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심화되고 있는 불평등의 일차적 피해자는 민주주의가 될 것이다. 자유시장 경제학을 정당화하는 기본적인 도덕적 주장 가은데 하나, 즉 개인의 이윤 추구가 동시에 공익을 위한 최선의 메커니즘을 제공한다는 주장은 의혹에 싸였고 사실상 거짓으로 밝혀졌다. 


                                          ㅡ 지그문트 바우만의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에서 인용  




미셀 푸코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과 지그문트 바우만의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는 현대성의 정체를 정확히 짚어냈습니다. 그들이 밝힌 현대성이란 특별한 정형이 없지만, 시장경제를 극대화하기 위해 최소의 통치로 최대의 경쟁을 이루어내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을 말합니다.





독일의 프라이부르크학파가 정립한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은 국가가 시장경제(수출 포함)를 극대화하기 위해 국가의 모든 부분을 시장 중심으로 재구축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부는 국가 주도의 독점경제(히틀러의 우파 전체주의와 스탈린의 좌파 전체주의)를 막기 위해 시장참여자 사이의 완전경쟁을 극대화하도록 법과 제도, 환경을 만드는데 집중하면 됩니다.



간단히 말하면 정부가 할 일이란 시장경제가 가장 잘 돌아가도록 국가와 사회, 기업과 개인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시장경쟁을 방해하는 것은 공권력을 동원해 제거하는 것입니다. 국가 전체를 시장경제에 가장 적합한 조직으로 만들면서도, 국민에게 기본적인 삶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 된 것입니다. 



관방학(내치학)과 국가이성 및 17~18세기의 정치경제학(고전파 경제학)이 적절한 조합을 이루면서 탄생한 독일의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이 질서자유주의나 사회적 시장경제라 명명되는 것도 '최대의 경쟁을 위해, 최소의 개입을'이라는 구호가 국가의 부흥과 국민의 삶을 동시에 높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독일의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은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을 거치면서 영미식 신자유주의로 바뀌닙니다. 이때부터 국민의 안전과 소득, 복지를 제공해야 할 국가의 역할이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이 가능한 자유시장 자본주의에 따라 모든 것이 정열된 경제국가를 만드는 것으로 축소됩니다. 



공짜 점심이 없다는 것과 더 이상 사회의 도움은 없다는 것이 일반화되면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책임지고 도와주던 보편적 복지는 사라지고, 소비자로 파편화된 국민은 시장경제에 종속된 채 끊임없는 경쟁과 퇴출을 반복해야 합니다. 성공과 실패는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지는 것이 일반화됐습니다. 





정부의 복지는 시장경제에서 탈락한 개인을 최단 시간 내에 시장경제에 재진입시키기 위한 재교육을 제공하고, 완전한 패자는 최소한의 삶만 보장해줍니다. 과학과 기술공학의 발달로 전 지구적 시장이 등장함에 따라 영토 내에서의 배타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정부의 역할은 더욱 축소됐습니다.



기술공학과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자동화를 촉진시켰고, 이에 따라 자본과 초국적기업은 노동과 국경에 구애받지 않는 전 지구적 차원의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각국 정부는 국민 전체에게 기본적인 소득과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그 결과 부의 불평등이 계속해서 커졌고, 정부는 보편적 복지에 들어가던 비용을 시장경제의 극대화를 위해 사용했습니다. 정부는 또한 완전경쟁을 방해하는 것들을 규제 완화, 구조조정, 노동유연화, 관세 철폐, 초저금리, 보조금 지급금지, 노조의 해체, 조세 개혁 등과 같은 방식으로 무력화시켰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성공과 실패가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졌고, 보편적 복지는 선별적 복지를 축소됐습니다. 생존을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시장경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자신의 역량을 높이는 것뿐입니다. 국민의 안전과 복지를 제공해야 할 국가의 업무도 민간으로 넘어갔습니다.



