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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유시민과 전원책의 썰전에 대한 몇 가지 단상



칼 마르크스와 함께 19세기의 정치경제학을 대표하는 존 스튜어트 밀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반드시 보수주의자는 아니지만, 보수주의자의 대부분은 어리석은 자들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단어의 순서만 바꿔도 문장의 뜻이 하늘과 땅 차이 만큼 벌어지는 것을 보여준 이 명언은 유시민과 전원책이 새로운 패널로 나온 어제의 썰전에 적용하면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청개구리적인 기질이란 면에서 유시민과 전원책은 교집합을 이루고 있지만, 청개구리적인 기질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지식과 논리의 정연함과 깊이는 전원책이 유시민을 따라올 방법이란 없습니다. 유시민의 상대로는 턱없이 모자라는 전원책은 첫방에서 확실한 눈도장을 찍기 위해 기본적인 진행도 이루어질 수 없을 만큼 일방적이어서, 밀이 말한 어리석은 보수주의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노통 이후로 유시민처럼 뛰어난 토론가가 없었다는 점에서, 보수주의자들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는 전원책은 존 스튜어트 밀의 명언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식의 토론이라면 새로운 패널을 내세운 썰전의 수준이 하향평준화되거나 토론의 기본적인 규칙마저도 무너뜨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많은 분들이 직접 확인하셨겠지만 적절한 비유와 정곡을 파고드는 논리를 보여준 유시민에 비하면 전원책의 말들은 예상한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보수주의자 중에서 토론으로 유시민과 맞장을 뜰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 이혜훈이나 박형준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것도 많이 양보한 것이어서 그렇지, 냉정하게 말하면 존 스튜어트 밀의 명언이 2016년의 대한민국에서도 100% 유효합니다. 전원책이 농담조로 유시민과 김구라를 좌파라는 색깔론으로 묶음으로써 자신의 지식과 논리 부족을 매꾸려했지만, 영원한 진실에 속하는 취중진담과 농담조로 흘리는 말과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합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J.S.밀이 "어리석은 사람들이 반드시 보수주의자는 아니지만, 보수주의자의 대부분은 어리석은 자들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전수전에 공중전까지 마스터한 유시민이야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가장 적절한 단어와 비유로 풀어내겠지만, 전원책의 좌파타령이 썰전의 수준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것을 막으려면 김구라의 노력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될 수 없을 만큼 요구됩니다. 



너무나 아쉽지만 현실정치에 복귀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유시민을 일주일에 한 번은 볼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듯합니다. 전원책에게 보다 많은 준비와 토론의 기본은 지켜주기를 바라며, 더 수준 높은 썰전을 기대해 봅니다. 동서양의 위대한 석학들이 공통적으로 말했듯, 정치의 시작은 말이고 토론도 이와 다르지 않음은 썰전을 시청하는 모든 분들이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방송된 썰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필자가 걱정했던 토론의 하향평준화였습니다. 오락성을 띠는 것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전원책은 준비도 논리도 첫회보다도 떨어졌습니다. 답답한 것은 천재와 바보를 묶어놓으면 바보가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라 천재가 바보의 수준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천재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썰전 2회에서 이것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1, 2회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3회부터는 전원책이 분발하기를 바라며 보다 재미있으면서도 치열한 토론이 오고갔으면 합니다. 바람이 있다면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에서도 제2, 제3의 유시민이 나오는 것입니다. 방대한 지식과 달변으로 갖춘 정치신인들이 나와, 치열한 토론을 벌어야 유시민을 넘어 노무현 대통령에 근접하는 폭발적인 정치인이 출현할 수 있습니다. 



그것까지 바라기에는 필자의 욕심이 지나친 모양입니다. 유시민을 보면 노통이 생각나고··· 제기랄, 늙으면 귀에서도 눈물이 나온다고 하는데 노통에 대한 그리움만 깊어지는 하루하루가 흘러가니 이것도 궁상맞은 상사병은 아닌지 창밖의 하늘만 올려다 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P.S. 범주화를 통해 일종의 낙인찍기의 효과를 발휘하는 전원책의 좌파타령을 이해하려면, 20세기의 위대한 사회철학자이자 미학자인 브르디외가 정치문화적 범주화와 차별화가 지니는 폭력성에 대해 자세히 다룬 《구별짓기》와 탁월한 경제학자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을 참조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소설로는 프로스트의 대작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추천할 수 있습니다.   



20~21세기의 위대한 석학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근대》와 《유동하는 공포》,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등의 저작들에서 상류층 엘리트들이 궁정문화에서 대중문화로 갈아타면서 이런 구분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했지만, 리영희 교수의 기념비적 대작인 《전환시대의 논리의 이전으로 퇴행한 대한민국의 수구보수에게는 적용될 수 없습니다, 오늘의 썰전이 혼란스러웠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