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밖에도 작은 마을 단위의 시장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유럽 전체를 넘어 전 세계에 적용될 자유시장(정확히는 자기조정 시장) 개념을 그렸던 18세기 경제학자들의 고전경제학이 지닌 치명적인 오류와 그것에서 출발한 시장 실패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뉴턴역학과 다윈의 진화론에 경도된 고전파경제학자는 인간 이성과 도덕률에 대한 지나친 믿음과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자연의 법칙(칸트가 말한 기계로 부터 나온 에 기원한다)에 함몰돼 자기조정 시장의 허구성과 자본의 폭력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부족했고 진보(양적 성장)의 필연성에 함몰됐다.





또한 천사의 모습으로 다가와 ‘빚도 자산’이라는 무한대의 신용 창출을 부추긴 사탄의 후예들과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유지될 수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경험의 부족, 비용-편익적인 면에 매몰된 공리주의의 범람, 결국에는 잘 될 것이라는 결과의 낙관론에 빠져 동원 가능한 수단에 집중하면서 천연자원을 바닥내고, 생태계를 파괴한 성장지상주의, 기술공학적으로 생각하는 관료제의 본질과 속성에 대해서도 살펴봐야 한다. 국가이성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관료제와 중상주의, 중농주의, 도시의 발전과 확대, 경제표의 등장과 통계학과 관방학(내치)의 발전 등과 함께 한 근대국가의 탄생도 살펴봐야 한다.



이성이라는 종교가 불러온 과학기술 분야 전문가들의 무책임하고 탈윤리적이며 관료화된 파벌 행태, 채점을 통해 등수를 매기는 교육의 등장과 진화를 거부하는 식물화, 부르주아의 세력화가 능력주의로 변질되며 무한경쟁이 확대되는 경향 등이 모든 개인들로 하여금 탐욕의 춤을 추게 만들었고, 결국에는 신용을 창출한 극소수 고리대금업자의 수중에 모든 것이 넘어가도록 진행된 필연적 귀결도 들여다봐야 한다. 통제와 관리기술의 발전에 따른 삶-정치의 등장과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확장도 살펴봐야 한다.





이런 수많은 원인과 결과들이 쌓이고 쌓여 민주주의에 대한 시장의 우위는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무모하기 그지없었던 존 로크가 개인의 소유권을 신의 이름으로 불가침한 것으로 만들면서 시작된 부의 불평등과 그에 따른 인류의 퇴행은 이제 ‘더는 나빠질 것이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노인은 죽지 않고, 여성은 소비되고, 남성은 퇴행하고, 아이는 태어나지 않으며, 자연은 파괴되고, 생명의 다양성은 파국에 이르렀다.’ 이것이 근대이성이 현대(성)를 창출하며 지구에 던져버린 결과의 낙관론이 초래한 현실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 필자의 결론이다.



부분적으로 닫힌 세계인 지구에서 부와 권력의 원천인 한정된 자원의 소유권을 독차지하려는 갈등의 폭발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다고 해서 ‘공짜 점심은 없다’거나, ‘더 이상 사회의 구제는 없다’거나, ‘적자생존이 진화의 법칙’이라거나, ‘자연의 상태의 인간이란 모두가 모두에게 늑대’여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그치지 않는다거나,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해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은 지상최고의 거짓말 중 슈퍼울트라 거짓말에 속한다.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면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기 때문이며, 모두에게 책임을 져야할 근거인 공정한 분배가 행해지고 공평한 기회가 주어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칼 포퍼의 지적처럼, 수없이 많은 대량학살과 자원을 둘러싼 전쟁으로 얼룩진 인류의 역사란 소수의 승자와 강자를 위한 대량학살과 인종청소와 야만적 폭력의 역사였다. 개인에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마저 박탈해서 이익의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빅데이터 구축과 활용(이것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다면 구글 관련 책들을 보기 이전에 제임스 베니거의 《통제 혁명》부터 봐야 한다)을 처음 생각한 사람들 중에 한 명이었던 필자가 인류의 위대한 현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조금은 거칠고 조잡하며 비약에서 자유롭지 못할망정 갈수록 심해지고 빈번해지는 미세먼지를 뚫고 걸어가는 심정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려 한다.



그런 과거로의 여행 속에서 현재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라도 생긴다면, 그래서 최소한의 탈출구를 찾을 수 있다면, 그 이상의 바람은 없을 것이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때로는 무모할 수 있는 충동으로 인해 뜻하지 않는 기적을 이루고는 한다. 설사 기적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세상을 향해 저항할 수 있는 무엇이라도 건질 수 있다면 과거로의 여행을 못할 것도 없고, 반드시 해야만 한다.





이제는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필요한 시간이다. 인류가 진보한 모든 분야에서 파국적 퇴행이 진행되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주에서 유일하게 진화된 생명체가 살고 있는 지구의 엔트로피(무질서도)가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인정해야 한다. 앞으로도 이 '작고 푸른 별'에서 살아야 하는 미래 세대들을 위해 파시즘적 속도로 달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기차’부터 멈춰 세워야 한다. 당장 브레이크를 당겨라! 너무 늦었지만 파국적 퇴행을 이끌고 있는 자들을 향해 미래세대의 이름으로 분노해야 하며, 목숨을 걸어서라도 투쟁해야 한다. 나만 살겠다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브레이크를 있는 힘껏 당겨 기차를 세워야 하는 이유는 넘치도록 많다.



이 정도면 속을 만큼 속았다. 경제가 성장했음에도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핍박해졌는지, 부모를 공양하고 자식을 교육하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워졌는지, 가망도 없는 노후대책을 세우기 위해 20대부터 비정규직을 전전해야 하는지, 노인빈곤율과 자살률과 이혼율이 왜 이렇게 높아만 가는지, 평균수명은 늘었지만 왜 이렇게 만성질환에 시달리는 기간이 늘어났는지,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왜 이렇게 폭발적으로 늘어나는지, 하우스푸어와 렌트푸어가 왜 이렇게 늘어나기만 하는지, 아무리 많은 스펙을 쌓아도 왜 취직이 안 되는지, 고생고생을 해서 이 자리까지 올랐는데 왜 다음 번 별도의 통지가 있을 때까지만 나의 자리가 유효한 것인지,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왜 이렇게 많은 공포들이 나를 엄습하는지, 힘겹게 쟁취한 민주주의가 왜 끝도 없이 퇴보하는지, 이제는 멈춰 서서 세상을 향해 물어야 하고, 원인을 파악해 최소한의 해결책이라도 찾아야 한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달빛천사7 2015.01.30 03:53 신고

    아는 형들이 얼마 없어요

    • 늙은도령 2015.01.30 04:27 신고

      그럴 것입니다.
      대부분 근대철학자고 일부만 현대철학자와 경제학자라....

  2. *저녁노을* 2015.01.30 07:02 신고

    무슨일이든..원인파악이 우선인데....
    아쉬워요 ㅜ.ㅜ

    • 늙은도령 2015.01.30 15:54 신고

      네, 근본적으로 돌아보고 무엇이 잘못됐는지 하나하나 살펴봐야 합니다.
      더 이상의 실수는 인류를 종말로 이끌 수 있습니다.

  3. 耽讀 2015.01.30 09:24 신고

    자본은 힘이 셉니다. 노동과는 비교할 수가 없지요. 자본은 돈과 언론권력, 정치권력,사회권력, 문화권력 심지어 스포츠권력과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노동이 주인되는 세상 과연 올까요?

