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몇 차례의 글을 통해 트럼프와 샌디스의 돌풍이 지속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었던 것은, 9.11사태, 이라크전쟁, 카트리나 피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경험하면서 미국 시민들이 자국의 실체에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21세기 초입을 강타한 이 네 가지 사건들은 예외국가이자 기축통화국으로 전세계를 파탄지경에 내모는 동안 유일제국 역시 얼마나 망가졌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유대인 고리대금업자들만 우주적 차원의 돈을 챙겼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의 패배로 미국 시민들이 잠시나마 디즈니월드식 제국(미국이란 나라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디즈니월드가 있다는 말로 대표되는)에서 벗어나는 각성의 움직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들의 각성은 60년대 말에서 70년대초까지 풍미했지만 약간의 인권신장만 이룬 채 소멸해버렸습니다. 레이건의 당선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평등의 가치는 종적을 감췄고 무한경쟁의 승자독식만 범람하면서 하위 99%의 삶은 상위 1%를 위한 희생양으로 전락했습니다. 전세계를 초토화시킨 유일제국의 신자유주의가 21세기에 들어서는 본토의 시민마저 삼켜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9.11사태에서 월가의 붕괴까지, 제국의 실상을 폭로한 모든 사건의 중심에는 아이비리그 출신들로 대표되는 지배엘리트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워싱턴DC의 메인스트리트, 금융의 천국인 월가, 보수화된 거대 양당, 새로운 귀족사회인 세습자본주의, 극단의 불평등을 양산한 시장근본주의, 민주주의가 적용되지 않는 군산복합체, 젠체주의적 경향의 인종차별,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허리우드와 디즈니왕국까지 제국의 핵심에는 아이비리그 출신들이 있습니다. 



유진 뎁스와 헨리 조지, 아이스너, 헬렌 켈러 등으로 대표되는 19세기의 사회주의 정치혁명을 주도한 인민당 열풍(중부의 8개주 석권했으나 거대양당의 합작에 의해 무너졌다) 이래, 무려 한 세기를 격해서 하위 99%가 주도한 두 번째 반란이 '월가를 점령하라'였습니다. 이때부터 샌더스의 돌풍이 씨앗을 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트럼프 돌풍을 이해하려면 스웨이트와 울드리지의 《라이트 네이션》과 글랜 백의 《글랜 백의 상식》, 프랭크 토마스의 《캔자스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와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등을 보라). 





모든 정치평론가들이 샌더스의 돌풍을 예상하지 못했지만, 필자처럼 제국의 허상을 파고든 사람이라면, 피케티 교수의 《21세기 자본》이 미국에서 열풍을 일으킨 것에 주목했을 것입니다. 모든 영역이 신자유주의에 점령된 나라인 한국에서처럼, 미국에서의 '피케티 열풍'은 '월가를 점령하라'의 후속편인 샌더스 돌풍(과 트럼프 광풍)의 전조를 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흑인 가면을 쓴 백인 대통령 오바마에 실망한 미국의 하위 99%가 자신의 이념적 성향에 따라 아이비리그로 대표되는 지배엘리트들의 독점에 반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만은 확실했습니다. 바우만과 클라인 등이 정확히 파고든 대로 아이비리그 출신의 흑인 대통령에 실망한 하위 99%가 각각의 이념적 성향에 따른 그들만의 선택과 정치혁명에 나설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했습니다. 



가장 많은 대의원이 걸려 있는 슈퍼 화요일이 3일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샌더스가 전국 단위의 여론조사에서 엘리트주의의 정화인 힐러리를 추월했고, 모든 공화당 후보들과의 가상대결에서도 승리한다는 결과가 나온 것도 샌더스의 돌풍이 일회성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거대양당의 엘리트주의를 사수하는 최후의 보루로써 슈퍼대의원의 방해가 남았지만, 샌더스의 돌풍이 55% 이상의 득표를 기록하면 대통령에 오를 수 있습니다.   



WASP(백인 앵글로색슨계 청교도의 후예)와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라는 미국의 주류들이 암살을 비롯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샌더스 돌풍을 잠재우려 하겠지만, 이전과 다른 샌더스 돌풍을 잠재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오바마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신냉전을 구축하는 등의 방법으로 힐러리를 노골적으로 지지(힐러리가 샌더스에 확실하게 앞서는 것이 외교국방 분야이기 때문)하는 것도 계속될 수 없습니다.     





슈퍼 화요일에 샌더스가 힐러리에 압승을 거둔다면 오바마의 선택은 힐러리 지지에서 샌더스의 런닝메이트를 자기 사람으로 채우는 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샌더스 열풍(과 트럼프 광풍)은 어떤 형태로든 '만악의 근원'으로서의 제국의 탐욕에 치명타를 입힐 것이며, 사망선고를 받고도 인공호흡기(무제한 양적완화와 환율전쟁)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종말도 앞당길 것입니다.   



이명박근혜의 8년이 신자유주의로 옷을 갈아입은 친일수구세력의 역주행이었다면, 노무현의 친구이자 동반자인 문재인의 부활과 더불어민주당의 돌풍이 지향해야 할 세상이란 너무나 분명합니다. 노무현의 꿈이었던 진보적 자유주의에서 한 발 더 좌측으로 옮기기만 하면 샌더스가 표방하고 있는 사회적 민주주의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만이 승자독식의 자유방임을 찬양하는 뉴라이트와 조중동식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근본주의의 조합에서 벗어나 적극적이고 평등하며 공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샌더스 열풍은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 때문에 보수당과의 차별성이 사라진 영국 노동당 경선에서 전통의 마르크스주의자인 제레미 코빈이 당선된 것과 합쳐)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며, 그 중심에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행동하는 양심으로 표출되는 정치혁명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희망을 잃지 않고 '거대한 전환'을 이루고 말겠다는 자유의지를 표로 전환할 때 위대한 국가의 정치혁명이 실현될 것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P.S.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이 영국을 얼마나 망가뜨렸는지 확인하려면 대니얼 돌링의 《불의란 무엇인가》와 자크 아탈리의 《인간적인 길》을 참조하면 좋을 것입니다. 





  1. 참교육 2016.02.11 04:06 신고

    소외계층을 일관되게 대변하는 그의 철학이 현실화되는 기적을 기대해 봅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6.02.11 08:31 신고

    슈퍼 화요일까지 기대해 보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6.02.11 14:01 신고

      아마 대선 마지막까지 치열한 경쟁이 펼쳐질 것입니다.
      샌더스 대세론이 조금만 더 커지면 손쉬운 완승도 가능하지만....
      미국의 엘리트들이 대반격에 나서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3. 耽讀 2016.02.11 08:40 신고

    깨어있는 시민, 행동하는 양심 그리고 풀뿌리 민주주의가 혁명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샌더스 백악관에 입성하면 자본주의 본령 미국은 어떻게 변할까요?

    • 늙은도령 2016.02.11 14:01 신고

      최소한 만악의 근원에서는 벗어납니다.
      미국이 변하면 전 세계가 변하니까요.

  4. 2016.02.11 13:12

    비밀댓글입니다

    • 늙은도령 2016.02.11 14:02 신고

      그런 일이 대선 마지막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트럼프의 승리가 확실해지면 상대는 샌더스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흥미진진한 대선의 예비경선이 될 것 같습니다.

  5. 반골 2016.02.12 23:16

    남의 나라 대선을 이렇게 재밌있고 호기심으로 본건 처음입니다~

  6. 2016.02.15 12:13

    비밀댓글입니다

    • 늙은도령 2016.02.15 14:58 신고

      네, 그리 해주시면 제가 더 고맙지요.
      저는 제 지식을 최대한 나누는 것이 목표인 까닭에 많은 분들에게 제가 배우고 읽고 성찰한 내용들을 알려지는 것에 대찬성입니다.
      정말 유대인이 문제입니다.
      그들의 고리대금업이 도를 넘어 인류를 파멸로 몰고 있습니다.
      미 연준과 월가를 고리로 한 그들의 지배력은 이제 신의 영역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의 야만적 세계 지배에 저항하려면 무조건 내수시장을 키워야 하고 미국 유대자본에서 자유로운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전세계의 빚에서 나오는 이자만 생각헤도 끔찍합니다.
      그 이장의 대부분이 유대자본으로 들어가니 하위 99%가 죽어라 노력해도 돈 버는 것은 0.01%의 유대자본입니다.
      이것을 타파하려면 미국부터 변해야 하는데, 샌더스가 대통령이 돼 변화의 일단이라도 만들었으면 합니다.
      반갑습니다.

  7. 미시 2016.02.15 18:14

    이렇게 좋은 글을 미국의 많은 친구들과 공유할 수있게 허락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 사이트와 일맥상통하는점이 너무나 좋습니다
    좋을 글도 예를 갖추어 나눈다는 것과
    조개속의 돌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진주가 될 뜻합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 늙은도령 2016.02.15 18:52 신고

      아닙니다, 모두가 좋은 세상에서 지금보다 잘살 권리가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데는 10~20%의 사람만 깨어서 활동하면 바뀝니다.
      지금까지 모든 혁명은 10% 내외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작금의 상황은 10% 정도에 이르렀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나옵니다.
      특히 미국이란 전체주의적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샌더스 돌풍이 일어난 것이 이를 입증해줍니다.
      샌더스의 돌풍은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혁명입니다.
      미국이 변해야 세상이 변하는데 1%의 지배엘리트에 맞서온 샌더스의 돌풍이 젊은층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것은 세계사를 바꿀 미증유의 혁명입니다.
      그가 대선 막바지까지 슈퍼대의원의 마음까지 돌릴 수 있다면 혁명은 성공에 이릅니다.
      슈퍼화요일에 부디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미우나 고우나 미국이 변해야 합니다.
      중국은 자체의 문제가 너무 크기에 절대로 세계를 제패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20년 안에 인구문제에 발목이 잡힐 것인데, 이번의 경착륙은 그것을 10년 정도 앞당겼습니다.
      그러니 미국만 변하면 됩니다.



올해의 최저임금은 6030원이다. 인상률이 정해졌을 때, 노사 양측에서 그런 데로 적정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고 하고, 쓰레기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중소기업이 인상률이 너무 높아서 죽을 맛이라고 하소연을 한단다. 그렇다면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최저임금의 적정선은 없는 것일까? 있다고 해도 최저임금제가 도입된 이래 노동자들의 삶은 나아졌을까? 최저임금이 올라가면 모든 근로자의 연봉도 올라가는 것일까?

 

 



우리는 최저임금과 관련해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기업(특히 중소기업) 측에서는 최저임금이 올라가면 직원 전체의 월급이 올라가 인건비 부담이 경영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고 울상이다. 노동자 측에서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삶을 최저임금이 보장하지 못한다고 울상이다. 정작 최저임금의 인상에 따라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중소기업과 영세자영업 및 저임금, 임시직 노동자들의 요구는 배제된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최저임금에 적정선은 없는 것일까? 최저임금의 적정선을 판정하는 기준들이 공정하고 합리적인가? 따라서 이번 인상률이 적정한 것일까, 아니면 턱없이 부족한 것일까? 아르바이트나 일용직 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이 제대로 적용될까? 인건비에 부담을 느낀 중소기업은 외국인노동자를 더 많이 쓰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신자유주의적 체제가 굳건히 자리 잡은 나라이다. 헌데 우리가 매일같이 떠들어대는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필자가 여러 글에서 밝혔듯이 부정적 세계화의 주범인 신자유주의가 79년과 80년에 걸쳐 영국과 미국에서 대처와 레이건이 당선되면서 급속도로 퍼진 경제 사조인가?

 

 

단언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역사와 실체, 변화와 파생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신자유주의가 일상화된 세상에서 무한경쟁을 일상화하는 신자유주의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즉 태어나 보니까 전통이나 관습, 일상의 환경처럼 신자유주의는 이미 주어져 있는 어떤 것이었다. 그래서 적응하면 그만일 뿐 알고자 하는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위 88%로 대표되는 우리는 매일같이 당하고 휘둘리며, 저들이 촘촘하게 쳐놓은 여러 개의 그물망(통치 메커니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최저임금도 그들이 쳐놓은 그물망 중에 하나이며, 각자도생이라는 자발적 노예를 대량으로 만드는 최고의 수단 중 하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최저임금이 생각보다 많이 올라도 그것 또한 시장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의 하나일 뿐이다. 



이 3권의 책만 읽어도 신자유주의의 학문적 이해가 정립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자유주의 경제학(자유방임을 모토로 하는 중농주의 경제학으로 고전파 경제학이라고 한다)을 바탕으로 새롭게 구성된 독일의 질서자유주의에 그 원형이 있다. ‘가능한 한 최대의 경쟁을 그러나 최소한의 계획’을 모토로 하는 질서자유주의는 적극적 자유주의, 자유방임적 시장경제, 권위적인 정부가 방해되는 것들을 가지 쳐주는 선별적 개입의 자유주의라고도 한다.

 

 

최근의 신자유주의는 미국의 무정부적 자본주의의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가 말하는 신자유주의는 경제학의 산물이 아니라, 정치경제학에서 분리된 자유주의 경제학이 정치의 내부에 자리하면서 탄생한 통치술의 총합이다. 신자유주의는 경쟁(가격이 핵심)으로서의 자유시장 메커니즘을 국가의 모든 부분에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교육과 결혼, 가족 같은 지극히 사적인 것들마저 시장경제의 종속변수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시장경제화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은 절대 시장경제라는 존재의 기초를 건드리지 않는다. 그들의 목표는 시장경제의 주체인 기업이 시장경제를 통해 영원히 사업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들은 기업 위주의 시장경제가 잘 돌아가도록 교환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시장 메커니즘을 가격을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어 경쟁을 극대화했다.

 

 

이를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국가의 권력과 법률, 선별적 규제를 동원해 시장경제를 둘러싼 환경과 사회에 개입해서 시장경제가 가장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조정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자유방임이 아닌 적극적 자유주의나 개입적 자유주의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자유주의는 세상을 시장경제화해서 상위 1%에게 하위 99%의 부를 이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권위적인 통치권력이다.   

 

 

신자유주의는 미래의 노동자이자 소비자로서 아이들을 교육하고, 시장에서 떨어져나간 사람들을 재교육해서 경쟁을 확장하고, 법률과 규율 및 규범을 통해 모든 인간을 시장경제에 종속된 존재로 만든다. 시장경제에서 탈락한 자들은 경쟁의 법칙에 따라 굶어죽을 수도 있다. 경쟁력이란 자신의 책임하에 갖춰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패는 개인의 책임일 뿐이며 공짜 점심은 없다.  

