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는 끝내 위안부협상에서 아베와 나눈 대화내용을 공개하지 않은 채 위안부할머니와 엄동설한의 혹독한 환경에서 소녀상을 지키는 청춘들에게 협상 내용을 받아들일 것만 강요할 모양입니다. 국가공권력에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백남기씨는 무시로 일관하고, 노동개악을 밀어붙여 사측에게 무수불위의 권한을 주는 초법적 양대지침을 몰아붙일 모양입니다. 세월호참사의 유족들에 이르면 박근혜를 향하는 극도의 분노를 주체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온갖 폭정과 일방적 통치는 국민을 상대로 한 전쟁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박근혜는 대통령에 오른 이후, 나라를 팔아먹어도 자신을 지지하는 불멸의 35%를 믿고 국민을 찢어놓고, 서로 싸우게 만들고,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것을 넘어 유신독재의 부활과 일제의 식민지지배에 면죄부까지 발행했습니다. 매일같이 경제와 민생을 외치지만 한국경제를 이 지경으로 망쳐놓은 책임만 국회, 특히 야당에 전가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지금 민주주의와 헌법정신에 정확히 역행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무시하는 일들을 제멋대로 하고 있습니다. 국가를 극도의 혼란 속으로 몰고가 칼 슈미트가 말한 예외상태를 만들어 독재를 하겠다는 것인지 박근혜의 불통의 독선이 향하는 곳은 박정희 시대의 부활로만 여겨질 정도입니다. 박근혜의 탈선은 국민이 타고 있는 기차와 정면으로 부딪치려는 고속열차를 떠올립니다. 

 

 

박근혜가 대통령의 의무와 역할을 하기 위해 어느 수준까지 준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과정만 놓고 보면 전혀 준비가 되지 않는 대통령을 넘어 최악의 소녀 군주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대통령의 현실인식이 내치에서의 절대적 권리를 주장하는 군주나 중세시대의 왕의 모습이 오버랩되기 때문입니다. 국민은 동원의 대상이고 지시와 명령에 따라야 하는 노예로 보는 것이 박근혜의 통치에는 수없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현실인식에 따라 통치의 방법도 달라집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와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이 극좌의 전략과 전술로 무장해 주류 정치세력으로 떠올랐던 미국의 부시 정부도 박근혜 정부에 비하면 여러 단계 아래에 위치할 정도입니다. 이는 마치 미국유학파로 구성된 한국형 신보수주의 정권이 얼마나 많은 광기와 위선들을 내부에 숨기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만 같습니다. 

 

 

이런 힘의 우위에 대한 폭력적인 성향은 독재의 본질이자, 선거를 통해 집권에 성공한 히틀러가 극우 파시즘으로 변해가는 과정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히틀러는 독일을 멸망의 길로 인도한 자였고, 자국민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최고지도자였습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도 표면적으로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내세웠기 때문에 당시의 국민들이 속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60대 이상의 노인들 사이에서 여전히 유효한 인식의 근거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국무회의가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인 장관들의 받아쓰기 장소로 변질됐고, 미리 연습한 각본에 따르지 않으면 질문도 받지 않는 일방적 대국민담화는 선동정치의 전형입니다. 박정희는 긴급조치 1~9호를 이용해 독재를 했지만, 박근혜는 고정지지층을 기반으로 감성적이고, 그래서 선동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최악의 통치를 하고 있습니다. 통치이성이 사라진 곳에서는 국가공권력에 대한 집착과 사적 이용에 대한 유혹이 스멀스멀 피어오릅니다. 

 

 

지금은 대통령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국입니다. 전 세계적인 경제대공황이 점점 현실화되는 시점에서 대한민국은 백척간두에 서있는 풍전등화의 신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떨어지는 대상이 국민이 될 수 없으므로, 대통령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양보하는 것이 옳을 진데, 사회적 약자의 희생만 강요하는 모습이 참으로 잔인하기만 합니다. 



