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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저와 책이 있는 풍경

리처드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 요약-4

 

 

8  폭발과 나선  

  

 

다윈은 생존과 존재를 위한 투쟁(생존경쟁)을 가장 강조했지만, 존재와 생존이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 목적이란 바로 번식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수컷의 장식이 정적인 암컷의 선호도의 영향으로 진화했다고 생각하지만, 피셔는 암컷의 선호가 수컷의 장식과 보조를 같이하며 진화한다고 생각했다. 

 

 

수컷은 암컷에 대해 매력적으로 보일 때 많은 것을 얻는다. 반면 암컷의 경우에는 확실한 수요가 있기 때문에, 수컷에 대해 매력적으로 보여도 그다지 이득이 없다.

 

 

유전자자 몸 안에 있어도 발현되지 않을 수 있다...암컷의 선호에 관해서는 유전자는 비록 암컷의 몸에서만 발현하지만 수컷의 몸에도 들어 있다. 따라서 수컷의 꼬리에 작용하는 유전자는 비록 암컷의 몸에서 발현되지 않아도 암컷의 몸 속에 들어 있다...수컷이든 암컷이든 모든 개체는 수컷에게 특정 성질을 가지게 한 유전자와 암컷에게 그와 완전히 똑 같은 성질을 가지게 한 유전자 양쪽을 모두 가질 가능성이 높다. 즉 수컷의 성질에 관여하는 유전자와 암컷에게 그 성질을 좋아하게 만드는 유전자는 개체군 속에 제멋대로 뒤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한데 연대해 있는 경향이 있다...교미가 가능한 여섯 마리의 수컷 중에서 단 한 마리의 수컷만이 큰 하렘을 차지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는 사회에서는 다수파에 속하는 암컷들이 좋아하는 방향을 추종해야만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에너지나 비행 효율과 같은 실용적인 비용을 능가하고 남을 정도로 크다.

 

 

그렇다면 최초에 다수파 암컷들에게 그런 선호도가 발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암컷의 대다수가 실용적인 최적값보다 짧거나, 또는 실용상의 최적값과 일치하는 길이의 꼬리를 좋아하게 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패션이 실용성과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물에 대한 답은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며, 또한 실제로 많은 종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수컷이 긴 꼬리를 가졌다는 이유로 선택될 때, 긴 꼬리에 관여하는 유전자만이 선택되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그 강한 연대 때문에 긴 꼬리를 좋아하는 유전자도 함께 선택된다. 다시 말해 암컷이 특정 길이의 꼬리를 가진 수컷을 선택하게 만드는 유전자는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유전자의) 복제를 선택하는 점이다. 이것은 자기 강화 과정의 본질적 요소이다. 한마디로 자동적으로 그들 자신을 유지시키는 동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단 진화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기 시작하면, 이 힘은 진화를 같은 방향으로 지속시키는 경향을 낳는다.

 

 

근연 개체에 대해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유전자가 자연선택에서 유리하게 되고, 그 이유는 오직 그것과 완전히 동일한 유전자의 복제가 그 개체의 몸에 존재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혈연관계라는 것은 유전자가 다른 개체의 몸에 있는 자신의 복제를 효과적으로 찾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단지 우연히 자신의 복제를 돕는 효과를 가지는 유전자가 어쩔 수 없이 개체군 가운데에서 증가하는 경향을 가질 뿐이다.

 

 

선택의 불일치가 0이라는 것은 두 종류의 서로 대립하는 선택이 완전히 상쇄되어 진화적 변화가 멈추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계를 평형 상태라고 말한다.) 분명 선택의 불일치가 클수록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실용 선택의 인력에 저항해서 암컷이 행사하는 진화적 인력이 강해진다. 여기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특정 시점의 선택의 불일치의 절대값이 아니라 선택의 불일치가 세대를 거치면서 변화한다는 사실이다...균형을 이룰 수 있는 점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따라서 세대 교체에 따라 불일치가 줄어드는 경향이 있는 조건에서 개체군은 가장 가까운 평형점에 낙착할 것이다.(부의 피드백)

 

 

가령 그 결과가 행운이든 불행이든, 우연한 사건을 통해 수컷의 수가 어떤 주기성을 띠고 임의적으로 변동하면서 그 시스템이 자주 교란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실용 선택과 성 선택의 결합을 통해 개체군은 수많은 평형점 중에서 가장 가까운 한 점으로 반드시 복귀할 것이다. 어쩌면 그 점은 이전과 동일한 평형점이 아니라 평형점을 나타내는 직선에서 조금 위쪽이거나 또는 조금 아래쪽에 위치한 다른 점일 것이다. 따라서 개체군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평형점의 직선을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현실에서는 직선이 한 점으로 축소되는 편이 경제적이다.

