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선택에 의한 적자생존으로 대표되는 다윈의 진화론적 주장에 따르면, 생존에 성공한 모든 개체는 능력의 한계와 한정된 자원을 놓고 승자독식이 이루어질 때까지 무한경쟁을 하는 대신 적절한 수준에서 타협을 선택하는 도덕성을 키워왔다고 합니다. 상대적으로 압도적이거나 무소불위의 절대적인 힘을 보유하지 않는 한 공멸로 이어지기 마련인 승자독식보다는 적절한 수준의 협력을 통해 종이나 개체군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선에서 균형을 잡는 도덕성을 키워왔다는 것이지요.   

 

종이나 개체 단위에서 유래한 도덕성에 대한 이런 접근은 세계적인 생태학자 개릿 하딘이 《공유지의 비극》을 통해 진리의 차원으로 승격될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공유지의 자원을 자신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모든 개인이 무한경쟁에 뛰어들면 공유지의 자원이 바닥을 드러내 모두가 피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 후생경제학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공유지의 비극'입니다.

 

이를 반대로 해석하면, 시장에 참여한 어떤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늘리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손해를 초래할 때만 가능한 상태에 이르는 지점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파레토 최적' '파레토 균형'이라는 후생경제학의 제1원리가 여기에서 나왔는데, 모두의 이익이 완벽한 균형에 이르러 모두의 이익을 늘리지 않는 한 사람의 이익도 늘릴 수 없는 완벽한 균형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파레토 최적'에서 영감을 받은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시장에 참여한 모든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이기적인 노력과 선택들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거해 최적의 시장가격을 형성하면ㅡ공급과 수요에 의해 결정된 시장가격이 모든 참여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지점ㅡ이익의 극대화가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도 진화론적 해석을 인위적으로 극대화한 것입니다.  

 

'공유지의 비극'이란 절대 일어날 수 없다는 이런 주장들은 빛의 속도로 이루어지는 정보와 선택, 계약이 이루어지고, 비행기와 고속도로, 고속철도 등과 같은 고도화된 물류시스템에 의해 시공간의 한계를 무력화한 현대에서는 더 이상 통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공유지의 비극'이 극복될 수 있는 근대적 시장규모에서는 '도덕성이 다른 면에서는 이기적인 개체들이 협력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끔 해주는 심리적 적응물이'라는 진화론적 주장이 통용될 수 있었습니다.

 

나와 우리만 구별하면 되는 사회관계와 시장규모가 '우리'와 '그들'이라는 구별로 확장되고, 부족 단위의 공동체는커녕 지역과 국가를 넘어 전 지국적 차원으로 추가 확장되면 '공유지의 비극'은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다가옵니다. 자본의 축적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세계화는 인류로 하여금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시장경제에 무방비로 던져버렸고, '벨 에포크 시대의 도래'라는 사상 최악의 불평등을 초래했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이어진 이런 국가와 인류 차원의 불평등은 1차세계대전과 스페인독감, 경제대공황, 2차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대학살을 연이어 일으켰습니다. 미국의 뉴딜정책과 유럽의 복지국가로 대표되는 상생과 공존, 평등의 세계적인 합의가 2차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체결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선진국을 중심으로 무려 30년 동안 이어진 평등한 세상을 위한 공통의 협력은 지구적 차원의 상생과 공존이 불가능한 꿈만이 아님을 입증했습니다.