이것이 지난 40년 동안 신자유주의적 통치술과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만들어낸 세상입니다. 부의 불평등은 기회의 불평등을 양산했고, 완전경쟁이 불평등경쟁으로 바뀌었고, 저축이 소비(빚을 내서라도)로 대체됐고, 부와 빈곤이 대물림되는 세습자본주의가 등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정부의 재정보다 훨씬 많은 부를 축적한 자본과 초국적기업의 압도적인 힘은 시장경제에 반하는 민주주의의 요소들(조세정의에 의한 부의 재분배, 신분이동의 가능성 제고, 공정한 경쟁과 기회 제공 등)을 제한했고, 그 결과 과두정치에 가까운 최소의 민주주의가 보편화됐습니다.





마침내 새로운 형태의 차별주의가 등장했습니다. 완전경쟁의 시장경제에 편입되는 것과 퇴출되는 것으로 1차 차별이 작동하고, 소득 능력에 따라 2차 차별이 작동하고, 소비 물량에 따라 3차 차별이 작동하고, 가족 전체의 소비 여력에 따라 4차 차별이 이루어집니다.



자유가 지나칠 정도로 많이 주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시장경제 의존성이 높은 제한된 자유여서, 국가와 사회가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정치적으로 확장된) 자유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시장경제에 참여해야 하는 제한된 자율성에 불과합니다.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란 소비할 수 있는 자유, 즉 돈이 있어야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변질됐습니다.



이로써 생존선 이하의 삶의 자율성만 지닌ㅡ다시 말해 가난이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지는 잉여들이 양산됐고, 그들 중 일부는 시장경제에 아무 쓸모없는 쓰레기로 전락하거나, 시장경제에 위험한 군으로 분류되고 배제된 상태(도시의 게토, 난민수용소, 열악한 복지시설, 슬럼가 등)에서 총체적 감시를 받는 존재로 버려집니다.





선별적 복지란 이런 이유들로 해서 시장경제 탈락자에게 주어지는, 그래서 생존을 위한 소비 외에는 단 한 푼도 저축할 수 없는 최소한의 복지를 말합니다. 국가업무의 민영화와 함께, 국가의 역할을 실현하기 위한 정부의 재정이 시장경제를 먹여 살리는 최후의 먹거리가 됐습니다.



석유(만능의 제품인 플라스틱)를 대체할 수 있는 먹거리가 나올 때까지 국가의 역할은 갈수록 축소될 것이며, 국민의 안전과 건강은 보장할 수 없는 것이 됐습니다. 복지와 공적 부조가 줄어들거나 최소화됨에 따라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소득도 보장돼지 않습니다.



홍준표가 강행한 의무급식 중단과 오세훈 등이 주장하는 선별적 복지는 이런 과정을 통해 강화됐고, 최소한의 복지라도 받기 위해 저소득층은 보수정당을 지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제도화된 가난이 양산됐고, 소득원을 찾을 수 없는 개인들이 하루살이처럼 살아야 하는 신자유주의적 노예로 전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의 무서움은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이 가능한 시장경제 자본주의국가를 만들어놓으면 개개인이 정부를 비판하고 정치인과 특권층을 비난해도 최소의 통치만으로 기득권의 이익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는 엄청날 정도로 자유가 늘어난 것처럼 착각하기 쉽지만 소비로 유혹되고 감시받는 자유(시장 의존적 자율성)일 뿐입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벌어진 일련의 과정들에서 볼 수 있듯, 부분적인 교정 외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국가는 국민의 목숨을 지키려 하는 것이 아니라, 유능한 소비자를 키우려는 것입니다. 생산은 자동화되고 외국의 저임금 노동자에게 얼마든지 아웃소싱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에 가격이 매겨져 있어, 돈이 없으면 생필품도 기본적인 서비스(특히 의료와 보건)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넘치도록 많은 자유를 누리는 것 같지만 지독할 정도로 시장 의존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기 이전에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이 구축한 체제의 노예부터 되는 것입니다(왜 가난한 사람들은 보수정당을 찍을까-1)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ppp 2015.06.11 11:37

    좋은글입니다 항상 감탄하고 읽고있습니다 퍼갑니다.


스퀼러가 워낙 설득력 있게 말하는데다가 그와 함께 있던 세 마리의 개들이 위협하듯 으르렁거렸기 때문에 더 이상 질문도 하지 못하고 스퀼러의 설명을 받아들였다.

