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완벽한 추측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필자의 희망사항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정의당 당원이고 '노유진'이란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음에도, 유시민 작가가 JTBC의 썰전을 선택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겠냐는 것에서 출발해 하나의 그럴싸한 결론을 이끌어낸 것이 이번 글의 허구성과 필자의 희망사항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부담없이 읽으시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텔레비전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린 시청자란 있을 수 없다. 텔레비전 없이 지내야 할 정도로 열악한 빈곤도 존재하지 않는다.텔레비전의 영향을 받고 변질되지 않은 수준 높은 교육도 찾아볼 수 없다……우리 모두는 카메라가 잡은 제한된 각도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브라운관에 비치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닐 포스트만의 《죽도록 즐기기》에서 인용).



위의 인용문처럼 텔레비전은 우리의 삶 모든 곳에 공기처럼 퍼져있습니다. 텔레비전을 보지 않거나, 아예 없다고 해도 스마트폰, 도심의 광고판, 유튜브, 각종 대화 등을 통해 텔레비전이 내보낸 콘텐츠를 어떻게든 접하게 됩니다. 텔레비전은 그 자체로 현대인의 삶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아무리 쌍방향적 소통이 가능해졌다고 해도, 텔레비전 테크크놀로지의 기본인 다수의 시청자에 대한 일방적 전달은 변함이 없습니다. 



바로 이것, 절대 다수의 시청자에게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뉴스와 정보는 가랑비에 옷 젓듯이 시청자의 인식을 텔레비전에 최적화하도록 야금야금 잠식합니다. 인류 진화의 최대 성과인 두뇌는 '보는 것과 듣는 것'에 편향된 방향으로 발전했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인 미디어 세상의 도래가 특별한 정항을 받지 않은 채 파시즘적 속도로 인간의 삶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 페이스북이 페친의 네트워크로 이에 맞서고 있지만, 유통되는 정보의 대부분이 텔레비전의 콘텐츠라 일반의 예상과는 달리 텔레비전의 위력을 배가시키고 있습니다. 미래의 미디어가 될 것을 예상했던 트위터의 몰락과 팟캐스트의 부진에 비해, '보이는 라디오'와 아프리카TV의 성공 등에서 보듯이, 미래에도 텔레비전에 적용된 테크놀로지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할 것임을 말해줍니다. 



유시민이 JTBC의 썰전을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현실정치에서 벗어난, 그러면서도 팟캐스트와 출판, 강연, 토크콘서트 등을 통해 거대양당체제에 무엇으로도 매꿀 수 없는 균열을 만들고자 종횡무진 뛰어다녔던 유시민이 텔레비전의 영향력에 두 손을 든 것이 썰전 참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득권 보수화된 새누리당2중대로서의 더불어민주당이 문재인 전 대표에 의해 환골탈태에 성공하자, 그에 발맞춘 듯 유시민은 썰전에 합류했습니다. 



문재인의 정치력과 리더십을 노무현과 비교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했던 그가, 바보 노무현의 정치력과 리더십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문재인에게서 노무현의 모습이나 그 확장판의 가능성을 볼 수 있었을 것이란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봅니다. 진중권은 실패했지만 유시민이기에 가능했던 것들이 썰전을 통해 발휘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시 노무현에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에는 추호의 변함도 없을 것입니다.    



그가 2회 때 말했던 것처럼,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통해 이미 끝장난 역사적 판결이 이명박근혜 8년 동안 모두 다 폐기된 채 유신시대로의 무한퇴행을 거듭하자 썰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서있는 것이 힘들 정도로 우측으로 기울어진 방송생태계에서 썰전이 갖는 독특한 영향력을 활용할 수만 있다면, 도무지 탈출구를 찾기 힘든 진보정당의 부활에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국 정당정치의 문제와 국정운영의 한계를 정확히 꿰뚫고 있는 박학다식과 촌철살인의 유시민이, 막무가내의 전원책을 적절하게 응대하면서, 썰전의 시청률을 높일수록 그의 영향력은 이철희보다 몇 배는 커질 것입니다. 이는 진보정당 전체에 힘을 실어줄 뿐만이 아니라, 더불어민주당의 혁신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유시민과 손석희의 오랜 인연이 썰전을 통해 시너지효과를 거둘 수 있다면 SNS를 통해 확대재생산될 콘텐츠들로 하여, 기울어진 방송생태계를 조금이나마 바로잡 수 있을 것입니다.



