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은 충북대 강연에서 “복지의 본질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노하우를 가르쳐주는 것”이라며 “우리의 재정 형편으로 부자 급식을 하는 건 정치이지 복지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서울시장에서 물러난 뒤 4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의무급식을 바라보는 그의 편향성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보편적 복지를 반대하는 오세훈의 논리는 단순함을 넘어 폭력적이기까지 합니다. 오세훈이 말한 ‘노하우’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정도면 국가와 복지의 본질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을 넘어 사실왜곡에 해당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발언입니다.



현대성은 개개인이 처한 다양한 삶의 조건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습니다. 쉽게 말해서 돈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 현대에서의 인간의 조건입니다.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자신이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들을 돌파하기에는 현실의 장벽이 너무 높습니다.



초중고를 넘어 대학과 대학원을 나와도, 심지어는 박사학위를 딴 사람들도 현실의 장벽을 뛰어넘을 만큼의 노하우를 쌓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교육제도가 그런 개인을 만들어내지도 못하는 것을 넘어, 신자유주의적 체제가 개인으로 하여금 삶의 문제들을 돌파해나갈 기회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더 엄격하게 말하면 개인이 신분상승의 사다리에 올라탈 수 있을 정도의 노하우를 쌓도록 나두지도 기다려주지도 않습니다.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을 부추기는 현대사회란 개인(과 가족)으로 하여금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충분한 기회와 수단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의 재정’ 운운하는 것도 사실왜곡의 전형입니다. 국가의 재정이란 어떤 조세제도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오세훈의 주장은 부자와 재계에게 유리한 현재의 조세제도를 손볼 수 없거나, 손대지 않겠다는 전제 하에서만 성립할 수 있습니다.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인정하고 들어갈 때만이 오세훈의 주장은 타당성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이해가 충돌하는 다양한 종류의 갈등을 조정해서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하는 정치의 필요성은 사라져버립니다.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이 갈등의 해결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공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부의 불평등이 심화된 현실을 그대로 두자는 것이 오세훈의 주장입니다. 이처럼 선별적 복지를 주장하는 자들의 논리에는 한 가지 숨어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명확한 기준이 없어 정하기 나름이다)에게 선별적 복지혜택을 주는 대신 무한대의 부를 가질 수 있는 부자도 동시에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극소수에게만 가능한, 그래서 절대다수를 가난하게 만드는 무한대의 부를 인정하는 것이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노하우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가난은 교육을 받았음에도 노하우를 깨우치지 못한 개인(과 가족)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의무교육과 선별적 복지를 제공했음에도 개인이 각자의 삶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노하우를 깨우치지 못했기에 가난은 큰 재산을 모은 부자과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는 제도의 책임이 아니라 개인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주어지는 복지는 선별적이어서 혜택이 되지 권리가 되지 못합니다.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삶의 노하우를 깨우쳐서 부를 쌓은 것이기에, 국가의 복지와 사회의 공적 부조를 받는 것은 성공한 자들에 비해 국가와 사회의 혜택을 받는 것이라 굴종적 인식에 사로잡힙니다. 가난이 곧 창피함이 될 뿐, 국민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가 되지 못합니다.  



선별적 복지는 그래서 국가가 사회가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 됩니다. 퇴임시 83%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빈국이었던 브라질을 중진국 반열로 끌어올린 룰라 전 대통령이 '부자를 돕는 것은 투자라며, 왜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왜 비용이라고 하느냐며 불만을 표출한 것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나옵니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선별적 복지는 슈퍼리치와 초국적기업, 거대 금융자본을 위한 공개적인 면죄부입니다. 모든 부는 누군가의 빈곤을 전제로 하는데, 선별벅 복지는 수백만에서 수천만 명이 나눠가질 수 있는 거대한 부를 독점한 자들에게 세속적인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역할을 할 뿐, 부의 불평등을 줄이지 못합니다. 





선별적 복지는 또한 복지의 사각지대를 만들어냅니다. 이들의 숫자가 소위 부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숫자보다 많습니다. 극소수에 불과한 부자급식을 반대하다 송파모녀 같은 이들을 양산합니다. 복지의 사각지대는 맞춤형 복지로 커버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에 성공한 국가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들은 또한 학부모의 자산과 소득을 파악하기 위한 엄청난 행정비용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어떤 나라도 지하경제 규모가 20% 정도를 차지하는데, 그것을 일일이 파악해서 투명하게 만드는 행정비용(부당수급되는 비용도 행정비용이다)이면 보편적 복지의 최소한인 의무급식을 중단할 이유조차 사라집니다.





오세훈과 홍준표 같은 자들은 가난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무한대의 부를 허용하기 위해 선별적 복지를 주장할 뿐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성공한 자들이 가지는 편협하고 반인류적인 현실인식은 자신의 경험을 전체에 투사시켜 모든 사람을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지옥으로 밀어 넣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너무나 많은 돈을 가진 슈퍼리치와 초국적기업과 재벌의 오너와 경영진, 거대 금융자본에게 지금보다 더 탐욕적인 부의 사냥에 나설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줍니다. 개천에서는 용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려면 개천을 용이 나올 수 있는 수준까지 만들어줘야 하는 것이지, 용이 살지 않은 개천에서 용이 나오라는 것은 대국민사기극입니다.



바로 여기에 총체적 차별을 당연시하는 능력주의와 시장경제를 위한 최소한의 통치라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의 무서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도 놓쳤고 케인즈도 놓쳤던, 그러나 허버트 스펜서는 꿰뚫었던 정치의 역할이 최소로 축소되는 신자유주의 우파의 이데올로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2부 개인은 어떻게 제도의 노예로 전락하는가?로 이어집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4.11 11:37 신고

    개인적으로 오세훈 시장은 평가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저는 여당내에서는 그래도 생각이 괜찮은 사람이었다라고
    기억합니다

    • 늙은도령 2015.04.11 16:48 신고

      오세훈법이 있는데 그것은 돈 없는 진보정당을 죽이는 법입니다.
      보수세력들은 기득권들이라 진보정당보다 자금 운영에 애로가 없는데 진보정당은 오세훈법이 정한대로 하면 선거에서 이길 가능성이 희박해집니다.
      오세훈이 한 일은 겉으로는 정의를 표방하지만 기득권에게 유리한 것만 해놓고 간 시장입니다.
      그가 한 일을 조금만 살펴봐도 그가 얼마나 무서운 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2. 유태준 2015.04.11 22:24

    선별적 무상급식이 오히려 부의 대물림을 제제하는데 도움이 될것 같은데요..
    저만그렇게생각하나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적에는 가난해서 밥못먹는 친구들이 있으면 나눠주고 도와주면 도와줫지 따돌림하거나 하는건 12년 교육과정동안 본적이없어서그런지 선별적무상급식의 반대의견논리에는 도통 공감할수가 없네요

    • 늙은도령 2015.04.12 01:01 신고

      최소한의 보편적 복지는 부자가 가난한 자를 나누지 않는 대신 부자에게서 누진적 과세를 받아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부를 나눠야만 자본주의 세상에서 비슷한 기회와 출발의 환경이라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가족의 부와 건강, 지역, 사회, 국가 등등에 따라 불평등하게 태어납니다.
      최근에는 그런 불평등을 고착화시켜 부와 기회가 세습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물려주는 부와 기회의 차이는 너무나 커서 절대 공정한 경쟁이 불가능합니다.
      최소한의 평등도 이루지 못합니다.
      의무급식을 선별적으로 해서 마련되는 비용으로 빈곤층 아이들에게 교육비를 지원한다 한들 기존의 부자들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차별은 그렇게 커지고 공고해집니다.
      아이들이 부의 크기에 따라 친구들마저 달라집니다.
      최소한 아이들이 그런 차별과 불평등을 점심 먹을 때만이라도 느끼지 않게 해주자는 것이 의무급식의 정신입니다.
      국가란 모든 국민에게 똑같은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지 차별적 복지를 제공하기 위해 결성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출발시의 불평등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했고, 그것이 인간의 가치를 짐승과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불평등하게 태어나지만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평등해집니다.
      그것이 정치가 하는 일이고 국가의 역할입니다.

      당신이 지금의 교육현장을 가보지 않아서 하는 말입니다.
      초등학교 1~2학년만 되도 자신이 살고 있는 동내에 따라 차별되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일들이 수두룩하게 벌어집니다.
      요즘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그런 차별에 익숙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게 현실이에요.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3. BGG뚜벅이 2015.04.12 20:58 신고

    하위 50%까지 지원한다고 했을때, 50.1%에 속하는 사람은 지원을 안 해줘야하는지, 49.9%사람들이 꼭 지원받을 필요가 있을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기준이 있다면, 오히려 그 기준을 악용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늙은도령 2015.04.12 21:28 신고

      네, 그것이 복지의 사각지대가 됩니다.
      선별적 복지는 극소수의 부자를 핑계로 서민, 특히 빈곤층의 삶을 지배하려는 것입니다.



이밖에도 작은 마을 단위의 시장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유럽 전체를 넘어 전 세계에 적용될 자유시장(정확히는 자기조정 시장) 개념을 그렸던 18세기 경제학자들의 고전경제학이 지닌 치명적인 오류와 그것에서 출발한 시장 실패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뉴턴역학과 다윈의 진화론에 경도된 고전파경제학자는 인간 이성과 도덕률에 대한 지나친 믿음과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자연의 법칙(칸트가 말한 기계로 부터 나온 에 기원한다)에 함몰돼 자기조정 시장의 허구성과 자본의 폭력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부족했고 진보(양적 성장)의 필연성에 함몰됐다.





또한 천사의 모습으로 다가와 ‘빚도 자산’이라는 무한대의 신용 창출을 부추긴 사탄의 후예들과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유지될 수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경험의 부족, 비용-편익적인 면에 매몰된 공리주의의 범람, 결국에는 잘 될 것이라는 결과의 낙관론에 빠져 동원 가능한 수단에 집중하면서 천연자원을 바닥내고, 생태계를 파괴한 성장지상주의, 기술공학적으로 생각하는 관료제의 본질과 속성에 대해서도 살펴봐야 한다. 국가이성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관료제와 중상주의, 중농주의, 도시의 발전과 확대, 경제표의 등장과 통계학과 관방학(내치)의 발전 등과 함께 한 근대국가의 탄생도 살펴봐야 한다.



이성이라는 종교가 불러온 과학기술 분야 전문가들의 무책임하고 탈윤리적이며 관료화된 파벌 행태, 채점을 통해 등수를 매기는 교육의 등장과 진화를 거부하는 식물화, 부르주아의 세력화가 능력주의로 변질되며 무한경쟁이 확대되는 경향 등이 모든 개인들로 하여금 탐욕의 춤을 추게 만들었고, 결국에는 신용을 창출한 극소수 고리대금업자의 수중에 모든 것이 넘어가도록 진행된 필연적 귀결도 들여다봐야 한다. 통제와 관리기술의 발전에 따른 삶-정치의 등장과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확장도 살펴봐야 한다.





이런 수많은 원인과 결과들이 쌓이고 쌓여 민주주의에 대한 시장의 우위는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무모하기 그지없었던 존 로크가 개인의 소유권을 신의 이름으로 불가침한 것으로 만들면서 시작된 부의 불평등과 그에 따른 인류의 퇴행은 이제 ‘더는 나빠질 것이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노인은 죽지 않고, 여성은 소비되고, 남성은 퇴행하고, 아이는 태어나지 않으며, 자연은 파괴되고, 생명의 다양성은 파국에 이르렀다.’ 이것이 근대이성이 현대(성)를 창출하며 지구에 던져버린 결과의 낙관론이 초래한 현실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 필자의 결론이다.