 




결국 신자유주의는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경제의 주축인 기업(그중에서도 오너와 최겨영영진, 대주주들로 구성된 사측)을 위해 정부의 개입을 최대화하고 최적화하는 궁극의 권력이다. 가격과 경쟁이라는 두 개의 메커니즘을 통해 기업 중심의 시장경제를 최대한 활성화하고, 경쟁 메커니즘을 교란하는 독점기업의 출현을 제한하고 해체(IMF 때 한국의 재벌을 해체하려고 했던 이유)하며, 필요하다면 최저임금을 올려서라도 시장경제가 잘 돌아가도록 만든다. 최종적으로는 이 모든 돈들이 상위 1%에게 흘러들어가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는 개인을 천부인권을 지닌 시민이 아니라, 기업적 입장에서 노동시장에서 거래되는 경쟁력에 따라 가격이 매겨지는 경제적 착취의 대상으로 본다. 각각의 개인들이 자신의 가치를 높여 경쟁력을 지닌 채 시장경제 안으로 들어오도록 만든다. 개인은 채용되기 위해 인적자본(능력자본)으로서의 경쟁력 제고에 전념해야 하며, 이것 때문에 선행교육과 스펙의 중무장이란 무한경쟁의 포로로 전락한다.

 

 

신자유주의가 부모나 가족, 사회나 정부가 개인에 투자하는 것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장려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기업도 시장경제의 주체이지만,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에서 도태하지 않도록 더 높은 경쟁력을 창출해야 한다. 그에 따라 임금이 올라가거나 고용이 안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기업과 개인에게 끊임없는 혁신이 주문되며, 기업의 경쟁력이 올라가는 만큼 그에 따라 예비 노동자와 학생들이 갖추어야 할 조건들도 계속해서 올라간다. 

 

 

가격 대비 경쟁력에서 뒤처지는 기업은 도태되고, 그 자리에는 다른 기업이 들어서며, 한 기업 내에서도 경쟁력이 떨어지는 부서는 구조조정의 칼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상시적 구조조정은 이런 과정을 통해 정당화된다. 신자유주의가 위험을 등지고 사는 삶, 위험과 함께 하는 삶을 장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자신에 투자해야 하고 창업도 마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잘린 노동자와 노동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에 대한 관리도 국민의 세금을 독점하는 정부가 맡아야 한다. 그들이 시장경제에 해가 되지 않도록 죽을 때까지 무한경쟁의 시장경제 메커니즘에 포획될 수 있도록 각종 부조와 복지를 제공해야 한다. 소비가 줄어드는 것은 어떻게든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시장경제에 해가 된다면 부조와 복지비용의 관리를 통해 도태시켜도 된다.

 

 

신자유주의는 시장경제의 활성화가 목적이기 때문에 생필품을 구입하던, 대박이나 창업 및 안정적인 정규직을 꿈꾸며 공부를 하던, 다시 시장경제에 뛰어들기 위해 병을 고치던, 시장경제를 유지하고 확장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기본소득제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 소비가 늘어나는 것은 그들에게 최상의 결과를 창출한다. 좌파의 논리라도 시장경제에 도움이 되면 얼마든지 수용한다(좌파 신자유주의의 기원). 

 

 

                                                     

 

세계화를 추진하는 이유도 시장경제의 활성화 때문이다. 가격과 경쟁의 메커니즘에서 도태되는 분야에는 적정한 수준의 보조금도 묵인한다. 그것이 기업이 주도하는 시장경제의 틀을 해치지 않는다면 품목별, 국가별 예외조항도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 공황이 도래하던, 경기침체가 길어지던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이 허용되는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라는 기본 틀만 유지하면 된다.

 

 

이렇게 지구를 상위 1%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업 위주의 시장경제 체제로 만드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목표다. 전 지구적 시장을 구축하는 부정적 세계화가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단 하나의 목표다. 인구 조절을 위해 공중위생의 확대도 필요하고, 각종 자선사업도 장려된다. 기업 위주의 시장경제만 유지될 수 있다면, 이익의 일시적인 감소도 감내할 수 있다. 판돈을 키우는 일은 너무나 쉬워서 그것 때문에 고민할 이유란 없다(영원히 지속되는 경제위기란 없다).

 

 

임금의 평균값으로 계산하던, 중위소득을 기준으로 계산하던 최저임금 또한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모든 노동자들을 시장경제 하에 두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다윈의 진화론과 뉴턴의 역학, 정부의 개입과 언론의 동원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시장경제는 자기조정 능력을 획득할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영원한 지배력을 발휘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일정 시대를 풍미한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공동체나 조직, 사회나 국가에 의해 자유라는 것이 출현하는 순간부터 계속해서 진화해온 시장경제의 총화이자 통치의 기술이다. 그래서 좌파 신자유주의도 가능하며, 우파 신자유주의도 가능하다. 인류의 삶 속에서 시장경제가 절대적 요소라면 우리는 신자유주의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다. 시장경제를 지탱하는 신용시스템이 2008년 금융위기의 수준을 넘어 완전히 무너지면 모를까?

 

 

하지만 최종대부자로서의 국가가 존재하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신자유주의에 벗어나려면 기차에서 뛰어내리던지, 기차에 탑승하고 있던지, 아니면 기차를 멈추던지 세 개의 선택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파헤친 푸코가 말년에 그리스철학의 핵심주제인 자기배려라는 가장 근원적인 성찰로 돌아선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뛰어내리려 했던 것이다.  

 

 

내가 시장경제의 부속품이라면, 그런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자기배려에 최대한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내가 정말로 소중하다면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내는 모든 것들과 거리를 두고, 최소한의 연결만 유지해야 한다. 시장경제에 속하지 않은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최저임금으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최저임금이란 시장경제에 참가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최하의 마지노선으로 주어지는 생존임금이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신자유주의는 지구라는 차원에서 자원의 한계와 자연의 반격이라는 것을 고려하지 못했다. 그들이 말한 무한한 성장이란 끝없는 퇴행이었으며, 시장경제마저 위협하는 최악의 메커니즘이었다. 생산과 소비의 확대라는 면에서 전체 인구로서의 인류를 관리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정보통신기술과 자동화 등의 확장으로 소비를 위축시키는 고용없는 성장이 일반화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구온난화까지 급진성을 띠려고 한다. 이런 총체적 위험 때문에 최저임금으로 대표되는 생존임금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없는 수준에서 한참 부족하게 됐다. 신자유주의는 실패했지만 시장경제는 유지돼야 하기 때문에 인간이 생존선 근처에서 각자도생을 위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해야 한다. 최저임금 속에 숨어 있는 첫 번째 진실이 바로 이것이다(최저임금에 숨어 있는 두 번째 진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생명마루한의원 2016.01.23 18:38 신고

    잘읽고갑니다..^^

  2. 수호자 2016.01.24 15:58

    에듀윌 이곳저곳에 과잉광고 정말 지긋지긋하다... 대한민국을 온통 시험공화국으로 만들려하나... 광고를 하든 안하든 하고 싶은 사람은 찾아서 하고 하기싫은 찾아줘도 사람은 안한다... 제발 좀 적당히 해라...

    • 늙은도령 2016.01.24 16:51 신고

      에고... 학생들이 불쌍해요.
      한국은 학생들과 청춘들에게 지옥이 됐습니다.
      광고는 제가 책을 구입하는 비용으로 쓰는 지라...
      지금까지 책 구입비만 2000만원을 돌파해서 더 이상 제 재정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양해바랍니다.

  3. 돌고래 2016.01.25 20:44

    광고 있어도 좋아요..이렇게 좋은 글만 볼 수 있다연요^^

    • 늙은도령 2016.01.25 21:24 신고

      감사합니다.
      오늘 새로 구입한 책 12권이 도착했습니다.
      광고 덕분에 원하는 책들을 마음껏 살 수 있어서 천만다행입니다.

  4. 새노래 2016.02.05 00:19

    괜한 트집잡는놈들 하는 말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저런놈은 정의도 없고, 소신도 없는 놈입니다, 오로지 주인이 던져주는 부스러기만 바라보고 사는 놈이라 신경 접어도 됩니다, 그 많은 책을 사는 비용도 비용이지만 그 많은 책을 읽고 소화 시키려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소모가 되는지 썩은 놈들은 모릅니다, 선생님은 신경 접어시고 좋은 글에만 집중 하십시요, 항상 읽어 보고 저의 판단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항상 고맙게 생각 하고 있습니다, 항상 건강 하시고 건필 하시기를 바랍니다, ....화이팅... 포맷이 필요한 대한민국에 꼭 필요 하신분이십니다,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을 당하고 반역자를 처단 할때 지식인과 언론인들을 먼저 했다지요.. 그들은 우리는 가만히 있었는데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느냐고 불평 불만이 많을때.... " 지식인과 언론인은 국가에서 가장 투자가 많이 되는 인재들이다, 그렇게 국가 혜택을 많이 본자들이 국가 위기 상태때 "침묵" 한 그것이 죄다,.... 이 얼마나 멋진 말입니다, 그리스도 국영언론이 해체되고 전 직원이 해고되는 사태가 있었죠.... 가만히 있으면 안됩니다, 침묵은 나의 목을 죄어 올 뿐입니다, 이럴때 가만히 있다고 침묵이 금이 되는건 아니죠....

    • 늙은도령 2016.02.05 02:36 신고

      그럼요, 지식인들은 모름지기 비판을 멈추면 안 됩니다.
      비판을 멈춘 지식은 죽은 자나 다를 것 없습니다.
      건강에 신경쓸 게요.



질서를 바라는 것은 풀 수 없는 그리고 충족될 수 없는 목마름입니다. 이 욕망은 각자의 현실이 무질서한 것처럼 여겨지게 만들어서 무질서 상태를 고치도록 요구합니다. 이런 까닭에 저는 감시가 결코 활력을 다하거나 일감이 없어질까 두려월 필요가 없는 얼마 안 되는 산업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ㅡ 지그문트 바우만, 데이비드 라이언 대담 《친애하는 빅브라더》에서 인용 




9.11테러가 불러온 변화와 비교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세월호참사는 가장 신자유주의적인 나라 대한민국에서도 감시와 안전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을 견인하며 민주주의를 작동불능의 상태까지 위축시키고 있습니다. 왜 위험사회가 됐는가에 대한 질문은 사라졌고, 그 때문에 세월호참사의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대신.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24시간 감시체제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민은 자신의 프라이버시(구글의 회장인 슈미트는 프라이버시 자체가 없는 세상이 됐다고 했지만)와 기본권조차 포기한 채 새롭게 등장한 감시사회의 안전담론에 자발적 복종을 보여주는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실제로 시민의 안전을 높이기보다는 권력의 통제를 강화하는데 유용한 감시 장비들의 확대 설치를 반대하는 여론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습니다. 체제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것에 적응해서 남들보다 조금 낫게 살아남으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회의 질서와 개인의 안전을 중시하는 안전담론의 강화는 사회의 보수화와 인식의 보수화를 동시에 강화합니다. 안전을 높이기 위해 질서를 강화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정치‧경제‧사회적 자유와 충돌하기 일쑤여서 가진 것을 지키고 늘려야 하는 기득권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사회와 인식의 보수화를 추동합니다. 



이런 경향이 강화되면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참극인 세월호참사가 지겨운 것으로 변질되고, 가끔씩 일어나는 해상교통사고로 치부되기에 이르며, 자식의 목숨을 팔아 한몫 챙긴 유가족들의 생떼가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색깔론까지 발전합니다. 250명의 아이들을 포함해 304명의 죽음이 안타깝지만, 내 자식과 부모형제들이 아니어서 더 이상 엮이는 것조차 불편하게 됩니다.  



 


OECD 가입국 중 부의 불평등과 사회복지지출이 가장 나쁜 대한민국은 사회갈등지수도 최상위에 위치합니다. 여기에 분단 현실을 악용하는 현 집권세력과 보수언론들의 안보상업주의가 더해지면 안전에 대한 욕구는 민주주의와 시민의 기본권이 제한되는 것을 감수할 정도로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울리히 벡이 말했던 《위험사회》의 출현이 인류가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획득한 적극적 자유(제도와 법으로 보장되는 자유, 내 마음대로 살게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소극적 자유인 자유방임과 구별된다)와 민주주의마저 제한하기에 이릅니다



사회와 인식의 보수화를 강화하는 이런 추세가 박근혜 정부 내내 이어진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시민의 기본권도 돌이길 수 없는 지경까지 후퇴할 것은, 집회마저도 정부의 허가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작금의 현실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월호참사 1주기를 맞아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집회를 폭력집회로 규정해 무차별적인 진압과 체포를 자행하는 것도 질서 유지와 공공의 안녕을 내세운 안전담론의 득세가 어디까지 왔는지 말해줍니다.



특히 ‘군‧산‧미디어‧연예복합체’의 일원인 언론(특히 쓰레기 방송들)은 선정적이고 폭력적이며 반인륜적인 사건·사고 뉴스를 집중보도함으로써 위험과 공포를 극대화합니다. 범죄율의 증가나 하락 같은 것은 보도하지 않고, 왜 이런 사건사고가 일어나는지도 보도하지 않고, 오직 위험과 공포만 부추깁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빌붙어 최대 이익을 거두면 그만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입니다. 





온갖 오보를 쏟아내며 세월호가 침몰하는 것을 생중계한 언론들이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보다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선회한 것도 모자라, 유족을 체제를 전복하려는 세력으로 몰고가는 짓거리도 서슴지 않습니다. 이런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의 보도를 통해 자사의 매출을 극대화하면 만사 OK라는 것입니다. 모든 뉴스에 오늘의 사건·사고가 갈수록 늘어나는 것도, 보도의 선정성과 폭력성이 갈수록 심화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9.11테러 이후의 미국이 민주주의와 헌법적 가치마저 제한하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진 것처럼, 세월호참사 이후의 대한민국이 비슷한 방식으로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작금의 상황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렇게 됐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나칠 정도로 안전담론에 매몰돼 민주주의와 기본권 등이 축소되고 침해받는 것까지 감수하게 됐을 때, 감시체제의 강화는 지배엘리트의 이익만 무한대로 늘려줍니다.



최소 250명에 이르는 어린 학생들이 체제와 어른들의 잘못으로 죽어갔음에도 세월호참사가 지겹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일베 같은 극우주의자들이 계속해서 설칠 수 있는 것도, 이들을 지지하는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끊이지 않는 것도, 세월호집회의 폭력성만 부각하는 쓰레기 방송들이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것도, 테러와의 전쟁이나 안전담론에 매몰된 사회와 인식의 보수화가 자발적 복종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작용들입니다.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21세기가 위험사회와 감시사회, 정신이상사회가 된 것은 상위 1%에 속하는 지배엘리트와 슈퍼리치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세월호참사도 이런 극단의 불평등 때문에 발생한 위험들이 하위 99%에게 전가된 참극의 전형입니다. 이익은 상위 1%에 집중되지만, 위험은 하위 99%에 전가되는 ‘리스크 대이동’이 세월호참사의 숨어있는 본질이며, 이 땅의 기득권들이 깨놓고 진실규명을 방해하는 이유입니다.