필자가 '올 단두대' 전원책을 오락적이지 않으면 시청률이 떨어지는 텔레비전의 특성에 부합한다고 인정하면서, 썰전의 본방사수에 힘을 보태는 것도 야권의 총선 승리가 너무나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이명박근혜 8년이 단 하나의 단어 '헬조선'에 압축되는 것에서 보듯, 나머지 2년마저 그렇게 흘러간다면 청춘의 미래란 '잉여의 흙수저'를 넘어 '쓰레기로 버려지는 무(無)수저'까지 추락할 수 있습니다. 



야권의 총선 승리, 그것도 진보정당의 약진을 동반한 승리만이 이런 퇴행을 막을 수 있다면, 썰전의 시청률이 10%를 돌파할 정도로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유시민의 활약이 독보적이어야 합니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던, 필자는 미증유의 부담을 유시민에게 안겨주는데 추호의 인색함도 보이지 않으렵니다. 문재인이 대놓고 밀어줄 수 없는 정의당의 원내교섭단체 달성, 노동당과 녹색당의 원내진출을 이루기 위해 유시민에게 온갖 부담을 씌우렵니다, 팍팍!!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반골 2016.02.03 23:20

    유시민과 손석희 제 개인적인 생각으론 이 두사람이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사이로(^^) 봅니다!
    손 석희는 유시민이 썰전에 나와서 시청률 및 우군이 생긴거고
    유시민은 방송에 출연해서 인지도 및 정당홍보 상승 돼고~

  2. 어쩌다가보니 2016.02.04 06:24

    더불어민주당이 환골탈태했나요? ^^;;

    • 늙은도령 2016.02.04 21:09 신고

      지금 진행 중입니다.
      문재인 대표가 백의종군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만일 환골탈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매일같이 비판해야죠.
      온라인입당도, 총선 승리도 모두가 날아가기 때문에 더불어민주당은 혁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 더 지켜보시죠.

  3. 공수래공수거 2016.02.04 08:32 신고

    좌파--> 올 단두대-->? 무엇을 이야기 할지 궁금하긴 합니다 ㅋ

 

 

안철수가 모든 방송과 신문의 집중조명을 받으며 보무당당하게 탈당할 때만 해도 후속 탈당파들이 20~30명은 거뜬히 나올 것 같았다. 탈당의 규모와 속도에 탄력이 붙으면 40~50명 선을 말하는 정치전문가(MBC라고 쓰고 엠병신이라고 읽는 것처럼, 정치전문가라고 쓰고 정치쓰레기라고 읽는다)들도 있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몰락과 문재인당으로의 사당화를 떠벌리는 종편벌레들의 주장도 여과없이 전해졌다.

 



 

진실된 의미의 정치전문가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정치철학과 이념적 정체성이 전무후무할 정도로 모호한 안철수'의 자가당착적이고 과대망상적 행태를 비판했다. 그들은 대통령병(3김시대를 이룬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을 비판하던 논리와 비슷)에 걸린 안철수가 대선만 바라볼 뿐 총선에는 비중을 두지 않는다고 말하며 탈당파의 입당행렬에 브레이크가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호남민심이 안철수에게만 있지 않다는 점을 들기도 했고, 안희정 충남지사처럼 '수평적 합의의 수직적 명령에 거역해 탈당하는 것이 쿠데타'라는 정곡을 찌르는 비판을 내놓은 인사도 있었다. 그밖에도 필자 수준의 기타등등, 기타등등이 난무했다. 안철수 신당의 성공을 예상하는 분들도 많았고, 상당 부분이 그들만의 리그에서나 통할 수 있는 희망사항에 불과하지만, 세상 일이란 모르는 것이어서 뜻밖의 변수가 튀어나와 대역적을.. 아, 대역전을 이룰 수도 있다. 

 

 

국민의당에 대한 찬반논리는 동전의 양면이어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할 수도 있고, 양화가 악화를 퇴출시킬 수도 있다. 동전이 새로 발행될 가능성(단일후보를 전제로 한 어느 한 쪽으로의 재통합)은 대선이 가까워져야 가능할 터, 양측의 주사위는 거대 양당의 공천권이 확정되기까지 계속될 던져질 것이다. MBC와 TV조선, 채널A, 연합뉴스TV처럼 자본과 권력의 나팔수를 자처하는 방송들은 청와대와 조중동의 조정과 리드 하에 문 대표 체제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저주의 굿판을 난발할 것이다.