 

자본주의 황금시대로 회자되는 '영광의 30년'은 1979년 영국에서 대처가, 1980년 미국에서 레이건이 최고지도자에 당선됨에 따라 무려 50년에 걸쳐 완벽하게 해체됩니다. 이 기간을 신자유주의 50년 또는 신소유주의 50년이라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 태어나 자란 세대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무한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갔습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경쟁이란 좋은 것이며, 성공도 실패도 개인의 책임이며 운이라는 요소는 개입할 수 없다며 소수의 승자독식 승자를 무한대로 칭송하고 절대다수의 패자들을 국가의 세금이나 축내는 벌레보다 못한 존재로 추락시켜버렸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탐욕이 모든 수준의 경쟁에서 최고의 덕목이 됐으며,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살 수 없다는 타협점을 찾을 수 없는 무한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새로운 도덕이 모든 개인의 내면에 절대적 기준인양 자리잡도록 만들었습니다. 개인이 축적할 수 있는 부의 한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초고율의 누진세를 부과해 하위 99%에게 나눠주는 재분배는 신의 뜻을 거스르는 최악의 대죄로 사형선고를 내려버렸습니다.

 

조슈아 그린이 《옳고 그름》에서 "똑같은 도덕적 사고가 한 집단 안에서는 협력의 기초가 되지만 집단 사이에서는 협력을 방해한다"는 현대적 비극이라 칭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한정된 자원과 유한한 기회라는 한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이익 추구적 행태는 자원 고갈과 생태계 파괴, 환경 오염이라는 외부효과를 피할 수 없음에도, 이익은 극소수가 독점한 채 피해는 절대다수에게 전가하는 탐욕의 폭주를 도덕성에 따른 공정한 정의인양 포장해버렸습니다.

 

극소수에게 무한대의 부와 권력, 기회를 몰아준 신자유주의 50년이란 '탐욕'이라는 단 하나의 가치만을 뽑아내는 '사탄의 맷돌'을 무한정으로 돌리기 위한 상위 1%의 거짓과 궤변의 향연이었습니다. 상위 1%의 탐욕을 위해 하위 99%가 피터지도록 싸워야 하는 세상이 이렇게해서 일반화됐습니다. 분열과 갈등은 모든 차원에서 발생했으며, 하위 99%에 속하는 우리(또는 내)가 살기 위해서는 또다른 하위 99%에 속하는 그들을 죽여야 하는 제로섬게임이 생존의 기준이 됐습니다.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의 무한경쟁 승자독식 사회의 이면에는 극소수의 탐욕을 위해 절대다수가 피해를 감수해야 논리가 도덕의 이름으로 자리하는 세상입니다. 문재인 정부의 4대의료정책에 대해 코로나19 펜데믹의 최전선에서 국민의 생명을 지켜왔다고 생각하는 젊은의사들의 분노가 유별나게 큰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선배들에 비해 자신이 희생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은 문재인 정부의 4대의료정책이 가뜩이나 줄어든 자신의 밥그릇을 더욱 축내는 것일 뿐이며, 특수한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선배 의사들과 이익을 공유하는 해법을 고민하거나 여론의 향배를 지켜볼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성을 완전히 집어삼킨 극단의 분노와 복수심에 가득찬 이들은 장렬히 전사할지언정 문재인 정부와의 타협이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최악의 선택이자 죽을 때까지 풀 수 없는 치욕입니다.

 

 

의료계의 파이를 키우는 것도 낙수효과의 작동불능 때문에 자신에게 떨어질 몫이 없으므로, 당장의 밥그릇 또는 가까운 미래의 밥그릇을 챙기는 극한 투쟁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는 판단에 이성과 사고는 작동불능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젊은의사들은 최대집이 의협 회장으로 선출된 이래 공공의료를 강화하려는 문재인 정부의 의료정책에 사사건건 반대를 해온 지난 3년의 비협조가 정당했기에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담보로 하는 극한투쟁도 정당한 것입니다.

 

노력한 것 이상을 번 선배와 비교할 때 투자와 노력에 대비 터무니없이 작은 몫만 챙길 수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 최대집과 의협의 투쟁은 지극히 정당하고 자신의 몫을 지켜주기 위한 희생적인 영웅일지도 모릅니다. 자신(또는 우리)에게 주어져야 마땅할 몫을 미래세대에게 나눠주려는 문재인 정부의 4대의료정책은 정당하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문재인 정부는 독재나 전체주의에 다를 것이 없으며, 그들에게 주어져야 마땅할 몫을 강제로 빼앗아 미래세대에게 나눠주려는 것이어서 사회주의적이고 심지어는 공산주의적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의료를 벗어나면 배운 것이 없는 그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경쟁을 제한하고, 자신보다 못한 자들에게 이익을 분배하는 모든 행위가 사회주의고 공산주의인 것입니다.