부와 위험의 불평등이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고 주장하는 ‘군‧산‧미디어‧연예복합체’의 논리는 허구로 가득한 퇴행적 현상의 전 지구적 차원의 지적 사기입니다. 디지털 빅브라더의 등장은 위험사회의 폐해를 최소화할 것이라는 주장도 어떤 경험적 증거가 제시된 적도 없으며, 세월호참사가 일어났을 때 수없이 많은 안전시스템들이 무용지물이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는 그저 편하게 살다 편하게 죽고 싶을 뿐입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자발적 복종은 진실을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더욱 가난해지고 위험해진다고 해도 진실을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세월호참사에는 이 모든 것들이 집약돼 있지만, 진실규명의 노력을 외면하면서 자발적 복종에 길들여져 갑니다. 어쨌든 자신은 세월호에 타지 않았고, 수장되지 않았으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어제 같은 오늘을 살고, 오늘 같은 내일이라도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15년 전에 노회찬이 '그래서 살림 좀 나아지셨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이, 지금에는 자발적 복종을 거부하는 대학생들이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묻는 것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질문의 변화와 차이 만큼 하위 99%의 삶은 퇴행했고, 우리를 먹여살리는 유일한 체제인 민주주의는 고사 직전에 이른 것입니다. 돌아보면 우리가 애써 외면하는 과정에 흘린 것들로 즐비합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술맛을 알아? 2016.01.17 01:57

    김무성이 인재영입에 대해서 소홀하다는 뉴스(김무성은 사람가지고 쇼하고 싶지가 않답니다)가 뜨더군요. 2007년인가요 열우당 깨질때가. . .작금의 탈당러시를 보여주고 있는 핵심삐끼들이 그때와 다르지 않고. . .김무성은 뜬금없이 180석도 가능하다 떠들고. . .친박과 친이계는 공천권의 헤게모니를 두고 싸우고 있고. . .쥐새끼는 윤여준과 비서관들을 지원하고. . .더민주 작살내면서 뛰쳐나오는 개새들과 새눌당 공천 학살자(친이계)들이 국민당에 합류한다면. . .또다시 이런 참극이 벌어지면 안되겠지만 저들의 민낯을 이미 겪은지라 참으로 걱정이 됩니다. . .저의 기우이길 바랄 뿐입니다.
    건강 챙겨야 하시는분이 일찍 주무시지요.
    새나라의 어린이가 되어야 미래를 볼수 있지 얗겠읍니까 ㅎ~

    • 늙은도령 2016.01.17 02:54 신고

      안철수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고 있으니 이 상태로 가도 된다는 것이지요.
      안철수는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표를 얻을 텐데, 그런 다음에 새누리당과 연정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새누리당은 표정관리 중입니다.

  2. 2016.01.17 09:21

    비밀댓글입니다

    • 늙은도령 2016.01.17 16:26 신고

      저도 인터넷으로 구입합니다.
      판매수를 확인할 수 없지만 일년에 몇 백 권만 팔리는 책들도 있어서...
      절판된 것도 많고, 오랜 시간 기다려야 중고책이라도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구입하지 못한 것이 너무 많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3. 공수래공수거 2016.01.18 09:04 신고

    해상교통사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한 이 나라는 더 이상
    발전할수 없는 나라입니다

  4. 편부가정 2016.01.28 17:22 신고

    늙도님. 반갑습니다. 자주 늙도님 티스토리 와서 보고 가곤 합니다.
    혹시 페이스북은 안 하시는지요? 페이스북에서도 소식 좀 듣고 싶습니다. ^^
    아래는 혹시나 해서 올린 제 URL입니다.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8200866904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만 더민주가 집권하는 목표가 성립 안된다면
    저는 그냥 두 아이 데리고 핀란드 시민권 어떻게든 얻어보려 합니다. 그래도 헬조선에 비하면
    탄압도 없고 청년 등지지도 않는 나라임은 확실하니까요...

  5. 늙은도령 2016.01.28 18:13 신고

    개표조작만 없으면 이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얼마 못 갑니다.
    핀란드가 최상의 국가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쪽도 청년실업이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총선보다는 대선이 더 중요합니다.
    문재인이 노무현 못지않은 거인으로 올라섰기에 조금만 더 지켜보시죠.

 

 

이기주의는 나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남에게는 피해가 되는 것을 하거나, 나만 이익에 합류하지만 남은 합류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아무 일도 안하고 열매만 따먹는 무임승차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극단에 이르면 자유방임과 약육강식, 거짓말의 향연 등의 생지옥이 펼쳐집니다. 극도의 혼란 속에서 부와 권력, 법과 기회를 독점하는 승자와 강자에게만 이익이 돌아가는 신자유주의가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게 됩니다.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는 역사적 경험치는 이런 이기주의가 정치의 영역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되는 것을 말합니다. 보수란 단어의 뜻대로 현재의 질서와 체제, 다시 말해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기에 이익의 독점이 가능해집니다. 먹을거리는 넘쳐나는데 혼자서 다 먹지 못하니 구성원들끼리 어느 정도는 나눠가져야 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이기주의가 작동합니다. 당연히 더 가지기 위한 부패와 비리가 난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보수는 사회경제적 열매를 따먹을 수 있는 유리한 기득권에 속하기 때문에, 더 가지려면 '파이부터 키우자'라는 생각을 공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밖에서 보면 당장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은 사기꾼집단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늘리기 위한 담합에는 놀라울 정도의 결속을 보여줍니다. 어차피 담합의 결과인 정치경제적 이익은 그들끼리만 나누기 때문에 손해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보기에 넘칠 만큼 가진 것이 많은 보수를 밀어줘야 식탁에 떨어질 부스러기라도 얻을 수 있을 것 같고, 자신과 그들을 그런 방식으로 연결시킴으로써 상대적 박탈감을 정치적 승리(개인적으로 볼 때, 결과는 가난의 지속이지만)로 대체하려고 합니다. 상대적 박탈감은 절대적 박탈감과 달라서 강한 자에게 자신을 동일시시킴으로서 박탈감의 탈출구를 진보 진영이 입게 될 피해로 대체함으로써 상대적 우월감을 만끽합니다, 어버이연합이나 엄마부대 등처럼. 

 

 

 

 

개인주의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상황에서 나의 이익을 취하는 것입니다. 내 행동으로 인해 집단 전체의 이익이 늘어나야 하고, 그 이익의 최대수혜자가 가장 가난한 사람이어야 하고, 내가 맨 꼭대기에 있는 상류층이라면, 가장 적은 이익을 취해야 한다는 것에도 동의합니다. 문제는 이익의 배분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리고, 개별적인 차이가 반영되지 못합니다.   

 

 

진보가 분열로 망한다'는 속설도 어떻게 보면 여기에 기인합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 속도에 비해 부의 재분배를 이루는 과정이 너무 느리게 이루어지고, 울리힉 벡이 《위험사회》에서 설파했듯 성장의 부작용인 위험의 증가와 비대칭적 재분배(빈곤층이 더 많은 위험에 직면)가 너무나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진보가 대변해야 할 대상이 끝없이 늘어납니다. 현실적으로 진보가 해결해야 할 성장과 발전의 폐해에 대한 우선순위가 관점에 따라 빠른 속도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진보는 어쩔 수 없이 분열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브레이크가 없는 성장과 발전은 곳곳에 새로운 빈곤층과 새로운 종류의 피해자들을 양산합니다. 이들을 정치적으로 대변해야 할 진보 진영으로서는 어떤 것에 시급성을 두거나 가중치를 두느냐에 따라 분열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과정이 외부에서 보면 권력투쟁의 산물로 보이고,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속설이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네그리와 하트가 신자유주의적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한 《다중》에서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는 네트워크식 이합집산이 자유롭지만, 큰 틀에서 가치를 공유하는 벌떼 같은 다중'을 21세기의 진보로 제시했습니다. 적대적 분열이 아닌, 푸코식으로 말하면, 제국적 권력과의 투쟁의 지평선과 저항의 지점들을 최대한 넓혀서 숫적으로 소수인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21세기 게릴라전(소요문화제, 축제 같은 집회 등)을 개념화했습니다. 

 

 

 

 

즉, 분열로 망한다는 진보의 속성을 인터넷과 SNS, 플래시 몹 같은 디지털 시대의 방법들에 접목시켜 '또다른 세상이 가능하며, 지구 차원에서 생각하고 지역과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것으로 승화시킴으로써, 부정적 세계화에 대항하는 다중으로서의 진보를 역설했습니다. 필자는 야당의 분열이 이런 것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가득하지만, 비주류 탈당파에서는 이런 업그레이드 된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문 대표의 사퇴 이외에는 답이 없다고 하는 것은 미래권력과 직결되는 공천권을 둘러싼 헤게모니 싸움(그람시가 《옥중서고 1,2》에서 말한 헤게모니 싸움은 보수우파와 하는 것이지 진보좌파 내부에서 하라는 것이 아니다)에 불과할 뿐, 진보정당이 대변해야 할 다중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피해를 전제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정치적 이기주의자이자 호남민심을 이용해 정치적 이득을 챙기려는 엘리트화된(귀족적 성격이 강한) 기득권입니다.

 

 

문재인 대표에게 힘을 실어줘야 할 이유는 너무나 많습니다. 정의당과 노동당, 녹색당 같은 진보정당과 함께 새정치민주연합의 당원가입이 30, 40, 50만으로 계속해서 이어져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의 차이를 정확히 알면 탈당파들의 본질과 혁신의 대상이 보입니다. 야권의 통합도 중요하지만, 야합이 되지 않으려면 정치철학의 화학적인 결합이 우선돼야 합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객관식 2015.12.25 14:40 신고

    글 잘 읽어보고 갑니다.

  2. 친일파숙청 2015.12.25 16:22

    개소리네요. 일단 야성은 같은 동지끼리 중립을 놓고 봐야 합니다. 누구나 대권이 있습니다.!! 왜 친문들이 유세 떨어서 만든 신기루에 연호해야 합니까.? 무엇보다도 중립에서 볼땐 대선부정개표 승복 이것만은 절대 용서가 안됩니다. 내가 찍어준 표를 죽이는 짓인데. 부정개표를 승복한다는 것은 유권자의 주권을 말살하는 행위 아니던가요.?

    • 늙은도령 2015.12.25 18:04 신고

      대선부정개표에 승복 안 하면 문재인이 대통령이 됐을까요?
      알려진 증거로는 대선의 결과를 바꿀 수 없습니다.
      부시가 대통령이 됐을 때 미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고, 아무것도 바꾸지도 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님은 최악의 위기에 몰렸을 때 기득권들이 동원할 수 있는 힘의 크기를 모릅니다.
      대선 불복은 문재인만이 아니라 노무현의 유족들까지도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문재인에게 가장 많은 이득이 됨에도 왜 그가 승복할 수 없었는지, 때를 기다려야 했는지, 당 내부의 적들이 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는지.. 권력의 최정상까지 접근해서 그들의 힘을 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회창, 이명박, 노무현, 한나라당, 민주당과도 일했고, 우리나라 최고의 재벌들과도 일했습니다.
      저의 삼촌과 사촌 당숙은 국가의 지도자급이었고 검찰총장도 지냈습니다.
      그분들 덕분에 박정희 시절의 실무담당자(지금은 70대)와 수없이 많은 장관들과도 일했습니다.
      할 수 있는 것도 시기가 맞지 않으면 못합니다.
      뒤로 미루어야 합니다.
      기회는 오기 마련이며, 그때까지 인내하면서 지켜야 할 사람들을 지켜내야 합니다.
      욕을 바가지로 먹고, 병신 취급을 받아도 감내하고 감내해야 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노무현을 지켜주지 못했는데 그 이상을 잃을 수 없으며, 문재인에게는 그것이 첫 번째였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은 억압과 착취 속에서도 돌아갑니다.
      대선 불복으로 억압과 착취가 끝나거나 줄어들 것 같습니까?
      현역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을 탄해시켰고, 손발을 다 잘라냈으며, 끝내는 죽음까지 내몰 수 있는 것이 이 땅의 기득권이자 특권층입니다.
      이상과 현실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자들은 정의도 실현하지 못합니다.
      명심하십시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으며 욕 먹는 것을 두려워하면 지도자가 될 수 없음을.

  3. 공수래공수거 2015.12.26 09:07 신고

    일단 이번 총선은 두가지의 시나리오가 ,전개가 예상됩니다
    안철수 신당이 끝까지 가서 야권이 멸렬하든지 다수당으로 가는것과
    선거 막판 일부 지역에서 단일화 추진으로 그나마 야권 통합을 보여주는길입니다

    어찌 되었든 여당이 분열될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4. 정우政佑 2015.12.27 23:00 신고

    늙은도령님 궁금한게 있습니다.

    만일 야권의 정치철학이 통일화 된다고 해도,
    그들은 자신들 만의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후보를 내세우고, 선거에 있어 다른 야권과 경쟁하게 될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썩은 보수라도 말벌처럼 강하게 결집되어 있는데,
    꿀벌들이 떼를 이룬다고 해서 말벌을 이길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런 날이 오면 야권통합의 정치인이 나타날까요?

    그런날이 와도 강하게 결집되어 있는 말벌에 균열을 일으키지 않는한,
    벌떼들이 아무리 많아도 말벌을 이기기 힘들지 않을까요?

    • 늙은도령 2015.12.28 04:57 신고

      벌떼는 흩어지더라도 다시 모이고,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벌떼 개념은 네그리와 하트가 정립한 것으로 정치인이 아닌 다중을 의미합니다.
      푸코가 권력과의 싸움에서 저항의 지점들을 무한대로 넓히면 다중이 이길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이것을 네트워크 방식으로 발전시킨 것이 다중 개념입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되 목표는 하나이지요.
      절대권력을 휘두르려는 신자유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함입니다.
      진보는 분열하는 것이지만 뿌리는 같습니다.
      모든 추진력은 배후, 즉 출발의 지점에서 옵니다.
      베르그송이 정립한 이런 창조적 진화는 진보좌파의 가치라는 출발의 지점에서 아무리 멀리 와도 근본에서는 같다는 것입니다.

    • 정우政佑 2015.12.29 01:06 신고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정의는 승리한다라는 말 같네요^^.
      넓고 다양한 진보들이 탄생하면 아무리 보수들이 힘이 쎄도 언젠가는 무너질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선 다양한 진보들이 탄생해야 할것인데
      밥그릇 가지고 싸우기만 하니 발전이 없는 거네요.

    • 늙은도령 2015.12.29 01:11 신고

      네, 권력을 지닌 자들은 한정된 수입니다.
      모든 개인이 자신의 위치에서 권력과 맞선다면 그들이 막아야 할 지평선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납니다.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이지요.
      진정한 자유는 권력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인데 현실적 힘을 차이를 돌파하려면 벌떼처럼 대항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 정우政佑 2015.12.29 01:15 신고

      민중이 벌때가 되려면 우선 현명해야할텐데 말이죠. 물론 늙은 도령님 처럼 현명한 시민도 많지만 아직 언론에 휘말리는 사람들도 엄청많은 것 같습니다. 제 친구들 중에서도 생각없이 정치 얘기를 하는 얘가 많기도 하고요. 물론 언젠가 바뀔것이라 믿습니다.



많은 전문가와 언론들이 미국과 일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근혜가 중국의 전승절 행사에 참석하는 이유에 대해 이런저런 해석을 내놓고 있다. 중국은 심각한 경제위기에 접어들었고, 미국은 기준금리 인상을 더는 미룰 수 없는 상황에서 전승절 행사에 참석하니 헷갈릴 만도 하다.