국민의당의 지지층이 새누리당의 지지층과 겹치고, 공천을 받지 못한 비박들과 뒤늦게, 아주 뒤늦게 합리적 보수를 외치는 자들의 합류(특히 이명박의 사람들)가 늘어날 경우, 국민의당을 향한 공격도 가열될 것이다. 정체성의 혼란은 계속해서 설화를 불러올 것이고, 문재인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온라인 당원가입이 10만을 넘어 20~30만에 육박하면 이들의 공격은 노무현 죽이기의 재현으로 강화될 것이다.



 


바로 여기에 국민의당이 자리를 잡는 게 예상보다 지지부진한 이유가 있다. JTBC 뉴스룸마저 야당 대표로서의 문재인의 발언을 이종걸이나 다른 최고의원으로 대체하거나, 기자들의 멘트로 대체하는 교묘한 카메라 편집을 통해 안철수에 힘을 실어주는 행태가 역풍을 불러온다는 사실이다. 언론, 특히 방송의 편파성을 뼈속까지 체험하고 있는 시청자들은 안철수에 대한 그들의 지원이 클수록 반발의 강도도 커지기 마련이다.



안철수 지지자의 대부분이 디지털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는 점에도 위험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온라인 입당의 결과가 크면 클수록 지지의 강도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들은 또한 안철수 신당에 합류하는 인사들의 과거 경력을 검색해 부적절한 발언과 행위가 있었을 경우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이들의 투표율이 낮다는 점도 고려하면 안철수 신당의 미래를 낙관적으로만 볼 수 없다.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의 자격(20석 이상)을 따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만, 합류인사의 면면이 지지자들의 기준에 미달할 경우 안철수 신당은 찻잔 속의 태풍도 못된 채 몇 방울의 흔적만 남기는 것으로 소멸될 가능성도 있다. 안철수라는 브랜드가 지역 단위에서도 통하고, 전국 단위에서도 통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신당의 성공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안철수 현상과 안철수가 단절된 상태에서, '혁신과 새정치'의 아이콘으로서의 안철수가 정체불명의 '강철수'를 내세워 예전의 명성과 영향력을 찾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신당에 합류한 자들이 혁신의 대상이라면 안철수의 이미지는 더욱 추락할 수밖에 없다. 안철수의 딜레마 중 가장 큰 것이 이것인데, 총선 전까지, 지지자들을 투표소로 끌어내는 안철수와 합류인사들의 화학적 결합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높지 않다. 

 

 

보궐선거와 달리 총선은 전국적 이슈가 승패를 가르기 때문에 정체성이 모호하고, 경험이 일천하며, 그래서 콘텐츠가 부족한 국민의당이 지지부진한 것은 충분히 예상가능한 것이었다. 정치에서 이념적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 대중적 인기에는 도움이 됐지만, 투표행위에 들어갔을 때는 약점으로 돌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선은 아직도 너무나 먼 미래의 일이고.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참교육 2015.12.27 06:31 신고

    결과적으로 새누리당의 재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행위지요.
    역사발전을 가로 막고 반동의 역사를 만드는 행위는 어떤 변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새누리가 재집권해 오는 참혹한 현실은 그 책임이 안철수가 져야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NARVEL 2015.12.27 11:26 신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지켜봐야겠네요..

    • 늙은도령 2015.12.28 00:59 신고

      자신이 대선후보가 되기 위해 전통야당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 막아야죠.

  3. 2015.12.27 19:40

    비밀댓글입니다

    • 늙은도령 2015.12.28 00:59 신고

      맞아요, 자신이 대선 후보가 되기 위함이죠.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자에요.



대한민국은 미디어의 천국이다. 3개의 지상파와 수십 개에 이르는 부속 채널, 4개의 종편, 2개의 보도전문채널, 거의 백 개에 근접하는 케이블방송. 이들의 콘텐츠를 확대재생산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이버 채널까지 대한민국은 하루 24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미디어들의 무한 메시지와 영상들로 넘쳐난다. 인간은 메시지와 영상의 홍수 속에서 영혼없는 유령처럼 메시지와 영상의 형태로 이곳 저곳을 배회한다. 





눈이 가는 모든 곳에 영상이 돌아가고 있고, 귀는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소리의 홍수 속에 단 한 순간도 쉴 수 없다.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감과 신경은 미디어가 쏟아내는 콘텐츠에 언제나 열려있어야 한다. 이를 인식해서 분류하고 합당한 반응을 제시해야 할 뇌는 압도적인 콘텐츠의 양에 질식하기 직전이다.



