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국정원과 군의 불법 대선개입과 개표조작의 의심이 있음에도 문재인 후보가 대선불복을 선언하는 것에 반대했었다. 당시에 상황에서 문 후보의 대선불복은 당을 산산조작낼 뿐만 아니라, 현재 당의 주류들에게는 정치할 기회조차 박탈당할 가능성이 너무 높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대선불복의 과정에서 벌어질 일들로 해서 지지자들이 입을 피해와 국가의 혼란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모든 언론의 집중포화는 말할 것도 없고, 사법부가 이에 대해 신속하게 처리할 리가 만무하기 때문에 대선불복의 역풍은 제1야당의 붕괴와 함께 회복불가능한 엄청난 피해를 야권 진영에 가했을 것이다. 김한길이나 박지어원, 안철수가 새정치민주연합을 접수했을 것이고, 이땅에서 진보정당의 존립은 벼랑 끝까지 몰릴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들을 고려하면 대선불복으로 얻을 것은 없지만, 당할 피해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을 것이고, 문재인은 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당시의 대표였던 김한길과 DJ의 적자를 자처하는 박지원 등이 대선불복을 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압박했다는 보도와 글들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표도 내부에서 자신을 흔드는 세력에 맞서 정면돌파를 결심한 이후에 선거법을 어긴 채 결심공판을 미루고 있는 대법원을 향해 심리를 재개하고 모든 의혹을 밝히라고 촉구까지 했다.   



또한 민주적인 정당성과 정치적인 정통성마저 없는 박근혜가 노골적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헌법을 유린하며, 입법부의 수장을 협박하고, 역사기술을 국정화했고, 수없이 많은 국민의 죽음을 방치했고, 노동자를 탄압하고 폭력으로 찍어눌러 백남기씨는 의식불명 상태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문재인 대표는 박근혜의 정통성에 의문을 표시하기에 이르렀다.





인권과 헌법상의 권리가 하위법에 뒤집혀 야만공권력의 폭력으로 표출되고, 법적으로 허용된 공간에서도 시민이 탄압받고 표현의 자유마저 원천봉쇄를 당하고 있다. 장악된 방송을 통해 사실 왜곡에 여념이 없고, 박정희 시대의 유신독재로 회귀하는 것까지 부추기고 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대선불복의 프레임에 갇혀있었던 문재인 대표가 대법원을 향해 조속한 심리를 요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어디 이뿐인가? 박근혜 경제팀의 성적은 참담함 그 자체고, 이 때문에 제2의 IMF 사태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고, 노동개악을 통해 상위 5%에게 무한대의 부를 이전시키려 하고 있다. 국민을 테러리스트와 동급으로 놓더니, 이제는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국민에게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며 자유마저 제한하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선불복을 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민주적 정당성과 정치적 정통성이 없는 유신 공주를 향해 국민불복종에 나서는 것은 대한민국을 구하는 일이다. 개표 부정을 확신하는 분들과 안철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문재인을 비판할 때마다 단골메뉴로 들고나오는 것도 대선결과 승복이라는 표피적인 프레임의 거친 말들 뿐이다. 문재인이 비겁했다면 노무현이 탄핵됐을 때 청와대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며, 노통의 장례식을 총괄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현실정치에 뛰어들지도 않았을 것이다(비판은 고도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므로, 비판의 대상에 대한 공부가 선행돼야 하고, 개인의 기호와 직관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대법원은 박근혜 임기가 끝날 때까지 무작정 미루려고만 하는 불법선거 심리와 판결을 당장 진행해야 한다. 그것만이 사법부가 역사의 정의를 세우고, 민주주의 최고 심급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며, 조국의 밝은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국민의 상당수는 더 이상 유신공주를 우리의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현세대와 미래세대를 위해 인정하지 말라고 하고 있다.



대법원은 법률이 규정한 시한을 넘기며 독재자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18대 대선무효소성을 당장 재개해야 한다. 판결이 어떻게 나던 독재자를 마기 위한 법의 지배를 확고히 해야 한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가당착적 행태는 더 이상 국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그 자체로 역사의 죄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정당성과 정통성이 없는 통치자가 제왕적 권력과 야만공권력, 정치검찰, 쓰레기 방송들을 앞세워 유신독재로 회귀하는 것을 막는 것은 대법원의 의무며, 삼권분립의 모든 것이다.



