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미디어의 천국이다. 3개의 지상파와 수십 개에 이르는 부속 채널, 4개의 종편, 2개의 보도전문채널, 거의 백 개에 근접하는 케이블방송. 이들의 콘텐츠를 확대재생산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이버 채널까지 대한민국은 하루 24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미디어들의 무한 메시지와 영상들로 넘쳐난다. 인간은 메시지와 영상의 홍수 속에서 영혼없는 유령처럼 메시지와 영상의 형태로 이곳 저곳을 배회한다. 





눈이 가는 모든 곳에 영상이 돌아가고 있고, 귀는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소리의 홍수 속에 단 한 순간도 쉴 수 없다.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감과 신경은 미디어가 쏟아내는 콘텐츠에 언제나 열려있어야 한다. 이를 인식해서 분류하고 합당한 반응을 제시해야 할 뇌는 압도적인 콘텐츠의 양에 질식하기 직전이다.



1분 이상의 생각을 요하는 일은 금물이다. 끝없이 밀려드는 콘텐츠와 정보에 감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도 힘겨운 상황에서, 어느 하나를 붙들고 생각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에 다름없다.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을 끝없이 흘려보내지 않으면, 연속해서 밀려드는 메시지를 감당할 방법이란 없다.



‘모든 철학이 죽었다’는 비트켄슈타인의 한탄을 넘어, 자기반성적 성찰도 사라진 미디어 세상에서 보고 듣는 것이 곧 진실이고 진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처럼 다양한 미디어가 쏟아내는 메시지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려면 생각하지 않는 것이 필수적인 사항이다.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최악의 범죄이다.





짧고 표피적인 단상들과 즉각적인 반응들이 넘쳐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주어지고 접하는 콘텐츠와 정보가 많으면 생각의 양과 질이 높아진다고 판단하기 쉽지만, 뇌라는 것이 그렇게 진화해오지 않아서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뇌는 가소성이 있어서 주어진 콘텐츠와 정보의 특성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디지털 세대일수록 생각의 양과 질이 많아야 가능한 철학이나 사상, 사회적 문제 등에 대한 거부감이 커지는 이유도 우리의 뇌가 미디어의 특성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탐사보도나 기사마저 일정 수준 이상으로 길어지거나 복잡해지면 안 된다. 인문학 열풍이 불어도 독서량이 늘지 않고 강연을 듣는 것과 동영상을 보는 것만 늘어나는 것도 우리가 미디어에 얼마나 길들여져 있는지 반증해준다.



이런 현실에서 미디어가 내보내는 콘텐츠와 정보가 자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검열을 거치거나, 특정 세력에 유리한 편향성을 지니고, 속보와 특종 경쟁 때문에 오보가 빈발하고, 특정 사실(진실이 아니다)만 부각해서 내보내거나, 아예 사실을 왜곡해서 내보내는 것이 일상화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민주주의를 확대하리라 예상했던 사이버 공간이 검열까지 받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미디어에 노출되는 시간이 많을수록, 미디어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소통하는 것이 일상화될수록, 우리의 뇌는 미디어화 된다. 우리는 미디어가 보여주는 것에 관심이 집중되고, 미디어가 이끌어가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생각의 양이 늘어나는 것 같지만 분업화된 노동처럼, 수없이 많은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분열된 자아처럼 통합되지 못하는 단편들로만 이곳저곳을 빛의 속도로 떠다닌다. 



생각의 깊이가 요구되는 것, 가치 판단의 기준이 명확해야 하는 것, 자기반성적 성찰이 필요한 것, 일관되게 생각을 밀고 가는 것, 그래서 생각의 끝까지 가보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심지어 무수히 많은 경험을 통해 상황을 판단하는 직관마저 미디어적인 방식으로 작동하게 된다. 자본과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편향된 보도와 정보가 사실 확인이라는 필터작용도 없이 수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방적인 내용만 전달하는 광고가 대표적인 예다. 첨단과학이 총동원된 마케팅의 정수인 광고는 인간의 의식을 파고들어 광고가 의도하는 대로 반응하고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다. 광고로 돌아가는 미디어가 본질적으로 자본적이고 시장 편향적인 매체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류가 영원히 함께 해야 할 미디어는 가장 자본주의적이고 가장 권력지향적인 매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가족과 공동체와 사회가 제 역할을 못하는 현실에서 미디어(특히 대중매체)가 공적 영역을 독점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미디어가 전한 콘텐츠의 내용을 알지 못하면 일상의 대화에도 끼지 못한다. 미디어의 종류가 늘어날수록 공적 영역뿐만 아니라 사적 영역에서도 미디어의 콘텐츠와 거기서 파생된 것들이 대화의 주를 이룬다. 



