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에 사토시가 블록체인에 기반한 비트코인을 설계하며, 채굴 가능한 코인을 2,100만 개로 한정한 이유는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최대 약점인 인플레이션(특히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려 히틀러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고 일본을 잃어버린 20년에 빠져들게 만든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물가상승의 또 다른 이름인 인플레이션은, 피케티에 따르면 경제성장률(노동소득률)보다 자본소득률이 언제나 높기 때문에, 소득과 부가 많은 상위층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사토시는 또한 2,100만 개의 비트코인을 8개의 소수 자리로 나뉘도록 설계함으로써 거래와 채굴의 활성화를 도모했는데, 이는 인플레이션을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지속가능한 성장을 담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치를 결합하거나 분리할 수 있는 이런 분할 때문에 단일 거래에서도 시간의 경과에 따라 가치가 변동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참여한 체인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다시 말해 참여자들의 서비스 사용이 늘어날수록 최초의 입력값과 다른 복수의 출력값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가치 변동을 이용해 참여자들은 지속적으로 서비스의 사용을 측정하면서, 최적의 시점에서 주기적으로 소규모 결제를 실행할 수 있습니다. 2,100만 개에 불과한 비트코인이 무한대의 거래를 창출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서비스 사용이 늘어날수록 비트코인 네트워크의 신뢰도는 높아지며, 금융시스템을 붕괴시키는 급격한 인플레이션를 초래하지 않으면서도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해집니다.





문제는 비트코인 네트워크의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한 사토시의 설계가 현실에서 작동하게 되면 뜻하지 않은 단점들로 돌변할 수 있습니다. 사토시가 이것을 알았던 몰랐던 간에, 비트코인 네트워크의 치명적인 문제인 거래 지연은 영원히 피할 수 없습니다. 가장 안정적이고 투명한 체인일수록, 다시 말해 참여자가 가장 많아 체인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거래 지연은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 때문에 해킹에서 자유롭다는 주장도 일본 거래소가 또다시 해킹당한 것에서 보듯이 현실과 차이를 보입니다. 



무어의 법칙(2년마다 반도체의 성능이 2배씩 올라간다는 주장)에 따른 서비스의 분산 속도가 아무리 빨라져도 체인의 길이에 따른 거래 지연은 이중 지불의 위험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특이점주의자를 비롯해 4찬 산업혁명 관계자들이 하늘같이 믿고 숭상하는 '무어의 법칙(2020~2025년 사이에 한계에 이를 것이다)'이 '무어의 위법(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것을 말함)'으로 둔갑하는 순간, 거래 지연은 비트코인 네트워크를 근본에서부터 붕괴시킬 수 있습니다. 서비스 사용을 끊임없이 관찰해야 하는 수고로움은 부수적인 피해에 불과합니다. 



또한 채굴비용이 비트코인 획득과 거래에서 얻는 이익보다 떨어지는 시점에 이릅니다. 블록이 더 이상 발행되지 않으면 비트코인 가격의 대폭락이 일어나고 천문학적인 거래비용을 챙긴 해커과 사기꾼들이 한몫 챙긴 채 익명의 바다 속으로 사라집니다. 수없이 많은 피해자들을 양산한 채 비트코인 블록체인은 금융사기의 최고봉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블록체인 기술은 타 분야에서 사용되겠지만 비트코인 블록체인으로 대표되는 P2P 금융거래는 종말을 고할 것입니다.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기 때문에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는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트코인 거래소의 서버 용량이 서비스 사용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까지 고려하면 신뢰의 네트워크(소액자기자본주의라고도 한다)는 신기루처럼 무너질 수 있습니다. 비트코인 블록체인은 국가의 부재를 전제하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구제 받을 방법도 없습니다. 최종 책임자가 있기 마련인 폐쇄적 블록체인의 경우와는 달리 국가의 부재 속에 이루어지는 공개형 블록체인에서는 각각의 참여자가 다양한 형태의 피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이를 막기 위해 실명제로 전환한다면 프라이버시를 지킨다는 본래의 취지는 완전히 무너져 본말이 전도되는 상황에 이릅니다. 



완벽한 기술이란 없다는 것까지 고려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비트코인 네트워크가 기존의 금융시스템을 대체할 만큼 성장하지 못하는 한, 다스라는 족쇄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명박이 고의부도를 시도하려는 것처럼, 목표한 수익을 거둔 후에 초기 참여자(얼리어댑터)들이나 작전세력들이 털고 나가면 후발 참여자의 피해를 만회할 방법이란 없습니다. 비트코인 네트워크를 재미삼아 공격하는 헤커집단(다양한 비트코인 블록체인에서 이들의 활동이 감지된다)들이 나온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아마존, 구글, 애플, 페이팔 등이 자신의 부를 유지하기 위해 비트코인 네트워크를 공격하거나 그들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수준에서 막고자 할 수도 있고요. 월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미국과 체제 유지가 중요한 중국, 유로존의 맹주가 되려는 독일, 정경유착을 유지해야 하는 러시아 같은 국가들이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비트코인 네트워크를 전용하는 경우에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엄청난 공간이 자리하고 있고, 공고하고 거대한 기득권 네트워크를 무너뜨리려면 10~30세대가 일치단결해야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엿볼 수 있습니다.    



P2P 네트워크로 이어진 태양광 패널들을 생각해 보라. 패널을 소유한 집주인은 지속 가능한 에너지를 생산하는 대가로, 블록체인에서 실시간으로 보상을 받는다. 개발자들의 커뮤니티가 엄청난 기여를 한 사람에게 코드 제공 대가를 보상해 주는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를 상상해 보라. 국가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라. 이는 생각처럼 어려운 일이 아니다.돈 탭스콧과 알렉스 템스콧의 《블록체인 혁명》에서 인용.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참교육 2018.01.28 07:01 신고

    어렵네요, 결국은 아는자와 모르는자 가진자와 못가진자...간의 싸움인 것 같습니다
    결국은 약자가 희생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 늙은도령 2018.01.28 13:34 신고

      블록체인 기술은 사실 사회주의적 이상향을 실현할 수 있는 기술입니다.
      문제는 사용자가 수천만 명에 이르기 전까지는 곳곳에서 허점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기득권들이 그들의 이익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용할 수도 있고요.

  2. 비트코인 우라늄 2018.01.28 08:00

    한국인이 만들어서, 돈벌고 있으면 모르겠는데
    일본 이름의 개발자, "사토시"가 창시하고, 결국에는 외국 거래소에서 주도하며 수수료 따먹고
    한국은 그저 돈 따박따박 상납하는 것 같네요.

