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폭발과 나선  

  

 

다윈은 생존과 존재를 위한 투쟁(생존경쟁)을 가장 강조했지만, 존재와 생존이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 목적이란 바로 번식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수컷의 장식이 정적인 암컷의 선호도의 영향으로 진화했다고 생각하지만, 피셔는 암컷의 선호가 수컷의 장식과 보조를 같이하며 진화한다고 생각했다. 

 

 

수컷은 암컷에 대해 매력적으로 보일 때 많은 것을 얻는다. 반면 암컷의 경우에는 확실한 수요가 있기 때문에, 수컷에 대해 매력적으로 보여도 그다지 이득이 없다.

 

 

유전자자 몸 안에 있어도 발현되지 않을 수 있다...암컷의 선호에 관해서는 유전자는 비록 암컷의 몸에서만 발현하지만 수컷의 몸에도 들어 있다. 따라서 수컷의 꼬리에 작용하는 유전자는 비록 암컷의 몸에서 발현되지 않아도 암컷의 몸 속에 들어 있다...수컷이든 암컷이든 모든 개체는 수컷에게 특정 성질을 가지게 한 유전자와 암컷에게 그와 완전히 똑 같은 성질을 가지게 한 유전자 양쪽을 모두 가질 가능성이 높다. 즉 수컷의 성질에 관여하는 유전자와 암컷에게 그 성질을 좋아하게 만드는 유전자는 개체군 속에 제멋대로 뒤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한데 연대해 있는 경향이 있다...교미가 가능한 여섯 마리의 수컷 중에서 단 한 마리의 수컷만이 큰 하렘을 차지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는 사회에서는 다수파에 속하는 암컷들이 좋아하는 방향을 추종해야만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에너지나 비행 효율과 같은 실용적인 비용을 능가하고 남을 정도로 크다.

 

 

그렇다면 최초에 다수파 암컷들에게 그런 선호도가 발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암컷의 대다수가 실용적인 최적값보다 짧거나, 또는 실용상의 최적값과 일치하는 길이의 꼬리를 좋아하게 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패션이 실용성과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물에 대한 답은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며, 또한 실제로 많은 종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수컷이 긴 꼬리를 가졌다는 이유로 선택될 때, 긴 꼬리에 관여하는 유전자만이 선택되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그 강한 연대 때문에 긴 꼬리를 좋아하는 유전자도 함께 선택된다. 다시 말해 암컷이 특정 길이의 꼬리를 가진 수컷을 선택하게 만드는 유전자는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유전자의) 복제를 선택하는 점이다. 이것은 자기 강화 과정의 본질적 요소이다. 한마디로 자동적으로 그들 자신을 유지시키는 동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단 진화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기 시작하면, 이 힘은 진화를 같은 방향으로 지속시키는 경향을 낳는다.

 

 

근연 개체에 대해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유전자가 자연선택에서 유리하게 되고, 그 이유는 오직 그것과 완전히 동일한 유전자의 복제가 그 개체의 몸에 존재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혈연관계라는 것은 유전자가 다른 개체의 몸에 있는 자신의 복제를 효과적으로 찾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단지 우연히 자신의 복제를 돕는 효과를 가지는 유전자가 어쩔 수 없이 개체군 가운데에서 증가하는 경향을 가질 뿐이다.

 

 

선택의 불일치가 0이라는 것은 두 종류의 서로 대립하는 선택이 완전히 상쇄되어 진화적 변화가 멈추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계를 평형 상태라고 말한다.) 분명 선택의 불일치가 클수록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실용 선택의 인력에 저항해서 암컷이 행사하는 진화적 인력이 강해진다. 여기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특정 시점의 선택의 불일치의 절대값이 아니라 선택의 불일치가 세대를 거치면서 변화한다는 사실이다...균형을 이룰 수 있는 점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따라서 세대 교체에 따라 불일치가 줄어드는 경향이 있는 조건에서 개체군은 가장 가까운 평형점에 낙착할 것이다.(부의 피드백)

 

 

가령 그 결과가 행운이든 불행이든, 우연한 사건을 통해 수컷의 수가 어떤 주기성을 띠고 임의적으로 변동하면서 그 시스템이 자주 교란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실용 선택과 성 선택의 결합을 통해 개체군은 수많은 평형점 중에서 가장 가까운 한 점으로 반드시 복귀할 것이다. 어쩌면 그 점은 이전과 동일한 평형점이 아니라 평형점을 나타내는 직선에서 조금 위쪽이거나 또는 조금 아래쪽에 위치한 다른 점일 것이다. 따라서 개체군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평형점의 직선을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현실에서는 직선이 한 점으로 축소되는 편이 경제적이다.

 

 

여러 가지 경향, 특히 실용적인 기술에서 나타나는 경향들은 경박한 유행과는 달리 거의 가치 판단을 둘러싼 논란의 여지없이 개선으로 인정된다...인간 생활에는, 뚜렷한 경향을 나타내면서, 어떠한 명백한 의미에서도 그 경향이 개선과 연결되지 않는 측면이 많이 있다.

 

 

6억년 이전의 과거를 알려주는 화석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경우가 극히 적다. 화석 기록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백은 실제로 오직 한 세대에서 일어난 돌발적인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는 대돌연변이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대돌연변이, 즉 큰 효과를 가지는 돌연변이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일어났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진화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이다. 다시 말하자면 대돌연변이가 특정한 종의 유전자 풀에 결합되어 있는지, 아니면 그 역으로 자연선택을 통해 항상 제거되는지의 여부이다.

대돌연변이의 잘 알려진 예로는 초파리의 촉각지가 있다. 이것은 DNA의 복사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며 실제의 돌연변이다.

 

 

어떤 식으로든 큰 폭의 조정이 이루어질 경우에는 상의 질이 향상될 가능성이 극히 작지만, 현미경 제작자나 사용자가 의도한 최소의 조정폭보다 미세한 조정이 이루어질 경우 개선될 확률은 거의 정확하게 2분의 1임은 거의 확실하다.

이제 움직임이 작으면 작을수록 향상이 이루어질 확률이 2분의 1이 되는 한편의 극단에 가까워지고, 움직임이 크면 클수록 향상이 이루어질 확률이 0이 되는 또 한편의 극단적인 경우에 가까워진다.

 

 

이 가정은 현미경이 비유에서 맡은 역할에서 비롯된다. 임의의 조정을 거치기 전의 현미경은 돌연변이를 일으킨 동물을 나타낸다. 또한 임의의 조정을 거치기 전의 현미경은 돌연변이를 일으킨 동물의 돌연변이를 일으키지 않은 정상적인 부모를 나타낸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점차 그 정도가 커지는 돌연변이를 생각하고 있다면 돌연변이가 커짐에 따라 점점 이익이 적어지는 점에 도달하며, 반대로 계속 그 크기가 감소하는 돌연변이를 생각하고 있다면 점차 돌연변이가 유리해질 수 있는 확률이 50퍼센트가 되는 점에 도달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 그것들이 진화적 변화의 토대가 될 것인지 여부에 대한 논의는 지금 생각하고 있는 돌연변이가 어느 정도  가에 대한 논의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실제로 발생하는 돌연변이 중 일부는 확실히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고, 더군다나 그 중 일부는 어떤 의미에서  돌연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확하게 진화 과정에 결합되었다는 것이 그 답이다.

 

 

도약 진화에 대한 반론으로써 복잡성 논의 DC8 개량형의 대돌연변이에 적용될 수 없는 이유는 거기에 관계되는 변화의 성질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전혀 대돌연변이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순진하게도 최종 산물인 성체만을 관찰하는 경우에만 대돌연변이로 보일 뿐이다. 배 발생의 과정을 살펴보면 배에 대한 명령에서 나타나는 아주 작은 변화가 성체가 되었을 때 외견상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미소돌연변이에 불과하다. 단속평형설은 가끔 도약 진화와 혼동을 일으킨다.

 

 

종의 기원이라는 문제에 대한 다윈의 답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하자면, 한 종이 다른 종에서 유래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생명의 계보를 나타내는 나무는 계속 가지를 뻗어 나가는 나무이다. 이 말은 복수의 현생 종을 추적해 들어가면 단일한 선조 종에 닿게 됨을 뜻한다.

 

 

단일한 선조를 가진다고 생각되는 어떤 종의 구성원들은 모두 서로 교잡이 가능하다. 어쨌든 많은 사람에게 단일 종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바로 그런 것이기에 종 분화가 어려운 문제처럼 보인다. 자연선택의 영향이든 우연의 영향이든 두 대륙의 동물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는 경향이 있다면 이제 더 이상 두 종이 서로 분리해서 완전히 다른 종이 되는 과정에 장벽으로 작용하지 않을 것이다.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한두 마리의 뒤쥐가 산맥 너머 저지에 도착...시간이 경과하면서 한쪽 개체군의 유전적 조성에서 발생한 변화는 번식을 통해 그 개체군 전체에 퍼져 나가지만 다른 개체군에게는 확산되지 않는다. 그러한 변화 중 일부는 자연선택에 따라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어떤 원인에 의해 유전적 변화가 일어났든 그러한 변화는 번식을 통해 각각의 개체군 내부로 확산되고 두 개체군 사이에서는 절대 확산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두 개체군은 유전적으로 분화되어 간다. 즉 점차 서로 다른 종이 되어 가는 것이다...몇몇은 그들의 선조 종이 살던 고향으로 돌아와 사촌의 자손들과 만난다면 그 유전적 구성이 완전히 분화된 상태여서 교잡이 불가능...잡종도 불임이 된다...자연선택은 양쪽 중 어느 한쪽의 개체가 상대의 종 또는 품종과 잡종을 만들려는 편애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에 상응하는 벌을 준다. 이것으로 자연선택은 산맥이라는 우연성의 개입과 함께 시작된 생식 격리의 과정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종 분화는 완성된다. 이제 한때 같은 종이었던 두 종이 존재하고 이 두 종은 서로 교잡하지 않고 같은 지역에 공존할 수 있게 되었다.