    • 늙은도령 2015.01.30 15:57 신고

      2~3년 안에 한 번 정도는 대혁명이 일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 프랑스혁명처럼 실패하지 하면 안 됩니다.
      미국혁명처럼 성공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시민들의 의식수준이 지금보다 훨씬 높아져야 합니다.
      프랑스대혁명은 혁명정신을 제3자들의 개입으로 대실패했습니다.
      제3자란 혁명의 에너지를 독차지한 로베스피에리에 같은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이 공포정치를 하는 바람에 혁명은 실패로 끝났고, 정신만 후대에 유전된 것입니다.
      반면에 미국 혁명은 성공했기에 그 과정이 후대에 유전되지 못했습니다.
      정말 아이러니하지요?

  4. 꼬장닷컴 2015.01.30 09:58 신고

    공부 많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제가 완전 문외한이거든요.
    앞으로 자주 다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5.01.30 16:00 신고

      이 연재는 제가 책으로 출판하기 위해 썼던 것으로 작년 초까지 70% 정도를 써놓은 상태입니다.
      하지만 퇴고를 거쳐야 하고, 그 이후 추가로 읽은 책들 때문에 상당히 수정을 가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미 써놓은 것들을 수정해서 올리고 있습니다.
      연재가 중간을 넘어가면(최소 몇 개월 연재가 가능할 것입니다) 본격적인 퇴고를 해서 출판을 할 것입니다.

  5. 참교육 2015.01.30 14:15

    인간이만든 제도, 법, 도덕 ,윤리..와 같은 문화란 인간중심, 강자중심의 논립니다.
    특히 경제논리는 희소가치를 가진 사람이 중심에 두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은 요원합니다,

    • 늙은도령 2015.01.30 16:02 신고

      이에 대해 고민하고 고발하는 비판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고, 시민들의 의식도 조금씩 높아지고 있습니다.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보수정부의 무능력을 확인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복지를 위해 증세하지는 것이 대세가 되가고 있으니 조금씩 발전하고 있습니다.
      나쁜 재벌 삼성도 여러 가지 면에서 패소하고 노동자의 피해를 보상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조금씩은 전진하고 있습니다.

  6. Chris (크리스) 2015.01.30 18:08 신고

    진실을 마주할 용기...
    요즘에는 진실이라는 이야기만 나와도 알러지에 반응하듯 진저리 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진실..이라는 단어가 기피 해야하는 단어가 된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 늙은도령 2015.01.30 18:07 신고

      그렇습니다.
      진실을 찾아가는 것이 삶의 목표이거늘, 우리는 거짓말 하기에 급급합니다.
      진정으로 용기를 내서 무엇이 문제인지 얘기해야 합니다.

  7. 현영이 2015.02.02 08:04

    아고라에서부터 늙은도령님의 글을 즐겨읽는 독자이자 팬입니다...책 출간 상당히 기다려지네요...알아야 할 것 공부해야 할 것 고민해야 할 것 등등 너무 많지만 요즘 배움을 즐기고 있는 한사람입니다....격하게 공감합니다...요즘 건강은 어떠하신지...예전에 아고라에서 우연히 알게되었거든요...건강도 챙겨가시면서 건필하시길...^^

    • 늙은도령 2015.02.02 21:27 신고

      반갑습니다.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책 출간은 조금 미뤘습니다.
      최근에 읽은 책들로 인해 추가해야 할 것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미 많이 써두었으니 책들을 완독하고 그것을 제가 소화해내면 집필에 전념할 생각입니다.
      조금만 시간을 가지고 기다려주셨으면 합니다.


2008년 이후 장기적인 경제대침체에 빠진 유럽과 미국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중국은 자국의 시장을 개방할 때부터 국가자본주의를 선택했지만, 아무리 국가에 의한 인민 통제를 강화한다 해도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한 중국의 추락도 시간문제이지 예외적인 성공을 거둘 수는 없다.



당장 중국을 공포와 질병의 도가니로 몰고 가고 있는 스모그 현상만 해도 중국의 압축성장이 한국에서처럼 얼마나 많은 환경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갈수록 커지는 불평등은ㅡ2차세계대전 이전의 유럽이 그러했듯ㅡ중국을 개발된 지역과 미개발된 내부의 식민화로 양분하며 이중 사회의 전형적 폐해들을 양산하고 있다.



중국에서 ‘묻지마 범죄’가 증가하고, 테러의 발생빈도가 늘어나는 것도 이중 사회적 병폐의 전형 중 하나이다. 시기와 문화적 결과에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기본적으로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채택하면 어떤 나라도 이중 사회적 병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현재의 중국이 보여주고 있다.





중국이 국가자본주의를 선택했다고 해서, 근대이성이 약속한 진보의 마지막 단계인 후기산업사회에 접어들면 그 단계를 거친 국가들에서 발생한 문제들이 거의 똑같이 발생한다. 어쩌면 타의추종을 불허했던 저렴한 인건비(노동 착취)와 지독히 관대한 환경규제(생태계 파괴), 권위적인 정부에 의한 안정적인 환율관리(시장 왜곡)를 내세워 세계의 공장을 자처했던 중국에서 무한한 진보가 초래한 파국적 결말이 가장 적나라하게 펼쳐질 수도 있다.



게다가 세계 어떤 나라도 13억 5천만(이중에서 5~7억 명이 절대 빈곤층) 명이 넘는 인구를 관리해본 경험이 없어, 무한한 진보가 유발하는 병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올 경우 이를 제어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주 낮을 수밖에 없다. 중국이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내세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병존에 상당한 성공을 보여준다 해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공장과 가정에서 배출되는 온갖 오염원들을 관리한다는 것은 신이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에 사적독점의 확대와 각종 부패의 고리, 부의 불평등의 확대, 과소비와 개인주의의 확산 등이 더해지면 중국의 미래가 장밋빛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런 암울한 전망은 인구가 중국에 버금가는 인도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지구온난화의 속도를 감안할 때, 중국보다 인도의 급속한 변화가 인류에게 더욱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인도는 중국처럼 국가자본주의를 들고 나올 수 없을 만큼 민주화된 국가이자, 봉건시대의 계급제도가 여전히 횡행하고 있는, 국가적 차원의 일관된 관리가 불가능한 거대 국가이기 때문이다.





결국 전 세계 인구의 40%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과 인도를 포함해,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도입한 국가들에서 근대이성이 약속한 ‘계몽의 변증법적 행진’이 파국적인 ‘초위험사회’로 접어들수록, 인류의 미래는 삼척동자라도 예언할 수 있는 암울한 결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될 파국적 결과가 인류의 총체적 종말로 이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근대이성의 결과물인 현대성이란 영원히 끝나지 않을 홀로코스트의 역사이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며, 자연의 배제와 인류의 소외가 동시에 진행된 폭력의 역사였다. 이런 병폐들이 쌓여 세상은 초위험사회로 접어들었고, 최소한 개인적 빈곤과 환경적 불리함이 교차하는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할 비대칭적 종말(최소 수천만 명에서 최대 수십억 명의 죽음이 예상되는)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런 병폐들이 쌓이고 축적돼 극단에 이른 작금의 현실에서 삶의 모든 단계마다 타인에 대한 불안함과 두려움과 우발적인 폭력의 형태로 폭발되는 것도 당연한 과정이자 부정적 결과일 수 있다. 1%의 승자의 세상에선 연일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만의 리그에 진입할 수 없는 99%의 패자의 세상에선 노동예비군도 되지 못하는 잉여들이 나이가 어릴수록, 비정규직을 전전해야 하는 여성일수록, 빈곤과 위험의 악순환에 빠져버린 무능력자일수록 쓰레기로 퇴출되거나, 존재의 근거마저 삭제되고 있다.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에서 폭주하는 기차를 세우지 않는 한 존재의 사슬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부터 비대칭적인 종말은 피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위대한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과 수많은 석학들의 주장처럼, 시야를 가리는 짙은 안개 때문에 앞을 볼 수 없다고 해도, 인류가 파국적 결말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면 폭주하는 기차부터 멈춰 세워야 한다.