1분 이상의 생각을 요하는 일은 금물이다. 끝없이 밀려드는 콘텐츠와 정보에 감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도 힘겨운 상황에서, 어느 하나를 붙들고 생각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에 다름없다.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을 끝없이 흘려보내지 않으면, 연속해서 밀려드는 메시지를 감당할 방법이란 없다.



‘모든 철학이 죽었다’는 비트켄슈타인의 한탄을 넘어, 자기반성적 성찰도 사라진 미디어 세상에서 보고 듣는 것이 곧 진실이고 진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처럼 다양한 미디어가 쏟아내는 메시지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려면 생각하지 않는 것이 필수적인 사항이다.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최악의 범죄이다.





짧고 표피적인 단상들과 즉각적인 반응들이 넘쳐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주어지고 접하는 콘텐츠와 정보가 많으면 생각의 양과 질이 높아진다고 판단하기 쉽지만, 뇌라는 것이 그렇게 진화해오지 않아서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뇌는 가소성이 있어서 주어진 콘텐츠와 정보의 특성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디지털 세대일수록 생각의 양과 질이 많아야 가능한 철학이나 사상, 사회적 문제 등에 대한 거부감이 커지는 이유도 우리의 뇌가 미디어의 특성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탐사보도나 기사마저 일정 수준 이상으로 길어지거나 복잡해지면 안 된다. 인문학 열풍이 불어도 독서량이 늘지 않고 강연을 듣는 것과 동영상을 보는 것만 늘어나는 것도 우리가 미디어에 얼마나 길들여져 있는지 반증해준다.



이런 현실에서 미디어가 내보내는 콘텐츠와 정보가 자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검열을 거치거나, 특정 세력에 유리한 편향성을 지니고, 속보와 특종 경쟁 때문에 오보가 빈발하고, 특정 사실(진실이 아니다)만 부각해서 내보내거나, 아예 사실을 왜곡해서 내보내는 것이 일상화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민주주의를 확대하리라 예상했던 사이버 공간이 검열까지 받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미디어에 노출되는 시간이 많을수록, 미디어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소통하는 것이 일상화될수록, 우리의 뇌는 미디어화 된다. 우리는 미디어가 보여주는 것에 관심이 집중되고, 미디어가 이끌어가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생각의 양이 늘어나는 것 같지만 분업화된 노동처럼, 수없이 많은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분열된 자아처럼 통합되지 못하는 단편들로만 이곳저곳을 빛의 속도로 떠다닌다. 



생각의 깊이가 요구되는 것, 가치 판단의 기준이 명확해야 하는 것, 자기반성적 성찰이 필요한 것, 일관되게 생각을 밀고 가는 것, 그래서 생각의 끝까지 가보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심지어 무수히 많은 경험을 통해 상황을 판단하는 직관마저 미디어적인 방식으로 작동하게 된다. 자본과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편향된 보도와 정보가 사실 확인이라는 필터작용도 없이 수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방적인 내용만 전달하는 광고가 대표적인 예다. 첨단과학이 총동원된 마케팅의 정수인 광고는 인간의 의식을 파고들어 광고가 의도하는 대로 반응하고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다. 광고로 돌아가는 미디어가 본질적으로 자본적이고 시장 편향적인 매체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류가 영원히 함께 해야 할 미디어는 가장 자본주의적이고 가장 권력지향적인 매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가족과 공동체와 사회가 제 역할을 못하는 현실에서 미디어(특히 대중매체)가 공적 영역을 독점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미디어가 전한 콘텐츠의 내용을 알지 못하면 일상의 대화에도 끼지 못한다. 미디어의 종류가 늘어날수록 공적 영역뿐만 아니라 사적 영역에서도 미디어의 콘텐츠와 거기서 파생된 것들이 대화의 주를 이룬다. 



헌데 대한민국의 미디어는 편향성이 도를 넘었다. 자본주의적이고 권력지향적인 편향성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미디어가 배출하는 콘텐츠와 정보가 공기처럼 만연된 현실에서 대한민국 미디어의 편향성은 생각의 깊이가 필요한 모든 것을 질식사시키며, 사고와 가치와 이념의 다양성마저 검열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지상파와 보도전문채널이 장악되고, 종편이 무더기로 승인되고, 정부의 비호 아래 세를 확장해온, 그래서 권력과 언론이 불편하지 않고 한통속으로 움직이는 지난 7년이란 다음의 한 줄로 압축할 수 있다. 죽은 미디어의 사회, 대한민국.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달빛천사7 2014.10.06 08:57 신고

    한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좋은하루되세요

  2. 중용투자자 2014.10.06 14:23

    정보는 넘쳐나는데 생각의 깊이는 더 짧아지게 만드는 미디어의 맹목적인 독선이 갈수록 심화되는군요.

