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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이재명 때문에 북한처럼 전체주의 하자는 표창원에게

 

거대 권력은 불가피하게 진실을 왜곡한다. 권력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바꾸는 데 관심이 있다……거대 권력은 블랙홀처럼 주변 공간 자체를 왜곡한다. 그 곁에 가까이 갈수록 모든 것이 더 심하게 뒤틀린다.

 

                                                                                                  ㅡ 유발 하라리의 《2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인용

 

 

자, 위의 인용문을 기억한 채 하나만 분명히 하자.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정당은 당대표(민주주의 선진국은 원내대표는 있어도 당대표라는 직위는 없다)가 결정했다고 당원들이 무조건 따르도록 강제하지 않는다. 집권여당의 당대표라면 거대 권력을 손에 쥐었다고 해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당대표의 거대 권력은 진실도 왜곡할 만한 힘으로 의원들과 당직자, 당원에게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아니,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북한의 공산당처럼 전체주의적 정당이면 모를까, 민주정당이라면 당대표의 결정을 신의 결정과 동급으로 놓지 않는다. 정당의 헌법과 법률인 당헌과 당규에도 그런 반민주적이고 초법적인 조항을 넣을 수 없다. 이재명을 안고 간다는 이해찬의 결정을 당원에게까지 적용할 수 있다고 믿는 표창원처럼, 자신이 상당한 권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총선의 공천권에 목메는 국회의원이라면 모르겠지만, 당원에게까지 잘못된 결정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것은 표창원이 툭하면 내세우는 (진정한 의미의) 해당행위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변증법적으로 풀어낸 '주인-노예 관계'처럼, 설사 당대표가 당의 주인이고 당원이 그의 노예라고 해도 당원의 지지와 참여, 후원이 없으면 당대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종국에는 주인과 노예 관계가 뒤바뀌는 역전현상이 일어남을 표창원은 깨달아야 한다. 헤겔이 자본과 노동의 변증법을 설명하기 위해 개념화한 '주인-노예 관계'는 민주주의 정당에 적용해도 특별한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보편적인 진리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듯이, 당의 주인은 당원이라는 뜻이다.

 

 

부, 건강, 지역, 국가, 문화, 전통 등 수없이 많은 실질적 이유로 불평등하게 태어난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인류의 믿음과 신념, 철학은 모든 개인이 참여한 정치사회적 합의에서 나온다. 사회계약에서 출발한 헌법과 법률은 그런 합의를 기본권과 인권이라는 법적 권리로 보장하며, 바로 그 지점에서 자유로운 개인과 정치사회적 공동체로써 공공이익이 탄생한다. '타인이 자신에게 해주기 바라는 것을 타인에게 하라'는 황금율을 실천해야 하는 개인은 자유의지에 따라 정당에 가입하고 평등한 주체로 행위한다.

 

 

그리스의 아테네라는 작은 도시국가에서 처음 실시된 민주주의는 '경제력이 충분해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결혼한 백인남성'에서 평등한 자유를 가진 모든 개인에게로 참여의 폭을 넓히는 과정이었다. 정당은 그런 과정에서 생겼으며 (전통적인 이론에 따르면) 두 개 이상의 정당이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민주적인 방식의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는 것을 목표로 한다. 최근에는 현실적인 이유로 권력을 잡지 못해도 공통의 목표를 지닌 개인들이 정부의 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정당까지 출현했다.

 

 

'우중에 의한 독재'와 '다수의 독재'라는 플라톤과 토크빌 등의 경고가 있었지만, 그 유명한 처칠의 말처럼, '민주주의가 최악의 체제(정부 형태)여도, 지금까지 시험한 체제들을 제외하면' 최선인 이유도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민주당이 아테네에서 출발해 피렌체를 거쳐 미국에서 뿌리를 내린 후, 20세기 후반부터 지배적인 체제로 자리잡은 민주주의 정당이라면 당대표가 결정(당론)했으니 모든 당원이 따라야 한다는 표창원 같은 주장은 허용될 수 없다. 

