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하고, 단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이지만 ‘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는 하나의 목표로 귀결된다. 강자와 승자 위주로 쓰인 역사와 세계사를 조금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것을 통해,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깔려 죽은 이름 모를 수많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희생과, 단 한 번도 제값을 받지 못한 피와 땀을 되살리는 것이다.
나의 능력과 건강, 나이에 비해 도무지 이루기 힘든 지난한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인류의 위대한 현인인 중 두 명의 입을 통해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길에 나서려 한다. 내가 이 두 사람을 인용하는 것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미셀 푸코와 발터 벤야민과는 달리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회의주의자이자, 타협을 모르는 진정한 용기 때문이다. 그 처음은 『열린사회와 그 적들2』의 저자 칼 포퍼의 말이다.
“사람들이 인류의 역사라고 말할 때 그들이 생각하며 그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은 정치권력의 역사이다...정치권력의 역사는 국제적 범죄와 집단학살의 역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도대체 인류의 구체적 역사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의 역사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희망과 투쟁 그리고 수난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의 신봉자이자 확장자였던 칼 포퍼는 마르크스로 대표되는 역사주의 학자들의 역사결정론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갔다. 비록 그는 마르크스 비판에서 지나칠 정도로 과학적 잣대를 들이대 사회학적 오류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최소한 역사의 주인에 대한 그의 인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 또한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2』에 나오는 다음의 인용문들을 보자.
“신이 보통 <역사>라고 일컫는 국제적 범죄와 대량학살의 역사에 자기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신을 모독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잔인하며 치졸하기도 한 짓거리에 대한 이야기가, 인간의 삶의 영역 안에서 참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제대로 말해줄 수 있겠는가. 잊혀진 사람들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슬픔과 기쁨, 그들의 수난과 죽음, 이것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진 인간경험의 참된 내용이다.”
인류의 역사는 모든 시대에서 평범하게 살다간 고달픈 삶을 반영해야 하며, 온갖 피해를 감내했던 대다수 인류를 포괄하는 우리 모두의 역사가 돼야 한다. 승자나 강자의 역사는 극소수의 영웅적인 신념에 의해 절대다수의 약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집단 최면의 거짓되고 희생을 강요하는 죽음의 역사였다. 성공한 사람의 기억만이 유효하다면 인류는 동물 중에 가장 천박한 동물에 다름 아니다.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짐승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빌 브라이슨이 『거의 모든 것의 역사』에서 “만약 우리의 외로운 우주에서 생명이 어디를 지나왔는가를 기록하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감시할 일을 맡길 수 있는 생물을 디자인하려고 한다면, 그런 일을 절대 인간에게 맡기면 안 된다”고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명에 의해서나, 신에 의해서나, 아니면 당신이 무엇이라고 부르고 싶은 바로 그 존재에 의해서 선택”됐다고 말했다. 미우나 고우나 인간만이 우주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류와 우주의 탄생과 역사, 미래에 대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자, 그런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에서의 삶이 행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그리하여 인류가 공존과 상생의 진정한 가치에 눈을 뜰 수 있도록 “우리는 열린사회를 위하여, 이성의 지배를 위하여, 정의와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그리고 국제적 범죄의 통제를 위하여 우리가 벌이는 투쟁의 관점에서 권력정치의 역사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역사가 그 자체로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의 이러한 목적들을 역사에 부여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가 자체로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역사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것이며, 기록은 그 이후에나 필요한 것이다.
극소수의 승자나 강자의 입장에서 역사가 기술되면 인류는 언제나 집단학살과 전쟁범죄의 역사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어떤 형태로든 탐욕과 죽음의 역사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 역사가 만인의 것이 되지 못할 때, 역사는 그 자체로 승자와 강자의 권력의 도구로 전락한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니, 이제 우리가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이자 검열관이 되어야 한다.