    • 늙은도령 2014.10.06 20:43 신고

      네, 단편적인 생각만 늘어납니다.
      미디어와 책읽기를 같이 해야 합니다.
      또한 명상의 시간을 늘리는 것도 필요합니다.

  3. 공수래공수거 2014.10.07 14:05 신고

    읽을만한 매체는 그래도 있는데 볼만한 매체는
    거의 없는것 같습니다..에혀
    눈과 귀를 통제 당한거 같은 세상.

    • 늙은도령 2014.10.07 19:46 신고

      우리는 너무 길들여졌어요.
      생각을 안 하려고 하고 너무 편리함만 찾아답니다.
      대중매체의 발달이 인간의 삶을 완전히 바꿔버렸습니다.

  4. 젊은학생 2014.10.09 06:11

    심지어 생각의 흐름까지도 유도하는 것 같아요.
    살짝 벗어난 예시지만,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자막이 참 많이 나오죠,
    자막은 이해를 돕고 더 큰 재미를 주기도 하지만, 시청자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막고 그 프로그램이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게끔 합니다.
    두 세개의 예능프로그램을 즐겨보는데 문득 그런생각이 들었네요.

    생각을 못하게 하는 것은 바쁜 현대사회도 한 몫 합니다.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저조차도 생각할 시간이 없음을 깨닫고
    생각을 할 시간을 따로 정해야되나 싶을 정도예요.

    다행히도 제가 듣는 수업들은 교수님들께서 질문을 많이 하십니다.
    어제 들었던 welfare economics 에서는 '복지국가'란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여
    복지란? 국가란? 에 대한 질문 등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정답이 있는 건 아니지만, 복지국가가 무엇인지 아무 생각도 안 한 상태에서 국가의 정책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이번 학기가 끝나면 복지국가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을까요?
    심심할 때 보는 예능을 줄이고, 한가지 한가지 생각을 해봐야 겠어요.

    어제 HIstory of Political Ideas 중간고사로 고대그리스부터 계몽주의시대까지의 정치사상의 변화 및 발전에 대한 에세이를 써야했는데 정말..부끄러운 에세이를 쓰고 왔어요. (진짜 망했어요)
    감히 생각만 해보자면, 기존의 유명한 정치사상들이 업데이트가 필요한 것 같아요.
    도령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우리나라의 정부형태가 어떠한 정치사상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면 말이죠.

    • 늙은도령 2014.10.10 00:01 신고

      네, 방송은 시청자가 생각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길들여 시청률을 높이는데 사용합니다.
      자막은 그런 기능을 합니다.
      님의 지적한 것이 정확합니다.
      마약 같은 것입니다.
      시청자로 하여금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고 프로그램의 기획대로 몰고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청자의 뇌는 길들여져 가고 자막이 없으면 불편해 합니다.
      자막이 시청률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그렇게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죽도록 즐기기>를 꼭 보십시오.

      고대 그리스부터 계몽주의시대까지가 근대성의 탄생이자 근대이성이며, 현대성의 원천입니다.
      칸트에 의해 완성됐는데 제가 '늙은도령의 눈으로 본 인류 근현대사 비판'이 바로 그 내용을 다룬 것입니다.
      원래는 책으로 출판하기 위해 집필을 시작한 것인데 이곳에 올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너무 어렵다는 댓글이 많아서 더욱 쉽게 풀어야 하기 때문에 기존에 써놓은 것을 틈틈이 퇴고하고 있습니다.
      체력이 떨어져 이것이 회복되면 그때부터 다시 올릴 것입니다.

      푸코의 저서말고 강의를 옮긴 책인 <영토, 안전,인구>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이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리고 '성의 역사'시리즈인 <앎의 의지> <쾌락의 활용> <자기 배려>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정치의 약속>, <혁명론>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철학적으로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 그리과 최근에는 바우만의 <홀로코스타와 현대성> <액체근대> <유동하는 공포>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등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고 싶다면 최고의 석학인 벤야민을 보십시오.
      단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안 보셔도 됩니다.
      정말로 어렵기 때문에 성찰이 매우 깊어지면 읽어보십시오.
      제가 읽은 책 중에 가장 어려웠습니다.

