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주 라투슈의 《탈성장사회-소비사회로부터의 탈출》를 보면 소비사회에서 학교와 교육이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내용이 나옵니다. ‘탈성장’은 이반 일리치와 카스토리아디스, 장 피에르 뒤피 등이 개념화한 것으로, 경제주의, 경제 성장, 공급주의와 빚의 경제학 등이 만들어낸 지속 불가능한 소비사회에서 벗어나 자연과 함께하는 대안적 삶을 모색하는 생태주의 시민운동입니다.





많은 분들이 현재의 교육과 학교에 대해 많이 걱정하고 고민하는데, ‘탈성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교육과 학교에 대해 근본적인 변화를 주장합니다. 이들은 각종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정신질환과 만성질환, 자살을 폭발적으로 늘리고, 인류의 공멸을 걱정해야 할 정도의 지구온난화, 환경오염, 대지의 사막화, 물 부족 등을 초래하는 소비사회로부터 벗어나려면 교육과 학교가 전복적일 만큼 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려서부터 TV와 스마트폰, PC, 야외광고판 등의 고도로 첨단화된 상업광고에 노출되는 아이들은 학교에 진학해서도 미디어에 노출되고, 경제성장과 소비사회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사고 회로가 단절되고, 유도된 욕구를 즉각적으로 해소해야만 - 욕구는 광고를 통해 끊임없이 만들어지므로 과소비와 소비중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 살아갈 수 있는 소비자(=생산자)로 키워집니다. 학교와 교육이 모두 다 점령당한 것이며, 그래서 세르주 라투슈는 《탈성장사회-소비사회로부터의 탈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주체 형성을 기조로 하는 학교는 일조의 딜레마에 직면한다. 학교는 현재 모습 그대로의 사회, 즉 경제 성장과 치열한 경쟁을 중심 가치로 하는 이 사회에 청소년들을 적응시켜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반드시 나아가야 할 사회 - 탈성장 사회 - 를 준비하도록, 즉 소비주의적인 파괴에 저항하는 능력을 지닌 시민의 형성을 위해 청소년을 교육해야 하는 것인가. 학생은 장차 지적이고 혁명적인 실업자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소외된 생산자=소비자, 즉 ‘문명화된 노예’가 되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학생은 현재의 경제적, 사회적 질서를, 적어도 그 가장 유해한 측면을 극복하거나 깨뜨리기 위해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이용하고 발달시키는 동시에 사회에 최소한 적응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점에 있어서 학교 제도 - ‘사회 질서에 종속을 조장하는 요소와 해방을 촉구하는 잠재적 요소가 동거하고 있는 제도’ - 의 책임은 어떤 것일까. 교육자에게 요구되는 곡예 같은 훈련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반 일리치의 신랄한 비판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교육은 ‘고용 가능한’ 노동자의 양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경제, 경제 성장, 소비라는 이름의 종교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의례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소수 엘리트가 극히 생산적으로 변해가고 대다수 대중은 규율을 준수하는 소비를 배울 필요가 있는 사회에서 학교는 그 사회의 일부가 된다.” 


시장 민주주의의 퇴폐함은 필연적으로 제도의 타락을 초래한다. 오늘날 학교는 경제 성장이라는 종교를 전파하고 진보에 대한 믿음을 주입시킨다. 유치원부터 대학 그리고 평생 교육에 이르기까지 교육 제도의 공식적인 일부는 상식을 벗어난 초대형 기계를 위해 원활하게 움직이는 톱니바퀴를 만든 것이다(이반 일리치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와 《성장을 멈춰라》, 나오미 클라인의 《슈퍼브랜드의 불편한 진실》을 보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의 교육과 학교에 대해 다양한 형태의 고민을 하고, 그에 상응하는 여러 가지 탈출구를 모색하고 실천하며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탈성장’의 모토가 대안의 모색이 아닌 대안의 모태이듯이, 다양한 형태의 대안교육들이 미래를 지금보다 나은 곳으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울리히 벡이 경고한 대로 우리는 ‘초위험사회’에 돌입해 있고, 신자유주의는 그런 위험사회에서 가장 잘 작동하는 탈취의 체제입니다. 지배엘리트를 구축하는 상위 1%가 9% 정도에 이르는 체제의 간수의 도움을 받아 하위 90%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언론의 소유와 함께) 교육과 학교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지속이 불가능한 현 체제를 비폭력적으로 전복하려면, 교육과 학교의 중심인 교사들이 분명한 시대적 이해와 사명, 철학을 가져야 합니다. “소비자 육성 세력과 사고력을 저하시키는 기술에 저항해야 합니다.” 교육과 학교가 차별을 공고히 하는 지배의 수단과 장소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더 이상 미루면 기회는 없습니다.





성장과 대규모 개발, 과학기술의 고삐 풀린 폭주, 타락한 정치의 직무유기, 진보의 낙관론, 자연의 풍요를 자원의 희소성으로 탈바꿈시킨 경제학(극소수에게 무한대의 자본축적을 가능하게 해준 경제학)이 창출한 문명의 역설이 '초위험사회'로 귀결된 지금, 인류가 6번째 종말에서 탈출하려면 우리의 인식이 급진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변해야 합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성장을 얘기하는 것은 지독히 무책임한 것이며, 공멸의 순간을 앞당기겠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가진 자들이야 그렇게 해서라도 미래의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싶겠지만, 그 과정에서 배제되고 버려지고 죽어갈 사람들을 생각하면 '탈성장'과 '성장 없는 풍요'의 긴급성과 전면성에 대해 얘기하고 떠들어야 합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9.14 08:26 신고

    숫자 놀음 하는 성장..
    피부에 와 닿는건 없습니다
    도대체 뭐가 성장인지..

    • 늙은도령 2015.09.14 17:06 신고

      지금은 성장이 아닌 파괴입니다.
      성장보다는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먼저입니다.
      망가진 지구를 살리는 것도 시급하고요.

  2. 앨리스 2015.09.14 09:34

    아이를 키우는 입장으로 너무나 공감되고 걱정되고 걱정되는 시대입니다.
    도령님의 추천으로 읽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 주더군요.
    실제 요즘 아이들은 생각을 귀찮아 하고 많이 하지 않아요 그것이 가장 충격적이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

    • 늙은도령 2015.09.14 17:08 신고

      과학기술의 발전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 인간은 진화의 산물을 파괴하는 방식으로만 나갑니다.
      교육도 거기에 맞춰 아이들을 망치고 있습니다.
      제발 무엇이 인간의 미래를 바꿀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메르켈 리더십의 본질을 가장 냉정하게 파고든 책 중에 하나가 올해 1월1일에 작고한 울리히 벡(김제동의 톡투유에서 최진기 강사가 위대한 사회학자라고 언급했던 석학으로 《위험사회》의 저자)의 《경제위기의 정치학》이다. 이제는 정치를 전공한 사람들도 읽지 않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보면 메르켈의 리더십이 어디에 근거하는지 추론할 수 있는데, 벡은 이것을 정확히 짚어냈다.