부분적으로 닫힌 세계인 지구에서 부와 권력의 원천인 한정된 자원의 소유권을 독차지하려는 갈등의 폭발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다고 해서 ‘공짜 점심은 없다’거나, ‘더 이상 사회의 구제는 없다’거나, ‘적자생존이 진화의 법칙’이라거나, ‘자연의 상태의 인간이란 모두가 모두에게 늑대’여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그치지 않는다거나,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해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은 지상최고의 거짓말 중 슈퍼울트라 거짓말에 속한다.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면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기 때문이며, 모두에게 책임을 져야할 근거인 공정한 분배가 행해지고 공평한 기회가 주어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칼 포퍼의 지적처럼, 수없이 많은 대량학살과 자원을 둘러싼 전쟁으로 얼룩진 인류의 역사란 소수의 승자와 강자를 위한 대량학살과 인종청소와 야만적 폭력의 역사였다. 개인에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마저 박탈해서 이익의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빅데이터 구축과 활용(이것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다면 구글 관련 책들을 보기 이전에 제임스 베니거의 《통제 혁명》부터 봐야 한다)을 처음 생각한 사람들 중에 한 명이었던 필자가 인류의 위대한 현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조금은 거칠고 조잡하며 비약에서 자유롭지 못할망정 갈수록 심해지고 빈번해지는 미세먼지를 뚫고 걸어가는 심정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려 한다.



그런 과거로의 여행 속에서 현재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라도 생긴다면, 그래서 최소한의 탈출구를 찾을 수 있다면, 그 이상의 바람은 없을 것이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때로는 무모할 수 있는 충동으로 인해 뜻하지 않는 기적을 이루고는 한다. 설사 기적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세상을 향해 저항할 수 있는 무엇이라도 건질 수 있다면 과거로의 여행을 못할 것도 없고, 반드시 해야만 한다.





이제는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필요한 시간이다. 인류가 진보한 모든 분야에서 파국적 퇴행이 진행되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주에서 유일하게 진화된 생명체가 살고 있는 지구의 엔트로피(무질서도)가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인정해야 한다. 앞으로도 이 '작고 푸른 별'에서 살아야 하는 미래 세대들을 위해 파시즘적 속도로 달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기차’부터 멈춰 세워야 한다. 당장 브레이크를 당겨라! 너무 늦었지만 파국적 퇴행을 이끌고 있는 자들을 향해 미래세대의 이름으로 분노해야 하며, 목숨을 걸어서라도 투쟁해야 한다. 나만 살겠다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브레이크를 있는 힘껏 당겨 기차를 세워야 하는 이유는 넘치도록 많다.



이 정도면 속을 만큼 속았다. 경제가 성장했음에도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핍박해졌는지, 부모를 공양하고 자식을 교육하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워졌는지, 가망도 없는 노후대책을 세우기 위해 20대부터 비정규직을 전전해야 하는지, 노인빈곤율과 자살률과 이혼율이 왜 이렇게 높아만 가는지, 평균수명은 늘었지만 왜 이렇게 만성질환에 시달리는 기간이 늘어났는지,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왜 이렇게 폭발적으로 늘어나는지, 하우스푸어와 렌트푸어가 왜 이렇게 늘어나기만 하는지, 아무리 많은 스펙을 쌓아도 왜 취직이 안 되는지, 고생고생을 해서 이 자리까지 올랐는데 왜 다음 번 별도의 통지가 있을 때까지만 나의 자리가 유효한 것인지,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왜 이렇게 많은 공포들이 나를 엄습하는지, 힘겹게 쟁취한 민주주의가 왜 끝도 없이 퇴보하는지, 이제는 멈춰 서서 세상을 향해 물어야 하고, 원인을 파악해 최소한의 해결책이라도 찾아야 한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깔롱퍽 2015.01.30 03:53 신고

    아는 형들이 얼마 없어요

    • 늙은도령 2015.01.30 04:27 신고

      그럴 것입니다.
      대부분 근대철학자고 일부만 현대철학자와 경제학자라....

  2. *저녁노을* 2015.01.30 07:02 신고

    무슨일이든..원인파악이 우선인데....
    아쉬워요 ㅜ.ㅜ

    • 늙은도령 2015.01.30 15:54 신고

      네, 근본적으로 돌아보고 무엇이 잘못됐는지 하나하나 살펴봐야 합니다.
      더 이상의 실수는 인류를 종말로 이끌 수 있습니다.

  3. 耽讀 2015.01.30 09:24 신고

    자본은 힘이 셉니다. 노동과는 비교할 수가 없지요. 자본은 돈과 언론권력, 정치권력,사회권력, 문화권력 심지어 스포츠권력과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노동이 주인되는 세상 과연 올까요?

    • 늙은도령 2015.01.30 15:57 신고

      2~3년 안에 한 번 정도는 대혁명이 일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 프랑스혁명처럼 실패하지 하면 안 됩니다.
      미국혁명처럼 성공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시민들의 의식수준이 지금보다 훨씬 높아져야 합니다.
      프랑스대혁명은 혁명정신을 제3자들의 개입으로 대실패했습니다.
      제3자란 혁명의 에너지를 독차지한 로베스피에리에 같은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이 공포정치를 하는 바람에 혁명은 실패로 끝났고, 정신만 후대에 유전된 것입니다.
      반면에 미국 혁명은 성공했기에 그 과정이 후대에 유전되지 못했습니다.
      정말 아이러니하지요?

  4. 꼬장닷컴 2015.01.30 09:58 신고

    공부 많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제가 완전 문외한이거든요.
    앞으로 자주 다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5.01.30 16:00 신고

      이 연재는 제가 책으로 출판하기 위해 썼던 것으로 작년 초까지 70% 정도를 써놓은 상태입니다.
      하지만 퇴고를 거쳐야 하고, 그 이후 추가로 읽은 책들 때문에 상당히 수정을 가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미 써놓은 것들을 수정해서 올리고 있습니다.
      연재가 중간을 넘어가면(최소 몇 개월 연재가 가능할 것입니다) 본격적인 퇴고를 해서 출판을 할 것입니다.

  5. 참교육 2015.01.30 14:15

    인간이만든 제도, 법, 도덕 ,윤리..와 같은 문화란 인간중심, 강자중심의 논립니다.
    특히 경제논리는 희소가치를 가진 사람이 중심에 두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은 요원합니다,

    • 늙은도령 2015.01.30 16:02 신고

      이에 대해 고민하고 고발하는 비판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고, 시민들의 의식도 조금씩 높아지고 있습니다.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보수정부의 무능력을 확인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복지를 위해 증세하지는 것이 대세가 되가고 있으니 조금씩 발전하고 있습니다.
      나쁜 재벌 삼성도 여러 가지 면에서 패소하고 노동자의 피해를 보상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조금씩은 전진하고 있습니다.

  6. Chris (크리스) 2015.01.30 18:08 신고

    진실을 마주할 용기...
    요즘에는 진실이라는 이야기만 나와도 알러지에 반응하듯 진저리 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진실..이라는 단어가 기피 해야하는 단어가 된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 늙은도령 2015.01.30 18:07 신고

      그렇습니다.
      진실을 찾아가는 것이 삶의 목표이거늘, 우리는 거짓말 하기에 급급합니다.
      진정으로 용기를 내서 무엇이 문제인지 얘기해야 합니다.

  7. 현영이 2015.02.02 08:04

    아고라에서부터 늙은도령님의 글을 즐겨읽는 독자이자 팬입니다...책 출간 상당히 기다려지네요...알아야 할 것 공부해야 할 것 고민해야 할 것 등등 너무 많지만 요즘 배움을 즐기고 있는 한사람입니다....격하게 공감합니다...요즘 건강은 어떠하신지...예전에 아고라에서 우연히 알게되었거든요...건강도 챙겨가시면서 건필하시길...^^

    • 늙은도령 2015.02.02 21:27 신고

      반갑습니다.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책 출간은 조금 미뤘습니다.
      최근에 읽은 책들로 인해 추가해야 할 것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미 많이 써두었으니 책들을 완독하고 그것을 제가 소화해내면 집필에 전념할 생각입니다.
      조금만 시간을 가지고 기다려주셨으면 합니다.


2008년 이후 장기적인 경제대침체에 빠진 유럽과 미국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중국은 자국의 시장을 개방할 때부터 국가자본주의를 선택했지만, 아무리 국가에 의한 인민 통제를 강화한다 해도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한 중국의 추락도 시간문제이지 예외적인 성공을 거둘 수는 없다.



당장 중국을 공포와 질병의 도가니로 몰고 가고 있는 스모그 현상만 해도 중국의 압축성장이 한국에서처럼 얼마나 많은 환경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갈수록 커지는 불평등은ㅡ2차세계대전 이전의 유럽이 그러했듯ㅡ중국을 개발된 지역과 미개발된 내부의 식민화로 양분하며 이중 사회의 전형적 폐해들을 양산하고 있다.



중국에서 ‘묻지마 범죄’가 증가하고, 테러의 발생빈도가 늘어나는 것도 이중 사회적 병폐의 전형 중 하나이다. 시기와 문화적 결과에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기본적으로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채택하면 어떤 나라도 이중 사회적 병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현재의 중국이 보여주고 있다.





중국이 국가자본주의를 선택했다고 해서, 근대이성이 약속한 진보의 마지막 단계인 후기산업사회에 접어들면 그 단계를 거친 국가들에서 발생한 문제들이 거의 똑같이 발생한다. 어쩌면 타의추종을 불허했던 저렴한 인건비(노동 착취)와 지독히 관대한 환경규제(생태계 파괴), 권위적인 정부에 의한 안정적인 환율관리(시장 왜곡)를 내세워 세계의 공장을 자처했던 중국에서 무한한 진보가 초래한 파국적 결말이 가장 적나라하게 펼쳐질 수도 있다.



게다가 세계 어떤 나라도 13억 5천만(이중에서 5~7억 명이 절대 빈곤층) 명이 넘는 인구를 관리해본 경험이 없어, 무한한 진보가 유발하는 병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올 경우 이를 제어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주 낮을 수밖에 없다. 중국이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내세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병존에 상당한 성공을 보여준다 해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공장과 가정에서 배출되는 온갖 오염원들을 관리한다는 것은 신이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에 사적독점의 확대와 각종 부패의 고리, 부의 불평등의 확대, 과소비와 개인주의의 확산 등이 더해지면 중국의 미래가 장밋빛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런 암울한 전망은 인구가 중국에 버금가는 인도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지구온난화의 속도를 감안할 때, 중국보다 인도의 급속한 변화가 인류에게 더욱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인도는 중국처럼 국가자본주의를 들고 나올 수 없을 만큼 민주화된 국가이자, 봉건시대의 계급제도가 여전히 횡행하고 있는, 국가적 차원의 일관된 관리가 불가능한 거대 국가이기 때문이다.





결국 전 세계 인구의 40%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과 인도를 포함해,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도입한 국가들에서 근대이성이 약속한 ‘계몽의 변증법적 행진’이 파국적인 ‘초위험사회’로 접어들수록, 인류의 미래는 삼척동자라도 예언할 수 있는 암울한 결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될 파국적 결과가 인류의 총체적 종말로 이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근대이성의 결과물인 현대성이란 영원히 끝나지 않을 홀로코스트의 역사이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며, 자연의 배제와 인류의 소외가 동시에 진행된 폭력의 역사였다. 이런 병폐들이 쌓여 세상은 초위험사회로 접어들었고, 최소한 개인적 빈곤과 환경적 불리함이 교차하는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할 비대칭적 종말(최소 수천만 명에서 최대 수십억 명의 죽음이 예상되는)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런 병폐들이 쌓이고 축적돼 극단에 이른 작금의 현실에서 삶의 모든 단계마다 타인에 대한 불안함과 두려움과 우발적인 폭력의 형태로 폭발되는 것도 당연한 과정이자 부정적 결과일 수 있다. 1%의 승자의 세상에선 연일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만의 리그에 진입할 수 없는 99%의 패자의 세상에선 노동예비군도 되지 못하는 잉여들이 나이가 어릴수록, 비정규직을 전전해야 하는 여성일수록, 빈곤과 위험의 악순환에 빠져버린 무능력자일수록 쓰레기로 퇴출되거나, 존재의 근거마저 삭제되고 있다.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에서 폭주하는 기차를 세우지 않는 한 존재의 사슬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부터 비대칭적인 종말은 피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위대한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과 수많은 석학들의 주장처럼, 시야를 가리는 짙은 안개 때문에 앞을 볼 수 없다고 해도, 인류가 파국적 결말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면 폭주하는 기차부터 멈춰 세워야 한다.





