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인용한 어느 생물학자의 말에 따르면 ‘지구의 역사에서 인류가 만물의 척도로 존재했던 시간을 24시간으로 환산하면 마지막의 2초에 불과하며, 문명화 기간은 그 마지막 1초의 5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한다. 인류는 그 찰나 같은 시간 동안 진보의 이름으로 고삐 풀린 과학기술과 모든 분야의 전문 지식을 총동원해 지구상의 모든 자원과 노동을 착취해 지구를 공멸의 위기로 내몰았다.





생물다양성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지구에 존재했던 종들의 90% 이상이 그 마지막 2초 동안에 멸종됐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기상이변을 속출시키고 있는 지구온난화도 그 임계점인 2℃ 상승에 근접해가고 있다(하랄트 벨처의 《기후전쟁》을 보라). 예측불가능해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전 지구적 재앙은 국가의 부와 지역적 특성에 따라 차별화되고 순차적으로 일어날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도 인류가 대오각성 하는 것을 근거로 한 것에 불과하다. 최근에는 이산화탄소가 불러올 지구온난화의 사회적 비용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5배 이상 크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의 대가》에서 대륙과 국가, 사회, 계급, 개인에 이르기까지 사상 최고의 빈부격차가 벌어진 이유를 설명한 후에 인류에게 남은 시간이 몇 년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심각한 전망을 내놓기까지 했다. 자크 아탈리는 10년 전에 이런 현상을 예상이라도 했듯이 《인간적인 길》을 내놓았고, 많은 지도자들이 ‘제3의 길’도 가보았으나 상황은 그들이 생각하고 바랐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보수 경제학자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을 통해 부의 불평등이 어떻게 심화됐는지 방대한 자료와 지독히 간단한 공식으로 입증했다. 



토마스 만 이래로 끈질기게 인류를 유혹하고 현재의 문제에 한 발 물러서게 만드는, 우리 모두의 유토피아로 가는 길은 언제나 자본과 권력이 선취해 자신의 신무기로 만들기 때문에 파편화된 개인에게는 나쁜 결과로 귀결되기 일쑤였다. 유토피아가 보여주는 달콤함이란 미래에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거야라는 현실도피의 한 형태로 나타나거나 억압과 착취에 순응하도록 만든다(특히 네그리의 《혁명의 만회》와 나오미 클라인의 《슈퍼브랜드의 불편한 진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래리 바텔스의 《불평등 민주주의》를 보라).





대체 인류 역사의 마지막 2초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정확히 말하면 그 2초의 만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최근의 250년 동안, 더 정확히 말하면 전체주의적 자본주의의 정수인 부정적 세계화(신자유주의)의 30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었기에 인류의 문명은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성장과 개발이 꾸준히 이루어진 인류 진보의 과정에서 대체 무슨 일들이 있어 인류는 비대칭적 종말을 걱정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을까?



영원한 진보를 추동하는 과학과 기술-경제적 관점이 어떻게 테크노폴리화 되면서 세상을 파국의 상황으로 내몰고 있는지 살펴볼 때 우리는 그 이유의 일단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직선적인 성장만 인정하는 지배와 착취의 사회철학이자 사회공학인 계몽의 변증법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소외가 급진적 자살관이나 자아의 완전한 고립과 타자에 대한 적대적 배척으로 이어지는지 확인해봐야 한다.



