜 버릴 뿐, 통신요금을 낮추거나 서비스의 질을 만족할 만큼 높이지 못합니다. 1위 사업자는 광고만 줄기차게 내보내고, 지하로 스며들 불법보조금 지급을 감시해 고발하기만 하면 됩니다.



단통법은 또한 스마트폰의 가격을 낮추지도 못합니다. 스마트폰 메이커의 입장에서는 보다 많은 신형제품이 팔려야 이익을 낼 수 있는데, 단통법 때문에 이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출고가를 낮출 요인이 줄어듭니다. 내년도에 스마트폰 생산량을 20% 감축하기로 한 삼성전자도 신형제품이 팔리지 않는다면, 가격을 낮출 이유가 없습니다.  





‘아이폰 대란’에서 보듯 단통법은 불법보조금의 유혹을 강력하게 만들어 음성적 거래를 더욱 부추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럴 경우 대리점이 떠안아야 할 보조금의 몫은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무리를 해서라도 번호이동이나 신규가입을 늘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통사보다 대리점들의 수익이 더욱 줄어듭니다. 이는 대부분이 비정규직인 대리점 직원의 월급에 영향을 미치고, 대량의 해고를 거쳐 폐업으로 이르는 악순환의 고리로 빠져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내수 경기는 더욱 나빠지고 이통사들도 화석화되는 점유율에 지쳐 현상 유지를 위해 광고의 양만 늘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경우 단통법의 최대 수혜자는 SK텔레콤과 함께 광고를 고가에 수주할 수 있는 지상파와 종편과 tvN처럼 경쟁력이 있는 케이블로 넘어갑니다. 최근에 들어서는 지상파의 시청률이 갈수록 떨어지고 종편과 케이블의 시청률이 올라가고 있어, 지상파들은 케이블에 준하는 프로그램을 양산해 시청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혈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지상파에서 공영방송의 역할을 기대할 수 없고, 건전해야 할 방송생태계가 무너져 모든 방송사는 보다 많은 광고를 유치하기 위해 상업성과 선정성 높은 프로그램들을 양산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접어듭니다. 최근에 들어 지상파들이 방송시간 변경의 꼼수들이 수시로 들고나오는 것과 '삐' 처리되는 양이 늘어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습니다.



지나친 소비를 반대하는 필자지만 그것이 서민들의 일자리와 소득 창출에 치명타를 가할 만큼의 충격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단통법이 설사 소비자의 통신요금 하락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대리점들이 살아갈 방법은 갈수록 줄어듭니다. 정부는 단통법에 대한 불만이 수면 밑으로 가라안자 이들을 위한 후속조치를 내놓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단통법이 누구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통신업계에서는 SK텔레콤을 의심하는 것 같습니다. 정부도 소비자도 대리점도 모두 다 속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단통법과 경기 침체로 이통사의 이익도 줄었다 하는데, 대리점은 얼마나 힘든 상황에 처했겠습니까?



단통법이 실시된 이래 대리점들은 그 이전의 수익의 60% 정도를 회복하는 정도에서 힘겨운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매출 하락에 따른 참으로 많은 대리점주와 직원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위험을 무릎 쓰고 음성적인 거래를 할 만큼의 이익이 보장되지도 않아 전국의 대리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폐업한 대리점의 중의 하나



많은 대리점들이 문을 닫았고, 수없이 많은 비정규직들이 더욱 열악한 환경으로 떠밀려 나갔습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정부는 단통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미래의 일은 미래의 일이고 지금은 당장 안정적인 시장구조를 세운다는 명목 하에 1위사업자에게 유리한 단통법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정규직 과보호론까지 들고 나왔습니다. 단통법의 뿌리를 SK텔레콤에서 흘러나왔다는 풍문이 있는 상황에서, 이번에는 현 정부에 정규직을 향한 일종의 방통법이라 할 수 있는 정규직 과보호론을 밀어붙일 모양입니다. 전국의 대리점과 수많은 비정규직에게 가해졌던 피해가 이번에는 정규직에게 가해질 모양입니다. 내년도는 IMF 시절에 준할 만큼 힘겨운 한 해가 될 텐데 걱정이 태산입니다. 



따라서 정부는 단통법이 통과된 지금 통신시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대리점의 상황이 어떤지, 소비자의 불평과 불만은 어떤지, 목표한 것이 제대로 달성되고 있는지, 아니면 SK텔레콤의 사기질에 정부가 놀아난 것은 아닌지 특별 감사도 하고, 피폐해진 대리점들의 얘기도 들어봐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대리점들이 힘들어 죽을 지경입니다. 1위 사업자인 SK텔레콤에게만 유리할 뿐 통신요금의 인하도 불러오지 못한 채 비정규직의 목줄만 죄는 단통법을 이대로 두며 안 됩니다. 경제를 살리겠다면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슈퍼관치갑질인 단통법을 당장이라도 개정해야 합니다. 소비자도 대리점도 이통사도 공존이 가능한 방식으로 개정해야 합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노지 2014.12.10 07:42 신고

    핸드폰은 꽁꽁 얼어붙고 있지요.

    • 늙은도령 2014.12.10 15:33 신고

      그런 것 같더라고요.
      통신사 관계자들도 힘든 상황이니 대리점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톹법은 SK텔레콤만 배 불려줄 뿐입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4.12.10 08:16 신고

    우후죽순처럼 생겨난,생기게한것도 문제입니다
    한집 건너 한집이 요즘 단말기 대리점인것 같습니다'

    새로 생기고 없어지고..
    그러니 과당 경쟁에..에휴 이놈의 스마트폰 시장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어요

    • 늙은도령 2014.12.10 15:36 신고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고 봅니다.
      서민들은 소득이 없으니 먹고 살 수 있는 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경제구조를 만든 정부가 뒤늦게 개입하면 너무나 많은 혼란이 발생합니다.
      더 문제는 SK텥레콤만 이익을 독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불공정 거래를 정부가 부추기는 것입니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국민국가의 등장과 함께 본격화되면서 세계 경제는 식민지 팽창과 대규모 개발 및 분업화된 생산을 통한 대량 생산의 역사였습니다. 계몽의 시대가 도래하여 영원한 진보가 가능하다는 성장의 패러다임이 절대적 가치로 고착화되면서, 이를 뒷받침하려면 두 가지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그 하나는 팽창과 개발 및 생산을 위한 무제한적인 신용의 창출이었고, 나머지는 대량 생산된 제품을 신용 창출에 힘입어 소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계몽의 시대에 견고하게 뿌리내린 자본주의의 역사는 돈을 풀어서 자연과 노동과 정신을 착취함과 동시에 이를 소비하도록 개인을 생산자이자 소비자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빚더미 위에 올라서 있는 지구