      칼 폴라니의 책들도 도움이 될 것이고, 칼 포퍼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블랙스완>도 좋구요.
      우리나라는 미국의 헌법을 받아들였지만, 홍익인간부터 동학까지 사회주의적 요소가 많아 충돌이 납니다.
      조선시대는 입헌군주제와 절대주의가 혼합된 민주주의적 체제였습니다.
      여기에 일본의 군국주의 파시즘, 즉 우파 전체주의와 깡패집단의 논리가 혼합돼 엉망진창이 된 것이 한국입니다.

      참, 박정희 시대를 이해하고 싶다면 마루야마 마사오의 <현대정치사상과 행동>을 보십시오.
      거기에 박정희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유신시대의 원형이 왜 일본에 있으며, 우리나라가 친일파의 천국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과 박명림 교수의 '한국전쟁' 시리즈를 비교해서 보면 더욱 이해가 커질 것입니다.
      최근 프레시안에 연재되고 있는 한국의 근현대사에 관한 내요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복지국가는 대단히 복잡해졌습니다.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무력화됐으니까요.
      복지국가에 대한 평가는 최근에 들어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불평등이 너무 커져서 복지국가의 원형으로만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분야에서는 자크 아탈리의 저작들과 <거대한 전환>을 번역한 홍기빈 씨의 저작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를 얘기할 때 과학기술의 발전이 미치는 영향을 너무 무시합니다.
      사실 인류의 정치체는 과학기술의 발전의 부산물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과학 관련 책을 많이 읽는 이유입니다.
      종합적 시각을 갖춰야 합니다.
      그래야만 현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국민국가 탄생과 얽혀 있는 정치경제학과 뉴턴역학, 다윈의 진화론을 왜곡한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 대한 이해가 절실히 요구됩니다.
      중상주의와 중농주의가 교차하는 중에 탄생한 고전경제학과 독일에서 시작한 질서자유주의(신자유주의의 원형)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합니다.

      울리힉 벡의 <위험사회>도 꼭 보십시오.
      저도 아직 못 본 책이 있어 벡의 최근 책들을 봐야 합니다.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후편인 <유리감옥>도 봐야하구요.

  5. 2015.12.24 05:39

    비밀댓글입니다




다양한 첨단기술의 발전에 따라 의사와 환자 간의 문진과 진단, 시술과 수술 등의 일체의 의료행위를 철저히 경제 논리에 의거하는 미국의 현상을 보면서, 우리는 현대성의 폭력적 행태가 사회의 모든 곳에 침투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인간의 생명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한국에서 박근혜 정부가 행정조치(국회의 동의가 필요없는 가이드라인)라는 편법을 동원해, 모법인 의료법을 무력화시키며 강행되고 있는 의료민영화와 영리화의 논리도 결국 자본과 기업의 이윤추구 행위의 정당화와 극대화에 있다. 