헌데 대한민국의 미디어는 편향성이 도를 넘었다. 자본주의적이고 권력지향적인 편향성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미디어가 배출하는 콘텐츠와 정보가 공기처럼 만연된 현실에서 대한민국 미디어의 편향성은 생각의 깊이가 필요한 모든 것을 질식사시키며, 사고와 가치와 이념의 다양성마저 검열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지상파와 보도전문채널이 장악되고, 종편이 무더기로 승인되고, 정부의 비호 아래 세를 확장해온, 그래서 권력과 언론이 불편하지 않고 한통속으로 움직이는 지난 7년이란 다음의 한 줄로 압축할 수 있다. 죽은 미디어의 사회, 대한민국.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달빛천사7 2014.10.06 08:57 신고

    한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좋은하루되세요

  2. 중용투자자 2014.10.06 14:23

    정보는 넘쳐나는데 생각의 깊이는 더 짧아지게 만드는 미디어의 맹목적인 독선이 갈수록 심화되는군요.

    • 늙은도령 2014.10.06 20:43 신고

      네, 단편적인 생각만 늘어납니다.
      미디어와 책읽기를 같이 해야 합니다.
      또한 명상의 시간을 늘리는 것도 필요합니다.

  3. 공수래공수거 2014.10.07 14:05 신고

    읽을만한 매체는 그래도 있는데 볼만한 매체는
    거의 없는것 같습니다..에혀
    눈과 귀를 통제 당한거 같은 세상.

    • 늙은도령 2014.10.07 19:46 신고

      우리는 너무 길들여졌어요.
      생각을 안 하려고 하고 너무 편리함만 찾아답니다.
      대중매체의 발달이 인간의 삶을 완전히 바꿔버렸습니다.

  4. 젊은학생 2014.10.09 06:11

    심지어 생각의 흐름까지도 유도하는 것 같아요.
    살짝 벗어난 예시지만,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자막이 참 많이 나오죠,
    자막은 이해를 돕고 더 큰 재미를 주기도 하지만, 시청자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막고 그 프로그램이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게끔 합니다.
    두 세개의 예능프로그램을 즐겨보는데 문득 그런생각이 들었네요.

    생각을 못하게 하는 것은 바쁜 현대사회도 한 몫 합니다.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저조차도 생각할 시간이 없음을 깨닫고
    생각을 할 시간을 따로 정해야되나 싶을 정도예요.

    다행히도 제가 듣는 수업들은 교수님들께서 질문을 많이 하십니다.
    어제 들었던 welfare economics 에서는 '복지국가'란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여
    복지란? 국가란? 에 대한 질문 등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정답이 있는 건 아니지만, 복지국가가 무엇인지 아무 생각도 안 한 상태에서 국가의 정책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이번 학기가 끝나면 복지국가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을까요?
    심심할 때 보는 예능을 줄이고, 한가지 한가지 생각을 해봐야 겠어요.

    어제 HIstory of Political Ideas 중간고사로 고대그리스부터 계몽주의시대까지의 정치사상의 변화 및 발전에 대한 에세이를 써야했는데 정말..부끄러운 에세이를 쓰고 왔어요. (진짜 망했어요)
    감히 생각만 해보자면, 기존의 유명한 정치사상들이 업데이트가 필요한 것 같아요.
    도령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우리나라의 정부형태가 어떠한 정치사상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면 말이죠.

    • 늙은도령 2014.10.10 00:01 신고

      네, 방송은 시청자가 생각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길들여 시청률을 높이는데 사용합니다.
      자막은 그런 기능을 합니다.
      님의 지적한 것이 정확합니다.
      마약 같은 것입니다.
      시청자로 하여금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고 프로그램의 기획대로 몰고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청자의 뇌는 길들여져 가고 자막이 없으면 불편해 합니다.
      자막이 시청률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그렇게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죽도록 즐기기>를 꼭 보십시오.