메르켈의 리더십을 ‘엄마 리더십’이라고 하지만,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이슈를 삼켜버린다’는 것과 동일하다. 메르켈은 지독히 마키아벨리적이어서 그때그때의 여론의 흐름에 따라 정책을 결정한다. 원전건설을 강행하던 중에 일본 후쿠시마에서 원전사고가 났고, 여론이 나빠지자 원전제로로 돌아선 것이 대표적이다.



이번에 메르켈이 시리아 난민 수용을 결정한 것도 똑같은 과정을 겪었다. 독일 우파의 주장에 따라 난민 수용 불가를 천명하다, 국가 전체의 여론이 나빠지자 이를 뒤집어버린 것이다. 메르켈은 TV로 생중계된 학생과의 토론에서 불법난민인 자신의 부모가 강제추방되지 않도록 도와달라는 여학생의 애원을 단호히 거절했었다.



이를 지켜본 시청자들의 여론이 악화되고, 불법난민과 이주자에 대한 극우주의자의 폭력이 확산되고, 그리스 사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전 세계적인 비판에 처하고 국내여론도 나빠지자 전격적으로 난민 수용을 결정했다. 여론에 따라 정치적 결정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것이 메르켈 리더십의 실체다.





독일이란 나라가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유일한 국가여서 이런 결정이 가능했지만, 문제는 난민이 독일에 정착한 다음이다.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을 보면(역사의 재구성이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방불케 한다), 이스라엘이 재난자본주의로 돌아선 것이 대규모 난민수용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소련연방이 여러 가지 이유(너무 많은 책에서 너무나 많은 주장을 제시해 하나로 압축할 수 없지만, 정치 실패가 가장 큰 요인이다)로 붕괴된 지 얼마 안 된 1993년에, 러시아 정부는 밀턴 프리드먼이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쇼크요법(국영기업 민영화, 공무원의 대규모 구조조정, 가격통제 해제에 따른 생활필수품에 대한 정부보조금 폐지, 전면적 시장경제 도입, 외국자본의 러시아 기업의 인수‧합병 허용, 이익의 해외반출 허용 등)을 실시했다.



이때 거의 1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추방됐는데, 이들을 받아들일 나라는 전 세계에 이스라엘밖에 없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잦은 전쟁 때문에 장기적인 경제침체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평화협정을 맺은 것도 국제적 압력보다는 경제적 탈출구를 찾기 위함이 더욱 강했다.





헌데 러시아에서 유입된 어마어마한 값싼 노동력(박사 학위 소지자와 첨단기술 전문가도 많았다)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평화협정을 이어갈 정치경제적 필요성을 없애버렸다. 이들 중 상당수는 생존을 위해 팔레스타인에 정착했고, 위험도 불사하지 않았기에 평화협정은 깨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스라엘은 전쟁을 통해 경제부흥을 일으켰고, 거기서 얻은 노하우와 기술을 살려 폭력시장과 안보‧재난시장, 디지털 감시사회, 경제적 차별을 축으로 하는 재난자본주의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다. 러시아 유대계 난민들이 정착한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를 ‘리틀 러시아’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메르켈의 결정은 최대 30만 명에 이르는 값싼 노동력의 확보와 동일해서 오씨라고 놀림받고 있는 동독의 노동자나 실업자들과 격렬한 일자리 충돌을 불러올지 모른다. 이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독일행을 선택한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들이 겪었던 힘겨운 생존을 되풀이해야 한다.





통일독일이 대규모로 유입될 난민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거나, 저임금‧비정규직으로 돌려버리면 독일사회의 잠재적 불안요소로 자리할 수도 있다. 이들이 만들어낼 시장은 기득권의 수중에 집중될 것이고, 메르켈이 동독노동자와 경쟁시키면 문제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여러 가지 면에서 불리한 난민들이 신빈곤층을 형성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이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며 그리스 부채탕감에 소극적으로 나올 수 있다. 유로존의 돈을 싹쓸이하는 것에 대한 각국의 비난도 이번 결정 때문에 쏙 들어갈 수 있다. 프랑스 정부가 받을 압력도 클 것이며, 경제위기에 시달리고 있는 나머지 유럽국가에도 상당한 압력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메르켈 입장에선 한 번만 더 총리를 연임하면 정치인으로서의 경력도 완성되기 때문에 묘수를 둔 것만은 확실하다. 독일이 저지른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감안하면 이 정도 희생은 당연한 것이고, 유럽의 제국주의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벨기에, 네덜란드 등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번 결정은 환영해마지 않을 일이지만, 이스라엘의 모델처럼 한다면 메르켈의 결정은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일 될 것이다. 부디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기를 희망한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9.04 08:44 신고

    함께 사는 세상..그것이 정답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이 이룬 것들로 인해 자신의 후손들이 고통 받고 있다는 지독한 모순에 갇혀 미래세대 못지않은 피해자로 뒤집혀지고 있다. 그들은 압축성장의 표상에 갇혀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변한 것도 모자라, 현실을 끝까지 부정하면서 과거만 움켜쥔 채 자신의 자손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한다(영화 '국제시장'이 그분들에 대한 현실도피적 헌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ㅡ'국제시장'에 대한 자세한 사회학적 비평은 별도의 글로 다룰 생각이다. 영화는 자본주의의 정수이기 때문에 '국제시장'에 대한 사회학적 비평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탐욕의 삼위일체’가 극소수의 승자에게만 미래로 가는 지독하게 좁은 풍요의 문을 열어주었다면, 한 걸음만 더 나가면 절대다수의 패자에게 새로운 형태의 궁핍과 위험으로 가득한 어디에나 자리하고 있는 미래의 문을 열어주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 그들의 전 생애에 걸친 삶의 모순은 죽어서도 떨쳐버리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부의 불평등이 기회와 교육의 불평등으로 고착되고, 성장의 각종 부작용들이 개인의 어깨를 짓누르는 압력으로 작용한다는 위험사회의 비대칭적 피해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른다. 



패자부활전을 인정하지 않는 ‘탐욕의 삼위일체’는 견고한 고체로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바우만의 성찰처럼 고체의 밀도를 지닌 채 액체처럼 유동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들이 펼쳐놓은 물샐틈없는 그물망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른다. 산업발전의 단계에 따라 중후장대하며 자본과 노동이 적대적 동거를 피할 수 없는 무거운 경제에서, 핵심인력만 정규직으로 둔 채 나머지 부문의 인력들은 노동유연화에 따라 비정규직이나 아웃소싱으로 대체한 채 가벼운 경제로 탈바꿈하고 있는 현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반대로 민주주의에 익숙하나, 유례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자유의 종류 때문에 민주주의가 빠른 속도로 퇴행 중이라는 사실을 직감하지 못하는 1030세대는, 계몽된 시민이었으나 지배자와 타협해 노동자를 착취하는 데에 적극 협력한 사람들의 착취의 대상이었던 노동자와 구별되는 압축성장의 주역들과, 시민정신의 계승자였으나 마르크스의 오류를 발견하지 못했거나, 민주주의의 경험이 너무나 적었던 민주화세대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 모두는 노동 개념과 자연 지배라는 성장의 낙관론이 사회와 문화의 퇴보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영원한 진보라는 계몽의 피해자라는 데는 동일하지만, 살아온 시대적 경험이 틀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할 여력도 없다. 