 

 

선조 중에서 자손 종으로의 이행이 급작스럽고 변덕스러운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단지 우리가 어떤 한 장소에서 나온 일련의 화석들을 관찰할 때 진화상의 모든 사건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진행 중인 사건, 다른 지역으로부터 새로운 종이 도래하는 과정을 보고 있는 것이다. 다윈은 화석의 불완전성 때문에 고민했지만, 일반적으로 진화는 우리가 대부분의 화석을 발견하는 곳과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의 이론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점진설의 주장은 각각의 세대가 이전 세대와 약간의 차이만을 가진다는 것이다...실제로 그들이나 그 밖의 단속론자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결국 다윈의 주장이라고 가정되는 진화 속도가 일정하다는 신념이다...단속론자들이 이야기하는 급격한 진화도 지질학적인 기준으로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수만 년이나 수십만 년이 걸린다.

 

단속평형론자들은 진화에 있어서의 도약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빠른 속도로 일어나는 진화의 에피소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단속론자들의 신념을 가장 정확하게 특징짓는다면 점진주의적이지만, 긴 기간의 평형 상태(진화적인 정체)가 빠르고 단계적인 변화들의 짧은 에피소드들로 단속된다.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물론 종래에 간과되었던 현상인 긴 정체기이다. 이 긴 정체기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설명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다윈 『종의 기원』제4판의 구절  많은 종은 일단 형성된 다음에는 결코 변화하지 않는다. 종이 변화하는 기간은 연수로 측정하기에는 무척 긴 기간이지만, 그 종이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기간에 비한다면 무척 짧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점진설 내에서도 (점진적인) 진화의 속도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다양한 신념을 구분할 수 있다.

 

 

선택적 육종을 수 세대에 걸쳐 진행시킬 경우, 이용 가능한 유전적 변이를 모두 써 버리게 되어 더 이상 사용할 수 있는 변이가 바닥이 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돌연변이가 나타날 대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우리가 선택적 육종을 할 때 항상 최초의 저항을 받는다는 사실은, 그 계통이 야생 상태에서 아무런 변화 없이 수 세대 동안 존속되어 왔다면, 변화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방향으로 향한 자연선택압이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종이 변화하지 않는 것은 그 상태(야생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개체가 변화하는 개체보다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단속론자가 다른 다윈주의 학파와 다른 점은 오직 한 가지, 즉 정체기를 적극적인 힘을 가진 무엇으로, 단순한 진화적 변화의 결여가 아니라 진화적 변화에 대한 능동적인 저항으로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어쩌면 이 사실이야말로 그들이 범한 오류의 핵심일 것이다...신의 창조는 도약이 최대한으로 이루어진 극단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영혼이 없는 점토에서 완전한 형태의 인간으로의 궁극적인 비약이다...다윈의 관점에서는, 자연선택에 따른 진화론의 핵심은 복잡한 적응의 존재를 기적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설명하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결사적으로 다윈주의를 믿지 않으려 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종교적인 이유에서 진화 그 자체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 부류는 진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부정할 이유는 없지만, 흔히 정치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 이유로 인해 다윈주의가 가지는 메커니즘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경우이다. 그 중에는 자연선택이라는 사고방식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냉혹하고 비정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자연선택을 임의성과 혼동한 나머지 자신들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더 나아가 다윈주의를 인종차별주의와 그 밖의 동의할 수 없는 부대 의미들을 내포한 사회다윈주의와 혼동하는 사람도 있다.

 

 

세 번째 부류에는, 대중매체라고 그들 스스로 부르는 그 속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포함된다. 어쩌면 기자들은 신문 잡지의 좋은 기삿거리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의 이론이 무너지기를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다윈주의는 이미 오래 전에 확립되어 체제가 정비된 이론이기 때문에 저널리스트들에게는 군침 도는 먹이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평판 높은 학자가 현재의 다윈주의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비판의 암시를 토해 놓으면, 결과적으로 그 사실은 열심히 과장되어 완전히 균형을 잃을 만큼 부풀려지게 마련이다...과학자가 현재의 다윈주의의 미묘한 의미에 대해 품고 있는 약간의 의혹을 조심스럽게 속삭이면, 원래 자신이 한 말이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이 왜곡되어 열심히 기다리고 있던 확성기에 의해 큰 소리로 울려 퍼지는 것을 들을 수밖에 없다.

 

 

4  진화의 갈림길

 

  

밝기, 포식자와의 거리, 망막 중심부로부터 영상이 맺힌 지점까지의 거리, 그 밖의 유사한 변수들에서 중요한 점은 그것들이 모두 연속 변수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완전히 보이지 않는 극단에서부터 완전히 보이는 극단까지 변화한다. 그러나 연속 변수가 연속적이고 점진적인 진화를 추동한다. 

 

 

바늘 구멍 사진기는 뚜렷한 영상을 만든다. 구멍이 작을수록 영상은 더 선명해진다.(그렇지만 어두워진다.) 구멍이 크면 영상은 밝아진다.(그러나 흐려진다.)

 

 

폭탄먼지벌레가 적에게 화상을 입힐 정도로 뜨거운 과산화수소와 하이드로퀴논의 혼합물을 뿜어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산화수소와 하이드로퀴논은 촉매가 첨가되지 않는 한 반응하지 않는다. 폭탄먼지벌레가 하는 일은 혼합물에 촉매를 첨가하는 일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이 진화하는 초기 단계에서 과산화수소와 다양한 종류의 퀴논들은 모두 생체화학 반응에서 다른 용도로 사용되던 것이었다. 폭탄먼지벌레의 조상은 이미 존재하는 화합물을 방어 무기라는 다른 용도로 사용한 것이다. 진화는 가끔 이런 식으로 일어난다.

 

 

종의 기원에서 다윈은 이렇게 말했다.

작은 개조가 수없이 거듭되는 것으로도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어떤 복잡한 기관이 있다는 것이 증명이 된다면 나의 이론은 붕괴될 것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팬터의 엄지에서 진화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로서는 완벽한 형태를 갖춘 기관보다는 불완전한 기관이 더 강력하다고 말했다.

 

 

진화는 결코 깨끗한 제도지 위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진화는 이미 무언가 있는 데서 출발한다.

 

 

일단 어떤 설계가 진화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훌륭한 것이라면 똑 같은 설계 원칙은 동물계의 다른 영역에서, 다른 출발점에서 다른 진화 경로를 거쳐 재차 진화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훌륭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데에는 뛰어난 설계를 보여 주는 실제의 예를 기술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그것은 바로 반향위치 결정법이다...최근 몇 억년 사이에 최소한 두 종류의 박쥐와 두 종류의 새, 이빨고래 그리고 보잘것없지만 다른 여러 종류의 포유류들이 모두 독자적으로 반향위치 결정기술이라는 귀결점에 도달했다. 지금은 멸종된 다른 어떤 동물(혹시 익수룡이 아닐까?)도 이 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했을지 누가 알겠는가? 

 

 

매미는 13년 변종과 17년 변종이 있다. 14. 15. 16년 변종은 없다. 13 17은 소수라는 공통점밖에 없다. 가령 14년 주기를 가졌다면 7년 주기의 기생충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기발한 생각이다. 13년과 17년이 무엇이 특별한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그 숫자들에는 틀림없이 특별한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세 종류의 매미들이 각기 독자적으로 그 주기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주머니늑대를 골치거리로 여겼다. 그러나 주머니늑대에게 사람들이 훨씬 더 큰 골치거리였다. 이제 주머니늑대는 멸종되고 없다. 대신 그만큼 인간들이 있을 뿐이다.

 

 

정보 저장기술 발달에 기본적인 요건은 많은 수의 기억 장소를 가진 저장 매체를 개발하는 것이다. 각각의 장소는 어떤 불연속적인 수의 상태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현재의 인공적인 세계에 만연된 디지털 정보 저장기술의 핵심이다...레이저 디스크는 일련의 작은 점에 정보를 저장하며, 그 점들은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이다. 중간 상태의 점이란 없다. 이것이 디지털 방식의 특징이다. 기본 요소가 어떤 한 상태에 있거나 아니면 완전히 다른 상태에 있다. 중간 또는 타협이란 없다. 유전자의 기본 저장기술은 디지털 방식이다.