    한국이 비트코인으로, 4차 산업의 선도?
    그냥 미국, 일본이 만든 사기성 가짜 화폐에 돈 따먹히고,
    주식처럼 한국인 개미가 외국인 투자자에게 쪽쪽 빨리고, 수수료 다 갖다 바치는 구조던데요.

    "김치 프리미엄" 한국만 비트코인이 가격이 미친듯이 비싼 것을 두며, 언론이 조롱하며 하는 말입니다.
    수수료도 20~30% 이상 비싸다고, 언론사에서 이미 나왔고요.

    심지어 한국은 전기료도 비싼데요. 기름, 에너지 낭비질에 뭔 짓이죠.
    왜 이딴거에 외국인이 만든 그래픽 카드 사고, ASIC 사면서 채굴하는지.

    한줄 요약 :
    비트코인 광란으로 한국은 하드웨어적, 소프트웨어적으로 모두 불리하게 돈을 상납하고 있습니다.

    • 늙은도령 2018.01.28 13:35 신고

      지금은 그러합니다.
      블록체인 기술의 좋은 예를 제가 제시해볼게요.
      그러면 블록체인 기술은 활용의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3. 공수래공수거 2018.01.28 11:31 신고

    앞으로도 꾸준히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블록체인과 비트코인 따로 두고 볼 필요가 있어 보이네요

    • 늙은도령 2018.01.28 13:36 신고

      둘을 하나로 합치더라도 좋은 방식에 사용하면 됩니다.
      제가 다음 글로 하나의 모델을 제시해볼 게요.



아무리 많은 사이비 학자들을 동원한다 해도 이윤 추구 외에는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 자유시장과 자본주의와 통치술로서의 자유주의(경쟁을 최대화하고 규제를 최소화하고, 시장경제 중심으로 국가가 돌아가도록 만드는 승자 중심의 통치술)가 손을 잡으면 부와 기회를 독점하는 극소수의 수중에 권력이 넘어가고, 절대다수의 사회경제적 약자들은 전체주의적인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평균적으로 따졌을 때 살아있는 날이 더 많다는 것이 절망적으로 다가오는 세대에게 꿈과 희망을 얘기하는 것은, 수십 년 동안 만성질환에 시달리는 병자에게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희망하던 내일이다'라는 말이 가장 끔찍하게 들리는 것과 같습니다. 희망고문과 열정패이가 일상일 때는 힐링마저 또 다른 절망의 연장에 불과할 뿐입니다.  





운이 좋아 양질의 일자리와 부의 재분배를 조금이라도 챙길 수 있었던 기득권 세대들은 어떻게든 나머지 삶을 이어갈 수 있겠지만, 출생 때부터 이것에서 배제된 중하위층의 1030세대들은 기득권의 식탁에서 떨어뜨린 부스러기를 두고 무한경쟁을 펼쳐야 생명이라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흙수저라도 올릴 밥상이라는 것이 아예 주어지지도 않았습니다. 



현존하는 최고의 경제학자 중 한 명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경제규모가 커질수록 불평등이 커지고, 사회경제적 약자일수록 극단으로 내몰리게 되는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항목으로 정리했습니다. 이런 퇴행적 현상은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확장됐으며, 공고화됐습니다. 특히 가장 신자유주의적 나라인 '헬조선'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첫째, 시장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누가 보기에도 시장은 효율적이지 않았고, 안정적이지도 않았다. 둘째, 정치 시스템은 시장 실패를 바로잡지 못했다. 셋째, 현재 경제 시스템과 정치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공정하지 않다. (그 결과) 미국을 비롯한 여러 선진 공업 국가들이 심각한 불평등을 (초래했으며) 이 세 가지 주제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불평등은 정치 시스템 실패의 원인이자 결과다. 불평등은 경제 시스템의 불안정을 낳고, 이 불안정은 다시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우리는 여러 악순환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어 가고 있다(스티글리츠의 《불평등의 대가》에서 인용).






이런 정치와 경제의 실패 때문에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앞선 세대가 남긴 것이 풍요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결핍인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빈약한 복지와 공정한 재분배를 감추기 위해 방임에 가까운 자유가 주어졌으나, 좋은 직업을 얻을 기회를 주지 않아 저임금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를 전전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세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 존엄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경제적 평등조차 박탈된 이들은 주로 1030세대에 집중돼 있습니다. 2015년 현재 30세 이하인 사람들은 지금처럼 엿 같은 현실이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고, 그 해결책마저 그들이 늙은 후에도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평생을 지옥에서 살게 되는 최초의 세대라 할 수 있습니다. 지구온난화까지 더하면 청춘들이 감수해야 할 빈곤과 위험의 정도는 무한대로 늘어납니다.



이들은 ‘자신이 원인 발생에 가담하지도 않았지만, 그 피해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고, 문제의 해결에도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최악의 세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로서는 전혀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없어 체념이 보편화되고 내면의 분노로 시달리는 ‘저주받은 세대’로 버려지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앞선 세대가 남긴 것을 따먹기는커녕 그들이 남긴 쓰레기를 뒤집어써야 하는 최초의 세대인 이들이 ‘헬조선’을 외치고 '죽장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절규하는 것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기득권 세대들이 나누려 하지 않고, 정부가 부의 재분배를 강제하지 않고, 재계가 따르지 않는다면, 1030세대에게 대한민국은 지옥과 다름없습니다.



이들이 해체된 가족과 무력해진 사회에 정착하지 못한 채 디지털 세상을 배회하는 것도 자유시장과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를 하나로 묶어 ‘지배의 변증법’을 만들어낸 기득권의 무제한적인 탐욕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부와 기회와 권력은 상층부에 쌓이고, 빈곤과 차별과 위험은 중하위층과 청년에게 전가되는 구조를 탈피할 때 최소한의 희망이라도 걸 수 있습니다.



지금은 혁명적인 변화가 필요하며, 청년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치적 힘을 쟁취할 때 '헬조선'의 악몽에서 벗어나는 첫 걸음이 시작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충분한 돈과 자원이 있으며, 소수의 기득권이 모든 부와 기회를 독점하지 않고 나누고자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인류는 미래세대의 것들마저 가져다 썼기 때문에 넘칠 만큼의 부와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1030세대의 미래를 포기한 나라에 어떤 희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5060세대와 정치권, 정부와 재계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들이 남긴 것으로 해서 1030세대가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의 세습과 생명연장의 꿈이 미래세대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다면 살아있는 자체가 치욕이며 부끄러움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8.12 08:41 신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자들의 고통을 알아야
    할것입니다
    정말 눈에 보이는것만 믿어서는 안될것입니다

    • 늙은도령 2015.08.12 16:36 신고

      네, 그래야 하는데 이 놈의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으니....
      답답한 현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2. 참교육 2015.08.12 09:17 신고

    막장 자본주의에 태어난 세대들.... 삶 자체가 비극입니다.
    가난이 죄가 되는 세상에 돈이 없다는 이유로 사람취급조차 받지 못하고 살아야합니다. 체제를 바꿔야합니다. 유럽식 사민주의로라도...