필자도 한 가지만 제외하면 헷갈리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은 박근혜와 시진핑이 공유하는 것으로, 전 세계를 1%의 수중에 넘겨준 시카고학파의 신자유주의 통치술에 있다, 최고지도자에게 제왕적 권력이 주어지는 권위주의적 독재정치와 정경유착을 기반으로 하는 시장경제의 혼합이라는(등소평과 장쩌민이 밀턴 프리드먼을 스승처럼 따랐다)..



자기조정 능력이 있어 시장참여자 모두에게 최적의 이익을 제공하는 완전시장은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유토피아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양한 종류의 시장으로 분할한 뒤, 자기조정 능력이 있는 전 지구적 차원의 완전시장으로 통합하는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조정과정을 왜곡하는 어떤 개입도 없어야 한다.



문제는 완전시장(시장근본주의)이라는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아 무언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스미스는 이를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했고, 파레토는 ‘사회적 계획가’라고 했다. 베버는 ‘청교도정신’이라 했고 로크는 ‘사유재산’이라 했다. 하이에크는 ‘자유에의 열정’이라 했고, 프리드먼은 ‘자유방임’이라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추상적이고 허구적인 개념이어서 현실에서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권위주의적이고 제왕적인 정치권력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다. ‘공식적으로 모든 경제학자는 사회주의자다’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조정 능력이 있는 완전시장에 이르려면 민주주의를 제한할 수 있는 정치권력이 필수적이다.



푸코가 국민국가의 등장과 함께 통치술로 전환된 자유주의를 다룬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설파했듯, 독일이 원조인 신자유주의는 국가(정부)가 자유방임이 최대한도로 구현된 완전시장을 이루기 위해 ‘경쟁을 최대화하고 규제를 최소화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이를 테면 국가의 독점을 막기 위해 국영기업(국가업무까지)을 민영화해야 하고, 규제(관세 등의 세금 포함)가 없는 자유무역을 시행해야 하고, 공정한 경쟁을 방해하는 국가지출(복지와 사회안전망)을 최소화해야 하고,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유로운 자본이동을 허용해야 한다.





결국 신자유주의의 유토피아인 완전시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국가(정부)가 모든 권력의 원천인 국민에게서 일시적이라도 민주주의와 헌법이 보장하는 정치적 평등과 자유, 기본권 등을 포기시킬 수 있어야 한다. 박근혜와 시진핑은 이것(신자유주의 통치술)이 가능한 제왕적 권력의 소유자다.



박정희, 등소평, 피노체트, 리콴유 등이 완전시장을 지향하는 시장경제를 인정한 독재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듯이, 박근혜와 시진핑도 신자유주의 통치술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끌릴 수밖에 없다. 경제적 번영을 위해서 민주주의를 제한할 수 있는 박근혜가 대국굴기를 이루기 위한 시진핑의 전승절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신자유주의는 ‘자유’라는 단어가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국가(정부)가 모든 국민이 존엄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평등을 보장하고, 그것에서 나오는 정치적이고 제도적인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박근혜와 시진핑의 공통점이 그것 아니면 무엇이 있겠는가? 



1%에게는 무한한 부와 권력과 자유를, 99%에게는 한정된 부와 자발적 복종, 각자도생을 강제하는 신자유주의 통치술, 제왕적 권력도 모자라다고 주장하는 박근혜가 국가자본주의와 대국굴기를 꿈꾸는 시진핑의 전승절 행사에 참여하는 이유다. 외교적 고려는 그렇게 크지 않다. 박근혜가 가고 싶을 뿐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8.29 11:07 신고

    서방 지도자는 한명도 참석을 안하더군요
    시진핑을 중심으로 좌근혜 대접을 받고 싶었던거겠죠..

    • 늙은도령 2015.08.29 15:12 신고

      대통령 맛에 이것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아무튼 2년5개월.... 잘 지나가야 할 텐데....

  2. 행인 2015.08.30 18:01

    박근혜가 유일하게 잘하는게 대중국외교인거 같습니다
    중국이 북한을 얼마나 압박했으면 김양건과 황병서같은 북한 최고위급지도자들이 4일동안 잠도 못자고
    남한과 협상하게 만들었을까요

    • 늙은도령 2015.08.30 19:28 신고

      네, 중국이 상당히 밀어붙인 것 같습니다.
      문제는 재발방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최근에 들어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각종 불평등과 차별이 심화되고 대물림됨에 따라 수없이 많은 '사회경제적 잉여'와 '쓰레기로 버려지는 삶'들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인 2030세대의 경우 부채의 늪과 저임금 단기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오늘을 사는 존재로 전락했다. 



이런 사회적 약자를 도와주고 재기의 기회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담당했던 사회적 자본마저 무너져 내려 빈곤의 고착화와 대물림이 점점 확대되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이에 대해 다양한 자료와 통계를 사용해 여러 가지 분석과 해결책을 내놓고 있지만, 경제위기가 장기화됨에 따라 특별한 해결책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거의 모든 연구들이 2030세대의 미래를 암울하고 비관적으로 예상하고 있다.



사회적 자본을 다룬 저자 중에 에릭 우슬러너는 《신뢰의 힘》에서 문명의 진보가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인류를 정반대의 결과를 양산하는 이유에 대해 사회적 자본의 핵심인 신뢰의 붕괴를 자세히 다루었다. 그는 수많은 자료와 통계, 인터뷰를 통해 공적영역과 사적영역 모두에서 신뢰의 관계가 줄어드는 것을 발견했고, 이것이 2030세대에게 지옥 같은 삶을 강요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그가 이런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절망적인 현실에 갇혀 ‘헬조선’을 외치는 2030세대를 이해하는데 기초적인 지식을 제공해준다. 활기와 도전으로 넘쳐야 할 청춘이 행복한 삶과 발전 가능성으로 연결되지 않고 절망적인 고립와 배제로 연결되는 세상이란, 모든 관계에서 상호 호혜성과 공존의 기반인 신뢰가 깨져버린 현대의 척박함을 보여준다.    





사회적 자본의 핵심은 ‘개인들 사이의 연계, 이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네트워크, 호혜성과 신뢰의 규범(신뢰성)’인데, 우슬러너는 ‘신뢰성’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경제규모는 갈수록 늘어나지만 삶의 질은 갈수록 줄어들고, 인생주기에 따른 기본적인 삶의 경험과 과정을 포기하는 세대로 전락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았다.  



전기 베이비붐 세대의 신뢰 증가현상은 미국의 신뢰 감소현상이 세대교체가 아닌 모종의 요인에 의해 초래됐음을 의미한다. 전기 베이비붐 세대의 신뢰 증가현상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되살아났다는 것이 반영됐다. 다른 집단, 예를 들어 베이비붐 세대보다 젊은 세대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타인을 덜 믿고 미래를 덜 낙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베이비붐 세대의 낙관론에는 그들의 소득향상과 함께 공평한 소득분배가 반영되어 있다. 전기 베이비붐 세대는 이전과 이후 세대보다 소득을 더 공평하게 분배받았다. 따라서 그들이 가장 낙관적이고 신뢰 지향적인 것은 당연하다.



지금은 선진국 중에서 가장 불평등과 차별이 심한 나라가 된 미국이지만, 한 때는 최고 세율이 91%에 달하는 등 미국의 역사를 통틀어 성장과 분배가 가장 완벽하게 이루어졌던 시기가 있었다. 거의 유토피아에 근접했던 1940~45년 사이에 출생한 전기 베이비붐 세대는 안정적인 유년과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었으며, 그 덕분에 그 이후의 세대에 비해 정치와 공동체 참여, 종교와 봉사활동 등에 적극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이 때가 미국에서 사회적 자본이 가장 좋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전후 체계가 무너지고, 공정한 분배를 담당했던 조세정의가 무력화됨에 따라 상위 1%에 천문학적인 부와 권력이 집중됐고, 그에 따라 중하층의 경쟁이 심화됐고, 적자생존의 시장근본주의가 정치의 영역까지 지배하기에 이르면서(특히 리처드 피트 등의 《불경한 삼위일체》를 보라) 사회적 자본의 핵심인 신뢰가 급격히 악화됐다.



미국인들이 서로를 덜 믿게 되면서 점점 더 작고 동질적인 공동체 안에서 보호막을 두른 채 자신과 같지 않은 사람들이(소수집단, 동성애자, 이민자) 다수에 비해 특혜를 받을까봐 우려하는 것 같다. 호황기에는 점점 커지는 파이가 빈곤과 차별 같은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이후 경제적 불평등이 커지자ㅡ예로부터 경제적 불안을 느끼면 늘 그랬듯이ㅡ내부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고립주의와 근본주의가 고개를 들면서 외국인‧소수집단‧이민자 등이 다수의 복리를 해치는 위험한 이방인으로 간주되었다. 일반적 신뢰가 개별적 신뢰에 무릎을 꿇어 이제는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만 믿는다.



이런 결과는 다민족 국가인 미국에서는 치명적인 결과를 양산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들어서는 인종차별이 심해지고 있고, 각종 총기사고, 증오범죄, 10대 출산율, 이혼율, 자살률, 정신질환자, 아동사망률, 빈부격차, 부정부패, 탈세 등이 높아진 것도 미국사회를 지탱해주던 사회적 자본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정치의 극한대립은 이런 현상을 더욱 심화시켰고, 이제는 공공연히 두 개의 미국이란 말이 회자되고 있다. 미국의 사회적 자본을 이렇게까지 망쳐놓은 것은 정경유착과 상위 1%가 부와 권력, 기회를 독점하는 신자유주의가 미국의 정치와 재계를 장악한 다음에 일어났다. 실패는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졌고,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도 똑같이 일어났고, 압축성장의 폐해가 폭발하고 있는 이명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갈수록 청년실업자가 늘어나고, 저임금 비정규직만 늘어나는 현실까지 감안하면 2030세대의 절망과 분노는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미국은 주에 따라 다르지만, 지역 단위의 복지와 사회적 안전망은 일정 수준 이상은 작동하고 있어 저복지 국가인 한국에 비교하면 2030세대의 절망과 분노는 약한 편이다.  





리처드 윌킨스와 케이트 피킷의 《평등이 답이다》를 보면, 미국의 50개 주 중에서 사회적 자본이 높은 주일수록, 즉 소득불평등이 적고 복지와 사회안전망이 잘 갖추어진 주일수록 행복지수가 높게 나온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벗어나지 않은 결론을 내놓았고, 이는 한국에서도 어김없이 진실이다. 



서울의 강남에서 강북, 분당과 죽전, 평촌과 일산 등의 신도시 순으로 대학진학과 직업의 종류 등이 결정나는 한국의 상황은 미국은 비교조차 될 수 없을 정도로 지역과 부에 의한 차별이 너무나 심한 편이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게 아니고 욕이 나온다. 최근에는 개천마저도 썩은 물과 녹조로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일 만큼 열악해졌다. 



따라서 소득향상이 좋았고 소득분배가 공평했던 시절에 열심히 살아온 5060세대들이 모든 것이 나빠진 2030세대들을 비판하려면, 무엇이 달라졌는지, 그들이 받고 있는 압력이 얼마나 큰지, 그런 것들부터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지난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국가와 사회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피상적으로 보지 말고 근본적이고 깊이, 그 배후에서 작동하는 기제까지 자세히 봐야 한다.



특히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한계를 정확히 파악한 칼 폴라니의 성찰처럼, 사회의 일부분이었고 정치의 하위개념이었던 경제ㅡ특히 초국적기업과 금융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시장경제가 자원의 희소성을 내세워 상위 1%의 리그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과 사회적 자본의 붕괴가 각각의 세대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시대의 피해자이지만 극단적 폭력을 선택한 일베가 자유(책임이 따른다)와 자유방임(책임을 거부한다)을 구별하지 못하는 극우적 버전의 2030세대라면, ‘헬조선’을 외치는 2030세대는 정치적 자유의 출발점인 사회경제적 평등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적 버전의 잉여들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선진복지국가는 사회주의적 가치가 반영된 복지와 사회안전망, 사회적 자본이 잘 갖추어진 나라들이다.

  


사회적 자본과 행복지수를 나타내는 각종 수치가 OECD 가입국 중에서 최악으로 나오는 한국에서 이제야 ‘헬조선’을 외치는 2030세대가 나온 것은 오히려 늦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아직은 소수이고, 지향점이 확실하지 않고, 어디로 흘러갈지, 어떻게 살아갈지 예상할 수 없지만 신자유주의와 이명박근혜 정부의 실정에 대한 반작용인 것만은 확실하다.



벗어날 수 없는 먹이사슬과 한없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탈출하고 싶은 이들의 절망과 분노는 일정 수준 이상의 삶의 질이 보장돼야 해소될 수 있기 때문에, 극도로 우경화된 대한민국에서 권력의 편에서 서서 상대적 약자들에게 폭력과 차별, 혐오와 배제를 가하는 일베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경고음을 보내고 있다. 죽창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이들의 절망과 분노, 외침을 한국사회가 제대로 반응하고 포용하지 않으면 파국적 결말도 각오해야 할지 모른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base 2015.08.07 19:26

    역사적으로 국민의 생활이 극도로 피폐해짐으로 일부 세력 또는 민중에 의해 개혁이나 혁명으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던 것처럼 지금 대한민국이 그러한 징후를 보이고 있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듭니다. 단지 먹거리만의 문제가 아닌 현대병으로 인해 정신적인 고통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겪고있은 아픔이 진정 안타깝습니다.

    • 늙은도령 2015.08.07 19:57 신고

      네, 병리현상이 자꾸 커지네요.
      하지만 헬조선은 일베와는 달리 기득권에 반하는 평등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일베는 권력에 손잡고 폭력과 차별, 혐오를 조장하지만 헬조선은 더 이상 피해를 입지 말자는 것이기에 젊은이들의 정서를 보여줍니다.
      여론을 움직이는 여론환경이 변하기를 바랍니다.

  2. 아이스킹 2015.08.08 02:08

    제가 느끼는 대한민국은 차이를 만드는 집단과 차이를 극복하려는 두 그룹의 충돌이라고 봅니다. 다수가 극복 할 수 없는 격차로 고통 받지만, 다수가 차이를 만드는 정당에 투표를 합니다. 이 괴리를 선명하게 알리고 누가 격차를 계속해서 만드는지 명확하게 각인 시켜야만 젊은 이들이 희망을 이야기 하고, 정의를 말하고 대한민국을 사랑할 겁니다.

    • 늙은도령 2015.08.08 02:41 신고

      문제는 그렇게 하려면 언론이 제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언론은 광고로 돌아가기 때문에 차별을 만드는 자들의 요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결국 방법은 하나입니다.
      혁명에 준하는 변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것은 정치세력화밖에 없습니다.
      정치철학이 확고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그런 정치세력이 나와야 합니다.
      정치가 바로 서지 않는 한 이 세상을 바꿀 방법이 없습니다.
      스스로 참여하고 연대하지 않은 한 답이 없는 것이지요.

  3. 공수래공수거 2015.08.08 08:26 신고

    아래에서 위로 치고 올라가는 분노의 정치 세력을
    언제쯤이면 볼수 있을까요?
    젊은 혁명가가 나와야 합니다

    • 늙은도령 2015.08.08 17:12 신고

      네, 그래야 합니다.
      정말로 젊은 정치인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4. 참교육 2015.08.08 12:42 신고

    자본이 만드는 세상은 막가파 세상입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은 청년들이 깨어날 때 가능하지 않을까요?