이를 위해 국가는 대규모 행정조직을 동원해 세금을 걷고, 이를 통해 신용 창출의 원천으로 자리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불완전하고 불공정한 시장을 통해 새로운 기득권으로 떠오른 지배엘리트들을 위한 국가와 지역 및 세계 차원의 시장을 구축하고, 값싸고 질 좋은 노동자들을 시대적 요구에 봉사하는 교육제도를 통해 양산해내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매스미디어의 등장은 무한한 진보가 가능하다는 긍정적 경제관을 주입시킴과 동시에, 첨단학문과 과학 및 기술로 중무장한 환상적인 광고를 통해 소비의 극대화와 신용 창출을 끊임없이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생산자이자 소비자였던 시민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생산자의 역할이 줄어들었지만 소비자로서의 역할은 커졌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가격이 매겨짐에 따라 빚을 내서라도 소비를 하는 인류가 등장했습니다. 소비의 중독이나 노예로 만드는 광고와 서비스 및 유행의 홍수는 삶의 모든 공간에서 개인의 삶과 욕망과 함께하며 끊임없이 유혹했습니다. 광고의 홍수에 노출된 개인이 이것에 맞서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로서 끊임없이 더 많은 빚을 권하는 신용 창출과 그것에 힘입은 과도한 소비가 두 개의 축으로 작용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견고하게 구축됐습니다. 그 밖의 것들은 보다 많은 빚과 보다 많은 소비를 위한 특권화된 기득권의 도구와 선동에 불과합니다. 결국 이 두 가지 축이 끝없는 차별과 온갖 문제를 양산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금까지 이끌고 왔고, 이제는 그 관성의 질주를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소비경제의 하이라이트



세계 각국의 정부와 국제기구들, 슈퍼리치와 거대 자본들이 하는 일이란 중단 없는 성장을 위한 신용 창출과 소비의 확장입니다. 그리고 그런 무한한 진보와 그 낙관적 결과에 대한 한계에 이른 것이 현재의 세계 경제 상황입니다. 더 이상은 기존의 경제 규모를 늘려갈 방법도, 여력도 바닥이 나 버린 것입니다. 가격파괴와 할인경제도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결국 현 체제를 유지하는 두 개의 축에서 심각한 부실이 노정된 것입니다. 거품의 크기가 너무 커 작은 바늘로 톡 찔러도 터져버릴 지경입니다. 특권화된 기득권들은 이것을 터뜨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 같고, 아니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현 상황을 뒤집어 보면 어떻게 될까요? 경제 성장이 이루어져도 돌아오는 것이 없는 현실에서 아예 빚과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여보는 것입니다. 지구보다 더 커진 거품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1%를 더욱 궁지로 내모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항을 하겠다, 너희들이 원하는 것과 정단대의 행동과 실천으로서.



거품을 터뜨릴 수도, 그냥 가지고 갈 수도 없도록 아예 기존의 체제가 요구하는 것과 정반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빚과 소비를 줄이는 것은 물론, 자식들을 위한 교육비 지출마저도 학교 공부에 한정하는 것입니다. 확률적으로 정규직이 될 가능성이 낮다면 인정하고 받아들여 지출을 최소화하는 것입니다. 양육에 들어가는 비용도 최소화하고, 먹고 자는데 드는 에너지 사용도 최소화하는 것입니다.



                                초고령사회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되게 만들면 된다



소규모 공동체를 이루어 공동육아와 교육, 생계를 함께함으로써 소비를 최소화하는 것입니다. 현 체제의 독점적 승자들이 제발 빚을 내서 소비를 늘려달라고 부탁할 때까지. 정말 독하게 자린고비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현 체제가 바뀌지 않은 한 해결이 불가능한 초고령화사회로 접어들도록 말입니다. 



상위 10%가 전체 부와 기회의 90%를 독점하는 상황이지만, 그들로만은 현재의 체제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위 90%가 무리하게 빚을 내서 신분상승의 꿈을 버리지 않고, 남들에게 꿀리지 않도록 빚을 내서라도 소비를 할 때만 상위 10%가 지금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데, 이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삶의 규모를 줄이고, 돈의 대부분이 내부에서 도는 소규모 공동체를 결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다한 돈이 필요없는 문화와 놀이를 찾아서 향유하고, 삶을 짓누르는 무한경쟁의 압박에서 한 발짝 벗어나 정신의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잘 살아야 한다는 진보와 과시와 경쟁의 악몽에서 벗어나 물질적이고 사회적으로는 가난해져도 정신적으로는 부유해지는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하나, 정부와 정치에 대한 감시ㅡ예산의 사용과 정책 및 법의 적용과 집행ㅡ를 극한까지 늘리는 것입니다.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꿈같은 얘기이지만 평균수명이 80년이라면 이렇게 2~3년 정도 살아보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봅니다. 지금처럼 2~3년 더 살아가는 것이 더 힘겨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지나칠 정도로 소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보다 물질적으로 잘 살아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압박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자신의 삶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가 변하기 시작합니다. 가진 자들이 더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돈이 돌지 않으면 지금 가진 것들을 절대 유지할 수 없습니다. 상위 1%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국가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운영에 드는 고정비용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돈이 안돌면 제일 먼저 죽어나가는 곳이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와 행정입니다. 기업은 아예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그들은 살기 위한 자구책을 미친 듯이 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위 90%의 소박한 반란에 따른 모든 압박이 상위 10%에게 집중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거품의 압력은 더욱 커지고, 거품의 폭발을 막고 있는 외벽은 빠르게 약해집니다. 빚과 소비를 줄인 하위 90%에게 거품 폭발이 무서울 것도 없습니다. 잃을 것이 없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대안적 삶은 이미 제시돼 있다



고생은 하겠지요. 무척이나 힘들 것입니다. 빚을 줄이고 소비를 줄이며 거품을 늘리지 않는 동안 정치권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분노가 차오르겠지요. 그것이 쌓이고 퍼져 가면 바로 혁명의 원동력이 됩니다. 폭력이 배제된 자유의지에 의한 저항이, 정신의 풍요로움을 찾아가는, 가난하지만 즐거운 여정이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쓰나미가 됩니다.



동등한 시민으로 태어나 체제의 노예로 살아가는 일을 중단했을 뿐인데, 아니 최소화했을 뿐인데 세상은 근본부터 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이릅니다. 그것은 파국을 선택한, 갈 데까지 가보자는 특권화된 기득권들의 암묵적 합의를 공생과 공존의 방향으로 틀어놓을 것입니다.