 

 

자손은 부모로부터 여러 가지 유전자를 받을 때, 그것들을 구분된 입자의 형태로 받는다. 각각의 입자에 관해 말하자면 자손은 그것을 물려받든가 물려받지 못하든가 둘 중 하나다...물론 유전 단위들이 한 몸 안에 있을 때 마치 잉크가 물에 섞이는 것과 같은 현상을 나타내는 일이 종종 있다. 키가 큰 사람이 키가 작은 사람과 결혼했을 경우, 또는 흑인이 백인과 결혼했을 경우 그들의 자손은 중간형을 띤다. 그러나 잉크가 물에 섞이는 것과 비슷해 보이는 이러한 현상은 단지 겉보기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로는 각각 작은 효과를 나타내는 많은 수의 유전 입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이다. 입자들 각각은 분리된 채로 남아 있으며 다음 세대로 그대로 이어진다...물감을 섞는 것과 같은 유전을 전제로 하면 세대가 거듭됨에 따라 다양성은 감소하고 획일성이 증가할 것이다. 결국 자연선택이 작용할 만한 다양성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다양성은 보존된다. 선택이 작용할 수 있는 다양성의 풀(pool)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전자기술에 널리 사용되는 불연속적인 디지털 방식의 정보 저장기술에서 각각의 저장장소는 단지 두 가지 상태만을 나타낼 수 있다. 편의상 그것들을 0 1로 표현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그것은 높고 낮음, 위와 아래, 켜짐과 꺼짐 등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두 상태가 엄격히 구분된다는 것이고, 그것들이 배열되어 있는 형태가 어떤 내용을 담은 정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세포들 속에 들어 있는 주요 저장매체는 전기적인 재료가 아니라 화학적인 재료이다.

 

 

여기에는 어떤 분자들은 무한한 길이의 긴 사슬로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  중합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이용된다. 중합체의 종류는 수없이 많다...중합체 사슬을 구성하는 단위분자에 이질성이 생기면 그 중합체는 이론적으로 정보를 저장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슬을 구성하는 단위 분자가 두 종류라면 그것들을 각각 0 1으로 생각할 수 있다. 사술이 충분히 길다는 요건만 갖추면, 곧바로 중합체는 어떤 종류의, 얼만한 한 양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 살아 있는 세포가 사용하는 특별한 중합체를 폴리뉴클레오티드라 부른다. 여기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각각 DNA RNA라고 부른다.

 

 

두 종류는 모두 네 종류의 뉴클레어티드로 이루어진 이질적인 사슬이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DNA RNA는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세포는 1 0의 두 가지 상태만 가지고 정보를 저장하는 대신에 A,T,C,G로 표현할 수 있는 네 가지 상태를 사용한다. 원론적으로 인간의 전자기술에서 사용하는 2진법의 정보 저장기술과 살아 있는 세포가 사용하는 4진법의 정보 저장기술에는 큰 차이점이 없다.

 

 

놀라운 것은 그 엄청난 유전 정보 중 극히 적은 분량만이 실제로 사용된다는 사실이다. 가령 인간의 세포는 그 중 1퍼센트만을 실제로 사용한다. 어림잡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한 권에 해당하는 분량이다...DNA의 알파벳을 사람들이 읽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꿈 같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글자는 너무 작아서 신약 성경 1,000만 권이 핀의 머리에서 한꺼번에 춤을 출 수 있을 정도이다. 

 

 

세포 속에 들어 있는 어떤 염색체의 정확한 물리적 위치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 염색체는 액체 속에 떠 있기 때문에 물리적인 위치가 변한다...모든 인간은 같은 형태의 DNA 주소 체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주소가 같다고 해서 내용까지도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생긴 것이다.

 

 

구성원 전체의 DNA가 같은 주소 체계로 되어 있는 집단을 종이라 정의하기도 한다.

 

 

46개의 염색체를 가진 세포에서 23개의 염색체를 가진 정자가 만들어질 때, 정자는 같은 주소를 가진 2개의 장소 중 어느 하나만을 갖게 된다. 정자가 그 중 어느 것을 가질지는 예측할 수 없다. 난자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 정자와 난자의 주소 체계는 같은 종이면 모두 같지만 저장된 내용이라는 면에서는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무시해도 좋을 극소수의 예외가 있기 하지만 말이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수정되면 다시 46개의 염색체 모두가 갖추어진다. 그리고 이 46개의 염색체는 발생 중에 있는 배의 모든 세포 속에서 복제된다.

 

 

같은 종에 속하는 개체들이 세대를 거듭하면서 선택적으로 살아남고 번식하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발전된 생존 지침이 그 종의 유전자 집합에 씌어진다. 진화는 세대가 거듭됨에 따라 DNA의 각 저장 장소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내용들 중 어떤 것이 득세하는가 하는, 유전자의 빈도 변화에서 비롯된다. 말할 것도 없이 모든 내용들은 어느 때건 개체의 몸 속에 들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진화에서 중요한 것은 집단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대립 유전자들의 빈도 변화이다. DNA의 주소 체계는 그대로 보존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저장 장소에 들어 있는 내용들의 통계적인 수치가 변화하는 것이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면 주소 체계 자체도 변화한다...전체 코드가 가끔 완전히 다른 염색체로 복사될 수도 있다. 염색체의 어떤 부분의 DNA 내용이 멀리 떨어진 다른 부분의 내용과 완전히 똑같은 경우가 발견되었다.        

 

 

DNA 글자 4개가 배열된 상태가 어떤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가령 눈의 색깔을 나타낸다든가 아니면 특정한 행동을 유발한다든가 하는 효과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효과가 DNA의 자료 유형 자체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이 배가 발달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쳐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것은 다시 DNA의 다른 부분에 들어 있는 자료 유형에 영향을 받는다.

 

 

대부분의 사슬은 복잡한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다. 그리고 그것의 정확한 모양은 아미노산의 순서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이 실타래 같은 모양은 아미노산의 배열 순서가 정해지면 결코 변하지 않는다. 아미노산의 배열 순서는 (중간에 RNA를 통해 번역된) DNA의 암호 배열 방식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실타래 같은 단백질의 3차원적인 구조가 DNA 암호 문자의 1차원적인 배열 순서에 따라 결정된다는 말은 타당성이 있다.

 

 

모든 체세포가 똑같은 유전자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세포들의 형태와 기능이 천차만별인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체세포들이 똑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모양과 행동을 보이는 것은 세포마다 다른 유전자들이 읽히기 때문이다. 특정한 유전자들만 읽고 나머지는 무시해 버린다. 가령 간세포는 자기의 DNA ROM에서 신장 세포를 만드는 데 해당하는 유전자는 읽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세포가 어떤 모양을 갖고 어떤 행동을 하는가는 세포 속의 유전자 중 어떤 것이 읽히고 번역되어 단백질 분자로 만들어지는가에 달려 있다. 이것은 다시 세포 안에 이미 존재하는 화합물의 영향을 받는다. 세포 안에 이미 존재하는 화합물이 어떤 것인가는 전에 얽힌 유전자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과, 인접한 세포가 어떤 종류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는 단지 DNA의 변종들 중 생존에 성공한 것의 후손들을 볼 뿐이다. 개체를 죽음으로 이끈 DNA들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는 돌연변이 속도보다 빠를 수 없다. 왜냐하면 돌연변이는 궁극적으로 새로운 변종이 만들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자연선택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어떤 새로운 변종을 수용하고 다른 것을 도태시키는 일이다. 돌연변이 속도는 진화가 일어나는 속도가 가질 수 있는 최대 한계선이다. 자연선택은 대개 진화에 관련된 변화를 막는 것과 상관이 있지 그것을 추동하는 것과는 별 관련이 없다. (물론) 자연선택은 건설적인 작용도 한다.

 

 

자연선택이 없는 상태에서 DNA가 얼마나 정확히 복제되는가 하면, 그것은 500만 세대가 복제되는 동안 그 내용의 1퍼센트가 잘못 복제되는 정도이다.

 

 

DNA 복제과정에도 실수 과정이 있다. 정확도는 그렇게 올라간다. DNA 복제과정에는 여러 가지 실수 수정 공정이 개입되어 있다. DNA의 암호가 안정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에 이 과정은 더욱 필요하다. 오히려 거기에 관련된 분자들이 너무 작기 때문에 그것들은 끊임없이 열운동을 하는 다른 분자들과 부대끼고 있다. 메시지의 글자를 뒤바꿀 수 있는 끊임없는 유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의 세포 속에서는 하루에 5,000개의 DNA 문자가 사라지지만 수리 메커니즘을 통해 즉시 복구된다. 수리 메커니즘이 존재하여 끊임없이 작용하지 않으면 메시지는 조금씩 사라질 것이다. 새로 복제된 DNA의 내용을 검토하여 틀린 곳을 수정하는 것은 일반적인 수리 과정에 속하는 특수한 경우일 뿐이다. DNA의 뛰어난 복제능력과 정보 저장능력은 주로 이 수리 메커니즘 덕분이다.

 

 

살아 있는 생물은 다름 아니 바로 DNA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다...개체는 단지 DNA가 그들의 천문학적인 수명 중 얼마간의 시간 동안만 짧게 거처하는 일시적인 용기에 불과한 것이다...어떤 사물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이유는 그것이 금방 생겨났든지 아니면 과거에 생겨났지만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을 만큼의 내구성이 있었기 때문이다...세상에는 두 종류의 존재 방식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쉽게 생겨날 수 있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하는 이슬과 같은 존재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쉽게 생겨날 수 없지만 일단 한번 생겨나면 오래 가는 바위와 같은 존재 방식이다. 바위는 오래 견디는 성질을 갖고 있지만 이슬은 쉽게 만들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DNA는 두 가지 존재 방식 모두에 있어서 탁월하다. DNA 분자 자체는 물리적 성질이 이슬과 같다. 조건만 갖춰지면 매우 빠른 속도로 생겨난다. 하지만 어느 것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한다. 대부분이 몇 개월 안에 망가질 것이다. 바위와 같은 내구성이 없다. 하지만 DNA가 갖고 있는 분자들의 배열 형태(정보)는 가장 간단한 바위와 같은 내구성이 있다. 그 형태는 수백만 년을 버틸 수 있고, 바로 그것이 DNA가 오늘날 존재하는 이유다. DNA와 이슬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슬은 새것이 낡은 것으로부터 생겨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에는 우주 안에서 가장 복잡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과 같은 기계를 만드는 능력도 포함된다.

