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받는 자들은 좋은 행동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며, 희생자가 되는 것이 권리를 담보하는 것도 아니다.

 

                                                                               ㅡ 필립스, 키이스 포크의 《시티즌십》에서 재인용

 

 

필자는 많은 글에서 밝혔듯이 진보적 자유주의자입니다. 정치·사회·문화적으로는 성인남성 위주의 권리와 법에 따른 의무를 중시했던 고전적 자유주의와, 민족과 국가를 중시했던 근대적 자유주의가 아닌, 페미니스트들의 위대한 노력으로 소수자 배려와 상호인정의 공감 능력, 그에 따른 연대성과 자발적인 책무 개념이 풍성해진 현대적 자유주의를 추구합니다. 경제적으로는 물질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절대평등의 구좌파보다는 개인의 욕구와 선호에 따른 정의로운 분배와 생태·환경·삶의 질 등을 중시하는 신좌파의 급진적이면서도 공정한 진보를 추구합니다.

 

 

 

 

다시 말해 2008년의 미 소고기 수입 전면개방 반대 촛불집회와 2016~2017년의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와 상당 부분 겹치는 '노무현의 진보적 자유주의'를 삶과 정치의 모토로 삼고 있습니다(안철수는 진보적 자유주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새정치를 포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무지몽매함을 드러냈었다). 제가 문재인을 지지하는 것도, 유시민을 좋아하는 것도 이 때문이며, 신좌파를 제대로 계승하지 못해 갈수록 몰락하는 진보정치가, 노무현의 참여정부 동안 그랬던 것처럼 문재인 정부 동안 화려하게 부활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정의당을 지지했던 것입니다(구좌파적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문재인 후보가 노무현처럼 화려한 토론능력을 갖추지 못했지만, 민주주의 지도자의 최고덕목인 듣는 귀를 가졌으며, 그것을 통해 당면한 과제를 임기응변이 아닌 원칙적이고 투명한 차원에서 해결하는 능력을 가졌기에 그를 지지합니다. 조중동의 악질적인 프레임 때문에 반문정서의 핵심(말을 잘 바꿔 신뢰할 수 없는 정치인이라는 것)으로 뒤집혀졌지만, 임기응변적 거짓말을 하느니 차라리 진실을 말하고 욕을 먹겠다는 문재인 특유의 '신뢰의 리더십'은 바로 여기서 나옵니다.  

 

 

진보정당들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유시민의 자유주의적 성향도 노무현보다 더 좌측(경제)에 자리한 진보적 성향과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에 좋아합니다.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현대국가를 이해하려면 무조건 참조해야 하는 미셀 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을 인용하지 않은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에는 많이 실망했지만, '썰전'과 강연 등을 통해 진보적 자유주의를 멋드러지게 풀어내는 모습에서 노무현의 정신을 떠올리곤 합니다. 

 

 

유시민이 문재인을 지지하면서도 정의당에 당적을 두고 있는 것(최근에 당적을 정리했다)도 진보적 자유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정의당 당원이 아니지만 진보정당의 부활을 간절하게 희망하기 때문에 정의당을 지지합니다. 아니, 지지했습니다. 마르크스에서 연원하는 구좌파적 노동운동에 지나치게 경도됐으며, 미국과 유럽의 차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기본소득이 만능인줄 아는 심상정(이재명의 한계이기도 하다)이 시청료 기생충 KBS 주최의 토론에서 문재인의 인격까지 저격하는 막말을 쏟아내기 전까지는 그러했습니다.

 

 

 

 

메갈당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심상정이, 여성을 비하한 홍준표를 공격하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문재인의 복지청책 후퇴(서울대의 팩트체크선터에 따르면 심상정의 주장이 대체로 거짓이라고 나왔고, 문재인의 답변은 진실이라고 나왔다. 유승민이 문재인을 공겨하며 주장했던 국민연금과 주적 발언도 거짓으로 나왔고, 문재인의 답변은 진실로 나왔다)를 정제된 언어로 공격하며 증세 논의로 이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문재인에게 '믿지 못할 정치인'이라며 조중동 프레임을 들이댄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정의당에 당비를 꼬박꼬박 내고있는 당원인 제 친구들도 탈당하겠다고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습니다. 

 

 

1차 토론으로 상당히 고무된 심상정은, 문재인을 공격하는 것으로 자신의 선명성을 부각하면 지지율이 오르고, 그것이 정의당의 부활로 이어질 것이라 판단한 것 같지만, 과거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그런 성찰로는 정의당과 진보정치를 죽일 뿐입니다. 촛불집회의 시대정신에서 '노동의 신성함'을 추출했다면 그것은 마르크스적 구좌파다운 해석이겠지만, 시민주권 행동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고 '노동의 종말'이 언급되는 작금의 현실에서는 '노동'이 대표하는 상징성과 구체적인 표가 너무나 모호하고 한정적입니다.

 

 

미래학자들이 초인공지능과 나노기술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이 본궤도에 오르면, 마르크스가 추상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구체적인 내용과 시기는 일체 언급할 수 없었던 '노동생산성'과 '자본 축적'이 최고조에 이르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내부로부터 무너지는 않는 대신) 기본소득이 도입될 것이라는 희망사항에 빠지면 진보정치는 고사하고 맙니다. 경제학은 물론 과학기술, 특히 인공지능의 핵심인 반도체(저장능력)와 나노·로봇·생명공학 등에 대한 현장의 이해가 부족한 미래학자(특히 레이 커즈와일 같은 특이점주의자들)들의 주장을 믿는다는 것은 진보정치인으로써는 자살행위에 다름아닙니다. 

 

 

현재의 4차 산업혁명 붐은 일종의 마케팅으로 그 분야에 종사하는 자들이 대규모 연구자금을 끌어모으기 위해 암묵적인 담합에 이른 지적사기에 가깝습니다. 이들의 말을 믿고 초고율의 누진세가 선행되지 않으면 절대 성공할 수 없는 기본소득에 함몰되면 진보정치가 설 수 있는 땅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심상정이 명심해야 할 것은 마르크스에서 자유롭지 못한 보수적이며 엘리트주의적인 구좌파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것이지, 도를 넘은 언어로 문재인의 인격을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 문재인이 개혁시킨 현재의 민주당이 정의당보다 진보적 가치의 실현에 적합하지, 자신의 정체성을 구좌파적 '노동'에 집중시키는 현재의 정의당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성인남성 위주로 이루어진 모든 정치철학에 도전한 페미니스트의 활약상이 전무하다시피했고, 박정희식 개발독재가 한국적 신자유주의로 고착화된 특수성 때문에 마르크스적 구좌파에 경도된 진보정치의 역사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민주정부 10년 동안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면 답은 없습니다.

 

 

심상정과 정의당은 신좌파의 짧은 성공(선진산업국가들의 기득권과 권위적인 기성세대를 저격했던 68혁명)과 기나긴 좌절(참여민주주의를 구체화하지 못한 것과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급진적 폭력성에 빠져 고사된 것)에서 기초를 다졌으며, 인권·사회·페미니즘·반전·환경운동 등으로 발전한 진보적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가 높아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젊은피의 수혈이 쉽지 않을 것이며, 대권이나 연정을 주도할 정당으로 발전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문재인 후보가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며 파격적인 양성평등 공약(문재인의 공약 중 최고!)을 발표한 것에서 보듯, 현재의 민주당은 노무현 대통령이 그토록 꿈꾸었던 진보적 자유주의가 상당히 구현된 21세기적 정당으로 변신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정의당을 지지할 이유가 그만큼 사라진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구좌파적 성향이 강한 이재명이 민주당 대선후보로써 선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래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번 글을 늙은도령이란 한 명의 주장에 불과하다고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세계화가 가장 많이 진행된 미국과 유럽은 물론 많은 나라에서 진보적 자유주의(와 촛불집회)에 대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는 점에서 심상정과 정의당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합니다. 정의당의 목표가 심상정의 대선 완주인지, 아니면 그것을 발판으로 정의당의 부활에 성공하고 민주당과의 연정을 꿈꾸는 것인지 정확한 현실판단이 선행돼야 할 것 같습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사람소리 2017.04.22 06:36

    베를린 아카마 호텔 호스텔 저렴하게 예약하는 방법을 알고 싶어요 ㅠㅠ 그래서 따라 들어왔다가 웬 헛소리만 읽고. 바빠요 ㅠㅠ

  2. 수원 2017.04.22 10:55

    윗 댓글이 너무해서 남겨요. 흥미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3. 김준호 2017.04.22 11:44

    진심으로 동의합니다.

    • 늙은도령 2017.04.22 18:18 신고

      문재인과 심상정이 동시에 잘돼야 하는데... 그래야 진보적 가치가 더욱 많이 실현될 수 있는데... 심상정이 욕심이 생겼던 모양입니다.

  4. 애효 2017.04.22 22:16

    이제 마지막입니다 마지막을 화려하게 불태우고 우린 역사속으로 퇴장 하는것이 운명입니다.

  5. 송인철 2017.04.23 00:51

    동감합니다
    정의당 다원입니다
    지난해 쉬지도 못하고 토요일이면 광화문으로 작은 촛불하나들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목청것 외치면서
    한철 겨울을 보냈습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꽃피는 봄이되었습니다
    바귀어야합니다
    마음속으로는 정의당과 민주당이 협치하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정의당으로서는 세상을 바꾸기엔 누군가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전 그부분이 민주당이라고 생각하고
    민주당 또한 정의당의 민족적 당위성을 지지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으로는 내가 선택한 주권의 한표는
    아니 내가 아는 내가 만나는 모든이에게 사표를 만들지말고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의
    선택을 위해 내가 던지 것이 사표되지 않아야된다고 말하고있습니다
    정의당은 대의를 위해
    자기의주장만 앞세워 정권교체의 반하는 결과를 만들지말자고
    말하고싶습니다
    다시한번 선생님의말씀에 동의하면서
    저의 이런 의겨니 나쁜것인지 조언있길바람니다
    늙은 아이입니다

    • 늙은도령 2017.04.23 01:52 신고

      님 같은 분들이 많아져야 정의당이 민주당과 당대 당 연정이 가능할 만큼 성장할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조차 마르크스적 구좌파는 한계에 처했습니다.
      마르크스적 구좌파는 너무 물질적인 면, 즉 경제의 평등에 집착하느라 정의와 시민권 같은 비물질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가치에 적대적이었습니다.
      정보통신으로 대표되는 과학기술의 발달은 공동체의 규모를 1인 가구까지 줄여갔지만, 대신 공감이란 연대성을 구축할 수 있는 다양성의 평등과 협치, 공감의 네트워크를 넓혀감으로써 새로운 민주주의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헌데 구좌파는 목표하는 것을 이루는 과정에서 집단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대동단결을 중시하기 때문에 숨막히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내부에서의 민주주의가 죽어가는 것이지요.
      개인과 집단 간의 적절한 균형과 긴장이 있을 때 권리와 책임이 함께할 수 있는데, 구좌파는 전위나 지도자를 무조건 따라야 하는 권위주의에 의해 돌아갑니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탈물질주의적인 청춘으로부터 외면을 받게 됩니다.
      여기에 구좌파가 대표하는 산업노동자의 수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시민이 대신 그 자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노동을 외치면 시민주권이 빠져나갑니다.
      정의당이 대표할 수 있는 구성원이 갈수록 줄어드는 결과는 이렇게해서 발생합니다.
      정의당이 구좌파를 넘어 신좌파를 연구하고 문호를 개방하지 않는 한 갈수록 축소될 것입니다.
      결과의 평등이 절대적 정의가 아닙니다.
      마르크스가 예언한 자유의 왕국은 그 실체가 너무 모호하고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종교적 교의는 현재의 세상에선 통하지 않습니다.
      심상정과 노회찬처럼 구좌파의 노동운동에 경도된 사람들이 2선으로 후퇴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의당은 살아남습니다.
      민주당 정부 때 세를 넓혀야 하고, 그래야 유럽의 노동당처럼 주요정당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의 오류를, 추상의 총체적 문제를 인정해야 합니다.
      현실에 발을 딛지 않은 채 유토피아를 아무리 떠들어도 그것에 귀를 기울일 청춘은 더 이상 없습니다.



세월호참사는 국가의 존재 이유만 묻는 것이 아니다. 세월호참사는 정부로 대표되는 국가의 역할과 통치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도 묻는 것이다. 그것이 최대국가이던 최소국가이던, 최대 통치이던 최소 통치이던, 정부가 자유와 사회에 대한 필요악이던,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차악의 선택이던, 그런 것들에 대해서만 묻는 것이 아니다. 





세월호참사는 국가의 역할과 통치자의 존재 이유, 즉 국가와 통치의 목적과 필요성에 대해 묻는 미증유의 참극이다. 달리 말하면 5년 동안 국가를 대표하고 국민을 통치하는 주체로서의 정부의 존재 이유와 역할에 대해 묻는 것이다. 절대군주제나 권위주의, 파시즘적 전체주의와 국가사회주의보다 우월하다고 확인된 민주적 통치의 목적과 존재 이유에 대해 묻는 것이다.

                              

 

세월호참사는 지난 40년 동안 일방적인 세계화를 추진한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의 추악함과 끝없는 탐욕, 기득권의 직무유기에 대해 묻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곳에 침투해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정당성에 대해 묻는 것이다. 경제가 정치를 대체해버린 자본의 논리가 민주주의의 가치마저 잠식하는 것에 대해 묻는 것이다. 