지도자가 그렇게 일방통행만 강행하면 어떤 국가던 내부로부터 심각한 균열이 발생하고, 이는 오직 폭력으로만 메울 수 있습니다. 찍어누르는 법치와 야만공권력을 앞세운 독재란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구체화되기 마련입니다.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민생을 들먹이며 경제 성장을 통해 지금보다 나은 풍요를 안겨주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는 성장에 대한 환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 무한한 진보를 약속한 헤겔의 변증법

 

일반인은 인식하기 힘들지만, 헤겔이 역사에 끼친 영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지금은 헤겔의 책들을 읽고, 그것에 대해 토론하는 일이 거의 없지만, 그가 남긴 변증법적 사고와 역사 개념은 성장과 개발의 시대를 관통하는 든든한 버팀목이었습니다. 기득권 권력(현재의 체제가 늘 '정'이기 때문에)에게 어마어마한 힘을 주는 변증법은, 역사를 발전으로 가는 필연으로, 개인에 대해 사회의 우위를 확고히 하는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헤겔의 영향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헤겔의 책들은 진정한 자유주의자, 칼 포퍼가 비판(포퍼 이외에도 헤겔을 비판한 석학들은 매우 많다)했듯이,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 이르러서는 형이상학적 언어유희로 슬쩍 넘어간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헤겔은 일정 부분 플라톤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베이컨과 데카르트, 뉴턴과 다윈의 발견들을 적절히 혼합했지만 계몽적 결론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에 기득권에 유리한 변증법을 남기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헤겔은 네 사람이 남긴 근대이성의 결과물을 버무려 그 유명한 '무한한 진보'가 가능한 변증법을 정립했습니다. 물론 변증법의 대가였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의해 헤겔의 변증법이 그만의 점유물도 아니고, 개인에 대한 사회의 우위를 확정하는 최종 단계에서 성찰의 치밀함과 끈질김이 변증법적 준거의 틀에서도 벗어났다고 신날하게 비판했습니다(필자도 상당 부분 동의합니다).

 

 

하지만 정반합으로 대표되는 헤겔의 변증법에 대해서는 그 위대한 성과에 대해 이의를 달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는 것이 헤겔의 핵심 주장입니다. 그것도 무한히 발전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정(正)에서 시작하는 역사(물론 반(反)도 동시에 존재한다. 유물론의 위대함은 여기에서 나온다)는 현재의 체제나 질서에 힘을 실어줍니다,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유물론적 논리를 전개한 끝에 탄생시킨 정상과학처럼.

 

 

그래서 언제나 보수(특히 기득권)에게 유리한 정에 반발해 동시에 존재하는 반이 이런저런 이의들이 제기하고, 저항과 투쟁이 일어납니다. 이런 과정에서 반체제적이고 현재의 질서를 인정하지 않아 폭력을 동반하는 혁명으로 이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반(反)이면서도 무한한 진보를 위한 중간단계적 충돌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반은 기존의 체제와 질서를 부정하거나 문제들을 지적하고, 체제나 질서를 전복하거나 개혁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진보의 개념이 됩니다.

 

 

이는 인력과 척력의 최적의 균형점을 이루는 방식으로 우주가 질서정연하게 돌아간다는 만류인력의 사회역사적인 변형이고,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뉴턴 역학에 기초한 정반합적 전개입니다. 또한 토마스 쿤에 의해 널리 인정받게 된 패러다임으로서의 정상과학에 대해 반론(이를 테면 뉴턴 역학에 대한 상대성이론의 반론, 상대성이론에 대한 양작역학의 반론)이나 새로운 이론들이 등장해 치열하게 서로의 진실을 가리는 작업들이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허나 헤겔의 변증법에 의해 정과 반의 대립은 정을 기반으로 부분 개조나 변형이 이루어지나 (때로는 극히 드물게 체제나 질서적 차원에서의 전복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결국은 정에서 출발한 합(合)이라는 새로운 체제와 질서가 정립됩니다. 즉 최종적인 합에는 정과 반이 모두 포함되기 때문에 기득권의 생존(보수의 목표)이 기본적으로 전제되는 것이 헤겔의 변증법입니다.