 

 

원시 지구에 출현한 최초의 복제자가 DNA가 아니었을 것이다. 살아 있는 세포 속에서만 정상적으로 존재하고 다른 분자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유지될 수 없는 DNA 분자가 저절로 생겨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최초의 복제자는 아마 DNA보다 더 투박하고 단순했을 것이다.

 

 

첫 번째 요소인 스스로를 복제하는 능력에서 자동적으로 생겨나는 두 가지 필수 요소가 있다. 자기 복제 과정 중에 틀림없이 우연한 실수가 생겨날 것이다...그리고 최소한 복제자들 중 일부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DNA는 실수를 줄이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하지만 오늘날의 DNA가 갖고 있는 고도의 기술은 수많은 세대를 거쳐 오며 누적적인 자연선택을 받은 결과로 획득한 것이다.

 

 

복제 과정 중에 실수가 생기면 동일한 복제자들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 여러 종류의 복제자가 뒤섞인 집단이 만들어질 것이다. 잘못 복제된 것들 중 많은 수는 필경 조상이 가지고 있던 자기 복제 능력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는 부모와는 다른 자기 복제 능력을 얻을 것이다. 그래서 집단 내에서는 실수로 만들어진 복제자가 차츰 자기의 복제품을 늘여 갈 것이다.

 

 

세 번째 요소는 위력이다. 덜 끈적거리는 복제품을 만드는 속도가 끈적거리는 복제품을 만드는 속도보다 수천 배는 빠를 것이다...따라서 점착성이 줄어드는 쪽으로 진행하는 진화 경향이 생긴다.

 

 

정상 세포에서는 RNA의 지시에 따라 단백질 분자가 만들어진다. RNA DNA 원본을 베껴 만든 현장용 설계도이다. 하지만 RNA로부터 RNA를 복제할 수 있는 RNA 복제 효소를 만들 수 있다. 다시 RNA가 만들어진다. 이 과정이 되풀이된다...복제 기구를 우연히 갖게 된 복제자는 그 인과관계의 사슬이 얼마나 길고 얼마나 간접적이든 상관없이 세상을 가득 채우게 될 것이다.

 

모든 사슬은, 그것이 세포 안에서 일어나는 화학 반응이든 뇌 세포가 연결된 후에 생기는 효과든, 아니면 호수의 크기가 변하는 최종적인 효과든, DNA의 변화로 인해 생기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유전자에서 일어난 어떤 변화가 그 자신의 복제 가능성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자연선택의 게임에서 공정한 규칙이다. 그것은 매우 단순하고 자동적이며 미리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거의 불가피한, 누적적인 자연선택에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복제, 실수 그리고 위력)가 태초에 저절로 생겨나게 되었다.  

 

 

 

 

 

1  결코 있을 법하지 않은 일

 

 

 

유전적인 변이를 수반한 계획적인 번식은, 축적될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광범위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자연선택은 확실히 어떤 용도를 위해 만들어진 모든 생물의 형태와 그들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며, 거기에는 미리 계획한 의도 따위는 들어 있지 않다. 자연선택은 마음도, 마음의 눈도 갖고 있지 않으며 미래를 내다보며 계획하지 않는다. 전망을 갖고 있지 않으며 통찰력도 없고 전혀 앞을 보지 못한다. 만약 자연선택이 자연이 시계공 노릇을 한다면, 그것은 눈먼 시계공이다.

 

 

우리가 얻은 해답은 복잡한 물건은 사전에 규정된 어떤 성질, 즉 단순한 우연만으로는 매우 얻기 힘든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생물의 경우 사전에 규정된 그 성질이란 일종의 능숙함이다. 그것은 항공 기술자가 가진 감탄할 만한 비행 기술과 같은 고도의 능력뿐 아니라, 더 일반적인 능력, 즉 죽음을 모면하는 능력이나 생식을 통해 유전자를 보존하는 능력 따위를 말하는 것이다.

 

 

생물에 초자연적인 무엇이나, 물리학의 기본 법칙에 반하는 생명력 따위란 결코 없다. 단지 어떤 생물 전체의 행동을 이해할 때, 물리학의 법칙을 그대로 적용하면 매우 이상하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신체는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 복잡한 물건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체의 행동을 이해하려 할 때, 물리학의 법칙은 전체가 아닌 각 구성 부분에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면 전체로서의 신체의 행동은 각 구성 부분이 상호 작용한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복잡한 물건이란 그것이 너무나 있을 법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그 존재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물건을 말한다. 그것은 일회적인 우연으로는 생겨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의 생성 과정을, 우연히 생겨날 정도로 충분히 단순한 최초의 물체가 점차적으로, 누적적으로, 단계적으로 더 복잡한 물건으로 변해가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1단계 환원주의로는 복잡한 메커니즘을 설명할 수 없고, 양파 껍질 벗기기 식의 작은 단계로 나누어진 설명만이 그 복잡성을 설명할 수 잇는 것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물건이 단 한 번의 단계를 거쳐 생겨났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시간 순으로 배열된, 일련의 작은 단계들로 설명해야 한다.

 

 

 

2  훌륭한 설계 

 

 

자연선택은 눈먼 시계공이다. 눈이 멀었다고 말하는 것은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절차를 계획하지 않고 목적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선택의 결과인 생물은 마치 숙련된 시계공이 있어서 그가 설계하고 고안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맹인들의 안면시는 얼굴 앞면이나 어떤 접촉과도 전혀 상관이 없음이 실험을 통해 입증되었다. 안면시라는 감각은 실제로는 귀로 느끼는 것임이 밝혀졌다. 맹인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발소리나 다른 소리의 반향을 이용해 장애물을 감지하는 것이다.

 

 

이론상 소리의 주파수가 높을수록 더 정확한 소나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주파수가 낮은 소리는 긴 파장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 가까운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두 물체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쥐의 일그러진 얼굴은 원하는 방향을 초음파를 발사하기 위한 절묘한 형태이다.

 

 

송신수신 장치는 파동이 방출되기 바로 직전에 수신 안테나의 회로를 차단한다. 그런 다음 메아리가 되돌아올 때를 맞춰 다시 안테나의 회로를 연결한다...박쥐의 귀에서는 고막의 진동이 마이크와 같은 청세포에 전달될 때 3개의 작은 뼈, 즉 그 모양에서 이름이 유래된 망치뼈, 모루뼈, 등자뼈를 거치게 된다...어떤 박쥐들은 등자뼈와 망치뼈에 잘 발달된 근육을 갖고 있다. 이 근육이 수축하면 그 뼈들은 소리를 효율적으로 전달하지 못한다. 마치 떨고 있는 진동판에 손가락을 대서 소리를 죽이는 것과 같다. 박쥐는 이 근육을 사용하여 귀가 잠깐씩 안 들리게 할 수 있다. 각각의 파동을 내보내기 바로 직전에 근육을 수축시켜 시끄러운 파동에 귀가 다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수축되었던 근육은 다시 이완되어, 메아리가 돌아올 때쯤이면 본래 가진 고동의 민감성이 회복된다. 

 

 

짹짹거리는 레이더가 일정한 음조를 가진 파동이 아니라 음조가 각기 다른 파동을 낼 때의 장점은 되돌아오는 메아리와 방금 레이더에서 나간 소리가 뒤섞인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이 없는 것이다...실제로 수많은 종류의 박쥐들이 매번 울 때마다 한 옥타브가량을 오르내리는 울음소리를 낸다. 

 

 

판박쥐가 정지된 물체를 향해 빠르게 비행하면서 끊임없이 웅 하는 소리의 초음파를 내면 나무에서 반사된 메아리는 박쥐 쪽을 이동하고 있으며 박쥐도 여전히 나무를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박쥐가 메아리를 들을 때에는 도플러 효과가 한 번 더 일어나게 된다. 박쥐의 움직임은 이중의 도플러 효과를 만들어 내고, 그 효과의 크기는 박쥐와 나무 사이의 상대 속도를 측정하기 위한 정밀한 지표가 된다. 따라서 자신의 울음과 메아리의 음조를 비교함으로써 이론상 박쥐(또는 그들의 뇌에 장치된 컴퓨터)는 자신이 나무를 향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지 계산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박쥐와 나무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없다...만약 소리를 반사하는 물체가 나무와 같이 정지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곤충이라면 도플러 효과에 따른 계산 과정은 더 복잡해진다. 그래도 여전히 박쥐는 자신과 목표물의 상대적인 속도를 계산할 수 있다...그들은 물체에 부딪쳐 되돌아오는 메아리가 도플러 효과를 통해 다른 음조로 변형된 후, 그 변형된 음조가 일정하게 유지되도록 내보내는 소리의 음조를 조심스럽게 조정한다. 즉 움직이는 곤충을 향해 속도를 낼 때, 그 곤충에 부딪쳐 되돌아오는 메아리의 음조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박쥐는 내보내는 울음소리의 음조를 끊임없이 변화시킨다. 이 기발한 기술 때문에 박쥐는 가장 민감하게 들리는 음조로 메아리를 유지할 수 있다.(이하 67~71p)

 

 

보는 감각(시각)은 사람에게는 듣는 감각(청각)과 매우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 차이는 빛과 소리의 물리적인 차이에서 직접적으로 비롯된 것은 아니다. 빛과 소리는 모두 그것에 상응하는 감각 기관에서 번역되어 최종적으로 신경 자극이라는 동일한 것이 된다. 신경 자극의 물리적인 양상만 보면 그것이 빛에 관한 정보를 운반하는지 아니면 소리나 냄새에 관한 정보를 운반하는지 분간할 수 없다. 시각이나 청각, 후각이 서로 다른 이유는, 뇌가 내부 모형을 사용할 때 보이는 세계와 들리는 세계, 냄새나는 세계에 각각 다른 종류의 모형을 사용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빛과 소리의 물리적인 차이가 직접적인 원인인 것은 아니다.