      고대 그리스부터 계몽주의시대까지가 근대성의 탄생이자 근대이성이며, 현대성의 원천입니다.
      칸트에 의해 완성됐는데 제가 '늙은도령의 눈으로 본 인류 근현대사 비판'이 바로 그 내용을 다룬 것입니다.
      원래는 책으로 출판하기 위해 집필을 시작한 것인데 이곳에 올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너무 어렵다는 댓글이 많아서 더욱 쉽게 풀어야 하기 때문에 기존에 써놓은 것을 틈틈이 퇴고하고 있습니다.
      체력이 떨어져 이것이 회복되면 그때부터 다시 올릴 것입니다.

      푸코의 저서말고 강의를 옮긴 책인 <영토, 안전,인구>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이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리고 '성의 역사'시리즈인 <앎의 의지> <쾌락의 활용> <자기 배려>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정치의 약속>, <혁명론>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철학적으로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 그리과 최근에는 바우만의 <홀로코스타와 현대성> <액체근대> <유동하는 공포>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등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고 싶다면 최고의 석학인 벤야민을 보십시오.
      단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안 보셔도 됩니다.
      정말로 어렵기 때문에 성찰이 매우 깊어지면 읽어보십시오.
      제가 읽은 책 중에 가장 어려웠습니다.

      칼 폴라니의 책들도 도움이 될 것이고, 칼 포퍼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블랙스완>도 좋구요.
      우리나라는 미국의 헌법을 받아들였지만, 홍익인간부터 동학까지 사회주의적 요소가 많아 충돌이 납니다.
      조선시대는 입헌군주제와 절대주의가 혼합된 민주주의적 체제였습니다.
      여기에 일본의 군국주의 파시즘, 즉 우파 전체주의와 깡패집단의 논리가 혼합돼 엉망진창이 된 것이 한국입니다.

      참, 박정희 시대를 이해하고 싶다면 마루야마 마사오의 <현대정치사상과 행동>을 보십시오.
      거기에 박정희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유신시대의 원형이 왜 일본에 있으며, 우리나라가 친일파의 천국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과 박명림 교수의 '한국전쟁' 시리즈를 비교해서 보면 더욱 이해가 커질 것입니다.
      최근 프레시안에 연재되고 있는 한국의 근현대사에 관한 내요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복지국가는 대단히 복잡해졌습니다.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무력화됐으니까요.
      복지국가에 대한 평가는 최근에 들어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불평등이 너무 커져서 복지국가의 원형으로만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분야에서는 자크 아탈리의 저작들과 <거대한 전환>을 번역한 홍기빈 씨의 저작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를 얘기할 때 과학기술의 발전이 미치는 영향을 너무 무시합니다.
      사실 인류의 정치체는 과학기술의 발전의 부산물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과학 관련 책을 많이 읽는 이유입니다.
      종합적 시각을 갖춰야 합니다.
      그래야만 현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국민국가 탄생과 얽혀 있는 정치경제학과 뉴턴역학, 다윈의 진화론을 왜곡한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 대한 이해가 절실히 요구됩니다.
      중상주의와 중농주의가 교차하는 중에 탄생한 고전경제학과 독일에서 시작한 질서자유주의(신자유주의의 원형)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합니다.

      울리힉 벡의 <위험사회>도 꼭 보십시오.
      저도 아직 못 본 책이 있어 벡의 최근 책들을 봐야 합니다.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후편인 <유리감옥>도 봐야하구요.

  5. 2015.12.24 05:39

    비밀댓글입니다



하지만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즉각적인 욕망과 쾌락을 쫓아가는 현대성을 이해하려면 아직도 살펴봐야 할 것이 두 개 더 남아 있다. 그것은 텔레비전의 영향력을 확대재상산하는 것에서부터, 기득권 위주의 상위정치에서 배제된 네티즌들의 정치의 장인 인터넷과, 그 폭발적 파급력이 빛의 속도를 연상시키는 SNS의 등장이다. 최근에 활성화된 개인 방송과 팟캐스트까지 더하면 현대성의 핵심으로 등장한 즉시성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와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근대》와 《유동하는 공포》를 통해 완전하지 않은 과학기술의 사용에 따른 각종 위험들의 증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된 무차별적인 개발의 부작용, 산업혁명 이후 닥치는 대로 이루어진 천연자원의 착취에 따른 환경 파괴, 견고하게 결합된 무거운 경제에서 액체처럼 유동하는 가벼운 경제로 바뀌는 과정에서 발생한 불확실성의 증가 등을 다루면서 그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 매스미디어의 변천에 관해 다루었다. 