최종 심급으로서의 대법원 판사들은 대한민국 사법부의 수장과 최고 재판관의 역할에서 도피하면 안 된다. 문재인 대표가 심리 시작과 판결을 서둘러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듯이, 대법원은 그에 합당한 일을 해야 마땅하다. 이는 국민의 명령이며, 야권의 분열을 획책해 불의한 친일수구세력의 집권만 연장해줄 뿐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참교육 2015.12.22 18:09 신고

    시법부는 이미 존재가치를 잃었습니다.
    권력의 눈치나 실피고 3권분립의 원칙조차 포기했습니다. 이명박근혜가 저지른 죄악을 필설로 다하기 어렵습니다.

  2. 2015.12.23 04:41

    그럼 문재인이 강동원 의원에게 한짖은 뭐로 변명할건가

    새정련은 불법 대선 용인과 함께 사실상 여당이 되었음으로 사라져야 한다

    실재로 야당으로서 한게 없다

  3. 공수래공수거 2015.12.23 08:36 신고

    판결을 미루고 있는 이유가 뻔합니다
    임기가 끝나 유야무야 흐지 부지 할때까지 기다리겠죠..

    • 늙은도령 2015.12.24 00:13 신고

      너무나 많은 사람이 다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문재인은 불법선거에 이의를 달 수 없었습니다.
      당 내에서도 이렇게까지 흔들어대는데 당시에 문제 제기를 했다면 문재인만이 아니라 노무현과 관련된 모든 분들이 다쳤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지지자들의 다수가 다쳤을 것이고요.
      총선까지는 레임덕 상태나 다름없는 박근혜의 선거 개입에 맞설 수 있는 대안이라 문재인도 조금씩 목소리를 높일 것으로 보입니다.

  4. 민주청년 2015.12.23 08:57 신고

    총선에서 이긴 후 대선부정특위라도 당내에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5.12.24 00:16 신고

      승리만 할 수 있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문제는 보수진영의 반발인데, 청춘들의 투표율이 높아야 가능합니다.



작가에게 표절은 어떤 이유로도 용서될 수 없는 최악의 범죄다. 제대로 된 사과와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신경숙의 표절논란이 영원히 끝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번 글은 엘리아스 카네티의 《말의 양심》을 읽고 쓴 것이라, 신경숙의 표절논란과 직접적 연관은 없다. 하지만 이 글을 올리게 된 이유는 표절논란에 대한 그녀의 대응이 뻔뻔함을 넘어, 그녀를 옹호하는 평론가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신경숙이 진정한 작가라면, 그것도 대단히 성공한 작가라면 진심어린 사과와 그에 합당한 대가를 피해서는 안 된다.






창작은 언제나 인식의 조급함이다.


                                           ㅡ 헤르만 브로흐, 엘리아스 카네티의 《말의 양심》에서 재인용




198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갑자기 각광을 받기 시작한 엘리아스 카네티는 1960년경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발표한 에세이를 연대순으로 묶어 《말의 양심》을 발간했다. 불가리아에서 태어난 카네티는 스페인계 유대인으로서 근대이성의 수도라 할 만한 빈에서 공부를 했지만, 바로 그 위대한 근대이성이 만들어낸 모든 성취들을 총동원해 유대인을 학살했던 나치의 광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그는 작가로서 평생을 권력과 죽음에 천착했다.



작가는 권력의 횡포에 맞서 시대의 수호자가 돼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일주일 전에 한 무명작가의 기록을 보게 됐다. 그 무명작가의 기록에는 “모든 것은 끝장이 났다. 내가 진정한 작가라면 전쟁을 저지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라고 적혀 있었다. 어쩌면 압도적인 권력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일개 작가에게 너무나 많은 책임을 지운, 그래서 상당히 오만하게 비칠 수도 있는 이 기록에는 또다시 인류를 공멸의 위기로 내모는 제2차 세계대전을 막을 수 없었던 무명작가의 무력함이 절절하게 묻어나온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다 기록하지도 못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니 발발하게 됐으니, 거대한 악의 번성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무명작가의 고뇌란 자기 자신을 향해 돌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느 무명작가의 비통한 기록을 ‘흥분과 초조의 상태’에서 읽은 카네티는 작가라는 사람에 대해 진지한 고민에 빠졌고, 무명작가의 기록이 작가의 길을 선택한 사람으로서 “말로 포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옹호하려는 의지이자 또 어떠한 실패도 자기 스스로가 속죄하려는 의지”임을 깨닫게 됐다. 