그런 후에 기차에서 내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빨리 얼마나 멀리 달려왔는지, 우리가 지나온 모든 곳에 얼마나 많은 파괴의 잔해들이 쌓여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문제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 누가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모두가 있는 힘을 다해 살펴보고 토론해서 탈출의 단초라도 찾아야 한다.



많은 석학들이 이에 대해 고민했고 지속적으로 떠들어댔으며, 일부는 소리 높여 강력한 경고를 보냈지만, ‘탐욕의 삼위일체’의 노예로 길들여진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했고, 저들은 우리가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하기 위해 정치경제의 엘리트들과 급진적인 지식인과 대중매체를 동원해 상징조작을 일삼았고, 현실 왜곡을 서슴지 않았다.



이중에서도 ‘탐욕의 삼위일체’를 위해 권력과 자본의 노예로 전락한 대중매체와 그들이 각색한 문화의 영향이 컸다. 모든 것을 오락화하고 상업화하는 대중매체와, 패션과 유행으로 대표되는 선정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대중문화는 ‘탐욕의 삼위일체’가 파시즘적 속도로 중하위층의 지갑을 털어갈 수 있도록 사람들의 인식과 행태를 조금씩 소리 없이 소비의 노예로 변질시켰다. 



대중문화는 그렇게 지배세력이 원하는 체제를 구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거기서 벗어날 수 없도록 각종 검열조치들을 강화해나갔다. 지배세력이 거대한 광고비용을 지불하고 각종 협찬을 지원하는 대신 시청자에게 전달될 콘텐츠의 내용을 일정 규칙체제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강제성이 있는 각종 방송심위규정들과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는 연령제한이나 등급제를 도입해 새로운 소비시장을 형성할 수 있는 자유만 주어졌을 뿐, 주어진 틀이나 체제를 뒤집어버릴 내용은 사전 검열을 통해 걸러냈다.  

     


이렇게 가장 많은 자유가 주어져야 할 대중문화가 대중을 상대로 한 문화산업의 형태로 한정된 결과, ‘탐욕의 삼위일체’는 돈이 된다면 패자의 기억과 영혼도 무덤에서 끌어내 대중에게 판매할 수 있는 유사 전체주의적 시장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들은 또한 개발과 성장의 부작용 때문에 급증하게 된 정신질환과 만성질환의 확대재생산을 통해 새로운 이익 창출에 성공했고, 이렇게 창출된 시장은 세상이 고령화사회로 접어들수록 시장규모를 늘려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발판으로 자리매김시키고 있다.





모든 먹거리가 사라져도 유병장수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몸이 남아 있으니, 이들의 이익 창출이 멈춰질 이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부시 정부 시절에 본격화된 전 세계적인 테러의 증가, 지구온난화와 토지의 사막화와 물 부족 현상의 폭발적 증가, 국가와 개인 간의 메울 수 없는 불평등의 증가는 폭력시장이라는 거대한 먹거리를 창출했다.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사회와 산업체계를 전파하는 목자의 역할을 자처했던 이들은 시장의 지속적인 확대를 위해 어린아이부터 노인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광고를 쏟아 부었다. 이들은 또한 산업사회의 발전에 내재해 있었던 노동유연화와 가족해체, 불량의학과 건강산업의 확장과 맞물려 이혼과 동거, 섹스의 양과 파트너의 수가 강조되는 여성의 평등을 이용해 또 다른 시장을 창출할 수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섹스의 향연 속에 말초적 삶이 사랑의 의미마저 단편화하고 즉시화한다. 보다 많은 소비자를 창출하기 위해 개별적 삶이 강조되면서 가족이 해체됐고, 임금하락에 따라 맞벌이가 늘어남으로써 아이들은 방치됐으며, 여성의 몸은 쾌락의 순간을 위해 돈으로 환산되기 일쑤였다. 입사를 위한 성형이 필수가 되면 여성의 가치는 외모로 판명될 뿐이고, 남녀평등이란 허울은 외적 아름다움이라는 미디어적 가치에 매몰당한다. 



경제주체와 미디어가 조장하는 이혼이 늘어날수록 자궁과 떨어질 수 없는 양육권이라는 미명 하에 수많은 여성들이 저임금노동과 경력단절의 악순환 속에서 빈곤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가난의 대물림은 여성가장의 가구일수록 발생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이는 저임금·임시직 노동시장의 확대로 이어지고, 가격 파괴를 통한 할인경제가 아니면 이들의 삶을 바쳐줄 수 없어,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려야 한다. 저임금의 악순환이 이렇게 되풀이된다.     



노동에 대해 일방적인 파혼을 선언한 자본은 광속으로 날아다니는데 비해, 파트너를 잃어버린 노동은 갈수록 설자리를 잃고 있다. 한국이나 일본처럼 신자유주의가 급격히 진행된 나라에서는 강경노조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헌법과 국제법이 보장하는 노동자의 기본적인 인권마저 말살되는 것이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다. 


  1. 태봉 2014.09.13 08:58

    그러면 이러한 세상을 변혁시킬 방법은 없는건가요?
    이미 곤고해진 기득권의 시스템을 이제는 선거를 통한 투표로도
    고 노무현 대통령처럼,한나라의 대통령의 힘으로도 저 곤고한 시스템을 무너트리기엔 너무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치론 답이 없다고 봅니다
    다른 쪽으로 그 해답을 찾아야 본다고 보는데, 늙은 도령님의 혜안을 듣고 싶네요

    • 늙은도령 2014.09.13 19:24 신고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노력은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한지 알려주는 시금석 같은 것입니다.
      제가 세월호에 집중하고 있는 것도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만일 특별법 제정이 유족과 국민의 뜻대로 제정되면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역사적 선례가 될 것인데, 그래서 여야 모두가 특별법 제정을 미루거나 유족의 뜻과 다르게 합의한 것입니다.

  2. 태봉 2014.09.13 08:58

    그러면 이러한 세상을 변혁시킬 방법은 없는건가요?
    이미 곤고해진 기득권의 시스템을 이제는 선거를 통한 투표로도
    고 노무현 대통령처럼,한나라의 대통령의 힘으로도 저 곤고한 시스템을 무너트리기엔 너무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치론 답이 없다고 봅니다
    다른 쪽으로 그 해답을 찾아야 본다고 보는데, 늙은 도령님의 혜안을 듣고 싶네요

  3. 중용투자자 2014.09.13 16:41

    '자본주의 시스템은 잘 만들어진 사기다' 는 말이 생각나네요. ^^

    • 늙은도령 2014.09.13 19:26 신고

      자본주의는 사기가 맞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유대인 고림대금업자의 신용창출이 과학기술의 발전, 근대국가의 등장과 함께 대규모화 된 것에 불과합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수많은 이론이 있었지만 저는 단순하게 봅니다.
      이자를 위해 일정액의 돈을 끝없이 돌려대는 신용창출이 자본주의의 핵심입니다.



제가 연재하고 있는 ‘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는 16~17세기 사이에 발아해서 19세기에 최고조에 이른 근대이성이 인류 문명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다루는 문명 비판서입니다. 우리가 현대성이라 하는 것도 근대이성이 배출한 산물이기 때문에 근대이성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입니다.



헌데 인류에게 미래의 희망을 얘기했던 근대이성이 내놓은 결과란 인류 문명의 퇴행이었고, 현대성으로 넘어간 뒤에는 총체적 종말을 향한 최악의 결과ㅡ비인간적인 문명ㅡ만 양산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세상을 얘기한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지옥도를 그리는 것 같아 글을 쓰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을 정도입니다.



많은 분들이 연재하고 있는 내용을 읽는 것 같지 않지만, 소수의 독자라도 제 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틈나는 대로 근대이성과 현대성의 철학적 이해를 제공해야 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상당히 어려운 내용이라 쉽게 풀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근대이성의 탄생부터 시작해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철학과 사회학, 과학적 개념들을 설명할까 합니다.



이 부분은 제가 연작으로 기획했던 책 중에서 5번째에 해당하는 것이었는데, 정기후원을 받기로 마음을 정한 이상 이곳에 먼저 글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리 쉽게 풀어내도 상당히 어려울 수 있으니 근현대의 철학에 관심 있는 분들만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근현대 철학을 다루는 가운데 고대 그리스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학파의 철학도 일부분 다루게 될 것입니다. 너무 어렸을 때 읽어서 확실하지 않지만,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동양의 철학들(6권의 목표입니다)도 일부 다루게 될 것입니다. 아직도 몇 백 권의 책을 더 읽어야 하지만, 근대이성에서 현대성으로 넘어가는 부분은 필요한 책을 거의 다 섭렵했기 때문에 글을 쓰는 데는 문제가 없을 듯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근대이성의 철학적이고 사회학적 산물인 계몽에 대해서 다룰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불고 있는 인문학 열풍은 계몽적인 기획이 너무 강해 그 의도가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기 때문에 제일 먼저 계몽의 철학부터 다루어 보겠습니다. 위험을 등에 지고 살 만큼 불확실성이 커진 세상에서 계몽만큼 기득권에게 유리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근대이성의 산물인 계몽의 철학을 이해하려면 베이컨과 데카르트, 파스칼, 칸트, 니체, 라이프니치, 헤겔, 스피노자, 쇼펜하우어 등을 다루어야 하는데, 이 중에서도 칸트는 제일 먼저, 제일 많이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이 어디까지 갈 수 있으며,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 그 한계를 정한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근대까지의 서양철학이 일체의 변화ㅡ기독교 유일신의 선험적 모델인 이데아의 세계에서 멀어지는 것ㅡ를 타락으로 본 플라톤의 철학과 사상에 대한 각주였다면, 칸트는 변화의 끝을 정함으로써 그것을 끝내버린 철학자입니다. 칸트에게서 이상적인 삶을 구축하는 계몽철학이 나온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인식(認識) 및 실천(實踐)의 객관적 기준을 선험적(先驗的) 형식에서 찾고, 사유(思惟)가 존재(存在)를, 방법(方法)이 대상(對象)을 규정한다고 하였다. 도덕의 근거를 인과율이 지배하지 않는 선험적 자유의 영역에서 찾고, 완전히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도덕적 인격의 자기 입법을 도덕률로 삼았다.



위의 인용문은 위키피디아에 나온 칸트에 대한 설명의 일부인데, 이는 너무나 도식적이고 형이상학적이어서 계몽을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합니다. 그래서 아래의 인용문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 나오는 내용으로, 필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칸트를 다루고 있어 우리의 출발점으로는 제일 적합할 것 같습니다.



계몽의 철학을 변증법적으로 다룬 이 책은 ‘계몽’을 다룬 (제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이 책을 중심으로 칸트가 정립한 계몽철학을 다루되, 푸코와 아렌트의 도움을 더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해 최대한 쉽게 풀어보도록 하겠지만, 그 출발은 조금 어렸습니다.



게다가 이번 글을 아래의 인용문을 올리는 것에서 그칠까 합니다. 제가 인용문을 쉽게 풀기 전에 한 번 읽어 보시고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제가 다음 글에서 이 인용문을 설명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계몽철학이 쉽게 다가올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제 설명에 반박도 할 수 있을 터이고요.



계몽은 칸트에 따르면 “스스로에 기인한 미성숙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인데, 미성숙이란 다른 사람의 인도 없이는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수 없는 무능력이다.” “다른 사람의 인도가 없는 오성”이란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오성이다. 이 말은 즉 자신의 독자적인 일관성을 근거로 인식을 체계화한다는 것이다. "이성의 대상은 오직 오성과 이의 합목적적 사용이다." 이성은 “오성 행위의 목표로서 어떤 집합적 통일체”를 설정하는데 이것이 “체계”다. 체계는 개념의 위계질서를 수립할 것을 요구한다.