    • 늙은도령 2015.08.12 16:38 신고

      네, 자본주의 다음이 사회주의인데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를 고민할 때입니다.
      인류는 더 이상 자본주의를 고집하면 안 됩니다.
      이제는 사회주의로 가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혼합하면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칼 폴라니가 가장 잘 정리해 두었습니다.

  3. 일본의 케이 2015.08.12 09:29 신고

    가슴아픈 현실입니다. 받아들리기 힘든 현실...

    • 늙은도령 2015.08.12 16:43 신고

      청년들의 분노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들의 분노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울 생각입니다.
      어차피 제가 글을 쓰는 이유도 그것에 있으니까요.

  4. 耽讀 2015.08.12 13:36 신고

    개혁은 힘듭니다.
    민주혁명이 필요할 때입니다.
    민주혁명을 일으킨 후, 경제민주화와 정치민주주의 그리고 친일부역자들과 독재부역자, 자본부역자들에 대한 철저한 심판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한민국 미래는 암울합니다.

    • 늙은도령 2015.08.12 16:44 신고

      네, 민주주의의 혁명이 필요한 때입니다.
      정말로 혁명이 필요합니다.

  5. 다노시무 2015.08.13 12:52 신고

    오랜만이죠.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조만간 일이 생겨도 생길것 같네요.
    그러탐 같이 죽창을 들어야 하겠죠

    신기하게도
    제 카톡배경도 죽창사진
    입니다..ㅎㅎ

    그럼 더운데 건강 조심하세옹~~~^^

    • 늙은도령 2015.08.13 20:36 신고

      대단히 위험한 시기입니다.
      도대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에서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서민들에게는 최악이 될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나라를 말아먹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망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현대 미국 사회의 많은 부분은 예측 가능한 경력 향상, 임금의 꾸준한 증가로 그 특징이 규정되는 안정된 고용 관계 위에 토대를 두고 세워졌다. 내 집을 갖고, 자녀를 대학에 보내며, 공동체와의 유대 관계를 통해서 안정감을 찾는 등, 직장 밖에서의 삶의 질은 고용에 대한 위협과 불확실성을 제거함으로써 향상되어왔던 것이다.


                                                             ㅡ 카펠리, 로버트 퍼트남의 《나 홀로 볼링》에서 재인용




지난 일요일에 방송된 '김제동의 톡투유'에서,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는 지인이의 부모와 방청객으로 참여한 한 어머님의 얘기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안타까움과 절망, 희망과 힐링의 연속이었다. 필자는 지인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얘기들을 (상당히 재미없지만) 사회적 자본이란 관점에서 다루어보고자 한다. 지인이의 현재를 응원하는 마음과 미래를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사회적 자본이 탄탄할수록 잘 돌아가는 민주주의가 탐욕의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제어할 수 있었을 때 평생고용(이 글에서 말하는 평생고용이란 한 직장에서의 근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과 국민복지, 사회안전망이라는 공생의 제도가 자리를 잡았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 추구였지만, 직원들은 물론 가족과 사회 전체의 이익도 고려하며 공생의 삶이 가능했다. 이 때문에 국민이 존엄하고 탈락자를 방치하지 않고, 시민이면 누구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합의하고 조정해 실제적 결과를 이끌어내는 정치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평생고용(과 평생교육)에 기반했기 때문에 사회적 자본을 형성하는 다양한 공동체 활동 참여와 자원봉사나 헌혈처럼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개인은 안정된 직장과 수입으로 인해 평생에 걸친 삶의 계획을 세울 수 있었고, 그런 안정감에서 나오는 사회적 신뢰는 다양한 협력과 평화로운 공존을 이룰 수 있었다.



노동(감정노동과 가사노동 같은 비물질노동 포함)의 가치와 연륜이 인정되는 이런 사회는 일정 수준 이상의 사회경제적 분배가 이루어져 민주주의를 확장시키는 정치적 자유가 더욱 공고해졌고, 법 앞의 평등이나 정의실현이라는 열린사회의 실현이 가능했다. 국가 차원의 복지가 미흡해도 사회경제적 약자를 위한 지역 공동체와 사회가 작동할 수 있었다.





이런 세상을 전복해버린 것이 모든 영역에서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이 작동하도록 체제를 완전히 바꿔버린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완전히 압도하던 시절인 19세기로 돌아가자는 것이 신자유주의이니 평생고용을 기반으로 구축된 세계를 파괴하는데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단 40년 만에 평생고용에 기반한 안정적인 세상은, 생산 증대와 이익 독점만 신경 썼을 뿐, 평생고용이나 누진적 조세제도처럼 부의 재분배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됐던 무한경쟁의 19세기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부와 권력의 불평등이 심해졌고, 사회적 자본은 적은 위험도 막아줄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다.



‘경제가 곧 대기업의 이익’을 말하는 시대가 도래했고, 민주주의는 독점 자본과 권력이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위에서 찍어 누를 수 있는 국가공권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변질됐다. 벤야민의 말처럼 ‘야만적이지 않은 문명은 없다’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한 억압과 착취의 시대가 고착화됐다. 지인이 같은 장애인들은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고 형편없는 감호시설로 보내졌다(미셀 푸코의 《광기의 시대》에 자세히 나와있다).  





시장자유주의 우파라는 공통점으로 이어진 이명박근혜 정부가 평생고용에 기반한 사회체제를 집중공략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 결과 고용의 불안정과 부의 불평등, 위험의 사회화가 일상화됐고, 용산참사와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자살, 세월호 참사, 경주리조트 붕괴, 메르스 대란처럼 막을 수 있었던 비극들이 계속해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쟁이 클수록 효율성과 생산성이 높아진다고 배웠고,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승자독식을 이룩한 개별기업 차원에서만 진실인 신자유주의 신화를 무너뜨리지 않는 한 제2, 제3의 용산참사와 세월호 참사, 메르스 대란 등은 더욱 빈번하게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배제되고 격리되고 위험에 노출될 확률이 높은 지인이와 부모에게는 하루하루가 두려움과 절망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소비만 하고 살 수 있도록 진화하지 않았고, 오늘만 사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사회는 불안정해지고 위험해지며, 효율성과 생산성도 하락하고, 상호신뢰와 이타심, 호혜성 등의 사회적 자본도 구축될 수 없다. ‘김제동의 톡투유’에서 지적장애아(지인)의 부모가 세상이 공격적이고 배타적이 됐다고 말한 것도 사회적 자본을 파괴시킨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축적된 결과다.