구글이미지에서 인용



현대사회의 위험성이 통제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음을 경고하고, 견고했던 체제들이 무너져내리면서 사회의 불확실성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었던 이들은, 닐 포스트만처럼 매스미디어의 테크놀로지에 천착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인터넷에서 트위터까지 상시적인 위험에 노출된 삶과 불확실성에서 도피하기 위한 즉시성이 만들어낸 비합리적 선택의 증가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비합리적 선택과 합리적 선택과의 차이는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느냐, 지지 않느냐로 나뉜다). 



이들은 인류가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체제의 하부구조를 이루는 경제에 집중하는 동안, 체제의 상부구조를 이루는 정치와 철학, 문화와 교육 등에서 벌어진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퇴행의 중심에는 텔레비전이 독점했던 메시지를 보다 세밀하게 분할해서 점령한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앞에서 다루었듯 텔레비전을 이루는 테크놀로지는 폭력성과 선정성과 상업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이와 정반대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 정보통신기술도 이런 방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은 텔레비전이 독점했던 메시지를 시공간적으로 분할한 것에서 기인한다. 



철저하게 '1대 다'의 소통방식을 취했던 텔레비전에 비해, '1대 1'의 소통을 내세웠던 인터넷과 SNS는 넘쳐나는 정보와 익명성으로 인해 민주적인 매체에서 무정부적이고 카오스적인 매체로 변질되고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자율정화란 아담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것이어서, 원래부터 존재하지도 작동할 수도 없는 것이었고, 정보의 양이 늘어나고 질적 차이가 구별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용자의 수가 늘어날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된다.  



필터링이 이루어질 수 없는 정보와 익명성의 바다에서 근대이성이 탄생시킨 현대성은 루소와 칸트와 홉스가 그렇게도 우려했던 아노미적 무한경쟁과 무정부적 자유방임의 투쟁과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인류가 끝없는 유목생활에서 벗어나 정착함에 따라 문명이라는 것이 시작됐고, 근대이성이 탄생하기까지 발전의 뱡향은 예측가능한 사회와 미래를 만들기 위한 합리성의 극대화였다. 그것이 신의 섭리에서 나왔건, 우주의 법칙에서 유래했건, 자연의 원리에서 끌어왔건, 죽음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에서 출발했건, 장기적인 계획과 질서 잡힌 확실성의 원천으로써의 합리성의 추구는 확실한 것을 선호하는 인간의 본성에 일치한 불변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텔레비전의 보편화에 이어, 즉시성과 유목성 및 선정성과 상업성을 특징으로 하는 정보통신기술과 모바일기기의 발전은 한 세기도 되기 전에 인류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욕망과 쾌락에 대한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폭력적인 현대성(한정된 자원과 일자리를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투면서 발생한다)이 창출한 온갖 허상들을 과학기술의 발전이라는 낙관적이고 변증법적인 신화로 포장하는데 성공했다. 갈수록 첨담화되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구원과 해방이 실현된 유토피아로 향해 간다면, 그때까지 자신의 죽음을 늦추는 방법이 최상의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과학기술의 발전이 영생의 삶을 보장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래서 지금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죽음에 이르는 전 과정을 무수히 작은 단위로 쪼개놓음으로써, 영원한 삶도 가능할 수 있다는 관념이 지배적 패러다임을 형성할 수도 있다, 토끼가 먼저 출발한 거북이를 따라잡는 과정에서 토끼가 간격을 좁힐 때 거북이도 최소한이라도 앞으로 나갔기에 토끼가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시간의 흐름이 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가정 하에 시간을 잘게 쪼개놓으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는 궤변은 소피스트의 전유물이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비해 과학과 기술은 비교가 불가능할 만큼 발전했이지만, 소피스트의 궤변처럼 시간을 잘게 쪼개놓으면 영원한 삶도 가능하다는 관념은, 멈추지 않는 파동으로 영원히 날아갈 수 있는 빛으로 대변되는 전기전자기술의 과학적 원리와 일치한다. 이런 궤변과 과학의 이종교합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별하지 못하는ㅡ구태여 구별하려 하지 않는ㅡ아노미적 현상을 일반화한다. 끊임없이 시공간을 옮겨다니는 새로운 유목인의 등장은 이런 이종교합에서 나온 자연스런 결과일 수도 있다.  