  5. 호빵멘 2015.08.11 23:45 신고

    요즘 헬조선이란 말이 나와서 뭔가 했는데 작성자님 글을 읽고 모두 해소했네요.
    정말 핵심을 잘 집어 주신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트윗으로 퍼 갑니다...

    • 늙은도령 2015.08.12 00:06 신고

      답답한 내용이지요.
      어떻게 인류가 여기까지 왔는지, 대한민국이 이렇게도 형편없는 국가가 됐는지 답답할 따름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날부터 지금까지의 과정을 복기해 보면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남북이 분단된 상황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정치와 이념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공익을 구현하는 정치는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적 구별과는 다른 것이며, 이념에 대한 실천적 과정이다. 정치가 공익을 구현하지 못할 때 그것은 정치가 아닌 사적 이익을 위한 것이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주의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과 동일해서, 정치의 과잉이 역설적으로 정치의 몰락으로 이어진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한다. 대중매체에 의해 공적인 부분이 사적인 것들로 식민화된 이후에는 정치는 더욱 공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 250여명의 학생을 포함해 304명의 국민이 죽었음에도 5개월이 넘었는데도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하나 제정하지 못하는 것도 이것에 기인한다.





민주주의라는 대원칙 하에, 현대적 의미의 정치를 최소로 정의(현대 정치학의 빈곤함)하면 다양한 사회적 이해관계와 갈등을 조정하는 공적인 작용이다. 정치가 충돌하는 사회적 갈등을 조정해 구속력 있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과정이란 정의도 여기서 나온다. 정치를 정의하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짧은 글로 다루려면 모든 가지들을 쳐낸 이런 방법(추상화)밖에 없고, 그래서 대단히 위험하다. 



구속력 있는 사회적 합의가 최후의 지점에 이르면 다수결원칙으로 판가름나는 것이 민주주의기 때문에, 정치과정을 대의하는 정당이 여론을 참조하고 참여를 늘리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회적 합의와 동일한 것으로 취급되는 법에 공개성, 공공성, 투명성 등의 원칙들이 적용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가 갖는 한계가 여기서 나오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피할 방법이란 없다.



반면에 이념을 같은 방식의 최소 정의로 보면, 구속력 있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확보한 공적 이익을 어떻게 배분하느냐의 원칙에 관한 것이다. 생산과 분배, 낙수효과와 분수효과 등등이 여기서 나온다. 근대국가의 등장과 자유방임 시장경제, 자본주의가 거의 동시에 등장하면서 계층의 분화와 함께 부와 기회의 불평등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이로 인해 분출하는 갈등의 충돌에 따른 약자와 패자를 돌보는 안전망으로서의 사회가 급격히 몰락함에 따라, 공적 이익의 분배에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방식을 취한 진보좌파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방식을 취한 보수우파로 나뉘었다.





이념이 주로 경제(푸코가 말한 삶-정치로 귀결된다)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정당과 이익집단의 기초가 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도 실제는 소유권이 핵심인 경제에서의 대립(주인 대 노예, 기업(자본)가 대 노동자 등등)이었다. 자본주의는 자유방임에 따른 사적 독점을 인정할지언정 정부에 의한 계획경제(공적 독점이 발생한다)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자유주의와 자웅동체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 자유민주주의가 탄생하고, 그 자체로 보수적 성향을 띠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자연적으로 주어진 자유라 함은 육체적, 정신적, 환경적, 계층적 등등의 면에서 태생적이고 후천적인 차원 모두에서 강자로 출발하는 자에게 유리하다.



보수우파들이 (그들 사이의) 자유을 중시하고, 자본주의가 극에 달한 신자유주의가 자유를 방임의 수준ㅡ무한경쟁․적자생존․승자독식ㅡ까지 몰고 간 것도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기본적으로 태성적·후천적 강자에게 유리한 것도 소유권의 한계와 분배에 관한 다툼인 이념에서 출발한다. 



세상을 보는 관점에서 보면, 보수우파의 정치는 현재의 상황이 지금까지의 최선(변증법상의 정)이라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언제나 결과에서 차이가 벌어진다. 태생적이고 환경적인 차이를 정치가 교정하지만 그것이 최소한에 그친다는 것(신자유주의 통치의 핵심이다)이 차별과 불평등이 늘어나는 것이 보수우파의 현실인식이고 그들의 정치다.  

  


이에 비해 이념(사상, 이데올로기)은 국민(인민)과 사회의 구성원을 사회경제적 기득권과 비기득권으로 나누는 것에서 출발한다. 정치에 비해 이념의 기원을 아담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에서 찾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념은 그래서 기득권(소유한 것이 많고 크다)에 방점을 두느냐, 비기득권(소유한 것이 적도 작다)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정치과정을 통해 이루어내는 사회적 합의의 내용이 달라지는 출발점이다.



즉 이념은 정치가 현실적 과정으로서 출발하는 지점이나 먼저 주어진 선험적인 것(소여)이 된다. 이해관계의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구속력을 지닌 사회적 합의라는 공적 이익이 도출되면, 이것을 기득권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조정하는 것이 보수우파요, 비기득권에게 유리하도록 조정하는 것이 진보좌파다. 



이는 제한된 공적 이익의 상대적 조정이지만, 결과에서는 차별과 불평등을 최소화한다. 좌파와 진보가 나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좌파는 결과의 평등을 얼마까지 인정하느냐에 따라 가운데에서 좌측으로 간다. 강준만 교수의 성찰은 이것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이념의 가치를 현실화하는 정치과정(타협, 조율)에서 벌어지는 표상에 집착함으로써 좌파와 진보를 하나로 본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든다.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이고 엘리트적이며, 기존의 강자이자 승자인 대기업 위주의 성장정책과 낙수효과를 주장하는 것이 보수우파이다. 그들의 특징은 '계몽의 변증법'에 의해 인류 문명은 끝없이 전진한다는 결과의 낙관론(예를 들면 과학기술의 발전이 문제를 해결해낼 것이다)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래서 현재의 차별과 불평등이 미래에는 줄어든다고 주장(쿠즈네츠 가설)한다. 



보수우파가 긍정적·적극적·낙관적인 사고를 중시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채 탐욕으로 이어지는 욕망을 부추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래는 지금보다 언제나 좋다는 '결과의 낙관론'에 경도돼 있기 때문에 ‘하면 된다’는 말이 보수우파에게서 유독 강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보수우파가 그토록 혁신을 강조하는 것도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면서, 지속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혁신이기 때문이며, 이것이 바로 사회진화론의 핵심인 적자생존의 원리다. 노력만 하면 미래는 좋아지기 때문에 '꽁짜 점심은 없다'는 것과 '더 이상 사회적 구조는 없다'라는 선언이 나올 수 있었다.



이는 또한 자본주의의 발전 방식이기도 하다. 보수경제학자인 피케티가 부자에 대한 누진증세를 주장하면서도, 성장이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는 방식이라며, 끊임없는 혁신을 강조한 것도 보수 경제학자의 본질이다. 새누리당이 매일같이 떠들어대는 ‘보수의 혁신’은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당연한 것이다. 




                                          


  1. 중용투자자 2014.09.29 20:54

    조경태가 김현 의원을 출당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 새정연이 몰락한 이유를 알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4.09.29 21:17 신고

      조경태와 김현을 함께 출당시켜야 합니다.
      정확히 모르겠지만, 김현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경찰 수사가 끝난 다음에 복당시키더라도 김현은 일단 징계위에 회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밝히는 일은 이미 불가능해졌습니다.
      긴 승부로 봐야 합니다.
      그러려면 새정연에게 부담이 되는 인물은 과감히 잘라내야 합니다.
      김현에 대한 유무죄를 넘어 지금은 세월호 유족을 살려야 합니다.
      김현이 억울하더라도 지금은 방법이 없습니다.

      조경태 저 자식은 인간도 아니고요.
      정말 기회주의자입니다.
      치사한 자식이고.

  2. 공수래공수거 2014.09.30 09:43 신고

    싸가지 없는 사람은
    말도 싸가지없이 합니다

    얼굴도 싸가지 없어 보입니다

    • 늙은도령 2014.09.30 15:40 신고

      오늘 인터뷰를 보고 경우에 따라서는 <싸가지 없는 진보>를 사거 보고 서평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3. 참교육 2014.09.30 09:45 신고

    가해자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요.
    아니 안하지요. 법을 대충만들어도 진실은 절대 밝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압니다.

    • 늙은도령 2014.09.30 15:41 신고

      예, 말도 안 됩니다.
      헌데 세월호 참사는 세월호 프레임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라 답답합니다.

  4. 코손 2014.10.01 00:03

    이념이란 허울좋은 구실에 불과합니다.
    애초 자본주의 국가에서 국회는 자본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이들이 모여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이념의 차이?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또한 이념도 아닙니다.
    자본이 스스로 몸집을 키워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 체제 따위가
    이념을 실현하는 수단이나 목적이 될 수 있을까요?

    나와 자손들의 부를 지키고 공고화하기 위해 온갖 사회질서의
    진입장벽을 높이고 복지규모를 줄이는 등이 이념의 차원일까요?
    그건 그냥 욕심입니다. 개인의 욕심. 이기주의.
    이기주의가 이념으로 승화될 수 있을까요?
    보수는 이념과 상관 없다는 겁니다.
    진보도 마찬가집니다. 애초 진정성이 없거든요.
    진짜 진보는 자본주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반정부투쟁을 하든 무정부주의를 설파하죠.
    국회 안에서 양대 거당을 이루고 그 안에서 권력을 누리는 것?
    그게 무슨 진보입니까?
    자본주의 사회체제, 양대 정당 체제에서
    이념은 권력의 명분을 포장하기 위한 그럴듯한 정치학적 수사에
    불과한 것이 현실입니다.
    그 결실이 오늘 발표된 세월호 특별법 합의죠.
    진상규명 다 틀어막겠다고 합의하는 야당이 과연 야당일까요? 진보일까요?
    아무 것도 아닌 겁니다.

    • 늙은도령 2014.10.01 00:21 신고

      아무것도 아니지요.
      거대화된 보수정당들의 기득권 지키기이지요.
      이념을 엿 바꿔 먹은 놈들이 지랄하는 것이지요.
      강준만은 그것에 협조하고....

      정말 개판입니다.
      직접민주주의가 가장 완벽한 민주주의이지만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의민주주의가 필요했지만, 그렇다고 기득권을 형성하라고 한 것은 아니었지요.

      정말 개판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목표와 민주주의 출발을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국가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전체화하는 경향과 개인화하는 두 가지 상반된 경향과 중첩되며 일어나는 전형적인 인식의 오류입니다.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를 통해 1%를 위한 전체주의적 세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대중매체를 수단으로 만들어내는 이런 인식의 오류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민주주의는 체제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이 공적인 이슈에 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을 갖추고 있을 때 시작됐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목소리란 공적 영역에서 공익에 대한 자유로운 의견 개진과 상대의 의견에 대한 진지한 청취, 서로에 대한 합리적 설득과 민주적 절차에 의한 구속력 있는 합의에 이르는 전 과정을 말합니다.



고대 아테네의 아고라가 그랬던 것처럼, 민주주의는 사회경제적 평등이 일정 수준에 이르렀을 때 가능한 정치체제입니다. 인간이란 불멸의 존재가 아니어서 생존선 이하의 상태에서는 짐승과 다를 것이 없는 존재로 전락하기 마련이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가 법과 행정력을 동원해 모든 구성원에게 제도적으로 일정 수준의 사회경제적 평등을 보장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란 사회경제적 평등을 제도적으로 보장한 데서 출발해 자유의 왕국으로 향해 가는 부단한 과정을 말합니다. 이를 보장하는 것이 법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법이 만인에게 평등해야 한다는 것도 민주주의가 본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가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양대 축이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헌데 민주주의의 파트너로 등장한 자본주의가 시장경제를 절대화하는 과정에서 제도적이고 보편적 합의의 산물인 자유를 태생적으로 주어진 자연의 법칙이자 신의 선물인양, 어떤 제한도 가해질 수 없는 자유방임으로 대체하면서 민주주의는 퇴행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제한된 자유가 방임적 자유와 혼동되면 강제적으로 보장된 사회경제적 평등이 개별적 능력의 결과물로 변질됩니다. 능력이 자유의 원천이자 민주주의의 보루로 둔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능력이란 불평등한 환경에서 나오는 차별적 요소의 산물임에도 이것이 사회경제적 평등을 대체하면, 자유란 제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경쟁의 결과로 획득하는 것이 됩니다. 이럴 경우 승자나 강자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것도 힘의 크기와 범위에 따라 무한대의 자유를 독점할 수 있게 됩니다. 자유에 따르는 사회적 책임이란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에서나 누릴 수 있는 것이 됩니다.



마르크스의 착각이 여기서 나온 것이지만, 그래서 과학적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본질은 유전자 나선처럼 이어져 있는 것이면서도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민주주의의 퇴행은 제도적으로 주어진 자유가 일체의 제한을 거부하는 방임적 자유로 왜곡된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자유가 방임으로 대체되면 민주주의의 토대인 사회경제적 평등은 기하급수적으로 축소됩니다.



민주주의가 국가의 개인화하는 경향인 자유와, 전체화하는 경향인 평등을 두 축으로 균제와 견제로 이루어지는 것도 능력(힘 또는 권력)이 내포하고 있는 불평등의 확대를 막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삶이 동물의 세계처럼 타고난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면, 적자생존의 법칙만이 유효한 원리가 됩니다. 이럴 경우 자유란 물리적이고 환경적인 힘의 우위에 따라 결정되는 정글로 화합니다.





허버트 스펜서가 다윈의 진화론을 왜곡해 사회에 적용한 사회진화론, 홉스가 자연의 상태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내세워 정립한 절대주권, 대처가 ‘사회란 없고, 있다고 해도 가족만이 있을 뿐’이라며 만천하에 선언한 신자유주의적 통치도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반민주적인 것들입니다. 신자유주의적 통치가 각종 불평등을 극단까지 몰고 가는 것도 방임적 자유가 제도적 자유를 대체한 결과입니다.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이런 대체가 일반화돼 방임적 자유가 제도적 자유와 동일한 것이 됐습니다. 그래서 태어났을 때부터 넘쳐나는 자유에 노출된 세대들은 민주주의와 자유의 범람을 혼동하기 일쑤입니다. 민주화 세대가 가장 비민주적인 세대로 보이는 것도 여기에 기인합니다. 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를 구별하지 못하는 일베충적 사고도 자유의 과잉이 초래한 인지부조화에 다름 아닙니다.





민주주의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엄밀히 구별하는 것에서 출발한 체제라는 것은 공적 영역의 사적인 것들로 대체된 것과, 동시에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사라진 시대의 본질이 무엇을 뜻하는지 말해줍니다. 사회경제적 평등을 포기한 대가가 자유의 과잉이라면, 그 끝에는 자유의 축소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자생존과 승자독식을 인정하고 탄생의 조건과 환경적 요인에서 나오는 능력의 차이와 그 결과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의 정반대에 위치하는 것도 동일한 논리를 통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과잉은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가 제도적으로 보장해온 사회경제적 평등을 희생시켜온 결과입니다.