우리 모두가 지인이의 부모가 될 수 있고, 지인이가 걸어가야 할 길을 밝힐 수 있고, 지인이와 함께 걸어갈 수 있으려면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를 거둬내야 한다. 권력과 자본이 사회적 자본을 파괴하고 서로가 서로에 대해 영원한 타인이자 물리쳐야 할 적으로 인식시킬 때 인간은 일베처럼 짐승 이하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부의 재분배가 뒤따르지 않는 경제성장이란 말에 속지 말라. 1%의 식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나눠주는 것을 민생이라고 포장하는 말에 속지 말라. 경쟁과 불평등을 강조하기 위해 공짜점심이 없다는 말에 속지 말라. 타인의 것을 빼앗는 성공을 미화하기 위해 실패는 개인 책임이라는 말에 속지 말라. 극소수의 무임승차를 부각시키는 복지담론에 속지 말라. 상위 1%에 부와 권력과 기회가 독점되고, 그 폐해는 하위 99%에게 전가되는 세상은 그런 새빨간 거짓말들이 보편적 진리인양 호도되면서 이루어진 결과다.



하물며 생존선 근처의 삶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을 지옥으로 만드는 이런 세상이 지인이의 미래를 어떻게 보장할 수 있단 말인가? 신뢰와 협력, 호혜성의 문화를 높이는 평생고용이 인류의 자산 중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다시 깨닫게 됐을 때, 인류는 비로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서 벗어나 공존과 상생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 



누진적 증세는 언급도 하지 않은 채 임금피크제와 일자리 나누기를 얘기하기 전에, 비정규직의 확대 적용과 노동유연화를 통한 경영효율성을 주장하기 전에,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신뢰, 이타적 협력과 평등한 자유를 구축할 수 있는 소득 보장과 복지 제공이 가능하도록 만들 때 우리 모두는 지인이의 가족이 되고 친구가 되고 동료가 된다.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탄생으로 인해 차별받지 않을 때, 불평등하게 주어진 조건과 공정하지 못한 경쟁이 현재를 넘어 미래의 삶까지 결정하지 않을 때, 개인으로서나 조직의 일원으로서나 노동의 대가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삶의 질이 보장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고, 지인이의 동료나 친구로서 삶이라 길을 동행할 수 있다.   




P.S. 로버트 퍼트남과 수많은 석학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필자 역시 마찬가지로, 태어났을 때부터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체험한 밀레니엄 세대들이 사회의 주류가 됐을 때 사회적 자본이 다시 회복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아래로부터 더 많은 정의와 평등, 협력이 이루어질 때 생존선 이하의 각자도생에서 벗어나 존엄한 존재로서의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7.21 08:27 신고

    불편한 시선을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얼굴에서 묻어 나올수 있는 따뜻한 배려가 진정으로
    필요할때입니다

    • 늙은도령 2015.07.21 15:16 신고

      세상이 갈수록 험악해지는 것이 자본주의의 끝물에 나오는 현상이라 이를 어떻게 극복할까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 백순주 2015.09.06 08:01 신고

    세종에 중증 장애학생들을 위한 '세종누리학교'가 조용히 첫 개교를 했습니다. 개발이 한참인 중심에서 벗어나 산 아래턱에 일찌감치 터를 잡았습니다. 일선 학교에서는 장애아들이 예체능 과목만 통합운영 되고 있습니다. 나머지 주요과목은 '개별학습실'에서 공부합니다.

    특수교육학개론 수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엔 두 부류의 엄마가 있다고 합니다. 장애아 엄마와 비 장애아 엄마.
    왜 이들이 무서워지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우린 그 이면보다 보여지는 현상에 집중해서 얼굴을 찌푸립니다.
    무엇이 화나게 하는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 들여다 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그렇습니다.

    존엄한 존재로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날은 함께이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 늙은도령 2015.09.06 09:12 신고

      네, 대단히 중요한 얘기입니다.
      소비지상주의가 극에 이르면 외모에 대한 호불호가 너무나 강해집니다.
      보기에 좋은 것만 쫓게 되고, 그것이 성형이나 지나치고 너무 어린나이부터의 화장 등에 매달리게 만듭니다.
      남성도 이제는 화장과 성형을 주저하지 않으니 외모에 대한 강박이 더욱 커졌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외국인들과 얘기하면 한국여성은 너무 날씬하다고 합니다.
      참으로 무서운 얘기인데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소비지상주의는 외모를 가꾸는 것을 부추기고 젊음에 집착하게 해서 멋있게 늙은 것을 회피합니다.
      이것이 쌓이면 세대간 갈등의 원인도 되고, 노인을 경시하는 것, 늙지 않기 위해 더욱 소비하고 성형하고 화장하게 만듭니다.
      결국 노후자금을 만들 수도 없고, 상위 1%만 좋은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까지 소비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장애아들에게 복지를 제공하고 통합교육을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자본주의의 무서움이 이것입니다.
      예쁘고 아름답고 보기 좋으면 좋은 상품으로 인정되듯이....




문제는 텔레비전이 오락물을 전달한다는 점이 아니라 모든 전달하는 내용이 오락적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ㅡ 닐 포스트만의 《죽도록 즐기기》에서 인용




인터넷과 SNS가 보편화된 지금에도, 거의 모든 정치학자들과 언론‧방송학자들은 텔레비전이 정치에 미친 영향이 측정불가능할 만큼 크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인터넷과 SNS에 익숙한 세대가 사회의 주축을 이루면 다른 판단이 나올 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텔레비전의 영향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인터넷과 SNS 상에서 다루어지는 컨텐츠의 원천이 거의 다 TV에서 나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해 다루었기에 이번 글에서 그에 대한 근거를 대는 것은 필요없으리라 봅니다. 