작가는 보통사람보다 말과 언어의 연금술에 뛰어난 사람이지만, 그 화려한 연금술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작가의 진정성은 존재할 수 없다는 어느 무명작가의 기록은 “업적과 전문성의 세계, 줄곧 정상만을 향하여 온갖 힘을 경주하는 세계, 정상을 향한 목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부수적이지만 다양하고 본질적인 것을 경멸하고 말소시키는 세계, 자기 파괴의 수단을 증가시킬 뿐 초기의 인간이 획득한 특성을 강한 한 질식시키는, 생산이라는 일반적 목적에 방해요소가 되기 때문에 점점 더 변신을 금지하는 세계(이는 견고한 근대, 무거운 경제 위주의 생산자 사회에 적용된 것이지만)”에서 삶과 죽음을 천착하는 작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카네티는 ‘문학의 종언’이 난무하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보다는 후세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산재해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면서도, “자기 시대에 예속된 맨 밑바닥에 있는 종”이자 ‘끊임없이 짖어야 하는 개’이기도 한 작가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모름지기 작가라면 “그가 자기 시대에 저항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성찰한 카네티가 처음부터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바라기라도 한 사람처럼 다가와 그의 정신세계를 정복했지만, 결국에는 반기를 들고 자신을 방어하도록’ 만든 칼 크라우스의 말의 항연에 빠져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마저 부인하기도 했다.



죽음의 증인이자 시대의 고발자로서 10여 년에 걸친 사유를 묶어낸 《말의 양심》의 세 번째 에세이가 ‘칼 크라우스ㅡ저항의 학교’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이 에세이에서 자신이 세운 세계에 갇혀 그 밖의 모든 세계를 부정하는 말과 언어의 독재자이자 정신의 파괴자였던 칼 크라우스(벤야민과 아도르노도 크라우스를 인용할 정도)의 포로였음을 고백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어떻게든 살아남은 대중에게 남긴 ‘후유증·악덕·살인·탐욕·기만·활자의 오식’까지도 찾아내, 대중의 도마 위로 올려서 현장에서 즉결처분하도록 만드는데 탁월한 재주 지닌 칼 크라우스에게 빠졌다가 힘겹게 빠져나온 자신의 경험을 통해 카네티는 다음과 같은 고백성사에 이른다.






맨 처음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군중의 효과가 갖는 급진성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모든 사람이 사건의 문제점을 정확히 알고 있고 또 이미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반대하고 있었으면서도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것이 고발되고 단죄되기를 그렇게 잘 설명할 수 있었을까? 모든 고발자들은 법조문에서 느낄 수 있는 이상스러울 정도로 견고한 어투로 행해졌으며 또 그 고발들은 결코 중단된다거나 끝나는 일이 없이 마치 몇 년 전부터 시작되어 앞으로도 한결같이 동일한 어조로 계속될 것처럼 들렸다. 그 어투는 법의 영역에 근접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으며 또 모든 것은 이미 건드릴 수 없는 확실한 기존의 법률과 같은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따라서 거기에는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아무도 긁어 상처를 내거나 낙서를 할 수 없는 화강암처럼 단단하고 당연한 것이었다.



카네티는 그렇게 칼 크라우스의 ‘법률’ 속으로 빠져들었고, 스스로 예속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일체의 이단을 인정하지 않는 칼 크라우스의 ‘법률’은 그의 것이 아닌 앞선 사람들ㅡ셰익스피어, 클라우디우스, 괴테, 네스트로이, 오펜바하 등ㅡ의 글이나 말에서 빌려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사용한 것들이었다. 그는 이것들을 연사로서의 특출한 능력으로 버무려 관중을 선동하고 그들의 정서를 파고들어 공공의 적을 만든 다음에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즉결심판을 통해 그의 추종자들을 양산했다.



카네티가 칼 크라우스의 최대 장점으로 들었던 ‘청각적 인용’ㅡ연설 중에 특정 인물의 글이나 말에서 일정 부분만 때내 그들의 의도를 왜곡함으로써 관중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악의적인 인용ㅡ도 길거리나 광장, 술집과 같은 곳에서 들었던 대중의 말들과 모든 종류의 신문에서 읽었던 문장들을 그의 연설 중에 적재적소에 써먹는 차용능력을 말한다. 일반의 작가와 지식인들과는 달리 세상의 모든 얘기를 귀를 기울였고 그것을 하나도 버리지 않았던 칼 크라우스는 이런 ‘청각적 인용’을 통해 ‘도덕의 영역과 문학의 영역을 하나로 결합’함으로써, 그가 연설하는 중에 나왔던 “힘없는 자들에 대한 연민과 다정함, 힘 있는 자들을 추적하는 살인적인 대담성, 정신박약증의 가면을 벗김으로써 사물을 꿰뚫어보려는 욕망, 자신의 주위에 거리감을 만들어주는 오만함”이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다(2부로 이어집니다). 