그런 후에 기차에서 내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빨리 얼마나 멀리 달려왔는지, 우리가 지나온 모든 곳에 얼마나 많은 파괴의 잔해들이 쌓여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문제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 누가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모두가 있는 힘을 다해 살펴보고 토론해서 탈출의 단초라도 찾아야 한다.



많은 석학들이 이에 대해 고민했고 지속적으로 떠들어댔으며, 일부는 소리 높여 강력한 경고를 보냈지만, ‘탐욕의 삼위일체’의 노예로 길들여진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했고, 저들은 우리가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하기 위해 정치경제의 엘리트들과 급진적인 지식인과 대중매체를 동원해 상징조작을 일삼았고, 현실 왜곡을 서슴지 않았다.



이중에서도 ‘탐욕의 삼위일체’를 위해 권력과 자본의 노예로 전락한 대중매체와 그들이 각색한 문화의 영향이 컸다. 모든 것을 오락화하고 상업화하는 대중매체와, 패션과 유행으로 대표되는 선정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대중문화는 ‘탐욕의 삼위일체’가 파시즘적 속도로 중하위층의 지갑을 털어갈 수 있도록 사람들의 인식과 행태를 조금씩 소리 없이 소비의 노예로 변질시켰다. 



대중문화는 그렇게 지배세력이 원하는 체제를 구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거기서 벗어날 수 없도록 각종 검열조치들을 강화해나갔다. 지배세력이 거대한 광고비용을 지불하고 각종 협찬을 지원하는 대신 시청자에게 전달될 콘텐츠의 내용을 일정 규칙체제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강제성이 있는 각종 방송심위규정들과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는 연령제한이나 등급제를 도입해 새로운 소비시장을 형성할 수 있는 자유만 주어졌을 뿐, 주어진 틀이나 체제를 뒤집어버릴 내용은 사전 검열을 통해 걸러냈다.  

     


이렇게 가장 많은 자유가 주어져야 할 대중문화가 대중을 상대로 한 문화산업의 형태로 한정된 결과, ‘탐욕의 삼위일체’는 돈이 된다면 패자의 기억과 영혼도 무덤에서 끌어내 대중에게 판매할 수 있는 유사 전체주의적 시장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들은 또한 개발과 성장의 부작용 때문에 급증하게 된 정신질환과 만성질환의 확대재생산을 통해 새로운 이익 창출에 성공했고, 이렇게 창출된 시장은 세상이 고령화사회로 접어들수록 시장규모를 늘려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발판으로 자리매김시키고 있다.





모든 먹거리가 사라져도 유병장수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몸이 남아 있으니, 이들의 이익 창출이 멈춰질 이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부시 정부 시절에 본격화된 전 세계적인 테러의 증가, 지구온난화와 토지의 사막화와 물 부족 현상의 폭발적 증가, 국가와 개인 간의 메울 수 없는 불평등의 증가는 폭력시장이라는 거대한 먹거리를 창출했다.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사회와 산업체계를 전파하는 목자의 역할을 자처했던 이들은 시장의 지속적인 확대를 위해 어린아이부터 노인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광고를 쏟아 부었다. 이들은 또한 산업사회의 발전에 내재해 있었던 노동유연화와 가족해체, 불량의학과 건강산업의 확장과 맞물려 이혼과 동거, 섹스의 양과 파트너의 수가 강조되는 여성의 평등을 이용해 또 다른 시장을 창출할 수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섹스의 향연 속에 말초적 삶이 사랑의 의미마저 단편화하고 즉시화한다. 보다 많은 소비자를 창출하기 위해 개별적 삶이 강조되면서 가족이 해체됐고, 임금하락에 따라 맞벌이가 늘어남으로써 아이들은 방치됐으며, 여성의 몸은 쾌락의 순간을 위해 돈으로 환산되기 일쑤였다. 입사를 위한 성형이 필수가 되면 여성의 가치는 외모로 판명될 뿐이고, 남녀평등이란 허울은 외적 아름다움이라는 미디어적 가치에 매몰당한다. 



경제주체와 미디어가 조장하는 이혼이 늘어날수록 자궁과 떨어질 수 없는 양육권이라는 미명 하에 수많은 여성들이 저임금노동과 경력단절의 악순환 속에서 빈곤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가난의 대물림은 여성가장의 가구일수록 발생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이는 저임금·임시직 노동시장의 확대로 이어지고, 가격 파괴를 통한 할인경제가 아니면 이들의 삶을 바쳐줄 수 없어,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려야 한다. 저임금의 악순환이 이렇게 되풀이된다.     



노동에 대해 일방적인 파혼을 선언한 자본은 광속으로 날아다니는데 비해, 파트너를 잃어버린 노동은 갈수록 설자리를 잃고 있다. 한국이나 일본처럼 신자유주의가 급격히 진행된 나라에서는 강경노조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헌법과 국제법이 보장하는 노동자의 기본적인 인권마저 말살되는 것이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다. 


  1. 태봉 2014.09.13 08:58

    그러면 이러한 세상을 변혁시킬 방법은 없는건가요?
    이미 곤고해진 기득권의 시스템을 이제는 선거를 통한 투표로도
    고 노무현 대통령처럼,한나라의 대통령의 힘으로도 저 곤고한 시스템을 무너트리기엔 너무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치론 답이 없다고 봅니다
    다른 쪽으로 그 해답을 찾아야 본다고 보는데, 늙은 도령님의 혜안을 듣고 싶네요

    • 늙은도령 2014.09.13 19:24 신고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노력은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한지 알려주는 시금석 같은 것입니다.
      제가 세월호에 집중하고 있는 것도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만일 특별법 제정이 유족과 국민의 뜻대로 제정되면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역사적 선례가 될 것인데, 그래서 여야 모두가 특별법 제정을 미루거나 유족의 뜻과 다르게 합의한 것입니다.

  2. 태봉 2014.09.13 08:58

    그러면 이러한 세상을 변혁시킬 방법은 없는건가요?
    이미 곤고해진 기득권의 시스템을 이제는 선거를 통한 투표로도
    고 노무현 대통령처럼,한나라의 대통령의 힘으로도 저 곤고한 시스템을 무너트리기엔 너무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치론 답이 없다고 봅니다
    다른 쪽으로 그 해답을 찾아야 본다고 보는데, 늙은 도령님의 혜안을 듣고 싶네요

  3. 중용투자자 2014.09.13 16:41

    '자본주의 시스템은 잘 만들어진 사기다' 는 말이 생각나네요. ^^

    • 늙은도령 2014.09.13 19:26 신고

      자본주의는 사기가 맞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유대인 고림대금업자의 신용창출이 과학기술의 발전, 근대국가의 등장과 함께 대규모화 된 것에 불과합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수많은 이론이 있었지만 저는 단순하게 봅니다.
      이자를 위해 일정액의 돈을 끝없이 돌려대는 신용창출이 자본주의의 핵심입니다.