신자유주의가 최고의 가치로 끌어올린 욕망의 정치가 민주주의를 대체하고 있는 것도 방임적 자유가 제도적 자유를 대체한 것에서 나온 부수적 피해입니다. 인류가 수천 년에 걸쳐 발전시켜온 민주주의가 조중동과 새누리당과 친일부역의 후손들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와 동일한 것이 아님도 똑같은 논리에서 출발하면 얼마든지 설명이 가능합니다.



저들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란 사회경제적 평등을 자유의 이름으로 희생시킬 때 나오는 극소수의 강자와 승자만이 누릴 수 있는 사이비 민주주의에 불과합니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한 나치가 우파 전체주의로 귀결된 것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종착역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자유가 강조되면 평등은 약화되고, 절대다수의 약자와 패자는 극소수의 강자와 승자의 먹이감으로 전락합니다.





그리고 최후에 이르면 절대다수의 약자는 잉여를 거쳐 쓰레기로 버려집니다. 대한민국이 바로 이 지점에 이르렀음은 국민적 합의도 거치지 않은 일방적인 서민증세와 이를 옹호하기 바쁜 대중매체에서 반민주적 보도에서 입증되고 있습니다. 현 상태의 민주주의란 자유의 과잉과 욕망의 정치에서 나온 과두정치와 전체주의의 혼합물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자유가 제도적 제한에서 벗어나 방임과 과잉에 이를 때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합니다. 정치의 몰락이 책임정치의 부재와 동의어인 것도 이 때문입니다. 대국민 약속인 공약이 집권의 수단일 뿐,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있는 것도 방임적 자유가 제도적 자유를 대체하는 민주주의의 퇴행에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지난 7년의 대한민국이 바로 그러했고, 최소한 3년은 더 그럴 것입니다. 

  1. 중용투자자 2014.09.17 00:30

    인간의 존재모드를 자유에서 자율로 전환할 때라야 인간은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는 도올 선생의 말이 생각납니다 ^^
    [

    • 늙은도령 2014.09.17 01:12 신고

      자율은 자유의 도덕적 형태이라 그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타자가 있어야 자아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는 내 주먹이 미치는 곳에 상대의 코가 있다면 폭력이라 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백순주 2015.09.22 16:25 신고

    민주주의가 뭔지,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습니다. 저는 민주주의가 정치하는 사람이 국민에게 해야 하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외우고 공부해서 시험은 보았으나 실체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학교가 민주주의를 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방임을 알수 있겠지요.ㅠ


극심한 혼란과 분열로 무정부적 상태에 이른 대한민국의 문제들은 보수우파의 경험과 단절의 삼중적인 모순에서 발생하고 있다. 첫 번째로 경험의 관점에서 보면, 극단적인 혼란과 분열은 해방 이후 권위주의와 군부독재 시절에 이룩한 압축성장과 자본주의의 전성시대ㅡ이것도 최근의 연구를 통해 빚의 확대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ㅡ에 대한 구보수의 일방적인 향수가 IMF 환란을 극복해낸 민주정부 10년의 가치들을 부정하면서 발생한다.



또한 IMF 환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신보수와 구보수 간의 정치경제적 권력투쟁이 경험상의 차이를 드러내며 또 다른 형태의 혼란과 분열을 쏟아내고 있다. 이들 모두는 4.19운동과 광주민주화항쟁 및 6.10항쟁으로 이어져온 민주주의의 결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IMF 환란을 극복한 민주정부 10년의 성과를 모두 다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구글이미지에서 인용



하지만 산업화 세력과 신자유주의자로 나뉘는 이들의 근본적인 경험의 차이는 바우만이 말한 중후장대한 ‘무거운 경제’와 경박단소한 ‘가벼운 경제’와의 차이이기도 하며, 동시에 이승만과 박정희로 대표되는 식민지근대화론과 권위주의적 독재에 대한 구보수의 긍정과,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민주화 세대의 신보수의 차이이기도 하다.



이들은 민주정부 10년 동안 무섭게 성장한 진보좌파의 세력화에는 공통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지만, 구보수는 참여정부의 4대개혁입법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반감을 가진 반면 신보수는 이에 대해 조금은 유연한 편이다. 구보수와 신보수의 차이 중에 나이나 세대를 들먹이는 것은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구글이미지 인용



이명박 정부는 물론, 박근혜 정부 내에서도 이들의 경험적 차이는 다양한 정책과 지향점에서 갈등과 혼란을 야기시켰고, 주류와 비주류라는 위치 변동만 있었을 뿐, 이들의 갈등과 혼란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족벌언론들도 이런 갈등과 혼란을 부추기기도 하고, 그들에게 불리할 때는 맹수처럼 달려들기도 한다.



헌데 경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단절이다. 구보수나 신보수나 할 것 없이 2008년 미국의 금융 대붕괴에서 시작돼 전 세계적인 경제 대침체로 이어지며, 자본주의체제의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자 공통의 경험이 뿌리 채 흔들리는 단절에 직면했다. 그들은 근대이성이 현대성을 이루며 확고해진 무한한 진보와 결과의 낙관론에 노예들이었다.



그들은 세계화의 긍정성을 찰떡같이 믿었지만, 신자유주의 40년의 현실이 극도의 불평등과 지구온난화라는 종말적 현상들로 귀결되자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부수적 피해가 발생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주가 돼 자신들까지 종말의 위험에 처하게 할지는 몰랐다. 작금의 상황이란 그들이라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그들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그들이 찰떡같이 믿어온 것들이 뿌리부터 무너지는 것은, 상황에 따라 자신의 행태를 결정해온 기회주의자들이 단 하나의 탈출구도 주어지지 않을 때 경험하는 공황상태와 거의 동일하다. 그들은 지금까지 주장해온 것들을 밀고 나가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자니 어마어마한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그들은 후자를 택했고, 단기적 이익에 집착하며 갈 데까지 가보자는 자포자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처럼.



이 두 권의 책은 연달아 읽으면 현대 정치에 대한 이해를 늘릴 수 있다.



헤겔의 변증법과 뉴턴의 만류인력에 의해 기존 질서와 체제는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발전을 거듭해야 하고, 다윈의 진화론과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 의해 적자생존의 법칙들이 유효해야 하는데, 현재의 상황이란 두 개의 축이 모두 다 무너지고 있다. 정치권력이란 보잘 것 없이 찌그러들었고, 초국적기업과 거대 언론의 도움 없이는 현재의 지위도 유지하기 힘들 정도다. 집권을 위해서라면 좌파 특유의 정책도 복사해서 사용해야 한다. 



국정원의 대선 불법 개입과 세월호 참사에 이어, 끊이지 않는 대형 사고들과 GOP 총기난사사건과 각종 폭력사건들이 속출하고, 건축물 붕괴와 초미세먼지의 습격 및 여기저기서 발생하고 있는 싱크홀과 동공처럼 난개발의 후유증들이 본격적으로 드러나자, 이들은 현대성의 단절이 가하는 전방위적 압박과 습격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현재의 무정부 상태는 여기에 기인한다. 단순히 세월호 참사 때문만이 아니다. 



구보수건, 신보수건 경험과 단절의 이중적인 모순에서 발생하는 인지부조화에 단기적인 반응밖에는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무엇을 해도 불확실성이 너무 커서 일사분란한 질서의 효력이란 과거의 경험에서나 존재하는 것으로 변질됐다. 한국의 우파들이 제왕적 대통령과 과반수 이상의 의원들을 확보한 상태에서도 국정 동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이들은 정치를 비즈니스화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치가 비즈니스화 됨에 따라 정부의 업무 중 상당 부분이 민영화됐기 때문에 정치 본연의 기능이 상실됨을 깨닫지 못했다. 이런 권력의 민영화는 자신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부메랑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사적독점 집단과 거대 언론의 도움 없이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보수우파들이 느끼는 정치권력의 무력함은 자신이 자기 무덤 판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또한 이들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진보좌파의 가치와 정책들을 피상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끌어다 쓰는 바람에, 선거에서는 승리했을지언정 정작 자신의 정체성이 파괴되고, 갈수록 무력해지는 정치권력의 헤게모니 때문에 실패한 자들이 돼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기 시작했다. 보수우파는 더 이상 스스로의 논리나 가치로 서있을 수 없는 허수아비 같은 존재로 변질됐고, 국가의 공권력을 빼면 사적독점의 집단들과 거대 언론의 도움없이는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기 힘들어졌다.



                                                                       구글이미지에서 인용



이들은 작금의 혼란과 분열을 일소하기 위해 권위주의 독재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초국적기업과 거대 자본 및 족벌언론도 이런 퇴행을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방임 시장경제란 국가의 혼란이 크고, 사회적 불안이 클수록 최대의 이익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한 어느 나라나 공통적인 현상으로, 신자유주의에 내포된 필연적인 과정이며, 바로 여기서 세 번째 모순이 발생한다.



가장 신자유주의적인 국가인 한국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 혼란과 갈등으로 국민이 지불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이 높은 것도 이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유령이 다시 살아나는 것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우파의 해석이 온갖 논리적 모순과 오류에 빠져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TV토론에 나오는 보수우파의 패널들을 보면 시정잡배보다 못한 자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은 분명 우파의 위기이자 정체성의 붕괴가 분명한 시기이며, 개입주의와 자유방임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한국판 시장경제의 위기이기도 하다. 더 이상은 기회주의적인 땜질식 처방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며, 장기적으로 집권세력의 지위를 유지하려면 지금보다 더 큰 불법들을 동원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는 국민들에게 극도의 불만을 불러일으키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혁명의 기운으로 폭발할 때 보수우파가 설 수 있을 자리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이들은 승리했고 집권했지만 그것이 불안할 정도가 된 것이다. 승자의 역설, 그것이 한국의 보수우파가 처한 정신적 아노미현상이자 세월호 유족들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의 핵심이다. 문제는 한국의 진보좌파도 비슷한 위기와 모순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다음 글ㅡ언제 올릴지 알 수 없지만ㅡ에서는 거의 전멸의 수준에 이른 한국의 진보좌파의 위기와 해체를 다루면서, 그들의 무능력과 조급함 때문에 자유민주주의 못지않게 참여민주주의의 위기와 퇴행 및 축소가 심각할 정도로 악화됐다는 사실을 다루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가장 완벽한 민주주의에서 무정부적 자유주의(미국식 신자유주의)로 퇴행한 미국에서의 민주주의와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한 공부가 선행돼야 한다. 또한 민주주의의 가치를 완벽하게 제시했던 프랑스혁명이 전체주의의 한 형태인 공포정치로 변질된 과정과 이유에 대한 공부가 선행돼야 한다.   

  1. 참교육 2014.08.22 07:40 신고

    새누리를 비롯한 우리나라 보수란느 사람들.... 그 사람들은 이해관계로 방황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친일 혹은 수구 기득권세력이 아니겠습니까?
    보수의 청체성을 찾는다는 것 부터가 웃기는 일입니다.

    • 늙은도령 2014.08.22 17:54 신고

      새누리당에 있는 자들이 보수우파의 본 모습을 갖추면 세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제 주변에 있는 보수우파들은 합리적인 분들이 많아요.
      저와 이념적으로 많은 토론을 해도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새누리당에 합리적 보수우파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새누리당 내에 있는 악질 친일 부역자 후손들을 걸러내야 합니다.
      그러면 진보좌파도 새롭게 구축될 것입니다.
      지금의 진보좌파는 너무 공부도 부족하고 미래 비전도 제시 못하니 그들의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합니다.

  2. 새 날 2014.08.22 10:58 신고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3. 태봉 2014.08.22 14:49

    공부 잘 하고 갑니다^^

  4. 영감 2014.08.27 13:48

    세상이 평평하다는 말이 있죠.
    세계 경제가 개방되어서 우리의 경쟁상대가 아프리카에도 있고 남미, 아시아 어디든지 있어요.
    그래서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불가능한 상상의 이념이 되었는데도 우리 민족은 순진한 모양입니다.
    국가가 적정한 통제를 통해 소수의 경제집중을 막아야 하는데
    다국적 거대기업을 제어할 수 없으니 신자유주의를 거부할 수 없고요.
    친일 부역자를 걸러내려고 하면 더욱 발광하게 되고 서민들만 힘들어질거예요.
    아쉽지만 면죄부를 주고 잊어버리는게 낫습니다.
    나쁜 기억을 계속 가지고 있다보면 정신병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피폐해집니다.
    늙은도령님께서 쓰신 것처럼 신자유주의 경제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보수 진보 모두의 과제일 것입니다.

    • 늙은도령 2014.08.27 14:37 신고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은 중요합니다.
      허나 완벽한 체제는 없는데 체제를 타락시키는 자들이 있습니다.
      저는 악질적인 자들을 말합니다.
      우리나라 국민 중 0.01%밖에 안 됩니다.
      헌데 그들이 우리나라의 핵심부에 있어요.
      그들이 나쁜 짓을 못하게 하는게 중요합니다.
      그냥 조용히 살라고....



하지만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즉각적인 욕망과 쾌락을 쫓아가는 현대성을 이해하려면 아직도 살펴봐야 할 것이 두 개 더 남아 있다. 그것은 텔레비전의 영향력을 확대재상산하는 것에서부터, 기득권 위주의 상위정치에서 배제된 네티즌들의 정치의 장인 인터넷과, 그 폭발적 파급력이 빛의 속도를 연상시키는 SNS의 등장이다. 최근에 활성화된 개인 방송과 팟캐스트까지 더하면 현대성의 핵심으로 등장한 즉시성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와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근대》와 《유동하는 공포》를 통해 완전하지 않은 과학기술의 사용에 따른 각종 위험들의 증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된 무차별적인 개발의 부작용, 산업혁명 이후 닥치는 대로 이루어진 천연자원의 착취에 따른 환경 파괴, 견고하게 결합된 무거운 경제에서 액체처럼 유동하는 가벼운 경제로 바뀌는 과정에서 발생한 불확실성의 증가 등을 다루면서 그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 매스미디어의 변천에 관해 다루었다. 



구글이미지에서 인용



현대사회의 위험성이 통제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음을 경고하고, 견고했던 체제들이 무너져내리면서 사회의 불확실성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었던 이들은, 닐 포스트만처럼 매스미디어의 테크놀로지에 천착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인터넷에서 트위터까지 상시적인 위험에 노출된 삶과 불확실성에서 도피하기 위한 즉시성이 만들어낸 비합리적 선택의 증가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비합리적 선택과 합리적 선택과의 차이는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느냐, 지지 않느냐로 나뉜다). 



이들은 인류가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체제의 하부구조를 이루는 경제에 집중하는 동안, 체제의 상부구조를 이루는 정치와 철학, 문화와 교육 등에서 벌어진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퇴행의 중심에는 텔레비전이 독점했던 메시지를 보다 세밀하게 분할해서 점령한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앞에서 다루었듯 텔레비전을 이루는 테크놀로지는 폭력성과 선정성과 상업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이와 정반대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 정보통신기술도 이런 방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은 텔레비전이 독점했던 메시지를 시공간적으로 분할한 것에서 기인한다. 