인류문화학적으로 1030세대의 특징을 어느 정도 압축시킬 수 있고, 그렇게 할 생각이지만 지금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기술-경제적 발전이 최종 단계에 이르면 자유의 주체로서의 자아와 평등의 주체로서의 타자가 서로 공존하고 갈등하는 관계라는 사실이다. 헌데 삶의 고단함에 짓눌려 이런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시대적 상황에 때문에, 그들은 극소수의 승자에 대해 절대다수의 약자와 패자의 위치로 내몰리고 있는 기술-경제적 발전의 피해자임은 분명하다. 평화와 공존의 종교인 이슬람 사회의 속담처럼 ‘사람은 부모보다 시대를 닮기 마련이다.’ 민주화세대는 물론 그보다 앞선 세대인 압축성장의 주역들에 대한 이해를 1030세대에게 구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세 세대가 살아온 시대의 조건과 지배의 방식, 산업화와 민주화의 단계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특히 여러 가지 면에서 경험의 부족과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 삶의 방식과 각자가 처한 환경 등에서 채울 수 없는 거리를 짧은 글로써 풀어낼 수는 없다. 



보릿고개라는 생존의 고민을 걱정했던 세대이자 국가와 사회와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받칠 수 있었던 세대들을 기술-경제적 발전 때문에 이기적일 정도로 개인주의화된 1030세대가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다. 산업화의 주역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 최선을 다했고 그 과정에서 눈에 보이는 성장과 발전을 목격했기에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충성의 마음이 아직까지도 유효한 상태다. 그들은 자유가 억압받는다는 느낌이 크지 않았고,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거대한 지적 사기이자 농촌 해체 과정인 '새마을운동'의 희생양이어서 올바른 판단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군사부일체와 국민교육현장, 국기에 대한 경레가 이상하지 않았던 그들에게 박정희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그의 딸인 박근혜에 대한 사랑을 1030세대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1030세대에게 권위주의적 독재에 저항해 감옥을 들락거리며, 미군이 아부라이브 교도소에서 자행했던 고문보다 더욱 심한 고문에 시달렸고, 때로는 사형이나 자살로 생을 마감해야 했던 민주화세대의 치열한 투쟁을 이해시키기 힘든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들은 국가의 전방위적 압박에 운동의 동력이 약해질 것을 두려워해 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을 교조적일 만큼 밀어붙였으며, 운동의 길이 너무나 힘겨웠기에 민주주의나 정의와 평화에 대한 개념에서 거의 권위주의적인 엄격함(민주화 주역에 대한 1030세대의 피로감이 여기서 나왔고 그 극단에 일간베스트가 있다)을 유지해야만 했다. 지난 60년 동안의 경제성장은 무수히 많은 부작용들을 후세대에게 전가하는 방식으로 앞만 보고 달려왔으며, 그 결과 1030세대들을 압축성장의 신화에 짓눌려 존엄한 삶과 진정한 자유도 누리기 힘들어졌다. 



이들 모두가 계몽적 진보(국민을 착취의 대상으로 만드는 유신(維新)도 이에 속한다)를 앞세운 기술-경제적 발전의 지배세력의 희생양이었지만, 절대 다수의 패자들 사이에서는 끝까지 살아남기 위한 지난한 싸움이 남아 있어 자신의 입장을 철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세 세대 간의 화해란 갈수록 벌어지며 서로를 향해 폭력적 적의와 이해할 수 없다는 비난들이 난무하며 교차하고 있다. 최근에 들어 기술-경제적 진보의 방향이 바뀌어 세상을 다시 한 번 뒤집어야 하는 ‘탐욕의 삼위일체’는 수없이 많은 갈등을 유발하는 세대 간의 전쟁(별도로 다룰 것이다)이 부담스러운 상황이라, 가족의 복원과 세대 간 화해를 유도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이익 추구를 위한 위장된 행태여서 세대 간 갈등과 가족의 해체는 상당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게 만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어쩌면 압축성장의 혜택을 최소한만 받았던 세대들과 그 피해를 감당하고 있는 1030세대가 부의 불평등과 위험의 불평등이 교차하는 하는 최악의 지점에 위치한 사회적 계급(파편화된 개인이라 연대의 능력도 없고 운동으로 승화할 동력도 없는 넓게 산재해 있는 계급)부터 비대칭적 종말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미래는 아무도 모르고 현재의 세상은 불확정성의 원리가 다스리고 있기 때문에 1%와 다음 번 별도의 통지가 있을 때까지만 그들의 배에 승선한 사람들이라고 비대칭적 종말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기술-경제적 발전의 수혜자로서 초국적기업의 위치에 오른 삼성전자그룹은 전 세계적으로 구축된 ‘네트워크의 효과’를 누리면서, 이제는 1등을 유지하기 위한 ‘마하경영’을 화두로 들고 나왔다. 이런 삼성전자그룹의 끊임없는 변신은 정보통신 기술이 어느 산업에나 적용되는 지적 능력의 특징 때문에 전통의 제조업에서 무거운 부분을 떼어내는 작업에 들어서는 단계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필연적 과정임에는 틀림없다. 속도가 핵심인 가벼운 경제에 승선하려면 전통의 제조업도 제 살을 깎는 살벌한 구조조정이 불가피해졌고, 이는 대규모 실업의 양산과 공장의 폐쇄나 해외이전을 의미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현대기아차 그룹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초국적기업에 오른 대기업집단은 기술-경제적 발전의 궤도에 적응해야지 그에 저항하면 패망의 길로 들어서는 불확실성의 시대가 도래했다(최근에는 선진국들이 경쟁적으로 펼치고 있는 환율전쟁에 갇혀 최대의 위기에 처했다). 



이 땅의 기만적인 기득권들은 참여정부 시절이 삼성공화국이었다고 하면서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거짓을 확대재생산했지만 당시에는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삼성전자나 현대기아차가 망하면 나라가 망할 수 있을 만큼 부의 독점이 임계점을 넘은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사실에 가깝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지금의 새누리당 출신들이 일으킨 IMF 외환위기 때문에 삼성전자그룹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고, 2008년의 월가 발 경제위기는 MB정부를 거쳐, 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면서 현대기아차그룹이 약진할 수 있었다(물론 기술-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정부의 도움을 별로 받지 않았지만). 국민의 지갑은 털렸지만, 이 두 초국적기업의 매출과 자산규모는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정도에 이르렀다. 



전 세계 차원의 청사진을 그려가며 현재를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초국적기업들의 탄생과 독과범적 시장 지배는 ‘탐욕의 삼위일체’가 만들어낸 계몽적 진보의 필연이었다. 이런 변화는 부정적 세계화에 뛰어든 모든 나라에서 공히 보여주는 공통의 현상이며, 모두가 알면서도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지배적 추세로 자리 잡았다. 모두에게 전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자유가 주어졌고, 손만 뻗치면 움켜질 수 있는 무한한 상품들이 주어졌지만, 그 자유를 만끽하고 상품들을 구매하려면 저임금 노동이라도 선행되어야 한다. 지금 당장 즐기고 지불은 뒤로 미루거나, 아예 뒤는 생각하지 않는 카드의 사용도 한계가 있으며, 대학을 졸업했을 때부터 이미 수천만 원에 이르는 빚을 가지고 출발하는 20대들은 노동예비군을 뜻하는 잉여가 아니라 폐기처분되기 직전의 잉여라는 뜻에서 ‘쓰레기가 되는 삶들’의 위협에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졌다.