제가 연재하고 있는 ‘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는 16~17세기 사이에 발아해서 19세기에 최고조에 이른 근대이성이 인류 문명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다루는 문명 비판서입니다. 우리가 현대성이라 하는 것도 근대이성이 배출한 산물이기 때문에 근대이성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입니다.



헌데 인류에게 미래의 희망을 얘기했던 근대이성이 내놓은 결과란 인류 문명의 퇴행이었고, 현대성으로 넘어간 뒤에는 총체적 종말을 향한 최악의 결과ㅡ비인간적인 문명ㅡ만 양산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세상을 얘기한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지옥도를 그리는 것 같아 글을 쓰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을 정도입니다.



많은 분들이 연재하고 있는 내용을 읽는 것 같지 않지만, 소수의 독자라도 제 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틈나는 대로 근대이성과 현대성의 철학적 이해를 제공해야 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상당히 어려운 내용이라 쉽게 풀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근대이성의 탄생부터 시작해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철학과 사회학, 과학적 개념들을 설명할까 합니다.



이 부분은 제가 연작으로 기획했던 책 중에서 5번째에 해당하는 것이었는데, 정기후원을 받기로 마음을 정한 이상 이곳에 먼저 글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리 쉽게 풀어내도 상당히 어려울 수 있으니 근현대의 철학에 관심 있는 분들만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근현대 철학을 다루는 가운데 고대 그리스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학파의 철학도 일부분 다루게 될 것입니다. 너무 어렸을 때 읽어서 확실하지 않지만,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동양의 철학들(6권의 목표입니다)도 일부 다루게 될 것입니다. 아직도 몇 백 권의 책을 더 읽어야 하지만, 근대이성에서 현대성으로 넘어가는 부분은 필요한 책을 거의 다 섭렵했기 때문에 글을 쓰는 데는 문제가 없을 듯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근대이성의 철학적이고 사회학적 산물인 계몽에 대해서 다룰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불고 있는 인문학 열풍은 계몽적인 기획이 너무 강해 그 의도가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기 때문에 제일 먼저 계몽의 철학부터 다루어 보겠습니다. 위험을 등에 지고 살 만큼 불확실성이 커진 세상에서 계몽만큼 기득권에게 유리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근대이성의 산물인 계몽의 철학을 이해하려면 베이컨과 데카르트, 파스칼, 칸트, 니체, 라이프니치, 헤겔, 스피노자, 쇼펜하우어 등을 다루어야 하는데, 이 중에서도 칸트는 제일 먼저, 제일 많이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이 어디까지 갈 수 있으며,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 그 한계를 정한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근대까지의 서양철학이 일체의 변화ㅡ기독교 유일신의 선험적 모델인 이데아의 세계에서 멀어지는 것ㅡ를 타락으로 본 플라톤의 철학과 사상에 대한 각주였다면, 칸트는 변화의 끝을 정함으로써 그것을 끝내버린 철학자입니다. 칸트에게서 이상적인 삶을 구축하는 계몽철학이 나온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인식(認識) 및 실천(實踐)의 객관적 기준을 선험적(先驗的) 형식에서 찾고, 사유(思惟)가 존재(存在)를, 방법(方法)이 대상(對象)을 규정한다고 하였다. 도덕의 근거를 인과율이 지배하지 않는 선험적 자유의 영역에서 찾고, 완전히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도덕적 인격의 자기 입법을 도덕률로 삼았다.



위의 인용문은 위키피디아에 나온 칸트에 대한 설명의 일부인데, 이는 너무나 도식적이고 형이상학적이어서 계몽을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합니다. 그래서 아래의 인용문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 나오는 내용으로, 필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칸트를 다루고 있어 우리의 출발점으로는 제일 적합할 것 같습니다.



계몽의 철학을 변증법적으로 다룬 이 책은 ‘계몽’을 다룬 (제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이 책을 중심으로 칸트가 정립한 계몽철학을 다루되, 푸코와 아렌트의 도움을 더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해 최대한 쉽게 풀어보도록 하겠지만, 그 출발은 조금 어렸습니다.



게다가 이번 글을 아래의 인용문을 올리는 것에서 그칠까 합니다. 제가 인용문을 쉽게 풀기 전에 한 번 읽어 보시고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제가 다음 글에서 이 인용문을 설명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계몽철학이 쉽게 다가올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제 설명에 반박도 할 수 있을 터이고요.



계몽은 칸트에 따르면 “스스로에 기인한 미성숙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인데, 미성숙이란 다른 사람의 인도 없이는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수 없는 무능력이다.” “다른 사람의 인도가 없는 오성”이란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오성이다. 이 말은 즉 자신의 독자적인 일관성을 근거로 인식을 체계화한다는 것이다. "이성의 대상은 오직 오성과 이의 합목적적 사용이다." 이성은 “오성 행위의 목표로서 어떤 집합적 통일체”를 설정하는데 이것이 “체계”다. 체계는 개념의 위계질서를 수립할 것을 요구한다.


라이프니츠나 데카르트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칸트에게서도 ‘합리성’이란 “좀더 높은 유와 좀더 낮은 종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체계적 상관관계를 완수하는” 데 있다. 인식의 “체계화란 하나의 원리에 입각한 수미일관성이다.” 계몽이란 의미에서 ‘사유’란 통일적인 학문적 질서를 만들어내고 원리들ㅡ이것이 자의적으로 설정된 공리이건, 내재적인 이념이건, 최상의 추상화이건 관계없이ㅡ로부터 사실 인식을 도출해내는 것이다. 


“논리의 법칙”들은 질서의 내부에 가장 보편적인 관계들을 만들어내며 이 관계들을 정의한다. 통일성이란 하나의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데 있는 것이다. 모순율은 체계의 핵심이다. ‘인식’이란, 원리들 밑에 다른 일체를 포섭함으로써 성립한다. 인식이란 체계 속에 분류해 넣는 판단과 동일한 것이다. 체계적이지 못한 사유는 종잡을 수 없는 것이거나 권위적인 사유다. 


이성은 오직 체계적 통일성이라는 이념, 즉 개념적으로 고정된 상관관계에 기여할 뿐이다. 사람들이 붙잡고 싶어 하는 모든 ‘내용적 목표’란, 그것이 이성의 통찰일지라도 계몽의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광기나 거짓, 합리화에 불과하다. 철학자들이 이런 결론을 희석시키기 위해 인간적이고 우호적인 감정을 내보이면서 갖은 애를 쓴다고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성이란 “보편자로부터 특수자를 이끌어내는 능력”이다. 보편자와 특수자가 같은 성질이라는 것은 칸트에 의하면 “순수 오성의 틀”에 의해 보증된다. 이 말은 즉 지각 작용을 이미 오성에 일치하게 구조화하는 지적 메커니즘의 무의식적 작용을 일컫는 것이다. 주관적 판단이 행하는 사물의 이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물이 자아 속으로 들어오기 전에 사물에는 객관적 질로서 오성이 이미 새겨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틀이 없다면, 즉 간단히 말해 지각 작용에 지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어떤 인상도 개념으로 나아갈 수 없고, 어떤 범주도 실례와 어울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체계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수렴하는 사유의 통일성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학문이 의식하고 있는 과제는 이러한 ‘사유의 통일성’을 생산하는 것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중용투자자 2014.09.04 10:16

    '서양철학자들은 역사를 고대-중세-근대로 나누어진 마르크스 사관으로 보는데 이는 우월감에서 오는 것이다' 는 도올 선생의 말이 생각나네요 ^^

    • 늙은도령 2014.09.11 20:53 신고

      마르크스가 아니라 많은 철학자나 사회학자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죠.
      유럽 중심주의적 표현인 것은 확실합니다.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출발은 둘 다 비슷합니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자본주의적 해석이 들어가면서 많이 달라졌기도 했지만, 그 근본에는 경제규모의 확장을 불러온 근대이성이 있습니다.

