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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변호인>의 첫 자막이 현 시대의 야만을 말한다

 

 

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그를 바보라고 불렀다, 다른 말로는 그의 일생을 표현할 수 없어서. 영화 <변호인>은 노무현이라는 사람의 ‘거대한 전환’에 관한 짧고 투박한 이야기다. 국가의 폭력과 불의를 압축하는 사건과 마주쳤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던 속물 변호사의 위대한 변화에 관한 이야기다. 3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되풀이되는 국가의 폭력과 불의에 저항해야 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영화의 완성도와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반감, 문재인 의원을 중심으로 한 참여정부 인사들의 정치적 부활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변호인>을 평가절하 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변호사 시절의 노무현을 일방적으로 미화했다며 영화의 가치를 폄하할 수도 있다. 러닝타임에 얽매여 서둘러 끝낸 결말이 <죽은 시인의 사회>의 표절이 아니냐고 비난할 수도 있다. 

 

 

모든 것에는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ㅡ예고편에서 캡처  

 

 

영화적으로 볼 때, 프란시스 코풀라 감독의 <대부> 시리즈 1편과 2편처럼 전반부에는 속물 변호사 노무현의 성공과 야만적 국가의 폭력을 교차하는 방식으로 다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국가의 야만적 폭력에 마주쳐 현실에 눈 뜨는 중반부에는 인권변호사 노무현과 압도적 힘을 가진 국가가 공작을 벌여 변호사 자격을 박탈하는 과정이 교차 편집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그러나 <변호인>에는 국민의 자유와 삶의 질을 보장해야 하는 국가(정부)가 권력을 사유화해 국민을 사지로 내모는 압도적인 폭력에 대한 고발과, 깨어나는 시민으로서의 저항의 역사가 들어 있다. 정권의 안위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조작됐고, 그때마다 얼마나 심한 고문이 자행됐으며, 얼마나 많은 국민이 희생됐는지, 독재정권의 악마성이 들어 있다. 

 

 

<변호인>에는 돈을 잘 벌던 변호사가 그때까지 이룬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부와 권력, 기회의 독점에 따른 극도의 불평등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파괴하는 현 대한민국에 대한 정치적 성찰이 들어 있다. 왜 이 시대에 노무현 같은 바보가 필요한지, 그것도 여러 명이 필요한지 이 시대의 절박한 요구가 들어 있다.

   

 

예고편에서 캡처

 

 

나 아렌트의 말처럼 국가의 폭력이 “착취와 억압조차 사회가 돌아가게 만들고 나름의 질서를 확립”시키는 사건에 직면했을 때, 변호사 노무현은 현실을 직시했으며 분노했고 저항했다. 그는 정의의 담지자인 법의 언어로 국가의 폭력에 맞섰으나, 자신의 의뢰인을 지켜내지 못했고 변호사 자격마저 박탈당했다.

 

 

영화의 끝에선 작은 희망의 불씨를 볼 수 있었지만, 국가의 폭력이 무력해졌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일어선 변호사들이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과 함께 한다고 해서 국가의 폭력이 사라진다는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았고, 정치적 해석도 끝까지 피해갔다.

 

 

어쩌면 제작진과 관계자들은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을 믿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전반부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함으로써 변호사 노무현의 변화에 무게를 실어주는 방식이 다소 거칠고 설득력이 떨어졌지만, 직선으로 부딪치는 후반부의 노무현이 그 시절의 절박함을 이 시대의 경험들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예고편에서 캡처

 

 

이처럼 <변호인>은 아직도 서슬이 퍼런, 아니 최근에 들어서는 퍼렇다 못해 이글거리는 국가의 폭력이 두려워 자기검열의 흔적ㅡ영화에서 편집돼 사라진 부분들ㅡ이 곳곳에 묻어나는 시대의 아픔이 반영된 영화다. 그 증거는 영화의 맨 처음에 나오고 이것 때문에 필자는 영화를 보는 내내 목에 걸린 국가의 폭력이라는 가시에 불편함을 금할 수 없었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그 첫 번째 화면에 ‘실제 인물에서 모티브를 얻었지만 내용은 허구’라는 자막은 <변호인>에 가해졌을 유무형의 정치적 압박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사상 최고의 속도로 흥행기록을 가라치우고 있는 <변호인>의 흥행몰이를 외면하거나, ‘한국영화 전성시대’나 ‘2,000만 배우 송강호’로 평가절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영화 <변호인>도, 교묘한 방식의 압박과 회유에 시달렸을 제작진도, 인권변호사 노무현을 잊지 못해 상영관을 찾은 관객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국가 폭력의 희생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영화를 시작하는 한 줄의 자막이 보여주고 있다. 같은 이유로 해서 영화의 엔딩에 실제의 사건이 어떤 결말로 이어졌는지 자막처리를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예고편에서 캡처

 

 

영화 <변호인>이 진정으로 말하는 것은 ‘이 영화는 허구’라는 안전장치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우리네 현실의 팍팍함이다. 법정의 노무현은 시리도록 아려서 꽃처럼 아름다운 인물이었을지언정 우리네 삶은 여전히 국가의 폭력에 둘러쌓여 있다. 영화는 이것을 말해주려 했다. 달라진 것은 보다 세련되고 민주적 절차를 이용하는 국가 폭력의 진화 뿐이다.   

 

일각에서 말하는 ‘성공한 법정영화’라는 평가는 <변호인>의 가치를 최대한으로 축소시키는 의도적인 폄하다. 이는 마치 <화려한 휴가>를 시대에 휩쓸려버린 사랑이야기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또는 <부러진 화살>을 어느 또라이 교수의 법정투쟁기로 제한하는 것이다.   

 

 

<변호인>은 인간 노무현에 대한 예찬이 아니다. <변호인>은 영화라는 매체를 빌려 국가의 폭력을 고발한 직선적인 영화다. 그래서 사악한 폭력의 으뜸이자 절대악이었던 나치에 대한 뼈저린 후회와 뒤늦은 성찰에서 나온 명제, ‘처음에 저항하라, 그리고 결말을 고려하라’라는 말을 <변호인>에 그대로 따온다면 ‘첫 화면의 자막을 기억하라, 그리고 마지막 장면과 비교하라’라 말할 수 있으리라.

 

 

많은 부분이 편집됐거나, 아니면 잔혹한 실화를 모두 담아낼 수 없어서 러닝타임이 턱없이 부족했던 <변호인>의 흥행이 어디까지 이이질지 알 수 없지만 이것 하나만은 잊지 마시라, 국가의 폭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시대는 지금 깨어있는 시민들의 연대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