 




세월호참사는 수구 기득권의 먹이사슬이 피지도 못한 아이들의 생명까지 앗아가는 것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는지에 대해 묻는 것이다. 어떤 음모론들이 난무한다 해도 세월호참사는 갈수록 벌어지는 불평등이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을 넘어선 것에 대해, 국가의 존재근거이자 통치의 나침판인 국가이성과 통치이성이 더 이상 유효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현대의 민주주의란, 미셀 푸코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증명했듯, “피통치자들의 합리성이 곧 통치의 합리성에서 규칙화의 원리로 작동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최고지도자의 통치행위가 피통치자의 합리적인 의지와 뜻에서 벗어나지 않고, 예측가능한 수준에서 투명하게 진행돼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 조상들의 위대한 성찰,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격언과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라는 현대민주주의의 근간이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이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면, 박근혜가 모든 방송이 생중계하는 가운데 '악어의 눈물'을 흘리며,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책임자 처벌을 위한 특단의 대처라며 내놓은 '해경 해체'에 이의 있다고 절규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특권화된 기득권의 암묵적인 합의이자, 사상 유례가 없는 정치적 꼼수를 거둬들이고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대책을 내놓으라는 국민과 유족들의 요구이자 명령이다.

 

 

작년에 작고한 울리히 벡이 말한 대로,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시장경제가 모든 개인들에게 세상 모든 곳에 널려 있는 ‘위험을 등에 지고 사는 삶'을 강요하지 않았다라고 해도, 현재와 같은 국민국가의 탄생은 전체 인구의 안전을 담보하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미셀 푸코의 《안전, 인구, 영토》를 참조). 전체 인구는 배타적 영토 안에 사는 개인들의 총합이기 때문에 국민 한 명 한 명의 안전보장이 곧 통치의 목적이자 역할이며 존재의 근거다.                      





따라서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참사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그 어떤 특단의 조치라도 민주적이고 정치적인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이 사상 최악의 인재이던, 막을 수 없었던 천재이던 사고는 일어나기 마련이지만, 그 피해를 최소화하지도 못했고, 그런 의지도 보여주지 못했던 정부가 사후대처에 있어서도 실패할 경우 피통치자들이 통치자에 주었던 정치적 정당성과 통치의 정통성은 유효할 수 없다.

 

 

박근혜 정부는 무려 304명이나 되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했다. 이것만으로도 탄핵대상이고, 통치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마당에, 무능한 것이 만천하에 알려진 정홍원 총리를 재임명한 것도 모자라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수습을 담당해야 할 2기 내각의 후보자들이 온갖 추문에 휩싸여 있는 자들이라는 것은 어떤 이유와 정치적 권한을 내세워도 정당화될 수 없다. 

 

 



세월호참사는 이념의 문제도 아니고, 기존 정당이나 기득권 집단에 모든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세월호참사는 ‘비즈니스 프렌들리’와 ‘줄푸세’로 대표되는 이명박근혜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합리성과 정당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며, 그 밑바탕에 깔려있는 자본의 탐욕과 정치의 부재에 대한 민심의 옐로우카드다. 그것도 국정원의 대선개입이란 불법과 개표조작의 증거들 때문에 한 장은 이미 주어진 상태다.

 

 

야당과 국민이 지닌 거의 유일한 통치의 견제장치인 청문회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수석비서관회의에서만 소통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통치방식은 나머지 한 장의 옐로카드까지 합쳐 레드카드로 바뀔 뿐이다. 세월호참사를 이용해 자신의 통치기반을 재정립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늘의 뜻이라 하는 민심의 바다를 건널 수 없다. 역사는 국민에 반하는 지도자의 최후가 어떤지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세월호참사를 더 이상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지 말라. 국민이 꺼내든 옐로카드는 대통령만이 아니라 집권세력 전체에 해당됨을 새누리당과 보수 언론, 제도권 방송들도 명심해야 한다. 세월호 정국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루라도 빨리 세월호를 인양해 실체적 진실을 투명하게 밝히는 것 뿐이며, 그에 따른 책임자 처벌과 재발방지가 이루어질 때만 가능함을 박근혜와 새누리당은 명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안철수와 김한길 공동대표와 박영선 원내대표가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하겠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이 국정조사에서 보여준 것이란 박근혜 정부의 사후대처를 비난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지, 침몰 원인의 구조적인 문제와 정부의 대처에서 드러나는 은폐의 시도들에는 접근조자 못하고 있다. 하긴 지금의 새정치민주연합은 새누리당2중대에 불과하니 무엇인들 제대로 하겠느냐만은.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P.S. 이 글에 첨부한 사진들(위의 4장)은 오늘 단원고에 가서 아이들이 공부했던 교실에서 찍은 것입니다. 책상 하나하나마다 친구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저승에서 이승까지 달려온 아이들의 영혼이 머물고 있는 듯해 가슴이 미어질듯 먹먹했습니다. 칠판을 비롯해 교실과 복도의 곳곳에 적혀있는 수많은 얘기들과 완성되지 못한 기억들, 간절한 바람들이 소중한 추억들 속에서 잊지 말아 달라고, 진상규명을 꼭 해달라고 간절하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1. 참교육 2016.01.13 07:27 신고

    세월호 이야기만 나오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참으로 부끄롭고 미안합니다. 이런나라에 산다는게 부끄럽습니다. 페북으로 퍼갑니다. 좋은 글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2. 耽讀 2016.01.13 07:42 신고

    304명을 지켜내지 못한 것도 탄핵대상이지만,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철저히 가로막는 것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김한길-안철수 체제는 이를 밝힐 능력도 마음도 없었습니다. 무능을 넘어 무책함 자들이었습니다.
    세월호 거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반드시 밝혀야 합니다.

    • 늙은도령 2016.01.13 15:29 신고

      인양작업 자체를 유가족에게 오픈하지 않고 있습니다.
      팽목차도에서 24시간 망원경으로 살펴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3. 공수래공수거 2016.01.13 08:48 신고

    세월호,단원고 영상만 보아도 눈물이 나오려 합니다
    어제 졸업식 경향이 찍은 영상은 정말 슬프게 하는군요
    나쁜 나라입니다

  4. 바람 언덕 2016.01.13 12:16 신고

    이 문제만 생각하면 이 나라의 끝이 보입니다.
    세상 어디에 이런 나라가 있을까 하는 생각 뿐입니다.
    끝까지, 기억해서,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어른들의 의무이자 사명입니다.

    • 늙은도령 2016.01.13 15:27 신고

      이런 추악한 정부는 다시 없습니다.
      유가족들은 당시의 당대표와 원내대표에게 불만이 많았습니다.
      결국은 그들의 여당을 위한 정치노름만 했던 것이지요.
      국민의당에 다 몰려간 자들 말입니다.

  5. 냥이사랑 2016.01.13 14:12

    세월호 유가족의 심정을 너무나 잘 알지요!저 역시 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이라...
    사는내내 명치끝이 아프고 활짝 웃어보지도 못하는 심정을ㅠㅠ 오늘 박그네 담화 듣자니 홧병이 확 도집디다.어떻게 모든 인식이 저럴 수 있을까 싶었답니다 총선 정신 바짝 차려야겠습니다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 늙은도령 2016.01.13 15:26 신고

      감사합니다.
      어제 아이들의 교실에 앉아 그들의 모습을 떠올려봤습니다.
      참으로 슬프더라고요.
      미안햇고...
      유가족들은 세월호 인양작업을 참관도 하지 못하게 해수부가 방해하고 있어 34시간 망을 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고 하네요.
      죽일 놈의 정부입니다.

  6. 요원009 2016.01.13 17:06 신고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하겠다는 것"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대책.

    다 나왔는데요?

    무리한 과적으로 배가 기울면서 사고가 났고, 책임자 200여명이 처벌 받았고, 재발 방지 대책도 나왔습니다.

    물론, 공무원들의 현실감 떨어지는 재발 방지 대책은 당연히 보강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는데, 마치 하나도 진행되지 않았다는 뉘앙스로 글을 쓰시는건 잘못된거 아닌가요?



    이런 문단은,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하겠다는 것".
    "세월호참사의 후 벌어진 솜방망이 처벌과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한 재발방지"라고 표현하는게 더 알맞지 않겠습니까?

    ㅏ 다르고 ㅓ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 늙은도령 2016.01.13 17:16 신고

      세월호 출발 당시부터, 지금까지 유족들이 직접 확인한 것들은 다릅니다.
      또한 세월호도 인양되지 않았고요.
      유족들이 현장에 들어갈 수 없게 해수부가 막고 있고, 인양을 핑계로 진실규명을 하염없이 미루고 있습니다.
      제대로 밝혀진 것이 있습니까?
      유병언과 관련된 자들이 거의 다 풀려났고, 해경과 구원파도 마찬가지입니다.
      덕분에 김기춘은 무시할 수 있었고, 해운조합의 퇴직 공무원들은 면책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뭐가 해결됐다는 것입니까?
      온갖 것들을 은폐하기에만 급급한데...
      눈이 있으면 더욱 찾아보시고, 발이 있으면 유족들을 만나 진실에 대해 들어보십시오.
      알고자 하면 재판 결과들을 확인하고, 해경 관계자들과 세월호특위를 무력화시킨 자들이 어떤 영전을 했고, 국회 진출도 가능하게 됐는지 살펴보시고.
      만일 이런 노력도 없이 댓글을 단다면 차단하겠습니다.

 

 

한 사람 이상이, 의심할 바 없이 나처럼, 더 이상 얼굴을 가지지 않기 위해서 쓴다.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말라. 나에게 거기에 그렇게 머물러 있으라고 요구하지도 말라. 이것이 나의 도덕이다. 이것이 내 신분증명서의 원칙이다. 쓴다는 것이 필요할 때, 이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ㅡ 미셀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에서 인용  

 

  

글을 쓴다는 것은 '더 이상 얼굴을 가지지 않기 위해서'라는 말에 담겨 있듯, 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서도 자유롭기 위해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에게 거기에 그렇게 머물러 있으라'는 요구에 굴하지 않고, 글을 써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진정으로 자유롭게 쓰기 위해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얼굴로 나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글로 나를 드러내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의 신분증명서가 글에 담겨있는 것, 그것이 글을 쓴다는 것에 담겨있는 나만의 의미다. 

 

 

 

 

내가 곧 글이고, 그럴 때만이 글 쓰는 사람은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글로서 모든 것을 말하고, 써야 할 필요를 느낄 때 쓰는 것,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반성적 성찰과 철학적 사유 속에서 침묵하는 것, 그것이 글 쓰는 사람이 가져야 할 덕목이자 존재에 대한 유일한 신분증명서여야 한다. 내가 아는 한 정치에 대한 접근이 이러했던 사람은 노무현이 유일하다, 행동하는 시민에 대한 김대중의 믿음이 그러했던 것처럼. 

 

 

'한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있고, 여러 사람을 한동안 속일 수 있어도,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없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문재인에 대한 노무현의 경험이 그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문재인을 친구로 두고 있는 노무현입니다' '나는 문재인의 친구입니다' 같은 말들은,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에 올랐으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문재인을 믿는데 보증수표 같은 역할을 해준다. 노무현이 문재인이고 문재인이 노무현이다.  

 

 

 

 

노무현에게도 여러 가지 부족했던 것이 있었던 것처럼 문재인에게도 여러 가지 부족한 것들이 있지만 그 이상의 장점이 있다. 정치가 최선을 찾을 수 없어서 차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최선의 가능성이 보이는 차선을 찾는 것이어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문재인에게 표를 주겠다. 문재인이 아니라면 노무현이 틀렸다는 뜻인데, 나는 그것에 추호도 동의할 수 없다. 국정원을 비롯해 이명박 정부의 사정기관들이 5년 내내 털어도 노무현은 깨끗했다. 그런 사람의 판단을 믿지 못한다면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인간은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존재라고 하지만, 더민주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열린우리당을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흔들고, 노무현을 탄핵으로 몰고갔으며, 끝내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죽음으로 내몬 상황과 너무나 비슷하다는 것은 몇 번의 검색만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때처럼 조중동을 필두로 한 모든 기득권 언론들이 문재인 죽이기에 나섰다, 그에게서 노무현의 향기가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부터.


***********


노통은 박정희를 큰 차이로 따돌리고 대통령 선호도에서 부동의 1위에 올랐고, 문프는 새로운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세계사적 전환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하루하루가 기적 같은 날들의 연속이지만, 문프와 김경수 후보를 흔드는 조중동의 발악과 광기는 여전합니다. 문프는 노통과 닮은 듯하면서도 다른 리더십을 구축했고, 노통의 마지막 비서관이었던 김경수 후보는 문프의 복심으로써 경남도지사에 도전장을 내밀었는데 조중동에게는 이것이 지옥의 현존과 같은 모양입니다.



천하의 사기꾼이자 정치브로커인 드루킹의 입을 빌려 김경수를 죽이려 하는 조중동의 발악과 광기가 그를 경남지사를 거쳐 차기주자로 성장하는데 최고의 자양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유시민 작가의 말처럼 우리가 꿈꾸는 노통의 복수란 문재인 정부의 성공이란 우화한 형태로 진행돼야 하듯이, 노통과 문프에 비견되는 공격을 받고 있는 김경수 후보도 조중동의 발악과 광기를 사뿐히 즈려밟고 가기를 바랍니다.