개발은 왜 진행될수록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높아지는지, 개발의 결과가 지구적 차원의 퇴행으로 이어지는지, 이런 부정적 사례들이 가시적인 형태로 널려 있는데 왜 시민이라는 계몽된 인간들은 동물적 쾌락과 철저한 순응에 빠져드는지, 그런 악순환의 고리와 구조에 대해서도 살펴봐야 한다. 분명 세상은 발전해왔다고 하는데 인간 생존의 조건인 삶의 궁핍함과 초라함은 자기 파괴적 단계에 이르렀으니, 그 모순된 현실(개발의 역설)에 대해 근본적인 부분까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필요하다면 인류의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살펴볼 필요도 있었다. 그리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인류가 저지른 일은 인류가 아니면 풀어낼 수 있는 존재가 없고(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보라), 과거에 대한 반성적 고찰 없이 매번 처음일 수밖에 없는 현재를 미래에 투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성장과 개발은 파괴적 결과로 이어지며, 존재하는 모든 것이 파멸에 이를 때까지 탐욕의 질주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가, 지구를 이토록 망쳐놓은 인류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자연의 대반격 앞에서 빈곤과 결핍의 중하위층부터ㅡ물론 상류층도 피해를 면할 수 없지만, 최소화할 수는 있다ㅡ회복 불가능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근원적인 모순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파멸을 피하려면 과학과 기술-경제적 발전과 관료제 등에 의해서 진행되는 진보의 신화인 근대이성의 기원부터 시작해 최근의 30년 동안에 벌어진 일들을 해체적이고 구조적인 시각에서 살펴봐야 한다. 동시에 국가의 전체화하는 경향과 개인화하는 경향을 살펴봐야 하고, 푸코로 대표되는 사건 위주의 단절과 분절, 충돌과 상호연관 및 권력 작동으로서의 통치술의 변천과 같은 미시적 접근, 스티글리츠가 《불평등의 대가》와 피케티 교수가 《21세기 자본》에서 다룬 것처럼 거시적인 접근도 해야 한다. 


 

특히 독일에서 시작돼 영국과 미국에서 변형된 시장 중심의 자유민주주의를 살펴봐야 하고, 타락한 방송과 신문을 대체하고 있는 포탈의 역할에 대해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한다. 미국이라는 방패막이를 이용해 거대금융집단과 초국적기업들, 미국의 NSA와 CIA처럼 각국의 국가정보기관들이 인류를 감시하고 지배적 이익을 유지하려는 빅데이터 구축과 그것의 군사와 외교와 통상 및·경제적 활용에 대해 고민을 하고, 그에 따른 프라이버스 침해 문제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이런 일들은 사회적 차원을 넘어 전 세계적 차원의 협력이 필요하지만, 최소한 고발이라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감시사회의 등장은 현재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되돌릴 수 없는 수준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이는 구글과 똑같은 꿈을 꿨던 필자가 장담할 수 있다). 개인의 행동이 예측되기 시작하면 감시사회는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의 내밀한 삶 깊숙이 파고들어 전제적 행태를 보일 수 있고, 최소한 경제적 필요에 의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거의 모든 악의 근원인 미국의 연방정부(연방준비제도를 포함한)를 장악하고 있는 전 지구적 통치엘리트와 UN 및 각종 국제기구와 국제사법제도, 월가와 런던의 금융 세력들, 이들의 그림자로 전체를 조율하고 있는 극소수의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들과 모든 것을 쇼로 만들어버리는 대중매체와 영상산업, 권력과 자본의 시녀와 나팔수 역할에 충실한 언론(특히 방송)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자아와 전체를 통일시켜ㅡ이것은 책략이라는 술수가 내재해 있는 이성의 특성상 불가능한 일이고, 후대에 의해 위대한 칸트의 관념론이 비판받은 이유다ㅡ이성의 지배를 공고히 한 칸트의 관념론을 넘어, 주체와 객체에 대한 치열한 공방 속에서 더 이상 생각을 밀고나갈 수 없어서, 계몽에 의해 완성된 시민인 자아(주체와의 차이에서 나오는 특수성의 담지자)에 대해서 전체로서의 사회(또는 체제로서의 객체로 보편성과 영원성의 담지자)의 우위를 선언한 헤겔의 변증법적 낙관론, 오직 노동자의 구원에만 집중해 자본에게 세계를 석권하는 길을 열어준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의 극단의 모순을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탄생한 이상, 자본주의와 운명을 달리 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주의 영향력은 특히 학문적으로, 여전히 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치밀한 분석력과 통찰력은 현대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대 사회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는 필수다.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해명과 자본주의 세계화와 계층화에 대한 정확한 비판은 탁월하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전 지구로 확장되면서 부자와 빈자, 부국과 빈국의 차이는 더욱 커지고 있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인간소외, 물신숭배, 생산과 소비의 과잉, 공황의 문제 등도 지금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이를 해결하려면 싫든 좋든 마르크스를 탐구하고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사회과학자라면 마르크스에 신세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듯, 마르크스에게는 독보적인 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2005년, BBC방송은 전문가들에게 설문조사를 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사상가를 뽑았다. 단연 1위는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주의가 비록 현실에서 다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자본주의를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비판했고 여러 대안을 세울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유주의 정치철학자인 이사야 벌린은 "일부 결론상의 오류가 있었지만 마르크스 사상이 갖는 중요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면서 "그의 사상은 역사, 사회를 바라볼 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인간의 인식을 높여주며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고 강조했다.(위키백과에서 인용)