합리적 보수(유럽의 경우, 미국에서는 진보, 한국에서는 중도)의 가치를 드러내는 다음과 같은 그의 주장들도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는 휴머니즘의 본질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철학자로 내가 꿈꾸는 역사의 재구성에 모범적 예다. 역사의 주인은 강자나 승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만인의 행복을 위해 '사회계약론'의 필요성을 제시한 루소의 『인류 불평등기원론』의 핵심 주제도 이와 비슷하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사회를 이루는 일반의지를 부정하고, 인류 이성의 포기까지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과 역사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평등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이 평등권을 위한 투쟁을 벌일 것을 결정할 수 있다. 국가와 같은 인간의 제도들은 그 자체로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보다 합리적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을 벌일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프랑스의 행동하는 자유주의자였고 급진적 진보주의자였던 『분노하라』는 소책자로 널리 알려진 고 스테판 에셀을 떠올리는 칼 포퍼의 외침은, 발터 벤야민과 미셀 푸코, 칼 폴라니와 한나 아렌트처럼 ‘신은 승자와 언제나 함께 한다’는 통념을 철저하게 배격한다. 동시에 그는 모든 것을 한 번에 이루려는 폭력적인 혁명도 반대한다. 열린사회라는 것이 꾸준한 변화들이 쌓여 점진적으로 이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칼 포퍼의 열린사회가 마르크스의 '자유의 왕국'과 다른 점은 최종적인 모습이 결정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생산관계인 체제의 하부구조가 정치와 문화 및 교육과 예술 같은 체제의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궁극의 유토피아를 확정할 수 있었지만, 어떤 결정론도 거부하는 칼 포퍼는 인류의 역사를 열린 상태로 나두었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그것이 사회경제적 약자와 이름 모를 무명용사들의 것이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자유주의적 이상론에 빠지지 않고 열린 세상을 위한 정의로운 투쟁을 역설한 것으로 이어졌다. 바로 이 점에서 칼 포퍼와 칼 마르크스는 '극과 극은 통한다'는 벤야민의 성찰처럼, 서로간에 사상의 소통이 가능하다.
“우리는 열린사회를 위한 투쟁과 그 적들(궁지에 몰리면 이들은 파레토의 충고에 따라 인도주의적 정감을 앞세운다)과의 항쟁을 벌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 우리는 역사를 해석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무엇이 삶의 목적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에게 달렸다. 사실과 결정의 이러한 이원론은 아주 근본적인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실 그 자체는 아무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은 우리의 결정을 통해서만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이는 사회적 생산관계의 산물인 특정 제품이 자신의 삶과 관계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고 말한 마르크스의 물신주의 비판과도 일맥상통한다. 언제나 결정권은 인간의 주체성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긴 칼 포퍼는 마르크스의 역사적 결정론을 비판한 것이지, 그의 휴머니즘적인 신념과 과학적인 분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철저한 위선자였고 차별주의자이자 인종주의자였던 플라톤과 기득권을 옹호하는데 자신의 능력을 쏟아부은 헤겔을 맹렬히 비판했던 것과 비교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리처드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도 초기 기독교의 이론을 제공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으며, 월가의 현인으로 등장한 탈래브의 《블랙스완》을 관통하는 주장도 플라톤의 주름지대(권위가 만들어낸 단순성, 다양한 토론이 가능한 것을 원천 봉쇄하는 것)를 극복하는 것에서 출발하지 않았던가. 플라톤의 주장처럼 변화 자체가 부패라면 열린사회는 애당초 불가능하고 인류의 진보도 불가능하다. 플라톤은 이것을 막으려 했기 때문에 열린사회의 적이 된 것이고, 전체주의의 기원이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를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논리처럼 이용하는 자들이 얼마나 저자의 의도를 왜곡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같은 책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함으로써, 인간의 이타성에 대해 분명히 하고자 한다. 도킨스가 이기적이라고 한 것은 유전자 차원에서 적용되는 논리로 그들 또한 무한경쟁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과 공존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기도 한다는 사실도 아울러 상기하고자 한다.
“30억 년 전부터 이 지상에서 언급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자기 복제자는 DNA였다. 그러나 DNA가 그 독점권을 영원히 가지리란 법은 없다. 새롭게 시작된 진화가 이미 낡은 유형이 된 진화를 답보할 이유는 없다. 유전자를 선택의 단위로 하는 낡은 유형의 진화는 뇌를 만들어 냄으로써 최초의 밈이 등장하면서 이들은 낡은 유형의 진화보다 훨씬 빠른 독자적 진화를 시작했다......일단 유전자가 재빠른 모방 능력을 가진 뇌를 그 생존 기계에게 만들어 주면, 밈은 자동적으로 세력을 얻을 것이다...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 뇌가 모방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뿐이다. 그러기만 하면 밈은 그 능력을 십분 이용하면서 진화해 나갈 것이다......우리는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의 기계로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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