신자유주의 통치술이 일반화된 미국과 일본, 한국에서는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정치행위의 상당 부분이 돌아갑니다. 《죽도록 즐기기》의 저자, 닐 포스트만의 주장처럼 텔레비전은 자본과 권력의 광고와 협찬, 지원 등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의 정수입니다. 권력과 자본을 위해 돌아가는 신자유주의 통치술과 텔레비전이 한 몸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국민의 의식수준을 형편없이 떨어뜨린다고 해서 ‘바보상자’로 불리는 텔레비전이 처음 도입됐을 때, 정치인과 언론학자들은 전혀 다른 예상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텔레비전이 만들어낼 세상에 대해 온통 장밋빛 전망만 내놓았고, 정치의 수준과 민주주의가 한 단계 높아질 것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쏟아냈습니다. 방송생태계가 망가질대로 망가진 대한민국의 현실을 감안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칭찬들이 난무했습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주니어(대통령의 아들) : 텔레비전이 정치를 집안으로 가져옴으로써 ‘국가정책을 이끄는 사람들과 정책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나라 전체에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유권자에게 더 지적이고 일치단결된 행동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들은‧‧‧스스로 더 많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오린 던랩(최초의 뉴욕타임스 텔레비전 기자) : 카메라가 ‘정치의 빛과 그림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술책을 부리기가 더 어려워졌다. 그 어느 때보다 말과 얼굴 표정의 진정성이 중요해졌고, 정치 지도자들 또한 우리는 투명하고 지적인 정치가 열리는 순간을 앞두고 있다. 정치 후보들이 ’과거 정치인들이 역사를 바꾸고 만들어낸 호텔밀실이 아니라 국민의 앞에서 지명될 것이다.


토마스 듀이(1944년 194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 텔레비전은 엑스레이다. 정부의 사업을 모르고 있다면 그 날카로운 광선과 극명한 사실성을 오래 버틸 수 없다. 정치 운동에서 건설적인 진보를 이뤄낼 것이다.


제조업체 : 최초의 텔레비전 출시를 알리는 신문광고 중에는, 텔레비전이 보통 사람들에게 정치를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상품의 이점으로 강조한 광고가 많았다(리처드 생크먼의 《우리는 왜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가》에서 인용).





이런 잘못된 예측 때문에 정치와 텔레비전의 불륜은 모든 가정을 파탄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텔레비전 시청자가 정치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게 됨에 따라 모든 정치인들은 텔레비전에 노출되는 숫자가 늘어날수록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국민을 이분법의 노예로 만들려던 박정희가 흑백TV를 포기하고 컬러TV를 허용한 것도 시대적 변화를 더 이상 거역할 수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통치수단으로써의 텔레비전의 위력에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이재명이 연상된다).  



시청자인 국민은 그렇게 정당(계급과 계층적 이익을 대변하는, 즉 나의 이익을 대변해주는)과 정치인과의 직접적인 대면으로부터 멀어져갔고, 현장에 있는 느낌 때문에 방과 거실에 고립된 유권자로 파편화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루스벨트, 케네디, 레이건, 부시, 오바마, 트럼프에 이르기까지 1930년대 이후의 미국 대통령들은 텔레비전과의 불륜을 포기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정당의 후보를 선출하는 전당대회에서도, 심지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알려야 하는 무소속 후보도 정치의 맨 앞자리를 차지한 시청자를 향해 뜨거운 구애를 해야 했습니다. 정치는 그렇게 시민들을 능동적 참여의 현장이 아닌, 자신의 방과 거실로 물러난 채 카메라 앵글 속의 정치인의 언행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유권자로 변화시켰습니다. 정치인과 유권자 사이에 텔레비전이 들어섬에 따라 정치는 오락화되고 개인화됐으며, 이미지 마사지에 속아 철저한 검증에서 멀어졌습니다.



하지만 일방적이고 즉각적인 이미지 전달을 통해 생각하는 능력을 갉아먹는 ‘바보상자’라는 텔레비전의 본질에는 추호의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자본과 권력의 논리대로 움직이는 텔레비전은 맹자와 플라톤이 그렇게도 걱정했던 ‘무지하고 우둔하고 멍청한’ 국민들을 양산했습니다(TV를 많이 보지 않는 1020세대는 다르다). 아주 간단한 정치조작과 상징조작, 정보와 이미지 왜곡에 쉽게 넘어가는 그런 국민 말입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텔레비전의 지각방식이 인쇄를 통한 지각방식에 철저하게 적대적이고, 텔레비전을 통한 의사소통은 모순과 하찮음을 조장하고, '진지한 텔레비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텔레비전은 오직 한 가지 소리(오락의 소리)만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즉, 텔레비전은 시청자가 생각하지 않도록 만듬으로써 (의심하는 기능을 마비시키며) 방송의 지배력을 높입니다. 대한민국을 말아먹고 있는 종편의 성공도 똑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게다가 “텔레비전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린 시청자란 있을 수 없고, 텔레비전 없이 지내야 할 정도로 열악한 빈곤도 존재하지 않으며, 텔레비전의 영향을 받고 변질되지 않은 수준 높은 교육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우리 모두는 카메라가 잡은 제한된 각도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브라운관에 비치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이 없는 집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라면, 정치의 하향평준화는 극단에 이르렀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텔레비전 시청자들에게는 보는 것이 곧 믿는 것과 동일시됐으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우리의 속담처럼 국민들은 스크린의 포로가 됐습니다. 시청자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정치인의 표정과 동작, 말과 호흡까지 지켜봤기 때문에 그가 본 정치인이 그 정치인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인간이란 동물이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이 되는 방향으로 진화해온 것도 텔레비전의 성공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시청률조사와 동일한 메커니즘을 가진 여론조사의 활용은 “1950년대와 1960년대, 대중이 대단히 무지하고 비합리적이며 우리 정치가 신화에 의해 이끌려가고 있다는 증거가 축적되기 시작하던 바로 그 시기에, 정치 시스템은 과거 어느 때보다 대중에게 직접적인 지배권을 주는 방향으로 재편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조작되기 일쑤인 여론조사가 정치의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지위로 격상된 것입니다. 



“일단 여론을 과학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해지자 아무도 그것이 파악해야 하는 것인지 당위를 묻지 않았”고, “여론조사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 됐습니다. 최근에는 대중을 넘어 국민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고 두려워하고 바라는지를” 알기 위해 매주 다양한 여론조사가 이루어지고, 어떤 필터링도 거치지 않은 채 텔레비전을 통해 국민의 안방과 거실을 점령해버렸습니다. 



과학적이라는 전제가 붙어있기에, 일단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면 정치인들은 그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박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어서 정치적 자살행위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특정 사안과 이슈에 대해 명확한 의견이 없는 국민들은 여론조사기관에서 작성된 질문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임에도, 이에 대한 객관적인 검증도 없이 여론조사결과는 전파를 타고 시청자에게 전달됩니다.