세계사적 사건인 스탈린의 굴락과 히틀러의 아우슈비츠, 일본에 떨어진 두 발의 원자탄과 홀로코스트의 발전된 재현인 베트남전쟁, 소비지상주의와 ‘테러와의 전쟁’을 증거를 조작(한국의 국정원처럼 미과 영국의 정보기관이 조작하고 양국의 최고지도자였던 부시와 블레어가 요구했던)해서 제멋대로 선언한 9.11사태에 대한 부시 정부의 일방주의, 폭력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이자 우월한 인종으로서의 백인의 천국을 꿈꾸는 신보수주의자에 대해서도 살펴봐야 한다.



또한 미국의 악마성을 가장 잘 드러낸 2008년 신용붕괴와 대마불사를 확인한 천문학적인 보조금 지급, 무기력한 유럽을 상징하는 장기적인 경제위기, 독일의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제3제국을 떠올리게 만드는 뒤집혀진 유럽, 역사의 비극은 더 큰 단위로 되풀이될 뿐이라는 3.11 일본 제1원전 폭발, 군국주의적 재무장을 통해 1등 국가로 재도약하려는 아베의 광기어린 부활, 부정적 세계화에 대항할 수 있는 대항세력의 힘이 너무나 미약함을 입증한 시애틀 세계화포럼 반대시위와 2012년의 ‘성난 사람들’의 ‘점령하라 운동’의 초라한 결말 등에 내재돼 있는 인류사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부정적 세계화에 적극적인 나라일수록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과 그들의 그물망이 지구 전체를 덮을 정도로 커졌고 촘촘해졌으며 가벼워졌고 그래서 그만큼 유연해졌기 때문에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곳곳에서 지구온난화가 심해짐에 따라 더욱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기상이변과 사막화, 물 부족 사태와 바다 산성화, 전 방위적인 생태계파괴 등이 파시즘적 속도로 이루어낸 무차별적인 개발과 성장의 역설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한다. 성장하고 개발할수록 지구는 파괴되고 불평등이 늘어난다면 그래야 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봉포스트 2015.01.19 20:48 신고

    아..유익하면서도 재밌네요.
    잘 읽다 갑니다!

  2. 참교육 2015.01.19 21:20

    자멸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자연파괴에 대한 보복이 곧 밀어 닥칠 것입니다.
    자업자득입니다.

    • 늙은도령 2015.01.19 22:15 신고

      자업자득이지만, 상위 1%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구온난화의 피해가 극단화되지 않는 한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는 1%에서 대부분의 생존자가 나올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음에도......

  3. base 2015.01.20 01:55

    안녕하세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도령께서 영화평을 하신 어느 시점에 제가 '설국열차'를 언급했더니 마르크스로 답변하시더군요. 그런데 요즘 점점 더 그 영화가 생각난는지 모르겠습니다. 건강하세요 그래야 훌륭한 글로 애국하시고 저 같은 사람이 살 만한 가치와 의미와 희망을 가지거든요. 오늘 한 잔 했습니다.