상위 10%, 최종적으로는 상위 1%에 유리한 현 체제는 중하위 90%가 무리하게 빚을 내 소비하기 때문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식시키려면 이 두 개의 축에 타격을 가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선택의 시기, 폭력적 혁명이 불가능하다면 현 체제가 원하는 삶의 방식과 정반대로 가는 것만이 유일한 탈출구입니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우리가 주체이며 삶의 주인입니다. 반성적 실천이 가능한 것이 인간입니다. 우주에서 지금까지의 과학으로 밝혀낸 유일한 고등생명체가 인간입니다. 물질적 가난이란 자본주의적 시각이 만들어낸 차별의 논리입니다. 생각하지 않고 소비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목표라면, 이제부터라도 생각하며 최소한으로 소비하며 살면 됩니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나를 바꾸면 됩니다. 현재의 체제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빚을 소비에 쏟아부어 이루어내는 양적 성장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경제규모가 커질수록 하위 90%의 삶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팍팍해지는 것입니다. 작금의 경제 성장이란 하위 90%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전도된 나쁜 성장입니다.  


                                                                                                          

                                                                                                             사진출처 : 구글이미지


 

 

                                          


  1. 참교육 2014.12.05 07:54 신고

    내가 자본과 싸울 투사가 될 때 세상이 바뀌겠지요.
    나 하나가 아닌 수 많은 투사가 된 나로 만드는....

    • 늙은도령 2014.12.05 09:55 신고

      우리가 거창하게 시작하지 않으면 됩니다.
      성장이란 악마의 논리를 거둬내면 세상이 보입니다.
      작은 실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다수의 나가 생깁니다.
      세상이 복잡하니 우리는 단순하게 생각하면 됩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4.12.05 08:05 신고

    세상도 나도 바꾸기가 힘이 드는군요 ㅡ.ㅡ;

    • 늙은도령 2014.12.05 09:56 신고

      아주 조금만 바꾸면 됩니다.
      세상을 우리가 당장 바꿀 수는 없지만 나라도 변하면 됩니다.
      그냥 그렇게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변하게 됩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실제 이런 변화에 동참한 사람들이 늘고 있답니다.

  3. 덕산 2014.12.05 08:34

    공동체 생활으로 공생과 공존을 해나간다면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 생각 바꾸기 넘 힘이 드네요.

    • 늙은도령 2014.12.05 09:58 신고

      일단 자신부터.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나부터 변화를 실천하면 됩니다.
      현 체제는 너무 거대해 스스로 무너지게 돼 있습니다.
      거기에 휩쓸려 가지 않는 것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일단 내 삶의 방식부터 바꿔야 살아남을 수 있고, 그것이 퍼져 힘이 됩니다.
      무조건 내 삶부터 바꾸는 것입니다.

  4. 달빛천사7 2014.12.05 09:36 신고

    좋은글을 너무 잘쓰시네요

  5. TISTORY 2014.12.05 17:55 신고

    안녕하세요, TISTORY입니다. 이 게시글의 이미지가 12월 6일, 7일 이틀간 티스토리 앱 카테고리 배경이미지로 소개될 예정입니다. 항상 좋은 글과 사진으로 활동해주셔서 감사합니다.

  6. 발큰신데렐라 2014.12.10 13:44 신고

    좋은글 감사합니다.
    2014년 한해동안 정말 필요치 않은 소비를 습관적으로 또는 충동적으로 너무 많이 했더라구요.
    크게 생각하지 않고 정말 필요한 물건 필요한 소비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어요.
    2014년 마무리 잘하시구요^^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 남겨주세요. 감사합니다.

    • 늙은도령 2014.12.10 20:01 신고

      네, 건강에 조심하며 좋은 글로 인사드릴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모든 일들이 뜻대로 되지는 않지만 최선은 다해볼 생각입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저에게는 반성하는 마음으로 쓰는 글들인데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7. 기저 2015.03.03 23:02 신고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투자하고 있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물질적인 부분이 참 어렵습니다. 소비가 위축되면서 주위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가는 나를 보며 속상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럴 때 마다 미래를 위한 투자다, 나는 현재가 아닌 미래 지향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버텼는데, 이 글을 읽고나니 지금 이 순간을 통해 정신적인 풍요로움에 이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한민국은 미디어의 천국이다. 3개의 지상파와 수십 개에 이르는 부속 채널, 4개의 종편, 2개의 보도전문채널, 거의 백 개에 근접하는 케이블방송. 이들의 콘텐츠를 확대재생산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이버 채널까지 대한민국은 하루 24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미디어들의 무한 메시지와 영상들로 넘쳐난다. 인간은 메시지와 영상의 홍수 속에서 영혼없는 유령처럼 메시지와 영상의 형태로 이곳 저곳을 배회한다. 





눈이 가는 모든 곳에 영상이 돌아가고 있고, 귀는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소리의 홍수 속에 단 한 순간도 쉴 수 없다.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감과 신경은 미디어가 쏟아내는 콘텐츠에 언제나 열려있어야 한다. 이를 인식해서 분류하고 합당한 반응을 제시해야 할 뇌는 압도적인 콘텐츠의 양에 질식하기 직전이다.



1분 이상의 생각을 요하는 일은 금물이다. 끝없이 밀려드는 콘텐츠와 정보에 감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도 힘겨운 상황에서, 어느 하나를 붙들고 생각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에 다름없다.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을 끝없이 흘려보내지 않으면, 연속해서 밀려드는 메시지를 감당할 방법이란 없다.



‘모든 철학이 죽었다’는 비트켄슈타인의 한탄을 넘어, 자기반성적 성찰도 사라진 미디어 세상에서 보고 듣는 것이 곧 진실이고 진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처럼 다양한 미디어가 쏟아내는 메시지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려면 생각하지 않는 것이 필수적인 사항이다.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최악의 범죄이다.





짧고 표피적인 단상들과 즉각적인 반응들이 넘쳐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주어지고 접하는 콘텐츠와 정보가 많으면 생각의 양과 질이 높아진다고 판단하기 쉽지만, 뇌라는 것이 그렇게 진화해오지 않아서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뇌는 가소성이 있어서 주어진 콘텐츠와 정보의 특성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디지털 세대일수록 생각의 양과 질이 많아야 가능한 철학이나 사상, 사회적 문제 등에 대한 거부감이 커지는 이유도 우리의 뇌가 미디어의 특성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탐사보도나 기사마저 일정 수준 이상으로 길어지거나 복잡해지면 안 된다. 인문학 열풍이 불어도 독서량이 늘지 않고 강연을 듣는 것과 동영상을 보는 것만 늘어나는 것도 우리가 미디어에 얼마나 길들여져 있는지 반증해준다.



이런 현실에서 미디어가 내보내는 콘텐츠와 정보가 자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검열을 거치거나, 특정 세력에 유리한 편향성을 지니고, 속보와 특종 경쟁 때문에 오보가 빈발하고, 특정 사실(진실이 아니다)만 부각해서 내보내거나, 아예 사실을 왜곡해서 내보내는 것이 일상화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민주주의를 확대하리라 예상했던 사이버 공간이 검열까지 받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미디어에 노출되는 시간이 많을수록, 미디어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소통하는 것이 일상화될수록, 우리의 뇌는 미디어화 된다. 우리는 미디어가 보여주는 것에 관심이 집중되고, 미디어가 이끌어가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생각의 양이 늘어나는 것 같지만 분업화된 노동처럼, 수없이 많은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분열된 자아처럼 통합되지 못하는 단편들로만 이곳저곳을 빛의 속도로 떠다닌다. 