 

 

또한 정과 반의 작용과 반작용의 결과 새로운 합이 정립되면 그것이 다시 정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새로운 체제나 질서라 해도 그것이 새롭게 정리돼서 안정화됐기 때문에 정의 상태와 동일해지는 것입니다. 당연히 시간이 지나 새로운 것들이 나타나면 반이 출현하거나 합에 담겨있던 반이 힘을 얻으면 다시 둘 사이에 작용과 반작용이 포괄적으로 일어난 뒤 다시 합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역사는 무한히 진행되고 언제나 발전합니다. 헤겔의 변증법에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가 결정적 오류를 범한 것도 무한한 진보가 가능하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뉴턴역학의 작용과 반작용이 정과 반의 근거가 될 수 있었듯이, 생존의 싸움에서 승리한 적자가 계속해서 진보한다는 다윈의 진화론이 약속한 무한한 진보가 헤겔을 넘어 마르크스까지 사로잡은 것입니다. 





하지만 무한한 진보라는 허구의 개념은 지구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와 더불어, 진보와 성장을 이루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폭력적인 방법 때문에 파국적 종말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위대한 석학, 발터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무한한 진보가 초래할 파국의 필연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조금 어려울 수 있겠지만, 몇 번 되풀이해서 읽으면 충분히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파울 클레어가 그린 「새로운 천사」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의 천사는 마치 자기가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금방이라도 떨어지려고 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 천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고, 입은 벌어져 있으며 또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도 바로 이렇게 보일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천사는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은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러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 그러나 지구는 유한한 존재다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베이컨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우주와 자연마저 정복의 대상이 됐으나, 지구라는 행성은 우주에서 오직 하나며, 인류는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과학의 발전이 얼마까지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극히 일부의 인류만이 정자나 난자 은행에 보관된 상태로 지구와 비슷한 행성으로 옮겨질 수 있으나, 그것은 (인류 원리에 의해) 확률 상 제로에 가깝습니다.

 

 

결국 인류의 대부분은 단 하나 뿐인 지구에서 살다가 죽어야 합니다. 이런 물리적 한계 때문에 인류 진보의 무한성은 존재할 수 없는 허구에 불과합니다. 보십시오, 산업혁명이 일어난 지 단 250년(지구 전체의 역사를 기준으로 하면 0.00001초도 안 된다)만에 지구는 몸살을 앓을 정도로 파괴됐고, 자연은 더 이상 인간에게 당할 수만은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아우성(지구온난화가 대표적)입니다.

 

 

천연자원 고갈과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의 파괴,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상이변, 20세기 내내 수위가 올라간 대양, 무차별적인 개발에 따른 생태계 파괴와 각종 오염에 따른 대지의 기능 상실, 대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토지의 사막화와 각종 오염물질의 초미세먼지와 스모그화, 각종 만성질병과 정신질환의 급증, 사라졌거나 퇴치된 전염병의 부활과 슈퍼 박테리아의 출현 등 각종 부작용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근대이성의 최종 결과물 중 하나인 헤겔의 변증법을 신날하게 비판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끊임없는 진보가 내리는 저주는 끊임없는 퇴행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런 무한한 진보에 대한 믿음이 초래한 환상 때문에 전 세계적인 불평등이 개별 국가 차원에서도 공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악화됐습니다. 블랙홀의 대가인 리스는 인간의 생존확률이 50%에도 이르지 못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진화의 무한함을 주창하는 주류 경제학이 성장의 규모를 키우면 낙수효과가 발생해 중하위층도 풍요로워지리라는 주장이 새빨간 거짓말인 이유가 무한한 진보의 결과물이란 상위 1%에 집중되고, 하위 99%에게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지난 30년 동안 너무나 명확해졌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 또한 무한한 성장을 믿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해야 무계급사회가 도래한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 우를 범했습니다.