라이프니츠나 데카르트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칸트에게서도 ‘합리성’이란 “좀더 높은 유와 좀더 낮은 종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체계적 상관관계를 완수하는” 데 있다. 인식의 “체계화란 하나의 원리에 입각한 수미일관성이다.” 계몽이란 의미에서 ‘사유’란 통일적인 학문적 질서를 만들어내고 원리들ㅡ이것이 자의적으로 설정된 공리이건, 내재적인 이념이건, 최상의 추상화이건 관계없이ㅡ로부터 사실 인식을 도출해내는 것이다. 


“논리의 법칙”들은 질서의 내부에 가장 보편적인 관계들을 만들어내며 이 관계들을 정의한다. 통일성이란 하나의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데 있는 것이다. 모순율은 체계의 핵심이다. ‘인식’이란, 원리들 밑에 다른 일체를 포섭함으로써 성립한다. 인식이란 체계 속에 분류해 넣는 판단과 동일한 것이다. 체계적이지 못한 사유는 종잡을 수 없는 것이거나 권위적인 사유다. 


이성은 오직 체계적 통일성이라는 이념, 즉 개념적으로 고정된 상관관계에 기여할 뿐이다. 사람들이 붙잡고 싶어 하는 모든 ‘내용적 목표’란, 그것이 이성의 통찰일지라도 계몽의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광기나 거짓, 합리화에 불과하다. 철학자들이 이런 결론을 희석시키기 위해 인간적이고 우호적인 감정을 내보이면서 갖은 애를 쓴다고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성이란 “보편자로부터 특수자를 이끌어내는 능력”이다. 보편자와 특수자가 같은 성질이라는 것은 칸트에 의하면 “순수 오성의 틀”에 의해 보증된다. 이 말은 즉 지각 작용을 이미 오성에 일치하게 구조화하는 지적 메커니즘의 무의식적 작용을 일컫는 것이다. 주관적 판단이 행하는 사물의 이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물이 자아 속으로 들어오기 전에 사물에는 객관적 질로서 오성이 이미 새겨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틀이 없다면, 즉 간단히 말해 지각 작용에 지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어떤 인상도 개념으로 나아갈 수 없고, 어떤 범주도 실례와 어울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체계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수렴하는 사유의 통일성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학문이 의식하고 있는 과제는 이러한 ‘사유의 통일성’을 생산하는 것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중용투자자 2014.09.04 10:16

    '서양철학자들은 역사를 고대-중세-근대로 나누어진 마르크스 사관으로 보는데 이는 우월감에서 오는 것이다' 는 도올 선생의 말이 생각나네요 ^^

    • 늙은도령 2014.09.11 20:53 신고

      마르크스가 아니라 많은 철학자나 사회학자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죠.
      유럽 중심주의적 표현인 것은 확실합니다.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출발은 둘 다 비슷합니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자본주의적 해석이 들어가면서 많이 달라졌기도 했지만, 그 근본에는 경제규모의 확장을 불러온 근대이성이 있습니다.

      사실 자본주의라 함은 마르크스가 말한 것이 가장 정확하지도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유대인의 신용창출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만나 이루어진 것입니다.


스퀼러가 워낙 설득력 있게 말하는데다가 그와 함께 있던 세 마리의 개들이 위협하듯 으르렁거렸기 때문에 더 이상 질문도 하지 못하고 스퀼러의 설명을 받아들였다.

 

                                                                                                                    ㅡ 조지 오웰의 『 동물농장 』 중에서




얼마 전부터 연재를 시작한 '대한민국 현대사'에서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의 우려스러운 현상들과 첨예한 갈등, 진실의 왜곡 및 호도, 사이비 지식인들의 오류투성이의 글, 방송의 지독한 편향성과 선정성, 정치인의 타락과 부패를 고발하기 위해 시작했다. 이런 아노미적 현상들을 필자의 사고와 성찰을 거친 다양한 단상과 글들을 통해 자세히 다룰 생각이다. 


                                                    




또한 필자는 지그문트 바우만에 이르러 명료해진 ‘액체대’ 또는 ‘최초의 현대(성)’이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연재에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다양하면서도 파괴적이고, 극단적인 현상들을 분석하고,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필자의 능력이 되는 한) 다양한 분야의 대가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깨어 있는 지식인들의 앞선 성찰을 인용하려고 한다. 



인용되는 분야의 넓음이 사유의 단단함을 흔들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사유의 단단함이 독자의 상상을 방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여백을 남겨둘 생각이다. T. E. 로렌스는 《지혜의 일곱기둥》에서 “길을 가던 순례자들은 이곳에 돌탑을 세웠다......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 탑 위에 돌 하나를 더 얹어놓곤 했다. 어떤 특별한 이유나 알려진 동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남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고 그 중 누군가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필자의 노력도 그것과 다르지 않다. 



이번 연재에 나오는 여러 가지 단상들은 현재의 대한민국을 살펴보는 정신의 지도가 될 것이지만, 측정의 미숙함 때문에 때로는 중간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다. 필자의 무능력과 앞의 이유들로 해서 곳곳에 허술한 논리와 비약이 존재하고 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다만 필자는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보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더 멀리 보려고 했을 따름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바로 내일을 향해서 부산하다면, 나는 양양한 미래를 향해서 생각을 돌렸던 것”이라는 자세를 견지하고자 했다. 





                                                                     


각종 위험들의 매일같이 터져 나오고, 극도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사회에서 이런 노력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확실하지 않지만, 최소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되,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고약한 의도들을 파헤쳐 날것의 형태로 전하려면 이런 자세를 견지할 수밖에 없었음을 밝힌다. 지식인으로서 비판정신을 유지하려면, 이런 자세를 견지함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 생각한다.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를 추측해서 현재의 세상에 의미 있는 무엇을 제시하려면 영혼의 얼음집에 담겨 있는 차가운 비판정신을 유지해야 한다. 




수백 년에 걸친 근대를 70년 정도의 파시즘적 속도로 치러낸 대한민국의 상황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상황이 심각하다. 근대가 남긴 모든 성과와 잔재와 폐기물이 분명하고도 파국적인 위험으로 변화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21세기는 ‘유동하는 공포’가 극에 달한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타인이 지옥’이라는 샤르트르의 말은 가족의 붕괴와 삼포세대의 등장, 이혼율의 꾸준한 상승, 자살률과 노인빈곤률 1위, 공교육 붕괴와 청소년들의 행복도 급락, 민주주의의 후퇴 등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도 바우만의 성찰은 시급을 다투는 일이 됐다. 필자가 연재를 시작한 이유도 여기서 출발한다. 





바우만은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에서 “현대(성)의 본질과 그것의 역사적 경향, 문명화 과정의 논리, 사회적 삶의 점진적 합리화의 전망과 그것에 대한 장애 등은 종종 마치 홀로코스트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논의”되는 기억 삭제의 경향이 있다고 했는데, 이런 현상이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현대(성)의 부정적 아이콘이었던 이명박이 대통령에 오르고, 그것도 모자라 MB정부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박근혜 정부의 탄생은 민주주의의 기초인 선거마저 국가기관들에 의해 유린됐으며, 이것에 대한 실체적 진실과 그에 따르는 단죄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마치 국정원을 중심으로 한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만들려는 현 집권세력과 정부기관 및 방송들이 일치단결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실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민주화 이전으로 후퇴했다고 말해도 모자람이 없다. 이밖에도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증거들은 넘쳐날 지경으로 널려 있다. 다수가 합의(선택)하면 그것이 그 사회의 도덕규범이 되는 상황은 민주주의를 파괴시킨다. 





다수결원칙은 민주주의의 원칙 중 하나이지 전부가 아니다. 합법화된 물리력이 국가(정부)에 집중된 현대국가의 경우, 정치가 거대관료제를 독점하는 것도 모자라 자본권력 및 방송과 손을 잡으면, 그리고 그 결합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대항권력이 없다면 정치적 자유가 견인하는 민주주의의 다원성과 사회경제적 평등이 견인하는 소통과 합의의 규칙은 말살된다. 여기에 대항권력의 현실적 결과를 도출하는 선거마저 국가기관에 의해 왜곡된다면 민주주의는 녹아서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



이 때문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으면 하는, 유시민이 『후불제 민주주의』에서 비통하게 말한 "민주주의를 제대로 누리려면 국민이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잘 알고 그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하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국민들과의 헌법이 규정한 기본권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지금의 경제적·정치적 위기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제대로 성찰하기만 한다면 앞으로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힘을 얻고 있다. 이는 명백한 퇴행이지만, 북한과의 준 전쟁 상태를 유지하는 한 영원히 지속될 한국적 민주주의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일본의 극우적 준동은 또 어떠한가?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몰락의 사이에서 다시금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격랑에 빠져들 수 있는 한반도의 상황은 또 어떠한가? 여전히 한국의 지배엘리트에 남아 있는 악질 친일 부역자들의 후손들은 또 어떠한가? 압축성장과 경제성장을 빌미로 부와 권력을 독식하고 후대에 세습하는 사적독점의 세력들은 또 어떠한가? 



필자는 이 모두를 조금씩이라도 다루려 한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통해 일방적 주장이 된다 해도, 현재의 혼란과 갈등을 조장하는 것들을 하나씩 밝혀 퇴출시키고자 노력할 것이다. 바로 이런 목표 때문에 인류 문명에 대한 비판서인 '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를 동시에 연재하고 있으며, 두 개의 연제를 교차해서 보면 현재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조금이라도 늘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는 과신도 아니며, 내 지적 풍요로움의 자랑도 아니다. 나는 아직 너무나 많이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그것 뿐이다. 그래서 이런 무모한 짓을 할 수 있는 것이며, 글을 쓰면서도 다시 고쳐쓸 것을 각오한 상태에서 부족한 공부를 병행하고 있다. 이 모든 나의 노력은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 이상의 것은 없다.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인간이 무엇보다 앞선 것임을 보여주려 한다. 






굴곡지고 파란만장했던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제합병 시기를 견뎌냈고, 6.25전쟁을 경험하고 참전하신 내 부모님의 기억들을 옮기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나의 작업은 살아 있을 시간이 별로 많지 않은 어머님의 생존 시에 철저히 실패한 자식이 그 동안의 불효에 대해 조금이라도 만회할 수 있는 유일한 도리이기도 하다. 또한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죽어갈 모든 이들과, 현재의 욕망보다 우선하는 미래세대에게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전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올해 말까지 계속될 이 연재들은 출판의 형태를 취할 테지만, 그 이전에 많은 분들과 거친 초고의 형태로라도 만남을 가질 것이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 했으니 조금이라도 많은 분들이 나의 지적 여정에 함께 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1. 태봉 2014.08.23 12:24

    제가 아는 게 없지만 님의 지적 여행에 살포시 한 숟가락 얹져봅니다 화이팅이요!!!^^

  2. 머루 2014.08.24 15:41

    도령님의 방대한 지식의 힘에 늘 반갑고... 제 지식의 힘이 갑자기 배로 커지는 느낍입니다
    제 일의 시간관계상 늘, 항상 읽을수없지만, 시간이 나는데로 아껴서 아껴서 읽고있습니다
    건강관리 잘하시여 오랫동안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 늙은도령 2014.08.24 20:23 신고

      네, 열심히 공부하고 사고하고 글로 옮기고 있습니다.
      모두 다 여러분의 관심 덕분입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저를 움직이게 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3. 숲속의친구 2014.08.24 17:04 신고

    늘 감사히 글을 읽고 있지만, 그러한 고도의 집중이 행여라도 도령님의 건강에 이상신호를 보내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4.08.24 20:24 신고

      건강을 잘 관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늘 그것이 문제인지라 최대한 조심하고 있습니다.
      건강해야 오랫동안 글을 쓸 수 있을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4. 가난한여행자 2015.04.12 21:54 신고

    아~~ 대단한 저술을 시도하시는 군요.