생각의 깊이가 요구되는 것, 가치 판단의 기준이 명확해야 하는 것, 자기반성적 성찰이 필요한 것, 일관되게 생각을 밀고 가는 것, 그래서 생각의 끝까지 가보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심지어 무수히 많은 경험을 통해 상황을 판단하는 직관마저 미디어적인 방식으로 작동하게 된다. 자본과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편향된 보도와 정보가 사실 확인이라는 필터작용도 없이 수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방적인 내용만 전달하는 광고가 대표적인 예다. 첨단과학이 총동원된 마케팅의 정수인 광고는 인간의 의식을 파고들어 광고가 의도하는 대로 반응하고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다. 광고로 돌아가는 미디어가 본질적으로 자본적이고 시장 편향적인 매체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류가 영원히 함께 해야 할 미디어는 가장 자본주의적이고 가장 권력지향적인 매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가족과 공동체와 사회가 제 역할을 못하는 현실에서 미디어(특히 대중매체)가 공적 영역을 독점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미디어가 전한 콘텐츠의 내용을 알지 못하면 일상의 대화에도 끼지 못한다. 미디어의 종류가 늘어날수록 공적 영역뿐만 아니라 사적 영역에서도 미디어의 콘텐츠와 거기서 파생된 것들이 대화의 주를 이룬다. 



헌데 대한민국의 미디어는 편향성이 도를 넘었다. 자본주의적이고 권력지향적인 편향성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미디어가 배출하는 콘텐츠와 정보가 공기처럼 만연된 현실에서 대한민국 미디어의 편향성은 생각의 깊이가 필요한 모든 것을 질식사시키며, 사고와 가치와 이념의 다양성마저 검열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지상파와 보도전문채널이 장악되고, 종편이 무더기로 승인되고, 정부의 비호 아래 세를 확장해온, 그래서 권력과 언론이 불편하지 않고 한통속으로 움직이는 지난 7년이란 다음의 한 줄로 압축할 수 있다. 죽은 미디어의 사회, 대한민국.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달빛천사7 2014.10.06 08:57 신고

    한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좋은하루되세요

  2. 중용투자자 2014.10.06 14:23

    정보는 넘쳐나는데 생각의 깊이는 더 짧아지게 만드는 미디어의 맹목적인 독선이 갈수록 심화되는군요.

    • 늙은도령 2014.10.06 20:43 신고

      네, 단편적인 생각만 늘어납니다.
      미디어와 책읽기를 같이 해야 합니다.
      또한 명상의 시간을 늘리는 것도 필요합니다.

  3. 공수래공수거 2014.10.07 14:05 신고

    읽을만한 매체는 그래도 있는데 볼만한 매체는
    거의 없는것 같습니다..에혀
    눈과 귀를 통제 당한거 같은 세상.

    • 늙은도령 2014.10.07 19:46 신고

      우리는 너무 길들여졌어요.
      생각을 안 하려고 하고 너무 편리함만 찾아답니다.
      대중매체의 발달이 인간의 삶을 완전히 바꿔버렸습니다.

  4. 젊은학생 2014.10.09 06:11

    심지어 생각의 흐름까지도 유도하는 것 같아요.
    살짝 벗어난 예시지만,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자막이 참 많이 나오죠,
    자막은 이해를 돕고 더 큰 재미를 주기도 하지만, 시청자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막고 그 프로그램이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게끔 합니다.
    두 세개의 예능프로그램을 즐겨보는데 문득 그런생각이 들었네요.

    생각을 못하게 하는 것은 바쁜 현대사회도 한 몫 합니다.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저조차도 생각할 시간이 없음을 깨닫고
    생각을 할 시간을 따로 정해야되나 싶을 정도예요.

    다행히도 제가 듣는 수업들은 교수님들께서 질문을 많이 하십니다.
    어제 들었던 welfare economics 에서는 '복지국가'란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여
    복지란? 국가란? 에 대한 질문 등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정답이 있는 건 아니지만, 복지국가가 무엇인지 아무 생각도 안 한 상태에서 국가의 정책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이번 학기가 끝나면 복지국가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을까요?
    심심할 때 보는 예능을 줄이고, 한가지 한가지 생각을 해봐야 겠어요.

    어제 HIstory of Political Ideas 중간고사로 고대그리스부터 계몽주의시대까지의 정치사상의 변화 및 발전에 대한 에세이를 써야했는데 정말..부끄러운 에세이를 쓰고 왔어요. (진짜 망했어요)
    감히 생각만 해보자면, 기존의 유명한 정치사상들이 업데이트가 필요한 것 같아요.
    도령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우리나라의 정부형태가 어떠한 정치사상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면 말이죠.

    • 늙은도령 2014.10.10 00:01 신고

      네, 방송은 시청자가 생각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길들여 시청률을 높이는데 사용합니다.
      자막은 그런 기능을 합니다.
      님의 지적한 것이 정확합니다.
      마약 같은 것입니다.
      시청자로 하여금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고 프로그램의 기획대로 몰고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청자의 뇌는 길들여져 가고 자막이 없으면 불편해 합니다.
      자막이 시청률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그렇게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죽도록 즐기기>를 꼭 보십시오.

      고대 그리스부터 계몽주의시대까지가 근대성의 탄생이자 근대이성이며, 현대성의 원천입니다.
      칸트에 의해 완성됐는데 제가 '늙은도령의 눈으로 본 인류 근현대사 비판'이 바로 그 내용을 다룬 것입니다.
      원래는 책으로 출판하기 위해 집필을 시작한 것인데 이곳에 올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너무 어렵다는 댓글이 많아서 더욱 쉽게 풀어야 하기 때문에 기존에 써놓은 것을 틈틈이 퇴고하고 있습니다.
      체력이 떨어져 이것이 회복되면 그때부터 다시 올릴 것입니다.

      푸코의 저서말고 강의를 옮긴 책인 <영토, 안전,인구>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이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리고 '성의 역사'시리즈인 <앎의 의지> <쾌락의 활용> <자기 배려>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정치의 약속>, <혁명론>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철학적으로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 그리과 최근에는 바우만의 <홀로코스타와 현대성> <액체근대> <유동하는 공포>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등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고 싶다면 최고의 석학인 벤야민을 보십시오.
      단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안 보셔도 됩니다.
      정말로 어렵기 때문에 성찰이 매우 깊어지면 읽어보십시오.
      제가 읽은 책 중에 가장 어려웠습니다.

