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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

다시 한 번 긴 여행을 떠나며

 

 

들어가는 글  

 

 

 

 

 

그리하여 가장 최근에는 브라질에서 극우 표퓰리스트 정치인이자 '리틀 트럼프'로 회자되는 자이르 보우소나루(63)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등 영국의 브랙시트와 미국의 트럼프 당선으로 최고조에 이른 민주주의 위기론과 종말론이 신종 전염병처럼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시민의 힘으로 권위주의적 표퓰리스트 정치인으로 분류되는 박근혜를 탄핵시킴으로써 민주주의 역주행의 잃어버린 9년을 종식시킨 대한민국을 제외하면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표퓰리스트 정치인과 정당들이 권력을 잡거나 주요 정당으로 부상했다. 이에 따라 시민 자치를 뜻하는 민주주의(특히 자유민주주의)를 벼랑끝으로 내몰면서 작동불능의 지경으로까지 몰고가고 있다. 히틀러와 스탈린을 빰칠 듯한 극단적 표퓰리스트의 득세에 기존의 정당들과 언론들은 너무나 무력하고 부패해서 이들에게 휘둘리며 민주주의 방패막이로써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케이블 방송(한국의 종편을 생각하면 된다)과 인터넷언론, 팟캐스트, 유튜브의 새로운 먹거리로 등장한 1인방송, 정치뿐만 아니라 모둔 분야에서 극단적 대결을 조장하는 소셜미디어 같은 대안언론과 유사언론, 1인언론의 폭발적인 분출은 정치적 아웃사이더나 극단적 표퓰리스트에게는 더 없이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필터링 기능이 마비된 생태계에서 가짜뉴스가 전 세계적인 문제로 떠오른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증오와 혐오, 차별과 분열, 배제와 범주화, 복수와 테러를 조장하는 발언들이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까지 퍼져나갔다.       

 

 

경쟁하는 체제와의 싸움에서 민주주의 진영의 승리를 이끌었던 고도·과속성장의 파티는 너무나도 짧았고, 선진복지국가를 구축한 북유럽의 국가들을 빼면 자유주의 경제학이 자랑했던 낙수효과와 비슷한 것이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뒤를 이은 신자유주의 30~40년 동안 지속가능한 성장이 불가능하도록 만든 극단적인 불평등과 양극화가 발생함에 따라 기성정치와 제도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폭발 직전에 이르면서 표퓰리스트들이 목소리를 높일 환경이 조성됐다. 2016년부터 이런 현상을 우려하는 수많은 논문과 저서들이 폭발적으로 쏟아지고 있지만 과학기술이 미친 영향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만족할 만한 연구결과는 나오지 않는 실정이다. 푸코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처음으로 정식화한 신자유주의 통치술이 40년만에 전 세계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도 정보통신기술로 대표되는 디지털기술과 빅데이터 및 뇌과학에 기반한 인공지능 발전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신자유주의는 하위 99%의 돈을 상위 1%로 이전하는 역계급혁명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대기업과 자본의 입장에서 수익성이 높은 아이디어들이면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강자의 수익모델로써,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에 가격을 매겨 무한경쟁을 강제하는 새로운 형태의 통치술이다. 푸코에 의해 신자유주의 이성이라고 명명된 이런 통치술은 자유민주주의를 시장민주주의로 치환시켜 정치적 인간을 경제적 인간으로 만들어버린다).  

 

 

