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보수여 죽어라. 죽기 전에 새롭게 태어나 힘들여 자라길’이란 제목의 칼럼을 기고한 이문열에게 묻는다, 6주 동안이나 주말을 포기한 채, 민주주의와 정의를 외친 232만의 촛불에서 이번에도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에는 부끄러워서 타인의 입을 끌어들여야 했던) "아리랑 축전에서와 같은 거대한 체조의 분위기"를 느꼈는지? 광화문광장은 물론 전국에서 자발적으로 모여든 깨어있는 시민들의 빛나는 열망이 스스로 몸을 태우는 촛불로 일렁일 때마다 민주주의의 불꽃들이 거대한 너울을 만드는 것이 전체주의적 광기처럼 보였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으로 쟁취한 민주주의를 무당의 주문보다 하찮은 것으로 만들고, 수없이 많은 아이들이 죽어갈 때도 추문의 베일 뒤에서 마약성 약물에 취해있었고, 헌법을 수호해야 함에도 위반을 밥먹듯이 했으며, 국기를 지켜야 함에도 문란케했으며, 국격을 높여야 함에도 시궁창에 처박은 박근혜에게 즉각적인 하야를 요구한 232만의 촛불이 "삼류 도색 잡지도 다루기 낯간지러운 사생활에 대한 억측과 풍문"에 현혹돼 "여성 대통령의 미용이나 섭생까지 깐죽거리며 모욕하고 비하를 일삼는" 저열한 짓거리 같은가?
용암처럼 들끓는 분노를 민주주의의 축제로 승화시킨 232만의 촛불과 횃불이 "풍채 좋고 언변 좋은 양반들이 온종일 종편이 펼쳐준 좌판에 몰려 앉아…대통령의 속곳까지도 슬쩍슬쩍 곁눈질하며 최가네 일족 잡상스러움을 시시덕거리거나, 문고리 몇 인방이니 친박 개박 매화타령하며 킬킬거리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지? 인류역사상 사례를 찾을 수 없는 비폭력 평화집회를 이어가고 있는 232만의 촛불이 "1500단체가 불러내고, 매스컴이 일주일 내 목표 숫자까지 암시"에 따라 동원된 폭도로밖에 보이지 않는가?
이문열에게는 한 달만에 연인원 1000만에 육박하는 촛불시민의 자율적인 참여가 "여왕의 어지러운 통치 때문에 폭동"을 일으킨 폭도의 난동으로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이들은 "여왕을 빼닮은 창녀"를 여왕으로 착각해 "며칠 심문이랍시고 갖은 모욕과 고통을 주며 그녀가 여왕임을 자인케 한 뒤 엉터리 재판에 넘겨 처형장으로" 보낼 만큼 비민주적이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다. 이문열에게는 희대의 사기꾼 최순실이 "여왕을 빼닮은 창녀"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민주주의에 익숙해 분노의 순정함이 더욱 큰 촛불시민에게는 박근혜가 '자신의 아버지를 빼닮은 사이코패스적 여왕'으로만 보일 뿐이다.
<당신들의 천국> <서편제> <벌레이야기> 등처럼 권력과 인간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명작들이 넘쳐나는 이청준에 비해, <젊은 날의 초상>을 제외하면 권력과 폭력에 대한 비뚤어진 말의 향연(대표적으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영웅시대>, <황제를 위하여> 등)만 양산한 이문열에게는, 혁명의 시대인 이 계절이 "죽기 좋은 계절"이어서 박근혜가 "그 어떤 여왕보다 더 품위 있고 고귀한 여왕"으로 죽어야 (반칙과 특권의) 보수가 재기의 발판이라도 마련할 것으로 보일만큼 다급하고 초조했으리라.
육영수의 품위와 박정희의 신화가 그렇게 해서 허구의 성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처럼, 냉혹한 품성의 이문열에게는 비루하고 천박한 박근혜가 이 땅의 보수를 위해 품위있게 죽을 수만 있다면 "죽음을 예고하고 혹은 초대하는 이야기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악머구리 들끓듯" 하는 촛불폭도들의 난장을 끝낼 수 있을 것으로 보였으리라. 그래서 이문열은 "사람 모두가 두려워하는 죽음/ 사랑하는 이는 기꺼이 맞네/ 그래야만 참으로 사는 거니까"라고 절규했던 '16세기 수피즘의 시인 술탄 바후의 노래'를 인용했던 것이리라.