                                                                       


이처럼 '날아가는 화살은 멈춰있다'는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를 연상시키는 2차원적 관념이 3차원의 현실을 뒤집어버린 것은 인류 문명의 발전에 내포돼 있는 정신적 퇴행을 드러내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물질만능주의가 만연된 세상이 거꾸로 된 세상이라고 말했는데, 작금의 세상은 즉각적인 만족을 통해 영속적인 삶을 추구하는 현대성에 의해 다시 한 번 뒤집혀버린 것이다. 이런 2중의 변증법에 의해 견고하고 지속적이며 질서 잡힌 체제를 추구했던 근대이성은 현대성으로 넘어오자마자 끊임없이 유동하는 특성을 지니게 됐고, 그에 따라 삶의 불확실성은 갈수록 높아졌다. 



이제 장기적인 계획이 담긴 청사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 단계로 접어들었고, 현실공간을 빠르게 넘나드는 가벼움을 유지하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전략으로 굳어졌다. 신자유주의로 발전한 자본주의는 인간의 삶만 파편화시킨 것이 아니라, 파편들의 충돌로 인해 높은 열(갈등)이 발생시켰으며, 이것으로 인해 각각의 파편들이 녹아내려 세상이 액체상태로 변화했다. 이에 따라 체제와 제도는 물론 그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유동하는 상태로 접어들었고, 불확실성이 증가함에 따라 위험과 두려움이 공포를 생성하며, 개인의 삶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바우만이 말하는 '액체화된 근대'의 출현과 '유동하는 공포'의 만연이란 이런 상태를 말한다. 이는 분명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가 '초위험사회'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현대성의 모토는 이렇게 출현했고, 잘게 쫗개놓은 시간의 관념에 맞는 삶을 영위하려면, 미래를 위해 현재의 만족을 미루지 않고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졌다. 



헌데 즉각적인 만족을 위해서는 '오늘의 사치품이 내일의 필수품'이 될 수 있도록 만들거나, '내일에는 내일의 신상품이 출시'돼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잘게 쫗개놓은 시간들을 만족시켜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돈이 부족해 오늘에는 사지 못한 사치품이 내일에는 가격이 내려 필수품이 돼거나, 오늘 채우지 못한 만족을 내일의 신제품으로 채울 수 있어야 싼 가격에 자신의 노동을 팔아서라도 구차한 삶을 이어갈 수  있다. 소비지상주의는 이렇게해서 일반화된다.  



결국 자본주의가 사회와 체제 속의 시민들을 개인들로 파편화시키는 과정에서 공동체와 가족이 해체됨에 따라, 이런 즉시성의 추구는 정신적 차원에서 충족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매일같이 쏟아져나오는 신제품들을 쉴새없이 광고하는 텔레비전과, 매일같이 지우고 덮혀지고 새로 업그레이드 되는 인터넷과 SNS가 최상의 매체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고, 개개인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적 지위로 격상했다. 



원래부터 다양한 나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시간을 잘게 쪼개듯, 자아를 여러 개로 쪼개 각종 사이트와 네트워크를 넘나들며 즉각적인 욕망과 쾌락을 탐닉하던 흔적들을 곳곳에 남겨놓게 됐고, 이것들은 쌓이고 축적돼 매체를 지배하고 있는 자들에게 개인의 취향을 꿰뚫어볼 수 있는 빅데이터를 구축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모든 광고주들의 꿈이었던 맞춤형 광고가 가능하게 됐고, 끝없는 매출 창출과 이익의 추구의 기반이 확고하게 다져졌다.  



이렇게 소비지상주의 시대가 우리의 눈앞에 도래했다. 끊임없이 대형마트와 쇼핑몰(홈쇼핑 포함)을 채워주는 신제품과 매순간마다 업그레이드 되는 정보와 지식들은 즉각적인 만족을 일상화시켰고, 먼저 쓰고 나중에 갚는 플라스틱 신용과 전자 신용의 발전은 파편화된 개인들을 빚의 굴레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충분히 예측가능한 결과를 회피하면서, 당장의 만족에 매달리는 이런 비합리적 선택들은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합리적인 선택으로 전도되고, 머리결마저 소중한 존재로 포장됨에 따라 미래를 위해 만족을 늦추는 것은 자신을 저버리는 배반의 행위가 됐다. 