제가 글을 쓰는 이유는 지식을 나누기 위함이고 그럴 때만이 나라는 존재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지만, 노통과 문프에 이어 김경수 후보가 경남지사를 거쳐 차기 대통령에 오를 수 있다면 그것보다 기쁜 일은 없을 듯합니다. 그 다음은 차근차근 승리의 기록들을 쌓아가고 있는 촛불시민과 청춘들이 이끌어갈 것이기에 남북평화체제 구축과 공동 번영의 한반도를 꿈꾸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천일을 단()하고 만일을 연(鍊)해야 괜찮은 무사가 될 수 있다면, 차기주자로 성장할 김경수 후보가 그러할 것입니다. 조중동을 중심으로 한 기레기들의 공격에 많이 단단해졌다는 김경수 후보가 '진실의 힘은 세다, 강하다'고 말했던 노통의 신념을 되새기면서 '이겨야겠다. 반드시 이기겠다'고 다짐한 것에서 폭풍 성장하는 미래의 선두주자 김경수를 볼 수 있었습니다, 문재인처럼 김경수에게서도 노무현의 향기가 나기 시작했으므로.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12.25 09:14 신고

    물과 기름은 영원히 섞일수 없습니다
    한물에 담궈져 잇었을뿐입니다

    요번 기회에 제대로 걸러내졌으면 합니다

  2. 새노래 2015.12.26 02:48

    이번 총선부터 선거법부터 개정을 하든지 아니면 개표기 철저하게 감시부터 해야 할텐데 걱정입니다, 총선 승리에 이어 기필코 정권 재창출을 해야 합니다, 이나라가 더이상 병들어 회복이 불가능 하도록 병이 들었지만 .... 대수술을 해야 합니다, 뿌리부터 뽑아야 합니다, 더이상 부패하고 썩어서는 이나라에는 희망도 미래도 없습니다,

    • 늙은도령 2015.12.26 03:23 신고

      안철수 신당이 걱정인 이유 중 하나입니다.
      이것들이 새누리당과 전략적 제휴에 들어가면 부정선거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박근혜는 무슨 짓이라도 할 텐데, 분열된 야당의 힘이 그것을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독자분들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편지를 써서 병 속에 넣은 후 바다로 떠나보내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병 속에 편지를 넣은 주인공은 병이 어디로 갈지, 누구한테 갈지, 도중에 병이 깨져 사라지거나 영원히 바다를 떠돌지 알 수 없습니다. 미지의 누군가를 향해 말을 걸었지만, 운이 좋아야 병을 주운 사람이 편지를 읽을 수 있는 동시대의 사람일 수 있지, 반대의 경우라면 해독 불가능한 나만의 독백으로 그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병 속의 편지'를 통해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다룬 철학자이자 사회과자들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현재의 독일을 만들어낸 양대 학파 중 프랑크푸르트 학파(나머지 하나는 프라이부르크 학파로 신자유주의의 원형이자 질서자유주의 또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정립했다)의 1세대인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21세기 최고의 석학으로 꼽히는 영국의 지그문트 바우만입니다. 



유대인으로 히틀러의 나치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자 미국으로 망명한 아도르노는, 정착할 수 없는 미국사회의 방랑자이자 소외자로서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을 다룬 《미니마 모랄리아》를 통해, 90대 후반의 고령을 이끌고도 활발한 저작활동을 하고 있는 바우만은 근대이성의 산물인 현대성 대한 고찰로 유명한 《유동하는 공포》에서 '병 속의 편지'라는 비유를 통해 지식인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인류의 위대한 철학자들인 두 사람은 47세의 나이로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 발터 벤야민(필자가 아는 한 산문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는지 보여준 최고의 철학자이자 사회과학자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긴 좌우를 막론하고 20세기 말과 21세기의 철학자와 사회학자, 미학자, 정치학자들 중에 미셀 푸코와 발터 벤야민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보편적인 정의와 최선의 유토피아가 있다고 믿는 노엄 촘스키, 철저하게 약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본 하워드 진, 미국에서는 나오기 힘든 좌파지식이지만 미국 특유의 낙관론에 기대는 경향이 있는 리처드 도티, 존 롤스처럼 합리적 토론를 통해 민주적인 합의에 이르는 길을 탐구한 위르겐 하버마스 등은 벤야민이나 푸코에 인색하지만, 그들의 위대함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시련이 닥쳐도 결국에는 자유와 정의의 왕국이 도래할 것이란 '결과의 낙관론'을 믿는 사람들은 희망의 전도사로 최후의 승리를 주창하기 때문에 미셀 푸코와 발터 벤야민처럼 지금/현재의 삶을 중시하는, 그래서 비폭력적인 저항을 지지하는 진보좌파 지식인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은 저항과 투쟁을 반길 혁명가는 없기 때문입니다.  





석학들의 판단이야 어떻든, 이번 글에서는 90이 넘은 나이에도 열정적인 사회참여와 집필을 보여주고 있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의 도움을 받아 '병 속의 편지'가 지식인에 대해 지니는 알레고리(은유 또는 비유)를 다루고자 합니다. 영국이 배출한 최고이 석학 중 한 명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위대한 휴머니스트이자 정직한 철학자이며 불굴의 사회학자였던 마르크스와 아도르노, 브르디외를 인용하며, '병 속의 편지'에 담긴 지식인에 대한 비유에서 두 가지 추정을 제시합니다. 



(병 속에 담긴) 그 메시지가 종이에 써서 병에 넣어 띄워 보낼 만큼 가치가 있다는 추정. 그리고 그것이 발견되어 읽혀질 시점(비록 그 시점을 미리 확정할 수는 없지만)에 아직도 가치가 남아 있으리라는(발견자가 그것을 해독하고 연구, 이해, 적용하기만 한다면) 추정.



이런 두 가지 추정은 어떤 지식인이 자신의 사상에 대해 '들을 준비도 뜻도 없는 동시대 사람들과 말을 섞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을 때, 그래서 '정해지지 않는 미래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에게 메시지를 맡기는 일'이 낫다고 여겼을 때 가능합니다. 이는 어떤 지식인이, 특정할 수 없는 미래의 시공간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사상을 들어줄 것이며, 이해할 수 있으며, 연구하고 발전시켜 후대에 전해줄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라도 동시대의 사람들에게서 아무런 호응도 받지 못하고, 토론을 거쳐 인정받거나, 검증 절차를 거쳐 진리의 영역으로 들어서거나, 심지어는 맹렬한 반박이라도 받지 못하면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시대에 엄청난 핍박과 박해를 받은 위대한 마르크스가 "아무튼 나는 말했고, 나의 영혼은 구원받았다"고 말한 것처럼, 체념에 빠져 똑같이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물론 마르크스처럼 위대하고 방대한 추상을 펼칠 수 있는 지식인도 없겠지만, 전복적이라고 할만큼의 혁명적 변화가 없으면 공멸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재의 상황을 고려하면,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라 행동해야 할 때라는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민주적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고, 영국에서 마르크스주의자 제레미 코빈이 노동당 당수가 된 것에서 보듯 혁명의 기운은 전 세계적으로 분명하게 대두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병 속의 편지'는 영원한 가치를 믿는 사람, 보편적인 진리를 믿는 사람, 지금 진리를 찾고 가치를 지키려 애쓰게 만드는 우려가 계속되리라 의심하는 사람이 쓸 수 있는 편법이다. 그 병 속의 메시지는 좌절이란 일시적일 뿐임을, 그리고 희망은 계속될 수 있음을 입증하고, 가능성의 패배하지 않음과 그런 가능성을 가로막는 적들의 허약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바우만은 지식인의 역할이 치열한 비판정신을 잃지 않는 것에 있다는 아도르노의 성찰을 따라갔습니다.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살해 위협에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던 아도르노가 너무나 흥청망청이고 더없이 풍요롭고 지독히 이중적인 미국에서의 경험이 정신적 부적응에 가까웠던 것도 고려해야지만, 완벽하게 고립된 지식인이 이런 자세를 견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뻔뻔하고 파렴치할 정도의 표절이 넘처나고, 권력과 자본의 돈에 빌붙어 살며, 파벌을 만들어 그들만의 왕국을 구축하기에 바쁜 이 땅의 지식인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요. 



"모든 철학이 죽었다"는 비트켄슈타인의 절망적인 선언이 나왔던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철학과 사회학이 죽어버린 시대가, 신자유주의 통치술과 거대 미디어의 세상이자, 생각 자체가 사라진 채 끊임없이 이동하고 접속하며, 단 한 번의 클릭으로 자신의 과거를 삭제하고, 현재의 나를 끝없이 업그레이드하는 모발일기기의 특징으로 대변되는 시대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을 대량학살한 홀로코스트의 행정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가, 인류사의 최대 악으로 지탄받던 나치의 핵심인물 중 한 명이었던 아이히만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ㅡ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를 출간한 뒤, 좌우로부터 융단포격을 받았던 것을 떠올리면 동시대의 주류에서 벗어난 사상을 꿋꿋하게 밀고 나가는 것은 고립을 자처하는 어리석은 선택이자, 학문적으로 자살행위에 다름이 아닙니다(신자유주의의 특징 중 하나가 악의 평범함이다. 모든 분야에서 타락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좌우의 융단포격을 받은 한나 아렌트가 자신의 사상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것처럼, 그래서 그녀가

《인간의 조건》에서 지식인(모든 개인도 마찬가지이지만)에게 주어진 삶이 사막처럼 척박하고 황량해도 끝끝내 시작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비판이론을 업으로 삼고 있는 지식인이라면 '병 속의 편지' 같은 편법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부르디외가 《세계의 비참》의 추고에서 말한 것을 지식인(특히 철학과 사회학을 전공하는)이라면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사회적 세계를 연구하는 데 인생을 바칠 기회를 얻은 사람은, 세계의 미래가 걸려 있는 투쟁 앞에서 무관심하거나 중립적으로 있을 수 없다.         

 


부정적 세계화가 돈이 되는 지역들을 전 지구적 시장으로 끌어들여 뼈속까지 빨아먹고 있는 지금/현재, 돈이 되는 것은 모두 다 전문화돼 일반인들은 접근할 수도 없고, 전 지구적 지배계급과 거대 자본 및 초국적기업에 봉사하는 지식에는 국경이 없어졌습니다. 세계화의 주역들을 위해 치외법권적 지위를 누리며 계급화된 엘리트로 자리매김한 현대의 지식인들은 부정적 세계화를 위해 시민을 소비자로 변질시키는 상징제작자와 상징조작자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부정적 세계화의 정도가 심화된 대한민국에서는 족벌신문과 정권의 나팔수를 자처하는 방송들을 맴돌며 정치권만 기웃거리는 사이비 지식인들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영혼도 철학도 없는 그들은 오로지 돈과 권력만 쫓아 불나방 같은 행태를 서슴지 않습니다. 지식인의 업무가 현실비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과 권력의 맛에 길들여진 이들은 사실과 진실은 물론 진리와 공리마저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 가치와 진실 여부는 전혀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이 지식의 이름으로 홍수처럼 밀려오는 디지털 세상에서 지식인이 할 일이란 자신의 사상이 경고하는 미래상이 틀리기를 바라면서 부정적 세계화의 현실과 사회비판에 물러섬이 없어야 합니다. 성장과 개발이 불러온 현실이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비대칭적 종말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망가져 버렸지만, 모름지기 철학과 사회학을 업으로 삼고 있는 지식인이라면 실낱 같은 희망을 잉여에서 쓰레기로 버려지는 시대의 난민에게 제공하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박근혜 정부가 무서울 정도로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지금, 지식인이라면 지그문트 바우만이 《유동하는 공포》의 마지막에 했던 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사회경제적 평등과 돈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진보좌파의 가치가 민주주의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확고하게 믿는 지식인이라면 더욱더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정보와 지식이 오픈된 디지털세상이라고 해도 지식인이 해야 할 역할이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신자유주의의 천국인 미국과 영국에서 샌더스와 코빈이 각광받고 있다는 것은 대중들 사이에서도 거대한 전환에 대한 열망과 욕구가 용암을 내뿜고 있다는 뜻이기에, 이 땅의 지식인들도 다음과 같은 진단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목숨으로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부산대 교수의 죽음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됩니다.  



다가오는 세기는 궁극적인 재앙의 시대가 될 것이다. 아니면 지식인과 민중 사이에 새로운 협약이 이루어지는 시대가 될 것이다. 희망을 갖자. 이 두 개의 미래에 대해, 아직도 우리에게 선택의 기회가 남아 있으리라고.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9.16 08:42 신고

    돈보다 사람이 먼저다 라는 말에 저도 공감합니디다
    이 정권은 반대이기 때문에 싫어할수밖에 없습니다

    고현철 교수의 고귀한뜻도 지켜내야할 가치입니다

    • 늙은도령 2015.09.16 15:44 신고

      네, 지식인들이 제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금은 제 한몸 지키기에 급급합니다.

  2. 백순주 2015.09.17 09:14 신고

    '해독 불가능한 나만의 독백'을 하고 있었습니다. 너그러운 듯 다시한번 설명해 주는 배려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 쯤 됐다 싶어 답을 다그쳤습니다.
    저만 모르고 있었습니다.남들은 관심조차 없었다는 것을요.

    관심은 희생에서 비롯된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 늙은도령 2015.09.17 15:14 신고

      누구를 설득하려고 하면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요.
      하지만 꾸준히 얘기하다 보면 듣는 사람도 비슷한 얘기를 접할 때 자신도 모르게 님의 얘기를 떠올리게 되고, 그런 과정을 몇 번이나 거쳐야 변하기 시작합니다.
      설득이나, 설명이나, 진실과 진리로 가는 길은 오랜 고통이 따르는 힘든 일입니다.
      말을 잘 이해하는 사람도 만날 때가 있고, 아닐 때도 있습니다.
      화학실험에서 똑같은 조건으로 했는데 결과가 다르게 나올 때처럼요.

      관심은 희생이기도 하지만 노력이고 사랑입니다.
      노하우가 쌓일 거에요.
      그러면 설득력이 높아지고, 진심이 전달될 것입니다.
      art of love처럼요.

    • 백순주 2015.09.18 08:01 신고

      관심어린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쓰다보니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네요.
      이 말 뜻이 진심어린 말이었군요. 호호.

    • 늙은도령 2015.09.18 10:44 신고

      허허.. 그러네요.
      만일 상업광고가 사라진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수천 배는 좋아질 것입니다.
      우주적 차원으로 소비하는 사회는 광고로 움직이니까요.

      남을 설득한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따기 입니다.
      인간은 뇌의 구축이 거의 끝나는 16세 전후가 되면 설득당하지 않는 경우가 99.99%입니다.
      수많은 노인들이 박정희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박정희와 인생을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가능하면 진실에 가까운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은 말해주는 사람의 몫이 아니기에.