국가권력기관들의 불법적인 선거 개입에 의해 박근혜 대통령의 민주적이고 정치적인 정당성이 의심받는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가 국민의 60~70%와 야당, 의사협회와 보건노조, 시민단체들이 반대하는 의료민영화와 영리화를 강행하는 것은 경기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이라는 미명 하에 국민의 생명마저 돈의 논리에 넘겨버리는 최악의 통치행위라 할 수 있다. 의료민영화와 영리화는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켜야 하는 국가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도 어긋난다.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각종 규제가 신설되고, 초국적기업과 거대 금융자본의 탐욕을 제한하고 있음에도, 유독 근대이성에 사로잡혀 성장만 외치는 박근혜 정부의 시대착오적 행태는 자신의 임기 동안 성과를 거둘 수 있겠지만, 그 폐해는 다음 정부와 미래세대에게 전가된다. 시대에 역행하는 각종 정책들, 규제의 옥석을 가리지 않는 무분별한 철폐, 온통 장미빛으로 색칠된 ‘통일은 대박’이라는 미래비전은 치적에 대한 지도자의 본능적 욕망과 미래에 대한 대책 없는 낙관주의가 만들어낸 허구의 산물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며, 대체 불가능한 경제학자로 지칭되는 조지프 스트글리츠마저 경제성장이 온기가 국민들에게 흘러내리는 낙수효과가 제대로 작동한 적이 없다는 것을 밝혔음에도, 치기 어린 지도자와 정부 및 정권의 나팔수를 자처하는 방송들의 설득력 있는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오직 '결과의 낙관론'을 퍼뜨려 국민들을 집단적인 최면상태로 빠뜨리는 것은 현대성의 폭력성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선정적이고 선동적인 방식으로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의 여론몰이는 특히 텔레비전에 길들여진 세대에게는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텔레비전과 함께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미디어세대들은 텔레비전이 전해주는 특정 정보에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신뢰를 드러낸다. 미국의 교육학자이자 사회학자이며 방송학자였던 닐 포스트만은 '텔레비전에 길들여진 성찰없는 미디어세대'에 대한 기념비적인 저서, 《죽도록 즐기기》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텔레비전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린 시청자란 있을 수 없다. 텔레비전 없이 지내야 할 정도로 열악한 빈곤도 존재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의 영향을 받고 변질되지 않은 수준 높은 교육도 찾아볼 수 없다...이제 텔레비전은 지식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에 관한 방법론까지 지시하는, 초 매체적 지위에까지 올랐다...우리 모두는 카메라가 잡은 제한된 각도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브라운관에 비치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 결과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에 편향된 방송을 즐겨 시청하는 50대 후반부터 60대 이상의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흘러나오는 메시지가 사실ㅡ심지어는 진실ㅡ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텔레비전이란 도구(정확히는 텔레비전을 작동시키는 배후의 테크놀로지)가 가치중립적이라고 확고하게 믿어 의심하지 않는 이들은, 특정 방송이 텔레비전을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를 생각의 입구에서 출구까지 빛의 속도로 반응하며, 텔레비전에 길들여진 인식의 활동을 일상생활과 여론조사와 투표소에서 분출시킨다.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세월호 유족들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농성 중인 장소에서 맞불시위를 벌이거나, '자식 팔아서 그만큼 챙겼으면 됐지'라며 짐승보다 못한 폭언을 퍼붓고 폭력을 행사하는 단계까지 치달을 수 있다. 이들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와 거기에 적용된 테크놀로지의 관계가 '두뇌와 정신의 관계와 같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닐 포스트먼은 이런 인지부조화와 길들여진 인식의 편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테크놀로지와 매체의 관계는 두뇌와 정신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두뇌처럼 테크놀로지는 일종의 물리적 기관과 같다그리고 정신과 같이 매체는 물리적 기관의 사용과 관계가 있다하나의 테크놀로지가 특정한 상징부호를 사용할 때나 사회적 위상을 차지할 때그리고 경제적ㆍ사회적 정황 속에 슬그머니 자리잡을 때그 테크놀로지는 하나의 매체로 변모한다테크놀로지는 그저 하나의 기계장치에 불과하지만매체는 기계장치로 인해 생성되는 사회적ㆍ지적 환경과 같다는 뜻이다물론 뇌처럼 테크놀로지는 나름대로 태생적인 편향성을 갖는다바로 이 때문에 경우에 따라 테크놀로지가 쉽게 접목되기도 하며 충돌이 생기기도 한다따라서 과학기술이 중립적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테크놀로지의 역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뿐이다.



과학자들이 '과학적 연구와 발견은 가치중립적이어서 윤리나 도덕과는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 자체로 과학적 행위가 가치중립적이라는 특정 가치를 강요하는 것이어서 논리적 모순에 빠져드는 것처럼, 카메라가 제한된 각도에서 찍은 것만 볼 수 있는, 다시 말하면 제한된 각도 밖에 어떤 것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이들은 텔레비전에 적용된 테크놀로지의 편향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폐허와 쓰레기장도 카메라 각도와 편집에 따라 예술이 될 수 있고, 희망의 상징이 될 수 있다. 



텔레비전에 길들여진 미디어 세대들은 모든 방송 콘테츠가 광고와 협찬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으며, 고가의 텔레비전 광고비와 거액의 협찬을 감당할 수 있는 자들(조직, 단체)이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고려하지 않는다. 방송사들이 먹고 살려면 이들의 구미에 맞는 콘텐츠와 뉴스를 내보낼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자본지향적이고 권력지향적이며, 소수의 상류층의 삶을 지향하는 매체이자 테크놀로지의 집합체라는 사실을 고민해보지도 않는다.   