 

 

그것이 특정 정당에 가입하건 가입하지 않건, 정치 행위에 참여하는 평등한 개인은 공통의 가치관과 목표를 추구하되 정치적 선택과 결정은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른다. 그런 정치행위에 대한 합당하고 정당한 책임을 지는 것도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랐기 때문이다. 당대표의 결정에 따르지 않아도 당원으로 남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고 권리이다. 당헌과 당규가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는 판단의 기준이 될지언정 절대적 기준이 되는 것도 아니다. 

 

 

표창원의 무지하고 폭력적인 인식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전체주의적 발상이다. 당대표의 결정에 따르는 것도 최종적으로는 당원의 자유의지에 따라 이루어진다. 당대표가 항상 옳을 것도 아니며, 옳다고 해도 반드시 따라야 할 의무가 당원에는 없다. 이재명을 안고 간다는 최고회의의 결정에 모든 당원이 참여한 것도 아니고 당대표의 정무적 판단에 따른 것이며, 수많은 당원들이 반대의사를 분명히 한 상태였기 때문에 표창원의 주장은 플라톤과 토크빌이 경고한 다수의 독재에 불과하다. 

 

 

과거의 경력과 삶이 어떠했던 간에 민주주의 정당의 정치인이 된 이상, 퇴행의 모습만 보여주는 표창원은 민주주의와 정당에 관해 기초부터 다시 공부하고 체현해야 한다. 이재명을 감싸고 도는 것은 표창원의 자유이고 정치적 권리이지만 그 방식이 민주주의에 반한다면 어떤 정당성도 갖지 못한다. 상황에 따라 당원의 의무를 강조할 수 있어도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대전제를 넘어설 수 없다, '모든 국법이 정지되는 예외상황'이나 전체주의 정당이 아니라면.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당론을 정해 당원의 권리를 제한한다는 발상 자체가 위헌에 가까운 행위이지만, 당원 가입이라는 정치행위도 당대표의 결정에 복종하는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아니다. 당원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지배하려고도 강제하고 지시하려고도 하지 말라! 군인조차도 상관의 명령이 명백히 잘못됐다면 거부할 권리가 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P.S. 정당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로버트 달, 아담 쉐보르스키, 최장집 등처럼 구세대 학자들이 주장하는 계급과 이념에 기반한 '조직으로써의 정당론'과, 정당의 모든 과정에 시민이 참여(시민행동주의)하는 것을 주장하는 '네트워크로써의 정당론'으로 나뉜다. 냉전시대의 잔재가 남아있는 전자는 대중을 동원과 제한된 참여의 대상으로 보고, 후자는 행위와 결정의 주체로 본다. 전자는 대의민주주의에 방점이 찍혀있고, 후자는 참여·직접민주주의에 방점이 찍혀있다.

 

 

혁명처럼 예외적 상황일 때도 전자는 대중의 요구를 정당이 흡수해 제도화하거나, 원내에서 정책화하는 정치행위를 주도하고 대중은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루소가 '유권자는 선거일에만 주인이고 다음부터는 노예로 돌아간다'고 말한 것도 이런 정당론에 기반한다. 후자는 혁명에서 나온 대중의 요구를 시민의 직접참여로 정당과 함께 공동으로 풀어가는 것을 말한다. 문프가 민주당 대표였을 때 만들고자 했던 정당은 후자이지 전자가 아니다. 추미애와 이해찬의 민주당은 전자로 돌아가고 있다. 필자가 퇴행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추미혜와 이해찬의 민주당이 갈수록 자유한국당를 닮아가고 있다. 세월호참사와 촛불혁명을 철저하게 이용해먹은 이재명과 그를 정치적으로 키워주고 보호하는 김어준 카르텔이 퇴행의 중심에 있으니 이런 대참사가 가능한 것 같다. 이들은 왜 이재명에게 이렇게도 목을 메는 것일까? 이재명의 지지율 7%를 잡으면 50%대 지지율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일까? 자신이 하는 말의 70% 정도만 이해하는 듯한 나경원이 제1야당의 원내대표가 되는 것이 보수 진영의 현실이다보니, 니들이 민주당 말고 다른 당을 찍을 수 있겠느냐는 배짱으로 이러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