 

 

소리뿐만 아니라 박쥐는 우리가 빛을 사용하는 것과 똑같이 3차원 공간의 영상과 그 속에 있는 물체들의 위치를 끊임없이 점검한다. 따라서 그들이 사용하는 내부의 컴퓨터 모형은 3차원 공간에서 운동하는 물체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것이다. 

 

 

다윈이 극도의 완벽함과 복잡성을 갖춘 기관이라고 부른 것들을 우리 모두가 불신하는 밑바탕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자리 잡고 있다. 첫 번째 우리는 진화가 일어날 수 있는 거대한 시간을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두 번째 이유는 확률 이론을 직관적으로 적용하는 데 있다...어떠한 주장이 들어맞을 통계적인 확률을 계산하는 것은 그 주장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취해야 할 정당한 방법이다. 문제는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돌연변이는 무작위적이다. 그러나 자연선택은 무작위성의 정반대편에 있다. 둘째, 각 부분은 그것만으로는 쓸모가 없다.라는 말도 진실이 아니다. 전체로서의 완벽함이 동시에 달성되어야 한다는 말은 거짓이다. 모든 부분이 전체의 성공에 필수적이라는 말도 사실이 아니다. 단순하고 덜 발달되었으며 반만 완성된 눈이나 귀, 음향 탐지 체계, 뻐꾸기의 기생 생활 방식 등은 전혀 없는 것보다는 낫다. 눈이 없다면 전혀 볼 수 없다. 눈이 절반만이라도 있으면 비록 초점이 맞는 정확한 영상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천적이 움직이는 대강의 방향이나마 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삶과 죽음의 차이를 만들어낼 것이다.

 

 

 

3  바이오모프의 나라 

 

 

비록 사소한 것이지만 무질서로부터 질서가 나왔으며, 이 과정에는 어떠한 마음도 개입하지 않았다.

 

 

헤모글로빈의 수는 1 뒤에 0 190개 붙인 것이다! 헤모글로빈이 운에 따라 만들어지길 바랄 때 필요한 행운이 바로 이 수만큼이다. 그리고 헤모글로빈은 생물의 복잡성을 고려할 때 단지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단순하게 걸러내는 것이나 그것만 가지고는 도저히 생물의 복잡성에 근접할 수 없다. 걸러냄은 생물이 가지고 있는 질서를 만들어 내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단순한 걸러냄 작용들은 모두 1단계 선택에 속하는 예들이다. 반면 생물의 탄생은 누적적인 선택의 결과이다.

 

 

1단계 선택에서는 선택되거나 따로 분류되는 것은 그것이 자갈이든 아니면 다른 것이든 한 번에 전체가 선택되거나 다로 분류된다. 반면 누적적인 선택에서는 그것들이 새끼를 친다. 어떤 방법을 통해 첫 번째 거름 작용의 결과가 두 번째로 넘어가고 그 결과는 그 다음으로, 또 그 결과는 그 다음으로 하는 식으로 계속 넘어간다. 선택되고 분류된 것들은 연속되는 여러 세대에 걸쳐 다시 선택되고 분류된다. 한 세대에서 선택된 최종 산물은 다음 세대 선택의 출발점이 되고 그러한 과정이 여러 세대에 걸쳐 반복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일에서 컴퓨터는 원숭이보다 약간 빠르지만 그 차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누적적인 선택에 따라 걸린 시간과, 같은 컴퓨터를 같은 속도로 작동시켜 1단계 선택이라는 다른 과정을 통해 원하는 문장에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의 차이다.

 

 

이렇듯 (비록 작기는 하지만 매 번의 개선이 미래를 건설하는 기초가 되는) 누적적인 선택과 (매번 전혀 새로운 시도를 하는) 1단계 선택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만약 1단계 선택에 의존해야 했다면 진화는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눈먼 힘이 누적적인 선택의 필요조건을 충족시켜 주었다면 진화 과정은 실현 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실제로 바로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그러한 과정이 가장 최근에 낳은 가장 기이하고 놀라운 결과물이다.

 

 

다윈의 조리법에서 확률은 별볼일 없는 양념이다.

 

 

생물은 그렇지 않다. 진화에는 장기적인 목표 따위는 없다. 먼 미래의 목표, 선택의 기준이 될 궁극적인 완벽함 따위는 없다. 진화의 궁극적인 목표가 우리 인간이라는 믿음은 터무니없는 인간 허영심의 산물에 불과하다. 실제 상황에서 선택의 기준은 항상 단기적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개체의 생존이거나 아니면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성공적인 번식이다. 수백만 년이 흐른 뒤에 뒤돌아보았을 때 그 과정이 어떤 머나먼 목표를 향해 조금씩 앞으로 나간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단기간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여러 세대에 걸친 우연적인 결과이다. 시계공, 즉 누적적인 자연선택은 미래를 알지 못하며 장기적인 목표 따위는 갖고 있지 않다.

 

 

실제 자연에서 개개의 동물들의 형태는 배 발생을 통해 만들어진다. 진화가 일어나는 것은 세대가 거듭되면서 배 발생 시에 약간씩 변이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이는 발생을 조절하는 유전자의 변화(돌연변이. 여기서 말하는 돌연변이는 무작위적이고 작은 변화이다.)에서 비롯된다.

 

 

동물의 유전자들은 몸 전체의 청사진, 즉 전체 계획이 결코 아니다. 유전자들은 청사진보다는 조리법에 가깝다. 게다가 발생 중인 배 전체가 아니라 각각의 세포, 또는 분열 중인 세포들의 국부적인 집합들이 이 조리법을 따른다. 배 그리고 나중의 성체가 전체적인 큰 형태를 갖는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전체적인 큰 형태는 작고 국부적인 세포들이 미치는 효과들이 모여 이루어졌으며, 이 국부적인 효과들은 기본적으로 두 갈래 가지 뻗기, 즉 세포가 두 개의 딸세포로 분열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유전자들이 궁극적으로 성체의 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이 국부적인 사건들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유전자들은 단백질 합성이라는 과정을 통해, 발생 중인 배의 성장 규칙으로 번역되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유전학자들은 대개 유전자들이 어떻게 배 발생에 효과를 발휘하는지 알지 못한다. 더군다나 동물의 완전한 유전 형식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하나의 유전자가 변한 것이라고 알려진 2개의 성체를 비교함으로써 그 유전자가 나타내는 효과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유전자들의 효과는 각각의 단순한 합보다 더 복잡한 방식으로 상호 작용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힘들다.

 

 

발생→번식→진화

 

 

신체는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전해지는 것은 유전자이다. 유전자들은 그들이 자리 잡고 있는 신체의 배 발생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 다음 같은 유전자들이 다음 세대로 전해지기도 하고 전해지지 않기도 한다. 유전자의 성질은 그들이 자리 잡은 신체의 발생 과정에 참여했는가 하지 않았는가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신체의 성공 여부에 따라 다음 세대로 전해질 가능성이 영향을 받는다. 번식이 발생을 통해서 유전자의 값을 다음 세대로 전하며 또한 발생 과정 동안 성장 규칙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제외하면 두 과정은 서로 독립되어 있다. 발생은 절대로 유전자 값을 번식에 되돌려 주지 않는다.

 

 

번식은 돌연변이가 일어날 확률과 함께 유전자들을 다음 세대로 물려준다. 발생은 번식을 통해 주어진 유전자들을 받아서 성장 규칙으로 번역한 다음 신체를 이루어간다.

진화는 기본적으로 번식의 끝없는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세대에서 번식은 앞 세대로부터 유전자들을 받아 무작위적이며 조그만 실수인 돌연변이와 함께 다음 세대로 물려준다. 돌연변이는 무작위적으로 선택된 하나의 유전자가 원래 가지고 있던 값에 단순히 +1 또는 -1을 더하는 것이다. 이 말은 세대가 거듭됨에 따라 한 번에 하나씩 작은 변화들이 쌓이게 되고 결국 유전자 변이의 총량이 원래 조상과 비교하여 엄청나게 커질 수 있다는 말이다.

 

 

비록 돌연변이가 무작위적이기는 하지만, 세대가 거듭됨에 따라 축적되는 변화는 무작위적이지 않다. 한 세대의 자손은 무작위적인 방향으로 부모와 달라진다. 그러나 그 자손들 중 어느 것이 선택되어 다음 세대로 이어질 것인지는 무작위적이지 않다.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이 도입될 부분이 바로 이곳이다. 선택의 기준은 유전자들 자체가 아니라 유전자들이 발생을 통해 영향을 미친 신체의 형태다.