      칼 폴라니의 책들도 도움이 될 것이고, 칼 포퍼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블랙스완>도 좋구요.
      우리나라는 미국의 헌법을 받아들였지만, 홍익인간부터 동학까지 사회주의적 요소가 많아 충돌이 납니다.
      조선시대는 입헌군주제와 절대주의가 혼합된 민주주의적 체제였습니다.
      여기에 일본의 군국주의 파시즘, 즉 우파 전체주의와 깡패집단의 논리가 혼합돼 엉망진창이 된 것이 한국입니다.

      참, 박정희 시대를 이해하고 싶다면 마루야마 마사오의 <현대정치사상과 행동>을 보십시오.
      거기에 박정희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유신시대의 원형이 왜 일본에 있으며, 우리나라가 친일파의 천국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과 박명림 교수의 '한국전쟁' 시리즈를 비교해서 보면 더욱 이해가 커질 것입니다.
      최근 프레시안에 연재되고 있는 한국의 근현대사에 관한 내요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복지국가는 대단히 복잡해졌습니다.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무력화됐으니까요.
      복지국가에 대한 평가는 최근에 들어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불평등이 너무 커져서 복지국가의 원형으로만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분야에서는 자크 아탈리의 저작들과 <거대한 전환>을 번역한 홍기빈 씨의 저작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를 얘기할 때 과학기술의 발전이 미치는 영향을 너무 무시합니다.
      사실 인류의 정치체는 과학기술의 발전의 부산물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과학 관련 책을 많이 읽는 이유입니다.
      종합적 시각을 갖춰야 합니다.
      그래야만 현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국민국가 탄생과 얽혀 있는 정치경제학과 뉴턴역학, 다윈의 진화론을 왜곡한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 대한 이해가 절실히 요구됩니다.
      중상주의와 중농주의가 교차하는 중에 탄생한 고전경제학과 독일에서 시작한 질서자유주의(신자유주의의 원형)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합니다.

      울리힉 벡의 <위험사회>도 꼭 보십시오.
      저도 아직 못 본 책이 있어 벡의 최근 책들을 봐야 합니다.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후편인 <유리감옥>도 봐야하구요.

  5. 2015.12.24 05:39

    비밀댓글입니다



하지만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즉각적인 욕망과 쾌락을 쫓아가는 현대성을 이해하려면 아직도 살펴봐야 할 것이 두 개 더 남아 있다. 그것은 텔레비전의 영향력을 확대재상산하는 것에서부터, 기득권 위주의 상위정치에서 배제된 네티즌들의 정치의 장인 인터넷과, 그 폭발적 파급력이 빛의 속도를 연상시키는 SNS의 등장이다. 최근에 활성화된 개인 방송과 팟캐스트까지 더하면 현대성의 핵심으로 등장한 즉시성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와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근대》와 《유동하는 공포》를 통해 완전하지 않은 과학기술의 사용에 따른 각종 위험들의 증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된 무차별적인 개발의 부작용, 산업혁명 이후 닥치는 대로 이루어진 천연자원의 착취에 따른 환경 파괴, 견고하게 결합된 무거운 경제에서 액체처럼 유동하는 가벼운 경제로 바뀌는 과정에서 발생한 불확실성의 증가 등을 다루면서 그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 매스미디어의 변천에 관해 다루었다. 



구글이미지에서 인용



현대사회의 위험성이 통제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음을 경고하고, 견고했던 체제들이 무너져내리면서 사회의 불확실성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었던 이들은, 닐 포스트만처럼 매스미디어의 테크놀로지에 천착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인터넷에서 트위터까지 상시적인 위험에 노출된 삶과 불확실성에서 도피하기 위한 즉시성이 만들어낸 비합리적 선택의 증가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비합리적 선택과 합리적 선택과의 차이는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느냐, 지지 않느냐로 나뉜다). 



이들은 인류가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체제의 하부구조를 이루는 경제에 집중하는 동안, 체제의 상부구조를 이루는 정치와 철학, 문화와 교육 등에서 벌어진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퇴행의 중심에는 텔레비전이 독점했던 메시지를 보다 세밀하게 분할해서 점령한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앞에서 다루었듯 텔레비전을 이루는 테크놀로지는 폭력성과 선정성과 상업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이와 정반대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 정보통신기술도 이런 방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은 텔레비전이 독점했던 메시지를 시공간적으로 분할한 것에서 기인한다. 



철저하게 '1대 다'의 소통방식을 취했던 텔레비전에 비해, '1대 1'의 소통을 내세웠던 인터넷과 SNS는 넘쳐나는 정보와 익명성으로 인해 민주적인 매체에서 무정부적이고 카오스적인 매체로 변질되고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자율정화란 아담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것이어서, 원래부터 존재하지도 작동할 수도 없는 것이었고, 정보의 양이 늘어나고 질적 차이가 구별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용자의 수가 늘어날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된다.  



필터링이 이루어질 수 없는 정보와 익명성의 바다에서 근대이성이 탄생시킨 현대성은 루소와 칸트와 홉스가 그렇게도 우려했던 아노미적 무한경쟁과 무정부적 자유방임의 투쟁과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인류가 끝없는 유목생활에서 벗어나 정착함에 따라 문명이라는 것이 시작됐고, 근대이성이 탄생하기까지 발전의 뱡향은 예측가능한 사회와 미래를 만들기 위한 합리성의 극대화였다. 그것이 신의 섭리에서 나왔건, 우주의 법칙에서 유래했건, 자연의 원리에서 끌어왔건, 죽음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에서 출발했건, 장기적인 계획과 질서 잡힌 확실성의 원천으로써의 합리성의 추구는 확실한 것을 선호하는 인간의 본성에 일치한 불변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텔레비전의 보편화에 이어, 즉시성과 유목성 및 선정성과 상업성을 특징으로 하는 정보통신기술과 모바일기기의 발전은 한 세기도 되기 전에 인류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욕망과 쾌락에 대한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폭력적인 현대성(한정된 자원과 일자리를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투면서 발생한다)이 창출한 온갖 허상들을 과학기술의 발전이라는 낙관적이고 변증법적인 신화로 포장하는데 성공했다. 갈수록 첨담화되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구원과 해방이 실현된 유토피아로 향해 간다면, 그때까지 자신의 죽음을 늦추는 방법이 최상의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과학기술의 발전이 영생의 삶을 보장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래서 지금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죽음에 이르는 전 과정을 무수히 작은 단위로 쪼개놓음으로써, 영원한 삶도 가능할 수 있다는 관념이 지배적 패러다임을 형성할 수도 있다, 토끼가 먼저 출발한 거북이를 따라잡는 과정에서 토끼가 간격을 좁힐 때 거북이도 최소한이라도 앞으로 나갔기에 토끼가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시간의 흐름이 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가정 하에 시간을 잘게 쪼개놓으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는 궤변은 소피스트의 전유물이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비해 과학과 기술은 비교가 불가능할 만큼 발전했이지만, 소피스트의 궤변처럼 시간을 잘게 쪼개놓으면 영원한 삶도 가능하다는 관념은, 멈추지 않는 파동으로 영원히 날아갈 수 있는 빛으로 대변되는 전기전자기술의 과학적 원리와 일치한다. 이런 궤변과 과학의 이종교합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별하지 못하는ㅡ구태여 구별하려 하지 않는ㅡ아노미적 현상을 일반화한다. 끊임없이 시공간을 옮겨다니는 새로운 유목인의 등장은 이런 이종교합에서 나온 자연스런 결과일 수도 있다.  