게다가 미디어 이론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매스미디어가 내보내는 '메시지는 메타포'라고 말했다. 이는 메시지를 생산하는 '테크놀로지마다 제 나름대로의 어젠다를 내포하고 있다'는 뜻인데, '어젠다'라는 단어에 내포된 의미가 정치적이라는 것처럼, 텔레비전에 적용된 테크놀로지가 그 시대의 지배적 세력이 추구하는 가치와 이익에 봉사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최악의 초국적 언론재벌 머독



맥루한은 또한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할 때마다 인간은 자동적으로 미디어가 전하는 정보(콘텐츠)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미디어는 결국 인간을 그 이전의 인간과 전혀 다른 인식체계를 지닌 존재로 변화시킨다. 맥루한은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를 "기술(테크놀로지)의 영향력은 의견이나 개념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이미지 조작(상징 조작)을 통해 "인식의 방식을 꾸준히, 아무런 저항없이" 바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맥루한이 텔레비전이 내보내는 콘텐츠가 "정신의 감시견을 따돌리기 위해 도둑이 미끼로 던지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현대성을 대표하게 된 가장 대중적인 매체인 텔레비전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라는 최적의 기후조건에서 모든 잠재력을 영상기술로 끌어낼 수 있었"고 정치적 편향성이나 권력 편향성을 지닌 매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텔레비전이 쏟아내는 수백 수천만 가지의 동영상에 인간은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이 되는, 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사고의 결여로 확장됐고, 심지어는 뇌의 퇴행을 야기하는 유전적 변화ㅡ리처드 도킨스는 이 유전자를 밈이라고 명명했다ㅡ까지 초래했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텔레비전에 적용된 테크놀로지는 '시간을 분초로 나누어 팔아야 하고, 한편으로는 말보다는 이미지가 우선이기 때문에' 시청자를 사로잡기 위해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폭력적인 것들을 선택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부정적 세계화가 만들어낸 세상에서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폭력적인 것들은 넘쳐날 정도로 많고, 이런 것이 쌓이면 시청자의 인식뿐만 아니라 "실제 세계가 텔레비전이라는 무대를 통해 상영되는 모습을 본떠 점차 각색"되는 일도 가능해진다. 



무한한 진보가 가능하며, 부수적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최종적인 결과는 낙관해도 좋다는 근대이성이, 1, 2차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현대성으로 넘어가며 선택한 지배적 체제가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에 따른 승자독식을 인정하는 신자유주의였다는 사실까지 더하면, 인류를 자연과 신의 수중에서 해방시켜주고 빈곤과 질병에서 구원해주겠다고 공언한 근대이성은 더 이상 존재할 명분이 사라진다. 무한한 진보와 함께 근대이성이 약속한 것이 '자유와 평등, 박애와 관용, 정의와 평화'의 왕국이었다는 것마저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현대성은 이렇게 폭력성과 선정성, 즉시성과 오락성을 띨 뿐 어떤 진지한 담론과 토론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인류는 그렇게 현대성을 확대재상산하는 주류 매체인 텔레비전의 테크놀로지에 의해 전쟁과 테러, 대형사고와 유명인사의 부패와 스캔들, 엽기적인 범죄와 함께 잘 만들어져 섹시함으로 흘러넘치는 아이돌들의 온갖 몸짓들과 모든 이슈를 오락거리처럼 다루는 콘텐츠 처리방식에 따라 가치의 판단기준이 왔다갔다 하는 아노미 현상에 빠져들게 됐다. 



이를 극대화시킨 것이 모든 콘텐츠에 따라다니는 가장 감각적이고 유혹적인 광고의 범람이다. 인류는 이제 광고 없는 공간을 찾기 힘들게 됐고, 이제는 광고에 순응돼 그것이 전하는 현대성의 다양한 욕망과 쾌락행위에 사로잡힌 포로이자 노예의 신세로 전락했다. 눈이 가는 모든 곳에는 어김없이 광고가 걸려있고, 손을 뻐치는 모든 곳에는 광고에서 본 욕망들이 실체를 드러낸 채 기다리고 있다. 필요한 것은 돈이거나, 즐기고 난 다음에 갚는 플라스틱 신용과 전자 신용이다. 



현대성이란 이렇게 즉시적인 욕망과 쾌락의 추구를 창출해낸다. 소비자로 정체성이 재규정된 인간은 어제의 귀중품이 오늘에는 필수품이 돼야 한다. 욕망은 뒤로 미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족시킬 수 없어 돈을 버는 대로 소비하려 달려가는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순간적이고 즉시적인 불만족과 스트레스로 이어진다. 이것이 인간의 행동에 폭력적 요소를 가미하게 되고, 한 아파트 단지에 사는 이웃과 주차 문제를 놓고 살인도 일어나게 된다. 폭력적 성향으로서의 현대성이 온갖 공포를 양산하고, 타인은 언제나 지옥인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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