 

                                                                                                                    ㅡ 조지 오웰의 『 동물농장 』 중에서




얼마 전부터 연재를 시작한 '대한민국 현대사'에서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의 우려스러운 현상들과 첨예한 갈등, 진실의 왜곡 및 호도, 사이비 지식인들의 오류투성이의 글, 방송의 지독한 편향성과 선정성, 정치인의 타락과 부패를 고발하기 위해 시작했다. 이런 아노미적 현상들을 필자의 사고와 성찰을 거친 다양한 단상과 글들을 통해 자세히 다룰 생각이다. 


                                                    




또한 필자는 지그문트 바우만에 이르러 명료해진 ‘액체대’ 또는 ‘최초의 현대(성)’이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연재에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다양하면서도 파괴적이고, 극단적인 현상들을 분석하고,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필자의 능력이 되는 한) 다양한 분야의 대가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깨어 있는 지식인들의 앞선 성찰을 인용하려고 한다. 



인용되는 분야의 넓음이 사유의 단단함을 흔들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사유의 단단함이 독자의 상상을 방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여백을 남겨둘 생각이다. T. E. 로렌스는 《지혜의 일곱기둥》에서 “길을 가던 순례자들은 이곳에 돌탑을 세웠다......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 탑 위에 돌 하나를 더 얹어놓곤 했다. 어떤 특별한 이유나 알려진 동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남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고 그 중 누군가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필자의 노력도 그것과 다르지 않다. 



이번 연재에 나오는 여러 가지 단상들은 현재의 대한민국을 살펴보는 정신의 지도가 될 것이지만, 측정의 미숙함 때문에 때로는 중간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다. 필자의 무능력과 앞의 이유들로 해서 곳곳에 허술한 논리와 비약이 존재하고 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다만 필자는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보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더 멀리 보려고 했을 따름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바로 내일을 향해서 부산하다면, 나는 양양한 미래를 향해서 생각을 돌렸던 것”이라는 자세를 견지하고자 했다. 





                                                                     


각종 위험들의 매일같이 터져 나오고, 극도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사회에서 이런 노력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확실하지 않지만, 최소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되,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고약한 의도들을 파헤쳐 날것의 형태로 전하려면 이런 자세를 견지할 수밖에 없었음을 밝힌다. 지식인으로서 비판정신을 유지하려면, 이런 자세를 견지함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 생각한다.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를 추측해서 현재의 세상에 의미 있는 무엇을 제시하려면 영혼의 얼음집에 담겨 있는 차가운 비판정신을 유지해야 한다. 




수백 년에 걸친 근대를 70년 정도의 파시즘적 속도로 치러낸 대한민국의 상황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상황이 심각하다. 근대가 남긴 모든 성과와 잔재와 폐기물이 분명하고도 파국적인 위험으로 변화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21세기는 ‘유동하는 공포’가 극에 달한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타인이 지옥’이라는 샤르트르의 말은 가족의 붕괴와 삼포세대의 등장, 이혼율의 꾸준한 상승, 자살률과 노인빈곤률 1위, 공교육 붕괴와 청소년들의 행복도 급락, 민주주의의 후퇴 등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도 바우만의 성찰은 시급을 다투는 일이 됐다. 필자가 연재를 시작한 이유도 여기서 출발한다. 





바우만은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에서 “현대(성)의 본질과 그것의 역사적 경향, 문명화 과정의 논리, 사회적 삶의 점진적 합리화의 전망과 그것에 대한 장애 등은 종종 마치 홀로코스트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논의”되는 기억 삭제의 경향이 있다고 했는데, 이런 현상이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현대(성)의 부정적 아이콘이었던 이명박이 대통령에 오르고, 그것도 모자라 MB정부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박근혜 정부의 탄생은 민주주의의 기초인 선거마저 국가기관들에 의해 유린됐으며, 이것에 대한 실체적 진실과 그에 따르는 단죄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마치 국정원을 중심으로 한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만들려는 현 집권세력과 정부기관 및 방송들이 일치단결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실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민주화 이전으로 후퇴했다고 말해도 모자람이 없다. 이밖에도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증거들은 넘쳐날 지경으로 널려 있다. 다수가 합의(선택)하면 그것이 그 사회의 도덕규범이 되는 상황은 민주주의를 파괴시킨다. 