 

 

여러 가지 경향, 특히 실용적인 기술에서 나타나는 경향들은 경박한 유행과는 달리 거의 가치 판단을 둘러싼 논란의 여지없이 개선으로 인정된다...인간 생활에는, 뚜렷한 경향을 나타내면서, 어떠한 명백한 의미에서도 그 경향이 개선과 연결되지 않는 측면이 많이 있다.

 

 

6억년 이전의 과거를 알려주는 화석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경우가 극히 적다. 화석 기록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백은 실제로 오직 한 세대에서 일어난 돌발적인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는 대돌연변이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대돌연변이, 즉 큰 효과를 가지는 돌연변이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일어났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진화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이다. 다시 말하자면 대돌연변이가 특정한 종의 유전자 풀에 결합되어 있는지, 아니면 그 역으로 자연선택을 통해 항상 제거되는지의 여부이다.

대돌연변이의 잘 알려진 예로는 초파리의 촉각지가 있다. 이것은 DNA의 복사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며 실제의 돌연변이다.

 

 

어떤 식으로든 큰 폭의 조정이 이루어질 경우에는 상의 질이 향상될 가능성이 극히 작지만, 현미경 제작자나 사용자가 의도한 최소의 조정폭보다 미세한 조정이 이루어질 경우 개선될 확률은 거의 정확하게 2분의 1임은 거의 확실하다.

이제 움직임이 작으면 작을수록 향상이 이루어질 확률이 2분의 1이 되는 한편의 극단에 가까워지고, 움직임이 크면 클수록 향상이 이루어질 확률이 0이 되는 또 한편의 극단적인 경우에 가까워진다.

 

 

이 가정은 현미경이 비유에서 맡은 역할에서 비롯된다. 임의의 조정을 거치기 전의 현미경은 돌연변이를 일으킨 동물을 나타낸다. 또한 임의의 조정을 거치기 전의 현미경은 돌연변이를 일으킨 동물의 돌연변이를 일으키지 않은 정상적인 부모를 나타낸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점차 그 정도가 커지는 돌연변이를 생각하고 있다면 돌연변이가 커짐에 따라 점점 이익이 적어지는 점에 도달하며, 반대로 계속 그 크기가 감소하는 돌연변이를 생각하고 있다면 점차 돌연변이가 유리해질 수 있는 확률이 50퍼센트가 되는 점에 도달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 그것들이 진화적 변화의 토대가 될 것인지 여부에 대한 논의는 지금 생각하고 있는 돌연변이가 어느 정도  가에 대한 논의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실제로 발생하는 돌연변이 중 일부는 확실히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고, 더군다나 그 중 일부는 어떤 의미에서  돌연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확하게 진화 과정에 결합되었다는 것이 그 답이다.

 

 

도약 진화에 대한 반론으로써 복잡성 논의 DC8 개량형의 대돌연변이에 적용될 수 없는 이유는 거기에 관계되는 변화의 성질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전혀 대돌연변이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순진하게도 최종 산물인 성체만을 관찰하는 경우에만 대돌연변이로 보일 뿐이다. 배 발생의 과정을 살펴보면 배에 대한 명령에서 나타나는 아주 작은 변화가 성체가 되었을 때 외견상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미소돌연변이에 불과하다. 단속평형설은 가끔 도약 진화와 혼동을 일으킨다.

 

 

종의 기원이라는 문제에 대한 다윈의 답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하자면, 한 종이 다른 종에서 유래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생명의 계보를 나타내는 나무는 계속 가지를 뻗어 나가는 나무이다. 이 말은 복수의 현생 종을 추적해 들어가면 단일한 선조 종에 닿게 됨을 뜻한다.

 

 

단일한 선조를 가진다고 생각되는 어떤 종의 구성원들은 모두 서로 교잡이 가능하다. 어쨌든 많은 사람에게 단일 종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바로 그런 것이기에 종 분화가 어려운 문제처럼 보인다. 자연선택의 영향이든 우연의 영향이든 두 대륙의 동물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는 경향이 있다면 이제 더 이상 두 종이 서로 분리해서 완전히 다른 종이 되는 과정에 장벽으로 작용하지 않을 것이다.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한두 마리의 뒤쥐가 산맥 너머 저지에 도착...시간이 경과하면서 한쪽 개체군의 유전적 조성에서 발생한 변화는 번식을 통해 그 개체군 전체에 퍼져 나가지만 다른 개체군에게는 확산되지 않는다. 그러한 변화 중 일부는 자연선택에 따라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어떤 원인에 의해 유전적 변화가 일어났든 그러한 변화는 번식을 통해 각각의 개체군 내부로 확산되고 두 개체군 사이에서는 절대 확산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두 개체군은 유전적으로 분화되어 간다. 즉 점차 서로 다른 종이 되어 가는 것이다...몇몇은 그들의 선조 종이 살던 고향으로 돌아와 사촌의 자손들과 만난다면 그 유전적 구성이 완전히 분화된 상태여서 교잡이 불가능...잡종도 불임이 된다...자연선택은 양쪽 중 어느 한쪽의 개체가 상대의 종 또는 품종과 잡종을 만들려는 편애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에 상응하는 벌을 준다. 이것으로 자연선택은 산맥이라는 우연성의 개입과 함께 시작된 생식 격리의 과정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종 분화는 완성된다. 이제 한때 같은 종이었던 두 종이 존재하고 이 두 종은 서로 교잡하지 않고 같은 지역에 공존할 수 있게 되었다.