 

문재인 정부의 일방통행을 무력화시키지 못하면 자신과 우리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하는 젊은의사의 선택이 극단적인 단체행동이나 사직서를 제출하는 감정적 대응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상위 1%가 밀어붙인 무한경쟁의 승자독식 논리를 내면화한 젊은의사에게는 '죽이 아니면 까무라치기' 외에는 어떤 해결책도 없다는 도덕적 원리에 따라 문재인 정부를 굴복시키고야 말겠다는 것 이외의 선택은 불가능합니다.

 

제가 앞의 영상에서 이번 투쟁에서는 회색으로 칠해진 중간지대가 없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들은 4대의료정책을 좌초시키기 위해서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도 얼마든지 담보로 내걸 수 있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문재인 정부와 현재의 국민, 미래세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을 완벽하게 거부하고 있는 젊은의사의 도덕율은 단체행동은 'all or nothing'의 내면화가 얼마나 극한투쟁으로 국가와 국민을 천길나락으로 몰아낼 수 있는지 웅변해줍니다.

 

문재인 정부의 4대의료정책이 완벽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최대집이 의협 회장으로 선출된 이후의 의료계의 이기적인 행태는 어떤 정부라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을 훌쩍 넘어도 진작에 넘었습니다. 상위 1%, 더욱 자세하게 파고들면 상위 0.01~0.1%로 모든 부가 쏠리는 현실에서 3년차를 넘긴 단임정부에 질 수 없다는 결기와 광기가 의협 집행부를 넘어 젊은의사들에게까지 단체행동에 나서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내부에서도 불평등이 극대화되는 상위 1%는 영원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지만, 남은 것이란 레임덕밖에 없는 4년차 정부가 더욱 만만한 상대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들만의 사회주의를 구축하겠다는 의협 집행부보다 더욱 강경한 젊은의사의 단체행동과 집단적 사직서 제출은 갈등과 분열로 얼루직 이 시대가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최후의 과제와도 같은 것입니다. 

 

지난 50년의 세상이 하나의 방향으로만 흘러왔다고 앞으로의 세상도 같은 방향으로만 흘러갈 것이라고 확신하는 저들의 이기적이고 극단적인 선택을 지켜보면서 수없이 많은 철학자들이 찾아해맸던 보편적 도덕원리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하는 하루하루입니다. 새로운 공유지를 만들어내는 도덕적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세상이란 끝없이 늘어나는 분열과 갈등을 매일의 양식처럼 먹고살아야 하는 지옥이나 다름없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oGeLtR7rMg     

 

 

 

주류진화론의 한계에 관해 많은 불만이 있었던 필자에게 전혀 새로운 시각을 알려준 책이 있다. 제프리 밀러의 <연애>다. 주류진화론에 대한 필자의 불만을 거의 다 해소해준 이 책은 다윈 진화론의 한 축에 대한 필자의 무지가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준다. 자연선택(하나의 기원으로부터 모든 종들이 나왔다는 생명의 나무와 함께)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주류진화론ㅡ특히 리처드 도킨스와 스티븐 핑커류의 진화심리학ㅡ에 대한 필자의 불만은 자연선택으로는 인간의 진화, 특히 뇌와 연동된 마음의 진화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다는 것과 그것 때문에 인간의 가치를 너무 떨어뜨린다는데 있었는데, 다윈의 <인류의 유례와 성선택>을 되살려낸 <연애>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바이러스나 박테이라 같은 무성생식의 속도를 따라가기 위한 진화는 고등동물로써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인간은 새로운 전염병에 속수무책이다. 하지만 성선택론이 맞다면, 그래서 지능의 발전이 진화의 또 다른 방향이라면 느린 생식을 대체하는 방법은ㅡ신종 전염병에 대처하는 방법은ㅡ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있다. 인간의 유전자가 3만 개 정도에 불과한 것은 돌연변이의 숫자를 최소화하면서도ㅡ유전자의 숫자가 많을수록 돌연변이도 많이 일어나기 때문ㅡ생존에 유리하게 진화하기 위함인데, 이것의 최적화는 지능의 발전이다. 백신과 치료제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최소 백만년 단위나 최대 억만년 단위의 자연선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뇌의 폭발적 진화이며, 그를 통한 마음의 진화 이론이다. <종의 기원>을 출판한 이후의 다윈도 이에 대해 고민했다........ 이어지는 내용은 영상에 담았습니다.