자살만 생각하던 필자가 ‘세상을 알고나 죽자’라는 심정으로 출발한 지난 10년 동안의 공부는 통치술로의 신자유주의로 압축된다. 정말로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지만, 그 모든 것들이 신자유주의 통치술로 귀결되는 것은 인류의 멸망을 피하려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산업화된 대학에 자리를 틀고 앉은 강단의 지식인들에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치열하게 공부했고, 그 과정에서 확인하고 깨우칠 수 있었던 것을 사회경제적 약자에게 나눠주고 싶었다. 의학이 도와줘 10년 이상을 더 살 수 있다면 몇 개의 지적공동체라도 이루어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는 작은 예들을 만들고 싶었다.



신자유주의에 관한 수백 권의 책을 읽는 동안 무엇인가 미진했던 부분을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을 비롯한 푸코의 강연 저작들을 통해 신자유주의를 경제적으로만 접근하면 안 된다는 사실에 눈을 떴다. 신자유주의는 국가를 다스리는 통치술이며,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문화가 강한 국가와 기업에서 최고의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한국과 일본, 독일의 기업들이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성공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최근에 읽은 조하나 보크만의 《신자유주의의 좌파적 기원》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정치경제적 변천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이 미국보다 더 신자유주의적 국가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박정희의 통치술에 신자유주의적 요소가 모두 포함돼 있었다는 것에서 기인함을 확신을 할 수 있었다.





조금은 지루했지만, 《신자유주의의 좌파적 기원》에서 신자유주의는 ‘경쟁적 시장, 더 작고 권위주의적인 국가, 경영진과 주주들이 통제하는 위계적 기업, 자본주의’를 열렬히 지지한다고 나온다. 필자도 이것에 동의한다. 여기에 무제한의 사유재산과 독재자, 기업의 사적독점을 중심으로 한 정경유착이 더해지면 신자유주의는 완성된다.



우리는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신자유주의가 최단기간 내에 강제적으로 이식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필자가 공부한 바로는 박정희가 한국적 통치술로의 신자유주의의 원형을 제공했고, 줄푸세의 박근혜에 이르렀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도 신고전파 경제학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이명박근혜가 신자유주의를 밀어붙일 수 있는데 일정 수준의 도움을 준 결과를 초래했다(이는 당시의 사정을 고려할 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현대의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공통점인 신고전파 경제학에서 경제민주주의와 노동자의 권리를 최소화시키거나 말살시킨 형태다. 따라서 노조가 살길이 없고, 민주주의가 극도로 위축되기 때문에, 공교육이 재생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고, 최고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서도 민주주의는 배척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여기에 정치검찰과 국정원, 국토부와 함께 최고의 기득권 이익집단인 교육부가 신자유주의 통치술에 따라 대학에서 민주주의를 최소화하기 위해 총장직선제를 간선제로 바꾸는 작업에 들어간 갔고, 이는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사회에서 교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형편없이 낮아졌지만, 그들로부터 간선제를 끌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국민의 여론을 무시한 채 비리사학을 복귀시켰고, 국공립대에 예산 지원 중단이라는 압력으로 간선제를 밀어붙일 수 있었고, 교수들이 간선제로 뽑은 총장 후보도 청와대의 낙점을 받지 못하면 임명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국공립대들이 하나씩 항복 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고, 87민주화항쟁의 최대 성과 증 하나인 총장직선제가 부산대만 남겨놓은 상황에 이르렀다.



부산대마저 총장간선제가 확정되면 권력의 뜻에서 벗어나는 대학이 더 이상 나올 수 없으니, 그 다음에는 교과서의 국정화와 대학의 신자유주의 우경화와 산업 및 상업화(민간대학은 다 이 길로 들어섰다)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교육을 유치원에서 초중고를 거쳐 대학까지 완전히 장악하게 되고, 교육부의 목표는 완전히 이루어진다.





이럴 경우 민주주의는 사라지고, 화석처럼 흔적만 남는 최악의 교육환경이 조성된다. 이 땅의 보수화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르고 미래세대까지 신자유주의 우파의 수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보수우파의 영구집권이 가능해지는 것이고, 미레새대가 지옥으로 가는 ‘헬게이트’가 열린다.



이런 최악의 과정을 지켜본 부산대 교수가 스스로를 희생하는 최후의 수단을 동원해 교육부의 일방통행을 저지하겠다고 나섰다. 이제는 학생의 자살만으로는 찻잔 속의 태풍도 되지 못해 교수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상황이 얼마나 막막하고 절망적이었으면, 최고의 지성이라고 하는 교수마저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겠는가?



정말 대한민국은 곳곳에서 미친 증상들이 마구마구 튀어나오고 있다. 푸코가 말한 ‘광기의 시대’가 대한민국에서 통째로 재현되고 있다. 정의는 고사하고 윤리와 도덕을 넘어 상식과 지식, 종교와 예술마저도 돈이 되지 않으면 천대받는 세상이 됐다.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도 되는 이기주의가 극에 달했고, (조)부모의 재산과 사는 지역, 학벌에 따른 차별을 당연시 여긴다.





일베나 서북청년단, 어버이연합처럼, 자유청년연합 등이 초법적인 폭력을 일삼아도 처벌도 되지 않고 수구세력과 극우집단이 비호하고 있어 그들의 초법적 폭력은 독버섯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국민은 온갖 방식의 조작과 이간질로 반목하고 작은 이익을 두고 극단으로 갈라짐에 따라 사회적 합의로 가는 길이 아예 차단돼 버렸다.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 정부 부처들과 기관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일보다는 대통령과 청와대에 잘 보이기 위해 혈안이 됐고, 대통령이 지시한 것만 행함으로써 국민의 요구는 무시하기 일쑤다. 국방부와 국정원은 청와대의 관리를 벗어난 느낌이 들 정도다. 정부는 무능을 넘어 무책임까지 일상화돼 최악의 행정부로 전락했지만, 그마저도 쓸데없는 일만 벌이고 있다.



한국이 미쳤다. 어디를 둘러봐도 뭐하나 정상적인 것이 없다. 대통령부터 선행학습에 내몰린 유아까지 권력과 성공에 대한 욕망만이 역겨운 냄새를 내며 대한민국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내몰고 있다. 그런 혼란과 역주행을 견딜 수 없었던 교수가 자신의 목숨을 던져 미친 대한민국에 묵직하고 참담한 경고를 던졌다.





필자는 교수의 유서를 읽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숨이 막혀 읽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나라와 세상, 집단들은 미쳤지만, 그 와중에도 바르게 살려는 분이 있다는 것에 놀라웠고(필자 주변에는 교수들이 널려 있지만 거의 대부분 적당한 타협에 익숙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런 일이 일어난 지 수개월이 지났는데 언론에 한 번도 다루지 않았다는 것에 극도의 절망을 느꼈다.



허구한 날 정부에 유리한 쓰레기 보도들만 양산하고, 선정적인 사건만 주구장창 떠들어대는 종편과 존재이유를 포기한 보도채널이 친정부적 행보만 이어간 이래 지상파3사까지 최악의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모든 언론과 방송이 제 역할을 포기했고 교육은 공공성을 포기했다. 필자는 부산대 사태를 어디에서 접해보지 못했다. 매일같이 여러 신문과 방송을 보면서도.



아래의 유서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세월호 참사라는 묵직하고 먹먹한 돌 하나가 가슴에 자리하고 있는데, 유명을 달리한 교수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매일같이 미친 일들이 더해지는 바람에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대한민국은 미쳤다, 망하는 길을 향해. 기득권은 특권화를 울부짖는다, 미래세대의 고혈을 짜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드디어 직선제로 선출된 부산대학교 총장이 처음의 약속을 여러 번 번복하더니 최종적으로 총장직선제 포기를 선언하고 교육부 방침대로 일종의 총장간선제 수순 밟기에 들어갔다. 부산대학교는 현대사에서 민주주의 수호의 최후 보루 중 하나였는데, 참담한 심정일 뿐이다. 문제는 현 상황에서 교육부의 방침대로 일종의 간선제로 총장 후보를 선출해서 올려도 시국선언 전력 등을 문제 삼아 여러 국·공립대에서 올린 총장 후보를 총장으로 임용하지 않아 대학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란 점이다. 교육부의 방침대로 총장 후보를 선출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후보를 임용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대학의 자율성은 전혀 없고 대학에서 총장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부터 오직 교육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이 문제이다. 이는 민주주의 심각한 훼손이 아닐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황에 대한 인식이 대학과 사회 전반적으로 너무 무뎌있다는 점이다. 국정원 사건부터 무뎌있는 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 교묘하게 민주주의는 억압되어 있는데 무뎌져 있는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상황이 이렇다면, 대학에서의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서는 오직 총장직선제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말이 된다. 민주주의 수호의 최후 보루 중 하나이며 국·공립대를 대표하는 위상을 지닌 부산대학교가 이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래야 지금이라도 이런 참당한 상황을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현대사를 봐도 부산대학교는 그런 역할의 중심에 서 있었다. 총장직선제 수호를 위해서 여러 교수들이 농성 등 많은 수고로움을 감당하고 교수총투표를 통해 총장직선제에 대한 뜻이 여러 차례, 갈수록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총장간선제 수순 밟기에 들어가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너무 무뎌있다는 방증이다. 대학 내 절대권력을 가진 총장은 일종의 독재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교수회장이 무기한 단식농성이 들어갔고, 오늘 12일째이다. 그런데도 휴가를 떠났다 돌아온 총장은 아무 반응이 없다. 기가 찰 노릇이다. 그렇다면, 이제 방법은 충격요법밖에 없다. 메일을 통해 전체 교수들에게 그 뜻을 전하는 것은 내부적으로 교수끼리 보는 방법으로 이미 전체교수 투표를 통해 확인한 바 있는 상황에서 별 소용이 없다. 늘 그랬다. 사회 민주화를 위해 시국선언 등을 해도 별 소용이 없다. 나도 그동안 이를 위해 시국선언에 여러 번 참여한 적이 있지만, 개선된 것을 보고 듣지 못했다. 그것보다는 8·90년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방식으로 유인물을 뿌리는 게 보다 오히려 새롭게 관심을 끌 것이다. 지금의 상황은 진정한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지난 날 민주화 투쟁의 방식이 충격요법으로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그 희생이 필요하다면 감당하겠다. 근래 자기 관리를 제대로 못한 내 자신 부끄러운 존재이지만. 그래도 그 희생이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그 몫을 담당하겠다. 대학의 민주화는 진정한 민주주의 수호의 최후의 보루이다. 그래서 중요하고 그 역할을 부산대학교가 담당해야 하며, 희생이 필요하다면 그걸 감당할 사람이 해야 한다. 그래야 무뎌져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이 각성이 되고 진정한 대학의 민주화 나아가 사회의 민주화가 굳건해 질 것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에쏘 2015.08.18 19:52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뭐라 말을 덧붙여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미쳐간다는 말 밖에는...

    • 늙은도령 2015.08.18 19:59 신고

      정말 광기의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극우 수구세력들의 준동이 도를 넘었습니다.

      그나저나 건강하신 것이지요?

  2. 방문객 2015.08.18 20:12

    충격적입니다. 교수 직위와 삶을 포기해서라도 불의에 맞서셨군요.

    • 늙은도령 2015.08.18 21:16 신고

      실제 교육부가 마음에 안 들면 총장 임명 품위를 청와대에 올리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피해본 대학교가 여러 군데입니다.

  3. 참교육 2015.08.18 22:13 신고

    선생님의 글을 통해 학문의 깊이와 인간애 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가지신 분이라는 걸 느끼고 있었습니다.
    막가파들이 판을 치는 세상 민주주의를 포기하겠다는 인간 망난이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선생님의 뜻 하신바를 꼭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 늙은도령 2015.08.19 00:07 신고

      요즘은 정말 어디서부터 움직여야 하는지 모를 지경입니다.
      너무나 많은 것이 극단에 이르렀습니다.
      지구온난화까지 겹치면 정말로 극단의 세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10년이 중요한데, 우리는 잘할 수 있을까요?

  4. HowlS 2015.08.19 00:38 신고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이였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늙은도령 2015.08.19 02:05 신고

      묻혀 버리면 안 되고, 국공립대 교수들로 고인의 뜻이 전파돼야 합니다.
      교수사회가 그럴 수 있을지 부정적이지만, 그래도 이대로 묻히지 않게 노력해야 합니다.

  5. 진검승부 2015.08.19 11:13 신고

    30년이 필요할 지, 100년이 더 필요할 지....우리세대까지 다 저승에 가면 바뀔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5.08.19 16:56 신고

      정부가 법인세 인상과 부자증세해서 일자리를 만드는 것 이외에는 절대 답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전체 인류가 지금보다 몇 배는 잘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이 풀려있습니다.
      조세정의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만 제대로 되면 당장 내년부터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6. 백순주 2015.08.19 13:01 신고

    아직 제 깜냥이 선생님 글을 소화할 수 없을 듯 하여 열어보지 못했습니다. 살며시 들춰낸 글에 역시 할 말을 잃었습니다.
    '충격'이란 단어는 이제 목숨을 내놓아야만 가능한가 봅니다. 어떤 이유에서도 '자살은 정당화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의를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면...
    요즘 혼란스럽습니다.
    그동안 보도 듣도 못한 일들을 눈으로는 보는데 머리로는 도망치고 있습니다.
    진정 이 사회를 위해 제가 할 일은 있는 걸까요?

    • 늙은도령 2015.08.19 16:58 신고

      그럼요, 많지요.
      지금 쓰시는 글들도 세상을 살기 좋게 만드는데 도움이 됩니다.
      한국은 제조업을 포기하는 순간 망합니다.
      화학은 한국 최고의 젖줄이고요.
      님은 지금처럼 살아도 충분합니다.