부정적 세계화의 핵심인 이런 기술-경제적 관점(계몽의 변증법)이 보편적 진리로 자리 잡게 되면서 ‘탐욕의 삼위일체’의 실재적 지배자들은 절대적 권력을 형성하면서 세계적 특권그룹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그런 압도적 힘을 동원해 전 지구적 시장을 구축하기로 합의한 국가들의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와 언론을 기술-경제적 원리에 의해 돌아갈 수 있도록 재편하는데 성공했다. 동시에 이들은 힘겹게 자신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던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체제를 내부로부터 야금야금 침식해 들어가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인식의 전환(신자유주의적 시장논리를 인정하는 것)을 이루어내는데 성공했다. 정치와 문화의 대부분이 그 하부구조인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만들어내는 빈약한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발견을 철저히 벤치마킹해, 견고한 체제의 적대적 동반자였던 노동은 물론 정치와 문화의 힘도 약화시키고 변화시켰던 과정이 네그리의 《혁명의 만회》에 자세히 나와 있다. 



세계화를 다룬 책들과 연구논문들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언급할 수 없을 정도이지만, 공통되는 내용은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세계화라는 것이 그 앞에 ‘부정적’이라는 단어를 숨긴 기술-경제적 승자들의 일방통행이고 폭력적인 약탈의 과정이었다는 사실이다. 2008년의 신용붕괴로 모두의 눈앞에 펼쳐진 부정적 세계화는 세계경제의 대통령 소리를 들었던 그린스펀과 경영의 신으로 추앙받았던 잭 웰치가 참회의 고백을 하게 만들었고, 막강한 시카고학파의 퇴장을 불러왔지만,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정확히 거기까지 만이었다. 그밖에 달라진 것이란 1%의 부가 더욱 늘었다는 사실과 지구온난화의 죄목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무거운 경제를 털어낼 기회를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1%에 몰린 거대한 부도 최종적으로는 1: 9로 재편되고 있다(미국은 미국혁명과 남북전쟁 전후에도 1대 9 사회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결과에 직면한 현재, ‘탐욕의 삼위일체’는 가벼운 경제에 맞는 체제로 세상을 다시 한 번 뒤집기 위해 거대한 변환을 시도하고 있다. 그들은 정치의 몰락과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당연한 현상임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국가와 사회의 변화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반영할 수 없는 개인들이 인터넷과 SNS로 몰려다니며 정치의 과잉을 초래함으로써 세상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전 세계적 시장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정치와 비정치의 중간에 위치’해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국가 체제를 기술-경제적 관점에 맞게 재편하면서, 생활정치의 영역으로 뛰어들은 그들은 일체의 권위를 해체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길을 따르며 좀처럼 뚫고 들어가기 힘든 현실공간마저 하나씩 점령해나갔던 전략을 더욱 정교하게 펼치고 있다. 거의 모든 공적 공간마저도 그들의 로고와 브랜드로 도배해 버렸다(특히 나오미 클라인의 《슈퍼브랜드의 불편한 진실》을 보라). 



박근혜 대통령과 시장자유주의 우파정부의 허상이 밝혀지면서 온갖 정책적 실족들이 속출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기술-경제적 관점에 의해 새롭게 재편된 국가의 역할도 바뀌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도 계몽적 진보의 암묵적 지지자였음을 밝힌(마르크스가 고전경제학의 계보를 잇는다는 점에서 진실이지만 그 반대로 여전히 진실이다) 울리히 벡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필적하는 《위험사회》에서 “심지어 외적으로는 국민국가의 사법권은 국제적으로 상호결합한 시장과 자본의 집중이라는 역사적 발전뿐만 아니라, 오염물질과 유독물질의 지구적 교환 및 그에 따른 보편적 건강위협과 자연파괴에 의해 과중한 부담을 안게” 되었다고 말했다. 어떤 정당이 정권을 잡아도 이런 상황은 변하지 않았고, 이런 국가행위의 결과가 지니는 불투명성 때문에 정치적 불만과 분노로 가득 찬 유권자들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그네타기 유권자’로 변해가거나 아예 투표를 포기한 채 비판하는 사람들로 인터넷과 현실공간을 떠돌아다녔다.



문제는 이런 투표 불참자가 늘어나면서 최소한의 득표율로 당선되는 정치인들이 늘어나면서 그 민주적 대표성이 흔들리게 됐다는 점이다. 즉 각 정당과 후보들은 조직과 돈을 동원해 ‘투표에 참여하는 열성적인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필사적인 전투를 벌어야 했고, 그 부작용은 민주주의의 근간마저 침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중매체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강해졌고, 의제 선정과 패널 선정에 따라 여론 조작과 왜곡의 가능성이 심각한 문제도 떠올랐다(앤서니 기든스가 《기후변화의 정치학》에서 언급한 정치학에서의 ‘의제 설정 이론’을 참조하라. 그 단계는 유권자들이 중요시 여기는 ‘대중적 의제’, 의회와 주변 기관들의 논쟁 단계인 ‘정부 의제’, 입법화 단계인 ‘경정 의제’의 3단계로 구성돼 있는데, 이를 보도하는 대중매체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정치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국민적 정서’의 대부분을 대중매체가 선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대중매체는 고가의 광고와 협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하자). 



이는 모든 나라에서 공통된 현상이며, 정치 과잉과 투표 불참이라는 이중적 분화가 정형화되기에 이르렀다. 지난 대선에서 드러났듯이 국가기관을 동원한 선거 개입이 가능한 세상이 됐고, 민주주의의 후퇴는 뚜렷한 추세로 자리 잡으며 과거의 망령인 권위주의 독재와 파시즘을 추종하는 세력들의 정치 공간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는 근대이성의 총아인 과학에서 출발해 지배적 교리로 자리매김한 기술-경제적 진보가 왜 민주주의의 퇴행과 맞물려 돌아가는지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성장이 정체돼 새로운 빈곤층이 늘어나고, 중산층의 두께가 얇아지고, 사회는 물론 가정 내부에서조차 혼란과 불화, 적대가 늘어나고, 사회의 분열이 회복가능한 상황에 이르면 과학과 기술-경제적 진보의 본질인 잠재된 폭력성이 현실공간은 물론 사이버 세상이라는 하위정치의 영역에서까지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나라의 ‘일베 현상’이 대표적인데, 이런 추세에 대한 울리히 벡의 설명에 따르면



한편에서 하위정치 행동의 영역은 민주적 규칙의 적용에서 면제된다. 다른 한편에서 심지어 내적으로도 정치는 체계적으로 고무된 외적 요구들에 따라 군주적 특성을 여전히 보인다. ‘정치적 지도력’은 행정부와 이해집단에 맞서 강력하고 독재적인 실행력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시민과 관련하여 그것은 평등한 것들 중의 평등한 것이 되어야만 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들의 관심사를 처리해 주며 진지하게 고민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것은 질문을 없애고 자문을 줄이기 위한 모든 행동에 가해지는 제약을 단지 반영하는 것을 넘어선다. 그것은 또한 민주적 정치체계의 구조에 내재해 있는 긴장과 모순을 표현한다. 즉 의회의 토론과 공동영역을 한편으로 하고, 의회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지만 자신의 결정을 수행할 수 있는 권력을 통해 자신의 ‘성공’을 평가받는 행정기관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관계. 특히 선거운동체계는 준민주의의적인 ‘임기직 군주’의 실제적 허구를 항상적으로 조장하고 재생하는 의사결정 당국들이 서로에 대해 이바지하도록 강제한다. 이전의 정책들이 거둔 성공을 공언하건 비난하건 상관없이.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참교육 2015.07.05 10:22 신고

    인간의 욕망이 만든 세상 막장까지 왔다는 느낌입니다.
    살기위해서 먹는 게 아닌 먹고 입고 즐기기 위해서 사는 동물적인 욕구가 결국의 파멸을 불러올 것입니다.