 

 

근대이성과 변증법이 약속한 무한한 진보와 성장이란 불가능합니다. 더 이상 이런 허구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진보와 성장을 고집하면, 그 결과는 단 하나뿐입니다. 사회적 약자부터 죽어나가는 비대칭적인 종말이 먼저이고 뒤를 이어 성장 동력을 잃어버린 나머지 인류 문명의 총체적인 공멸이 이어집니다. 이는 막을 수 없으며, 늦추거나 피해를 줄일 수는 있습니다, 인간이 정말로 합리적인 존재고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면. 





◉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

 

전 세계가 공멸의 시간을 늦추기 위해 노력하는 시점에서, 박근혜 정부는 정반대의 길로 나가고 있습니다. 인류가 비대칭적 종말을 걱정해야 하는 현 시점에도 박근혜 정부는 성장 위주의 정책에 더욱 매달리고 있습니다. 무차별적인 규제 완화와 비정상의 정상화, ‘통일은 대박’이라는 허무맹랑한 선동, 기업하기 좋은 나라, 선진국에서는 60년대부터 일상적으로 쓰인 창조경제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 때문에 창조경제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갈수록 빨라지고, 규모가 커지는 지구온난화와 재생능력을 상실한 토지의 누적된 오염, 에너지전쟁을 대체할 전 지구적 물 부족 사태, 천연자원의 부족, 특히 정점을 찍은 석유 생산(오일피크)으로 인해 발 빠른 초국적기업들은 무거운 경제에서 가벼운 경제로 갈아타는 것만이 아니라, 기업 경영에서 불확실한 것들을 최소화하고 있습니다. 상시적 구조조정이란 말이 여기에서 나왔고 이것이 청년실업과 조기퇴직으로 이어졌습니다. 



정부가 법을 바꿔 정년을 늘리고 사법적 보장을 했지만, 기업이 이것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넘칠 만큼 많습니다. 최근에는 기업활력제고법이나 노동개악을 추진함으로써 앞의 정책이 이를 위한 비열한 당근(사전포석)에 불과함을 알 수 있게 됐습니다. 또한 정보통신의 발전, 특히 소비자에 대한 각종 정보를 수집, 축적한 후 데이타 가공을 통해 행동패턴을 예측해내는 빅데이터의 활용은 소비의 확대로 이어질 뿐 신입사원의 필요성을 극도로 악화시켰습니다. 

 

 

최근에 들어 많은 기업들이 경력사원를 수시로 채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며, 이런 현상은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청년실업을 극복하려면 기업이 아닌 정부의 투자와 정책의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시장 우파이자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작은 정부로는 청년실업을 해결할 수 없고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박근혜는 사측의 이익만 반영된 경제법안과 노동법안을 강행처리하기 위해 1000만인 서명운동 같은 관제동원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하위 99%에게는 경제와 삶의 질의 악순환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비록 권력의 저울추가 시장으로 기울었다고 해도 정부의 역할이 중지되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정부는 이런 시장의 힘에 대항하거나 협조하거나 제약을 가함으로써 제 역할을 다해야 국민 전체의 복리가 증진하고 불평등이 사라지며, 각종 불평등이 초래하는 새로운 종류의 차별을 막을 수 있습니다. 바우만의 말처럼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여전히 유효하게 남아 있습니다.

 

 

글로벌 경제 세력의 하녀든 아니든, 국가란 쉽게 사표를 쓰고(과연 누구 앞으로?), 짐을 챙겨서 어디론가 사라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여전히 국가는 그 영토 내의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책임을 맡고 있으며, 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행동에도 책임을 지고 있다.