따라서 기술 발전을 녹여내는데 상당한 성공을 이룬 로버트 J. 고든의 《미국의 성장은 끝났는가》와 '촛불혁명'과 '소셜미디어'에 하나의 장을 할애한 야스차 뭉크의 《위험한 민주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과학기술의 발전이 정치와 경제, 사회에 미친 영향력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통치술에 날개를 달아준 디지털기술과 인공지능에 대한 냉정하고도 비판적이며 포괄적인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물론 인류의 멸종을 막을 최후의 기회마저 허무하게 날릴 수 있다. 나는 이 책에서 인간이 주도하는 마지막 산업혁명이자 최후의 발명품이라고 하는 4차 산업혁명(미국의 실리콘벨리와 영국, 한국에서만 각광을 받는)과 인공지능의 영향까지 포함해 거칠고 위태하지만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적이면서도 포괄적인 접근을 시도하려고 한다. 성장의 또 다른 말이 극단적 불평등이었으며 지속불가능한 양극화였다는 것을 인식하려면 신자유주의 통치술과 과학기술 발전의 역설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성장과 진보를 무조건적인 선으로 보는 기존의 인식에서 탈피하지 않는다면 인류가 지금까지 이루어온 모든 것들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이런 인식을 대전제로, 가능하면 모든 사안을 진영논리에서 벗어나 볼 생각이며, 양극화된 이념적 구분이나 프레임전쟁의 관점에서도 최대한 벗어나려고 노력하되 현장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려고 노력할 생각이다. 나에게는 너무 쉬운 보수우파 비판만이 아니라 살과 뼈를 잘라내는 심정으로 진보좌파 비판에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려고 한다. 작고한 드워킨이 그랬듯이, 진보와 보수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공통의 합의점을 제시할 것이며, 비판을 넘어 대안 제시에도 용감하려 노력할 생각이다. 다양한 정의론 중에서 이 시대에 맞는 정의론의 일단이라도 고민해보았고, 몇몇 선도적 연구가들의 도움을 받아 디지털기술과 디지털세대의 명암도 직선적으로 다루었다. 조심스럽지만 디지털기술과 만난 페미니즘의 급진화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페미니즘의 정상화만이 수많은 인류 멸종 시나리오의 대부분을 종식시킬 수 있기 때문에, 남녀의 성대결로 변질되고 있는 페미니즘 급진화의 원인을 밝혀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시급하다고 믿는다. 인류사 전체를 놓고 보면 부모세대보다 자식세대가 못사는 경우가 적지 않았음을 밝힐 것이지만, 밀레니엄 세대의 경우가 그중에서도 최악인 이유를 밝히려고 노력했다.

 

 

책은 크게 세 개의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파트는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았으며, 사업 실패로 모든 것을 잃고 매일같이 가장 초라한 자살만 꿈꾸다가 방대하고 무차별적인 독서를 통해 지금에 이른 나에 대한 이야기다. 거의 모든 표퓰리시트는 빛과 어둠의 경계를 어슬렁거리며 세상을 배회하던 아웃사이더로 분류되고, 기성정치인과 기존 체제에 대한 대중의 불만과 분노를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는 공통점을 보이기 때문에 나의 삶을 짧게나마 다루는 것이 그들에 대한 독자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매우 짧은 기간의 꿈으로 허망하게 끝났지만 지금의 구글과 애플이 하고 있는 사업들을 거의 다 그려보고 한두 가지는 실제로 추진해봤기 때문에 디지털기술과 온라인 세상, 특히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의 명과 암을 정확히 꿰뚫어볼 수 있었던 내 경험이 작금의 현실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독자의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이 때문에 두 번째 파트는 아웃사이더의 눈으로 본 근현대사 비판에 할애했으며, 산업혁명에서 2008년 글로벌금융위기를 거쳐 표퓰리즘의 득세까지 신자유주의 합리성과 과학기술 발전이 인류에 미친 영향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조금은 삐딱한 시선으로 다루어보았다. 세 번째 파트에서는 디지털시대의 표퓰리즘과 민주주의 위기, 진보의 역설과 인류의 종말을 다양한 부분으로 세분해 다루었으며, 포괄적인 관점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모든 과정을 거쳐 끝에 이르렀을 때 내가 주장하고자 했던 것들이 독자들의 눈에는 더욱 진보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진보의 재정립처럼 다가올 수도 있고, 보수의 정신을 대폭 수용한 새로운 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결과가 무엇으로 나오던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갈 것이며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단 하나의 기준이 있다면 '사람이 먼저'라는 것이며, 지금보다 풍요롭지 않을 수도 있지만 상식과 양심, 상호존중과 배려, 정의와 공정이 산소처럼 퍼져있는, 그래서 '하루하루가 신명나는 사람 사는 세상'에 다가가는 것이다. 비록 소수에 그칠 독자와의 여행이지만 모든 고민의 끝에는 흐릿하게나마 희망적인 세상의 일단이라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여행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목적지를 정하는 것에서부터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전 과정이 더욱 흥분되고 설레는 것처럼, 나와 여러분의 여행도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대한 쉬운 언어로, 평이하게 풀어가도록 노력하겠지만, 혹시라도 그에 미치지 못했다면 모든 것이 필자의 모자람과 과욕에 있지 독자 여러분의 사유의 깊이와 넓이에 있지 않음을 밝힌다. 

 

 

자, 그러면 함께 출발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