    • 늙은도령 2015.07.05 15:24 신고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공멸로 몰고 갑니다.
      지금까지의 성장에 대해 반성하고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지 않는 한 공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기업들의 폭주를 정치로 막아야 하는데 이놈의 정치인들이 정반대로만 달려가니....
      정치 실패가 패인이 될 것 같습니다.
      최근에 들어서는 민주주의의 나쁜 점만 부각되는 시대로 진입한 것 같습니다.

  2. 耽讀 2015.07.05 16:52 신고

    정치권력과 자본권력 그리고 언론권력은 자신들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오늘도 진실을 왜곡합니다. 서민들이 수구기득권정당을 더 많이 지지하는 이유도 이들 권력삼위일체가 진실을 왜곡하기 때문이죠. 그리스를 보도하는 국내언론들은 이 지경이 된 이유를 복지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는 정치권력과 자본권력 부패때문입니다.
    갈수록 전세계는 이들 권력삼위일체가 만든 왜곡된 질서로 빠져들어갈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이겨낼 수 있느냐입니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힘도 세고, 자신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힘을 잘 합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분열합니다.

    • 늙은도령 2015.07.06 14:58 신고

      국민들이 제대로 된 정치와 민주주의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정치와 민주주의가 최고에 이를 때 서민들이 가장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모릅니다.
      워낙 책을 읽지 않으니 TV에서 해부어야 하는데 그것도 불가능합니다.
      지금의 정치와 민주주의는 특권엘리트들의 독점물입니다.
      국민은 자포자기 상태이고요.

  3. 공수래공수거 2015.07.06 08:55 신고

    오늘 쓰신글이 다른때보다 약간 길어 한번 읽고 이해하기란
    제 수준에서 어렵습니다
    두세번 정독해야 할듯 싶어 댓글 이정도로 마무리합니다

    • 늙은도령 2015.07.06 14:59 신고

      좀 어렵지요?
      원래 퇴고를 해야 할 초본이라 좀 어려울 수 있습니다.

  4. 바람 언덕 2015.07.06 10:05 신고

    지난 주말 아고2 오프모임 잘 가졌습니다.
    도령님 이야기 많이 했어요.뵙지 못해 정말 아쉽네요.
    이런 저런 정치 이야기도 많이 하고 앞날도 모색하는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

    • 늙은도령 2015.07.06 15:02 신고

      제가 후기를 읽어보겠습니다.
      약의 내성 때문에 조금 힘든 상황이라....
      좋은 시간됐다니 다행입니다.^^

  5. 『방쌤』 2015.07.06 11:54 신고

    모두들 제대로 투표를 해서
    민주적 정당성을 갖춘 지도자를 뽑아야지요,,,
    계속 이렇게 살수는 없는것 아니겠습니까

    • 늙은도령 2015.07.06 15:05 신고

      확실한 지도자를 뽑아야 하는데, 그들이 국회나 청와대로 들어가면 또 로비의 대상으로 전락하는지라...
      정말 어렵네요.
      민주주의가 너무 무너진 상태라 이것을 어떻게 살려야 할지 고민이 많아야 할 것 같습니다.

  6. base 2015.07.06 18:07

    세 세대간은 갈등은 그 어느 시대보다 심화된 것은 사실인거 같습니다. 지난 60여년동안 이 세대들이 경험한 삶이 너무도 다르니 그러지 않겠나 싶네요. 그리고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더욱 더 잠식해가는 현실에서 격게되는 수 많은 현실적 모순에 우리가 갇혀있는게 아닌가요. 그래도 이번 그리스의 국민투표 결과는 굉장한 의미를 시사하는 것 같은데 아닌가요?

    • 늙은도령 2015.07.06 18:22 신고

      네, 세대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것을 하나로 만드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어차피 그분들이 돌아가시면 역사에 맡겨질 일이니 그것 때문에 미래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젊은이들이 제대로 역사를 알고 제대로 된 참여와 선거, 여론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네요.
      요즘은 뭐든지 진실을 얘기하는 것이 힘겨운 세상이라....



‘탐욕의 삼위일체’가 주도한 이런 과학의 궤도 이탈은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제시한 패러다임 이론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하나의 새로운 과학이론(또는 결과물)이 나왔을 때 다른 과학자들이 그것을 실험하고 다른 방식으로 재현해도 부정적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그것을 대체할 다른 과학이론이 나오기 전까지 정상과학의 위치에 들어선다는 정상과학론을 구조화했다. 하나의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과학이론이 나오면 똑같은 과정이 과학계 내부에서 진행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해 한층 진전된 정상과학이 시대를 풍미하게 된다. 





이렇게 정(기존의 정상과학)-반(반대 또는 대립되는 과학 이론의 등장)-합(과학적 검증을 통해 다시 정립된 새로운 정상이론, 이것이 다시 ‘정’이 되고 변증법적 발전이 지속된다)의 순환이라는 ‘계몽의 변증법적 발전’에 의해 과학혁명은 영원히 지속되는 영구운동으로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하늘에 별이 빛나는 한, 우리가 하늘을 보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이상 과학의 발전은 멈추지 않고 모든 장애물들을 돌파해나갈 것이다.



과학의 부정적 입증에 철저하게 파고든 칼 포퍼와는 달리 토마스 쿤이 공식화한 계몽의 변증법적 해석에 따라 과학혁명은 영원한 발전을 보장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쿤이 무한대의 발전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언젠가는 과학의 진보도 한계에 이를 것이라 했지만ㅡ이것에 관해서는 포퍼도 마찬가지다ㅡ이는 자신이 정립한 과학혁명의 패러다임 이론과도 모순에 처한다. 마르크스가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해 자본주의가 극에 이르면 내부로부터 붕괴해 유토피아(자유의 왕국)에 이른다는 것과 대단히 유사하다. 






물론 이런 방식에 대해 닐 포스트먼은 《테크노폴리》를 통해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 진술의 조건을 검증 가능성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은 정반대다. 과학적 진술은 거짓임을 증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과학적 진술과 구분된다. 과학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진리’를 인식하는 능력이 아니라 거짓을 깨닫는 능력이다”라고 주장하며 칼 포퍼의 이론에 반박을 표하기도 했지만, 세상이 다시 뒤집히는 지금에 와서는 포퍼의 주장이 정확했던 것 같다(장하석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는 과학철학에 접근하기에 대단히 좋은 길을 제시한다). 