    • 늙은도령 2015.01.20 02:50 신고

      설국열차의 엔진은 자본주의를 말합니다.
      신성한 엔진이란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말하고요.
      맨 뒷 칸에서 앞 칸으로 가는 과정은 신분상승의 사다리가 사라진 상태에서 계층의 피라미드를 거슬러 올라가는 혁명을 말합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가 포함돼 있는데 그 핵심에는 마르크스가 있습니다.
      아울러 프랑스혁명의 정신이 내재돼 있습니다.

      님의 댓글을 보니 설국열차에 대한 감사평을 길게 써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되는 대로 한 번 시도해볼 가치가 있어 보이네요.

  4. 공수래공수거 2015.01.20 08:47 신고

    제 수준을 뛰어 넘는 글이십니다

    인간은 자연을 이길수 없고 이기려 하는 방법을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 라고 저 나름대로 이해합니다^^

    • 늙은도령 2015.01.20 13:42 신고

      네, 공존이 중요합니다.
      공생과 함께요.
      과학기술의 발달이 미진할 때는 크게 일을 벌이면 안 되는 것이지요.
      이 글은 출판을 목적으로 쓰는 글이기 때문에 조금 어렵습니다.



끊임없는 진보가 내리는 저주는 끊임없는 퇴행이다.


                                                       ㅡ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서 인용




삼성전자의 어닝쇼크에서 보듯 초국적기업들의 문제는 미래의 먹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의 발전도 이제는 한계에 이르렀음은 애플의 혁신이 사라졌다는 점에서도 입증된다. 최근에 들어 후발업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기존의 시장을 조금씩 나눠가질 뿐 인류의 성장을 견인했던 기존의 제조업을 대체할 것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3D프린터와 유전공학 등이 기존의 제조업을 대체할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물보다 싼 석유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대규모 생산과 소비를 대체할 수 없다. 이를 테면 박근혜 대통령의 창조경제처럼, 가벼운 경제가 무거운 경제를 대체할 것이라고 예측한 《롱테일 경제학》도 프랙털 이론(아래의 P.S를 참조할 것)에 기댄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빅뱅의 순간ㅡ다음이미지 인용



지금까지의 성장을 견인해온 신용 창출(화폐경제에서는 돈이 돌아야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이라는 것이 힉스입자가 만들어내는 전자기장에 의해 기본입자에 질량을 부여하는 것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것은 아니다. 신용 창출이란 어떤 경우에도 사후 결재가 뒤따른다. 즉, 미국 연방준비제도에서 줄기차게 실시하고 있는 무제한 양적완화가 인플레를 초래하기 때문에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시장경제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가 주기적인 공황에 직면하는 것도 발행된 통화량에 비해 그것을 변제할 수 있는 담보(지불준비금)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떤 정치경제학도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본질적 결함을 치유할 수 없다. 완전시장이라는 유토피아는 마르크스가 추상해낸 자유의 왕국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



산업혁명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뉴턴역학 및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절대적 신봉에서 출발한 근대이성이 지구라는 행성에 대한 기본적인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끝없는 신용 창출로 인류의 새로운 먹거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낙관론은 비극적인 종말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지구라는 행성을 끝없이 찾아내 광속으로 공간이동을 할 때만 가능하다.


                                                 머니투데이에서 인용(단위는 억이 아니라 조입니다)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말했던 것처럼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근간인 자기조정 시장(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무한한 진보를 견인하는)은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황폐화시키기 전에는 멈추지 않는다. 삼성전자의 어닝쇼크도, 애플이 혁신도 한계에 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산을 지탱해줄 소비자의 소득이 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소비의 무한 창출이란 그것을 바쳐줄 수 있는 생산이 우선돼야 하는데, 지구의 자원에는 한계가 있고, 개발의 후유증을 무한대로 품어낼 지구도 한계가 있다. 생산비가 저렴한 사이버 세상마저도 전기라는 에너지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다. 이것 역시 천연자원의 사용이 있어야 한다.