P.S. 칼 크라우스는 플라톤에 비견될 만큼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철학자이자 선동가였고, 연설가였으며 정치인이었고, 탁월한 작가였고 시인이었습니다. 유럽 석학들의 저작들을 보면 칼 크라우스를 인용하는 것이 많이 나옵니다. 마르크스보다 위대했던 블랑키처럼, 우리나라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20세기 초의 유럽을 뒤흔들었던 인물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7.22 08:17 신고

    표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신경숙건은 표절 맞습니다

    왜 인정을 안 하는지 모르겠더군요

    칼 크라우스..기억하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5.07.22 15:54 신고

      원래 신경숙처럼 유명하고 성공한 사람이 표절을 여러 번 한 것이 발견되면 어느 나라에서건 절필을 선언합니다.
      우리나라는 기본적인 도덕과 윤리가 존재하지 않는 탐욕의 국가가 됐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합니다.
      신경숙이 사과를 하려면 제대로 하고 자신이 벌었던 돈을 가난한 문인을 위해서 쓰던지, 여러 가지 대가를 치를 방법이 있었는데 그녀는 최악의 사과와 휴식만 말했을 뿐입니다.

  2. 왜 그냥 2015.07.22 08:40

    자기 이름만 내걸고 글 못 쓰나.
    신경숙 일 있고 여기저기 이름없던 사람들 이름만 떠올라.
    점잖은 양반들은 말을 아끼더라.

    • 늙은도령 2015.07.22 15:56 신고

      창피해서 말을 아끼는 것입니다.
      저도 우리나라 최고의 소설가 시인들을 여러 분 알고 있습니다.
      연륜이 높으신 그 분들은 너무나 참담해 얘기조차 안하는 것입니다.
      소설이 나오면 계속해서 표절논란이 일어났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런 식으로 정치와 정책의 연속성은 약해지고(같은 집권여당이 정권을 재창출하기 위해 선거전을 치를 때는 전임 정부의 실적에 관해 마치 야당이라도 된 듯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정치 무대에 오른 의제들은 기술-경제적 관점에서 사전 조정된 내용들이 올라온다. 그것은 허상의 공연에 불과하며, 집권하면 본색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선거 때마다 경쟁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지킬 수 없는 공약들과 정책들이 난무하는 것에서 이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장 민주적으로 치러져야 할 선거 기간 동안 성숙되지 않은 민주주의의 약점이 곳곳에서 드러나며, 헌법과 법률에 의해 단기적 정당성을 획득한 정부는 독점적 공권력을 동원해 선거기간 동안 남발된 공약과 정책들을 폐기해버리며, ‘임기제 군주’처럼 임기 내에 확실한 실적을 쌓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하지만 지배세력인 ‘제국’이 있다면, 대항세력인 ‘다중’이 있기 마련이듯이, 그런 과정에서 하위정치를 구성하게 된 변함없는 비판세력의 공격에 노출되고, 현실적인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임시직 군주’는 이를 돌파하기 위해 권위주의적이고 파시즘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경우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통치행태가 과격해질수록 국민과의 소통의 양과 질, 양면에서 급격한 후퇴가 일어나며, ‘권위주의적이고 파시즘적 통치’에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그네타기 유권자’와 인터넷과 SNS 등의 하위정치에 정착한 비판세력의 공격에 노출되는 범위가 갈수록 늘어난다. 



이런 현대의 정치 환경에서 집권세력은 존재를 확인할 수 없으며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한 여론의 추이와 임기 초반에 나타나는 대중매체의 기회주의적 지지와 집권 후반부면 어김없이 배를 갈아타는 변절에 따라 권력의 저울추는 현기증이 느껴질 만큼 크게 요동친다. 이에 따라 정부 정책의 정당성을 두고 사법부의 권력이 지나칠 만큼 비대해진다. 여기서 울리히 벡의 도움을 다시 한 번 받아보자.



