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에는 휴식처란 있을 수 없고 환희의 배당도 지불되지 않는다.


                                                              ㅡ T.E.로렌스의 『지혜의 일곱 기둥』 중에서




어쩌면 나는 깨어나지 않는 잠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 작용이 죽음과 같아서, 영원히 빛과 어둠 사이 갇힌다 해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나에게 묻고, 내가 설명하고 그것과 투쟁하는, 숱한 몽상가들이 꿈꿨던 그 지겨운 쳇바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리석게도 이성의 힘을 믿었기에 물질의 과잉 속에서도 투명한 질서와 자율이 있으리라 믿었다. 탐욕의 자본주의 하에서 이성의 가치와 정의의 실현을 위해 끊임없는 고투를 마다할 수 없었지만, 그 끝에는 관대한 희망이 있으리라 믿었다.



그렇다, 나는 어쩌면 로렌스가 그러했듯 밤에 꿔야 했던 꿈을 낮에 꿨는지도 모른다. 밤에 꾸는 꿈은 아침에 일어나면 초라해지지만 낮에 꾸는 꿈은 실제 행동으로 옮겨지기 마련이며, 언제든 폭력적으로 돌변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꿈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휴식처란 있을 수 없고, 어떤 환희의 배당도 지불되지 않는다. 정신은 감각의 부속물이며 감각이 견딜 수 있는 데까지 견디어내고 정신이 일보 전진할 때마다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보다 먼 모험, 보다 깊은 고난, 보다 심한 고통으로 빠져드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로렌스만큼 치열하게 투쟁하지 못한 나는, 이성이 행동을 지배하고 영혼이 육신을 고양하는 어설픈 지성의 테두리에서 서성거렸다. 세상과 직접 부딪쳐야 하는 용기가 부족했기에 나는 움직이기 전에 결정하지 못했다. 문제는 늘 거기서 발생했다.



로렌스의 경험처럼, 나의 시작도 어느 수정처럼 맑은 오월의 아침(아니 오후일지도 모른다. 시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에 일어났다. 지난밤의 폭우가 만들어낸 세상 첫날 같은 햇빛에 눈을 떴지만, 밤새 퍼 마신 술 때문에 이성은 숙취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불 속을 뒹굴고 있었다. 육체는 아직 정신에 연결되지 못한 상태였지만, 질서정연한 사고가 배제된 그 순간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부딪쳐왔다. 



만개한 오감은 만물의 속삭임, 색체와 향기, 숨결과 미세한 떨림까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알코올의 찌꺼기와 잠의 잔재, 정신의 부재가 만들어낸 현실과 비현실이 어디쯤. 그것은 인위적 해석과 성향이 배제된 본질의 세계였다. 거기에는 너무나 허술한 창조의 말도, 숱한 우연으로 가득 찬 거대한 섭리와 일관된 진화의 논리가 수십 억 년에 이르는 거대한 시간 동안 점진적으로 작용하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미세조정에 슬쩍 끼어든 ‘눈먼 시계공’의 간섭도 필요하지 않았다. 



만물은 아름답거나 초라하고 복잡하거나 단순했다. 날것 그대로의 세상에선 모든 것이 투명해 어떤 꾸밈도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배하는 관성의 법칙도, 거대한 거리에서 작용하는 중력의 힘도, 나노 같은 극소의 공간에서 작동하는 양자역학의 에너지도, 질량불변의 법칙에 이르기까지 우주를 지배하는 모든 물리학 법칙마저도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시공을 뛰어넘어 내가 로렌스의 영적 경험에 빙의됐거나 아니면 로렌스가 내 몽상적 경험에 빙의됐거나, 그 꿀맛 같은 몇 분(아니 몇 십 분, 몇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거듭 말하지만 시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깨달음이나 본질의 차원을 얘기할 때는 시간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이 거짓말처럼 흘러갔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

투명한 질서만이 혼돈처럼 자유로운 곳.



재영은 로렌스적 경험이 현실의 옷자락에 닿는 순간, 칼끝이 살을 파고드는 벼락같은 통증을 느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위장이 쥐어짜듯 비틀어졌다. 역한 취기가 통증을 앞세워 맹렬하게 신경을 파고들었다. 그 위세에 눌려 만개한 오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잠시였지만 고통마저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으윽.”



지독한 갈증과 함께 위액이 역류할 듯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재영은 손을 뻗어 머리맡을 마구 뒤졌다. 가까스로 주전자가 손에 잡히자마자 재영은 입으로 가져와 있는 대로 쏟아 부었다. 미지근한 물이 식도를 타고 흘러내려 위장에 닿는 순간 묵직한 통증이 엄습했지만, 재영은 미간과 이마를 찌푸린 채 꾸역꾸역 물을 밀어 넣었다.



“꺼억.”