조금만 생각해보라, 삼성전자나 애플, 구글 같은 초국적기업들이 무엇인들 검토해보지 않았겠는가? 살아남기 위해 어느 것인들 시도해보거나 고민해보지 않았겠는가? 미국이란 유일제국이 신자유주의로 갈아탄지 겨우 40년만에 국민들의 과소비를 감당하지 못해 장기불황에 빠져들었으며, 중국이란 신흥제국이 개발도상국의 GDP에도 이르지 못한 상황에서 개발의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겠는가?



잠시 동안 비약적인 성장을 하는 것 같던 브라질이 극도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고, 과거의 영광 중 일부라도 재현하는 것 같던 아르헨티나가 또다시 국가 부도의 위기에 처한 것에서 보듯, 무한한 진보를 견인할 미래의 먹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는 우리 모두와 미래세대의 문제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산업혁명(샌드라 핼퍼린의 《유럽의 자본주의》를 보면 산업혁명이 유럽의 과거를 세탁하기 위해 과대포장된 이데올로기임을 증명했다)이 일어난지 300년도 안 돼 지구는 한계상황에 직면했고,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상이변과 토지사막화와 환경오염 등으로 인류는 사회경제적 약자들부터 죽어나가는 비대칭적 종말을 걱정해야 할 처지로 내몰렸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인류는 1970년대부터 실질적인 면에서 성장을 멈췄다는 것이 밝혀졌다. 경제규모는 커졌지만 빚잔치에 불과했고, 물가가 오른 만큼도 인류의 삶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많이 소비해왔고, 신상에 매달렸으며, 그러는 사이 내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존선 주변으로 내몰리는 것을 방치했다.



이제는 솔직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무한한 진보가 선사해줄 풍요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공존과 상생을 위한 새로운 사회계약을 체결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계약도 계속해서 수정보완을 한다고 해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폐기하고 새로운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 그것이 완만한 진보이던, 영겁회귀하는 윤회의 반복이던 공존과 상생을 위한 것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P.S. 《롱테일 경제학》의 핵심은 가우스의 종의 곡선에서 양쪽 끝으로 내려가 직선처럼 길게 늘어지는 부분(χ축에 근접한 부분)이 실제로는 더 큰 시장이라는 것이다. 특히 1 대 99사회로 접어들면서 가우스의 종의 곡선으로는 첨단정보통신 산업경제를 설명할 수 없다며, 가우스 확률에서는 의미없는 부분으로 취급되는 부분의 경제가 첨단정보통신기술과 어우러져 무거운 경제(중후장대)를 가벼운 경제(경박단소)로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네이버 이미지 캡처



이때 주장의 근거로 대는 이론이 프랙털 이론으로, 이것의 핵심은 전체는 그것을 이루는 부분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전체를 다 살펴보지 않고 부문만 살펴봐도 전체를 알 수 있다는 것이 프랙털 이론의 핵심이다. 예를 들어 해안선들의 모양이나, 한 지역에서 석유가 매장되어 있는 곳을 살펴보면 지구 차원에서도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0과 1이라는 단 두 개의 비트로 무엇이던 만들어내는 컴퓨터의 연산능력처럼, 많은 투자비를 들이지 않고도 새로운 먹거리를 창조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대규모 투자가 선행돼야 하는 중후장대한 무거운 경제에서는 변수가 적은 종 부분이 중요하지만, 경박단소한 가벼운 경제에서는 의미 없다며 잘려나간 부분이 중요하며, 99%가 몰려 있는 이곳에서 미래의 먹거리가 나올 것이란 뜻이다.



실제로 가우스 확률은 양자역학이 나온 이래 실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에 직면했고, 변수가 적은 거대한 규모에서나 이용되고 있다. 가우스가 정립한 수학과 확률이론은 빠르게 발전하는 디지털기술과 나노단위로 작동하는 첨단산업, 금융공학 등에서는 유효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특히 무작위적으로 보이는 패턴을 발견하는 데는 가우스 수학은 무용지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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