역설적이지만, 한편에서 법관들이 심지어 정치의 본성에 맞지 않게 자신들의 ‘사법적 독립성’을 행사하고, 다른 한편에서 시민들이 자신들을 정치적 결정의 공손한 수신인에서 정치적 참여자로 변형시키고 필요하다면 국가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법원에 청원하려 하는 바로 그 정도 내에서 이 같은 변화는 일어난다...이 모든 것은 분명히 국가정치의 영향력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외교 및 국방정책의 핵심영역에서, 그리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국가권력의 응용에서 그 독점권을 보유한다. 이러한 독점이 국가정치의 영향력이 행사되는 중심영역이라는 것은 19세기의 혁명 이래 시민의 동원과 경찰의 기술-경제적 장비 사이에는 상대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이로써 사법부의 권력이 지나칠 정도로 비대해지면서 정치적 결정에 참여하는 발언권이 갈수록 커지고 이는 ‘정치의 사법화’로 귀결되는 퇴행의 민주주의를 견인한다. 사회적으로 다양하게 발생하는 각종 갈등을 조정하는 기능으로서의 정치적 역할은 갈수록 퇴화하고, 본질적으로 확립된 질서를 유지하는 성향이 강한 사법부의 보수적 성향 때문에 정치적 정당성을 결여한 판결이 속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런 예상은 질서유지와 승진을 중시하는 법관의 성향이 제도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에 대해서는 미셀 푸코가 《감옥의 역사》에서 규범적 권력으로서의 사법제도의 형성을 다룸으로써 상식의 영역에 이르렀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지배세력이 입에 달고 사는 법치주의라는 단어도 개별 사건에 대한 법의 해석이 민주적 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당시의 지배적 세력과 여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 정당성을 지니게 된다. 



게다가 법의 적용은 아무리 과학적인 논리에 따라 법정에 제시된 증거를 다룬다 해도 언제나 법관의 해석이 선행되는 작업이다. 법관도 여론의 향배에 민감할 수밖에 없지만 지배권력과 기술-경제적 특권그룹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다(특히 아담 쉐보르스키 등의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를 보라). 법관은 판결로만 말한다지만 승진을 해야 하는 정신적 근로자에 불과하며,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부모이거나 자식이거나 변함없는 당사자이고, 아무리 높게 봐줘도 특정 분야의 지식에 정통한 전문가 이상은 아니다. 그 또한 정치적 성향이 있으며 나름대로 시대의 흐름을 바라보는 성찰의 능력도 갖추고 있다. 힘의 우위에 따른 현실적 고뇌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판결이 내려진다는 일반적 생각은 대단한 허구에 불과하다. 



만일 그렇다면 정치적 시시비비와 정책집행의 결과에 대해 그 민주적 정당성을 가리는 작업은 처음부터 법정에서 시작하면 아무런 갈등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도 완벽할 수 없으며, 정의의 여신의 두 눈이 가려진 것은 어떤 유혹에도 불구하고 불편부당한 판결을 내리라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법관이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주체와 객체의 입장에 들어설 수 없음을 뜻한다. 자신이 대변하는 쪽에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는 검사와 변호사가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의 사법화’가 민주주의에 반하는 경우가 빈번한 이유는 또 있다. 그것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법정에 올라온 사건의 내용이 전문적 지식을 요하는 경우가 갈수록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이 또한 미셀 푸코가 앞에 언급한 책과 《광기의 역사》에서 자세히 명쾌하게 다루었던 내용으로서, 법관이 판결을 내림에 있어 기술-경제적 전문화에 따라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의 조언을 구하거나,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의 경우에는 대규모 공개변론이나 공청회ㅡ그러나 일반 국민은 참여하기 힘든 공개변론이나 공청회를 실시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누가 선정하고 규정해서 조언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를 수 있는가? 이제는 그 분화의 이유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세분화된 전문가들 중에서 누가 공신력 높은 권위를 지녔으며, 그 권위에 대해서는 누가 무엇으로 보증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극도로 세분화된 과학과 기술의 영역에서 서로 대치되는 주장과 방법론을 주장하는 경우가 다산사인데, 해당 분야의 지식을 총괄하는 전문가가 아닌 이상 전문가의 성향과 수준에 따라 판결은 왜곡될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하고 왜곡되기 일쑤였다. 





결국 돈이 유일무이한 권력으로 작동되는 세상에서 ‘탐욕의 삼위일체’의 이해를 대변하는 쪽일수록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한 것이 아니라, 누가 보다 높은 수준의 전문가를 대량으로 끌어올 수 있느냐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자금을 지녔느냐에 따라서 국민적 관심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정치적 사안은 승패의 윤곽이 잡힌다. 전관예우로 얼룩져 있는 거대 로펌이 승승장구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 나오며, 이는 산업사회가 처음 출발할 때부터 내재적으로 갖고 있었던 이중적 경향, 즉 타자의 힘은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힘은 최대한 키우는 근대성과 반근대성이라는 이중적 경향에서 나왔다.