 

 

선조 중에서 자손 종으로의 이행이 급작스럽고 변덕스러운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단지 우리가 어떤 한 장소에서 나온 일련의 화석들을 관찰할 때 진화상의 모든 사건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진행 중인 사건, 다른 지역으로부터 새로운 종이 도래하는 과정을 보고 있는 것이다. 다윈은 화석의 불완전성 때문에 고민했지만, 일반적으로 진화는 우리가 대부분의 화석을 발견하는 곳과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의 이론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점진설의 주장은 각각의 세대가 이전 세대와 약간의 차이만을 가진다는 것이다...실제로 그들이나 그 밖의 단속론자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결국 다윈의 주장이라고 가정되는 진화 속도가 일정하다는 신념이다...단속론자들이 이야기하는 급격한 진화도 지질학적인 기준으로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수만 년이나 수십만 년이 걸린다.

 

단속평형론자들은 진화에 있어서의 도약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빠른 속도로 일어나는 진화의 에피소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단속론자들의 신념을 가장 정확하게 특징짓는다면 점진주의적이지만, 긴 기간의 평형 상태(진화적인 정체)가 빠르고 단계적인 변화들의 짧은 에피소드들로 단속된다.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물론 종래에 간과되었던 현상인 긴 정체기이다. 이 긴 정체기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설명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다윈 『종의 기원』제4판의 구절  많은 종은 일단 형성된 다음에는 결코 변화하지 않는다. 종이 변화하는 기간은 연수로 측정하기에는 무척 긴 기간이지만, 그 종이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기간에 비한다면 무척 짧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점진설 내에서도 (점진적인) 진화의 속도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다양한 신념을 구분할 수 있다.

 

 

선택적 육종을 수 세대에 걸쳐 진행시킬 경우, 이용 가능한 유전적 변이를 모두 써 버리게 되어 더 이상 사용할 수 있는 변이가 바닥이 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돌연변이가 나타날 대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우리가 선택적 육종을 할 때 항상 최초의 저항을 받는다는 사실은, 그 계통이 야생 상태에서 아무런 변화 없이 수 세대 동안 존속되어 왔다면, 변화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방향으로 향한 자연선택압이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종이 변화하지 않는 것은 그 상태(야생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개체가 변화하는 개체보다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단속론자가 다른 다윈주의 학파와 다른 점은 오직 한 가지, 즉 정체기를 적극적인 힘을 가진 무엇으로, 단순한 진화적 변화의 결여가 아니라 진화적 변화에 대한 능동적인 저항으로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어쩌면 이 사실이야말로 그들이 범한 오류의 핵심일 것이다...신의 창조는 도약이 최대한으로 이루어진 극단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영혼이 없는 점토에서 완전한 형태의 인간으로의 궁극적인 비약이다...다윈의 관점에서는, 자연선택에 따른 진화론의 핵심은 복잡한 적응의 존재를 기적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설명하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결사적으로 다윈주의를 믿지 않으려 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종교적인 이유에서 진화 그 자체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 부류는 진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부정할 이유는 없지만, 흔히 정치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 이유로 인해 다윈주의가 가지는 메커니즘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경우이다. 그 중에는 자연선택이라는 사고방식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냉혹하고 비정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자연선택을 임의성과 혼동한 나머지 자신들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더 나아가 다윈주의를 인종차별주의와 그 밖의 동의할 수 없는 부대 의미들을 내포한 사회다윈주의와 혼동하는 사람도 있다.

 

 

세 번째 부류에는, 대중매체라고 그들 스스로 부르는 그 속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포함된다. 어쩌면 기자들은 신문 잡지의 좋은 기삿거리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의 이론이 무너지기를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다윈주의는 이미 오래 전에 확립되어 체제가 정비된 이론이기 때문에 저널리스트들에게는 군침 도는 먹이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평판 높은 학자가 현재의 다윈주의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비판의 암시를 토해 놓으면, 결과적으로 그 사실은 열심히 과장되어 완전히 균형을 잃을 만큼 부풀려지게 마련이다...과학자가 현재의 다윈주의의 미묘한 의미에 대해 품고 있는 약간의 의혹을 조심스럽게 속삭이면, 원래 자신이 한 말이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이 왜곡되어 열심히 기다리고 있던 확성기에 의해 큰 소리로 울려 퍼지는 것을 들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