문제는 이런 다양한 매체들을 운영하는 극소수의 전 지구적 지배 그룹으로 즉각적인 만족의 대가들이 흘러들어가는 데에 있다. 천문학적인 빚에 대한 이자는 그 자체만으로 천문학적인 수준에 이르렀고, 돈이 곧 권력인 세상에서 지배 그룹의 영향력은 텔레비전과 인터넷과 SNS를 중계도구로 활용해 존재하는 모든 것에 가격표를 붙이고, 돈이 되는 모든 분야를 독식할 수 있었다. 결국 모든 미디어가 지배 세력의 이익에 협조하고 봉사하는 시대에 접어듬에 따라, 미디어가 전해주는 콘텐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돈과 권력의 도구인 미디어 자체가 중요해졌다.                 

      


전 지구적 지배 세력의 광고와 협찬(과 미디어에 길들여진 개인들의 시청료)로 돌아가는 이들의 힘은 국가의 주권을 구성하고 있는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에 이은 제4부에서 이들 삼부를 좌지우지 하는 제1부의 역할을 할 정도로 영향력이 커졌다. 본질적으로 자유 시장 자본주의와 천상의 궁합을 가진 것이 미디어의 본질이어서 폭력적인 현대성의 폐해들은 몇 번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유동하는 공포’와 공간을 압축해 지배의 범위를 넓히는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 과실들은 극소수의 수중에 떨어졌음은 이제 상식의 영역에 자리했다.  



이런 극단의 불평등으로 귀착되는 폐해들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ㅡ뒤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ㅡ는 정말로 여러 번 있었다. 1929년에 발발한 경제대공황이 그 중에 하나였고, 2008년의 금융 대붕괴와 2011년부터 구조화된 유럽의 경제위기가 최근의 것이었다. 이렇게 현대성의 폐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인류ㅡ정확히는 전 지구적 엘리트와 국민국가 단위의 지역적 엘리트와 국제기구를 지배하고 있는 엘리트들ㅡ는 근대이성의 질주가 초래한 현대성의 문제점을 교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살리기는커녕, 아예 방향을 돌려 사회경제적 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와 관용의 정신을 실현한 복지국가의 잔재마저 일소시키는 퇴행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중심에는 욕망과 쾌락에 대한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행태를 끊임없이 부추긴 텔레비전과 인터넷, SNS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오랜 전부터 특정 세력에 의해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회주의의 몰락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세를 불린 급진적 자유주의자와 좌파에서 전향한 신보수주의자들이 자본과 권력의 주변부에서 핵심으로 포섭되는 과정에서 더욱 심화됐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들이 내놓은 새로운 통치이론(신자유주의)과 가치판단의 기준에 따라, 근대이성이 창출한 현대성은 사회적인 도덕규범에서 완전히 이탈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거대 금융자본과 초국적기업은 빛의 속도로 국경을 넘나들며, 천연자원을 바닥까지 착취하고, 무한대의 신용을 창출해 전 세계 부의 90%을 독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공존과 상생이 불가능한 이런 극도의 불평등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은 것이 아님에도, 전 지구적 지배 그룹은 부정적 세계화의 병폐들이 한꺼번에 터지는 그날까지, 갈 수 있는 한 최대한도로 가보자며 신자유주의의 엔진 출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있다. 자기조정 시장에서 발전한 자유시장과 사회적 생산관계의 변화로 등장한 자본주의, 새로운 통치술의 형태로 등장한 자유주의가 삼위일체를 이루면서 형성된 탐욕의 기관차가 빛의 속도까지 출력을 높이는 동안 지구와 인류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고,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는 폭발 직전의 단계에 이르렀다. 



지난 30년의 신자유주의적 폭주는 무엇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지구의 반격에 직면했지만, 전 지구적 지배 세력은 폭주하는 기관차의 속도조절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어쩌면 그들도 제어할 수 없는 속도에 이른 기관차를 멈출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정도 속도를 감당해낼 브레이크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을 전후한 지난 250년 동안 인류는 지구 역사상 5번째의 종말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고, 그 중심에는 인간의 성찰을 가로막아 즉각적인 만족의 포로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다양한 형태의 미디어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게네시스 2014.08.14 17:11

    기술은 발전하지만 우리가 중요해야할 인문학적인 분야나 윤리는 점점 사라져 가네요ㅠㅠ 그게좀 슬픕니다

    • 늙은도령 2014.08.14 19:55 신고

      네, 돈이 되는 사람들에게 과학과 기술 발전으로부터 얻는 이익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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