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이성이 창출해낸 현대성이란 즉각적인 만족을 위한 소비지상주의와 무한투쟁을 장려하기 때문에,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가 왜곡돼 전달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인간이란 이기적인 유전자의 횡포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우리는 그저 복잡한 생존기계가 아닌 스스로 운명을 창조할 수 있는 위대한 종이자, 모든 생명체가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지적 존재이다. 신이라는 존재와 무한이라는 개념을 추상할 수 있는 인간이란 종은 그래서 한 명 한 명이 작은 우주이며, 곧 신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예언자로서 나서는 대신 우리의 운명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해 일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우리의 오류를 항상 눈여겨보도록 우리 자신을 길들여야 한다. 권력의 역사가 우리의 심판자라는 생각을 우리가 내던져 버릴 때, 역사가 우리를 정당화해 줄 것인가에 대해 염려하는 버릇을 끊어 버렸을 때 그 때에야 비로소 아마도 우리는 권력을 길들이는 데 성공하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역사를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정당화를 너무나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다.”

 

 

거의 모든 면에서 진보좌파인 나는 합리적 자유주의자인 칼 포퍼와는 몇 가지 면(특히 경제적 관점과 변증법적 유물사관)에서 일치하지 않지만, 정치권력의 역사에 대한 그의 인식과 그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래서 역사는 단순한 사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나와 모든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 혼자만의 역사와 이미 결정된 역사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승자와 강자의 역사란 폭력의 만연으로 짐승으로 되돌아간 인간이란 종의 비극을 보여줄 뿐이다. 민주주의란 그런 세상에선 무용지물이 될 뿐이다.



만일 위정자가 국민의 뜻에 반하는 통치를 하면, 그를 끌어내릴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며, 열린사회가 지향하는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라고 했다. 위정자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것도 국민이고, 그의 탈선을 막기 위해 그를 끌어내리는 것도 국민이 권력을 회수하는 것이라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전 세계의 위정자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며, 이럴 때만이 열린사회는 점진적인 발전을 할 수 있으며, 다양한 형태의 발전이 가능하다.

 




알렉시스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인간은 권력의 행사나 복종의 습관으로 타락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 부정하다고 믿는 권력을 행사하거나, 부정하게 탈취되고 억압적이라고 스스로 여기는 통치에 복종하게 되면 타락하고 만다”고 한 것도 매우 중요한 성찰을 제공한다. 이는 승자와 강자의 공적독점을 대체한 사적독점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더구나 사적독점이 공적영역마저 사유화하는 이 시대에는 더욱더 유효하다.



‘억압과 착취 속에서도 세상은 돌아간다’고 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진정한 자유는 불멸의 가치로서 영원한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자유가 없다면 인류의 존엄성은 사라진다. 하지만 그것이 사회경제적 평등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역사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리고 육체적이던 정신적이던 사회적이던 간에 평등이라는 것이 탄생과 함께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불평등한 부조리에 저항하고 투쟁해야 한다(생명의 침해불가능한 존엄성과 탄생의 불평등은 다른 얘기다. 이 둘을 혼동하면 안 된다).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자로써 살아가지 않는 한 나는 타인에게 비쳐진 나일 수밖에 없다. 타인이 지옥일 수는 있어도 존재 자체와 관계를 거절할 수는 없다. 죽음마저도 자신의 삶의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아 스스로 선택하는 가장 극단적인 저항이라고 말한, 자본주의 사회가 철저하게 배격한 위대한 철학자 쇼펜하우어(우리나라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과소평가된 철학자로 스피노자와 함께 진정한 의미의 자유주의자이자 진보주의자였다)의 말을 잠시 빌려보자.

 

 

“타방이 있어야만 일방이 있으며, 타방이 없으면 다른 일방도 소멸되어 버린다. 양자는 서로 직접 접경하여 객관이 시작되는 데서 주관은 끝난다. 양자의 경계가 공통된 것은 모든 객관의 일반 형식, 즉 시간·공간·인과율이 객관의 인식이 없이도 주관에 의해 안전히 인식”될 수 있다.