      사실 자본주의라 함은 마르크스가 말한 것이 가장 정확하지도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유대인의 신용창출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만나 이루어진 것입니다.


스퀼러가 워낙 설득력 있게 말하는데다가 그와 함께 있던 세 마리의 개들이 위협하듯 으르렁거렸기 때문에 더 이상 질문도 하지 못하고 스퀼러의 설명을 받아들였다.

 

                                                                                                                    ㅡ 조지 오웰의 『 동물농장 』 중에서




얼마 전부터 연재를 시작한 '대한민국 현대사'에서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의 우려스러운 현상들과 첨예한 갈등, 진실의 왜곡 및 호도, 사이비 지식인들의 오류투성이의 글, 방송의 지독한 편향성과 선정성, 정치인의 타락과 부패를 고발하기 위해 시작했다. 이런 아노미적 현상들을 필자의 사고와 성찰을 거친 다양한 단상과 글들을 통해 자세히 다룰 생각이다. 


                                                    




또한 필자는 지그문트 바우만에 이르러 명료해진 ‘액체대’ 또는 ‘최초의 현대(성)’이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연재에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다양하면서도 파괴적이고, 극단적인 현상들을 분석하고,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필자의 능력이 되는 한) 다양한 분야의 대가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깨어 있는 지식인들의 앞선 성찰을 인용하려고 한다. 



인용되는 분야의 넓음이 사유의 단단함을 흔들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사유의 단단함이 독자의 상상을 방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여백을 남겨둘 생각이다. T. E. 로렌스는 《지혜의 일곱기둥》에서 “길을 가던 순례자들은 이곳에 돌탑을 세웠다......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 탑 위에 돌 하나를 더 얹어놓곤 했다. 어떤 특별한 이유나 알려진 동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남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고 그 중 누군가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필자의 노력도 그것과 다르지 않다. 



이번 연재에 나오는 여러 가지 단상들은 현재의 대한민국을 살펴보는 정신의 지도가 될 것이지만, 측정의 미숙함 때문에 때로는 중간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다. 필자의 무능력과 앞의 이유들로 해서 곳곳에 허술한 논리와 비약이 존재하고 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다만 필자는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보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더 멀리 보려고 했을 따름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바로 내일을 향해서 부산하다면, 나는 양양한 미래를 향해서 생각을 돌렸던 것”이라는 자세를 견지하고자 했다. 





                                                                     


각종 위험들의 매일같이 터져 나오고, 극도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사회에서 이런 노력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확실하지 않지만, 최소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되,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고약한 의도들을 파헤쳐 날것의 형태로 전하려면 이런 자세를 견지할 수밖에 없었음을 밝힌다. 지식인으로서 비판정신을 유지하려면, 이런 자세를 견지함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 생각한다.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를 추측해서 현재의 세상에 의미 있는 무엇을 제시하려면 영혼의 얼음집에 담겨 있는 차가운 비판정신을 유지해야 한다. 




수백 년에 걸친 근대를 70년 정도의 파시즘적 속도로 치러낸 대한민국의 상황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상황이 심각하다. 근대가 남긴 모든 성과와 잔재와 폐기물이 분명하고도 파국적인 위험으로 변화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21세기는 ‘유동하는 공포’가 극에 달한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타인이 지옥’이라는 샤르트르의 말은 가족의 붕괴와 삼포세대의 등장, 이혼율의 꾸준한 상승, 자살률과 노인빈곤률 1위, 공교육 붕괴와 청소년들의 행복도 급락, 민주주의의 후퇴 등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도 바우만의 성찰은 시급을 다투는 일이 됐다. 필자가 연재를 시작한 이유도 여기서 출발한다. 





바우만은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에서 “현대(성)의 본질과 그것의 역사적 경향, 문명화 과정의 논리, 사회적 삶의 점진적 합리화의 전망과 그것에 대한 장애 등은 종종 마치 홀로코스트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논의”되는 기억 삭제의 경향이 있다고 했는데, 이런 현상이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현대(성)의 부정적 아이콘이었던 이명박이 대통령에 오르고, 그것도 모자라 MB정부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박근혜 정부의 탄생은 민주주의의 기초인 선거마저 국가기관들에 의해 유린됐으며, 이것에 대한 실체적 진실과 그에 따르는 단죄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마치 국정원을 중심으로 한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만들려는 현 집권세력과 정부기관 및 방송들이 일치단결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실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민주화 이전으로 후퇴했다고 말해도 모자람이 없다. 이밖에도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증거들은 넘쳐날 지경으로 널려 있다. 다수가 합의(선택)하면 그것이 그 사회의 도덕규범이 되는 상황은 민주주의를 파괴시킨다. 





다수결원칙은 민주주의의 원칙 중 하나이지 전부가 아니다. 합법화된 물리력이 국가(정부)에 집중된 현대국가의 경우, 정치가 거대관료제를 독점하는 것도 모자라 자본권력 및 방송과 손을 잡으면, 그리고 그 결합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대항권력이 없다면 정치적 자유가 견인하는 민주주의의 다원성과 사회경제적 평등이 견인하는 소통과 합의의 규칙은 말살된다. 여기에 대항권력의 현실적 결과를 도출하는 선거마저 국가기관에 의해 왜곡된다면 민주주의는 녹아서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



이 때문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으면 하는, 유시민이 『후불제 민주주의』에서 비통하게 말한 "민주주의를 제대로 누리려면 국민이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잘 알고 그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하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국민들과의 헌법이 규정한 기본권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지금의 경제적·정치적 위기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제대로 성찰하기만 한다면 앞으로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힘을 얻고 있다. 이는 명백한 퇴행이지만, 북한과의 준 전쟁 상태를 유지하는 한 영원히 지속될 한국적 민주주의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일본의 극우적 준동은 또 어떠한가?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몰락의 사이에서 다시금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격랑에 빠져들 수 있는 한반도의 상황은 또 어떠한가? 여전히 한국의 지배엘리트에 남아 있는 악질 친일 부역자들의 후손들은 또 어떠한가? 압축성장과 경제성장을 빌미로 부와 권력을 독식하고 후대에 세습하는 사적독점의 세력들은 또 어떠한가? 



필자는 이 모두를 조금씩이라도 다루려 한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통해 일방적 주장이 된다 해도, 현재의 혼란과 갈등을 조장하는 것들을 하나씩 밝혀 퇴출시키고자 노력할 것이다. 바로 이런 목표 때문에 인류 문명에 대한 비판서인 '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를 동시에 연재하고 있으며, 두 개의 연제를 교차해서 보면 현재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조금이라도 늘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는 과신도 아니며, 내 지적 풍요로움의 자랑도 아니다. 나는 아직 너무나 많이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그것 뿐이다. 그래서 이런 무모한 짓을 할 수 있는 것이며, 글을 쓰면서도 다시 고쳐쓸 것을 각오한 상태에서 부족한 공부를 병행하고 있다. 이 모든 나의 노력은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 이상의 것은 없다.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인간이 무엇보다 앞선 것임을 보여주려 한다. 