 

 

 

⊙ 빚도 자산이라는 악마의 경제학에서 탈피해야

 

현재 대한민국의 빚이 거의 4000조에 이른 것처럼, 박근혜 정부의 폭주가 계속된다면 제2의 IMF(이것이 정말로 일어나면 그때는 헤어 나올 방법이 없다)가 다음 정권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국가 전체의 부가 1경 5백조라고 하니 우리가 지고 있는 빚의 규모가 국부의 40%에 이릅니다. 빚도 자산이라는 악마의 경제학에 속아 매년 수십조의 이자를 정부와 민간과 개인이 물고 있습니다. 



이런 막대한 이자 때문에 부채율이 높은 기업들은 직원의 월급도 제대로 올려주지 못한 채 사업규모의 확장에만 몰두하게 만듭니다. 이럴 경우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네이버 같은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기업만 돈잔치를 벌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노동5법마저 국회를 통과하면 하위 99%의 삶은 최악을 피할 수 없으며, 이들 속에는 나라를 팔아먹어도 박근혜를 지지하는 35%도 포함돼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무려 소득의 20% 이상을 저축한 국민의 절약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 들어서는 전체적인 저축율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부의 재분배를 통해 복지의 확대와 사회안전망 강화에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선별적 기본소득제도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되지도 않을 성장 일변도의 정책과 조치들의 남발은 대한민국을 더욱 깊은 수렁 속으로 몰고 갈 뿐입니다.

 

 

⊙ 박근혜 정부의 폭주를 막아라

 

지금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가 진행하고 있으며, 앞으로 진행하려는 일들이 현실화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하위 99%를 희생시키는 것 이외에는 탈출의 방법이 없습니다. 박 정부는 특정 집단에게 일정 수준의 당근을 던져주는 대신, 그 뒤로는 거의 전 국민의 지갑을 털어가는 정책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런 정책들은 박근혜 임기 동안에는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지만, 그 다음 정권에는 엄청난 압력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아직도 중상주의와 중농주의 시대의 허접하고 오류투성이의 정치경제정학(박 대통령의 신념인 줄푸세가 대표적이다)을 신봉하는 현 정부의 행태는 국가와 국민을 공멸의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그들은 선의로 한다고 주장하겠지만, 지금까지 진행된 각종 정책들과 파기되고 축소된 공약들을 보면 더 이상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 일부 부처의 행태를 믿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인사를 할 때마다, 정부의 각 부처가 새로운 정책을 내놓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철렁 가라앉곤 합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과 내각을 보고 있자면, 단기적인 업적에만 급급함을 넘어 장기적인 이익을 상위 1%에게 퍼부어주는 모습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정말 정신을 차리고 박근혜 대통령과 현 정부의 폭주를 막아야 합니다. 이는 좌우,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중하위 90%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막아야 합니다. 



국가의 총소득은 늘고 있지만 그것은 일방적이고 신기루에 쌓여 있는 것이고, 달러보유액(외한보유액)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시적인 위험이 만연된 현재의 상황에서 달러보유액은 투자로 활용하지 못하므로, 인플레이션의 비율만큼 역마진을 초래합니다. 외국의 투자를 기대하는 것은 기대 난망이며, 국내에서도 두 개의 그룹을 제외하면 여력이 있는 기업이 별로 없습니다. 



그들이 투자에 나선다면 또다시 빚을 내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의 부채도 감당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더해 새로운 부채가 계속해서 는다면 대한민국은 내부로부터 폭발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가 기습적으로 시행을 발표한 양대지침이나, 부의 대물림을 허용해주는 기업제고활력법과 모든 근로자를 비정규직으로 만들고,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는 노동5법 등을 통과시키려고 혈안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잔혹한 IMF의 구조조정을 최단기에 끝냈고, 엄청날 정도로 1인당 국민소득도 늘었습니다. 헌데 실제의 삶은 더욱 가난해지거나, 소비에 중독돼 저축액은 늘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국가로서도, 개인으로서도 작은 위기에도 큰 데미지를 입게 됩니다. 박근혜 정부는 이것을 해결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반대로 가고 있으니 그들의 폭주를 막는 것은 시대의 명령이자 생존의 요구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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