 

 

성공의 기준은 실제 자연선택에서 사용되는 생존이라는 직접적인 기준이 아니다. 실제 자연선택에서 어떤 신체가 살아남는 행운을 얻었다면 그 유전자는 자동적으로 살아남게 된다. 왜냐하면 신체 속에 유전자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동물의 유전자를 해독할 수 있는 특정한 유전자 형식을 선택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그러나 자연선택은 유전자를 직접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들이 신체에 미친 효과, 학술적인 용어로 표현형에 미치는 효과를 선택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암공작이 수공작을 선택할 때처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자연은 선택을 하기 위해 뭔가를 복잡하게 따져 보거나 계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연선택은 단도직입적이고 명확하며 단순하다. 자연선택은 사신(死神)이다. 물론 죽음을 면하고 살아남는 이유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자연선택이 동물과 식물들을 엄청나게 복잡하게 만들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죽음 자체는 매우 조잡하고 단순하다. 그리고 자연 상태에서 선택적인 죽음은 전적으로 표현형을, 그래서 거기 담긴 유전자들을 선택한다.

 

 

진화의 목표는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부모가 된 동물은 적어도 다 자랄 때까지 살아남을 정도의 좋은 자질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 부모가 낳은 돌연변이 자식은 부모보다 더 잘 살아남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식에게 일어난 돌연변이가 매우 커서 유전자 공간에서 부모와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갔다면, 부모보다 더 좋게 될 가능성은 어떨까? 답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는 그대로이다. 만약 돌연변이가 매우 큰 것이라면 그 도약의 착지점이 될 수 있는 바이오모프의 수는 천문학적이다. 그리고 죽어 있는 방법의 수는 살아 있는 방법의 수보다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유전자 공간에서 아무렇게나 크게 도약한 결과가 죽음으로 끝날 확률은 매우 높다. 심지어 유전자적 공간에서 아무렇게나 작게 건너뛴 것이 죽음으로 끝날 확률도 꽤 높다. 그러나 도약하는 거리가 작으면 작을수록 그 결과 죽음으로 이어질 확률은 줄어들고, 오히려 개선이 될 확률이 커진다.

 

 

자연선택에 의한 적자생존으로 대표되는 다윈의 진화론적 주장에 따르면, 생존에 성공한 모든 개체는 능력의 한계와 한정된 자원을 놓고 승자독식이 이루어질 때까지 무한경쟁을 하는 대신 적절한 수준에서 타협을 선택하는 도덕성을 키워왔다고 합니다. 상대적으로 압도적이거나 무소불위의 절대적인 힘을 보유하지 않는 한 공멸로 이어지기 마련인 승자독식보다는 적절한 수준의 협력을 통해 종이나 개체군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선에서 균형을 잡는 도덕성을 키워왔다는 것이지요.   

 

종이나 개체 단위에서 유래한 도덕성에 대한 이런 접근은 세계적인 생태학자 개릿 하딘이 《공유지의 비극》을 통해 진리의 차원으로 승격될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공유지의 자원을 자신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모든 개인이 무한경쟁에 뛰어들면 공유지의 자원이 바닥을 드러내 모두가 피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 후생경제학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공유지의 비극'입니다.

 

이를 반대로 해석하면, 시장에 참여한 어떤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늘리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손해를 초래할 때만 가능한 상태에 이르는 지점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파레토 최적' '파레토 균형'이라는 후생경제학의 제1원리가 여기에서 나왔는데, 모두의 이익이 완벽한 균형에 이르러 모두의 이익을 늘리지 않는 한 사람의 이익도 늘릴 수 없는 완벽한 균형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파레토 최적'에서 영감을 받은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시장에 참여한 모든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이기적인 노력과 선택들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거해 최적의 시장가격을 형성하면ㅡ공급과 수요에 의해 결정된 시장가격이 모든 참여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지점ㅡ이익의 극대화가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도 진화론적 해석을 인위적으로 극대화한 것입니다.  

 

'공유지의 비극'이란 절대 일어날 수 없다는 이런 주장들은 빛의 속도로 이루어지는 정보와 선택, 계약이 이루어지고, 비행기와 고속도로, 고속철도 등과 같은 고도화된 물류시스템에 의해 시공간의 한계를 무력화한 현대에서는 더 이상 통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공유지의 비극'이 극복될 수 있는 근대적 시장규모에서는 '도덕성이 다른 면에서는 이기적인 개체들이 협력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끔 해주는 심리적 적응물이'라는 진화론적 주장이 통용될 수 있었습니다.

 

나와 우리만 구별하면 되는 사회관계와 시장규모가 '우리'와 '그들'이라는 구별로 확장되고, 부족 단위의 공동체는커녕 지역과 국가를 넘어 전 지국적 차원으로 추가 확장되면 '공유지의 비극'은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다가옵니다. 자본의 축적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세계화는 인류로 하여금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시장경제에 무방비로 던져버렸고, '벨 에포크 시대의 도래'라는 사상 최악의 불평등을 초래했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이어진 이런 국가와 인류 차원의 불평등은 1차세계대전과 스페인독감, 경제대공황, 2차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대학살을 연이어 일으켰습니다. 미국의 뉴딜정책과 유럽의 복지국가로 대표되는 상생과 공존, 평등의 세계적인 합의가 2차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체결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선진국을 중심으로 무려 30년 동안 이어진 평등한 세상을 위한 공통의 협력은 지구적 차원의 상생과 공존이 불가능한 꿈만이 아님을 입증했습니다.

 

자본주의 황금시대로 회자되는 '영광의 30년'은 1979년 영국에서 대처가, 1980년 미국에서 레이건이 최고지도자에 당선됨에 따라 무려 50년에 걸쳐 완벽하게 해체됩니다. 이 기간을 신자유주의 50년 또는 신소유주의 50년이라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 태어나 자란 세대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무한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갔습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경쟁이란 좋은 것이며, 성공도 실패도 개인의 책임이며 운이라는 요소는 개입할 수 없다며 소수의 승자독식 승자를 무한대로 칭송하고 절대다수의 패자들을 국가의 세금이나 축내는 벌레보다 못한 존재로 추락시켜버렸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탐욕이 모든 수준의 경쟁에서 최고의 덕목이 됐으며,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살 수 없다는 타협점을 찾을 수 없는 무한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새로운 도덕이 모든 개인의 내면에 절대적 기준인양 자리잡도록 만들었습니다. 개인이 축적할 수 있는 부의 한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초고율의 누진세를 부과해 하위 99%에게 나눠주는 재분배는 신의 뜻을 거스르는 최악의 대죄로 사형선고를 내려버렸습니다.

 

조슈아 그린이 《옳고 그름》에서 "똑같은 도덕적 사고가 한 집단 안에서는 협력의 기초가 되지만 집단 사이에서는 협력을 방해한다"는 현대적 비극이라 칭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한정된 자원과 유한한 기회라는 한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이익 추구적 행태는 자원 고갈과 생태계 파괴, 환경 오염이라는 외부효과를 피할 수 없음에도, 이익은 극소수가 독점한 채 피해는 절대다수에게 전가하는 탐욕의 폭주를 도덕성에 따른 공정한 정의인양 포장해버렸습니다.

 

극소수에게 무한대의 부와 권력, 기회를 몰아준 신자유주의 50년이란 '탐욕'이라는 단 하나의 가치만을 뽑아내는 '사탄의 맷돌'을 무한정으로 돌리기 위한 상위 1%의 거짓과 궤변의 향연이었습니다. 상위 1%의 탐욕을 위해 하위 99%가 피터지도록 싸워야 하는 세상이 이렇게해서 일반화됐습니다. 분열과 갈등은 모든 차원에서 발생했으며, 하위 99%에 속하는 우리(또는 내)가 살기 위해서는 또다른 하위 99%에 속하는 그들을 죽여야 하는 제로섬게임이 생존의 기준이 됐습니다.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의 무한경쟁 승자독식 사회의 이면에는 극소수의 탐욕을 위해 절대다수가 피해를 감수해야 논리가 도덕의 이름으로 자리하는 세상입니다. 문재인 정부의 4대의료정책에 대해 코로나19 펜데믹의 최전선에서 국민의 생명을 지켜왔다고 생각하는 젊은의사들의 분노가 유별나게 큰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선배들에 비해 자신이 희생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은 문재인 정부의 4대의료정책이 가뜩이나 줄어든 자신의 밥그릇을 더욱 축내는 것일 뿐이며, 특수한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선배 의사들과 이익을 공유하는 해법을 고민하거나 여론의 향배를 지켜볼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성을 완전히 집어삼킨 극단의 분노와 복수심에 가득찬 이들은 장렬히 전사할지언정 문재인 정부와의 타협이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최악의 선택이자 죽을 때까지 풀 수 없는 치욕입니다.

 

 

의료계의 파이를 키우는 것도 낙수효과의 작동불능 때문에 자신에게 떨어질 몫이 없으므로, 당장의 밥그릇 또는 가까운 미래의 밥그릇을 챙기는 극한 투쟁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는 판단에 이성과 사고는 작동불능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젊은의사들은 최대집이 의협 회장으로 선출된 이래 공공의료를 강화하려는 문재인 정부의 의료정책에 사사건건 반대를 해온 지난 3년의 비협조가 정당했기에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담보로 하는 극한투쟁도 정당한 것입니다.

 

노력한 것 이상을 번 선배와 비교할 때 투자와 노력에 대비 터무니없이 작은 몫만 챙길 수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 최대집과 의협의 투쟁은 지극히 정당하고 자신의 몫을 지켜주기 위한 희생적인 영웅일지도 모릅니다. 자신(또는 우리)에게 주어져야 마땅할 몫을 미래세대에게 나눠주려는 문재인 정부의 4대의료정책은 정당하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문재인 정부는 독재나 전체주의에 다를 것이 없으며, 그들에게 주어져야 마땅할 몫을 강제로 빼앗아 미래세대에게 나눠주려는 것이어서 사회주의적이고 심지어는 공산주의적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의료를 벗어나면 배운 것이 없는 그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경쟁을 제한하고, 자신보다 못한 자들에게 이익을 분배하는 모든 행위가 사회주의고 공산주의인 것입니다.