굴곡지고 파란만장했던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제합병 시기를 견뎌냈고, 6.25전쟁을 경험하고 참전하신 내 부모님의 기억들을 옮기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나의 작업은 살아 있을 시간이 별로 많지 않은 어머님의 생존 시에 철저히 실패한 자식이 그 동안의 불효에 대해 조금이라도 만회할 수 있는 유일한 도리이기도 하다. 또한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죽어갈 모든 이들과, 현재의 욕망보다 우선하는 미래세대에게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전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올해 말까지 계속될 이 연재들은 출판의 형태를 취할 테지만, 그 이전에 많은 분들과 거친 초고의 형태로라도 만남을 가질 것이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 했으니 조금이라도 많은 분들이 나의 지적 여정에 함께 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1. 태봉 2014.08.23 12:24

    제가 아는 게 없지만 님의 지적 여행에 살포시 한 숟가락 얹져봅니다 화이팅이요!!!^^

  2. 머루 2014.08.24 15:41

    도령님의 방대한 지식의 힘에 늘 반갑고... 제 지식의 힘이 갑자기 배로 커지는 느낍입니다
    제 일의 시간관계상 늘, 항상 읽을수없지만, 시간이 나는데로 아껴서 아껴서 읽고있습니다
    건강관리 잘하시여 오랫동안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 늙은도령 2014.08.24 20:23 신고

      네, 열심히 공부하고 사고하고 글로 옮기고 있습니다.
      모두 다 여러분의 관심 덕분입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저를 움직이게 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3. 숲속의친구 2014.08.24 17:04 신고

    늘 감사히 글을 읽고 있지만, 그러한 고도의 집중이 행여라도 도령님의 건강에 이상신호를 보내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4.08.24 20:24 신고

      건강을 잘 관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늘 그것이 문제인지라 최대한 조심하고 있습니다.
      건강해야 오랫동안 글을 쓸 수 있을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4. 가난한여행자 2015.04.12 21:54 신고

    아~~ 대단한 저술을 시도하시는 군요.


    저는 한국현대사를 이념이 아닌 ....개인우상화 , 개인과 특혜집단의 욕망충족을 위한 시공간이라고 생각 됩니다

    북한은 유물론 신봉하는 공산국가에서 3대세습을하고, 한국도 모든것이 기득권이 세습되고.(교회도세습..이해불가)

    한국,북한도 이념이 아닌 , 개인 .집단이 욕망 분출, 취득하고 세습하는 연장선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역사적으로 후진적 사회 전형입니다

    저는 현재 한국을 '''' 중세봉건적 사고를 가진 공업화된 나라''' 라고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는척해서....



    아무튼 개인이 하기 힘든 작업을 하시는것에 저자신이 부끄럽네요

    부디 건강챙기시고 ,,,좋은글 쓰기를 바람니다
    ''''''

    • 늙은도령 2015.04.12 22:05 신고

      아닙니다, 저는 다만 운이 좋아 많은 책을 읽었고 조금 더 전문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었을 뿐입니다.
      한 분야에 걸치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이 이런 무모한 시도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님의 지적이 상당 부분 대한민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적 풍요함과 편리함이라는 욕망의 노예가 됐습니다.
      인간의 가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잇습니다.

    • 길냥이 2015.10.04 01:11

      조선이 공산주의체제라는건 분명한 거짓말입니다.
      예전에 어느책에서 읽은 기억에 의하면 조선이 개한미gook 보다 잘나가던 시절의 언급입니다.
      식량을 어느정도 자급하던 시절의 조선관리가 이야기한 것입니다.식량부문에 한에 어느정도 공산주의에 접근했다는 이야기를 했답니다.
      식량부문에 한해서 말입니다.다른부문은 공산주의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공산주의국가는 아직 출현한적이 없읍니다.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체제의 국가라는 존재들이 적대적인 국가를 공산주의국가로 단정을 하고 일방적으로 주장을 했을뿐이고 그게 널리 퍼진 현상이라는 것이지요.

    • 길냥이 2015.10.04 01:30

      아참 공산주의는 민주주의의 반대개념이아닙니다.
      개한미ook 에서는 조선을 적대하다보니 조선을 공산주의국가로 취급하다보니 개한미gook 이 마치 민주주의국가인양 착각을 하거든요,
      조선이 공산주의국가가 아니듯이 개한미gook 또한 민주주의국가가 아니란 것이 보다 더 적절한 표현일듯합니다.
      권력에 세습은 없읍니다.

  5. 길냥이 2015.10.04 01:07

    민주주의를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것 같습니다.
    사실 개한미gook 인들의 절대다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는 아주 애매한 개념입니다.
    글중에 다수결의 원칙이 민주주의의 원칙이라고 하셨는데 그건 분명한 거짓입니다.
    하긴 개한미gook 인 다수가 그런 개념을 받아들이곤 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다수결의 원칙일 뿐이지 민주주의와는 전혀 관계없는 원칙입니다.
    책을 한권 권해도 될런지 모르겠읍니다만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비밀> 이란 책을 권하고 싶군요.
    민주주의를 경멸하고 전체주의내지 귀족정 비슷한 체제를 염원하던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다룬 소크라테스 비평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6. Shine 2018.06.27 01:39

    "이 모든 나의 노력은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 이상의 것은 없다.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인간이 무엇보다 앞선 것임을 보여주려 한다."

    응원합니다. 건강과 평화를 빕니다.


결국 지난 250년 동안 인류는 지구 곳곳에 널려 있는 석탄을 이용하는 기술이 내연기관을 탄생시켰고, 산업혁명과 제국주의의 엔진 노릇을 톡톡함으로써 노동분업(포드의 자동차 생산방식, 포디즘)의 1차 소비 팽창을 이룰 수 있었다. 그 이후 과학기술의 발달로 석유의 다양한 이용과 전기전자 혁명에 성공함으로써 포스트포디즘(값싼 노동력을 착취하고, 환경규제를 피해 전 세계적 재편성된 생산체제)의 2차 소비 팽창을 이룰 수 있었다. 



이어 생산품(특히 모바일기기와 문화 콘텐츠)를 한 번 만들면 무한복제가 가능한 첨단통신기술의 발달로 지적재산권과 특허전쟁으로 중무장한 초국적기업들의 3차 소비 팽창을 들어설 수 있었다. 이들은 이제 각 지역 고유의 생명으로부터 추출한 유전자와 원소들을 특허권으로 독점해, 지역 고유의 치료법과 먹거리에서도 악마의 특허료를 받아내고 있다.      



이렇게 전 지구적 지배세력에게 무한대의 탐욕만 독점시켜준 채, 근대이성은 무한경쟁과 효율성의 신화인 폭력적인 현대성을 이루어내는데 성공했다. 부국들의 이익 독점을 위해 만들어진 OECD 가입국 중 각종 불평등이 가장 심한 미국과 한국에서 현대성의 폭력성이 극단에 이른 것도, 정부가 무한경쟁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무차별적인 규제완화를 통해 국민 대다수의 삶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성이 폭력성을 띠게 된 것은 이것 말고도 또 다른 과학기술적 발전이 자리하고 있다. 첫 번째는 신에 의한 인간 구원의 확실성에 의문을 제공한 천체 망원경의 발전으로, 인류가 우주도 개척해서 경제적 부를 계속해서 늘릴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 것이다.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은 제시되지 않은 채,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다루어지는 방식으로 근대이성이 장담한 영원한 진보에 대한 환상만을 더욱 강화시켰다.  