조작되기 일쑤인 여론조사를 권위의 원천이자 시청자를 조정하는 핵심 수단으로 장착한 텔레비전은 정치의 수준을 갈수록 하향평준화시켰습니다. 광고와 협찬의 지원 하에 모든 것을 오락화하는 텔레비전은 출발의 시점부터 시청자들을 더 멍청하게 만들도록 설계됐지, 똑똑하거나 현명하게 만들도록 설계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방송종사자들은 시청자에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프로그램이 최악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국민들이 권한을 책임 있게 행사할 가능성이 적어진 바로 그 시점에 (권력과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기 일쑤인 여론조사와 텔레비전이 일반화됨에 따라)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권한이 국민들'에게 넘어가면서 정치의 하향평준화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텔레비전의 보급을 막을 수 없는 일이고, 여론조사를 하지 않도록 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은 피할 수도 없었습니다.  





토크빌의 성찰처럼 “국민이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지는 것처럼, 미디어 또한 수준에 맞는 미디어만 가질 수 있”게 됐습니다. “만약 대중이 정치인들이 유포하는 신화를 기꺼이 수용하는 미디어를 원한다면, 우리는 바로 그런 미디어를 가질 수 있”으며, 이명박근혜 9년 동안 친일수구세력의 영구집권을 위한 종편들과 보도채널(연합뉴스TV), 지상파3사의 활약은 무소불위의 경지에 오르기도 했었습니다.



민주주의가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최상의 체제로 굳어진 현실에서 국민에게 제대로 된 정보와 사실(진실)이 전달되면 최상의 선택을 할 것이라는 국민신화에 도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국민에게 왜곡된 정보와 사실(진실)을 전달하는 쓰레기 방송들의 일탈과 막장질을 막으려면 텔레비전 시청을 최소화하고, 가짜뉴스를 필터링하는 습관을 키우고, 정치 참여를 늘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텔레비전이 삶의 일부가 된 사람들이 당분간 줄어들지 않을 것이란 점에서 이런 비관적 전망은 마냥 부인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이것에 더해 인터넷과 SNS가 텔레비전의 콘텐츠를 확대재상산하는데 머물고, 정치적 영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고 집단적 결정을 이루는 하위정치의 공간이자 민주주의의 학습장으로 발전하지 못하면 민주주의의 후퇴는 피할 수 없습니다(우리는 노무현의 죽음에서 집단적 성찰에 들었고 촛불혁명으로 이를 극복하는 과정이다). 



인터넷과 SNS가 양질의 콘텐츠를 생산하고, 정치적 양극단에 위치한 사람들의 감정적 배설과 언어 폭력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작동불능의 상태에 이를 것입니다. 반대의 결과를 이룩할 경우에는 민주주의는 보다 넓어지고 단단해질 것이며, 수많은 정치철학자들과 석학들이 모델링한 진정한 민주주의로서의 참여·직접민주주의가 한 발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


안철수와 이재명처럼 결격사유와 하자가 많은 인간들이 지도자급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미디어의 위력을 말해줍니다. 안철수는 TV 예능프로그램이 만든 허상이었지만 '안철수 현상'이란 새정치의 주인공으로 포장되고 인식될 수 있었습니다. 이재명은 촛불집회와 각종 광고를 통해 자신의 업적을 뻥튀기하고,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이미지 세탁에 성공할 정도로 선전과 선동의 도구로 미디어를 활용하는데 도를 튼 정치선동가(히틀러와 스탈린가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인류의 발전과 민주주의의 확장은 그 빌어먹을 1%의 희망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명박근혜 9년의 역주행도 그 빌어먹을 1%의 희망 때문에 촛불혁명으로 타올 수 있었습니다. 깨어난 시민의 행동하는 양심이 1%의 희망으로 99%의 절망을 대체하는데 성공한 것이지요. 이재명도 안철수처럼 미디어(텔레비전)가 만든 허상의 정치인임을 깨닫게 된다면 작금의 지지율도 역전시킬 수 있습니다. 문프가 주도하고 있는 평화협정 체결은 말할 것도 없고요.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5.28 08:38 신고

    TV 의 순기능이 많은데 역기능적인 부분이 순기능을
    압도해 버립니다
    그것을 보는 국민들이 걸러 볼줄을 알아야 하는데 곧이 곧대로 보고
    믿으니 종편을 비롯 모든 방송들이 진실을 외면하고
    사실을 호도하기 급급합니다

    수구 언론에 반하는 방송들이 나와야 합니다

    • 늙은도령 2015.05.28 14:42 신고

      네, 텔레비전이 정치를 망치는 것은 미국, 한국, 일본 등입니다.
      유럽은 덜한 편인데 유독 한국은 미국만 쫓아갑니다.

  2. 耽讀 2015.05.28 08:43 신고

    진보는 종편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나이든 사람과 보수만 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식당이나, 병원을 가면 하루 종일 종편에 틀어줍니다.
    진보는 종편이 만들어질 때, 허가 반대 외칠 것이 아니라 진보언론과 진보세력이 온힘을 다 해 채널 하나라도 개설해야 했습니다. 조중동 중 하나라도 탈락시켜고, 그 중 채널 하나를 확보했다면 언론지형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 늙은도령 2015.05.28 14:44 신고

      보수 반동이 너무 진행돼 진보적 가치를 근본적으로 다시 살리고 재정립하지 않으면 이런 상태로 계속갈 것입니다.
      작은 소규모 공동체를 계속해서 만드는 것이 최상인데,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에 치이다 보니 아무것도 못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요즘은 절망적입니다.

  3. 달빛천사7 2015.05.28 09:31 신고

    요즘은 1인 미디어가 많긴 하지여 블로그 미디어가 제일 낳긴하네요 .

  4. HowlS 2015.05.29 03:18 신고

    공감하고 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5. 최홍대 2015.05.29 11:51 신고

    이명박 대통령이 저렇게 가볍과 의미없게 보일줄이야..국민수준이 그랬던것 같아요.

    • 늙은도령 2015.05.29 14:37 신고

      그렇지요, 우리는 경영과 정치를 혼동하기 쉬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6. evitamins 2015.05.30 06:08 신고

    공감하고 갑니다. 좋은글 읽으러 종종 놀러오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7. CheekyNaru 2015.05.30 18:42 신고

    잘보고 갑니당~!!

  8. 아줌 2015.05.30 19:38

    정몽준 아들이 어느정도는 옳은 말을 한듯...요. 국민수준에 딱 맞는 통령... 미디어를 갖고있죠....