다수결원칙은 민주주의의 원칙 중 하나이지 전부가 아니다. 합법화된 물리력이 국가(정부)에 집중된 현대국가의 경우, 정치가 거대관료제를 독점하는 것도 모자라 자본권력 및 방송과 손을 잡으면, 그리고 그 결합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대항권력이 없다면 정치적 자유가 견인하는 민주주의의 다원성과 사회경제적 평등이 견인하는 소통과 합의의 규칙은 말살된다. 여기에 대항권력의 현실적 결과를 도출하는 선거마저 국가기관에 의해 왜곡된다면 민주주의는 녹아서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



이 때문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으면 하는, 유시민이 『후불제 민주주의』에서 비통하게 말한 "민주주의를 제대로 누리려면 국민이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잘 알고 그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하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국민들과의 헌법이 규정한 기본권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지금의 경제적·정치적 위기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제대로 성찰하기만 한다면 앞으로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힘을 얻고 있다. 이는 명백한 퇴행이지만, 북한과의 준 전쟁 상태를 유지하는 한 영원히 지속될 한국적 민주주의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일본의 극우적 준동은 또 어떠한가?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몰락의 사이에서 다시금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격랑에 빠져들 수 있는 한반도의 상황은 또 어떠한가? 여전히 한국의 지배엘리트에 남아 있는 악질 친일 부역자들의 후손들은 또 어떠한가? 압축성장과 경제성장을 빌미로 부와 권력을 독식하고 후대에 세습하는 사적독점의 세력들은 또 어떠한가? 



필자는 이 모두를 조금씩이라도 다루려 한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통해 일방적 주장이 된다 해도, 현재의 혼란과 갈등을 조장하는 것들을 하나씩 밝혀 퇴출시키고자 노력할 것이다. 바로 이런 목표 때문에 인류 문명에 대한 비판서인 '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를 동시에 연재하고 있으며, 두 개의 연제를 교차해서 보면 현재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조금이라도 늘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는 과신도 아니며, 내 지적 풍요로움의 자랑도 아니다. 나는 아직 너무나 많이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그것 뿐이다. 그래서 이런 무모한 짓을 할 수 있는 것이며, 글을 쓰면서도 다시 고쳐쓸 것을 각오한 상태에서 부족한 공부를 병행하고 있다. 이 모든 나의 노력은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 이상의 것은 없다.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인간이 무엇보다 앞선 것임을 보여주려 한다. 






굴곡지고 파란만장했던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제합병 시기를 견뎌냈고, 6.25전쟁을 경험하고 참전하신 내 부모님의 기억들을 옮기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나의 작업은 살아 있을 시간이 별로 많지 않은 어머님의 생존 시에 철저히 실패한 자식이 그 동안의 불효에 대해 조금이라도 만회할 수 있는 유일한 도리이기도 하다. 또한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죽어갈 모든 이들과, 현재의 욕망보다 우선하는 미래세대에게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전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올해 말까지 계속될 이 연재들은 출판의 형태를 취할 테지만, 그 이전에 많은 분들과 거친 초고의 형태로라도 만남을 가질 것이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 했으니 조금이라도 많은 분들이 나의 지적 여정에 함께 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1. 태봉 2014.08.23 12:24

    제가 아는 게 없지만 님의 지적 여행에 살포시 한 숟가락 얹져봅니다 화이팅이요!!!^^

  2. 머루 2014.08.24 15:41

    도령님의 방대한 지식의 힘에 늘 반갑고... 제 지식의 힘이 갑자기 배로 커지는 느낍입니다
    제 일의 시간관계상 늘, 항상 읽을수없지만, 시간이 나는데로 아껴서 아껴서 읽고있습니다
    건강관리 잘하시여 오랫동안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 늙은도령 2014.08.24 20:23 신고

      네, 열심히 공부하고 사고하고 글로 옮기고 있습니다.
      모두 다 여러분의 관심 덕분입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저를 움직이게 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3. 숲속의친구 2014.08.24 17:04 신고

    늘 감사히 글을 읽고 있지만, 그러한 고도의 집중이 행여라도 도령님의 건강에 이상신호를 보내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4.08.24 20:24 신고

      건강을 잘 관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늘 그것이 문제인지라 최대한 조심하고 있습니다.
      건강해야 오랫동안 글을 쓸 수 있을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4. 가난한여행자 2015.04.12 21:54 신고

    아~~ 대단한 저술을 시도하시는 군요.