어쨌든 과학혁명에 대한 그의 패러다임 이론은, 다윈의 진화론과 함께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같은 모든 분야로 넓혀져, 과학혁명에 대한 맹신과 진보에 대한 믿음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막심 탈레브가 《블랙스완》에서 ‘돈이 되는 모든 것은 전문화된다’고 말한 것처럼, 비전문가에 대해 또는 적대적 공생관계의 과학자들과 대안과학자들에 대해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전문성이라는 높은 장벽을 구축한 과학자들은 그들만의 천국에서 어떤 것이든 할 수 있었다(하고 있고, 할 것이다). 이렇게 계몽의 변증법이 탄생시킨 진보의 과정에 심각한 왜곡이 일어나면서 지적 모순을 바로잡을 확률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런 배타적 독점권(파벌을 이루는 모든 학문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한다) 때문에 오류의 가능성은 높아졌고, 부작용을 은폐하거나 축소하는데 쉬워졌으며, 문제의 해결도 같은 부류의 과학자들이 도맡아 처리했다. 또한 과학연구가 대학과 기업으로 넘어감에 따라 반드시 실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과학자들의 목을 조여 왔다. 투자비용은 계속 늘어나는데 확실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자, 황우석 교수와 만능세포 발견과 취소를 거듭한 일본의 젊은 과학자처럼 완전하지 않는 연구결과를 조작해서 대규모 사기를 벌이는 일들이 다반사로 이루어졌다(한국 교수들의 학위논문을 전수조사 하라, 그러면 진실이 밝혀질지니!). 





이들은 인류의 진보를 이루기 위해서는 과학적 연구의 결과물들이 일정한 부작용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 때문에 과학자가 책임을 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가치중립적인 면책특권을 이용해 부작용이 속출하는 연구결과물들을 대량생산과 전문서비스의 영역으로 넘겨버렸다. 어떤 것이든 시장 시스템으로 넘어가면 오직 한 가지 목적, 이윤만 추구되기 때문에 부작용들의 확산과 축적은 막을 도리가 없다. 시장이 알아서 다른 것들로 대체할 때까지 악순환은 계속된다.



문제는 막심 탈레브가 《블랙스완》에서 말한 것처럼, 인류는 극도로 세분화되고 고도로 전문화된 연구의 타당성과 윤리적 방법에 대해 사전에 검사할 수 없고, 당연히 연구의 결과물의 장단점과 문제점을 생산단계 이전에 확인할 수 있는 지적검증부대(벡이 말한 대항과학이나 대안과학 또는 대안전문가)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문제의 결과물이 알려진 것보다 부작용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경우(토지 오염과 사막화, 이에 따른 물 부족 사태와 생태계 파괴, 미세먼지 같은 스모그의 일상화, 지구온난화와 각종 기상이변, 무조건 인재인 파멸적인 원전 폭발과 모든 책임이 개인에게 전가되는 공포와 스트레스의 폭발적 증가 등)에도 리콜조치가 소비자가 할 수 있는 거의 전부다. 또한 제품이 나오기까지 여러 단계와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과학자에게까지 책임을 묻는 경우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과학은 그림자 영역 속으로 들어가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는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된다. 사전 예방이라는 최상의 방법은 이윤 추구에 굴복해 영원히 취해지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정치만이 아니라 전문화된 거의 모든 영역에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경향이 만연되고 제도적으로 고착화된다. 지금 기업의 연구소에서, 또는 기업의 의뢰로 개인연구소에서 어떤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는지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사적 영역을 보호해주는 자유민주주의가 최상의 체제가 되며, 삼권분립이라는 정부 구조가 책임의 분산을 자초하거나 유발하는데 일조했다. 문제가 발생해도 합법적 면죄를 받거나 최소한의 형량과 벌금으로 과학의 부정적 결과는 모든 제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소비자가 입은 피해는 (거의) 보상받지 못한다.





이런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현상은 과학자들이 연구의 결과물을 내놓으면서 ‘위험과 위협을 조직적이고 객관적으로 해석’해 부작용에 대해 투명하게 밝혔는지, 아니면 ‘경시하거나 은폐했는가’로 판정할 수 있는데, 최근에는 과학적 결과물을 독점하는 산업자본의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이것조차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진 상태다.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를 통해 적나라하게 밝힌 것처럼, 무분별한 과학적 결과물의 산업화와 서비스화에 따라 부와 위험의 불평등이 중첩되는 사회계급이 발생했고, 공통된 계급의식과 연대의 가능성이 없는 개인화된 이들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비대칭적 종말에 무방비상태로 놓여 졌다는 경고가 속출하기에 이르렀다. 



각종 오염과 중독에 대한 기준치는 개별적으로 제시되고, 그 기준치의 근거도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눈으로 보이고 만성질환의 증가를 초래하고 있음에도 숫자의 제시는 개별 기준치들은 인간이 먹고 마시고 숨 쉬고 접촉하는 가운데 모든 기준치들의 총합은 개인의 인체에 축적되고 있다. 이는 과학적 부작용을 전체 인류를 상대로 한 자연적인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알지만,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방식으로 인체가 과학의 실험대상으로 전락했다. 달리 말하면 세상에 의해 공인된 그래서 부정적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침묵의 암살자가 등장한 것이다. 거의 모든 과학자들의 종교입문서나 헌법 같은 《과학혁명의 구조》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쿤의 주장이 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과학혁명에서는 소득 못지않게 손실도 따르며, 과학자들은 손실에 대해서는 유독 맹목적인 경향을 띤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혁명을 통한 진보에 관한 어떠한 설명도 이 대목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패러다임 사이의 선택을 결정하는 과정과 권위의 성격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전혀 틀린 것은 아닐 공식화, 즉 과학에서 힘은 곧 정의라는 명제를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권위가 그리고 특히 비전문적 권위가 패러다임 논쟁의 조정역을 한다면 그들 논쟁의 결과는 혁명이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과학적 혁명은 아닐 것이다. 과학의 존재 의미는 어느 특별한 유형의 사회 구성원들에게 패러다임 사이에서의 선택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에 달려 있다. 과학이 존속되고 성장하기 위해서 그 사회가 얼마나 특별해야 하는가는 과학 활동에 대하여 인류가 보인 이해력의 부족에 의해서 알 수 있다. 기록이 남아 있는 모든 문명의 기술, 예술, 종교, 정치체제, 법률 등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옛 문명의 이러한 영역들은 우리들의 문명에서만큼이나 발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로부터 전승되었던 문명만이 가장 원초적인 과학 이상의 것을 지니고 있었다. 과학 지식의 대부분은 지난 4세기 동안 유럽이 낳은 산물이었다. 그 밖의 다른 지역, 다른 시대는 과학적 생산 활동이 나타나는 그런 특별한 과학자 사회를 뒷받침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과학은 스스로 과학화됐다. 일체의 도전과 자기성찰을 허용하지 않게 되었고, 위계적 학제와 권위주의적 파벌 속에서 ‘과학에 대한 비판, 진보에 대한 비판, 전문가에 대한 비판, 기술에 대한 비판’을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과학의 진보를 믿지 않는 자들과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은 정신병자나 비합리적 문제아로 낙인찍혔다. 