 

문재인 정부의 일방통행을 무력화시키지 못하면 자신과 우리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하는 젊은의사의 선택이 극단적인 단체행동이나 사직서를 제출하는 감정적 대응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상위 1%가 밀어붙인 무한경쟁의 승자독식 논리를 내면화한 젊은의사에게는 '죽이 아니면 까무라치기' 외에는 어떤 해결책도 없다는 도덕적 원리에 따라 문재인 정부를 굴복시키고야 말겠다는 것 이외의 선택은 불가능합니다.

 

제가 앞의 영상에서 이번 투쟁에서는 회색으로 칠해진 중간지대가 없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들은 4대의료정책을 좌초시키기 위해서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도 얼마든지 담보로 내걸 수 있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문재인 정부와 현재의 국민, 미래세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을 완벽하게 거부하고 있는 젊은의사의 도덕율은 단체행동은 'all or nothing'의 내면화가 얼마나 극한투쟁으로 국가와 국민을 천길나락으로 몰아낼 수 있는지 웅변해줍니다.

 

문재인 정부의 4대의료정책이 완벽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최대집이 의협 회장으로 선출된 이후의 의료계의 이기적인 행태는 어떤 정부라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을 훌쩍 넘어도 진작에 넘었습니다. 상위 1%, 더욱 자세하게 파고들면 상위 0.01~0.1%로 모든 부가 쏠리는 현실에서 3년차를 넘긴 단임정부에 질 수 없다는 결기와 광기가 의협 집행부를 넘어 젊은의사들에게까지 단체행동에 나서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내부에서도 불평등이 극대화되는 상위 1%는 영원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지만, 남은 것이란 레임덕밖에 없는 4년차 정부가 더욱 만만한 상대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들만의 사회주의를 구축하겠다는 의협 집행부보다 더욱 강경한 젊은의사의 단체행동과 집단적 사직서 제출은 갈등과 분열로 얼루직 이 시대가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최후의 과제와도 같은 것입니다. 

 

지난 50년의 세상이 하나의 방향으로만 흘러왔다고 앞으로의 세상도 같은 방향으로만 흘러갈 것이라고 확신하는 저들의 이기적이고 극단적인 선택을 지켜보면서 수없이 많은 철학자들이 찾아해맸던 보편적 도덕원리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하는 하루하루입니다. 새로운 공유지를 만들어내는 도덕적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세상이란 끝없이 늘어나는 분열과 갈등을 매일의 양식처럼 먹고살아야 하는 지옥이나 다름없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oGeLtR7rMg     

 

 

 

주류진화론의 한계에 관해 많은 불만이 있었던 필자에게 전혀 새로운 시각을 알려준 책이 있다. 제프리 밀러의 <연애>다. 주류진화론에 대한 필자의 불만을 거의 다 해소해준 이 책은 다윈 진화론의 한 축에 대한 필자의 무지가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준다. 자연선택(하나의 기원으로부터 모든 종들이 나왔다는 생명의 나무와 함께)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주류진화론ㅡ특히 리처드 도킨스와 스티븐 핑커류의 진화심리학ㅡ에 대한 필자의 불만은 자연선택으로는 인간의 진화, 특히 뇌와 연동된 마음의 진화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다는 것과 그것 때문에 인간의 가치를 너무 떨어뜨린다는데 있었는데, 다윈의 <인류의 유례와 성선택>을 되살려낸 <연애>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바이러스나 박테이라 같은 무성생식의 속도를 따라가기 위한 진화는 고등동물로써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인간은 새로운 전염병에 속수무책이다. 하지만 성선택론이 맞다면, 그래서 지능의 발전이 진화의 또 다른 방향이라면 느린 생식을 대체하는 방법은ㅡ신종 전염병에 대처하는 방법은ㅡ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있다. 인간의 유전자가 3만 개 정도에 불과한 것은 돌연변이의 숫자를 최소화하면서도ㅡ유전자의 숫자가 많을수록 돌연변이도 많이 일어나기 때문ㅡ생존에 유리하게 진화하기 위함인데, 이것의 최적화는 지능의 발전이다. 백신과 치료제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최소 백만년 단위나 최대 억만년 단위의 자연선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뇌의 폭발적 진화이며, 그를 통한 마음의 진화 이론이다. <종의 기원>을 출판한 이후의 다윈도 이에 대해 고민했다........ 이어지는 내용은 영상에 담았습니다.

 

 

P.S. 영상의 앞부분은 북한의 도발적 행태와 추미애의 윤석렬 직격에 대한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0duLKr6wzw 

 

  1. 영국사는 크리스 2020.06.22 02:43 신고

    책을 읽어봐야겠네요.
    댓글은 뜸하지만 영상 잘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링크로 봤었는데 오늘은 유튜브 구독도 했어요.

 

 

다윈은 <종의 기원>을 출판한 이후 '적자생존과 돌연변이 도태와 적응'에 의한 자연선택에 대해 더 이상 연구하지 않고 성선택으로 넘어갔다. 인간을 포함해 동물의 진화를 자연선택만으로 설명하는 것에 부족함을 느꼈던 다윈은 '촉진된 진화' 또는 '형질의 폭발이라는 질주적 진화'를 설명할 수 있는 성선택에 집중했던 것이다. 몇 년 간의 연구 끝에 다윈은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이란 책을 통해 자연선택만으로 설명불가능했던 인간의 뇌 발달(성선택에 의한 창의적 지능의 발현 또는 창발) 같은 단시간에 일어났던 폭발적 진화의 메커니즘을 풀어냈다.

 

 

현대의 진화심리학이 이 책을 기반으로 시작됐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테지만, 성선택에 대한 다윈의 주장에 대해 당시의 반응은 냉담하다 못해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다윈은 자신을 후원하던 기득권층으로부터 무차별 공격에 놓였고, <종의 기원>에 비견될만한 위대한 저작인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한국에서는 <인간의 유래>로 출판)은 생물학과 진화론의 영역에서 퇴출되다시피 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적응 메커니즘의 전도사였으며, 다윈과 함께 진화론을 정립한 월리스의 비판이 결정적이었다. 월리스와 다윈을 진화론의 창시자로 만들려고 했던 기득권층이 힘을 합쳐 성선택을 지식의 전당에서 내쫓아버렸던 것이다.  

 

 

성선택론은 여성에 힘이 실린다. 물론 진화에 대한 선택압은 양쪽에 모두 적용됐기에 상호진화과정이라는 양의 피드백이 적용된다. 남성우월적이거나 남성중심적 진화가 아닌 성평등적 진화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과거에는 여성에게 성폭력을 행사한 자들을 식구나 친척, 친지, 부족들이 복수해주었다. 가해자를 죽이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여성의 성선택이 인류 진화의 핵심이라면 여성의 가임은 절대적인 것인데, 이것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침탈당하는 것을 방치하면 그 부족이나 가족은 생존하지 못한다.

 

 

헌데 이른 자가구제를 대신하게 된 현대의 사법제도는 어떠한가? 인권의 발전이 너무 이성적으로 치우지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가해자에게는 관대하고 피해자에게는 가혹하게 된다. 개선의 여지가 있다거나, 특히 너무 어려서 더욱 그러하다며 가해자의 인권을 극도로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인권에 대한 극단적 이상주의는 피해자에게 더욱 끔찍하게 작용했다. 가해자의 인권에 집중하다보면 피해자는 시야에서 사라지기 마련이다. 

 

 

당시의 반대는 전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이었으며, 남성중심적 세계관과 남성 위주의 권위주의가 반영된 결과였다.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열었던 빅토리아시대 때, 종간의 진화는 자연선택의 영향이 절대적이지만, 개체간의 진화는 암컷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다윈의 성선택론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치명적 도발이었다. 언어, 유머, 시, 미술, 음악, 스포츠, 정치적 지위, 지식의 축적, 부의 확장ㅐ 등의 발전은 자연선택에 의한 생존가능성에 긍정적 효과가 없다는 주장도 한몫 거들었다. 검증(또는 증명) 가능한 수학적 모델의 부족(수리생물학의 도래로 이는 해결된다)도 과학으로써의 성선택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성선택은 그렇게 사장되는 듯했다. 

 

 

영상에 보다 자세한 설명을 담았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znFtXorXCI

 



이번 글에서는 진화론에 나오는 최적화와 최대화 개념에 대해 다루어보겠습니다. 또한 시간이 나는 대로 이 두 개의 개념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의 노동가치설과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의 차이에 대해서도 다루어보겠습니다. 이번 글에선 진화론를 이해하는데 주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최적화와 최대화 개념에 대해서 다룰까 합니다.

 

 

 

보통 우리는 최적화와 최대화를 동일한 개념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둘의 개념은 정반대입니다. 이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책의 제목에서 주는 선입관이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자발전 진화》라는 책을 보면 리처드 도킨스와 다윈을 비판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비교해서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적자생존이란 의미에서의 최적화

 

진화론의 핵심 논리이자 거의 전부인 것처럼 알려진 최적화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요약하면 “유전적인 변이를 수반한 계획적인 번식은, 축적될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광범위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유전적인 변이란 대부분의 진화를 추동하는 돌연변이를 말하는데, 수만~수십만 분의 1의 확률로 일어나기 때문에 가우스 종형곡선의 꼬리 부분(롱테일)에 해당한다고 보면 됩니다.