    저는 한국현대사를 이념이 아닌 ....개인우상화 , 개인과 특혜집단의 욕망충족을 위한 시공간이라고 생각 됩니다

    북한은 유물론 신봉하는 공산국가에서 3대세습을하고, 한국도 모든것이 기득권이 세습되고.(교회도세습..이해불가)

    한국,북한도 이념이 아닌 , 개인 .집단이 욕망 분출, 취득하고 세습하는 연장선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역사적으로 후진적 사회 전형입니다

    저는 현재 한국을 '''' 중세봉건적 사고를 가진 공업화된 나라''' 라고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는척해서....



    아무튼 개인이 하기 힘든 작업을 하시는것에 저자신이 부끄럽네요

    부디 건강챙기시고 ,,,좋은글 쓰기를 바람니다
    ''''''

    • 늙은도령 2015.04.12 22:05 신고

      아닙니다, 저는 다만 운이 좋아 많은 책을 읽었고 조금 더 전문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었을 뿐입니다.
      한 분야에 걸치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이 이런 무모한 시도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님의 지적이 상당 부분 대한민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적 풍요함과 편리함이라는 욕망의 노예가 됐습니다.
      인간의 가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잇습니다.

    • 길냥이 2015.10.04 01:11

      조선이 공산주의체제라는건 분명한 거짓말입니다.
      예전에 어느책에서 읽은 기억에 의하면 조선이 개한미gook 보다 잘나가던 시절의 언급입니다.
      식량을 어느정도 자급하던 시절의 조선관리가 이야기한 것입니다.식량부문에 한에 어느정도 공산주의에 접근했다는 이야기를 했답니다.
      식량부문에 한해서 말입니다.다른부문은 공산주의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공산주의국가는 아직 출현한적이 없읍니다.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체제의 국가라는 존재들이 적대적인 국가를 공산주의국가로 단정을 하고 일방적으로 주장을 했을뿐이고 그게 널리 퍼진 현상이라는 것이지요.

    • 길냥이 2015.10.04 01:30

      아참 공산주의는 민주주의의 반대개념이아닙니다.
      개한미ook 에서는 조선을 적대하다보니 조선을 공산주의국가로 취급하다보니 개한미gook 이 마치 민주주의국가인양 착각을 하거든요,
      조선이 공산주의국가가 아니듯이 개한미gook 또한 민주주의국가가 아니란 것이 보다 더 적절한 표현일듯합니다.
      권력에 세습은 없읍니다.

  5. 길냥이 2015.10.04 01:07

    민주주의를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것 같습니다.
    사실 개한미gook 인들의 절대다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는 아주 애매한 개념입니다.
    글중에 다수결의 원칙이 민주주의의 원칙이라고 하셨는데 그건 분명한 거짓입니다.
    하긴 개한미gook 인 다수가 그런 개념을 받아들이곤 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다수결의 원칙일 뿐이지 민주주의와는 전혀 관계없는 원칙입니다.
    책을 한권 권해도 될런지 모르겠읍니다만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비밀> 이란 책을 권하고 싶군요.
    민주주의를 경멸하고 전체주의내지 귀족정 비슷한 체제를 염원하던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다룬 소크라테스 비평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6. Shine 2018.06.27 01:39

    "이 모든 나의 노력은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 이상의 것은 없다.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인간이 무엇보다 앞선 것임을 보여주려 한다."

    응원합니다. 건강과 평화를 빕니다.


자신들과 그들의 정신을 권위와 편견의 감독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의 소망이다. 그들은, 오랜 전통이든 새로운 전통이든, 자유와 인간다움과 합리적 비판의 기준에 맞는 전통은 보존하고 발전시키고 확립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단지 확립된 것이거나 그저 전통적이기만 한 절대적 권위는 거부하는 열린사회를 건설하고자 한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 앉아서, 통치의 책임을 인간적 권위나 초인간적인 권위에 전적으로 지워버리려고 하지는 않으며,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없애기 위해 일할 각오가 되어 있다.  