철저하게 '1대 다'의 소통방식을 취했던 텔레비전에 비해, '1대 1'의 소통을 내세웠던 인터넷과 SNS는 넘쳐나는 정보와 익명성으로 인해 민주적인 매체에서 무정부적이고 카오스적인 매체로 변질되고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자율정화란 아담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것이어서, 원래부터 존재하지도 작동할 수도 없는 것이었고, 정보의 양이 늘어나고 질적 차이가 구별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용자의 수가 늘어날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된다.  



필터링이 이루어질 수 없는 정보와 익명성의 바다에서 근대이성이 탄생시킨 현대성은 루소와 칸트와 홉스가 그렇게도 우려했던 아노미적 무한경쟁과 무정부적 자유방임의 투쟁과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인류가 끝없는 유목생활에서 벗어나 정착함에 따라 문명이라는 것이 시작됐고, 근대이성이 탄생하기까지 발전의 뱡향은 예측가능한 사회와 미래를 만들기 위한 합리성의 극대화였다. 그것이 신의 섭리에서 나왔건, 우주의 법칙에서 유래했건, 자연의 원리에서 끌어왔건, 죽음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에서 출발했건, 장기적인 계획과 질서 잡힌 확실성의 원천으로써의 합리성의 추구는 확실한 것을 선호하는 인간의 본성에 일치한 불변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텔레비전의 보편화에 이어, 즉시성과 유목성 및 선정성과 상업성을 특징으로 하는 정보통신기술과 모바일기기의 발전은 한 세기도 되기 전에 인류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욕망과 쾌락에 대한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폭력적인 현대성(한정된 자원과 일자리를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투면서 발생한다)이 창출한 온갖 허상들을 과학기술의 발전이라는 낙관적이고 변증법적인 신화로 포장하는데 성공했다. 갈수록 첨담화되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구원과 해방이 실현된 유토피아로 향해 간다면, 그때까지 자신의 죽음을 늦추는 방법이 최상의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과학기술의 발전이 영생의 삶을 보장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래서 지금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죽음에 이르는 전 과정을 무수히 작은 단위로 쪼개놓음으로써, 영원한 삶도 가능할 수 있다는 관념이 지배적 패러다임을 형성할 수도 있다, 토끼가 먼저 출발한 거북이를 따라잡는 과정에서 토끼가 간격을 좁힐 때 거북이도 최소한이라도 앞으로 나갔기에 토끼가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시간의 흐름이 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가정 하에 시간을 잘게 쪼개놓으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는 궤변은 소피스트의 전유물이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비해 과학과 기술은 비교가 불가능할 만큼 발전했이지만, 소피스트의 궤변처럼 시간을 잘게 쪼개놓으면 영원한 삶도 가능하다는 관념은, 멈추지 않는 파동으로 영원히 날아갈 수 있는 빛으로 대변되는 전기전자기술의 과학적 원리와 일치한다. 이런 궤변과 과학의 이종교합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별하지 못하는ㅡ구태여 구별하려 하지 않는ㅡ아노미적 현상을 일반화한다. 끊임없이 시공간을 옮겨다니는 새로운 유목인의 등장은 이런 이종교합에서 나온 자연스런 결과일 수도 있다.  



                                                                       


이처럼 '날아가는 화살은 멈춰있다'는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를 연상시키는 2차원적 관념이 3차원의 현실을 뒤집어버린 것은 인류 문명의 발전에 내포돼 있는 정신적 퇴행을 드러내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물질만능주의가 만연된 세상이 거꾸로 된 세상이라고 말했는데, 작금의 세상은 즉각적인 만족을 통해 영속적인 삶을 추구하는 현대성에 의해 다시 한 번 뒤집혀버린 것이다. 이런 2중의 변증법에 의해 견고하고 지속적이며 질서 잡힌 체제를 추구했던 근대이성은 현대성으로 넘어오자마자 끊임없이 유동하는 특성을 지니게 됐고, 그에 따라 삶의 불확실성은 갈수록 높아졌다. 



이제 장기적인 계획이 담긴 청사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 단계로 접어들었고, 현실공간을 빠르게 넘나드는 가벼움을 유지하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전략으로 굳어졌다. 신자유주의로 발전한 자본주의는 인간의 삶만 파편화시킨 것이 아니라, 파편들의 충돌로 인해 높은 열(갈등)이 발생시켰으며, 이것으로 인해 각각의 파편들이 녹아내려 세상이 액체상태로 변화했다. 이에 따라 체제와 제도는 물론 그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유동하는 상태로 접어들었고, 불확실성이 증가함에 따라 위험과 두려움이 공포를 생성하며, 개인의 삶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바우만이 말하는 '액체화된 근대'의 출현과 '유동하는 공포'의 만연이란 이런 상태를 말한다. 이는 분명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가 '초위험사회'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현대성의 모토는 이렇게 출현했고, 잘게 쫗개놓은 시간의 관념에 맞는 삶을 영위하려면, 미래를 위해 현재의 만족을 미루지 않고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졌다. 



헌데 즉각적인 만족을 위해서는 '오늘의 사치품이 내일의 필수품'이 될 수 있도록 만들거나, '내일에는 내일의 신상품이 출시'돼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잘게 쫗개놓은 시간들을 만족시켜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돈이 부족해 오늘에는 사지 못한 사치품이 내일에는 가격이 내려 필수품이 돼거나, 오늘 채우지 못한 만족을 내일의 신제품으로 채울 수 있어야 싼 가격에 자신의 노동을 팔아서라도 구차한 삶을 이어갈 수  있다. 소비지상주의는 이렇게해서 일반화된다.  



결국 자본주의가 사회와 체제 속의 시민들을 개인들로 파편화시키는 과정에서 공동체와 가족이 해체됨에 따라, 이런 즉시성의 추구는 정신적 차원에서 충족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매일같이 쏟아져나오는 신제품들을 쉴새없이 광고하는 텔레비전과, 매일같이 지우고 덮혀지고 새로 업그레이드 되는 인터넷과 SNS가 최상의 매체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고, 개개인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적 지위로 격상했다. 



원래부터 다양한 나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시간을 잘게 쪼개듯, 자아를 여러 개로 쪼개 각종 사이트와 네트워크를 넘나들며 즉각적인 욕망과 쾌락을 탐닉하던 흔적들을 곳곳에 남겨놓게 됐고, 이것들은 쌓이고 축적돼 매체를 지배하고 있는 자들에게 개인의 취향을 꿰뚫어볼 수 있는 빅데이터를 구축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모든 광고주들의 꿈이었던 맞춤형 광고가 가능하게 됐고, 끝없는 매출 창출과 이익의 추구의 기반이 확고하게 다져졌다.  



이렇게 소비지상주의 시대가 우리의 눈앞에 도래했다. 끊임없이 대형마트와 쇼핑몰(홈쇼핑 포함)을 채워주는 신제품과 매순간마다 업그레이드 되는 정보와 지식들은 즉각적인 만족을 일상화시켰고, 먼저 쓰고 나중에 갚는 플라스틱 신용과 전자 신용의 발전은 파편화된 개인들을 빚의 굴레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충분히 예측가능한 결과를 회피하면서, 당장의 만족에 매달리는 이런 비합리적 선택들은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합리적인 선택으로 전도되고, 머리결마저 소중한 존재로 포장됨에 따라 미래를 위해 만족을 늦추는 것은 자신을 저버리는 배반의 행위가 됐다. 





문제는 이런 다양한 매체들을 운영하는 극소수의 전 지구적 지배 그룹으로 즉각적인 만족의 대가들이 흘러들어가는 데에 있다. 천문학적인 빚에 대한 이자는 그 자체만으로 천문학적인 수준에 이르렀고, 돈이 곧 권력인 세상에서 지배 그룹의 영향력은 텔레비전과 인터넷과 SNS를 중계도구로 활용해 존재하는 모든 것에 가격표를 붙이고, 돈이 되는 모든 분야를 독식할 수 있었다. 결국 모든 미디어가 지배 세력의 이익에 협조하고 봉사하는 시대에 접어듬에 따라, 미디어가 전해주는 콘텐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돈과 권력의 도구인 미디어 자체가 중요해졌다.                 

      


전 지구적 지배 세력의 광고와 협찬(과 미디어에 길들여진 개인들의 시청료)로 돌아가는 이들의 힘은 국가의 주권을 구성하고 있는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에 이은 제4부에서 이들 삼부를 좌지우지 하는 제1부의 역할을 할 정도로 영향력이 커졌다. 본질적으로 자유 시장 자본주의와 천상의 궁합을 가진 것이 미디어의 본질이어서 폭력적인 현대성의 폐해들은 몇 번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유동하는 공포’와 공간을 압축해 지배의 범위를 넓히는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 과실들은 극소수의 수중에 떨어졌음은 이제 상식의 영역에 자리했다.  



이런 극단의 불평등으로 귀착되는 폐해들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ㅡ뒤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ㅡ는 정말로 여러 번 있었다. 1929년에 발발한 경제대공황이 그 중에 하나였고, 2008년의 금융 대붕괴와 2011년부터 구조화된 유럽의 경제위기가 최근의 것이었다. 이렇게 현대성의 폐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인류ㅡ정확히는 전 지구적 엘리트와 국민국가 단위의 지역적 엘리트와 국제기구를 지배하고 있는 엘리트들ㅡ는 근대이성의 질주가 초래한 현대성의 문제점을 교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살리기는커녕, 아예 방향을 돌려 사회경제적 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와 관용의 정신을 실현한 복지국가의 잔재마저 일소시키는 퇴행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중심에는 욕망과 쾌락에 대한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행태를 끊임없이 부추긴 텔레비전과 인터넷, SNS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오랜 전부터 특정 세력에 의해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회주의의 몰락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세를 불린 급진적 자유주의자와 좌파에서 전향한 신보수주의자들이 자본과 권력의 주변부에서 핵심으로 포섭되는 과정에서 더욱 심화됐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들이 내놓은 새로운 통치이론(신자유주의)과 가치판단의 기준에 따라, 근대이성이 창출한 현대성은 사회적인 도덕규범에서 완전히 이탈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거대 금융자본과 초국적기업은 빛의 속도로 국경을 넘나들며, 천연자원을 바닥까지 착취하고, 무한대의 신용을 창출해 전 세계 부의 90%을 독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공존과 상생이 불가능한 이런 극도의 불평등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은 것이 아님에도, 전 지구적 지배 그룹은 부정적 세계화의 병폐들이 한꺼번에 터지는 그날까지, 갈 수 있는 한 최대한도로 가보자며 신자유주의의 엔진 출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있다. 자기조정 시장에서 발전한 자유시장과 사회적 생산관계의 변화로 등장한 자본주의, 새로운 통치술의 형태로 등장한 자유주의가 삼위일체를 이루면서 형성된 탐욕의 기관차가 빛의 속도까지 출력을 높이는 동안 지구와 인류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고,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는 폭발 직전의 단계에 이르렀다. 



지난 30년의 신자유주의적 폭주는 무엇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지구의 반격에 직면했지만, 전 지구적 지배 세력은 폭주하는 기관차의 속도조절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어쩌면 그들도 제어할 수 없는 속도에 이른 기관차를 멈출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정도 속도를 감당해낼 브레이크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을 전후한 지난 250년 동안 인류는 지구 역사상 5번째의 종말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고, 그 중심에는 인간의 성찰을 가로막아 즉각적인 만족의 포로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다양한 형태의 미디어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게네시스 2014.08.14 17:11

    기술은 발전하지만 우리가 중요해야할 인문학적인 분야나 윤리는 점점 사라져 가네요ㅠㅠ 그게좀 슬픕니다

    • 늙은도령 2014.08.14 19:55 신고

      네, 돈이 되는 사람들에게 과학과 기술 발전으로부터 얻는 이익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쌀 시장 전면 개방은 미국과 유럽의 거대기업농을 위해 녹색혁명(실제로는 녹색 착취)이란 명목하에 진행된 농축업 약소국에 대한 제2의 식민지화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고율의 관세화와 의무수입량의 급증을 들어 쌀시장을 전면 개방하겠다고 한 것도 이런 식민지화가 마지막에 이른 것입니다. 



우루과이 라운드로 대표된 농축산업의 신자유주의화는 17~18세기에 유럽을 지배했더 귀족과 고전파 정치경제학자들이 주장한 중농주의에 그 뿌리가 있습니다. 농작물 거래의 자유방임을 원칙으로 내세운 중농주의 정치경제학은 농작물의 자유무역을 통해 거대한 농지와 농노를 소유한 귀족과 대지주의 부를 불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미셀 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별도의 글로 올리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중농주의에서 시작된 농축산물의 자유무역은 지금의 신자유주의의 원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약소국일수록 피해가 크다는 것입니다. 현재 세계적인 거대기업농과 거대 금융자본에 장악된 농축산물의 자유무역은 상대적 약소국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밥상안전에도 빨간불을 켜고 있습니다.



                                                                      경향신문에서 인용


거대기업농과 농축산물 무역상들을 위해 출범한 중농주의적 자유무역은 선진국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GATT에서 WTO를 거쳐 우루과이 라운드까지 이어졌습니다. 전 세계적의 곡창지대를 거의 다 점령해 버린 거대기업농의 입장이 반영된 우루과이 라운드에서 상대적 약소국가의 농축산물시장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농작물의 자유무역에 관한 협정이 체결됐습니다. 



이 협정의 핵심은 농축산물의 자유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각국의 보호관세 장벽을 철폐하고 국제가격과 국내가격의 차이만큼 관세를 부여하는 '예외없는 관세화'만 허용하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 결정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데, 외국의 거대기업농이 기습적으로 가격을 낮춰 국내시장을 강타하면 사후 관세로 이득을 회수하는 것도 어렵고, 오랜 법정 다툼을 통해 이득을 사후에 회수했다고 해도 국내의 농축산물 시장은 도산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국내의 농축산업이 무력화되면 국제가격이 올라도 국내가격이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국내시장은 완전히 붕괴됩니다. 또한 우리의 몸에 맞지 않는 외국의 농축산물을 먹어야 할 뿐만 아니라, 농축산업 종사자들이 빈곤층으로 전락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복지비용을 대기 위한 국가의 재정이 심각한 위기에 처합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형태의 사회적 문제들이 속출해서 한국 사회의 골칫거리로 자리잡을 것입니다.   



이처럼 완전한 자유 경쟁을 강제하며, 우루과이 라운드에서 결정한 관세 이외에는 일체의 농업보조금을 금지하는 우루과이 라운드의 결정은 농업경쟁력이 떨어지는 나라를 위해 일정 기간의 유예를 두었지만, 이는 농작물의 자유무역을 지향하는 농업 분야의 신자유주의를 표방하기 때문에 농업 분야에도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이 적용됩니다. 거대기업농의 농축산물의 안전은 우리가 담보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정부의 역할은 무력화됩니다.