  7. 공수래공수거 2015.08.19 13:51 신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경북대학교도 수개월째 총장을 교육부가 승인을
    하지 얺고 있습니다
    대학을 손아귀에 넣고 좌지우지하려는 청와대의
    술책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두렵습니다
    유신시대로의 회귀입니다

    • 늙은도령 2015.08.19 17:05 신고

      이런 대학이 많습니다.
      방통대도 총장 임명이 1년 이상 미뤄졌다 정권이 원하는 자가 올랐지요.
      경북대는 아직도 싸우고 있고, 몇몇 대학도 지금 전쟁 중입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상류층은 유신으로 복귀했습니다.

  8. 행인 2015.08.19 19:57

    자신의 목을 걸고 왕에게 상소를 올리는 조선시대 선비 같은 분이 아직도 있다는 게 상당히 놀랍습이다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늙은도령 2015.08.19 20:16 신고

      이것이 그냥 묻히면 안 되는데 벌써 언론에서 사라진 느낌입니다.
      이런 분들의 희생은 반드시 기억되고 세상을 바른 방향으로 가는 계기가 돼야 합니다.

  9. Chris 2015.08.20 01:26

    정말 미쳤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저렇게 불의에 맞서는 사람들이 그냥 소비되는 현실이 아프네요.

    • 늙은도령 2015.08.20 01:50 신고

      정치라는 것이 정말 추악해졌습니다.
      기득권을 형성해 지들 이익만 챙기는 최악의 사기로 변질됐으니까요.

  10. 2015.11.18 09:53

    어리버리한 동네 아줌마가 생각해도 말도 안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생양아치 깡패집단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기분입니다, 어떤 것도 통하지않는...

    모든 것이 저들의 권력에 장악되어 있으니.. 어찌해야 할지... 가슴은 뜨거워 분노가 들끓는데..



이런 식으로 정치와 정책의 연속성은 약해지고(같은 집권여당이 정권을 재창출하기 위해 선거전을 치를 때는 전임 정부의 실적에 관해 마치 야당이라도 된 듯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정치 무대에 오른 의제들은 기술-경제적 관점에서 사전 조정된 내용들이 올라온다. 그것은 허상의 공연에 불과하며, 집권하면 본색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선거 때마다 경쟁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지킬 수 없는 공약들과 정책들이 난무하는 것에서 이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장 민주적으로 치러져야 할 선거 기간 동안 성숙되지 않은 민주주의의 약점이 곳곳에서 드러나며, 헌법과 법률에 의해 단기적 정당성을 획득한 정부는 독점적 공권력을 동원해 선거기간 동안 남발된 공약과 정책들을 폐기해버리며, ‘임기제 군주’처럼 임기 내에 확실한 실적을 쌓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하지만 지배세력인 ‘제국’이 있다면, 대항세력인 ‘다중’이 있기 마련이듯이, 그런 과정에서 하위정치를 구성하게 된 변함없는 비판세력의 공격에 노출되고, 현실적인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임시직 군주’는 이를 돌파하기 위해 권위주의적이고 파시즘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경우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통치행태가 과격해질수록 국민과의 소통의 양과 질, 양면에서 급격한 후퇴가 일어나며, ‘권위주의적이고 파시즘적 통치’에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그네타기 유권자’와 인터넷과 SNS 등의 하위정치에 정착한 비판세력의 공격에 노출되는 범위가 갈수록 늘어난다. 



이런 현대의 정치 환경에서 집권세력은 존재를 확인할 수 없으며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한 여론의 추이와 임기 초반에 나타나는 대중매체의 기회주의적 지지와 집권 후반부면 어김없이 배를 갈아타는 변절에 따라 권력의 저울추는 현기증이 느껴질 만큼 크게 요동친다. 이에 따라 정부 정책의 정당성을 두고 사법부의 권력이 지나칠 만큼 비대해진다. 여기서 울리히 벡의 도움을 다시 한 번 받아보자.



역설적이지만, 한편에서 법관들이 심지어 정치의 본성에 맞지 않게 자신들의 ‘사법적 독립성’을 행사하고, 다른 한편에서 시민들이 자신들을 정치적 결정의 공손한 수신인에서 정치적 참여자로 변형시키고 필요하다면 국가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법원에 청원하려 하는 바로 그 정도 내에서 이 같은 변화는 일어난다...이 모든 것은 분명히 국가정치의 영향력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외교 및 국방정책의 핵심영역에서, 그리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국가권력의 응용에서 그 독점권을 보유한다. 이러한 독점이 국가정치의 영향력이 행사되는 중심영역이라는 것은 19세기의 혁명 이래 시민의 동원과 경찰의 기술-경제적 장비 사이에는 상대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이로써 사법부의 권력이 지나칠 정도로 비대해지면서 정치적 결정에 참여하는 발언권이 갈수록 커지고 이는 ‘정치의 사법화’로 귀결되는 퇴행의 민주주의를 견인한다. 사회적으로 다양하게 발생하는 각종 갈등을 조정하는 기능으로서의 정치적 역할은 갈수록 퇴화하고, 본질적으로 확립된 질서를 유지하는 성향이 강한 사법부의 보수적 성향 때문에 정치적 정당성을 결여한 판결이 속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런 예상은 질서유지와 승진을 중시하는 법관의 성향이 제도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에 대해서는 미셀 푸코가 《감옥의 역사》에서 규범적 권력으로서의 사법제도의 형성을 다룸으로써 상식의 영역에 이르렀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지배세력이 입에 달고 사는 법치주의라는 단어도 개별 사건에 대한 법의 해석이 민주적 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당시의 지배적 세력과 여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 정당성을 지니게 된다. 



게다가 법의 적용은 아무리 과학적인 논리에 따라 법정에 제시된 증거를 다룬다 해도 언제나 법관의 해석이 선행되는 작업이다. 법관도 여론의 향배에 민감할 수밖에 없지만 지배권력과 기술-경제적 특권그룹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다(특히 아담 쉐보르스키 등의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를 보라). 법관은 판결로만 말한다지만 승진을 해야 하는 정신적 근로자에 불과하며,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부모이거나 자식이거나 변함없는 당사자이고, 아무리 높게 봐줘도 특정 분야의 지식에 정통한 전문가 이상은 아니다. 그 또한 정치적 성향이 있으며 나름대로 시대의 흐름을 바라보는 성찰의 능력도 갖추고 있다. 힘의 우위에 따른 현실적 고뇌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판결이 내려진다는 일반적 생각은 대단한 허구에 불과하다. 



만일 그렇다면 정치적 시시비비와 정책집행의 결과에 대해 그 민주적 정당성을 가리는 작업은 처음부터 법정에서 시작하면 아무런 갈등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도 완벽할 수 없으며, 정의의 여신의 두 눈이 가려진 것은 어떤 유혹에도 불구하고 불편부당한 판결을 내리라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법관이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주체와 객체의 입장에 들어설 수 없음을 뜻한다. 자신이 대변하는 쪽에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는 검사와 변호사가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의 사법화’가 민주주의에 반하는 경우가 빈번한 이유는 또 있다. 그것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법정에 올라온 사건의 내용이 전문적 지식을 요하는 경우가 갈수록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이 또한 미셀 푸코가 앞에 언급한 책과 《광기의 역사》에서 자세히 명쾌하게 다루었던 내용으로서, 법관이 판결을 내림에 있어 기술-경제적 전문화에 따라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의 조언을 구하거나,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의 경우에는 대규모 공개변론이나 공청회ㅡ그러나 일반 국민은 참여하기 힘든 공개변론이나 공청회를 실시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누가 선정하고 규정해서 조언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를 수 있는가? 이제는 그 분화의 이유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세분화된 전문가들 중에서 누가 공신력 높은 권위를 지녔으며, 그 권위에 대해서는 누가 무엇으로 보증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극도로 세분화된 과학과 기술의 영역에서 서로 대치되는 주장과 방법론을 주장하는 경우가 다산사인데, 해당 분야의 지식을 총괄하는 전문가가 아닌 이상 전문가의 성향과 수준에 따라 판결은 왜곡될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하고 왜곡되기 일쑤였다. 





결국 돈이 유일무이한 권력으로 작동되는 세상에서 ‘탐욕의 삼위일체’의 이해를 대변하는 쪽일수록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한 것이 아니라, 누가 보다 높은 수준의 전문가를 대량으로 끌어올 수 있느냐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자금을 지녔느냐에 따라서 국민적 관심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정치적 사안은 승패의 윤곽이 잡힌다. 전관예우로 얼룩져 있는 거대 로펌이 승승장구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 나오며, 이는 산업사회가 처음 출발할 때부터 내재적으로 갖고 있었던 이중적 경향, 즉 타자의 힘은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힘은 최대한 키우는 근대성과 반근대성이라는 이중적 경향에서 나왔다.



입만 열면 거짓말로 일관했던 이명박 정부와 공약 파기나 축소가 최대 무기인 박근혜 정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결코 한국적 상황만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물론 북한이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정학적 한계를 무시할 수 없지만ㅡ이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의 원천으로 삼는 정부와 세력이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만ㅡ마찬가지로 참여정부도 이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4.19와 5.18정신과 고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합의한 6.15선언과 10.4선언을 당론에서 배제하려 했던 안철수 의원의 한심한 행태는 어떤 말로도 변명될 수 없다. 이것은 본질에 관한 문제여서 몇 마디 정치적 수사로 바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명박처럼 안철수 역시 기업의 CEO 출신임을 명심해야 한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이렇게까지 무력해진 책임은 김한길 대표와 문재인 의원의 리더십에 있다. 물론 편파적인 방송들이 이른바 친노 죽이기에 일치단합한 것에서 나온 이유도 있다. 정치와 정당의 보수화와 관련된 제반의 상황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룰 생각이다). 



국정원이 정치의 전면에 부상해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있는 것과 미국의 NSA가 기타 정보기관들과 정보통신업체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전 세계의 지도자들과 유력 정치인, 재계의 거물,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각 분야의 엘리트들은 물론 타국의 국민들을 상대로 무차별도감청을 자행한 것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들으려 하지 않을 뿐이지, 최종적으로는 인류에게 유토피아를 선사할 것이라는 기술-경제적 진보의 내부에서는 본래의 모습ㅡ변함없는 사탄의 맷돌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ㅡ을 감춘 사회변화가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현대의 국민국가는 기술-경제적 요구와 변화에 따라 민주주의의 원리가 적용되는 분야를 갈수록 줄이고 있으며, 국민의 예산으로 돌아가는 정부의 역할과 기능을 이런저런 방식을 동원해 민영화하고 있으며(대부분 완전한 독점이 이루어지고 있거나, 흑자를 내는 것부터 민영화된다), 그 대신에 기술-경제적 특권그룹과 부딪치지 않는 영역에서, 즉 시장권력과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전통의 영토에 적용되는 주권의 독점적 사용에 전념하고 있다. 국익과 민생이라 하는 마약ㅡ다른 말로 해서 상위1%와 지배엘리트에게 돌아갈 이익과 권력을 숨기기 위해 국민의 의식에 주입되는 마약을 통해 국민을 착취하고 있다.  





결국 기술-경제적 진보의 방향은 기술 발전에 따른 사회의 변혁을 강제하는데, 그 속도의 가속이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적 변화를 동반하는 인지부조화 상태를 늘리거나, 급격하게 줄이고 있다. 특히 대규모 토론이 불가피한 핵발전소 문제와 지구온난화 문제처럼 국민의 인식을 바꾸는 문화적 변화가 필수요소로 등장하게 된다. 이로써 TV로 대표되는 대중매체와 인터넷 및 SNS라는 하위정치 영역이 집중조명을 받게 된다. 이는 신화에서 나와 닐 포스트만이 말하는 《테크노폴리》의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데(감시사회와 자동화에 관해서는 별도의 글로 다룰 생각이다), 여기에 이르면 계몽의 변증법이 인류에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다루었듯이, 계몽의 비진리성은 그것의 발전이 끝에 도달하면 폭력성이 극에 이르러 파시즘적 전체주의자로 넘어갈 수밖에 없음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닐 포스트만에 따르면 ‘테크노폴리’는 “특정 기술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들은 권력을 축적하는 한편, 기술이 가능케 하는 전문적 지식을 습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불리하도록 자기들끼리 서로 결탁하는 필연적 결과를 낳는다”고 한다. 이는 수많은 학자들이 밝힌 것으로 작금의 정보사회가 감시사회로 넘어가면서 전 지구적으로 부는 상층부에 쌓이고, 위험은 하층부에 쌓이는 현상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21세기에 들어 세계경제를 좌지우지 하는 기업들이 초국적 언론기업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정보통신 기업이며, 그들 모두가 네트워크 효과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애플과 삼성전자, 구글과 MS로 대표되는 4개의 초국적 독과점기업들이다.



끊임없이 나오는 신제품에 열광하는 것이 승자의 덕목이고 생존의 필수사항이라며 대중을 현혹시키는 이들은 대중매체와 대형 스포츠행사의 광고를 독점하고, 노동유연화를 내세워 정규직을 대폭으로 줄여서 조달한 천문학적인 인건비를 마케팅 비용으로 지출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그 생산지가 어디인지,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복잡한 생산과정을 통해 원가에 수배에서 수십 배에 이르는 뻥튀기 가능한 브랜드와 로고의 신화를 창조했다. 



시계의 발명으로 가능해진 초 단위까지 계산한 노동 분업으로 노동자를 착취하고,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수용소 같은 공장에서 저임금 노동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특히 부당한 권위에 대항하지 못하는 빈곤층 여성이 많다)이 생리와 섹스 임신과 낙태, 각종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하면서 만들어낸 제품에 붙이기 위해. 잔업을 거부하는 행위는 해고의 사유가 되며, 잔업수당을 꼬박 챙기는 것도 해고의 사유가 된다. 세상의 눈에 띠지 않는 곳에서, 지역 정부의 묵인 하에 18~19세기에나 있을 법한 노동착취가 자행되는 것은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이것밖에 없다는 진보의 신화를 끊임없이 주입한 결과에서 나왔다. 