물론 이 덕분에 우주공학과 관련된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각종 입자가속기 같은 수천억에서 수조, 수십조가 들어가는 각종 프로젝트들이 진행됐다. 투자 대비 경제성을 최고로 치는 현대성의 주창자들은 전 세계에서 수백~수천조 이상 들어간 우주공학으로부터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들은 산출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는 침묵하고 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각국의 정부들이 막대한 투자비를 투입한 것은 상위 1%의 배만 불려주었을 뿐 인류의 삶에 기여하지 못했다.    



오히려 우주공학의 발전은 현대성의 폭력성을 높여주는 두 번째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한 번 사용하기 시작하면 인류의 공멸을 걱정해야 하는 대량살상무기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일본에 투하된 두 개의 원자폭탄과 소련과 미국 및 일본에서 폭발한 핵발전의 확산이다. 단 두 개의 원자폭탄과 핵발전소에서 누출된 방사성물질의 파괴력은 인류로 하여금 인류가 발전시킨 과학기술에 의해 인류가 공멸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핵폭발과 핵융합으로 대표되는 무한대의 에너지는 근대이성이 선언한 무한한 진보를 이끌 핵심적인 과학기술로 포장됐지만, 지난 70년 동안 일어난 단 몇 개의 사건을 통해 인류는 정반대의 두려움에 빠져들었다. 무한대의 에너지를 창출하는 핵폭발과 핵융합이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멸을 불러올 수 있는 위험천만한 과학기술임이 밝혀졌다. 이때부터 인류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친구이기보다는 적일 수도 있음을 깨달았지만, 전 지구적 지배세력의 탐욕에 밀려 공멸을 두려워해야 하는 아노미적 현상 속으로 빠져들었다(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보라).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압승으로 끝난 소련과 동독의 붕괴와, 우주 개척과 무한대의 에너지 창출을 견인할 과학기술의 발전에 고무된 일부 지식인들은 《근대의 종언》이나,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문학의 종언》, 《탈산업사회의 도래》와 《문명의 붕괴》 같은 성마른 선언들을 우후죽순으로 내놓으며 인류를 현혹시켰다. 이들의 선언을 이용해 신자유주의적 통치를 내세운 세력들이 영국과 미국을 거쳐 전 세계적으로 정권을 잡기 시작했다.  



이후 무소불위의 권력을 움켜쥔 신자유주의 통치세력은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진 1989년을 기점으로 해서 근대이성의 마지막 저항선인 복지국가의 이상마저 조금씩 녹여서 공기 중으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견고하게 구축된 자본주의가 내부로부터 무너져내려 공기 중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격문이 거꾸로 뒤집혀버린 것이다. 마르크스는 전 지구적 지배세력의 종말을 예언했는데, 현실은 정반대로 진행되며 마르크스의 추상적 예언을 조롱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40년 동안 전 지구적 지배세력들이 추진한 부정적 세계화 과정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축적한 전 지구적 특권그룹은 모든 대항세력(노조와 시민단체)을 무력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국민의 행복과 안전을 담보하고 새로운 발전 동력을 제시해야 할 전통의 국가 역할마저 시장 논리에 반하지 않도록 조정하고 축소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대해 바우만은 《유동하는 공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글로벌 경제 세력의 하녀든 아니든, 국가란 쉽게 사표를 쓰고(과연 누구 앞으로?), 짐을 챙겨서 어디론가 사라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여전히 국가는 그 영토 내의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책임을 맡고 있으며, 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행동에도 책임을 지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 온전한 면, 다른 세력ㅡ국내와 국외 세력 모두, 어느 경우든 국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ㅡ에 대해 어떤 경우에는 완전히 굴복하기도 하는 면이야말로 그 핵심적 기능인 법질서 유지와 경찰 업무 기능을 보존할 뿐 아니라 확대, 강화할 수 있게 해주는 면이다. “시장을 더욱 개방해, 그 경계가 공적 영역까지 스며들어 오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정부는 시장 실패나 외부 효과 같은 시장이 인식하기를 거부한 문제의 청구서를 집어 든다. 그리고 시장의 힘에 따라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패배자들을 위한 안전망으로서의 역할을 한다...시장의 힘을 규제하는 것을 포기하고 일방적인 ‘부정적’ 세계화ㅡ즉 비즈니스, 범죄 또는 테러리즘의 세계화, 그러나 정치와 사법 기구는 이를 통제할 수 없다ㅡ앞에 국가가 항복하는 일은 그 대가로 사회 불안과 붕괴를 가져왔다. 이로써 인관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취약해지면서,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은 덧없는 것이 되고, 집단에 대한 열의와 연대성은 깨지기 쉽고 폐지가 가능한 것이 되었다. 그 결과 국가에는 사회복지국가를 수립하고 유지하며 운영하는 일보다 결코 가볍지 않은 부담이 주어지게 된다. 규제가 없어진 시장과 부정적 세계화의 결과로 이따금 일어나는 실패 같은 것이 아니라, 매일처럼 발생하는 평범한 일에서 정부가 짊어져야만 하는 사회적 부담이 계속해서 늘고 있으며, 그것도 점점 빠르게 늘고 있다.



바우만의 성찰은 매우 적절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들이 남아 있다. 명쾌하게 근대의 종말을 선언하기에는 여전히 근대적 잔재들이 세계의 중심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베이컨의 4개의 우상비판과 데카르트의 사유 예찬, 흄의 회의하는 이성에서 시작된 합리적 이성의 근대는 자연의 변덕스러움에서 벗어난 예측 가능하고 안정된 체제ㅡ최고의 주권으로서의 국민국가와 중앙 집중화된 행정을 담당하는 거대관료조직과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시민의식이라는 세 개의 축이 근간인ㅡ에 대한 믿음이 변함없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근대에 이루어진 고전물리학적 성찰이 제공한 모든 것이 질서 잡힌 상태ㅡ뉴턴의 만류인력에 근거하고,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완성된ㅡ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여전히 유효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이런 세 개의 축에서 구축된 합리적 이성ㅡ거의 대부분 합리적이지 않았지만ㅡ이 주조해낸 합리적인 이성과, 절대적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적 관조를 폐기시킨 과학에 대한 맹신은 폭력성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는 기술-경제적 발전의 신화와 함께 현대성의 핵심에서 떠날 기색이 전혀 없다. 

  1. 태봉 2014.08.20 16:39

    많이 공부하고 갑니다 늙은도령님^^


자신들과 그들의 정신을 권위와 편견의 감독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의 소망이다. 그들은, 오랜 전통이든 새로운 전통이든, 자유와 인간다움과 합리적 비판의 기준에 맞는 전통은 보존하고 발전시키고 확립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단지 확립된 것이거나 그저 전통적이기만 한 절대적 권위는 거부하는 열린사회를 건설하고자 한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 앉아서, 통치의 책임을 인간적 권위나 초인간적인 권위에 전적으로 지워버리려고 하지는 않으며,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없애기 위해 일할 각오가 되어 있다.  



위의 인용문은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Ⅰ》의 서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위대한 과학자이자 철학자였으며, 불 같은 성격의 교수였으며, 인간에 대한 애정이 넘처나는 휴머니스트였던 그는 최근에 들어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진정한 자유주의자였다. 그의 대표작인 《열린사회와 그 적들Ⅰ》은 초기 기독교의 원형을 제공했으며, 좌우의 전체주의의 기원이 된 플라톤에 대한 비판서이다. 