    저는 한국현대사를 이념이 아닌 ....개인우상화 , 개인과 특혜집단의 욕망충족을 위한 시공간이라고 생각 됩니다

    북한은 유물론 신봉하는 공산국가에서 3대세습을하고, 한국도 모든것이 기득권이 세습되고.(교회도세습..이해불가)

    한국,북한도 이념이 아닌 , 개인 .집단이 욕망 분출, 취득하고 세습하는 연장선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역사적으로 후진적 사회 전형입니다

    저는 현재 한국을 '''' 중세봉건적 사고를 가진 공업화된 나라''' 라고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는척해서....



    아무튼 개인이 하기 힘든 작업을 하시는것에 저자신이 부끄럽네요

    부디 건강챙기시고 ,,,좋은글 쓰기를 바람니다
    ''''''

    • 늙은도령 2015.04.12 22:05 신고

      아닙니다, 저는 다만 운이 좋아 많은 책을 읽었고 조금 더 전문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었을 뿐입니다.
      한 분야에 걸치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이 이런 무모한 시도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님의 지적이 상당 부분 대한민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적 풍요함과 편리함이라는 욕망의 노예가 됐습니다.
      인간의 가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잇습니다.

    • 길냥이 2015.10.04 01:11

      조선이 공산주의체제라는건 분명한 거짓말입니다.
      예전에 어느책에서 읽은 기억에 의하면 조선이 개한미gook 보다 잘나가던 시절의 언급입니다.
      식량을 어느정도 자급하던 시절의 조선관리가 이야기한 것입니다.식량부문에 한에 어느정도 공산주의에 접근했다는 이야기를 했답니다.
      식량부문에 한해서 말입니다.다른부문은 공산주의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공산주의국가는 아직 출현한적이 없읍니다.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체제의 국가라는 존재들이 적대적인 국가를 공산주의국가로 단정을 하고 일방적으로 주장을 했을뿐이고 그게 널리 퍼진 현상이라는 것이지요.

    • 길냥이 2015.10.04 01:30

      아참 공산주의는 민주주의의 반대개념이아닙니다.
      개한미ook 에서는 조선을 적대하다보니 조선을 공산주의국가로 취급하다보니 개한미gook 이 마치 민주주의국가인양 착각을 하거든요,
      조선이 공산주의국가가 아니듯이 개한미gook 또한 민주주의국가가 아니란 것이 보다 더 적절한 표현일듯합니다.
      권력에 세습은 없읍니다.

  5. 길냥이 2015.10.04 01:07

    민주주의를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것 같습니다.
    사실 개한미gook 인들의 절대다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는 아주 애매한 개념입니다.
    글중에 다수결의 원칙이 민주주의의 원칙이라고 하셨는데 그건 분명한 거짓입니다.
    하긴 개한미gook 인 다수가 그런 개념을 받아들이곤 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다수결의 원칙일 뿐이지 민주주의와는 전혀 관계없는 원칙입니다.
    책을 한권 권해도 될런지 모르겠읍니다만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비밀> 이란 책을 권하고 싶군요.
    민주주의를 경멸하고 전체주의내지 귀족정 비슷한 체제를 염원하던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다룬 소크라테스 비평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6. Shine 2018.06.27 01:39

    "이 모든 나의 노력은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 이상의 것은 없다.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인간이 무엇보다 앞선 것임을 보여주려 한다."

    응원합니다. 건강과 평화를 빕니다.


결국 지난 250년 동안 인류는 지구 곳곳에 널려 있는 석탄을 이용하는 기술이 내연기관을 탄생시켰고, 산업혁명과 제국주의의 엔진 노릇을 톡톡함으로써 노동분업(포드의 자동차 생산방식, 포디즘)의 1차 소비 팽창을 이룰 수 있었다. 그 이후 과학기술의 발달로 석유의 다양한 이용과 전기전자 혁명에 성공함으로써 포스트포디즘(값싼 노동력을 착취하고, 환경규제를 피해 전 세계적 재편성된 생산체제)의 2차 소비 팽창을 이룰 수 있었다. 



이어 생산품(특히 모바일기기와 문화 콘텐츠)를 한 번 만들면 무한복제가 가능한 첨단통신기술의 발달로 지적재산권과 특허전쟁으로 중무장한 초국적기업들의 3차 소비 팽창을 들어설 수 있었다. 이들은 이제 각 지역 고유의 생명으로부터 추출한 유전자와 원소들을 특허권으로 독점해, 지역 고유의 치료법과 먹거리에서도 악마의 특허료를 받아내고 있다.      



이렇게 전 지구적 지배세력에게 무한대의 탐욕만 독점시켜준 채, 근대이성은 무한경쟁과 효율성의 신화인 폭력적인 현대성을 이루어내는데 성공했다. 부국들의 이익 독점을 위해 만들어진 OECD 가입국 중 각종 불평등이 가장 심한 미국과 한국에서 현대성의 폭력성이 극단에 이른 것도, 정부가 무한경쟁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무차별적인 규제완화를 통해 국민 대다수의 삶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성이 폭력성을 띠게 된 것은 이것 말고도 또 다른 과학기술적 발전이 자리하고 있다. 첫 번째는 신에 의한 인간 구원의 확실성에 의문을 제공한 천체 망원경의 발전으로, 인류가 우주도 개척해서 경제적 부를 계속해서 늘릴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 것이다.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은 제시되지 않은 채,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다루어지는 방식으로 근대이성이 장담한 영원한 진보에 대한 환상만을 더욱 강화시켰다.  



물론 이 덕분에 우주공학과 관련된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각종 입자가속기 같은 수천억에서 수조, 수십조가 들어가는 각종 프로젝트들이 진행됐다. 투자 대비 경제성을 최고로 치는 현대성의 주창자들은 전 세계에서 수백~수천조 이상 들어간 우주공학으로부터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들은 산출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는 침묵하고 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각국의 정부들이 막대한 투자비를 투입한 것은 상위 1%의 배만 불려주었을 뿐 인류의 삶에 기여하지 못했다.    



오히려 우주공학의 발전은 현대성의 폭력성을 높여주는 두 번째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한 번 사용하기 시작하면 인류의 공멸을 걱정해야 하는 대량살상무기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일본에 투하된 두 개의 원자폭탄과 소련과 미국 및 일본에서 폭발한 핵발전의 확산이다. 단 두 개의 원자폭탄과 핵발전소에서 누출된 방사성물질의 파괴력은 인류로 하여금 인류가 발전시킨 과학기술에 의해 인류가 공멸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핵폭발과 핵융합으로 대표되는 무한대의 에너지는 근대이성이 선언한 무한한 진보를 이끌 핵심적인 과학기술로 포장됐지만, 지난 70년 동안 일어난 단 몇 개의 사건을 통해 인류는 정반대의 두려움에 빠져들었다. 무한대의 에너지를 창출하는 핵폭발과 핵융합이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멸을 불러올 수 있는 위험천만한 과학기술임이 밝혀졌다. 이때부터 인류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친구이기보다는 적일 수도 있음을 깨달았지만, 전 지구적 지배세력의 탐욕에 밀려 공멸을 두려워해야 하는 아노미적 현상 속으로 빠져들었다(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보라).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압승으로 끝난 소련과 동독의 붕괴와, 우주 개척과 무한대의 에너지 창출을 견인할 과학기술의 발전에 고무된 일부 지식인들은 《근대의 종언》이나,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문학의 종언》, 《탈산업사회의 도래》와 《문명의 붕괴》 같은 성마른 선언들을 우후죽순으로 내놓으며 인류를 현혹시켰다. 이들의 선언을 이용해 신자유주의적 통치를 내세운 세력들이 영국과 미국을 거쳐 전 세계적으로 정권을 잡기 시작했다.  



이후 무소불위의 권력을 움켜쥔 신자유주의 통치세력은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진 1989년을 기점으로 해서 근대이성의 마지막 저항선인 복지국가의 이상마저 조금씩 녹여서 공기 중으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견고하게 구축된 자본주의가 내부로부터 무너져내려 공기 중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격문이 거꾸로 뒤집혀버린 것이다. 마르크스는 전 지구적 지배세력의 종말을 예언했는데, 현실은 정반대로 진행되며 마르크스의 추상적 예언을 조롱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40년 동안 전 지구적 지배세력들이 추진한 부정적 세계화 과정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축적한 전 지구적 특권그룹은 모든 대항세력(노조와 시민단체)을 무력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국민의 행복과 안전을 담보하고 새로운 발전 동력을 제시해야 할 전통의 국가 역할마저 시장 논리에 반하지 않도록 조정하고 축소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대해 바우만은 《유동하는 공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글로벌 경제 세력의 하녀든 아니든, 국가란 쉽게 사표를 쓰고(과연 누구 앞으로?), 짐을 챙겨서 어디론가 사라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여전히 국가는 그 영토 내의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책임을 맡고 있으며, 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행동에도 책임을 지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 온전한 면, 다른 세력ㅡ국내와 국외 세력 모두, 어느 경우든 국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ㅡ에 대해 어떤 경우에는 완전히 굴복하기도 하는 면이야말로 그 핵심적 기능인 법질서 유지와 경찰 업무 기능을 보존할 뿐 아니라 확대, 강화할 수 있게 해주는 면이다. “시장을 더욱 개방해, 그 경계가 공적 영역까지 스며들어 오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정부는 시장 실패나 외부 효과 같은 시장이 인식하기를 거부한 문제의 청구서를 집어 든다. 그리고 시장의 힘에 따라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패배자들을 위한 안전망으로서의 역할을 한다...시장의 힘을 규제하는 것을 포기하고 일방적인 ‘부정적’ 세계화ㅡ즉 비즈니스, 범죄 또는 테러리즘의 세계화, 그러나 정치와 사법 기구는 이를 통제할 수 없다ㅡ앞에 국가가 항복하는 일은 그 대가로 사회 불안과 붕괴를 가져왔다. 이로써 인관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취약해지면서,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은 덧없는 것이 되고, 집단에 대한 열의와 연대성은 깨지기 쉽고 폐지가 가능한 것이 되었다. 그 결과 국가에는 사회복지국가를 수립하고 유지하며 운영하는 일보다 결코 가볍지 않은 부담이 주어지게 된다. 규제가 없어진 시장과 부정적 세계화의 결과로 이따금 일어나는 실패 같은 것이 아니라, 매일처럼 발생하는 평범한 일에서 정부가 짊어져야만 하는 사회적 부담이 계속해서 늘고 있으며, 그것도 점점 빠르게 늘고 있다.



바우만의 성찰은 매우 적절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들이 남아 있다. 명쾌하게 근대의 종말을 선언하기에는 여전히 근대적 잔재들이 세계의 중심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베이컨의 4개의 우상비판과 데카르트의 사유 예찬, 흄의 회의하는 이성에서 시작된 합리적 이성의 근대는 자연의 변덕스러움에서 벗어난 예측 가능하고 안정된 체제ㅡ최고의 주권으로서의 국민국가와 중앙 집중화된 행정을 담당하는 거대관료조직과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시민의식이라는 세 개의 축이 근간인ㅡ에 대한 믿음이 변함없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근대에 이루어진 고전물리학적 성찰이 제공한 모든 것이 질서 잡힌 상태ㅡ뉴턴의 만류인력에 근거하고,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완성된ㅡ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여전히 유효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이런 세 개의 축에서 구축된 합리적 이성ㅡ거의 대부분 합리적이지 않았지만ㅡ이 주조해낸 합리적인 이성과, 절대적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적 관조를 폐기시킨 과학에 대한 맹신은 폭력성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는 기술-경제적 발전의 신화와 함께 현대성의 핵심에서 떠날 기색이 전혀 없다. 