또한 19세기의 후설과 블랑키, 마르크스, 20세기의 벤야민과 폴라니, 푸코와 이스트만, 라캉과 데리다, 딜뢰즈, 엘리아스와 아렌트, 21세기까지 이어진 로티와 네그리, 바우만과 아탈리, 클라인과 벡, 다이아몬드와 스티글리츠 등으로 이어지는 수없이 많은 석학들이 끝없이 경고했던 기술-경제적 발전에 내재해 있는 전체주의적 폭력성을 ‘탐욕의 삼위일체’가 대중매체와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해 개인과 사회 및 시민의식을 사회문화적으로 변화(퇴행)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7.13 08:30 신고

    사법부의 판단이 권력을 향한 해바라기 판단으로
    기울수록 민주주의는 현실에서 멀어져 갑니다

    요즘 하는일마다 위헌입니다

    • 늙은도령 2015.07.13 17:40 신고

      최소 민주주의로 가고 있습니다.
      정말 답이 없습니다.
      이제 노골적으로 나가네요.

  2. chemica 2016.05.29 09:49 신고

    잘 보고 갑니다 ..
    공감 .. ^^

  3. 2018.06.11 04:33

    비밀댓글입니다

    • 늙은도령 2018.06.11 19:46 신고

      글은 많이 쓰면 느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찰의 깊이이니 저보다 뛰어나실 수 있습니다.



세월호 집회가 폭력으로 치달아 불법이라는 정부와 새누리당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야만공건력에 대한 시민의 저항권에 대해 다루어보겠습니다. 일부 정치학자들은 부당한 공권력의 집행에 맞서는 시민의 저항권이 최근에 정립된 개념이라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정치적 자유와는 달리 시민의 저항권은 인류 문명과 거의 동시에 정립된 개념입니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남자시민으로 한정됐다는 점에서 현대의 민주주의와는 구별됩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자유라는 개념이 정립된 것도 근대에 이르러서입니다. 노예라 해도 어느 정도의 자율성은 보장됐지만, 현대적 의미의 자유는 근대국가와 거의 동시에 정립된 정치사회적이고 법률적인 개념입니다. 그 바탕에 저항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침해불가능하고 양도불가능한 천부인권과 대부분의 국가가 헌법으로 보장하는 기본권은 거의 다 피통치자들의 혁명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토크빌의 《프랑스혁명과 앙시엥레짐》과 《미국의 민주주의1, 2》, 프랑스혁명과 미국혁명을 비교분석한 아렌트의 《혁명론》 등에서도 자세히 나와 있지만,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기본권은 수많은 피통치자의 목숨과 희생, 피와 땀, 세금을 내고 전쟁에 참가하는 대가로 회득한 것입니다.



국가에 절대주권을 (최초로) 부여한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도 자신의 생명이 위협당할 경우에는 국가를 부정하거나 전복해도 된다고 했습니다. 동양에서는 맹자가 ‘백성이 제일 귀하고, 그 다음이 나라고, 가장 가벼운 것이 왕’이라며 ‘왕이 잘못에 대해 간언을 듣지 않으면 바꾸라’고 함으로써 혁명권과 저항권을 인정했습니다.



자유주의자인 칼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1, 2》에서 당시까지의 역사가 승자와 강자에 의해 저질러진 대량학살과 국제전쟁범죄의 역사였다며, 향후의 세상이 절대다수의 약자들이 주인이 되는 열린 세상을 꿈꿨습니다. 그는 또한 피통치자가 통치자를 뽑는 것에 민주주의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가 실정할 때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에 민주주의의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폭력혁명을 놓고 미셀 푸코와 노엄 촘스키가 대담(《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을 하면서 푸코는 최소한의 폭력만, 촘스키는 그것이 정의로운 세상으로 가는 길이라면 상당 수준의 폭력도 인정했습니다. 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위대한 정치철학자와 사회학자들 중 대다수가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통치자에 대한 피통치자의 폭력적(비폭력이 우선하지만) 혁명과 저항을 인정하는 체제임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헌데 새누리당과 보수언론, 종편, 지상파3사, YTN과 연합뉴스TV 등이 세월호 집회가 폭력적으로 변질돼 광우병 집회(정확히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집회) 때와 비슷하다고 왜곡된 보도를 내보냈습니다. 실상은 다릅니다. 경찰은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을 받은 차벽(명박산성보다 심했다)을 치는 불법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경찰과 사복경찰들(폭력행위를 유도했다는 보도도 있다)은 유족의 눈에 캡사이신을 뿌리고 문지르고, 물대포까지 쏘는 등 초법적 행위를 자행했습니다.



미국의 연방대법원에서 '현존하고 명백한 위협'이 아니면 어떤 표현과 집회의 자유도 막아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경찰은 전 세계가 인정하는 헌법상의 권리와 민주주의의 핵심인 기본권에 해당하는 권리행사를 아무런 권한도 없으면서도,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가상해 세월호집회를 불법으로 규정까기 했습니다. 이는 명백히 헌법과 실정법 위반이며 오로지 상대적 힘이 우위를 바탕으로 독재에 협조하는 것일 뿐입니다.  





집회를 제압하는 과정에서도 압도적인 공권력이 저지르는 인권침해 사례를 확인하기 위해 집회에 동행한 인권변호사까지 강제연행했을 뿐만 아니라, 속전속결로 구속영장까지 신청(대부분 기각되고 두 명만 발부됐다)하는 등 유신독재시대의 행태를 재현했습니다. 경찰이 헌법과 민주주의를 무시했기 때문에 폭력적인 저항을 하는 것은 피통치자의 권리이자 정치적 자유입니다.



현재 전 세계 유수의 언론들이 폭력경찰의 잔인한 무력진압을 서울발 뉴스로 내보내고 있습니다. 외신들도 세월호 1주기 집회와 성완종 리스트가 맞물리면 박근혜의 퇴진도 가능하다는 뉘앙스의 보도를 내보내고 있습니다. 외신만 봐도 경찰의 폭력성과 위법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월호 집회 참가자가 폭력으로 맞선 것은 시민의 저항권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세월호가 지겹다가나, 세월호집회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글들을 보면 이들의 인식이 얼마나 천박하고 빈민주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정의와 양심, 진실과 상식, 자유와 민주주의보다 기득권에 유리한 질서만을 말합니다. 진정한 무임승차자들이 이들 같은 사람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질서란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될 때(공권력도 마찬가지다!)만 가능한 것이며, 집회의 자유는 타인의 불편함을 전제로 한다는 것까지 무시합니다.





우리가 시민의 권리과 기본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세월호 집회처럼 불의한 권력에 맞서 피와 땀, 목숨을 바친 투쟁을 통해 이룩한 것들입니다. 그들이 세월호 집회를 비판할 때 사용하는 표현의 자유와 권리는 세월호 집회 참석자들 같은 분들의 목숨을 건 투쟁으로 쟁취한 것들인데, 세월호 집회를 욕하는 사람들은 무임승차를 넘어 공권력의 야만적 폭력까지 옹호합니다.



수천 년에 걸친 피통치자들의 저항과 투쟁, 희생을 통해 힘겹게 쟁취한 정치적 자유와 천부인권,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 각종 복지제도들을 공짜로 누리는 무임승차가 부끄러워서인지, 세월호가 지겹다거나 집회가 저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모든 권력의 원천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 즉 평등한 자유의 실현이 근본인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어서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불의한 정부에 대한 저들의 저항과 투쟁은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시민의 혁명으로 가는 첫 번째 단계이고, 당신들의 아이들이, 그 이후의 아이들이 누려야 할 민주주의와 기본권, 정치적 자유와 사회경제적 평등을 확고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부의 불평등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장사가 가능해진 것 때문에 발생했는데 기득권의 이익을 대변하니 분노가 치밀 정도입니다.





정부가 차벽을 설치하고 국제기준과 헌법 및 민주주의에 벗어나는 진압이 이루어질 경우 정당한 공권력이 아닌 폭력집단의 만행이 되기 때문에, 이에 맞싸우는 것은 민주주의와 헌법에 저촉되지 않습니다. 불법을 바로 잡는 데 정의의 폭력이 필요하다면 그것을 허용하는 것이 민주주의이고, 실제로 현대의 민주주의는 그런 과정을 통해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된다는 전제 하의 법집행이 폭력적 수단을 허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며, 이는 대통령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평등하고 공정한 정의의 폭력입니다. 경찰과 용역, 사복경찰의 불법적이고 압도적인 힘 앞에서 죽음을 각오한 저항만이 이 땅의 민주주의와 피통치자들의 권리와 자유를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오늘에는 법정에 끌려간 사람이 내일에는 위대한 혁명가가 될 수 있는 것이 현대민주주의가 추구해야 할 방향입니다.



세월호 참사의 유족들은 현 정부 하에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자식사랑이 전 세계인들의 가슴에도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정부가 진상규명을 꺼려할수록 세월호참사의 진상을 알리고 조속한 인양과 실질적인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집회는 앞으로도 계속돼야 합니다. 독재에 맞서려면 제2의 4.19혁명이나 6.10항쟁 이상의 것들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집회 참석자보다 많은 경찰을 동원하고, 차벽을 설치해 인간의 생리현상까지 불허한 경찰의 폭력진압이 우리가 저항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줍니다. 현 정부는 출범부터 정치적이고 민주적인 정통성이 없었는데, 이제는 독재시대에나 가능한 일들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세월호 집회에서 발생한 폭력은 불법이 아니라 야만공권력에 대한 시민의 저항권에 근거한 것입니다. 



정당성을 상실한 정권은 유효기간이 지난 불량식품과 같습니다. 정부가 폭력으로 국민을 제압하려 한다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고, 한 치의 물러섬도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한 걸음 물러날 때마다 보낼 수 없는 아이들의 영혼은 그만큼 멀어지고, 자유와 천부인권 및 수많은 이들의 피와 땀, 희생으로 이룩한 헌법상의 기본권은 축소됩니다, 아직도 맹골수도에 갇혀 있는 아이들의 슬픈 영혼처럼. 



지금은 제2의 4.19혁명이나 6.10항쟁 이상의 것들이 필요한 시기이지, 독재권력의 부패한 폭정에 자발적 복종을 보여줘야 할 때가 아닙니다. 억압과 착취 속에서도 세상은 돌아간다 했는데 작금의 대한민국이 그러합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耽讀 2015.04.24 07:38 신고

    세월호 유가족만 아니라 장애인도 잡았습니다. 박그네정권이 어떤 정권이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박그네는 스스로 종말을 향해 내달리고 있습니다. 시민만 저항할 수 있습니다. 독재정권을 끝낼 수 있습니다.

  2. 달빛천사7 2015.04.24 08:55 신고

    세월호는 시간이 지나도 생각보단 오래가는 사건이네여 이유는 왜 그런지 모르겠어여

    • 늙은도령 2015.04.24 10:12 신고

      언제나 기억되는 사건이 있기 마련입니다.
      9.11테러도 있지만 프랑스혁명도 있지요.
      예수의 탄생도 있고 부처의 득도도 있었지요.
      어떤 것들은 절대 잊혀지지 않은 것들이 있답니다.

  3. 공수래공수거 2015.04.24 10:42 신고

    저렇게 하다가는 거꾸로 물대포를 맞을것입니다^^

    • 늙은도령 2015.04.24 10:45 신고

      이명박근혜 7년 4월 동안 정말 공권력에 의한 폭력이 너무 많았습니다.
      이제는 이런 반민주적 행정은 사라져야 합니다.

  4. 바람 언덕 2015.04.24 11:05 신고

    이와 관련해서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는 젊은 세대들의 에너지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인데
    민주주의를 글로 배운 세대이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많이 아쉽습니다.
    90년 대 이후로 학생운동권이 거의 소멸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사회변동의 동력이 많이 실종된 상태입니다.
    젊은 세대가 폭발해야 혁명이든 항쟁이든 일어날 것입니다.

    • 늙은도령 2015.04.24 18:14 신고

      지금 젊은이들이 많이 배우고 있다고 봅니다.
      이명박근혜로 이어지는 동안 많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일베로 활동하느니 저항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 같고, 특히 고등학생들은 부글부글 끓고 잇습니다.

  5. 세이렌. 2015.04.24 15:39 신고

    윗 사람들이 언제나 문제네요..

  6. 참교육 2015.04.24 16:00 신고

    그렇습니다
    지금은 혁명적인 방법이 아니고는 얽히고 설킨 현실을 바꾸가는 어려울 듯합니다.

    • 늙은도령 2015.04.24 18:23 신고

      지금은 혁명적인 것들이 필요합니다.
      정말 절호의 기회입니다.

  7. Konn 2015.04.25 04:05 신고

    프랑스 혁명이 아무런 폭력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그 이후에 이루어진 무수한 혁명과 시위, 집회에서 나타나는 폭력성, 심지어 현재에서도 그 발전된 시민의식과 진보한 정치, 사회시스템을 가진 서구에서도 집회니 시위니 하면 흔하게 보이는 것이 쇠빠따와 마스크, 그리고 불타는 쓰레기통이나 자동차인데 한국에서만 유독 폭력성 가지고 문제삼고 있죠.

    동시에 국가에서 유일하게 공인된 폭력인 공권력이 반드시, 언제나 올바른 폭력인 것도 아니라는 점도 사실이고요. 이번 강화문에서 경찰이 벌인 '불법'행위는 이미 증거까지 남아있죠.

    • 늙은도령 2015.04.25 09:04 신고

      그럼요, 이번 세월호 집회는 폭력집회가 아닌 저항권을 행사한 정당한 방어였습니다.
      그것에 대한 근거를 찾아서 유족들에게 힘을 주려고 한 것입니다.