  9. 그렇지? 2015.05.31 03:34

    동감입니다

    • 늙은도령 2015.05.31 03:47 신고

      네, 걱정입니다.
      보수 반동은 미국에서만 성공한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성공했습니다.

  10. Abricot 2015.05.31 11:39 신고

    여러모로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네요.

  11. 썸띵 2015.06.17 14:42

    오타나셨어요. 마지막에서 세번째 문단에 가길을 가질로 바꾸셔야 해요. 정독했는데 사실이고 지금도 하향평준화되는 중이라 씁슬하네요. 오락물을 많이 볼 수 밖에 없는 구조도 한목 한 것 같아요.(낮은 임금에 비해 값비싼 외부활동), 저조차도 이제는 이런 장문 읽기를 꺼려한다는게 정말 무섭고 부끄럽네요. 초등생부터 이런 내용의 교육을 받으면 정말 좋겠어요.독서도 많이 하고요..

    • 늙은도령 2015.06.17 00:57 신고

      네, 수정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오타는 저의 한계이니 이렇게 정독하시는 분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독서는 이제 정말로 필요한 것이 됐습니다.
      인류는 퇴화하는 쪽으로 발전의 방향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12. specialist 2015.07.20 22:42

    항상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한번쯤 왜 이럴까 하고 생각하면 여지없이
    그에 대한 현상을 분석하시고 글을 주시네요...
    답답한 사람들 훈계하고 상대하시느라 피곤하실텐데 대단하십니다. 이말밖에는...ㅎㅎ

    • 늙은도령 2015.07.20 23:00 신고

      아닙니다, 저도 꾸쥰하 공부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볼 수 있으니 노력하는 것이지요.


2008년 이후 장기적인 경제대침체에 빠진 유럽과 미국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중국은 자국의 시장을 개방할 때부터 국가자본주의를 선택했지만, 아무리 국가에 의한 인민 통제를 강화한다 해도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한 중국의 추락도 시간문제이지 예외적인 성공을 거둘 수는 없다.



당장 중국을 공포와 질병의 도가니로 몰고 가고 있는 스모그 현상만 해도 중국의 압축성장이 한국에서처럼 얼마나 많은 환경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갈수록 커지는 불평등은ㅡ2차세계대전 이전의 유럽이 그러했듯ㅡ중국을 개발된 지역과 미개발된 내부의 식민화로 양분하며 이중 사회의 전형적 폐해들을 양산하고 있다.



중국에서 ‘묻지마 범죄’가 증가하고, 테러의 발생빈도가 늘어나는 것도 이중 사회적 병폐의 전형 중 하나이다. 시기와 문화적 결과에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기본적으로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채택하면 어떤 나라도 이중 사회적 병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현재의 중국이 보여주고 있다.





중국이 국가자본주의를 선택했다고 해서, 근대이성이 약속한 진보의 마지막 단계인 후기산업사회에 접어들면 그 단계를 거친 국가들에서 발생한 문제들이 거의 똑같이 발생한다. 어쩌면 타의추종을 불허했던 저렴한 인건비(노동 착취)와 지독히 관대한 환경규제(생태계 파괴), 권위적인 정부에 의한 안정적인 환율관리(시장 왜곡)를 내세워 세계의 공장을 자처했던 중국에서 무한한 진보가 초래한 파국적 결말이 가장 적나라하게 펼쳐질 수도 있다.



게다가 세계 어떤 나라도 13억 5천만(이중에서 5~7억 명이 절대 빈곤층) 명이 넘는 인구를 관리해본 경험이 없어, 무한한 진보가 유발하는 병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올 경우 이를 제어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주 낮을 수밖에 없다. 중국이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내세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병존에 상당한 성공을 보여준다 해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공장과 가정에서 배출되는 온갖 오염원들을 관리한다는 것은 신이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에 사적독점의 확대와 각종 부패의 고리, 부의 불평등의 확대, 과소비와 개인주의의 확산 등이 더해지면 중국의 미래가 장밋빛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런 암울한 전망은 인구가 중국에 버금가는 인도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지구온난화의 속도를 감안할 때, 중국보다 인도의 급속한 변화가 인류에게 더욱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인도는 중국처럼 국가자본주의를 들고 나올 수 없을 만큼 민주화된 국가이자, 봉건시대의 계급제도가 여전히 횡행하고 있는, 국가적 차원의 일관된 관리가 불가능한 거대 국가이기 때문이다.





결국 전 세계 인구의 40%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과 인도를 포함해,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도입한 국가들에서 근대이성이 약속한 ‘계몽의 변증법적 행진’이 파국적인 ‘초위험사회’로 접어들수록, 인류의 미래는 삼척동자라도 예언할 수 있는 암울한 결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될 파국적 결과가 인류의 총체적 종말로 이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근대이성의 결과물인 현대성이란 영원히 끝나지 않을 홀로코스트의 역사이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며, 자연의 배제와 인류의 소외가 동시에 진행된 폭력의 역사였다. 이런 병폐들이 쌓여 세상은 초위험사회로 접어들었고, 최소한 개인적 빈곤과 환경적 불리함이 교차하는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할 비대칭적 종말(최소 수천만 명에서 최대 수십억 명의 죽음이 예상되는)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런 병폐들이 쌓이고 축적돼 극단에 이른 작금의 현실에서 삶의 모든 단계마다 타인에 대한 불안함과 두려움과 우발적인 폭력의 형태로 폭발되는 것도 당연한 과정이자 부정적 결과일 수 있다. 1%의 승자의 세상에선 연일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만의 리그에 진입할 수 없는 99%의 패자의 세상에선 노동예비군도 되지 못하는 잉여들이 나이가 어릴수록, 비정규직을 전전해야 하는 여성일수록, 빈곤과 위험의 악순환에 빠져버린 무능력자일수록 쓰레기로 퇴출되거나, 존재의 근거마저 삭제되고 있다.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에서 폭주하는 기차를 세우지 않는 한 존재의 사슬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부터 비대칭적인 종말은 피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위대한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과 수많은 석학들의 주장처럼, 시야를 가리는 짙은 안개 때문에 앞을 볼 수 없다고 해도, 인류가 파국적 결말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면 폭주하는 기차부터 멈춰 세워야 한다.





그런 후에 기차에서 내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빨리 얼마나 멀리 달려왔는지, 우리가 지나온 모든 곳에 얼마나 많은 파괴의 잔해들이 쌓여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문제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 누가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모두가 있는 힘을 다해 살펴보고 토론해서 탈출의 단초라도 찾아야 한다.