 

 

P.S. 영상의 앞부분은 북한의 도발적 행태와 추미애의 윤석렬 직격에 대한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0duLKr6wzw 

 

  1. 영국사는 크리스 2020.06.22 02:43 신고

    책을 읽어봐야겠네요.
    댓글은 뜸하지만 영상 잘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링크로 봤었는데 오늘은 유튜브 구독도 했어요.

 

 

다윈은 <종의 기원>을 출판한 이후 '적자생존과 돌연변이 도태와 적응'에 의한 자연선택에 대해 더 이상 연구하지 않고 성선택으로 넘어갔다. 인간을 포함해 동물의 진화를 자연선택만으로 설명하는 것에 부족함을 느꼈던 다윈은 '촉진된 진화' 또는 '형질의 폭발이라는 질주적 진화'를 설명할 수 있는 성선택에 집중했던 것이다. 몇 년 간의 연구 끝에 다윈은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이란 책을 통해 자연선택만으로 설명불가능했던 인간의 뇌 발달(성선택에 의한 창의적 지능의 발현 또는 창발) 같은 단시간에 일어났던 폭발적 진화의 메커니즘을 풀어냈다.

 

 

현대의 진화심리학이 이 책을 기반으로 시작됐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테지만, 성선택에 대한 다윈의 주장에 대해 당시의 반응은 냉담하다 못해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다윈은 자신을 후원하던 기득권층으로부터 무차별 공격에 놓였고, <종의 기원>에 비견될만한 위대한 저작인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한국에서는 <인간의 유래>로 출판)은 생물학과 진화론의 영역에서 퇴출되다시피 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적응 메커니즘의 전도사였으며, 다윈과 함께 진화론을 정립한 월리스의 비판이 결정적이었다. 월리스와 다윈을 진화론의 창시자로 만들려고 했던 기득권층이 힘을 합쳐 성선택을 지식의 전당에서 내쫓아버렸던 것이다.  

 

 

성선택론은 여성에 힘이 실린다. 물론 진화에 대한 선택압은 양쪽에 모두 적용됐기에 상호진화과정이라는 양의 피드백이 적용된다. 남성우월적이거나 남성중심적 진화가 아닌 성평등적 진화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과거에는 여성에게 성폭력을 행사한 자들을 식구나 친척, 친지, 부족들이 복수해주었다. 가해자를 죽이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여성의 성선택이 인류 진화의 핵심이라면 여성의 가임은 절대적인 것인데, 이것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침탈당하는 것을 방치하면 그 부족이나 가족은 생존하지 못한다.

 

 

헌데 이른 자가구제를 대신하게 된 현대의 사법제도는 어떠한가? 인권의 발전이 너무 이성적으로 치우지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가해자에게는 관대하고 피해자에게는 가혹하게 된다. 개선의 여지가 있다거나, 특히 너무 어려서 더욱 그러하다며 가해자의 인권을 극도로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인권에 대한 극단적 이상주의는 피해자에게 더욱 끔찍하게 작용했다. 가해자의 인권에 집중하다보면 피해자는 시야에서 사라지기 마련이다. 