  8. Cong Cherry 2015.04.26 00:50 신고

    오늘 면허시험장에 가서 수업을 듣는데,
    강사의 첫 질문이 "당신은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라고 생각하느냐? 후진국이라고 생각하느냐?" 였습니다.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학생둘이 "선진국 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는데,
    강사가 단호하게 우리나라는 "후진국"이라고 했습니다.
    미디어에서 항상 좋은것만 보여주니까 "선진국"이라고 생각하는거라고요.
    세월호....
    침몰하는 배에 선장이 살겠다고 수많은 생명을 나몰라라 하는 나라라고...

    사고는 일어났는데 국가에서는 항상 제자리걸음...
    헛헛한 마음 높은자리에 있는 그들이 먼저 나서서 위로하고 밝혀야지 어제 그 자리를 또 걷고 있으니,
    누군들 가만히 앉아만 있겠나요...



    • 늙은도령 2015.04.26 02:17 신고

      선진국에서 살아보지 않았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박에 없지요.
      유럽 같은 민주주의 선진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정권이 물러나는 정도가 아니라 정부도 폐쇄될 수 있습니다.
      몇 년에 걸친 조사와 토론을 거쳐 문제의 근원을 찾아내고 책임자 처벌을 하고 재발방지를 위해 나라의 틀을 바꿉니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의 의미를 잘 모릅니다.
      단순한 예로 소방차의 앞을 막으면 무조건 처벌됩니다.
      벌금도 엄청나게 많고요.
      스쿨버스의 경우에도 절대 추월이 불가능하고 스쿨버스가 정지하면 양쪽 차선에 있는 차도 멈춰야 합니다.
      장애인 주차구역에 주차하면 과징적 벌금이 부과되고 이것을 내지 않으면 출국도 하지 못합니다.
      운이 좋아 이민갔다고 해도 벌금회수가 이루어지고, 이것을 거부하면 추방당합니다.

      우리나라는 이런 면에서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자유와 방임도 구별 못해요.
      국민이 집회를 하는데 차벽을 세운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기본적으로 준법정신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데 이는 경찰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우리는 압축성장에만 매몰돼 보수언론들과 정치인들, 지배엘리트들이 나라를 개판으로 만들어놨습니다.
      국민들은 무엇이 자기의 권리를 지키고 정치사회적 자유를 높이는지도 모릅니다.

      경험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막장드라마 같은 것이 지상파를 장악하는 것에서 가치가 왜곡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유학파들로 이루어진 통치엘리트는 미국에서 나쁜 것만 들여오고, 소비지상주의에 빠진 청춘들은 무엇이 정말 중요한 것인지 판단조차 못합니다.

      답답하지만, 대한민국은 뿌리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과 정치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현재 심화되고 있는 불평등의 일차적 피해자는 민주주의가 될 것이다. 자유시장 경제학을 정당화하는 기본적인 도덕적 주장 가은데 하나, 즉 개인의 이윤 추구가 동시에 공익을 위한 최선의 메커니즘을 제공한다는 주장은 의혹에 싸였고 사실상 거짓으로 밝혀졌다. 


                                          ㅡ 지그문트 바우만의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에서 인용  




미셀 푸코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과 지그문트 바우만의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는 현대성의 정체를 정확히 짚어냈습니다. 그들이 밝힌 현대성이란 특별한 정형이 없지만, 시장경제를 극대화하기 위해 최소의 통치로 최대의 경쟁을 이루어내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을 말합니다.





독일의 프라이부르크학파가 정립한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은 국가가 시장경제(수출 포함)를 극대화하기 위해 국가의 모든 부분을 시장 중심으로 재구축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부는 국가 주도의 독점경제(히틀러의 우파 전체주의와 스탈린의 좌파 전체주의)를 막기 위해 시장참여자 사이의 완전경쟁을 극대화하도록 법과 제도, 환경을 만드는데 집중하면 됩니다.



간단히 말하면 정부가 할 일이란 시장경제가 가장 잘 돌아가도록 국가와 사회, 기업과 개인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시장경쟁을 방해하는 것은 공권력을 동원해 제거하는 것입니다. 국가 전체를 시장경제에 가장 적합한 조직으로 만들면서도, 국민에게 기본적인 삶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 된 것입니다. 



관방학(내치학)과 국가이성 및 17~18세기의 정치경제학(고전파 경제학)이 적절한 조합을 이루면서 탄생한 독일의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이 질서자유주의나 사회적 시장경제라 명명되는 것도 '최대의 경쟁을 위해, 최소의 개입을'이라는 구호가 국가의 부흥과 국민의 삶을 동시에 높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독일의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은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을 거치면서 영미식 신자유주의로 바뀌닙니다. 이때부터 국민의 안전과 소득, 복지를 제공해야 할 국가의 역할이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이 가능한 자유시장 자본주의에 따라 모든 것이 정열된 경제국가를 만드는 것으로 축소됩니다. 



공짜 점심이 없다는 것과 더 이상 사회의 도움은 없다는 것이 일반화되면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책임지고 도와주던 보편적 복지는 사라지고, 소비자로 파편화된 국민은 시장경제에 종속된 채 끊임없는 경쟁과 퇴출을 반복해야 합니다. 성공과 실패는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지는 것이 일반화됐습니다. 





정부의 복지는 시장경제에서 탈락한 개인을 최단 시간 내에 시장경제에 재진입시키기 위한 재교육을 제공하고, 완전한 패자는 최소한의 삶만 보장해줍니다. 과학과 기술공학의 발달로 전 지구적 시장이 등장함에 따라 영토 내에서의 배타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정부의 역할은 더욱 축소됐습니다.



기술공학과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자동화를 촉진시켰고, 이에 따라 자본과 초국적기업은 노동과 국경에 구애받지 않는 전 지구적 차원의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각국 정부는 국민 전체에게 기본적인 소득과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그 결과 부의 불평등이 계속해서 커졌고, 정부는 보편적 복지에 들어가던 비용을 시장경제의 극대화를 위해 사용했습니다. 정부는 또한 완전경쟁을 방해하는 것들을 규제 완화, 구조조정, 노동유연화, 관세 철폐, 초저금리, 보조금 지급금지, 노조의 해체, 조세 개혁 등과 같은 방식으로 무력화시켰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성공과 실패가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졌고, 보편적 복지는 선별적 복지를 축소됐습니다. 생존을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시장경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자신의 역량을 높이는 것뿐입니다. 국민의 안전과 복지를 제공해야 할 국가의 업무도 민간으로 넘어갔습니다.



이것이 지난 40년 동안 신자유주의적 통치술과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만들어낸 세상입니다. 부의 불평등은 기회의 불평등을 양산했고, 완전경쟁이 불평등경쟁으로 바뀌었고, 저축이 소비(빚을 내서라도)로 대체됐고, 부와 빈곤이 대물림되는 세습자본주의가 등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정부의 재정보다 훨씬 많은 부를 축적한 자본과 초국적기업의 압도적인 힘은 시장경제에 반하는 민주주의의 요소들(조세정의에 의한 부의 재분배, 신분이동의 가능성 제고, 공정한 경쟁과 기회 제공 등)을 제한했고, 그 결과 과두정치에 가까운 최소의 민주주의가 보편화됐습니다.





마침내 새로운 형태의 차별주의가 등장했습니다. 완전경쟁의 시장경제에 편입되는 것과 퇴출되는 것으로 1차 차별이 작동하고, 소득 능력에 따라 2차 차별이 작동하고, 소비 물량에 따라 3차 차별이 작동하고, 가족 전체의 소비 여력에 따라 4차 차별이 이루어집니다.



자유가 지나칠 정도로 많이 주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시장경제 의존성이 높은 제한된 자유여서, 국가와 사회가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정치적으로 확장된) 자유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시장경제에 참여해야 하는 제한된 자율성에 불과합니다.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란 소비할 수 있는 자유, 즉 돈이 있어야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변질됐습니다.



이로써 생존선 이하의 삶의 자율성만 지닌ㅡ다시 말해 가난이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지는 잉여들이 양산됐고, 그들 중 일부는 시장경제에 아무 쓸모없는 쓰레기로 전락하거나, 시장경제에 위험한 군으로 분류되고 배제된 상태(도시의 게토, 난민수용소, 열악한 복지시설, 슬럼가 등)에서 총체적 감시를 받는 존재로 버려집니다.





선별적 복지란 이런 이유들로 해서 시장경제 탈락자에게 주어지는, 그래서 생존을 위한 소비 외에는 단 한 푼도 저축할 수 없는 최소한의 복지를 말합니다. 국가업무의 민영화와 함께, 국가의 역할을 실현하기 위한 정부의 재정이 시장경제를 먹여 살리는 최후의 먹거리가 됐습니다.



석유(만능의 제품인 플라스틱)를 대체할 수 있는 먹거리가 나올 때까지 국가의 역할은 갈수록 축소될 것이며, 국민의 안전과 건강은 보장할 수 없는 것이 됐습니다. 복지와 공적 부조가 줄어들거나 최소화됨에 따라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소득도 보장돼지 않습니다.



홍준표가 강행한 의무급식 중단과 오세훈 등이 주장하는 선별적 복지는 이런 과정을 통해 강화됐고, 최소한의 복지라도 받기 위해 저소득층은 보수정당을 지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제도화된 가난이 양산됐고, 소득원을 찾을 수 없는 개인들이 하루살이처럼 살아야 하는 신자유주의적 노예로 전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의 무서움은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이 가능한 시장경제 자본주의국가를 만들어놓으면 개개인이 정부를 비판하고 정치인과 특권층을 비난해도 최소의 통치만으로 기득권의 이익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는 엄청날 정도로 자유가 늘어난 것처럼 착각하기 쉽지만 소비로 유혹되고 감시받는 자유(시장 의존적 자율성)일 뿐입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벌어진 일련의 과정들에서 볼 수 있듯, 부분적인 교정 외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국가는 국민의 목숨을 지키려 하는 것이 아니라, 유능한 소비자를 키우려는 것입니다. 생산은 자동화되고 외국의 저임금 노동자에게 얼마든지 아웃소싱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에 가격이 매겨져 있어, 돈이 없으면 생필품도 기본적인 서비스(특히 의료와 보건)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넘치도록 많은 자유를 누리는 것 같지만 지독할 정도로 시장 의존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기 이전에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이 구축한 체제의 노예부터 되는 것입니다(왜 가난한 사람들은 보수정당을 찍을까-1)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ppp 2015.06.11 11:37

    좋은글입니다 항상 감탄하고 읽고있습니다 퍼갑니다.



빠른 이동(시간)을 통해 공간을 지배하는 것이 현대의 권력이 되면서 특정 지역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내는 수많은 중하위층 사람들은 개인으로서의 삶이 뿌리 채 흔들리는 위험에 처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가격이 매겨짐으로서 돈이 없으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현실에서 직업을 찾아 전국을 전전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런 직업의 이동성은 가족의 해체만이 아니라 결혼의 유무, 주거의 형태, 자녀의 교육 등에서 연쇄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탄생부터 경쟁력을 지니게 된 개인(흔히 1%라 한다)은 자신이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어 모든 면에서 자유를 누리며, 상시적인 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중하위(전체 인구의 90% 정도)에 위치한 개인들은 직업 선택의 자유도 누릴 수 없을 뿐더러, 언제 단행될지 모르는 구조조정(노동유연화)에 상시적인 해고와 실업의 스트레스에 놓이게 된다. 선진국이라고 해도 경쟁의 정도가 심할수록 사회적 스트레스 지수가 높게 나오고 행복지수는 낮게 나온다.


 

                                         <불평등의 대가>의 예고편에서 캡처

 


미셀 푸코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특징이 개인으로 하여금 '위험을 등지고 사는 삶'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소득을 예상할 수 없는 개인들은 늘 움직일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가볍게 만들어 두어야 한다. 저축이나 보험 등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보편화되고 있다.

 

 

특히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는 것은 가장 위험한 것으로 불확실한 아주 짧은 미래의 습격으로부터 무방비상태에 놓이게 된다. 모든 개인은 '다음 번 통고가 있을 때까지만 유효한' 상태에서 직업을 유지하기 때문에 현재의 상태에 만족할 경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문자메시지나 메일의 형태로 도착해 있는 해고통보에 어떠한 대처도 할 수 없다. 개인은 아무리 소비에 매달려도 불안하고, 만족을 하려고 해도 불안한 마음에 만족은 소비를 할수록 멀어져 간다. 

 

 

직업이 안정된 시대의 개인은 내일을 위해서 오늘의 만족을 늦출 수 있었지만, 소비 중독과 소비지상주의 사회에서는 아예 만족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오늘의 사치품을 내일의 필수품으로 만드는 일만 중요하다. 이는 무거운 경제의 시대에서도 있었던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현재의 상황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특성 때문에 과거와는 명백히 다르다. 바우만은 새로운 현대성의 실체를 밝히는 과정인 《액체근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밟는 길에 끝이 있다는 믿음, 역사적 변화에 획득 가능한 목적인이 있고 미래의 어느 날, 내년이든 다음에 올 지복천년에서든 완벽한 상태, 살기 좋은 어떤 사회, 이루어질 것이라고 가정되던 면면의 전부 혹은 일부가 실현된,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가 올 것이라는 믿음에서 오는 환상)이 오늘날 점차 붕괴되고 급속히 기울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19세기에서 20세기 중후반까지 좌와 우 모두는 그들이 주장하는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다. 우파는 애덤 스미스가 말한 수요와 공급이 확고한 균형을 이루는 완전한 자유방임의 시장경제가 모든 인류를 행복으로 이끌 것이라 믿었다. 좌파는 칼 마르크스가 말한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 완전한 평등이 이루어져 모든 우연과 분쟁, 불명확함이 사라진 자유의 왕국이 도래할 것이라 믿었다. 유토피아에 대한 믿음은 좌우가 동일하게 희망했다. 