  1. 태봉 2014.08.20 16:39

    많이 공부하고 갑니다 늙은도령님^^




다양한 첨단기술의 발전에 따라 의사와 환자 간의 문진과 진단, 시술과 수술 등의 일체의 의료행위를 철저히 경제 논리에 의거하는 미국의 현상을 보면서, 우리는 현대성의 폭력적 행태가 사회의 모든 곳에 침투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인간의 생명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한국에서 박근혜 정부가 행정조치(국회의 동의가 필요없는 가이드라인)라는 편법을 동원해, 모법인 의료법을 무력화시키며 강행되고 있는 의료민영화와 영리화의 논리도 결국 자본과 기업의 이윤추구 행위의 정당화와 극대화에 있다. 



국가권력기관들의 불법적인 선거 개입에 의해 박근혜 대통령의 민주적이고 정치적인 정당성이 의심받는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가 국민의 60~70%와 야당, 의사협회와 보건노조, 시민단체들이 반대하는 의료민영화와 영리화를 강행하는 것은 경기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이라는 미명 하에 국민의 생명마저 돈의 논리에 넘겨버리는 최악의 통치행위라 할 수 있다. 의료민영화와 영리화는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켜야 하는 국가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도 어긋난다.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각종 규제가 신설되고, 초국적기업과 거대 금융자본의 탐욕을 제한하고 있음에도, 유독 근대이성에 사로잡혀 성장만 외치는 박근혜 정부의 시대착오적 행태는 자신의 임기 동안 성과를 거둘 수 있겠지만, 그 폐해는 다음 정부와 미래세대에게 전가된다. 시대에 역행하는 각종 정책들, 규제의 옥석을 가리지 않는 무분별한 철폐, 온통 장미빛으로 색칠된 ‘통일은 대박’이라는 미래비전은 치적에 대한 지도자의 본능적 욕망과 미래에 대한 대책 없는 낙관주의가 만들어낸 허구의 산물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며, 대체 불가능한 경제학자로 지칭되는 조지프 스트글리츠마저 경제성장이 온기가 국민들에게 흘러내리는 낙수효과가 제대로 작동한 적이 없다는 것을 밝혔음에도, 치기 어린 지도자와 정부 및 정권의 나팔수를 자처하는 방송들의 설득력 있는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오직 '결과의 낙관론'을 퍼뜨려 국민들을 집단적인 최면상태로 빠뜨리는 것은 현대성의 폭력성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선정적이고 선동적인 방식으로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의 여론몰이는 특히 텔레비전에 길들여진 세대에게는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텔레비전과 함께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미디어세대들은 텔레비전이 전해주는 특정 정보에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신뢰를 드러낸다. 미국의 교육학자이자 사회학자이며 방송학자였던 닐 포스트만은 '텔레비전에 길들여진 성찰없는 미디어세대'에 대한 기념비적인 저서, 《죽도록 즐기기》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텔레비전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린 시청자란 있을 수 없다. 텔레비전 없이 지내야 할 정도로 열악한 빈곤도 존재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의 영향을 받고 변질되지 않은 수준 높은 교육도 찾아볼 수 없다...이제 텔레비전은 지식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에 관한 방법론까지 지시하는, 초 매체적 지위에까지 올랐다...우리 모두는 카메라가 잡은 제한된 각도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브라운관에 비치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 결과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에 편향된 방송을 즐겨 시청하는 50대 후반부터 60대 이상의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흘러나오는 메시지가 사실ㅡ심지어는 진실ㅡ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텔레비전이란 도구(정확히는 텔레비전을 작동시키는 배후의 테크놀로지)가 가치중립적이라고 확고하게 믿어 의심하지 않는 이들은, 특정 방송이 텔레비전을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를 생각의 입구에서 출구까지 빛의 속도로 반응하며, 텔레비전에 길들여진 인식의 활동을 일상생활과 여론조사와 투표소에서 분출시킨다.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세월호 유족들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농성 중인 장소에서 맞불시위를 벌이거나, '자식 팔아서 그만큼 챙겼으면 됐지'라며 짐승보다 못한 폭언을 퍼붓고 폭력을 행사하는 단계까지 치달을 수 있다. 이들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와 거기에 적용된 테크놀로지의 관계가 '두뇌와 정신의 관계와 같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닐 포스트먼은 이런 인지부조화와 길들여진 인식의 편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테크놀로지와 매체의 관계는 두뇌와 정신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두뇌처럼 테크놀로지는 일종의 물리적 기관과 같다그리고 정신과 같이 매체는 물리적 기관의 사용과 관계가 있다하나의 테크놀로지가 특정한 상징부호를 사용할 때나 사회적 위상을 차지할 때그리고 경제적ㆍ사회적 정황 속에 슬그머니 자리잡을 때그 테크놀로지는 하나의 매체로 변모한다테크놀로지는 그저 하나의 기계장치에 불과하지만매체는 기계장치로 인해 생성되는 사회적ㆍ지적 환경과 같다는 뜻이다물론 뇌처럼 테크놀로지는 나름대로 태생적인 편향성을 갖는다바로 이 때문에 경우에 따라 테크놀로지가 쉽게 접목되기도 하며 충돌이 생기기도 한다따라서 과학기술이 중립적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테크놀로지의 역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뿐이다.



과학자들이 '과학적 연구와 발견은 가치중립적이어서 윤리나 도덕과는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 자체로 과학적 행위가 가치중립적이라는 특정 가치를 강요하는 것이어서 논리적 모순에 빠져드는 것처럼, 카메라가 제한된 각도에서 찍은 것만 볼 수 있는, 다시 말하면 제한된 각도 밖에 어떤 것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이들은 텔레비전에 적용된 테크놀로지의 편향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폐허와 쓰레기장도 카메라 각도와 편집에 따라 예술이 될 수 있고, 희망의 상징이 될 수 있다. 



텔레비전에 길들여진 미디어 세대들은 모든 방송 콘테츠가 광고와 협찬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으며, 고가의 텔레비전 광고비와 거액의 협찬을 감당할 수 있는 자들(조직, 단체)이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고려하지 않는다. 방송사들이 먹고 살려면 이들의 구미에 맞는 콘텐츠와 뉴스를 내보낼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자본지향적이고 권력지향적이며, 소수의 상류층의 삶을 지향하는 매체이자 테크놀로지의 집합체라는 사실을 고민해보지도 않는다.   



게다가 미디어 이론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매스미디어가 내보내는 '메시지는 메타포'라고 말했다. 이는 메시지를 생산하는 '테크놀로지마다 제 나름대로의 어젠다를 내포하고 있다'는 뜻인데, '어젠다'라는 단어에 내포된 의미가 정치적이라는 것처럼, 텔레비전에 적용된 테크놀로지가 그 시대의 지배적 세력이 추구하는 가치와 이익에 봉사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최악의 초국적 언론재벌 머독



맥루한은 또한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할 때마다 인간은 자동적으로 미디어가 전하는 정보(콘텐츠)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미디어는 결국 인간을 그 이전의 인간과 전혀 다른 인식체계를 지닌 존재로 변화시킨다. 맥루한은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를 "기술(테크놀로지)의 영향력은 의견이나 개념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이미지 조작(상징 조작)을 통해 "인식의 방식을 꾸준히, 아무런 저항없이" 바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맥루한이 텔레비전이 내보내는 콘텐츠가 "정신의 감시견을 따돌리기 위해 도둑이 미끼로 던지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현대성을 대표하게 된 가장 대중적인 매체인 텔레비전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라는 최적의 기후조건에서 모든 잠재력을 영상기술로 끌어낼 수 있었"고 정치적 편향성이나 권력 편향성을 지닌 매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텔레비전이 쏟아내는 수백 수천만 가지의 동영상에 인간은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이 되는, 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사고의 결여로 확장됐고, 심지어는 뇌의 퇴행을 야기하는 유전적 변화ㅡ리처드 도킨스는 이 유전자를 밈이라고 명명했다ㅡ까지 초래했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텔레비전에 적용된 테크놀로지는 '시간을 분초로 나누어 팔아야 하고, 한편으로는 말보다는 이미지가 우선이기 때문에' 시청자를 사로잡기 위해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폭력적인 것들을 선택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부정적 세계화가 만들어낸 세상에서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폭력적인 것들은 넘쳐날 정도로 많고, 이런 것이 쌓이면 시청자의 인식뿐만 아니라 "실제 세계가 텔레비전이라는 무대를 통해 상영되는 모습을 본떠 점차 각색"되는 일도 가능해진다. 



무한한 진보가 가능하며, 부수적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최종적인 결과는 낙관해도 좋다는 근대이성이, 1, 2차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현대성으로 넘어가며 선택한 지배적 체제가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에 따른 승자독식을 인정하는 신자유주의였다는 사실까지 더하면, 인류를 자연과 신의 수중에서 해방시켜주고 빈곤과 질병에서 구원해주겠다고 공언한 근대이성은 더 이상 존재할 명분이 사라진다. 무한한 진보와 함께 근대이성이 약속한 것이 '자유와 평등, 박애와 관용, 정의와 평화'의 왕국이었다는 것마저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현대성은 이렇게 폭력성과 선정성, 즉시성과 오락성을 띨 뿐 어떤 진지한 담론과 토론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인류는 그렇게 현대성을 확대재상산하는 주류 매체인 텔레비전의 테크놀로지에 의해 전쟁과 테러, 대형사고와 유명인사의 부패와 스캔들, 엽기적인 범죄와 함께 잘 만들어져 섹시함으로 흘러넘치는 아이돌들의 온갖 몸짓들과 모든 이슈를 오락거리처럼 다루는 콘텐츠 처리방식에 따라 가치의 판단기준이 왔다갔다 하는 아노미 현상에 빠져들게 됐다. 



이를 극대화시킨 것이 모든 콘텐츠에 따라다니는 가장 감각적이고 유혹적인 광고의 범람이다. 인류는 이제 광고 없는 공간을 찾기 힘들게 됐고, 이제는 광고에 순응돼 그것이 전하는 현대성의 다양한 욕망과 쾌락행위에 사로잡힌 포로이자 노예의 신세로 전락했다. 눈이 가는 모든 곳에는 어김없이 광고가 걸려있고, 손을 뻐치는 모든 곳에는 광고에서 본 욕망들이 실체를 드러낸 채 기다리고 있다. 필요한 것은 돈이거나, 즐기고 난 다음에 갚는 플라스틱 신용과 전자 신용이다. 



현대성이란 이렇게 즉시적인 욕망과 쾌락의 추구를 창출해낸다. 소비자로 정체성이 재규정된 인간은 어제의 귀중품이 오늘에는 필수품이 돼야 한다. 욕망은 뒤로 미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족시킬 수 없어 돈을 버는 대로 소비하려 달려가는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순간적이고 즉시적인 불만족과 스트레스로 이어진다. 이것이 인간의 행동에 폭력적 요소를 가미하게 되고, 한 아파트 단지에 사는 이웃과 주차 문제를 놓고 살인도 일어나게 된다. 폭력적 성향으로서의 현대성이 온갖 공포를 양산하고, 타인은 언제나 지옥인 존재가 된다.    




현대(성)의 병폐가 정점에 이르러 발생한 미증유의 참극인. 미국 월가 발 2008년의 신용 대붕괴가 유럽으로 전이돼 복지국가 신화에 종지부를 찍더니, 최근에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같은 신흥국의 위기로 확산되고 있다. '결과의 낙관론'이 부른 이런 참사들이 이어지며, 인류의 진보는 퇴행을 거듭하고 있고, 머지 않은 장래에 파국적 결말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과 공포가 확산일로에 있다.



                   작년 1월1일에 작고한 울리히 벡의 저작들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다는 것은 비극이다.



독일의 재부상은 현대(성)의 퇴행을 보여주는 대단히 상징적인 사건이다. 독일은 1945년부터 오이켄과 뢰프케 등의 질서자유주의(사회적 시장경제로 신자유주의의 원형을 제공했다)를 기반으로 압축성장을 이루었지만, 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극도의 경기 침체에 빠져들었다. 이후 제3제국의 특징인 파시즘에 뿌리를 두고 있는 녹색운동이 전방위적으로 펼쳐지며, 70~80년대의 장기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국민이 절약에 동참하고 국내투자(복지와 SOC투자 축소, 외국인에게 돈을 걷는 것 등)를 최소화한 채, 수출에 올인한 것이 신용 대붕괴를 전후로 해서 독일의 급부상을 견인했다. 