많은 석학들이 이에 대해 고민했고 지속적으로 떠들어댔으며, 일부는 소리 높여 강력한 경고를 보냈지만, ‘탐욕의 삼위일체’의 노예로 길들여진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했고, 저들은 우리가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하기 위해 정치경제의 엘리트들과 급진적인 지식인과 대중매체를 동원해 상징조작을 일삼았고, 현실 왜곡을 서슴지 않았다.



이중에서도 ‘탐욕의 삼위일체’를 위해 권력과 자본의 노예로 전락한 대중매체와 그들이 각색한 문화의 영향이 컸다. 모든 것을 오락화하고 상업화하는 대중매체와, 패션과 유행으로 대표되는 선정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대중문화는 ‘탐욕의 삼위일체’가 파시즘적 속도로 중하위층의 지갑을 털어갈 수 있도록 사람들의 인식과 행태를 조금씩 소리 없이 소비의 노예로 변질시켰다. 



대중문화는 그렇게 지배세력이 원하는 체제를 구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거기서 벗어날 수 없도록 각종 검열조치들을 강화해나갔다. 지배세력이 거대한 광고비용을 지불하고 각종 협찬을 지원하는 대신 시청자에게 전달될 콘텐츠의 내용을 일정 규칙체제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강제성이 있는 각종 방송심위규정들과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는 연령제한이나 등급제를 도입해 새로운 소비시장을 형성할 수 있는 자유만 주어졌을 뿐, 주어진 틀이나 체제를 뒤집어버릴 내용은 사전 검열을 통해 걸러냈다.  

     


이렇게 가장 많은 자유가 주어져야 할 대중문화가 대중을 상대로 한 문화산업의 형태로 한정된 결과, ‘탐욕의 삼위일체’는 돈이 된다면 패자의 기억과 영혼도 무덤에서 끌어내 대중에게 판매할 수 있는 유사 전체주의적 시장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들은 또한 개발과 성장의 부작용 때문에 급증하게 된 정신질환과 만성질환의 확대재생산을 통해 새로운 이익 창출에 성공했고, 이렇게 창출된 시장은 세상이 고령화사회로 접어들수록 시장규모를 늘려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발판으로 자리매김시키고 있다.





모든 먹거리가 사라져도 유병장수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몸이 남아 있으니, 이들의 이익 창출이 멈춰질 이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부시 정부 시절에 본격화된 전 세계적인 테러의 증가, 지구온난화와 토지의 사막화와 물 부족 현상의 폭발적 증가, 국가와 개인 간의 메울 수 없는 불평등의 증가는 폭력시장이라는 거대한 먹거리를 창출했다.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사회와 산업체계를 전파하는 목자의 역할을 자처했던 이들은 시장의 지속적인 확대를 위해 어린아이부터 노인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광고를 쏟아 부었다. 이들은 또한 산업사회의 발전에 내재해 있었던 노동유연화와 가족해체, 불량의학과 건강산업의 확장과 맞물려 이혼과 동거, 섹스의 양과 파트너의 수가 강조되는 여성의 평등을 이용해 또 다른 시장을 창출할 수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섹스의 향연 속에 말초적 삶이 사랑의 의미마저 단편화하고 즉시화한다. 보다 많은 소비자를 창출하기 위해 개별적 삶이 강조되면서 가족이 해체됐고, 임금하락에 따라 맞벌이가 늘어남으로써 아이들은 방치됐으며, 여성의 몸은 쾌락의 순간을 위해 돈으로 환산되기 일쑤였다. 입사를 위한 성형이 필수가 되면 여성의 가치는 외모로 판명될 뿐이고, 남녀평등이란 허울은 외적 아름다움이라는 미디어적 가치에 매몰당한다. 



경제주체와 미디어가 조장하는 이혼이 늘어날수록 자궁과 떨어질 수 없는 양육권이라는 미명 하에 수많은 여성들이 저임금노동과 경력단절의 악순환 속에서 빈곤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가난의 대물림은 여성가장의 가구일수록 발생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이는 저임금·임시직 노동시장의 확대로 이어지고, 가격 파괴를 통한 할인경제가 아니면 이들의 삶을 바쳐줄 수 없어,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려야 한다. 저임금의 악순환이 이렇게 되풀이된다.     



노동에 대해 일방적인 파혼을 선언한 자본은 광속으로 날아다니는데 비해, 파트너를 잃어버린 노동은 갈수록 설자리를 잃고 있다. 한국이나 일본처럼 신자유주의가 급격히 진행된 나라에서는 강경노조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헌법과 국제법이 보장하는 노동자의 기본적인 인권마저 말살되는 것이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다. 


  1. 태봉 2014.09.13 08:58

    그러면 이러한 세상을 변혁시킬 방법은 없는건가요?
    이미 곤고해진 기득권의 시스템을 이제는 선거를 통한 투표로도
    고 노무현 대통령처럼,한나라의 대통령의 힘으로도 저 곤고한 시스템을 무너트리기엔 너무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치론 답이 없다고 봅니다
    다른 쪽으로 그 해답을 찾아야 본다고 보는데, 늙은 도령님의 혜안을 듣고 싶네요

    • 늙은도령 2014.09.13 19:24 신고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노력은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한지 알려주는 시금석 같은 것입니다.
      제가 세월호에 집중하고 있는 것도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만일 특별법 제정이 유족과 국민의 뜻대로 제정되면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역사적 선례가 될 것인데, 그래서 여야 모두가 특별법 제정을 미루거나 유족의 뜻과 다르게 합의한 것입니다.

  2. 태봉 2014.09.13 08:58

    그러면 이러한 세상을 변혁시킬 방법은 없는건가요?
    이미 곤고해진 기득권의 시스템을 이제는 선거를 통한 투표로도
    고 노무현 대통령처럼,한나라의 대통령의 힘으로도 저 곤고한 시스템을 무너트리기엔 너무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치론 답이 없다고 봅니다
    다른 쪽으로 그 해답을 찾아야 본다고 보는데, 늙은 도령님의 혜안을 듣고 싶네요

  3. 중용투자자 2014.09.13 16:41

    '자본주의 시스템은 잘 만들어진 사기다' 는 말이 생각나네요. ^^

    • 늙은도령 2014.09.13 19:26 신고

      자본주의는 사기가 맞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유대인 고림대금업자의 신용창출이 과학기술의 발전, 근대국가의 등장과 함께 대규모화 된 것에 불과합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수많은 이론이 있었지만 저는 단순하게 봅니다.
      이자를 위해 일정액의 돈을 끝없이 돌려대는 신용창출이 자본주의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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