 

 

당시의 반대는 전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이었으며, 남성중심적 세계관과 남성 위주의 권위주의가 반영된 결과였다.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열었던 빅토리아시대 때, 종간의 진화는 자연선택의 영향이 절대적이지만, 개체간의 진화는 암컷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다윈의 성선택론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치명적 도발이었다. 언어, 유머, 시, 미술, 음악, 스포츠, 정치적 지위, 지식의 축적, 부의 확장ㅐ 등의 발전은 자연선택에 의한 생존가능성에 긍정적 효과가 없다는 주장도 한몫 거들었다. 검증(또는 증명) 가능한 수학적 모델의 부족(수리생물학의 도래로 이는 해결된다)도 과학으로써의 성선택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성선택은 그렇게 사장되는 듯했다. 

 

 

영상에 보다 자세한 설명을 담았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znFtXorXCI

 



이번 글에서는 진화론에 나오는 최적화와 최대화 개념에 대해 다루어보겠습니다. 또한 시간이 나는 대로 이 두 개의 개념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의 노동가치설과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의 차이에 대해서도 다루어보겠습니다. 이번 글에선 진화론를 이해하는데 주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최적화와 최대화 개념에 대해서 다룰까 합니다.

 

 

 

보통 우리는 최적화와 최대화를 동일한 개념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둘의 개념은 정반대입니다. 이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책의 제목에서 주는 선입관이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자발전 진화》라는 책을 보면 리처드 도킨스와 다윈을 비판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비교해서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적자생존이란 의미에서의 최적화

 

진화론의 핵심 논리이자 거의 전부인 것처럼 알려진 최적화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요약하면 “유전적인 변이를 수반한 계획적인 번식은, 축적될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광범위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유전적인 변이란 대부분의 진화를 추동하는 돌연변이를 말하는데, 수만~수십만 분의 1의 확률로 일어나기 때문에 가우스 종형곡선의 꼬리 부분(롱테일)에 해당한다고 보면 됩니다.

 

 

보통 돌연변이가 일어나면 거의 대부분은 채택되지 않습니다. 방사선에 피폭되면 일어나는 돌연변이가 인간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돌연변이는 다음 세대로 유전되지 못합니다. 이를 나쁜 돌연변이라 한다면 다음 세대로 유전되는 돌연변이도 있는데 이것이 진화를 추동하는 좋은 돌연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돌연변이에 나쁘고 좋음은 없지만, 돌연변이가 인간은 물론 자연과 환경에 적합하지 못하면 당대에서 도태되고 반대의 경우에는 유전돼 진화를 이어갑니다. 이런 방식으로 살아남은 돌연변이 유전자는 진화의 기억을 담아두는 유전자풀에 안착함과 동시에 다른 유전자들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모든 생명체를 최적화된 형태로 이끌어갑니다.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 일어나는 진화를 누적적 자연선택이라고 하며 만일 하나의 생명체가 자신의 진화를 계획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살면 어떤 결과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다윈과 도킨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을 보면 “유전적인 변이를 수반한 계획적인 번식은, 축적될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광범위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개념에 대해 보다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최고 걸작



▲ 적자생존이 승자의 진화를 말하는가?

 

허버트 스펜서가 정립한 적자생존이란 개념은 다윈의 진화론을 왜곡해서 나온 것으로, 주어진 자연환경(인류에 적용하면 사회가 된다)에서 살아남은 승자가 진화의 과정을 통해 후대로 전승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유전자 차원에서 말하면 모든 유전자에 대한 모든 유전자의 투쟁에서 승리한 것들이 후대의 진화를 이어간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지구상에 살아남은 종은 가장 강하거나 가장 지적인 종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한 종"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힘 세고 포악한 종은 멸종하고, 착하고 배려하는 종은 생존한다"고도 말했습니다. 허버트 스펜서의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란 개념은 『종의 기원』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적자생존의 본래의 뜻을 왜곡해서 ‘적자가 곧 승자’라는 의미로 사용한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다윈의 진화론을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과 병치시켜 무한경쟁과 적자생존 및 약육강식의 정글을 탄생시켰습니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제국주의 시대의 팽창주의(식민지 확대 경쟁)를 정당화한 강자의 논리에 불과합니다.