이런 비정상적 혼을 지닌 이문열이기에 마호메트의 금언까지 끌어와, 국민의 혈세로 마련한 차벽과 야만공권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자신의 한몸도 지키지 못하는 박근헤를 향해, "여보게 바후/ 죽기 전에 죽세/ 그래야 그분께 이를 수 있다네"라며 지옥에 있을 박정희(그분)까지 끌어들여야 보수 전체의 몰락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겠지. 그런 이문열이기에 "여기서 죽기 전의 죽음이란 정신적 죽음, 참다운 소생을 위한 낡은 정신의 죽음 같은 것"이라고 칠푼이를 향해 '사족 같은' 주석까지 달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폭발 직전의 분노마저 평화로운 집회로 풀어내고 있는 촛불시민을 종북좌파로 몰아가는 이문열의 비뚤어진 고정관념은 "쇠퇴하고 허물어진 정신의 허울 벗고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이 땅에서 보수는 다시 발 디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현 상황을 규정한 뒤, "죽어라, 죽기 전에. 그래서 진정한 보수의 가치와 이상을 담보할 새로운 정신으로 태어나 힘들여 자라가기를" 기원하는데 그치지 않은 다음의 문장에 분명하게 나와있다. "이 땅의 보수 세력 없이 통일되는 날이 오기 전에 다시 너희 시대를 만들 수 있기를."
종북몰이밖에 남은 것이 없는 이문열의 초조함은 민주주의와 정의를 실현해 반칙과 특권의 결과인 극단적 불평등과 노골적 차별이 추방된 '사람사는 세상'을 향한 촛불혁명의 지난한 여정이 '보수 세력 없이' 좌파들끼리 하는 남북통일으로 이어질 것처럼 호도·왜곡·날조하는 종편스러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것만이 아니다, 정말로 비루하고 추잡한 것은 절체절명의 위기감에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는지, 이문열은 유모차를 몰고온 주부와 배운 대로의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중고생의 촛불을 치기어린 광기로 몰아간 것을 넘어, 초등학교 5학년보다 못한 제멋대로의 숫자놀음까지 들먹이는 천박함에서 절정을 이룬다.
"지난번에 문재인 후보를 찍은 적극적 반대표만도 1500만표에 가까웠고, 대통령 지지율 4%가 정확한 여론조사였다면 이 나라에 박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유권자만도 3000만이 훨씬 넘는다. 아니, 박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친다면 4500만도 넘는다. 하지만 그중에 100만이 나왔다고, 4500만 중에 3%가 한군데 모여 있다고, 추운 겨울밤에 밤새 몰려다녔다고 바로 탄핵이나 하야가 '국민의 뜻'이라고 대치할 수 있는가."
통역하고 해석하는 것조차 창피하고 구역질나는 이 문단에서 고상하고 품위있는 보수우파를 자처하며, 권위주의와 불평등성장, 사대주의적 기회주의로 일관해온 이 땅의 보수세력이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형편없으며, 군중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왜곡돼 있으며, 의식체계를 이루는 가치관이 뼛속까지 썩어있는지 보여준다. 하나로써도 찬란한 232만 개의 촛불은 가슴 깊은 곳의 절망과 배신감을 태워 희망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촛불의 촛농처럼 흘러내리는 영혼의 피눈물을 비폭력 평화집회의 원천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통치자와 국가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전제로 한다'는 것을 전문대 나온 김제동도 알지만, 외눈박이 이념으로 세상을 보는 보수의 문호 이문열은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해서, 일제에 충성하고 김일성 만세를 외친 조선일보의 쇄락한 힘을 빌려 '고고하고 품위있는 단어를 사용해 교활하게 짜진 문장'으로 나치부역자를 방불케한 이문열의 칼럼은 보수를 자처하는 이 땅의 부패 기득권세력의 두려움이 얼마는 큰지 방증해주며, 거대한 촛불을 필사적으로 부정하려는 몸부림이 극에 달했음을 말해준다.
이는 촛불의 승리가 임박했음을 말해주는 분명한 증거이기에, 보수의 양심을 자처했던 이문열의 비루하고 왜곡된 칼럼은 단 하나의 속담으로 대체할 수 있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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