입만 열면 거짓말로 일관했던 이명박 정부와 공약 파기나 축소가 최대 무기인 박근혜 정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결코 한국적 상황만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물론 북한이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정학적 한계를 무시할 수 없지만ㅡ이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의 원천으로 삼는 정부와 세력이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만ㅡ마찬가지로 참여정부도 이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4.19와 5.18정신과 고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합의한 6.15선언과 10.4선언을 당론에서 배제하려 했던 안철수 의원의 한심한 행태는 어떤 말로도 변명될 수 없다. 이것은 본질에 관한 문제여서 몇 마디 정치적 수사로 바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명박처럼 안철수 역시 기업의 CEO 출신임을 명심해야 한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이렇게까지 무력해진 책임은 김한길 대표와 문재인 의원의 리더십에 있다. 물론 편파적인 방송들이 이른바 친노 죽이기에 일치단합한 것에서 나온 이유도 있다. 정치와 정당의 보수화와 관련된 제반의 상황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룰 생각이다). 



국정원이 정치의 전면에 부상해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있는 것과 미국의 NSA가 기타 정보기관들과 정보통신업체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전 세계의 지도자들과 유력 정치인, 재계의 거물,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각 분야의 엘리트들은 물론 타국의 국민들을 상대로 무차별도감청을 자행한 것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들으려 하지 않을 뿐이지, 최종적으로는 인류에게 유토피아를 선사할 것이라는 기술-경제적 진보의 내부에서는 본래의 모습ㅡ변함없는 사탄의 맷돌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ㅡ을 감춘 사회변화가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현대의 국민국가는 기술-경제적 요구와 변화에 따라 민주주의의 원리가 적용되는 분야를 갈수록 줄이고 있으며, 국민의 예산으로 돌아가는 정부의 역할과 기능을 이런저런 방식을 동원해 민영화하고 있으며(대부분 완전한 독점이 이루어지고 있거나, 흑자를 내는 것부터 민영화된다), 그 대신에 기술-경제적 특권그룹과 부딪치지 않는 영역에서, 즉 시장권력과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전통의 영토에 적용되는 주권의 독점적 사용에 전념하고 있다. 국익과 민생이라 하는 마약ㅡ다른 말로 해서 상위1%와 지배엘리트에게 돌아갈 이익과 권력을 숨기기 위해 국민의 의식에 주입되는 마약을 통해 국민을 착취하고 있다.  





결국 기술-경제적 진보의 방향은 기술 발전에 따른 사회의 변혁을 강제하는데, 그 속도의 가속이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적 변화를 동반하는 인지부조화 상태를 늘리거나, 급격하게 줄이고 있다. 특히 대규모 토론이 불가피한 핵발전소 문제와 지구온난화 문제처럼 국민의 인식을 바꾸는 문화적 변화가 필수요소로 등장하게 된다. 이로써 TV로 대표되는 대중매체와 인터넷 및 SNS라는 하위정치 영역이 집중조명을 받게 된다. 이는 신화에서 나와 닐 포스트만이 말하는 《테크노폴리》의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데(감시사회와 자동화에 관해서는 별도의 글로 다룰 생각이다), 여기에 이르면 계몽의 변증법이 인류에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다루었듯이, 계몽의 비진리성은 그것의 발전이 끝에 도달하면 폭력성이 극에 이르러 파시즘적 전체주의자로 넘어갈 수밖에 없음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닐 포스트만에 따르면 ‘테크노폴리’는 “특정 기술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들은 권력을 축적하는 한편, 기술이 가능케 하는 전문적 지식을 습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불리하도록 자기들끼리 서로 결탁하는 필연적 결과를 낳는다”고 한다. 이는 수많은 학자들이 밝힌 것으로 작금의 정보사회가 감시사회로 넘어가면서 전 지구적으로 부는 상층부에 쌓이고, 위험은 하층부에 쌓이는 현상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21세기에 들어 세계경제를 좌지우지 하는 기업들이 초국적 언론기업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정보통신 기업이며, 그들 모두가 네트워크 효과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애플과 삼성전자, 구글과 MS로 대표되는 4개의 초국적 독과점기업들이다.