 

 

이 때문에 국가와 자본의 결탁이 자연의 법칙인양 호도됐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신은 언제나 승자와 함께 한다’는 적자생존의 논리를 비판한 것도 동일한 맥락입니다. 스펜스의 사회진화론이 우파의 전체주의인 히틀러의 나치와 히데키의 군국주의로 이어졌고, 좌파에서는 스탈린의 전체주의로 이어져 인류에게 치유할 수 없는 최악의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월가의 현인인 탈레브가 《블랙 스완》에서 말한 것처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이나 전사의 후예보다 적당한 타협을 한 평범한 사람들의 후예들이 더 많이 살아남았습니다. 적자생존은 승자에게 진화의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멸종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실제로 생태계의 서열구조를 보면 승자만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각자의 환경에서 적정한 환경에 적응한 종들이 살아남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대일로 싸워서는 이길 수 없지만 연대를 하면 어떤 강자도 물리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필자가 어느 영화평론가가 말했던 Little, Low, Lean, 즉 작고 낮은 사람들이 서로 기대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말을 가장 좋아하는 것도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 이기적인 유전자로서의 최대화

 

리처드 도킨스에 따르면 유전자들은 수없이 많은 다른 유전자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최대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습니다. 누적적 자연선택과 돌연변이로 만들어진 유전자들이 유전자풀에 입성해 다른 유전자들과 경쟁하거나 협력해서 다음 세대에 전해지려면 최대한 이기적인 행태를 통해 살아남아야 합니다.

 

 

자살유전자 같은 경우에는 자신이 후대에 전해지기 위해 생명을 단축시키는 행위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수명이 길어질수록 자살유전자는 힘을 잃게 돼 유전자 풀에서 쫓겨나 진화의 역사에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오직 생존해 다음 세대에 전해지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진화의 결정체인 종의 생명마저 단축시키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최대화하려 합니다.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리처드 도킨스는 진화라는 과정이 유전자 차원에서 보면 지극히 이기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개별 유전자는 필요하다면 다른 유전자의 기능을 최소화시키고, 자신의 힘을 최대화시키기 위해 또 다른 유전자와 담합해서 자신의 특성과 반대되는 유전자를 퇴출시키기도 합니다. 이것이 자기보존의 차원에서만 행위하는 이기적인 유전자로서의 최대화를 의미합니다.


 


                                                  


  

▲ 인간이란 종의 이타적 특성

 

유전자가 이기적이라 표현했던 리처드 도킨스의 영향을 논외로 한다고 해도 유전자의 이기적인 면은 진화론의 시조인 다윈조차 고민했던 부분입니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진화의 핵심이 적자생존(유전자 차원과 종으로서의 차원 모두에서)으로 오독되기 쉬워, 그것만으로는 인간의 도덕성과 이타적 본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윈은 『인간의 유래』에서 인간의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기질이 인류의 성공적인 진화를 가능하게 했다는 견해를 밝힙니다. 그는 특히 “공동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많은 부족들의 ‘충성심, 애향심, 복종, 용기, 동정심’을 인류 진화의 성공 요인으로 지목했습니다. 이타적인 유전자의 특성이 인간이란 종이 만물의 영장의 자리에 오르도록 만든 일등공신이란 것이란 뜻이지요.

 

 

칼 세이건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코스모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생명의 본질은 우리를 만들고 있는 원자들이나 단순한 분자들에 있는 게 아니라 이 물질들이 결합되는 방식에 있다.” 즉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원자로 이루어진 유전자도 이기적인 행태가 아닌 진화를 위해 서로 협력하는 이타적인 방식에 의해 지금의 인류를 창조했다고 것입니다.