 

 

인간은 뉴런거울신경을 지니고 있어 사전 접촉이 없었던 상대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인식할 수 있다. 나와 타인의 경계가 공통된 것은 나와 타인을 구별하는 것이 오히려 인위적이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나는 상대가 있어야 존재하며, 상대 또한 내가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주관이 타인의 주관을 억압해서는 안 되고, 나에 대한 타인의 주관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사실이라는 객관적 팩트(시간과 공간, 인과율에 의해서 시계열 상으로 진열되는 역사의 단편들)는 의미라는 주관적 판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만, 내가 소중한 것만큼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과 믿음이, 역사에 적시될 팩트를 결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역사는 모든 사람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곡이 없는 절대 다수의 삶의 이야기들. 최초의 모든 이들과 그 후손들 모두가 주인공인 보편적 역사의 탄생. 

 

 

이번에는 인류의 위대한 현인이며 공화국의 부활을 꿈꾸었던 정치학자의 입을 빌려보자. 그녀는 인간은 늘 출발할 수 있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인간의 조건』, 누구나 상황에 따라 악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악마가 될 수 있다는 『예루살렘의 아히이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와 인류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던 히틀러의 나치를 파헤친 『전체주의의 기원』 등을 쓴 한나 아렌트다. 좌파와 우파를 떠나 오직 인간에만 집중했던 그녀의 사상은 네그리의 비판을 떠나서도 인류의 자산임에 틀림없다. 하물며 다음과 같은 통찰은 어찌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확신은 역사를 상투적인 틀로 해석하는 길로 이어질 수 있다. 이해란 잔악무도함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례에서 전례 없는 일을 추론하거나 현실의 영향과 경험의 충격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도록 만드는 유추와 일반화를 통해 현상들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이해는 오히려 우리의 세기가 우리 어깨에 지운 짐을 검토하고 의식적으로 떠맡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짐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그 무게에 패기 없이 굴복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이해란 현실에, 그것이 무엇이든, 미리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주의 깊게 맞서는 것이며 현실을 견뎌내는 것이다...현실을 아무런 편견 없이 감연히 맞서 이겨내는 것이다. 

 


내가 나의 능력에 비해 너무나 과분한 일인 인류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사에 대한 이해가 유치하고 깊이가 턱없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나는 가능한 한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 최대한 알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강자와 승자 위주의 현실에 대해 아무런 편견 없이 맞설 수 있을 것이며, 나와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늘어나 연대를 이룰 때 그들에 맞서 싸워 이길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과거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미래를 알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있는 것인데, 그것 때문에 오히려 나는 더욱 분명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권력의 결정체인 새로운 제국과의 싸움이 어찌 간단할 수 있겠는가? 제국의 체제 논리 때문에 전 세계가 상시적 전쟁 상태에 빠져든 상황까지 고려하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어찌 그에 대적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노력하고 연대한다 해도 무적의 제국을 무너뜨린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나는 모든 제국과의 싸움에 임해, 그 투쟁의 지평선을 최대한 넓히고자 한다. 더하여 이런 투쟁이 더 많은 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그리고 그 투쟁들이 인터넷을 통해 소통하고, 삶의 현장에서 네트워크 식으로 연결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서로의 특이성을 인정하며 공통의 가치를 창출해가기를 희망한다. 

 

 

만일 내 터무니없는 희망이 현실이 된다면 그 파급력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내가 다시 쓰고자 하는 약자들의 역사이며,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세계사의 진정한 모습이다. 부디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강자와 승자의 역사에서 사라진 수많은 약자들과 평범한 사람들의 안식처이자 재발견이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지상에서 보고 싶은 수없이 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의 성지의 일단이라도 보여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마지막으로 T.E.로렌스의 《지혜의 일곱기둥》에 나오는 인용문으로 글을 마칠까 한다. 새로운 출발점에 선 내 마음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며, 세월호 유족들의 입장에서 역사를 쓰면 똑같은 마음에 이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ㅡ특히 지식인들은 반드시 세월호 유족의 입장에서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슬프고도 참혹하며, 좌절하지 않는 위대한 역사를 써야 한다, 그들의 성지로 가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나는 문득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바로 순례자들의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대에 걸쳐 북쪽의 민족들은 성스러운 유물에 대한 신앙심을 가슴속에 품은 채, 성지를 방문하기 위해 이 길을 지나갔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아랍 혁명은 순례자들의 귀환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이상을 대신하여 또 하나의 이상을, 계시에 대한 과거의 믿음을 대신하여 자유에 대한 믿음을 품고, 북쪽으로, 시리아로 돌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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