19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지성사는 플라톤에 대한 해석이라고 말할 정도로 플라톤이 서구 문명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고대 그리스 철학의 최고봉을 이루지만, 그들이 미친 영향의 거대함은 19세기 중반까지 서구 유럽의 정부와 문명을 소수의 엘리트(귀족이나 선민의식의 형태로 나타난다) 수중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교육과 종교가 이들의 수중에 있었으며, 이는 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유지됐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모든 것의 기원, 즉 순수 그 자체이자 완전한 상태인 절대적 존재 혹은 형상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철학자가 완벽한 고독의 상태에서 깊은 성찰에 들었을 때 불연듯 보게 된 신의 모습이자 깨달음의 정화가 이데아(형상 이론이 여기서 나온다)다.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사막에 들었던 고행의 순례자가 죽음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러, 몽롱한 가운데 환영이나 환청처럼 보거나 들은 것이 신이 섭리나 우주의 법칙이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그것은 일종의 체험이자 유일무이한 경험이어서 철학자는 완벽한 순수체인 이데아란 존재를 느낄 수 있거나 볼 수 있지만, 말이나 글로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데아의 경이로움을 경험한 철학자는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 철학자는 이런 성찰에 이르지 못한 일반인들에게 이데아의 경이를 체험할 수 있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완전한 상태인 이데아의 세계를 체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이데아와 최대한 비슷한 사회(이데아의 세계, 천국에 있는 국가)로 인도할 수 있다. 이데아란 어떤 티끌도 없는 순수하고 완벽한 상태(형상)이기 때문에 이데아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타락하거나 부패하거나 악에 가까워진다. 





즉 이데아의 세계에서 멀어지는 '모든 사회적 변화는 타락이나 부패 또는 퇴화'라는 몰락이 법칙이 플라톤이 정립한 이데아론의 핵심이다. 플라톤이 《법률》에서 '악한 것의 변화를 제외하고는 모든 변화는 악하다'라고 한 것에서 이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이데아로부터 멀어지는 변화인, 모든 부패와 몰락이 도덕의 타락에서 나타나고, 최종적으로는 인종의 퇴화와 국가의 몰락으로 이어진다고 봤다. 



심지어 플라톤은 "변하지 않는 완전한 국가에 신념을 '모든 사물'의 영역까지 확대"해서 "일상적인 사물이나 부패하는 사물의 모든 종류에도 그에 대응하는 부패하지 않는 완전한 것이 있다"는 형상 이론이나 이데아 이론을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우주적 차원에서 인간사를 거쳐 사물의 차원까지 적용되는 거대한 몰락과 부패의 법칙이 완성됐고, 그의 사상과 정치철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존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일반적인 부패의 우주적 법칙이 인간사에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해 사회의 타락과 부패를 막고 악의 번성을 저지하기 위해 이데아의 경이로움을 체험한 철학자는 동굴에서 나와 사회(당시에는 도시국가, 즉 폴리스를 말함)를 구원해야 한다포퍼의 주장처럼, "플라톤은 역사적 운명의 법칙, 부패의 법칙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지탱되는 인간의 도덕적 의지로 붕괴될 수 있다고 믿었다."





플라톤은 《정치가》에서 "일반적인 부패의 법칙이 정치적 부패를 몰고 오는 도덕적 부패로 나타나는 것과 똑같이" 이데아를 체험한 위대한 법률가(철인왕)의 "이성의 힘과 도덕적 의지로 이 정치적 부패의 시대를 종결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변화가 없는 이데아의 세계를 이 땅에 실현하면 '악이 없는 최선의 국가이자 완전한 국가, 즉 황금시기의 국가이자 철인왕에 의해 일체의 변화가 '억제된 국가'인 천년왕국이 건설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철학자의 의무이자 책임이며, 특히 사회의 변화를 주도하는 정치를 통해 이를 이룩해야 한다. 이런 플라톤의 정치철학ㅡ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과 《정치의 약속》에서 발전적 변화를 추동해 후대에게 넘겨주는 정치의 역할과, 불평등하게 태어났지만 평등을 향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의지인 정치적 자유와, 어떤 척박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을 억제한 플라톤 때문에 그에게서 시작된 정치철학이 그에 의해서 끝났다고 비판했다ㅡ은 철인왕(이데아를 경험한 철학자, 현자)에 의한 통치를 최고의 체제로 자리매김시켰다. 


철인왕ㅡ플라톤은《정치가》에서 철인왕을 자신이나 자신과 비슷한 수준에 이른 철학자라고 했고, 공자도 비슷한 말을 했다ㅡ에 의한 일체의 변화로부터 멀어진 '억제된 국가'가 최선이자 최상의 국가가 된다는 것은 일체의 자유와 발전적 변화가 원천차단된 닫힌사회이며, 하나의 지도원리가 사물의 세계(길거리에 널려 있는 돌 하나)까지 지배한다는 점에서 히틀러의 나치즘, 즉 전체주의의 기원으로 작용했다(이것이 나치의 전체주의가 어디서부터 기원했는지 추적한,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억제된 국가'는 위계서열이 분명한 계급사회를 이룬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나누어지기 때문에 우월한 종족이 열등한 종족을 지배하는 인종적 차별도 허용된다. 물론 플라톤이 말한 계급사회는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사회와는 다르다. 마르크스는 그 시대의 지배적 체제를 이루는 지배계급이 그 이하의 계급, 특히 노동계급을 무한 착취하지만, 플라톤은 지배계급의 착취에 제한을 둔다. 이는 '억제된 국가'의 안정과 이익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특권계급들의 착취를 제한하려는 이런 경향들조차도 전체주의에 상당히 공통되는 요소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전체주의는 단순히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닫힌사회, 즉 집단이나 부족의 도덕이며, 개인적인 이기주의가 아니라 집단적인 이기주의"라고 말한 칼 포퍼의 지적은 정확하다. 플라톤이 주장한 국가의 이익에 해가 되는 어떤 것도 선하지 않고, 도덕적이지 않으며,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는 주장도 집단적 이기주의에 불과하다.


이는 일종의 공생을 위한 공리주의(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생산에 방점이 찍힌 성장담론을 이룬다)이기도 하지만,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우리 조상의 홍익인간에 비하면 그 수준이나 방식이 저급하고 제한적이며 일방적이다. 플라톤이 주장한 선량하며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행위란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이익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특권계급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국가를 통치하는 최종 지배자인 단 한 사람의 이익으로 귀결되는 전체주의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이익은 모든 이들에게 공정하게 나눌 때 가장 크지만, 국가의 이익을 앞세우면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그리고 후대에 세습하고 있는 소수의 집단에게 가장 많이 돌아가며, 최고의 권력을 지닌 자가 가장 많이 취하는 것이 인류의 보편적인 경험이다.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이런 경험은 더욱 강화돼, 인류가 다른 생명체와 함께 공존이나 상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음을 말해주고 있다. 


결국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모든 행위의 기반인 개인의 기본적이고 평등하고 인도적인 자유도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이다. 양도불가능하기 때문에 침해불가능한 시민의 기본권이 제하받는 경우가 나타난다. 이런 과정이 중첩되고 강화되면 권위주의 독재가 등장하며, 플라톤의 주장대로 하면 '다른 시민을 해치지 않는 행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의 기본 목적이 성립될 수 없다. 


즉, 플라톤의 주장대로라면 "국가는 가능한 한 균등하게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되, 자유의 동등한 제한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것 이상은 넘어서"면 안 된다는 현대 민주주의의 원리가 무력화된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과도하게 제한받게 되면, 모든 권력이 시민에서 나오는 민주주의는 작동할 수 없다. 우파 전체주의는 늘 이런 과정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독일의 나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일본의 군국주의, 한국의 권위주의 독재 등이 모두 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회경제적 평등에서 출발하는 민주주의를 무력화시켰다(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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