 

 

서로 협력하여 복잡하고 거대한 생명들을 만들어내는 유전자의 이타성이 진화의 본질이라는 뜻이고 이것은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과 일치합니다. 물론 브르스 립튼의 《자발적 진화》는 정반대로 말하고 있지만, 유전자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종의 차원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양자역학이 고전물리학(뉴턴역학과 상대성이론이 대표적이다)의 도움이 없이는 우주의 법칙을 모두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윈 진화론을 박반하는 후생진화론의 핵심

 


▲ 현대의 차원에서 본 유전자의 최적화와 최대화

 

다윈의 진화론을 입증하려면 생명체를 이룰 수 있는 원소들로 최초의 복제자가 탄생하던 순간을 재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대물리학과 유기화학 및 무기화학, 분자생물학 등이 발전함에 따라 우주의 탄생부터 계산이 불가능한 확률이 겹치고 겹치면서 지구라는 행성이 최초의 유기체가 탄생해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으로 진화를 해왔음이 밝혀졌습니다. 높은 온도와 방사능, 유해가스들이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수준까지 안정화된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과학은 최초의 유기체인 첫 번째 복제가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인 ‘원시 스프’의 재현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가장 진화된 유인원에서 현재의 인류 사이에 어떤 진화의 비밀이 있었는지도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신의 창조론은 여전히 유효한 상태입니다. 어쩌면 ‘원시 스프’의 재현에 성공하고, 유인원에서 인류로 비약했던 진화의 비밀을 푼다고 해도 신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글의 주제가 창조론과 진화론을 비교하며 무엇이 진실인지 가리는 것이 아니라 이에 관한 글은 시간이 되면 별도로 다루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을 믿던 간에 중요한 것은 인간이라는 종이 가진 이타적 본성에 있습니다. 인류학에서 밝혀진 것들을 참조하면,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유전자의 최적화와 최대화는 개별 유전자들이 이기적인 성질과 이타적인 성질을 동시에 지녔다는 점에서 둘 다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성질 때문에 인간은 보다 지적인 생명체로 진화할 수 있었고, 처한 환경에 따라 적자생존의 원리를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종으로서 이기적인 것에 치중하면 세상은 위험에 빠져들고 반대로 이타적인 것에 열중하면 세상은 행복해집니다. 삶의 필요와 욕구, 공존과 연대가 탐욕과 욕망, 독점과 무한경쟁으로 대체되면 최악의 세상인 신자유주의가 됩니다.

 

 

필자가 분장생물학이나 진화생물학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진화와 관련된 수십 권의 책을 읽으면서 내린 결론은 유전자 차원에서는 이기적인 성질이 중요하지만, 종이란 차원으로 넘어오면 이타적인 성질(새누리당 빼고)이 더욱 중요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몸만 해도 천조 개에 이르는 세포가 서로 협력하고 있기 때문에, 지적이며 영적인 활동까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전자의 이타성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진화의 결과입니다.

 

 

물론 대한민국을 말아먹고 있는 극좌와 극우들은 제외됨을 밝혀둡니다. 그들은 진화도 가끔은 역방향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살아 있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대한민국에서는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을 떠받드는 보수의 DNA가 최대화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사회경제적 평등에 기반한 다양한 자유를 지향하는 진보의 DNA는 최적화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셀 푸코에 따르면 국가란 개인화와 전체화의 두 가지 경향이 서로 충돌하고 반응하고 교차하는 곳입니다. 이 둘을 자유방임 시장경제 하에 통합시킨 신자유주의 통치가 일반화된 이후로는 모든 사회 환경이 사적 독점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보수우파(박근혜 정부 뒤에 자리한 시장자유주의 세력)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는데, 이는 자연의 법칙과 신의 섭리에서도 벗어난 탐욕의 결과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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