거대 금융자본의 탐욕 때문에, 소가 뒷걸음치다 횡재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는 독일의 부상은, 그런 성공이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한데도 유럽의 지형도를 뿌리 채 흔들고 있다. 유럽이 고도의 발전을 이루었던 시기는 부의 재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졌던 1945~1975년 사이의 '황금시대 30년' 뿐이었다. 신자유주의의 점진적인 부상과 케인즈 모델의 점진적인 몰락이 교차한 1979~1980년을 정점으로 유럽은 저성장이 고착화됐고, 각종 불평등이 양산됐다.     



2008년 금융 대붕괴 이후의 유럽이란,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라는 속담의 전형이었다. 바로 그 3년이 흐른 2011년부터 (독일을 제외한) 유럽은, 미국이 그런 것처럼 1929년에 버금가는 대공황으로 빠졌들었다. 이로써 서구의 양대 축으로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를 착취하고 약탈했으며, 일방적인 세계화를 통해 부와 권력과 위험의 불평등을 초래한 서구의 개발레짐과 채무레짐을 거쳐, 화폐 근본주의로 이어졌던 개발과 금융 위주의 성장 모델의 허상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바우만이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에서 언급한 내용은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임을 보여준다.



바우마도 너무 고령이어서 걱정이 앞선다.



세계은행 부총재를 지낸 경제학자 프랑수아 브루기뇽은 1인당 평균 소득을 기준으로 비교했을 때 1인당 평균 소득을 기준으로 비교했을 때 국가 경제들 간의 불평등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는 데 비해 세계 최상위 부자들과 세계 최하위 빈자들 간의 간격은 계속 벌어지고 있고 각국 내의 소득 격차도 계속 확대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콩쿠르상 수상자인 경제학자 에릭 오르세나는...최근의 변화는 세계 인구의 상위 10퍼센트의 평균 소득만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서는 최근의 변화의 크기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돌연변이(‘주기상의 한 국면’과는 분명히 다른 변화)의 메커니즘을 파악하려면, 상위1퍼센트, 아니 아마도 상위 0.1퍼센트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최근의 변화가 초래한 진정한 영향 즉 ‘중산계급들’의 ‘프리카리아트(비정규직·파견직·실업자·노숙자들을 총칭)’로의 전락이라는 결과를 간파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제안이 정당하다는 것은 한 국가를 대상으로 한 것이건 다수의 국가를 대상으로 한 것이건 간에 모든 연구를 통해 확인된다. 모든 연구들이 동의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전 세계의 거의 모든 곳에서 불평등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는 부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최상위 부자들은 더 부유해지는 반면 빈자들, 특히 최하위 빈자들은 더 가난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더군다나 부자들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점점 더 부유해진다. 빈자들은 단지 가난하기 때문에 점점 더 가난해진다. 오늘날 불평등은 자체의 논리와 추진력에 의해 계속 심화된다.



이렇게 새로운 형태의 빈곤층을 양산하고 있는 ‘사회적 불평등의 냉혹한 현실은 사회 내의 모든 사람에게, 혹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은 분명한 진실이 됐다. 특히 지난 40년 동안 신자유주의의 폭주로 인해 인류가 배운 교훈이라면 ‘가장 부유한 사회 구성원들이 갈수록 케이크의 더 큰 몫을 차지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경제 모델(낙수효과를 처음 정립한 존 롤스의 《정의론》이 자유 시장 자본주의에 도덕적 정당성까지 부여해준 것을 넘어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어준 경제 모델)은 결국 자멸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명백한 교훈도 전 지구적 네트워크를 구축해 그 효과를 독점하고 있는 초국적기업들(애플, 구글, MS, 삼성전자, 도요타, 폭스바겐, 포드, GM, 현대차 등)과 거대 금융자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한 때 전 세계시장을 점령한 채 실질적인 세계 최고의 부국이었고, 《평등이 답이다》에서 모든 통계수치로 볼 때 최상의 국가에 속했던 일본의 몰락과 몸부림은 ‘독일 중심의 유럽의 재편성’과 비교할 때 현대성의 병폐가 한 가지 현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거의 해프닝으로 끝난, 하지만 초국적 제약업체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이익과 각 국가의 공적자금을 물 쓰듯이 써버리도록 만든 대중매체의 선정적인 ‘신종플루의 습격’에 대한 보도처럼, 거의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선정적인 방식으로 중계돼 인류에게 극도의 공포를 안겨준 3.11 제1원전 폭발은 현대(성)의 병폐가 한두 가지가 아님을 드러낸다. 최근에 들어 전 세계 언론을 통해 선정적으로 보도되고 있는 에볼라 바이러스의 확산도 몇 년 후에는 '제2의 신종플루의 습격'이 될 수도 있다(물론 전 세계에서 1억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사망했던 '스페인 독감'이 재현될 수도 있다).  



독일과는 정반대의 이유로, 잃어버린 20년의 일본은 1급전범의 후예인 아베가 총리에 올라 두 번째 내각을 구성함과 동시에 파시즘의 동양판인 군국주의의 부활을 위해 맹렬한 기세로 달려 나가고 있다. 1,000억 달러에 이르는 피해를 발생시킨 고베 대지진에 이어 갈수록 도쿄를 향해 지진대가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의 재무장과 전쟁이 가능한 나라로의 변신은 새로운 냉전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것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만일 고베 수준의 지진이 도쿄에서 일어난다면 그 피해액만 34조 달러(2008년 신용붕괴보다 피해액이 더 크기 때문에 세계경제는 3번째 대공황으로 접어들 가능성이 높다)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기 때문에, 일본 정치권의 초조함이 비이성적 행태를 부추기고 있는 형국이다. 아베 총리와 그의 추종자들이 미국(또는 오바마 정부의 묵인 하에)과 국제사회의 경고(또는 무기력한 말장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한민국과 중국을 향해 끊임없는 도발적 언사와 행위를 강화시키는 이유는 일본에 팽배해 있는 패배의식과 숙명적 종말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가를 좌지우지하는 유대인의 로비도 천문학적인 재정적자 감축 때문에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이(그러나 이스라엘의 가자주민 대량학살 정도는 미 정치권을 움직여 국제여론의 비판으로부터 호모막을 칠 정도는 된다)에, 아베 내각의 의도적인 군국주의 부활은, 스스로의 탐욕으로 무너졌지만 전 세계에 그 피해를 배분함으로써 자신의 피해를 최소화했던 제국의 몰락과 어우러지면서, 전 지구적 차원의 긴장과 민주주의의 후퇴를 초래하면서 세계의 불확실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지진이라는 자연적 사건을 논외로 친다고 해도, 이런 전 지구적 현상은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탄생의 순간부터 내재했던 필연적 결과여서 다시 한 번 언급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한 연구는 충분히 이루어진 상태라 그 연구들을 따라가기만 해도 충분할 것이며, 앞선 연구들의 공통점을 언급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영원한 진보에 대한 믿음과 자유 시장 자본주의의 역사를 연구한 거의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듯이, 그 출발에 베이컨과 데카르트, 스미스와 리카도, 뉴턴과 다윈, 석탄의 효율적인 사용을 가능하게 해준 화학과 그것이 전부인 영국 발 산업혁명이 있었다. 



그들에게서 시작된 근대이성의 요란한 질주는 사회경제적 평등ㅡ초기의 미국과 신자유주의 이전의 스웨덴과 노르웨이와 덴마크가 달성했다ㅡ을 유보시키며 자유의 이름으로 ‘유동하는 공포’를 동반한 채 2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현대(성)로 넘어갔다. 이후로 너무 많은 폐해를 양산하는 석탄을 대신해 ‘물보다 싼 석유’의 등장으로 현대의 비약은 어지러울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부정적 폐해도 포함되기 때문에 오직 양적인인 성장만 나타내는 지표인 GDP를 기준으로 할 때)을 거듭했다.





유럽의 제국주의와 유일 제국 미국의 역사이기도 한 석유시대의 무한 확장은 ‘가격파괴의 저주’와 함께 이기적인 개인주의의 정화인 소비하는 개인화를 통해 시장규모를 최대한 늘리는데 성공했다. 석유 매장량의 끝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바닥에 이를 터ㅡ21세기를 넘길 것 같지는 않다ㅡ영원한 성장을 약속했던 근대이성의 질주는 대체에너지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과학기술의 한계 때문에 크게 휘청거리고 있다. 



무한한 진보를 약속했던 열역학 제2법칙도 엔트로피의 질이 너무나도 나빠져 더 이상 전가의 보도로 사용할 수 없다. 양자역학의 발전은 한편으로는 진보의 무한 동력이지만, 그 파국적 위험성은 인류 문명 전체의 종말로 불러올 수 있어 확률이 허용하는 한에서만 유효할 뿐이다. 나노과학은 초미세먼지와 조우하며 새로운 형태의 전염병과 신종질환을 양산할 위험성을 동반하고 있다.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인용된, 마샤 에인절의 《뉴욕 북 리류》의 2009년 1월 15일자 기사는 갑자기 ‘위험해진 세상’에 대한 한 가지 단서를 제공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제약회사들은 시장을 더 확장할 수 있는 보다 새롭고 극히 효율적인 방법을 완성시켰다.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들을 홍보하는 대신에, 오히려 자신들의 약들에 적절하게 들어맞는 질병들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전략은) 미국인들에게는 오로지 단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만이 있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는 일이다. 약물 치료를 필요로 하는 의학적인 상태를 지닌 사람들과 반면에 바로 자신도 약물을 필요로 하는 상태라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 말이다.



이쯤을 전후로 해서 의료와 제약 산업은 새로운 수요 창출을 극대화해 이윤을 추구하는 마케팅 전략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사의 묵인 하에 제약회사들은 자신들의 우월한 권력을 활용해,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만큼 건강에 대한 관심사가 커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보다 건강하게 살려면 자신들의 약들을 먹고, 균형 잡힌 몸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피트니스에 매달리며, 조금만 몸이 이상해도 병원을 찾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는 인식을 심는데 성공했다. 



약의 효능이 질병의 호전에 대해 약속할 필요는 없으며, 의료행위를 받는 사람들이 정말로 심각한 상태인지, 아니면 그저 여러 가지 통증 중 하나에 불과한지에 대해서는 전혀 따지지 않는다. 하나의 약이 효과를 보이지 못하면 다른 약을 먹으면 되고, 깨알 같은 전문용어로 써 있는 부작용들이 일어나면, 그것을 줄이는 다른 약을 머거나 의료행위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참는 데 익숙한 고통도 최근에는 질병으로 재정립된다.” 



최근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는 ‘위식도 역류(필자의 어머니의 지병인 식도성 역류염)’는 예전에는 속쓰림이었으며, 온갖 형태로 나타나는 생리통과 그 징후가 너무나도 특이해 이해하기도 어려운 자신감 상실 같은 것들은 불길하게 들리는 병명으로 재정립돼, 긴급하게 의학적 치료가 필요한 질병처럼’ 변경됐다. 또한 ‘사회불안장애’나 필자가 겪고 있는 ‘공황장애’, ‘만성적인 수면장애’와 ‘누구나 걸리는 우울증’ 등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면서, 제약업계는 ‘불안-홍보 캠패인’을 지속적이며 대규모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특히 끝이 보이지 않는 장기적인 경제공황을 탈출하기 위해서 전 세계적으로 ‘의료민영화’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의사와 약사와 갈리기도 하지만 초국적 제약회사와 첨단의료기기 제작업체와 전 세계적 판매상, 의료관광와 관광수입을 매개로 관광업계와 항공업계, 보험업계와 거대 금융자본들이 손을 잡고 각국 정부에 어마어마한 로비를 벌이고 있다. 특히 초고령사회와 초위험사회의 도래는 의료민영화만큼 돈이 되는 사업도 없다. 이 문제에 대한 이익집단과 국민 간의 전쟁은 갈수록 이익집단 쪽으로 기울고 있다. 거의 모든 의료대란이 상당 부분 짜고 치는 고스톱 형태로 진행되는 것처럼.