                                                                       


이처럼 '날아가는 화살은 멈춰있다'는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를 연상시키는 2차원적 관념이 3차원의 현실을 뒤집어버린 것은 인류 문명의 발전에 내포돼 있는 정신적 퇴행을 드러내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물질만능주의가 만연된 세상이 거꾸로 된 세상이라고 말했는데, 작금의 세상은 즉각적인 만족을 통해 영속적인 삶을 추구하는 현대성에 의해 다시 한 번 뒤집혀버린 것이다. 이런 2중의 변증법에 의해 견고하고 지속적이며 질서 잡힌 체제를 추구했던 근대이성은 현대성으로 넘어오자마자 끊임없이 유동하는 특성을 지니게 됐고, 그에 따라 삶의 불확실성은 갈수록 높아졌다. 



이제 장기적인 계획이 담긴 청사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 단계로 접어들었고, 현실공간을 빠르게 넘나드는 가벼움을 유지하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전략으로 굳어졌다. 신자유주의로 발전한 자본주의는 인간의 삶만 파편화시킨 것이 아니라, 파편들의 충돌로 인해 높은 열(갈등)이 발생시켰으며, 이것으로 인해 각각의 파편들이 녹아내려 세상이 액체상태로 변화했다. 이에 따라 체제와 제도는 물론 그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유동하는 상태로 접어들었고, 불확실성이 증가함에 따라 위험과 두려움이 공포를 생성하며, 개인의 삶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바우만이 말하는 '액체화된 근대'의 출현과 '유동하는 공포'의 만연이란 이런 상태를 말한다. 이는 분명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가 '초위험사회'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현대성의 모토는 이렇게 출현했고, 잘게 쫗개놓은 시간의 관념에 맞는 삶을 영위하려면, 미래를 위해 현재의 만족을 미루지 않고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졌다. 



헌데 즉각적인 만족을 위해서는 '오늘의 사치품이 내일의 필수품'이 될 수 있도록 만들거나, '내일에는 내일의 신상품이 출시'돼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잘게 쫗개놓은 시간들을 만족시켜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돈이 부족해 오늘에는 사지 못한 사치품이 내일에는 가격이 내려 필수품이 돼거나, 오늘 채우지 못한 만족을 내일의 신제품으로 채울 수 있어야 싼 가격에 자신의 노동을 팔아서라도 구차한 삶을 이어갈 수  있다. 소비지상주의는 이렇게해서 일반화된다.  



결국 자본주의가 사회와 체제 속의 시민들을 개인들로 파편화시키는 과정에서 공동체와 가족이 해체됨에 따라, 이런 즉시성의 추구는 정신적 차원에서 충족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매일같이 쏟아져나오는 신제품들을 쉴새없이 광고하는 텔레비전과, 매일같이 지우고 덮혀지고 새로 업그레이드 되는 인터넷과 SNS가 최상의 매체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고, 개개인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적 지위로 격상했다. 



원래부터 다양한 나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시간을 잘게 쪼개듯, 자아를 여러 개로 쪼개 각종 사이트와 네트워크를 넘나들며 즉각적인 욕망과 쾌락을 탐닉하던 흔적들을 곳곳에 남겨놓게 됐고, 이것들은 쌓이고 축적돼 매체를 지배하고 있는 자들에게 개인의 취향을 꿰뚫어볼 수 있는 빅데이터를 구축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모든 광고주들의 꿈이었던 맞춤형 광고가 가능하게 됐고, 끝없는 매출 창출과 이익의 추구의 기반이 확고하게 다져졌다.  



이렇게 소비지상주의 시대가 우리의 눈앞에 도래했다. 끊임없이 대형마트와 쇼핑몰(홈쇼핑 포함)을 채워주는 신제품과 매순간마다 업그레이드 되는 정보와 지식들은 즉각적인 만족을 일상화시켰고, 먼저 쓰고 나중에 갚는 플라스틱 신용과 전자 신용의 발전은 파편화된 개인들을 빚의 굴레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충분히 예측가능한 결과를 회피하면서, 당장의 만족에 매달리는 이런 비합리적 선택들은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합리적인 선택으로 전도되고, 머리결마저 소중한 존재로 포장됨에 따라 미래를 위해 만족을 늦추는 것은 자신을 저버리는 배반의 행위가 됐다. 





문제는 이런 다양한 매체들을 운영하는 극소수의 전 지구적 지배 그룹으로 즉각적인 만족의 대가들이 흘러들어가는 데에 있다. 천문학적인 빚에 대한 이자는 그 자체만으로 천문학적인 수준에 이르렀고, 돈이 곧 권력인 세상에서 지배 그룹의 영향력은 텔레비전과 인터넷과 SNS를 중계도구로 활용해 존재하는 모든 것에 가격표를 붙이고, 돈이 되는 모든 분야를 독식할 수 있었다. 결국 모든 미디어가 지배 세력의 이익에 협조하고 봉사하는 시대에 접어듬에 따라, 미디어가 전해주는 콘텐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돈과 권력의 도구인 미디어 자체가 중요해졌다.                 

      


전 지구적 지배 세력의 광고와 협찬(과 미디어에 길들여진 개인들의 시청료)로 돌아가는 이들의 힘은 국가의 주권을 구성하고 있는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에 이은 제4부에서 이들 삼부를 좌지우지 하는 제1부의 역할을 할 정도로 영향력이 커졌다. 본질적으로 자유 시장 자본주의와 천상의 궁합을 가진 것이 미디어의 본질이어서 폭력적인 현대성의 폐해들은 몇 번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유동하는 공포’와 공간을 압축해 지배의 범위를 넓히는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 과실들은 극소수의 수중에 떨어졌음은 이제 상식의 영역에 자리했다.  