                                                                       연합뉴스에서 인용


문제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우루라이 라운드에서 체결된 협정은 국제가격의 변동 때문에 자국의 농업종사자들에게 발생하는 피해를 보조금으로 해결하는 유럽과 미국의 반칙을 제어하지도 못했습니다. 그 결과 상대적 약소국들의 농업시장만 거대기업농들에게 무방비로 열어주는 결과만 초래했습니다. 각국의 주식(우리의 경우 쌀)에 관해서는 식량주권 차원에서 우루과이 라운드의 결정을 거부할 수 있지만, 대신 의무수입이란 족쇄를 수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바로 이 조항 때문에 우리나라는 쌀시장의 개방을 허용하지 않는 대신ㅡ정확히는 개방을 유예하는ㅡ10년마다 두 배로 뛰는 의무수입양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이해당사자들과의 대화도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쌀시장 개방은 이런 배경 하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일본이나 대만처럼 고율의 관세를 부과해 쌀시장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정부의 의지에 달린 것입니다. 그것이 국제적인 협정이라 해도 각국의 정부가 자국민의 일방적 피해를 이유로 협정 이행을 거부하면 이를 강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국제무역에 관한 재판소 같은 것들이 있지만 이 또한 배타적 주권을 지닌 각국의 정부가 재판을 거부하면 강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왜 이러 미친짓을 해야 한다 말인가?



미국이나 유럽이 자주 사용했고, 지금도 이용하고 있는 무역보복이란 것들도 미국산 쇠고기 전면개방의 반대시위로 무산된 것처럼 여론의 힘을 빌어 정부가 강하게 나가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는 것이 쌀시장 개방입니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까지 수출기업들을 위해 식량주권을 우습게 여기는 바람에 이 지경에 이르렀지만, 지금이라도 정부가 일본과 대만처럼 외국산 쌀들이 경쟁력을 지니지 못할 만큼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면 그만입니다. 



제 아무리 우루과이 라운드라 해도 쌀시장을 지키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강하면 300만 명으로 줄어든 농업종사자들의 미래를 짓밟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국제적인 선례도 있기 때문에 정부가 강력한 의지만 표명하면 우리 모두의 조상이었던 농업종사자들을 외국의 거대기업농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습니다. 



소수에게만 부가 독점된 박정희 시대의 압축성장을 위해 농촌을 식민지화하고 뼈속까지 수탈했으면 이제는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식량주권을 잃어버린 나라의 미래란 외국의 거대기업농에게 우리 모두의 생명을 맡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경상수지 흑자를 주장하며 쌀시장 전면 개방을 밀어붙이는 통상관료들의 감언이설에 정부가 놀아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이명박 정부는 이런 거짓말도 했다



만일 박근혜 정부가 일본의 내각처럼 자국의 농축산물 시장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면 쌀시장 전면 개방의 충격을 최소할 뿐만 아니라, 역전시킬 수도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 1000%에 이르는 초고율관세와 농축산업에 대한 정부의 장기적인 지원으로 자국의 농축산업을 보호하는 것을 넘어 풍요롭게 하는 데도 성공했습니다.



자신이 주장하는 ‘줄푸세’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이런 사실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우루과이 라운드 전문가들만 있다면 우리나라의 쌀시장은 얼마든지 지켜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부는 언제든지 거짓말을 한다는 현실정치학의 절대 명제입니다. 쌀시장 개방은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식량주권의 마지노선마저 풀어놓으면 안 됩니다. 필자의 형님이 국내 최고의 권위자인 식품포장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장거리 이동에는 일정량 이상의 방사능 처리가 가해집니다. 기준치 이하의 방사능은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장기적으로 축적되고, 다른 것들을 통해 축적되는 위험물질의 종합적인 양으로 따지면 인간의 생명까지 커다란 위험에 노출됩니다. 



미국산 소고기에 이어 쌀시장의 전면 개방이 자유무역을 통해 소비자에게 저렴한 가격의 농축산물을 공급하는 것 이상의 문제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식량주권이란 소규모 농작을 하며 시장경제의 밖에서 살 수 있는 소농들을 보호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내부에 축적되는 온갖 위험물질들은 자식에게 전해지고, 우리의 미래세대를 더 큰 위험에 내모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박근혜 정부가 얼마만큼의 관세율을 부과할지 국민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에 해당합니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외국 정부와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기 위해 관세율을 천명하지 않는다는 것은 국민을 속이는 행위의 전형입니다. 만일 박근혜 정부가 형편없는 수준의 관세율을 상대국들과 맺는다면 이는 탄핵의 조건으로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1. 참교육 2014.09.19 18:50

    미친정부입니다.
    교육, 의료, 철도, 수도.... 전작권에 이어 주식인 쌀까지 시장에 내놓겠다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식량주권을 포기해 식민지를 자청하는 정부 완전히 미쳐 돌아갑니다.

    • 늙은도령 2014.09.19 20:59 신고

      정말 미친 정부입니다.
      최후의 먹거리들을 임기 동안 다 발라내겠다는 것입니다.
      정부의 기능을 최소화시키겠다는 뜻이지요.

  2. 重傳/이희빈 2016.01.04 09:43 신고

    경찰(警察), 검찰(檢察), 감찰(監察), 입법(立法), 사법(司法), 행정(行政), 모두 각자의 임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공직자들이 국민을 우롱하고 자기 자신이 맡은 임무와 책무를 다하며 심부름을 다하지 않고
    국민들 위에서 군림하려고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들입니다...
    문제는 이 땅의 중간 리더들이 잘못하여 이 치욕의 역사를 외면하고 무슨 민주주의를 하겠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나랏님도 못살고 떠나시지요?
    대한민국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의 현주소가 이렇습니다!
    http://cafe.daum.net/gmot/6L12/7679


 IMF와 세계은행, WTO라는 불경한 삼위일체를 앞세워 빈국의 돈을 부국의 자본과 기업으로 빨아들이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회복불능의 벼랑 끝에 몰렸다 해도 아직 그들의 공복을 달래줄 먹이감은 세계 도처에 넘칠 만큼 남아 있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말한  ‘자기조정 시장’이란 완전한 시장과 완전한 정보, 완전히 합리적인 인간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실현 불가능한 허구의 논리이다.





정부에 의해서도, 재벌에 의해서도, 독점기업에 의해서도 시장은 얼마든지 조작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경제의 불완전함이 만들어낸 전 세계적 차원의 사적독점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에 의한 공적독점보다 더 큰 문제들을 양산하고 있다. 무한경쟁에서 나오는 부의 독점과 소득불평등을 허용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은 세상의 모든 가치를 빨아들인 뒤 돈이라는 단 하나의 가치만을 내보내는 ‘사탄의 맷돌’을 영원히 돌리려고 한다.


 

거의 모든 규제를 거부하고 자유방임적 무한경쟁을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다자간 무역협정에서 벗어나 쌍방 간, 또는 소수의 국가나 지역 간의 자유무역협정이라는 배타적인 방식을 통해 투자자와 초국적기업, 상대적 우위에 있는 기업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시장경제 밖에 있던 사회와 공동체 및 가족마저 경쟁의 논리로 덧칠하니 이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시장논리에 따라 재구축됐다.



그 결과 가난한 국가의 빈곤은 더욱 심해졌으며 물질적 가치에 우선해 삶과 환경을 망가뜨렸고 민주주의를 저해했으며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패자들이 양산되고 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기준이 된 것은 조금만 노력해도 자수성가할 수 있었던 ‘언덕 위의 도시’이자 축복 받은 천혜의 대지인 미국에서조차 극도의 불평등을 초래한 것도 모자라 전 세계를 대공황으로 몰고 갔다.



 


인류와 자연이 밑바닥을 드러내며 완전히 고갈될 때까지 탐욕의 질주를 멈추지 않을 ‘자기조정 시장’이 이제는 디지털 세계인 사이버 공간으로 침투해 영원한 확장을 실현시키고 있다. 가족과 사회라는 최후의 보루로 지탱되던 아날로그 세계를 초토화시킨 중상주의와 중농주의의 산물인 ‘사탄의 맷돌’이 이제는 디지털 공간마저 하나씩 점령해가고 있다. 이들이 전면에 내세운 것은 지적재산권이라는 배타적인 권리로 사이버공간의 본질적인 가치마저 부식시키고 있다. 



사람의 모든 행위와 생각이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정보라는 형태로 거래되는 곳에서는 인류 모두가 생산자이자 소비자이기 때문에, 생산을 위한 재투자비용과 자원고갈 및 환경오염 방지라는 사회적 비용 면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디지털 세상에선 독점적 이익으로 귀결되는 ‘자기조정 시장’이 더욱 범람할 수 있다. 특히 정보가 교환되는 모든 곳이 시장인 사이버 세상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서 벗어나 실시간으로 거래가 성사되기 때문에 아날로그 시장처럼 대부분의 상행위를 감시하고 규제해 바로 잡기도 힘들다. 



극도로 파편화되고 익명화된 사이버 공간에서 국가와 역사, 전통과 문화, 계층과 계급 간의 협력과 유대란 갈수록 약해지고 퇴색되기 마련이다. 심지어 사이버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행위와 접촉은 ‘생각하고 성찰하는 인간의 두뇌’마저 퇴행시키고 있기 때문에, 모든 가치가 전자화폐의 이동과 즉각적 쾌락으로 압축되는 ‘디지털 사탄의 맷돌’이 무한증식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민주주의의 바다라는 사이버공간에 나타난 ‘디지털 사탄의 맷돌’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자유방임적 논리’와 ‘생존권에 우선하는 지적재산권’, ‘사생활의 실종’과 ‘인간의 뇌보다 똑똑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내세워 국가와 공동체만이 아니라 전체로써의 사회와 그 안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간 본연의 삶마저 더욱 빠른 속도로 파괴시킬 수도 있다. 우리가 사이버공간의 본질이 정보 접근의 평등과 자기 표현의 자유, 자율적인 정화 등을 통해 보다 공정한 사회를 창출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실 세계화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저개발국가 모두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면 인류 전체의 삶을 향상시킨다는 점에서 오히려 지향해야 할 목표라 할 수 있다. 제조업의 발달로 환경과 생태계를 대량으로 파괴하는 일도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무게 없는 세상의 도래가 점점 현실화되고 있다. 석유를 대체할 수 있는 먹거리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인류의 능력이면 다음 세대의 먹거리를 찾아낼 것이다.  



세계화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글로벌 불균형을 초래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추진되는 방식과 그것을 굳건히 떠받치고 있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나 초국적기업의 독과점'에 있다. 각국 정부도 건드릴 수 없는 사적독점을 만들어내는 이 두 가지는 세계의 부와 권력을 1%를 넘어 0.1%의 수중에 넘겨주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의 부는 수천 배 이상 늘어났지만 하루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절대빈곤층이 15~20억 명에 이를 정도니 인류는 성장해온 것이 아니라 퇴행해온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다. 



이런 부정적 세계화의 폐해를 경험한 국가의 시민들과 세계 각국의 시민단체는 자유방임적 경쟁만 줄기차게 외쳐대는 초국적 자본과 기업 및 각국의 통상관료완 거대언론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하며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Another World is Possible)’는 캐치플레이 하에 ‘공정무역’과 ‘사회적 정의’, ‘부의 재분배’, ‘기회와 결과의 평등’을 목 놓아 외치며 크고 작은 실천들을 통해 성공사례들을 축적하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무모한 믿음이 조금이라도 현실성을 띠려면 IMF나 세계은행, WTO 같은 국제기구들의 투명성과 공정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아울러 초국적 자본과 기업들도 이익 독점의 탐욕에서 벗어나 자유무역과 국제금융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자원 독점과 환경오염이란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지금보다 적극적인 사회 공헌을 통해 인류의 공존과 상생의 방안을 모색해야만 한다. 



세계 국가는 정글의 법칙이 난무하는 배타적 자유무역 위주의 정책에서 벗어나 국내 시장을 키우고 부의 재분배를 이루는 사회 안정망을 강화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지구상의 모든 국가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세계화는 이해가 다를 수밖에 없는 국가들이 최대한 참여해서 이루어진 국제협약과 민주적인 제도 하에서만 가능하다. 현재의 기득권을 내놓지 않으려는 초강대국과 초국적기업 및 거대자본의 일방적 요구를 공존과 공생의 장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아울러 거대 언론들은 극도의 상업화와 선정주의에서 벗어나 ‘권력에 대한 감시견’으로써의 역할을 되살려야만 한다. 지배 엘리트와 집중화된 권력을 감시하는 제4부로써의 언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들이 사적인 이익에 매달리지 않고 공공의 복리에 충실할 때만이 점점 촘촘해지고 상호 연관성이 높아가는 세계화가 더 이상 절대다수의 희생을 담보로 진행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본연의 역할을 다할 때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병폐가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질 것이며, 전혀 예상치 못한 불의의 난관이 닥친다 해도 세계화의 혜택에서 배제된 약자들이 가혹한 구조조정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 생존선 주변에 몰려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절체절명의 위험에 빠져들거나 아사하는 것을 막으려면, 그래서 그들에게 회생의 발판을 마련해주려면 각국의 언론이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 권력과 자본의 감시견으로써 본연의 의무에 충실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어떠한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는 보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시민들의 의식과 실천이 선행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구호는 그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반발 심리를 희석시키는 역효과만 만들어낼 것이다. 결과가 없는 외침은 최소한의 메아리도 이루지 못하는 법이기에 작은 결실들을 하났기 쌓아나가야 한다.  



또 다른 세상을 만들려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하는 모든 개인과 단체들은 세계화의 과실이 모든 사람에게 합당한 만큼씩 나눠지고 장기적으로는 기회와 노력과 결과의 상대적 불평등이 최소화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내가 바뀌지 않는 한 세상은 바뀌지 않으며, 내가 현재의 불평등한 체제에 탐욕적 이데올로기에 분노하고 연대해 투쟁하지 않으면 우리와 후대를 위한 또 다른 세상도 불가능하다는 것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또 다른 세상의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찌 ‘또 다른 삶이 가능하다(Another Life is Possible)’는 것을 믿지 못할 것인가. 절대다수의 난장이들(그 비율이 99%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이 주인이 되는 또 다른 세상을 가능케 하려면 그들의 삶을 지탱해줄 수 있는 완벽한 버팀목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역사적 결정론자, 칼 마르크스처럼 노동계급에 의한 무장혁명과 다수의 독재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철지난 휴머니스트의 치기 어린 바람이고 여러 층으로 분화된 현대의 계층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분적으로 닫힌 세계인 지구에서 그의 주장을 실현하려면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모돼 감당할 수 없는 무질서가 초래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악화로 현실적인 양화를 구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절대다수를 위한 새로운 질서를 확립한다고 해도 그것이 이전에는 없었던 무질서한 세계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면 이는 아니한 만도 못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결국 혁명의 핵심은 과다한 에너지 소비와 인명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비폭력적인 방식을 찾는데 있다. 혁명과 반혁명이 반복되는 역사의 전례를 되풀이한다면 어떤 체제도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영원히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과 그의 실천에 따라 비약할 수도 있으며 퇴행과 진보 사이에서 요동칠 때도 있다. 무한한 진보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지만 보다 많은 인류가 주어진 조건에서 최대의 행복을 이룰 수는 있다, 정의와 공정을 향한 우리의 의식과 실천이 선행되기만 하면.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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