하지만 칼 포퍼가 말했듯이 “과학적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반적으로 진리에 도달한 의미의 지식이 아니라, 여러 가지 서로 경쟁하는 가정들과 그 가정들이 실험적 증거를 거쳐 어떤 결과가 나왔는가에 관한 정보”에 불과한데도,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진리로 확정이나 된다는 듯이 그들만의 리그에 안에서 과학적 정의는 물론 사회적 정의와도 거리를 넓혔고, 스스로 자본의 노예가 되는 것을 평균 이상의 소득과 승진, 명성으로 대체해버렸다. 





과학은 또한 인간 구원에 대한 최종적 믿음을 종교로부터 빼앗아 갔지만, 살아있는 동안의 인류 해방의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한 과학자집단이 문제를 일으키면 다른 과학자집단이, 그러나 둘은 지향하는 결과에서는 동일한 비전을 공유하면서도 서로의 방법에 대해 극단적 논쟁에 돌입하지만, 비전문가들은 논장의 밖에서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신자유주의가 번성한 지난 30년 동안 ‘과학은 진리의 도움을 받는 활동에서 진리없이 활동’했으며 ‘내적으로 과학은 더 이상 의사결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는 위험의 전 지구적 확산이었고, 유일한 성과물이란 ‘탐욕의 삼위일체’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윤을 쌓아준 것이다. 



과학은 이제 자신을 반성적으로도 비판적으로도 바라보지 않으며, 돌아오는 이익과 승진에의 욕망, 목을 조여 오는 연구자금의 사슬 속에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세속화됐으면서도 진리의 담지자이자 지배자로서의 역할은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책임이 사라진 곳에서 연구방법과 부정적 결과에 대해 윤리적으로 고민할 과학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에서의 파벌은 경제학에서의 파벌보다 더욱 심하다는 사실은 여러 과학자들의 고백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과학도 그들만의 리그를 구축한 채 현실에서 멀어진 것도 이런 파벌의 부작용에서 나온 것이다. 



게다가 벡의 지적처럼, 과학의 결과물을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환경오염과 다양한 종의 멸종 같은 파괴적인 결과들이 속출하는데도 불구하고, 산업적 이해에 사로잡혀 있는 과학은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 원인들을 제거하기 보다는, 그것들을 다시 산업화해 시장을 확대함으로써 이윤 창출을 지속하는 방식으로 움직였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 결과 ‘원인은 애매한 상태로 남겨지게 되고, 각종 실수와 문제의 변형을 시장의 활성화에 내맡기는 웃지 못 할 사태가 빈발하고 있다. 과학실천에서 ‘학습과정은 체계적으로 단축되며 저지’됨에 따라 각종 질환이 여기저기서 속출한다. 



인류는 당뇨병, 암, 심장병, 우울증, 비만, 호르몬 장애, 자살 충동 같은 문명질환의 무방비상태로 놓인다. 이렇게 새롭게 형성된 문명질환들을 치료하기 위해 새로운 산업화의 동력이 창출된다. 결국 “더욱더 많은 영역에서 산업은 문제의 기원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무시한 채 자신이 이차적으로 유발한 문제들에서 이윤을 얻고 있다.” 부작용이 눈에 보이는 것들로 변하면서 과학은 갈수록 무오류성의 신화를 대중으로부터 압박받으면서도, 과학이 도달할 무오류성 때문에 모든 부작용들을 언젠가는 해결될 수 있다는 과잉전문화에 매몰되면서 ‘한없이 뒤로 후퇴하는 자가동학적 진보의 신화’를 연일 써나가고 있다. 




1986년에 독일에서 출간된 《위험사회》에서 울리히 벡은 과학적 부작용의 원인을 이차적인 산업화의 동력으로 삼는 과정을 가장 일반적인 화학산업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이런 예는 너무나 많지만 나치가 아우슈비츠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살충제와 미국이 베트남을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의 땅으로 만들겠다며 무차별적으로 퍼부은 네이팜탄과 고엽제가 화학산업의 결과물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가장 적절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화학산업은 유독폐기물을 생산한다.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해결책’은 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는, 폐기물 문제가 지하수 문제로 되는 것이다. 화학 및 여타 산업들은 음료수의 ‘정화장치’를 판매함으로써 이러한 문제에서 이윤을 얻는다. 이러한 정화장치로 거른 물이 사람들의 건강을 해칠 경우에는 약을 먹으면 되며, 따라서 그 ‘잠재된 부수효과’는 정교한 의료체계를 통해 차단하고 연장된다. 이런 식으로 과잉전문화의 정도에 따라 문재해결과 문제생산의 사슬이 형성되며 이것은 보이지 않는 이차적 결과라는 ‘요정 이야기’를 다시금 완전히 ‘확증한다.’ ‘객관적인 제약들’과 ‘자기 동학’이 발생하는 원형구조는 이처럼 본질적으로 그 협소함, 방법과 이론에 대한 그 이해, 그 경력 사다리 등에서 과잉전문화된 인지적 실천의 모델이다. 극한까지 추진된 분업은 이차적 결과, 그 예측불가능성, 그리고 이 ‘운명’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이도록 하는 현실 등의 모든 것을 생산한다. 과잉전문화는 자기확증하는 순환 속에 결과의 운명론을 집중시키는 능동적인 사회적 실천모델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어떤 책들은 감히 서평을 쓰는 것조차 누가 되는 것들이 있다. 책의 첫 장에서부터 끝장에 이르는 동안 온몸을 관통하는 지적 선율과 시대를 관통하는 성찰에 지상의 언어가 모두 초라해 보이는 것들이 있다. 한 시대의 지식과 경험을 빌렸으되 영원 불멸하는 가치를 지니는 것들이 있다.


 

여기 이 책이 그렇다. 칼 폴라니의 몸을 빌어 1944년에 쓰여진 《거대한 전환》은 책의 부제처럼 우리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에 대해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보기 드문 걸작이다. 유럽에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이 책이 2009년에 이르러서야 한글로 번역된 것은 미스터리 그 자체라 할만하다. 이 책과 함께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를 읽으면 인류의 근현대사를 꿰뚫어 볼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운명일지도 모른다.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몰락하는 시점에서 자기조정 시장(시장경제)과 그것을 떠받드는 사상과 이념의 허구성과 폭력성을 고발한 이 책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운명적이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애담 스미스의 《국부론》과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던 것들이 이 책에는 담겨 있다.  

 


먼저 이 책의 94페이지를 보자



이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이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되어 있다. 인간은 그야말로 신체적으로 파괴당할 것이며 삶의 환경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자기조정 시장(시장 근본주의자와 신자유주의 핵심으로 모든 시장정보가 공개되는 완전경쟁이 이루어지면 최고의 효율성을 이루어 인류 전체가 풍요로워진다는 아이디어)의 문제를 이 보다 더 정확히 파악한 문장이 있었던가? 인간을 노동으로, 자연을 토지로 변환시킨 자기조정 시장은 인간과 자연이 완전히 고갈될 때까지 탐욕의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 모든 종류의 인간 욕구를 파괴해버리고 단 하나만을 남겨놓는 사탄의 맷돌처럼 애초부터 자기조정 시장이란 아이디어는 지구라는 행성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허구였다. 