이런 극단의 불평등으로 귀착되는 폐해들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ㅡ뒤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ㅡ는 정말로 여러 번 있었다. 1929년에 발발한 경제대공황이 그 중에 하나였고, 2008년의 금융 대붕괴와 2011년부터 구조화된 유럽의 경제위기가 최근의 것이었다. 이렇게 현대성의 폐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인류ㅡ정확히는 전 지구적 엘리트와 국민국가 단위의 지역적 엘리트와 국제기구를 지배하고 있는 엘리트들ㅡ는 근대이성의 질주가 초래한 현대성의 문제점을 교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살리기는커녕, 아예 방향을 돌려 사회경제적 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와 관용의 정신을 실현한 복지국가의 잔재마저 일소시키는 퇴행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중심에는 욕망과 쾌락에 대한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행태를 끊임없이 부추긴 텔레비전과 인터넷, SNS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오랜 전부터 특정 세력에 의해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회주의의 몰락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세를 불린 급진적 자유주의자와 좌파에서 전향한 신보수주의자들이 자본과 권력의 주변부에서 핵심으로 포섭되는 과정에서 더욱 심화됐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들이 내놓은 새로운 통치이론(신자유주의)과 가치판단의 기준에 따라, 근대이성이 창출한 현대성은 사회적인 도덕규범에서 완전히 이탈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거대 금융자본과 초국적기업은 빛의 속도로 국경을 넘나들며, 천연자원을 바닥까지 착취하고, 무한대의 신용을 창출해 전 세계 부의 90%을 독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공존과 상생이 불가능한 이런 극도의 불평등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은 것이 아님에도, 전 지구적 지배 그룹은 부정적 세계화의 병폐들이 한꺼번에 터지는 그날까지, 갈 수 있는 한 최대한도로 가보자며 신자유주의의 엔진 출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있다. 자기조정 시장에서 발전한 자유시장과 사회적 생산관계의 변화로 등장한 자본주의, 새로운 통치술의 형태로 등장한 자유주의가 삼위일체를 이루면서 형성된 탐욕의 기관차가 빛의 속도까지 출력을 높이는 동안 지구와 인류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고,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는 폭발 직전의 단계에 이르렀다. 



지난 30년의 신자유주의적 폭주는 무엇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지구의 반격에 직면했지만, 전 지구적 지배 세력은 폭주하는 기관차의 속도조절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어쩌면 그들도 제어할 수 없는 속도에 이른 기관차를 멈출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정도 속도를 감당해낼 브레이크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을 전후한 지난 250년 동안 인류는 지구 역사상 5번째의 종말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고, 그 중심에는 인간의 성찰을 가로막아 즉각적인 만족의 포로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다양한 형태의 미디어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게네시스 2014.08.14 17:11

    기술은 발전하지만 우리가 중요해야할 인문학적인 분야나 윤리는 점점 사라져 가네요ㅠㅠ 그게좀 슬픕니다

    • 늙은도령 2014.08.14 19:55 신고

      네, 돈이 되는 사람들에게 과학과 기술 발전으로부터 얻는 이익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양한 첨단기술의 발전에 따라 의사와 환자 간의 문진과 진단, 시술과 수술 등의 일체의 의료행위를 철저히 경제 논리에 의거하는 미국의 현상을 보면서, 우리는 현대성의 폭력적 행태가 사회의 모든 곳에 침투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인간의 생명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한국에서 박근혜 정부가 행정조치(국회의 동의가 필요없는 가이드라인)라는 편법을 동원해, 모법인 의료법을 무력화시키며 강행되고 있는 의료민영화와 영리화의 논리도 결국 자본과 기업의 이윤추구 행위의 정당화와 극대화에 있다. 



국가권력기관들의 불법적인 선거 개입에 의해 박근혜 대통령의 민주적이고 정치적인 정당성이 의심받는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가 국민의 60~70%와 야당, 의사협회와 보건노조, 시민단체들이 반대하는 의료민영화와 영리화를 강행하는 것은 경기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이라는 미명 하에 국민의 생명마저 돈의 논리에 넘겨버리는 최악의 통치행위라 할 수 있다. 의료민영화와 영리화는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켜야 하는 국가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도 어긋난다.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각종 규제가 신설되고, 초국적기업과 거대 금융자본의 탐욕을 제한하고 있음에도, 유독 근대이성에 사로잡혀 성장만 외치는 박근혜 정부의 시대착오적 행태는 자신의 임기 동안 성과를 거둘 수 있겠지만, 그 폐해는 다음 정부와 미래세대에게 전가된다. 시대에 역행하는 각종 정책들, 규제의 옥석을 가리지 않는 무분별한 철폐, 온통 장미빛으로 색칠된 ‘통일은 대박’이라는 미래비전은 치적에 대한 지도자의 본능적 욕망과 미래에 대한 대책 없는 낙관주의가 만들어낸 허구의 산물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며, 대체 불가능한 경제학자로 지칭되는 조지프 스트글리츠마저 경제성장이 온기가 국민들에게 흘러내리는 낙수효과가 제대로 작동한 적이 없다는 것을 밝혔음에도, 치기 어린 지도자와 정부 및 정권의 나팔수를 자처하는 방송들의 설득력 있는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오직 '결과의 낙관론'을 퍼뜨려 국민들을 집단적인 최면상태로 빠뜨리는 것은 현대성의 폭력성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선정적이고 선동적인 방식으로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의 여론몰이는 특히 텔레비전에 길들여진 세대에게는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텔레비전과 함께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미디어세대들은 텔레비전이 전해주는 특정 정보에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신뢰를 드러낸다. 미국의 교육학자이자 사회학자이며 방송학자였던 닐 포스트만은 '텔레비전에 길들여진 성찰없는 미디어세대'에 대한 기념비적인 저서, 《죽도록 즐기기》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텔레비전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린 시청자란 있을 수 없다. 텔레비전 없이 지내야 할 정도로 열악한 빈곤도 존재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의 영향을 받고 변질되지 않은 수준 높은 교육도 찾아볼 수 없다...이제 텔레비전은 지식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에 관한 방법론까지 지시하는, 초 매체적 지위에까지 올랐다...우리 모두는 카메라가 잡은 제한된 각도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브라운관에 비치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 결과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에 편향된 방송을 즐겨 시청하는 50대 후반부터 60대 이상의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흘러나오는 메시지가 사실ㅡ심지어는 진실ㅡ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텔레비전이란 도구(정확히는 텔레비전을 작동시키는 배후의 테크놀로지)가 가치중립적이라고 확고하게 믿어 의심하지 않는 이들은, 특정 방송이 텔레비전을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를 생각의 입구에서 출구까지 빛의 속도로 반응하며, 텔레비전에 길들여진 인식의 활동을 일상생활과 여론조사와 투표소에서 분출시킨다.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세월호 유족들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농성 중인 장소에서 맞불시위를 벌이거나, '자식 팔아서 그만큼 챙겼으면 됐지'라며 짐승보다 못한 폭언을 퍼붓고 폭력을 행사하는 단계까지 치달을 수 있다. 이들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와 거기에 적용된 테크놀로지의 관계가 '두뇌와 정신의 관계와 같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닐 포스트먼은 이런 인지부조화와 길들여진 인식의 편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테크놀로지와 매체의 관계는 두뇌와 정신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두뇌처럼 테크놀로지는 일종의 물리적 기관과 같다그리고 정신과 같이 매체는 물리적 기관의 사용과 관계가 있다하나의 테크놀로지가 특정한 상징부호를 사용할 때나 사회적 위상을 차지할 때그리고 경제적ㆍ사회적 정황 속에 슬그머니 자리잡을 때그 테크놀로지는 하나의 매체로 변모한다테크놀로지는 그저 하나의 기계장치에 불과하지만매체는 기계장치로 인해 생성되는 사회적ㆍ지적 환경과 같다는 뜻이다물론 뇌처럼 테크놀로지는 나름대로 태생적인 편향성을 갖는다바로 이 때문에 경우에 따라 테크놀로지가 쉽게 접목되기도 하며 충돌이 생기기도 한다따라서 과학기술이 중립적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테크놀로지의 역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뿐이다.