끊임없이 나오는 신제품에 열광하는 것이 승자의 덕목이고 생존의 필수사항이라며 대중을 현혹시키는 이들은 대중매체와 대형 스포츠행사의 광고를 독점하고, 노동유연화를 내세워 정규직을 대폭으로 줄여서 조달한 천문학적인 인건비를 마케팅 비용으로 지출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그 생산지가 어디인지,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복잡한 생산과정을 통해 원가에 수배에서 수십 배에 이르는 뻥튀기 가능한 브랜드와 로고의 신화를 창조했다. 



시계의 발명으로 가능해진 초 단위까지 계산한 노동 분업으로 노동자를 착취하고,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수용소 같은 공장에서 저임금 노동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특히 부당한 권위에 대항하지 못하는 빈곤층 여성이 많다)이 생리와 섹스 임신과 낙태, 각종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하면서 만들어낸 제품에 붙이기 위해. 잔업을 거부하는 행위는 해고의 사유가 되며, 잔업수당을 꼬박 챙기는 것도 해고의 사유가 된다. 세상의 눈에 띠지 않는 곳에서, 지역 정부의 묵인 하에 18~19세기에나 있을 법한 노동착취가 자행되는 것은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이것밖에 없다는 진보의 신화를 끊임없이 주입한 결과에서 나왔다. 



또한 19세기의 후설과 블랑키, 마르크스, 20세기의 벤야민과 폴라니, 푸코와 이스트만, 라캉과 데리다, 딜뢰즈, 엘리아스와 아렌트, 21세기까지 이어진 로티와 네그리, 바우만과 아탈리, 클라인과 벡, 다이아몬드와 스티글리츠 등으로 이어지는 수없이 많은 석학들이 끝없이 경고했던 기술-경제적 발전에 내재해 있는 전체주의적 폭력성을 ‘탐욕의 삼위일체’가 대중매체와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해 개인과 사회 및 시민의식을 사회문화적으로 변화(퇴행)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7.13 08:30 신고

    사법부의 판단이 권력을 향한 해바라기 판단으로
    기울수록 민주주의는 현실에서 멀어져 갑니다

    요즘 하는일마다 위헌입니다

    • 늙은도령 2015.07.13 17:40 신고

      최소 민주주의로 가고 있습니다.
      정말 답이 없습니다.
      이제 노골적으로 나가네요.

  2. chemica 2016.05.29 09:49 신고

    잘 보고 갑니다 ..
    공감 .. ^^

  3. 2018.06.11 04:33

    비밀댓글입니다

    • 늙은도령 2018.06.11 19:46 신고

      글은 많이 쓰면 느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찰의 깊이이니 저보다 뛰어나실 수 있습니다.



궁색해진 ‘폭탄’ 홍준표가 무상급식(이하 의무급식) 중단을 반대하는 학부모들을 종북세력이라고 매도했습니다. 이런 논리 제로의 똥 같은 발언이 나올 수 있는 것은 홍준표의 무(無)논리를 증명할 뿐, 종북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폭탄’의 말이 사실이라면 100% 의무급식을 하는 스웨덴과 핀란드도 종북세력이 집권한 국가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헌법 제31조, 교육기본법 제8조, 초중등교육법 제12조는 “초·중등 교육은 의무교육이고 의무교육은 무상으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무상의 범위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법에서 정한 수업료‧학교운영비를 넘어 급식비‧교재비‧기숙사 제공까지 넓어지고 있는 것이 세계적 추세입니다. 



스웨덴과 핀란드 외에도 20개 이상의 국가가 국공립의 경우 의무급식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국공립은 의무급식을 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들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들이 의무급식을 늘리는 추세입니다. 의무급식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드는 의무보육을 늘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의무급식을 포함해 의무교육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은 국가의 역할에 관한 문제이지, 종북 운운하는 이념적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폭탄’이 의무급식 중단을 반대하는 학부모들을 종북세력이라고 매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상=사회주의’라는 고정관념보다 유별나게 사립학교가 많은 대학민국의 특징이 더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의 경우 중학교의 24.85%, 인문계고등학교의 51.5%, 실업계 고등학교의 41.8%가 사립학교입니다. 스웨덴과 핀란드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사립학교의 경우 의무급식을 저소득층에만 제공하고 있습니다. 의무급식을 반대하는 측은 이런 나라들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점심 제공이 필요없는 반일제 교육을 시행하는 국가들도 많고, 네덜란드는 점심시간에 집에 가서 먹고 오고, 특정 음식에 대한 알레르기 등 개인적 차이 등 때문에 의무급식(정확히는 학교급식)을 반대하던 캐나다도 아이들의 균형잡힌 건강과 학교급식의 교육적 가치를 인정해 의무급식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나라들을 예로 들며 의무급식 반대를 논하는 것은 사실 왜곡입니다.