자신이 정식화했지만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애덤 스미스의 자기조정 시장이란 신의 섭리나 자연의 법칙처럼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이 있어도 실현될 수 없다. 시장에 주어진 모든 정보를 검토한 후 거래를 하는 것은 신이라도 불가능하다.노벨경제학상 수상사인 스티글리츠의 말처럼 원래 보이지 않는 손’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허구의 아이디어인 자기조정 시장이 경제체제의 축으로 돌아가는 세계에서 호황은 없었고 주기적인 공황만이 일어났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란 없어서 보이지 않는다



지금껏 자기조정 시장의 허구성을 말한 이들은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칼 폴라니처럼 자기조정 시장의 본질을, 그 화려한 유혹의 이면에 자리잡은 탐욕과 착취의 시스템을 낱낱이 밝혀낸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자본주의를 비판한 마르크스조차도 이익을 둘러싼 자본과 계급 간의 투쟁에만 집중했을 뿐, 자기조정 시장이 가지고 있는 파국적 결말의 필연성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장하준 교수가 《그들이 말해주지 않은 23가지》에서 말한 것처럼, 지구에 대해 선입견이 없는 외계인이라면 주류 경제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자기조정 시장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시장 경제란 선진국과 초국적기업 및 기업집단 간의 불평등한 거래를 숨기기 위한 허구의 개념임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이제는 선입견이 있는 인간이 보더라도 자기조정 시장이란 부의 불평등을 초래하는 핵심임을 알게 됐다.     

 


다시 209페이지를 보자.



시장 패턴이라는 것은 잠재적으로 오직 그것에만 따라오는 고유한 동기, 즉 물물교환과 교역이라는 동기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모종의 특별한 제도를 따라 창출할 수 있으니, 그 특별한 제도가 바로 시장이다. 궁극적으로 따져보면 이것이 바로 경제 체제를 시장이 통제할 경우 전체 사회 조직을 압도해버릴 만한 결과가 나오는 이유이다.


 

합리적인 인간의 자유롭고 이기적인 이익 추구 행위가 자기조정 시장의 중재하에 시장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 것이라는 애담 스미스의 선언이 있은 후, 인류는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부담에서 벗어나 마음껏 돈벌이에 나설 수 있었다. 자기조정 시장의 아이디어, 즉 자유주의 경제가 순식간에 전세계를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인데이런 이익 추구의 무한경쟁은 전세계를 초토화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거의 10년 단위로 되풀이되는 경제공황과 빠르게 고갈되고 있는 자원, 더욱 심해지는 지구온난화와 대지의 사막화, 토지의 대규모 오염, 물 부족 사태, 천연자원의 고갈, 미세먼지의 범람 등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일본의 제1원전 폭발과 세월호 참사에서 보듯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폭주는 지구의 반발을 불러와서 인류를 종말로 내몰고 있다.


                                                       2008년 금융 대붕괴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

 

결국 칼 폴라니의 분석처럼 자기조정 시장이란 유한한 지구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적 아이디어에 불과하며 금융 자본이 세계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인류와 실물경제를 담보로 한 거대한 지적사기에 다름 아니다. 이런 파괴적인 자기조정 시장의 악몽에서 벗어나려면 모든 사회의 근간인 상호성과 재분배의 회복이 필요하다. 공동체의 역할을 하는 사회의 회복, 바로 그것이 칼 폴라니가 제시하는 해답이며 지속 가능한 경제의 실현이다.


 

마지막으로 603~604페이지를 보자.



따라서 사회의 발견은 자유의 종말일 수도 있고 그것의 재탄생일 수도 있다...인류는 더욱 성숙해질 것이며, 복합 사회 안에서도 여전히 인간의 형상을 갖춘 채 존재할 수 있다...체념은 항상 인간에게 힘과 새로운 희망의 셈이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히려 그것을 기초로 삼아 자신의 이승에서의 삶의 의미를 쌓아 올리는 법을 배웠다...그러한 진리를 자신의 자유의 기초로 삼은 것이다...이렇게 가장 밑바닥의 체념을 받아들이게 되면 다시 새로운 생명이 솟구치게 된다...이제 인간은 자신의 모든 동료들이 누릴 수 있도록 풍족한 자유를 창조해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인간이 그러한 스스로의 과제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권력이나 계획과 같은 것들을 도구로 삼아 자유를 건설하려 한다고 해도 그것들이 인간의 원수로 변하여 자유를 파괴할 것이라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복합 사회에서의 자유의 의미이다. 이것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천혜의 땅에 세워진 미국의 경제가 무너지고대부분이 선진국인 유로존이 위기에 직면한 현재,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그 원인과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성경 같은 책이다. 회의 재발견, 그것만이 우리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며, 이는 미셀 푸코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의 주제이기도 하다. 21세기 최고의 석학으로 불리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액체근대》에서 칼 폴라니가 육화된 노동에만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오류를 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 폴라니의 성찰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위험사회》는 《거대한 전환》 못지않은 책이다.



현대의 상황을 유동하는 액체로 정의한 바우만의 성찰은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와 맥을 같이하며,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자들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지만, 푸코의 성찰에서 별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칼 폴라니의 작은 오류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인류가 물보다 싼 석유를 대체할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칼 폴라니의 성찰이 바우만의 성찰보다 더 유효할 수 있다.     



신주유주의 이후의 세계를 새롭게 구축해야 하는 이 시점에서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일반 국민은 물론 이 땅의 지도자들이 밤을 새워서라도 읽고 또 읽어야 하는 보물 같은 책이다아울러 이 땅에서 진보좌파의 이름으로 경제 민주화를 주장하는 자들 중에 합리적 자유주의, 즉 좌파 신자유주의를 부르짖는 고전파 경제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제학자와 통상관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재벌 개혁과 노동 개혁, 금융 개혁과 관치 경제 탈피는 진정한 의미의 신자유주의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지난 15년간 진보좌파와 보수우파 대통령이 이 나라를 통치했지만 그 결과가 자살률 1위의 무한경쟁 사회, 내수가 없는 수출 중심의 일방적 경제, 심화되는 부의 양극화, 기본적 사회안전망의 부족, 보편적 복지제도의 미비, 1000만 명을 육박하는 비정규직, 거의 4000조에 이르는 부채로 넘쳐나는 나라가 대한민국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주하는 기차를 멈추는 것이지, 속도를 늦추는 것이 아니다. 그런 다음에 사회적 토론과 합의를 통해 새로운 대학민국을 구축해야 한다. 이런 국가 개조의 맨 처음에 칼 폴라니의 성찰이 주요함은 《거대한 전환》이 증명해주고 있다. 

  1. 태봉 2014.07.19 18:03

    좋은 글, 좋은 책을 소개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2. 백승준 2015.03.24 03:17

    좋은책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번 읽어봐야겠군요

    • 늙은도령 2015.03.24 04:32 신고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조금은 어렵더라도 끈기있게 읽다 보면 세상을 보는 눈이 생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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