 


                                            디스토피아ㅡ설국열차에서 인용


 

하지만 최소한 지금까지는 좌우의 믿음과 희망도 진보와 보수의 전망과 주장도 모두 다 틀렸다. 마르크스가 예언한 것처럼 견고한 것은 녹아내렸지만, 그것이 기화돼 허공 중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용암처럼 녹아 있는 액체 상태로 접어들었다. 어떤 것도 녹여버릴 수 있고 어디에나 스며들 수 있기에 더 위험해졌고 더 불확실해졌고 더 막강해졌다. 고체의 견고함은 무너뜨릴 수 있지만 액체는 어떤 힘에도 전체를 유지한 채 자유자재로 변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좌우의 꿈을 완전히 뭉개버린 이런 체제의 액체화는 산업사회가 탄생한 시기부터, 신자유주의가 영국과 미국, 독일에서 권력을 잡은 후부터는 되돌릴 수 없는 필연의 과정이었다. 과학기술과 첨단 정보통신기기의 발전으로 공간을 압축하는 시간의 우위가 확고해지면서 자본의 입장에서 견고한 체제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사라졌다. 무거운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세워졌던 게임의 룰이 더 이상 유효하지도 않았고, 불편하기만 했다.   

 

 

두 번째로 중요한 변화는 근대화의 과제와 책임의 규칙이 폐지되고 사적인 것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전체 인간 종의 집단적인 자질이자 자산인 인간의 이성으로 수행해야 할 일로 여겨졌던 것들이 개인 차원의 과감성과 정력에 맡겨져 분해(개별화)되고 개인적 관리와 개인적 재능과 수완의 집행 영역으로 남겨졌다.  

 

 

 

공동체의 행복과 풍요를 지탱하던 사회의 역할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개인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개인의 자기 권리 주장은 강해졌지만, 이는 자유의 과잉과 함께 책임의 개인화를 공고히 했다. 이제는 모든 개인이 액체화된 세상의 불확실성에 맞서 홀로 싸워야 하고, 실패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지게 되었다. 직업의 이동성 확대는 공동체와 사회의 근간인 가족의 해체를 불러왔기 때문에 사회에 진입한 개인은 모든 결정과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 

 

 

경영의 신으로 칭송받던 피터 드리커는 "더 이상의 사회적 구제는 없다"고 선언했고, 마거릿 대처는 한술 더 떠 "사회 같은 것은 없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세계 최고의 부자들이 "공짜 점심은 없다"며 기반이 해체된 개인들에게 무한경쟁이 초래하는 불확실성의 책임을 떠넘겼다. "사회적으로 위험과 모순은 끊임없이 생겨나는데 그것들을 해결할 의무와 필요는 계속 개인 차원의 문제가 되어 갔다."  

  


                                                   일본 제1원전 폭발


 

이런 위험과 책임의 개인화는 공동체의 해체와 사회의 몰락을 부추겼고, 사회적 연대의 기초가 되는 유사한 고충을 토로하고 개선하거나 구제받을 방법이 사라졌다. 개인들이 느끼는 고충는 "전부 더하여 공동이 대의명분의 합으로 이끌어가지도 못한다." 산재하는 고충은 다른 개인들도 똑같은 고충에 시달리면서도 홀로 맞서고 있다는 잔혹한 동화만 들려줄 뿐이다. 이로써 력과 자본에 대항하는 시민으로서의 연대는 불가능해졌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공공의 힘이 가져다줄 것이라고 예상하고 희망할 수 있는 유용한 것은 두 가지 뿐인데, 그 하나는 개개인이 자기 방식대로 살 수 있도록 인권을 지켜주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것이 평화 속에서ㅡ실제 범죄자이거나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강도나 성도착자, 거지, 그 밖의 다른 불쾌하고 유해한 이방인들이 거리를 활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통해 개인의 신체와 재산의 안녕을 수호해줌으로써ㅡ추구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공적의 힘이 사라지자 사적인 것들이 공적 공간을 점령하게 되었고, 공적 이익은 사적 이익으로 대체됨에 따라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세월호참사도 이런 과정이 심화되면서 일어난 비극이다. 인간의 생명이나 존엄성은 사적 이익에 도움이 되는 선에서만 가치를 지닌다. 수많은 인재와 산업재해가 발생해도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취해지지 않고 해당 사고를 빨리 수습하기 위해 보상문제로 넘어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근대의 모든 진보가 정치와 경제 권력을 독점한 중심부가 주변부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이었듯이, 근대이성이 탄생시킨 '액체근대'라는 현대성은 무한한 진보는커녕 부정적 세계화를 추동하는 세력과 집단에게 무한대의 승자독식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세월호도 일본에서 폐기 처분될 운명이었으나 청해진해운으로 대표되는 이익집단에 의해 수입됐고, 정경유착을 동원한 규제 완화를 통해 위험천만한 증축을 감행할 수 있었다.



                                                   다음이미지에서 인용



(사고 나는 시점만 남아 있었던 세월호처럼) '무거운 자본주의' 호에 올라탔던 승객들은 선장의 갑판 위에 오를 수 있는 선택받은 일부 선원들이 목적지로 배를 몰고 갈 것이라 믿었다(이것이 항상 현명한 것은 아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승객들은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진, 통로마다 큼지막한 글자로 내걸린 규칙들을 익히고 준수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써도 되었다...반면 '가벼운 자본주의' 항공기에 탄 승객들은, 조종실이 텅 비어 있는 상황에서, 비행기가 어디로 날아가고 어디에 착륙하며 누가 공황을 선택하는지, 또한 도착할 때까지 승객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규정이라는 것이 있기도 한 것인지 등등의 정보를 '자동운항'이라고 적힌 정체 모를 블랙박스로부터 얻을 방도가 전혀 없다는 공포를 경험할 것이다.  



이런 불확실성이 초래한 공포에 짓눌려 시민의 연대의식은 초라하게 찌그러들었고, 사회의 점진적인 해체를 불러온 위험의 개인화는 자본과 노동이 적대적 공생을 유지할 수 있었던 중후장대한 무거운 경제에서 빛의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 자본을 풀어주었다. 이렇게 노동에서 자유로워진 자본은 국가라는 경계 안에 노동을 남겨둔 채 값싼 노동력을 찾아 국경을 넘나들며 경박단소한 가벼운 경제로 넘어갈 수 있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유동하는 공포'가 바로 이것이다.


 

세월호참사는 《액체근대》의 도래로 인류의 모든 삶과 관계에 스며든 불확실성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이란 《유동하는 공포》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됨에 따라 공적 영역은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게 된다. 거대한 심연에 갇힌 개개인은 과잉 소비를 통해 이런 공포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게 된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어도 이웃이란 직업과 자녀 교육을 위해 잠시 머물다 가는 이방인들로 보일 뿐이어서 더 이상 스위트홈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타인이 유동하는 공포로서 다가온다. 



이제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 소비 중독과 소비지상주의를 보편적인 현상으로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공적 영역의 사적인 것에 의한 식민지화와, 공적 이익을 다루었던 정치의 실종 및 힘겨운 귀환이다.    

 

 



처음은 두려움이고 설레임이다.

이곳에 글을 올리는 것도 이것이 처음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두려우면서도 설레고 있다.

이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어떤 인연들을 만들고, 색다른 경험을 할지 나 자신도 궁금하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미래는 예측할 수 없어서 미래라는 것인데 

그래서 현재만이 실재하는 것이라 했는데 글이란 것은 늘 죽어있는 경험들의 소산이다. 

글이란 쓸 때만이 현재일 뿐, 업데이트를 한다고 해도 생각을 거처 언어로 드러난다는 것에서 늘 죽어있는 경험이다.

글이 기록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나는 미셀 푸코가 『지식의 고고학』에서 한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곳에서의 첫 경험에 대신하려 한다.

20세기 최고의 석학으로 떠오른 푸코는 권력의 해체와 계보학적 분석을 통해 인류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었지만, 너무나 많은 추종자로 하여 자신이 지적 권력으로 우상화되는 것에 부담을 느껴 무려 8년 간 침묵을 했다.

그가 지적 권력으로 자리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자세에서 나왔는데 글 쓰는 사람들은 하나의 참조사항으로 접근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한 사람 이상이, 의심할 바 없이 나처럼, 더 이상 얼굴을 가지지 않기 위해서 쓴다.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말라, 나에게 거기에 그렇게 머물러 있으라고 요구하지도 말라. 이것이 나의 도덕이다. 이것이 내 신분증명서의 원칙이다. 쓴다는 것이 필요할 때, 이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좌우와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집중포화를 받아야 했던 푸코로서는 일일이 대항할 방법도 없었고, 그런 논란에 빠져들고 싶지도 않아 자신은 오직 글을 쓰는 것으로만 말하겠다는 의지를 표한 것이다.

필자도 이와 비슷하다.

쓸 것이 필요할 때, 사유의 결과물을 기록으로 옮겨야 할 때, 이곳에 글을 남김으로써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나는 글로써 말할 것이며, 글로써만 존재할 것이다.

나의 얼굴은 없으며, 신분증명서도 갖지 않고 있다. 

 

어느 누구도 완벽하지 않기에, 나 또한 끝없이 공부하고 보다 깊은 성찰에 이르기 위해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갈 뿐이며, 그것들을 글로써 말할 뿐이다. 

시작은 언제나 사막과도 같다.

자유로운 자만이 사막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며, 언제나 출발하는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상보다 조금 더 높은 곳을 보기 보다는 현실의 가장 낮은 곳에서 주위를 둘러보려 한다.

죽음에서 시작하면 영원히 살 것이며, 출생부터 시작하면 죽음을 피할 수 없으리라. 

그래서 나는 또 다른 출발을 시작한다.

길은 있어서 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지나왔기에 길이 될 수 있음을 잊지 않으면서..

  1. 대한민국 2014.07.09 23:53

    훌륭하신 마음과 강인한 정신...

    항상 끝없이 공부하고, 죽음마저 초월하시는 숭고함..

    도령님의 글들을 보며 많이 깨닫고 본 받고 싶습니다.

  2. 씽ㅡㅡ 2014.07.13 14:28

    우연히 아고라글을 보고 찾아와 즐겨찾기 했습니다~!

    학식과 성품을 본받기 위해 자주 들려서 많이 배워가겠습니다!

    건강하세요~~!

  3. 꼬꼬 2014.08.05 17:25

    도령님의 답글에도 공감을 많이 하고 갑니다.

    글을 써서 남긴다는 것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는 말. 정말 공감이 갑니다. 역설적이기도 해서 재밌네요. 요즘 인터넷을 통한 광장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해보는데요. 현실의 시공간 벽을 허무는 새로운 장인 인터넷 공간에서 글을 남기고 소통하는게 과연 민주주의의 확대를 가져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터넷에선 공존을 가장한 혼자만의 세상에서의 독재도 일어나기 때문이죠. 물론 독재라는 것도 작은 세상안에서의 착각이지만 (또 다른 통제는 존재하니까요) 적어도 익명성, 내 인터넷기기의 독점성 등은 내가 작은 세계에서나마 주인이 된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좋죠. 독재가 전제된 소통의 입을 통해 실현되는 민주주의는 어떤 것인지..많은 생각을 해봅니다. 적어도 도령님글은 도령님의 삶의 방향이 공동체와 이상을 향해 있는듯하여 민주주의의 이상으로 가는 길을 밝히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도령님이 앞으로도 결코 가볍지 않은 글을 쓰시며 자신의 존재의 길을 밝혀나가시길 응원합니다. 멋지십니다. 전 댓글 하나 달때도 많은 용기를 내야 하던데 이렇게 자신의 삶과 생각을 당당히 보여주신다는 게. 오즈의 마법사에서 허수아비,양철나무꾼,겁쟁이사자가 뇌,심장,용기를 찾는 것엔 얼마나 많은 진실이 담겨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 늙은도령 2014.08.05 18:06 신고

      하나의 사상이나 생각이 정립되기까지 많은 노력과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치열해야 하며, 진실해야 하며, 투명해야 합니다.
      글이 힘을 지니거나 울림이 있으려면 거짓된 것들을 올리면 그것은 독자를 향한 사기입니다.
      삶의 경험과 지적 여정, 성찰의 결과물들을 가장 쉬운 언어로 풀어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자신의 참모습을 숨기고, 분명한 기준이 없다면 허구의 기록이겠지요.
      글을 쓰는 것이 삶이기에 최대한 투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감사합니다.

    • 꼬꼬 2014.08.08 18:20

      치열하고, 진실하고, 투명할 것. 앞으로 계속해서 곱씹어야 할 말들이겠네요. 많이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4. 덕산 2014.08.11 20:36

    늙은도령님

    늦게나마 감사인사드립니다.
    아고라에서 알게된 후에 이사이트에 와서도 써놓으신 귀중한 글 늘 읽고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창을 활짝 열게 해주시고 악덕자본의 진실에 대해서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더 많은 분들이 깨어날 수 있도록 저도 작은 힘이지만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늙은도령 2014.08.12 00:37 신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한 명씩 깨어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연대의 소중함과 함께 하는 삶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각자의 개성이 평등을 기초로 자유롭게 어우러지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미래의 세계입니다.

  5. 육펜스 2014.09.01 02:55 신고


    살이와 생각. 이라고
    티스토리 대문만 지어놓고

    이럭저럭 일상으로
    전혀 글을 생산해 내지 못하고있습니다^^


    님의 글들 보다 정독하며
    제 마음자세를 먼저 다듬어봐야할듯 합니다


    좋은 글과 정보들..
    늘 감사드립니다.

  6. 백순주 2015.08.21 15:56 신고

    '나의 얼굴은 없으며, 신분증명서도 갖지 않고 있다.'

    PC로 만나는 세상은 그런 줄 알았습니다. 전 블로그 개설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얼굴이 생기고, 신분증명서도 발급되었습니다. 애써 감추려 했지만 그게 더 어려워 그만 두었습니다.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진심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희망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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