위의 인용문은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Ⅰ》의 서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위대한 과학자이자 철학자였으며, 불 같은 성격의 교수였으며, 인간에 대한 애정이 넘처나는 휴머니스트였던 그는 최근에 들어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진정한 자유주의자였다. 그의 대표작인 《열린사회와 그 적들Ⅰ》은 초기 기독교의 원형을 제공했으며, 좌우의 전체주의의 기원이 된 플라톤에 대한 비판서이다. 





19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지성사는 플라톤에 대한 해석이라고 말할 정도로 플라톤이 서구 문명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고대 그리스 철학의 최고봉을 이루지만, 그들이 미친 영향의 거대함은 19세기 중반까지 서구 유럽의 정부와 문명을 소수의 엘리트(귀족이나 선민의식의 형태로 나타난다) 수중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교육과 종교가 이들의 수중에 있었으며, 이는 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유지됐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모든 것의 기원, 즉 순수 그 자체이자 완전한 상태인 절대적 존재 혹은 형상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철학자가 완벽한 고독의 상태에서 깊은 성찰에 들었을 때 불연듯 보게 된 신의 모습이자 깨달음의 정화가 이데아(형상 이론이 여기서 나온다)다.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사막에 들었던 고행의 순례자가 죽음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러, 몽롱한 가운데 환영이나 환청처럼 보거나 들은 것이 신이 섭리나 우주의 법칙이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그것은 일종의 체험이자 유일무이한 경험이어서 철학자는 완벽한 순수체인 이데아란 존재를 느낄 수 있거나 볼 수 있지만, 말이나 글로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데아의 경이로움을 경험한 철학자는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 철학자는 이런 성찰에 이르지 못한 일반인들에게 이데아의 경이를 체험할 수 있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완전한 상태인 이데아의 세계를 체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이데아와 최대한 비슷한 사회(이데아의 세계, 천국에 있는 국가)로 인도할 수 있다. 이데아란 어떤 티끌도 없는 순수하고 완벽한 상태(형상)이기 때문에 이데아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타락하거나 부패하거나 악에 가까워진다. 





즉 이데아의 세계에서 멀어지는 '모든 사회적 변화는 타락이나 부패 또는 퇴화'라는 몰락이 법칙이 플라톤이 정립한 이데아론의 핵심이다. 플라톤이 《법률》에서 '악한 것의 변화를 제외하고는 모든 변화는 악하다'라고 한 것에서 이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이데아로부터 멀어지는 변화인, 모든 부패와 몰락이 도덕의 타락에서 나타나고, 최종적으로는 인종의 퇴화와 국가의 몰락으로 이어진다고 봤다. 



심지어 플라톤은 "변하지 않는 완전한 국가에 신념을 '모든 사물'의 영역까지 확대"해서 "일상적인 사물이나 부패하는 사물의 모든 종류에도 그에 대응하는 부패하지 않는 완전한 것이 있다"는 형상 이론이나 이데아 이론을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우주적 차원에서 인간사를 거쳐 사물의 차원까지 적용되는 거대한 몰락과 부패의 법칙이 완성됐고, 그의 사상과 정치철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존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일반적인 부패의 우주적 법칙이 인간사에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해 사회의 타락과 부패를 막고 악의 번성을 저지하기 위해 이데아의 경이로움을 체험한 철학자는 동굴에서 나와 사회(당시에는 도시국가, 즉 폴리스를 말함)를 구원해야 한다포퍼의 주장처럼, "플라톤은 역사적 운명의 법칙, 부패의 법칙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지탱되는 인간의 도덕적 의지로 붕괴될 수 있다고 믿었다."