고개만 쳐든 채 급하게 마신 물 때문에 트림이 터져 나왔다. 어지간한 통증은 수장시켰지만 그 바람에 토할 것처럼 위장이 출렁거렸다. 재영은 힘겹게 몸을 뒤집어 물의 역류를 막았다. 도대체가 인간이란 과거의 고된 일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족속이다!



“끅.”



재영은 다시 한 번 트림을 한 후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봤다. 칠흑 같은 어둠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기억 속의 얼룩덜룩한 무늬가 두 눈에 어지러웠다. 다시 위장이 울렁거렸다.



‘제기랄!’



재영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간 위장의 상태를 다스렸다. 몇 가지 생각들이 뒤죽박죽 머리를 스쳤지만, 아직도 뚜렷한 잠의 잔재가 의식을 끌어내렸다. 재영은 물을 빨아들이는 마분지처럼 온몸이 나락으로 빠져드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자 의식을 차단하는 스위치가 꺼지고, 잠을 불러오는 스위치가 켜졌다. 태고 이래로 반복돼온 빛과 어둠의 공전처럼, 두 개의 상태가 역전되는 순간이었다. 재영은 혼신을 다해 잠의 입구에 감각과 정신을 풀어놓았다. 의식적으로 무의식의 세계로 파고들었다.



생각을 버리면 오감이 깨어나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열리리라. 생명으로 충만한 그곳에서는 무엇이 허구이고 무엇이 진실이란 말인가? 내가 벌이는 이 지루한 고투는 냇물을 거쳐 작은 강에라도 이를 수 있을까? 바다는 거대한 수면에 때 없는 파문을 일으켰다는 이유만으로 기꺼이 자신의 품을 내어주려 할 것인가?



재영은 꿈꿨다, 손을 뻗으면 잡히는 주전자처럼 질서가 감각처럼 살아 있는 세상을. 생명의 회로에는 어떤 결함도 없기에 들여다보지 못할 실체도 파헤쳐야 할 이면의 진실도 없는 세상을. 만물의 소리와 숨결, 색체와 향기가 내는 것들이 일체의 사고가 배제된 오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투명한 세상을 꿈꿨다. 질서가 혼돈처럼 떠다니는, 어떤 여과장치도 정형화된 논리와 이념의 창도 필요 없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그보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한 세상을 향해 고뇌하고 투쟁하며 연대를 꿈꿨다.



하지만 진실은 항상 의식이 튀어나와 불굴의 노력으로 물질과 직관의 결과를 뒤집는 데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진실은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끊임없는 노력이, 끝없이 필요했다. 재영은 늘 거기서 멈칫거렸다. 이면에 자리한 채, 배후에서 작용하는 거대한 힘은 늘 그쯤에서 멈추라 경고했고 회유했으며 때로는 자신을 무자비하게 찍어 눌렀다. 재영은 그 압도적이며 일방적인 힘에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가 증명하듯, 모든 권력은 시스템에서 나온다. 그것은 지적생명체인 인류 탄생의 순간부터 구축되어 온 것이다. 그 압도적이며 가공할 실체 앞에서 한 명에 불과한 개인이 머뭇거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순수한 용기가 필요했다. 어떤 매개체도 필요 없는, 어느 수정처럼 맑은 오월의 아침에 경험했던 그 몇 분의 무작위적인 빙의처럼.



재영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그 경험의 순수함 때문에 탄식했지만, 시대의 예언자와 몽상가들은 언제나 실제적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사막에 들어가 육체를 핍박하고 물질을 멀리한 채 명상에 잠길 수 있었으나, 세상에 나와 온몸으로 부딪치는 행위의 위대함을 알지 못했다. 이성을 차갑게 유지했음에도, 명상과 고뇌의 양이 무엇과도 비견될 수 없다 해도, 예언자가 본 것은 극도로 고양된 감정과 각성된 정신이 만들어낸 자기 체험적 영혼의 울림이었을 뿐이다. 그것은 신비한 천상의 경험으로 채색됐지만 시대를 바꿀 전능한 말도 거룩한 질서가 구축되는 그 어떤 역사의 현장도 증거하거나 제시하지 못했다. 그들은 성찰의 순간에 들었던 천상의 말에 압도돼 삶과 죽음과, 관계와 사랑의 본질에서도 벗어나 그들만의 언어와 성역에 머물렀다. 예언자는 지상의 가난과 천국의 보상만을 떠들고, 몽상가는 반복되는 이상의 혼란과 찬란한 패배의 기억만을 부추길 뿐이었다. 그들은 모호하게 말할 뿐, 실제적인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오직 스스로 구축한 그들의 성서와 성전에서만 머물러 절대 다수의 희생과 복종을 요구하거나 강요할 뿐, 의도된 분노와 탐욕에 의거한 ‘사탄의 맷돌’식 일탈을 조장했다.



