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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홍준표와 오세훈이 의무급식 반대하는 진짜 이유



오세훈은 충북대 강연에서 “복지의 본질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노하우를 가르쳐주는 것”이라며 “우리의 재정 형편으로 부자 급식을 하는 건 정치이지 복지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서울시장에서 물러난 뒤 4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의무급식을 바라보는 그의 편향성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보편적 복지를 반대하는 오세훈의 논리는 단순함을 넘어 폭력적이기까지 합니다. 오세훈이 말한 ‘노하우’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정도면 국가와 복지의 본질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을 넘어 사실왜곡에 해당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발언입니다.



현대성은 개개인이 처한 다양한 삶의 조건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습니다. 쉽게 말해서 돈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 현대에서의 인간의 조건입니다.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자신이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들을 돌파하기에는 현실의 장벽이 너무 높습니다.



초중고를 넘어 대학과 대학원을 나와도, 심지어는 박사학위를 딴 사람들도 현실의 장벽을 뛰어넘을 만큼의 노하우를 쌓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교육제도가 그런 개인을 만들어내지도 못하는 것을 넘어, 신자유주의적 체제가 개인으로 하여금 삶의 문제들을 돌파해나갈 기회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더 엄격하게 말하면 개인이 신분상승의 사다리에 올라탈 수 있을 정도의 노하우를 쌓도록 나두지도 기다려주지도 않습니다.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을 부추기는 현대사회란 개인(과 가족)으로 하여금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충분한 기회와 수단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의 재정’ 운운하는 것도 사실왜곡의 전형입니다. 국가의 재정이란 어떤 조세제도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오세훈의 주장은 부자와 재계에게 유리한 현재의 조세제도를 손볼 수 없거나, 손대지 않겠다는 전제 하에서만 성립할 수 있습니다.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인정하고 들어갈 때만이 오세훈의 주장은 타당성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이해가 충돌하는 다양한 종류의 갈등을 조정해서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하는 정치의 필요성은 사라져버립니다.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이 갈등의 해결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공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부의 불평등이 심화된 현실을 그대로 두자는 것이 오세훈의 주장입니다. 이처럼 선별적 복지를 주장하는 자들의 논리에는 한 가지 숨어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명확한 기준이 없어 정하기 나름이다)에게 선별적 복지혜택을 주는 대신 무한대의 부를 가질 수 있는 부자도 동시에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극소수에게만 가능한, 그래서 절대다수를 가난하게 만드는 무한대의 부를 인정하는 것이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노하우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가난은 교육을 받았음에도 노하우를 깨우치지 못한 개인(과 가족)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의무교육과 선별적 복지를 제공했음에도 개인이 각자의 삶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노하우를 깨우치지 못했기에 가난은 큰 재산을 모은 부자과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는 제도의 책임이 아니라 개인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주어지는 복지는 선별적이어서 혜택이 되지 권리가 되지 못합니다.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삶의 노하우를 깨우쳐서 부를 쌓은 것이기에, 국가의 복지와 사회의 공적 부조를 받는 것은 성공한 자들에 비해 국가와 사회의 혜택을 받는 것이라 굴종적 인식에 사로잡힙니다. 가난이 곧 창피함이 될 뿐, 국민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가 되지 못합니다.  



선별적 복지는 그래서 국가가 사회가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 됩니다. 퇴임시 83%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빈국이었던 브라질을 중진국 반열로 끌어올린 룰라 전 대통령이 '부자를 돕는 것은 투자라며, 왜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왜 비용이라고 하느냐며 불만을 표출한 것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나옵니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선별적 복지는 슈퍼리치와 초국적기업, 거대 금융자본을 위한 공개적인 면죄부입니다. 모든 부는 누군가의 빈곤을 전제로 하는데, 선별벅 복지는 수백만에서 수천만 명이 나눠가질 수 있는 거대한 부를 독점한 자들에게 세속적인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역할을 할 뿐, 부의 불평등을 줄이지 못합니다. 





선별적 복지는 또한 복지의 사각지대를 만들어냅니다. 이들의 숫자가 소위 부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숫자보다 많습니다. 극소수에 불과한 부자급식을 반대하다 송파모녀 같은 이들을 양산합니다. 복지의 사각지대는 맞춤형 복지로 커버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에 성공한 국가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들은 또한 학부모의 자산과 소득을 파악하기 위한 엄청난 행정비용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어떤 나라도 지하경제 규모가 20% 정도를 차지하는데, 그것을 일일이 파악해서 투명하게 만드는 행정비용(부당수급되는 비용도 행정비용이다)이면 보편적 복지의 최소한인 의무급식을 중단할 이유조차 사라집니다.





오세훈과 홍준표 같은 자들은 가난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무한대의 부를 허용하기 위해 선별적 복지를 주장할 뿐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성공한 자들이 가지는 편협하고 반인류적인 현실인식은 자신의 경험을 전체에 투사시켜 모든 사람을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지옥으로 밀어 넣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너무나 많은 돈을 가진 슈퍼리치와 초국적기업과 재벌의 오너와 경영진, 거대 금융자본에게 지금보다 더 탐욕적인 부의 사냥에 나설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줍니다. 개천에서는 용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려면 개천을 용이 나올 수 있는 수준까지 만들어줘야 하는 것이지, 용이 살지 않은 개천에서 용이 나오라는 것은 대국민사기극입니다.



바로 여기에 총체적 차별을 당연시하는 능력주의와 시장경제를 위한 최소한의 통치라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의 무서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도 놓쳤고 케인즈도 놓쳤던, 그러나 허버트 스펜서는 꿰뚫었던 정치의 역할이 최소로 축소되는 신자유주의 우파의 이데올로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2부 개인은 어떻게 제도의 노예로 전락하는가?로 이어집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