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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참사

‘세월호 프레임’이 설정된 날 모든 것이 끝났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모든 기득권은 바짝 엎드렸다. 감히 어떤 기득권도 세월호 참사 앞에 다른 것을 말할 수 없었다. 국정원의 댓글사건에도 꿈쩍도 않던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며 대국민사과에 나서야 했다. 국가개조론마저 대두되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던 모든 기득권이 세월호 참사의 불똥이 튀지 않도록 바짝 엎드리는 것은 당연했다. 소나기는 피하고 보는 것이 우선이다.





헌데 말이다, 민주정부 10년마저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그래서 제대로 된 개혁도 못하게 만든 70년 전통의 기득권이 304명의 국민이 수장된 세월호 참사 때문에 국가개조론까지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다면 너무나 순진하다. 위험에 처했을 때 도주와 항전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것만 허용된다면, 인류의 문명은 아주 오래 전에 종을 쳤다. 인간만이 제3, 제4, 제5의 선택을 통해 위험을 줄일 수 있었고, 그것이 인류 문명을 최고의 위치에 오르게 만들었다.  



인류는 권력을 독점한 개인과 소수, 일당 독재에 맞서 전쟁과 혁명을 거쳤지만, 존엄하고 자유로운 삶이라는 해방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조건의 평등함이란 최소한의 자유마저 축소됐다. 전쟁과 혁명은 '자유의 진보'를 이루어내지 못했고, 수많은 희생과 죽음을 담보로 극도의 불평등만 늘려놓았다. 살아남은 승자는 소수의 강자가 돼 기득권으로 자리잡았다. 하물며 304명의 죽음 때문에 기득권을 해체하는 것이 필수적인 국가개조까지 언급하다니!!  



기득권의 첫 번째 특기는 벌어진 차이를 지키는 것이고, 가장 위험한 것은 제거하거나 해체해 버리는데 있다. 이들에게 출발에서의 공평함으로 돌아가는 결과의 평등만큼 위험한 것도 없으며, 헌법이 보장하는 시민적 자유란 비기득권이 좁히기 힘든 차이를 받아들인 대가로 선물(양보)한 것에 불과하다. 간단히 말해 우리가 누리는 각종 권리와 자유란 거의 모든 면에서 간극이 벌어지고 있는 불평등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데 대한 기득권의 자본주의적 처방에 불과하다.



가진 것들을 빼앗길 수 있는, 즉 혁명에 준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는 국가개조란 하늘이 무너져도 막아내야 하는 것이 기득권의 본질이다. 더구나 현대는 모든 것에 가격이 매겨지고, 시장의 기능이 개입하지 않으면 지속적인 삶이 불가능한 시대다. 돈이 곧 권력이고 삶의 질을 결정한다. 또한 과학기술(특히 전자․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침해 불가능한 기본권(생명, 자유, 재산)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개인의 공간마저 차별적으로 주어지거나, 아예 사라진 시대다.



무엇보다도 현대는 자유의 본질이 돈(자본)과 그것으로 구축된 체제(자본주의)에서 나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시대다. 심지어 민주적 선거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해도, 거대 관료제와 허용된 폭력인 공권력과 여론을 지배하는 대중매체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들을 움직이려면 어마어마한 돈이 든다. 기득권의 힘이 돈(자본)과 시장경제를 틀어쥐고 있는 것에서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보야, 경제가 문제야’가 아니라 ‘바보야, 기득권이 문제야’가 작금의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모토고,그것이 사회경제적 평등에서 출발하는 민주주의 본질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이 땅의 기득권들이 몸을 바짝 낮추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란 혁명에 버금가는 국민적 분노를 그들의 기득권을 지킬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다. 시간을 끌 수 있는, 그래서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분노의 온도가 떨어지게 만들 수 있는 그런 것으로 명박산성을 방불케 하는 바리게이트를 쳐야 한다. 단기적 결과를 만들어내는 행동이 아닌 장기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인식을 제압할 수 있어야 하고, 이는 정치적 의제설정이 다른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그래서 나온 것이 ‘세월호 참사의 책임은 대통령과 정부, 여야 모두에게 있기 때문에 정치적 이용은 안 된다’라는 ‘세월호 프레임’이다. 정부와 대중매체가 전국적인 추모열기를 띠우면서, 너무나 넘쳐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반성적 고찰들을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와중에 가장 정치적인 사건인 세월호 참사는 정치를 넘어 국가적인 아젠다로 넘어갔다.



세월호 참사의 기원과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대중매체들이 얼마나 많은 오보를 쏟아냈는지, 얼마나 다층적인 해결이 요구되는지, 범국가적 차원의 진상규명이 아니면 밝힐 수 없는 것들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쌓여갔지만, 정치적 이용을 하지 말라는 ‘세월호 프레임’ 때문에 세월호 특별법 제정이 여야의 손을 떠나, 유족이란 이름으로 모두가 요구하기 때문에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지독한 모순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기득권들이 바싹 숙였던 몸을 조금씩 일으키며 대역전을 이루어냈다. 4.19혁명 같은 것이, 서울의 봄 같은 것이, 6.10항쟁 같은 것이 열병을 앓듯 지나갔고, 남은 것이란 최종 책임을 져야 하는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설정한 가이드라인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3차 합의안이다. ‘세월호 프레임’은 제 역할을 다한 채, 제1야당을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든 것을 덤으로 해서, 세월호 유족의 대리기사 폭행만 남겨놓았다.



이 땅의 기득권이 독점하고 있는 정치적 프레임의 전형이 ‘세월호 프레임’임을 깨달을 때, 기득권이 지니고 있는 힘의 크기를 정확히 이해할 때,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사회경제적 평등이 일정 수준 이상까지 보장돼야 가능하다는 것을 뼛속까지 체험했을 때,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정치적 힘으로 표출하고 구체화할 수 있을 때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시작으로 그 다음의 것들이 가능하다.





필자가 유병언의 죽음이 정치적이라고 한 것처럼, 세월호 참사가 가장 정치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정치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기득권에 의해 ‘세월호 프레임’이 설정되기 전에 세월호 참사에서 그나마 자유로운 야당에게 힘을 실어줘야 했다. 최선만 주장하다 보면ㅡ주장하도록  분위기가 조성되면ㅡ최악으로 떨어지기 일쑤다. 최대를 요구하는 비기득권과 최소를 주장하는 기득권의 힘의 차이가 뚜렷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차선을 찾는 것(정치)이 비기득권이 기득권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인데, 이제는 그것마저 불가능해졌다. 필자가 ‘진보세력의 몰락과 부활을 위해’라는 연재를 시작한 것도 이제는 무의미해졌다. 세월호 유족을 비롯해 자신이 비기득권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모두가 또다시 참패했다. 직접민주주의와 폭력적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에서, 향후 2년 동안 선거마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사이버 망명을 넘어 현실적 망명을 얘기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 지랄 같은 세상, 쌓이고 축적돼 돌처럼 단단해진 기득권의 벽을 넘기가 이렇게도 힘들어서야, 대체 어디에서부터 저항과 투쟁 및 비판의 에너지를 끌어온단 말인가? 죽은 아이들이 떠올라 미쳐버리겠다. 1박2일의 도보행진을 한 단원고 생존학생들이 떠올라 고개도 들지 못하겠다. 처음부터 함정에 빠져버린 세월호 유족들이 불쌍해서 도무지 잠을 청할 수 없다. 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고, 보수우파의 가면을 쓴 기득권이 이번에도 완승했다. 


                                                                                                 사진 출서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