이런 현상은 제약업체만이 아니다. 《불량의학》과 《의사들이 말해주지 않는 것》, 《의학과 문화》, 《의학과 기술의 지배》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문진의 시간은 엄청나게 줄었고, 그 사이에 각종 의료기기를 동원한 수치와 보다 많은 투약, 보다 자주 이루어지는 수술 등이 자리하게 됨으로써 환자의 건강은 의료기술이 발전할수록 각종 신규 질병에 위협받고 있다. 



전 세계에서 국가와 국민이 가장 많은 의료비를 지출하면서도, 그것의 반도 지불하지 않으면서도 건강에 관한 모든 면에서 높은 안정성을 보여주고 있는 일본에 비해 미국의 건강 관련 각종 수치는 선진국이라고 전혀 얘기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것도 이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의 경우 개인파산자의 대부분이 높은 의료비를 감당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사실도 만성질병이 만연되고 있는 현실을 가장 잘 반영해준다. 



전 국민을 상대로 한 건강보험이 실시되지 않으면, 부와 위험의 불평등이 중첩되는 새로운 사회적 계급들의 삶의 질은 19세기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의료에 관련된 여러 가지 연구와 통계를 이용한 닐 포스트만의 《테크노폴리》를 보면, 의료행위와 의학기술에 내포된 경제논리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으며, 이것이 곧 다른 나라의 미래가 될 수 있는 천박한 미국의 실상을 볼 수 있다.



미국의 의사들은 영국의 의사들보다 1인당 평균 6배나 많은 심장질환과 이식수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의사들이 진찰을 위해서 행하는 검사의 횟수는 프랑스, 독일, 혹은 영국보다 많다. 미국의 여성들은 유럽의 여성보다 2배에서 3배나 많은 자궁적출수술을 받고 있으며, 미국에서 이 수술을 받는 사람의 60퍼센트가 44세 이하이다. 미국의 의사들은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많은 전립선수술을 한다. 미국은 제왕절개수술에서도 업계의 선두에 서 있어, 다른 나라들보다 50에서 200퍼센트 이상 많은 시술이 이루어진다. 미국 의사들은 수술을 피하고 약물치료를 선택하는 경우에도 다른 나라의 의사보다 훨씬 많은 양의 약을 사용한다. 그들은 영국 의사들보다 항생제를 2배 이상 많이 처방한다. 유럽의 의사들은 세균에 의한 감염이 분명하고 상태가 심각한 경우에만 항생제를 사용하는 데 반해, 미국 의사들은 세균감염으로 보이면 별 고민 없이 항생제를 투여한다. 미국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훨씬 많은 양의 엑스레이 사진을 찍도록 한다. 어떤 방사선 학자는 엑스레이의 사용 정도를 조사하는 중, 5장이면 충분했을 환장에게 50장에서 100장까지 엑스레이를 찍은 사례들을 발견하였다. 다른 조사에 따르면, 임상자료를 분석해 본 결과 엑스레이를 전혀 찍을 필요가 없거나 연기해도 좋은 환자가 2/3에 달했다고 한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 2014.08.11 01:55

    도령님의 훌륭한 글 읽다가

    글 마지막 문단 보고서...

    알고 있는 자료가 있어서 댓글로 남겨 봅니다.

    우리나라가 자궁 적체 수술 1위랍니다...

    http://www.yakup.com/news/index.html?mode=view&nid=147891
    http://www.agora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1874

    영국이나 미국 보다도 더 심한 이 나라는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요..?

    OECD 평균에 2배나 된다는데...

    멀쩡한 여자들 생식기로 돈 벌어먹을 의사들 ... ㅠㅠ


    항생제 처방율도 1위라는 것은 예전에 나왔고요...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1040611001

    신자유주의가 만연한 국가보다도 더 악랄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이해가 안갑니다.

    왜 그런지... 부디 현명하신 도령님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 늙은도령 2014.08.11 02:57 신고

      님이 질문하신 것에 대해서는 몇 편의 글로 올릴 수 있도록 구상을 마친 상태입니다.
      제가 올해 안으로 끝내서 출판해야 할 책에 들어가야 할 내용이기 때문에 구상하고, 자료를 구하고, 책들을 읽느라 많이 늦어졌습니다.

      대한민국이 이 지경이 된 핵심은 일제시대의 단죄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입니다.
      현재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통치엘리트들은 일제시대에 부를 축적한 자들과 족벌언론들입니다.
      그들이 일제시대에 부를 축적했기 때문에 북한을 최고의 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고,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해야 했던 미국의 제국적 이익이 이승만을 거쳐 박정희로 이어지면서 천민자본주의가 뿌리깊게 자리했기 때문입니다.

      6.25전쟁은 북한의 침략으로 시작됐지만, 미국과 소련 및 이승만 정권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6.25전쟁 때 북한의 침략으로 무너져내린 것은 알려진 것보다 적고, 미국의 폭격 때문에 망가진 것이 더 많을 수도 있는데, 이승만과 박정희 정부로 이어지는 이땅의 통치엘리트들이 6.25이후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됐고 이를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국민의 뇌리 속에 박아 놓았습니다.

      헌데 저들이 주장하는 압축성장이라는 것도 당시의 유럽도 똑같이 이룩한 것이었고, 그들은 부의 재분배를 통해 민주주의를 확고히 했지만 우리는 일제시대부터 이어져온 지배세력이 부를 독점했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고, 극도의 불평등이 만연하게 됐고 돈이 되는 것은 무슨 짓이라도 하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4대개혁입법이 왜 그렇게 중요했는지 국민들이 깨달아야 하는데, 조중동을 필두로 한 언론과 문창극 같은 식민지근대화론를 주장하는 자들 때문에 이것도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정말 엿 같은 나라가 된 것이지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도 특별법 하나 만들지 못하고, 국정원의 불법이 밝혀졌는데도 재선거가 치러지지 않는 것도 다 저들 때문입니다.

      여기에 기업의 힘이 너무 커져버렸고요, 신자유주의 20년 동안.
      이것이 대강의 과정입니다.
      도움이 되셨는지 모르겠네요?


  2. 뉴론7 2014.08.11 05:19 신고

    한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이네염 좋은하루되세염



21세기 최고의 석학으로 인정받고 있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를 보면 현재의 상황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불확실성이 극에 다른 시대인지를 알 수 있다. 바우만이 말하는 불확실성의 시대는 갤브레이스의 《불확실성의 시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갤브레이스는 주로 주류 경제학의 입장에서 시대의 혼란을 얘기했다면, 바우만은 종합적 차원에서 시대의 혼란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홀로코스트와 현대성》에서 18~19세기의 근대이성이 창출한 전체주의적이고 폭력적인 현대성의 문제를 성찰한 바우만은 《액체근대》와  《유동하는 공포》를 통해 인류의 현대성이 어떤 상태에 이르렀는지 뛰어난 성찰을 보여줬다. 특히 바우만의 상징으로 자리한 《액체근대》는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와 함께 현대를 종합적인 차원에서 파헤친 탁월한 성찰들로 가득하다. 현장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이런 수준의 성찰에는 절대 이르지 못한다.  



바우만이 현대의 특징으로 액체를 선택했는데 이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격언, "모든 견고한 것들이 녹아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에서 차용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견고한 체제를 구축하며 무섭게 질주하지만, 노동생산성이 발달할수록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 때문에 견고한 체제가 내부로부터 녹아 무너지며, 최후에는 기체처럼 자본주의의 체제를 이루는 모든 요소들이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고 주장했다. 



바우만은 이런 마르크스의 주장 중에서 모순과 오류가 있는 부분들은 제거한 채 자본주의라는 견고한 체제가 녹아내려 물처럼 유동하는 상태로 바뀐다고 주장했다. 부정적 세계화가 구축한 전 지구적 시장이란 첨단산업으로부터 1차산업과 소작농 및 물물교환까지 거의 모든 경제 형태가 하나의 액체 덩어리처럼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견고한 체제가 아닌 유동하는 특징이 있는 불확실한 체제의 형태로서. 



오늘날의 상황은 선택하고 행동할 개인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혐의를 (옳게 혹은 그릇되게) 받고 있는 족쇄와 사슬이 근본적으로 녹아버린 데서 발생했다. 질서의 경색은 인간 주체의 자유가 만든 인공물이자 침전물이다. 이 경색은 '브레이크를 푼' 전반적 결과이며 규제 철폐, 자유화, '유연화', 증가된 유동성, 재정·부동산·노동시장을 풀고 조세 의무를 덜어준 결과이다. 



결국 바우만의 성찰도 미국식 신자유주의(무정부적 자유주의) 40년이 장구한 세월 동안 구축돼 왔던 긴밀히 얽혀 있고 상호 이해관계로 단단히 묶여 있던 관계들이 모두 다 무너져버린 데서 출발한다. 공간적 거리를 속도로 극복해버린 전기·전자·정보통신 기술, 제품의 소형화에 성공한 무게 없는 제조업, 거대한 선박을 대체하기 시작한 비행기와 고속열차, 자동차 등의 등장으로 견고하게 자리 잡았던 체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 것이다. 



중후장대한 제조업 중심의 무거운 경제 시대에는 자본과 노동이 서로 대립하고 싸우고 격렬하게 충돌하기도 했지만, 자본은 노동이 필요했고, 노동은 자본이 필요했다. 이들은 하나의 틀 안에서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거대한 공장을 중심으로 '역사와 자본, 경영과 노동이 전부 연결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좋던 싫던 무한한 진보와 경제성장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처럼 결속되어 있어야 했다. 


                                                             사물인터넷의 세계



하지만 혁신과 향상, 진보를 뜻하는 것이 '더 작고, 더 가볍고, 더 쉽게 이동 가능한 것들'을 뜻하게 됨에 따라 자본은 더 이상 노동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졌다.  경박단소한 가벼운 경제가 도래함으로써 20세기까지의 근대성이 현대성으로 변환된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의 자본은 여행가방에 서류케이스, 휴대폰, 노트북, USB, 현지 법인만 있으면 국가의 경계를 넘어 어디로든 가볍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어디를 가든 잠시 머물 수 있고, 필요가 생기면 언제든지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다.



그것은 강제적이고 강박적이고 지속적이고 멈출 수 없는, 영원히 미완에 그치는 '근대화'이다. 창조적 파괴(혹은 이 경우에는 파괴적 창조이기도 한)를 향한, 저항하거나 근절하거나 가라앉힐 수 없는 갈증이다. '새롭고 향상된' 계획이라는 이름 아래 '개간'하는 근대성, '해체' '제거' '단계적 폐지' '합병' 혹은 '대규모 감원'의 근대성, 이 모든 것은 미래에도 똑같은 일, 즉 생산성과 경쟁력을 제고하는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여력을 확대하기 위한 힘이다.



이런 현대성의 목표는 근대성의 목표와 다르지는 않다. 단지 목표를 이루는데 있어 그 방법론과 존재론이 달라진 것이다. 방법론은 가벼운 경제의 본성인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이다. 존재론은 견고한 체제에서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다 끊임없이 유동하면서도, 어떤 견고한 것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는 액체의 특성을 지닌 체제로 변함에 따라 새롭게 등장한 우리의 존재 방식과 근대적 형식의 변환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노동의 분업화로 대규모 생산이 가능하도록 만든 포디즘과 세계화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던 포스트포디즘의 세계적인 생산체제 분업화가 만들어낸 중후장대한 제조업 중심의 무거운 경제가 막을 내리고, 반도체와 스마트폰, 인터넷과 SNS처럼 경박단소한 가벼운 경제가 도래했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파편화된 대중이라는 고전적 의미를 넘어 소비하는 시민으로서 도무지 만족하지 못하는 신자유주의적 개인으로 변질됐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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