하지만 이런 나라들은 사립학교의 비율이 매우 낮습니다. 그들은 국가가 제공하는 의무교육을 받지 않고 비싼 돈을 들여서라도 사립학교를 보내겠다는 부모들에게는 의무급식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국가가 자신의 자식에게 돈지랄 하겠다는 부모의 선택까지 제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립학교를 강제적으로 국공립으로 전환시킬 수 없는 노릇이기에, 의무급식 갈등을 종지부 찍으려면 법률을 개정해서 무상으로 제공하는 의무교육의 내용을 결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논리의 ‘폭탄’처럼 자신이 꼴리는 대로 하고 보는 보수 꼴통의 망나니짓을 막으려면 법률로 강제해야 합니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서로 보완적이기도 하지만, 서로 적대적이기도 합니다. 민주주의를 불편해하는 자들일수록 법치주의를 입에 달고 삽니다. 선거로 뽑은 자들을 끌어내리는 주민소환제가 제 역할을 못하는 상황에서 '폭탄'의 망나니짓을 막으려면 법률로 강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경험이 턱없이 부족하고, 자유에 대한 이해가 형편없는 나라에서 우리의 아이들에게 경쟁보다는 협력이 더 큰 것을 이루고, 사회경제적인 평등이 높아질수록 자유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을 가르치려면 국가의 역할과 의무에 대해 헌법과 법률로 강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폭탄’ 같은 꼴통들은 사회적 합의마저 무시하기 일쑤니, 선거를 잘해 법률을 개정할 수 있는 국회의원의 수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헌법까지 바꿀 수 있고, 국민의 뜻에 반하는 통치를 하는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는 국회의원 수(2/3)를 확보할 수 있다면 최상이고요.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耽讀 2015.04.03 08:28 신고

    진보개혁세력들도 정신차려야 합니다.
    자신들만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하나가 안 됩니다.
    수구기득권은 자신들은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가 됩니다.
    집권 후에는 자신들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이 버립니다. 자신들 배를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누가 말했습니다. 선거는 담론투쟁이 아니라 권력투쟁이라고.

    • 늙은도령 2015.04.03 17:17 신고

      저는 문재인 대표가 내부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너무 외연확대에만 매달리다 보면 집토끼들의 반란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정치민주연합에 있는 국회의원들 중에는 함량미달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진보가 분열하는 것은 내부결속력이 약해서인데, 자신이 옳다는 것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싸울 때와 싸우지 말아야 할 때를 구별 못합니다.

  2. 참교육 2015.04.03 09:33

    경남 도지사는 주민소화해야 합니다.
    도지사로서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한 나쁜 인간입니다.

  3. 공수래공수거 2015.04.03 09:37 신고

    방법은 우선 선거를 통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당장 눈앞에 선거도 야당 필패할것 같은 양상이니..

    • 늙은도령 2015.04.03 17:22 신고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숨어있는 표가 있습니다.
      문재인이 조금 더 담대하게 움직였으면 좋겠습니다.
      내부 단속도 하면서요.

  4. 달빛천사7 2015.04.03 13:36 신고

    전 애들이 없긴 하지만 세금을 내는 처지라 무상급식이 없어지길 바랍니다.

    • 늙은도령 2015.04.03 17:25 신고

      무상급식은 세금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결단의 문제입니다.
      거기에 들어가는 돈은 정부가 쓰잘 데 없는 일만 안 해도 남아 돕니다.

  5.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2015.04.03 20:55

    지금 현재에서는 저들에게 아무리 말해 보았자
    입만 아프고 만일에 실수라도 했을 경우는
    이를 빌미 삼아 오히려 역공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말이 통해야 이것 저것 의논하며 이해라도 해보지만
    지금은 앞뒤가 꽉막혀있는 수구세력들 보다는

    먼저 건전한 시민사회들을 더 설득하고
    나아가 그 지역에 살고있는 도민들을 향하여
    수구세력들의 잔인성을 적 나라하게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늦은 시간까지도 방문해 주시고 댓글까지도 올려주신
    도령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인사 꼭 드리고 싶군요^^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드림

    • 늙은도령 2015.04.03 22:19 신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는 것이 참 힘듭니다.
      청춘들이 투표를 많이 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으니 좀처럼 희망을 찾기 힘듭니다.
      산발적 저항은 저들의 면역만 높여주는데 그것을 돌파하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국민들이 좀처럼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막상 투표장에 가면 관성적으로 투표하니 수구세력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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