과학자들이 '과학적 연구와 발견은 가치중립적이어서 윤리나 도덕과는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 자체로 과학적 행위가 가치중립적이라는 특정 가치를 강요하는 것이어서 논리적 모순에 빠져드는 것처럼, 카메라가 제한된 각도에서 찍은 것만 볼 수 있는, 다시 말하면 제한된 각도 밖에 어떤 것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이들은 텔레비전에 적용된 테크놀로지의 편향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폐허와 쓰레기장도 카메라 각도와 편집에 따라 예술이 될 수 있고, 희망의 상징이 될 수 있다. 



텔레비전에 길들여진 미디어 세대들은 모든 방송 콘테츠가 광고와 협찬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으며, 고가의 텔레비전 광고비와 거액의 협찬을 감당할 수 있는 자들(조직, 단체)이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고려하지 않는다. 방송사들이 먹고 살려면 이들의 구미에 맞는 콘텐츠와 뉴스를 내보낼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자본지향적이고 권력지향적이며, 소수의 상류층의 삶을 지향하는 매체이자 테크놀로지의 집합체라는 사실을 고민해보지도 않는다.   



게다가 미디어 이론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매스미디어가 내보내는 '메시지는 메타포'라고 말했다. 이는 메시지를 생산하는 '테크놀로지마다 제 나름대로의 어젠다를 내포하고 있다'는 뜻인데, '어젠다'라는 단어에 내포된 의미가 정치적이라는 것처럼, 텔레비전에 적용된 테크놀로지가 그 시대의 지배적 세력이 추구하는 가치와 이익에 봉사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최악의 초국적 언론재벌 머독



맥루한은 또한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할 때마다 인간은 자동적으로 미디어가 전하는 정보(콘텐츠)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미디어는 결국 인간을 그 이전의 인간과 전혀 다른 인식체계를 지닌 존재로 변화시킨다. 맥루한은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를 "기술(테크놀로지)의 영향력은 의견이나 개념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이미지 조작(상징 조작)을 통해 "인식의 방식을 꾸준히, 아무런 저항없이" 바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맥루한이 텔레비전이 내보내는 콘텐츠가 "정신의 감시견을 따돌리기 위해 도둑이 미끼로 던지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현대성을 대표하게 된 가장 대중적인 매체인 텔레비전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라는 최적의 기후조건에서 모든 잠재력을 영상기술로 끌어낼 수 있었"고 정치적 편향성이나 권력 편향성을 지닌 매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텔레비전이 쏟아내는 수백 수천만 가지의 동영상에 인간은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이 되는, 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사고의 결여로 확장됐고, 심지어는 뇌의 퇴행을 야기하는 유전적 변화ㅡ리처드 도킨스는 이 유전자를 밈이라고 명명했다ㅡ까지 초래했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텔레비전에 적용된 테크놀로지는 '시간을 분초로 나누어 팔아야 하고, 한편으로는 말보다는 이미지가 우선이기 때문에' 시청자를 사로잡기 위해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폭력적인 것들을 선택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부정적 세계화가 만들어낸 세상에서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폭력적인 것들은 넘쳐날 정도로 많고, 이런 것이 쌓이면 시청자의 인식뿐만 아니라 "실제 세계가 텔레비전이라는 무대를 통해 상영되는 모습을 본떠 점차 각색"되는 일도 가능해진다. 



무한한 진보가 가능하며, 부수적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최종적인 결과는 낙관해도 좋다는 근대이성이, 1, 2차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현대성으로 넘어가며 선택한 지배적 체제가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에 따른 승자독식을 인정하는 신자유주의였다는 사실까지 더하면, 인류를 자연과 신의 수중에서 해방시켜주고 빈곤과 질병에서 구원해주겠다고 공언한 근대이성은 더 이상 존재할 명분이 사라진다. 무한한 진보와 함께 근대이성이 약속한 것이 '자유와 평등, 박애와 관용, 정의와 평화'의 왕국이었다는 것마저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현대성은 이렇게 폭력성과 선정성, 즉시성과 오락성을 띨 뿐 어떤 진지한 담론과 토론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인류는 그렇게 현대성을 확대재상산하는 주류 매체인 텔레비전의 테크놀로지에 의해 전쟁과 테러, 대형사고와 유명인사의 부패와 스캔들, 엽기적인 범죄와 함께 잘 만들어져 섹시함으로 흘러넘치는 아이돌들의 온갖 몸짓들과 모든 이슈를 오락거리처럼 다루는 콘텐츠 처리방식에 따라 가치의 판단기준이 왔다갔다 하는 아노미 현상에 빠져들게 됐다. 



이를 극대화시킨 것이 모든 콘텐츠에 따라다니는 가장 감각적이고 유혹적인 광고의 범람이다. 인류는 이제 광고 없는 공간을 찾기 힘들게 됐고, 이제는 광고에 순응돼 그것이 전하는 현대성의 다양한 욕망과 쾌락행위에 사로잡힌 포로이자 노예의 신세로 전락했다. 눈이 가는 모든 곳에는 어김없이 광고가 걸려있고, 손을 뻐치는 모든 곳에는 광고에서 본 욕망들이 실체를 드러낸 채 기다리고 있다. 필요한 것은 돈이거나, 즐기고 난 다음에 갚는 플라스틱 신용과 전자 신용이다. 



현대성이란 이렇게 즉시적인 욕망과 쾌락의 추구를 창출해낸다. 소비자로 정체성이 재규정된 인간은 어제의 귀중품이 오늘에는 필수품이 돼야 한다. 욕망은 뒤로 미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족시킬 수 없어 돈을 버는 대로 소비하려 달려가는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순간적이고 즉시적인 불만족과 스트레스로 이어진다. 이것이 인간의 행동에 폭력적 요소를 가미하게 되고, 한 아파트 단지에 사는 이웃과 주차 문제를 놓고 살인도 일어나게 된다. 폭력적 성향으로서의 현대성이 온갖 공포를 양산하고, 타인은 언제나 지옥인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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