 

 

보통 돌연변이가 일어나면 거의 대부분은 채택되지 않습니다. 방사선에 피폭되면 일어나는 돌연변이가 인간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돌연변이는 다음 세대로 유전되지 못합니다. 이를 나쁜 돌연변이라 한다면 다음 세대로 유전되는 돌연변이도 있는데 이것이 진화를 추동하는 좋은 돌연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돌연변이에 나쁘고 좋음은 없지만, 돌연변이가 인간은 물론 자연과 환경에 적합하지 못하면 당대에서 도태되고 반대의 경우에는 유전돼 진화를 이어갑니다. 이런 방식으로 살아남은 돌연변이 유전자는 진화의 기억을 담아두는 유전자풀에 안착함과 동시에 다른 유전자들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모든 생명체를 최적화된 형태로 이끌어갑니다.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 일어나는 진화를 누적적 자연선택이라고 하며 만일 하나의 생명체가 자신의 진화를 계획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살면 어떤 결과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다윈과 도킨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을 보면 “유전적인 변이를 수반한 계획적인 번식은, 축적될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광범위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개념에 대해 보다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최고 걸작



▲ 적자생존이 승자의 진화를 말하는가?

 

허버트 스펜서가 정립한 적자생존이란 개념은 다윈의 진화론을 왜곡해서 나온 것으로, 주어진 자연환경(인류에 적용하면 사회가 된다)에서 살아남은 승자가 진화의 과정을 통해 후대로 전승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유전자 차원에서 말하면 모든 유전자에 대한 모든 유전자의 투쟁에서 승리한 것들이 후대의 진화를 이어간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지구상에 살아남은 종은 가장 강하거나 가장 지적인 종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한 종"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힘 세고 포악한 종은 멸종하고, 착하고 배려하는 종은 생존한다"고도 말했습니다. 허버트 스펜서의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란 개념은 『종의 기원』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적자생존의 본래의 뜻을 왜곡해서 ‘적자가 곧 승자’라는 의미로 사용한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다윈의 진화론을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과 병치시켜 무한경쟁과 적자생존 및 약육강식의 정글을 탄생시켰습니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제국주의 시대의 팽창주의(식민지 확대 경쟁)를 정당화한 강자의 논리에 불과합니다.

 

 

이 때문에 국가와 자본의 결탁이 자연의 법칙인양 호도됐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신은 언제나 승자와 함께 한다’는 적자생존의 논리를 비판한 것도 동일한 맥락입니다. 스펜스의 사회진화론이 우파의 전체주의인 히틀러의 나치와 히데키의 군국주의로 이어졌고, 좌파에서는 스탈린의 전체주의로 이어져 인류에게 치유할 수 없는 최악의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월가의 현인인 탈레브가 《블랙 스완》에서 말한 것처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이나 전사의 후예보다 적당한 타협을 한 평범한 사람들의 후예들이 더 많이 살아남았습니다. 적자생존은 승자에게 진화의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멸종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실제로 생태계의 서열구조를 보면 승자만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각자의 환경에서 적정한 환경에 적응한 종들이 살아남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대일로 싸워서는 이길 수 없지만 연대를 하면 어떤 강자도 물리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필자가 어느 영화평론가가 말했던 Little, Low, Lean, 즉 작고 낮은 사람들이 서로 기대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말을 가장 좋아하는 것도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 이기적인 유전자로서의 최대화

 

리처드 도킨스에 따르면 유전자들은 수없이 많은 다른 유전자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최대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습니다. 누적적 자연선택과 돌연변이로 만들어진 유전자들이 유전자풀에 입성해 다른 유전자들과 경쟁하거나 협력해서 다음 세대에 전해지려면 최대한 이기적인 행태를 통해 살아남아야 합니다.

 

 

자살유전자 같은 경우에는 자신이 후대에 전해지기 위해 생명을 단축시키는 행위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수명이 길어질수록 자살유전자는 힘을 잃게 돼 유전자 풀에서 쫓겨나 진화의 역사에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오직 생존해 다음 세대에 전해지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진화의 결정체인 종의 생명마저 단축시키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최대화하려 합니다.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리처드 도킨스는 진화라는 과정이 유전자 차원에서 보면 지극히 이기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개별 유전자는 필요하다면 다른 유전자의 기능을 최소화시키고, 자신의 힘을 최대화시키기 위해 또 다른 유전자와 담합해서 자신의 특성과 반대되는 유전자를 퇴출시키기도 합니다. 이것이 자기보존의 차원에서만 행위하는 이기적인 유전자로서의 최대화를 의미합니다.


 


                                                  


  

▲ 인간이란 종의 이타적 특성

 

유전자가 이기적이라 표현했던 리처드 도킨스의 영향을 논외로 한다고 해도 유전자의 이기적인 면은 진화론의 시조인 다윈조차 고민했던 부분입니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진화의 핵심이 적자생존(유전자 차원과 종으로서의 차원 모두에서)으로 오독되기 쉬워, 그것만으로는 인간의 도덕성과 이타적 본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윈은 『인간의 유래』에서 인간의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기질이 인류의 성공적인 진화를 가능하게 했다는 견해를 밝힙니다. 그는 특히 “공동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많은 부족들의 ‘충성심, 애향심, 복종, 용기, 동정심’을 인류 진화의 성공 요인으로 지목했습니다. 이타적인 유전자의 특성이 인간이란 종이 만물의 영장의 자리에 오르도록 만든 일등공신이란 것이란 뜻이지요.

 

 

칼 세이건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코스모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생명의 본질은 우리를 만들고 있는 원자들이나 단순한 분자들에 있는 게 아니라 이 물질들이 결합되는 방식에 있다.” 즉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원자로 이루어진 유전자도 이기적인 행태가 아닌 진화를 위해 서로 협력하는 이타적인 방식에 의해 지금의 인류를 창조했다고 것입니다.

 

 

서로 협력하여 복잡하고 거대한 생명들을 만들어내는 유전자의 이타성이 진화의 본질이라는 뜻이고 이것은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과 일치합니다. 물론 브르스 립튼의 《자발적 진화》는 정반대로 말하고 있지만, 유전자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종의 차원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양자역학이 고전물리학(뉴턴역학과 상대성이론이 대표적이다)의 도움이 없이는 우주의 법칙을 모두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윈 진화론을 박반하는 후생진화론의 핵심

 


▲ 현대의 차원에서 본 유전자의 최적화와 최대화

 

다윈의 진화론을 입증하려면 생명체를 이룰 수 있는 원소들로 최초의 복제자가 탄생하던 순간을 재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대물리학과 유기화학 및 무기화학, 분자생물학 등이 발전함에 따라 우주의 탄생부터 계산이 불가능한 확률이 겹치고 겹치면서 지구라는 행성이 최초의 유기체가 탄생해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으로 진화를 해왔음이 밝혀졌습니다. 높은 온도와 방사능, 유해가스들이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수준까지 안정화된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과학은 최초의 유기체인 첫 번째 복제가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인 ‘원시 스프’의 재현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가장 진화된 유인원에서 현재의 인류 사이에 어떤 진화의 비밀이 있었는지도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신의 창조론은 여전히 유효한 상태입니다. 어쩌면 ‘원시 스프’의 재현에 성공하고, 유인원에서 인류로 비약했던 진화의 비밀을 푼다고 해도 신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글의 주제가 창조론과 진화론을 비교하며 무엇이 진실인지 가리는 것이 아니라 이에 관한 글은 시간이 되면 별도로 다루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을 믿던 간에 중요한 것은 인간이라는 종이 가진 이타적 본성에 있습니다. 인류학에서 밝혀진 것들을 참조하면,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유전자의 최적화와 최대화는 개별 유전자들이 이기적인 성질과 이타적인 성질을 동시에 지녔다는 점에서 둘 다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성질 때문에 인간은 보다 지적인 생명체로 진화할 수 있었고, 처한 환경에 따라 적자생존의 원리를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종으로서 이기적인 것에 치중하면 세상은 위험에 빠져들고 반대로 이타적인 것에 열중하면 세상은 행복해집니다. 삶의 필요와 욕구, 공존과 연대가 탐욕과 욕망, 독점과 무한경쟁으로 대체되면 최악의 세상인 신자유주의가 됩니다.

 

 

필자가 분장생물학이나 진화생물학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진화와 관련된 수십 권의 책을 읽으면서 내린 결론은 유전자 차원에서는 이기적인 성질이 중요하지만, 종이란 차원으로 넘어오면 이타적인 성질(새누리당 빼고)이 더욱 중요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몸만 해도 천조 개에 이르는 세포가 서로 협력하고 있기 때문에, 지적이며 영적인 활동까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전자의 이타성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진화의 결과입니다.

 

 

물론 대한민국을 말아먹고 있는 극좌와 극우들은 제외됨을 밝혀둡니다. 그들은 진화도 가끔은 역방향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살아 있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대한민국에서는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을 떠받드는 보수의 DNA가 최대화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사회경제적 평등에 기반한 다양한 자유를 지향하는 진보의 DNA는 최적화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셀 푸코에 따르면 국가란 개인화와 전체화의 두 가지 경향이 서로 충돌하고 반응하고 교차하는 곳입니다. 이 둘을 자유방임 시장경제 하에 통합시킨 신자유주의 통치가 일반화된 이후로는 모든 사회 환경이 사적 독점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보수우파(박근혜 정부 뒤에 자리한 시장자유주의 세력)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는데, 이는 자연의 법칙과 신의 섭리에서도 벗어난 탐욕의 결과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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