플라톤은 《정치가》에서 "일반적인 부패의 법칙이 정치적 부패를 몰고 오는 도덕적 부패로 나타나는 것과 똑같이" 이데아를 체험한 위대한 법률가(철인왕)의 "이성의 힘과 도덕적 의지로 이 정치적 부패의 시대를 종결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변화가 없는 이데아의 세계를 이 땅에 실현하면 '악이 없는 최선의 국가이자 완전한 국가, 즉 황금시기의 국가이자 철인왕에 의해 일체의 변화가 '억제된 국가'인 천년왕국이 건설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철학자의 의무이자 책임이며, 특히 사회의 변화를 주도하는 정치를 통해 이를 이룩해야 한다. 이런 플라톤의 정치철학ㅡ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과 《정치의 약속》에서 발전적 변화를 추동해 후대에게 넘겨주는 정치의 역할과, 불평등하게 태어났지만 평등을 향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의지인 정치적 자유와, 어떤 척박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을 억제한 플라톤 때문에 그에게서 시작된 정치철학이 그에 의해서 끝났다고 비판했다ㅡ은 철인왕(이데아를 경험한 철학자, 현자)에 의한 통치를 최고의 체제로 자리매김시켰다. 


철인왕ㅡ플라톤은《정치가》에서 철인왕을 자신이나 자신과 비슷한 수준에 이른 철학자라고 했고, 공자도 비슷한 말을 했다ㅡ에 의한 일체의 변화로부터 멀어진 '억제된 국가'가 최선이자 최상의 국가가 된다는 것은 일체의 자유와 발전적 변화가 원천차단된 닫힌사회이며, 하나의 지도원리가 사물의 세계(길거리에 널려 있는 돌 하나)까지 지배한다는 점에서 히틀러의 나치즘, 즉 전체주의의 기원으로 작용했다(이것이 나치의 전체주의가 어디서부터 기원했는지 추적한,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억제된 국가'는 위계서열이 분명한 계급사회를 이룬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나누어지기 때문에 우월한 종족이 열등한 종족을 지배하는 인종적 차별도 허용된다. 물론 플라톤이 말한 계급사회는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사회와는 다르다. 마르크스는 그 시대의 지배적 체제를 이루는 지배계급이 그 이하의 계급, 특히 노동계급을 무한 착취하지만, 플라톤은 지배계급의 착취에 제한을 둔다. 이는 '억제된 국가'의 안정과 이익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특권계급들의 착취를 제한하려는 이런 경향들조차도 전체주의에 상당히 공통되는 요소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전체주의는 단순히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닫힌사회, 즉 집단이나 부족의 도덕이며, 개인적인 이기주의가 아니라 집단적인 이기주의"라고 말한 칼 포퍼의 지적은 정확하다. 플라톤이 주장한 국가의 이익에 해가 되는 어떤 것도 선하지 않고, 도덕적이지 않으며,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는 주장도 집단적 이기주의에 불과하다.


이는 일종의 공생을 위한 공리주의(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생산에 방점이 찍힌 성장담론을 이룬다)이기도 하지만,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우리 조상의 홍익인간에 비하면 그 수준이나 방식이 저급하고 제한적이며 일방적이다. 플라톤이 주장한 선량하며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행위란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이익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특권계급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국가를 통치하는 최종 지배자인 단 한 사람의 이익으로 귀결되는 전체주의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이익은 모든 이들에게 공정하게 나눌 때 가장 크지만, 국가의 이익을 앞세우면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그리고 후대에 세습하고 있는 소수의 집단에게 가장 많이 돌아가며, 최고의 권력을 지닌 자가 가장 많이 취하는 것이 인류의 보편적인 경험이다.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이런 경험은 더욱 강화돼, 인류가 다른 생명체와 함께 공존이나 상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음을 말해주고 있다. 


결국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모든 행위의 기반인 개인의 기본적이고 평등하고 인도적인 자유도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이다. 양도불가능하기 때문에 침해불가능한 시민의 기본권이 제하받는 경우가 나타난다. 이런 과정이 중첩되고 강화되면 권위주의 독재가 등장하며, 플라톤의 주장대로 하면 '다른 시민을 해치지 않는 행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의 기본 목적이 성립될 수 없다. 


즉, 플라톤의 주장대로라면 "국가는 가능한 한 균등하게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되, 자유의 동등한 제한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것 이상은 넘어서"면 안 된다는 현대 민주주의의 원리가 무력화된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과도하게 제한받게 되면, 모든 권력이 시민에서 나오는 민주주의는 작동할 수 없다. 우파 전체주의는 늘 이런 과정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독일의 나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일본의 군국주의, 한국의 권위주의 독재 등이 모두 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회경제적 평등에서 출발하는 민주주의를 무력화시켰다(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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