신이 인간의 삶에서 모호함을 유지하는 것처럼 이제 예언자와 몽상가는 지상에서의 완전한 퇴장을 준비해야만 한다. 그들을 모조리 경계의 변방으로 영구 추방시키거나, 아무튼 그들의 기억을 역사에서 삭제해서라도 다시는 부활하지 못하게 완벽히 처단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화신인 ‘자기조정 시장’과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독재를 꿈꿨던 마르크스의 몰락처럼, 그들의 퇴장은 ‘속도의 파시즘’적인 진보의 역사에서 절대 다수의 희생과 죽음을 선동했던 얼치기 합리주의와 어설픈 휴머니즘의 패배로 기록돼야만 한다. 하지만 그들이 떠난 자리에 들어와 신처럼 군림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거대 언론, 지배를 꿈꾸다>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재영은 거대한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분명 꿈속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생생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재영은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일 수 없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어둠은 다가갈수록 멀어졌고, 물러설수록 다가왔다. 감각과 이성은 초라한 방에 갇혀버린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희망이란 구석진 천장에 늘어져 있는 거미줄에 간당간당 매달려 있는 세월의 무게 같아서 몇 점의 먼지에도 끊어질 듯 위태로웠다. 일체의 사고가 배제된 오감은 물먹은 마분지처럼 아예 작동하지도 돌아오지도 않았다. 감각이 느끼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란 이성의 체계에 갇혀 이미 죽어버린 경험으로 물컹물컹 흐느적거리거나 널브러져 있었다. 인류 대부분의 삶이란,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을 향한 무차별의 고투는 이렇게 이름 모를 공동묘지에 수장되거나 아무렇게나 매장돼 버렸다. 투명한 진실과 그 끝에 서 있는 초라한 희망, 재영이 붙들 수 있는 것은 그런 주변적 요소의 허탈함이 거의 전부였다.



그래, 언제나 희망이 문제였다. 희망은 늘 존재했고 단 1퍼센트만으로도 우리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두려움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1%의 가능성에라도 움직여야 한다면, 우리가 실패할 압도적인 확률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99%라는 일방적인 위험에 노출되는 우리는 누가 지켜줄 것인가? 1%의 독점은 99%의 희망에서 작동할 뿐, 희생의 대가가 무엇인지 전혀 말해주지 않는다. 지금부터 또 얼마나 많은 고투를 벌여야 우리는 99%의 희망이란 자인한 고통과 좌절, 일방적인 희생의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재영은 그 빌어먹을 1%의 희망 때문에 너무나 힘들고 두려웠다.



신이란 또 무엇인가? 격랑 치는 파도 속에서 신에게 기도한 소수만이 빠져 죽지 않았다면 기도하고도 물에 빠져 죽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왜 성공한 종교들이란 이 세계에서 번창하는 세력들에게만 그렇게도 관대한 것일까? 가난과 핍박, 차별에 대한 보상을 다음 세상에서 받으라 하면서 기득권 세력에 유리한 말만 되풀이 하는 저의란 무엇인가? 끝 날에 믿는 모든 이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천국에 이끌려 올려 진다면, 신의 법정에 어떤 세속의 부자를 세울 것이며 어떤 세속의 가난한 자에게 보상을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정의란 어디에 있으며 언제까지 원죄 없는 구원을 좇아야 이 질곡의 땅에서 평화로이 잠들 수 있단 말인가? 재영은 지독히 상업화하고 근본주의자들이 판치는 종교와 아직 제대로 된 공통의 준칙도 없는 사회와의 접촉이 두려웠다. 수많은 역사적 사례에서 보듯이, 종교와 사회의 만남은 그 무엇으로도 말릴 수 없는 지극히 휘발성 높고 마녀사냥적인 비방과 폭력이 난무하는 반인륜적이며 비이성적인 위험천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거대 언론, 지배를 꿈꾸다>



점차 생각의 양이 늘어나자 재영은 슬슬 잠에서 빠져 나왔다. 대부분의 숙취는 가셨지만 갈증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지만 12평 원룸에는 지독한 정적과 어둠만이 무성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재영은 더듬더듬 기어가 책상 위에 놓아둔 노트북 전원을 눌렀다. 독점적 권리를 나타내는 특유의 멜로디가 흐른 후, 태초 이래로 그 견고함을 유지해온 어둠이 디지털 전사의 빛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윽고 어둠이 사력을 다해 반격했지만, 얼마 안 가서 둘은 알맞은 선에서 싱겁게 타협해버렸다. 잠시 동안 빛과 어둠이 치열하게 다투는 잔재로 흔들리는 회색지대의 경계선을 말없이 응시하던 재영은 손깍지를 한 상태에서 두 팔을 머리 위로 뻗으며 무슨 오래된 응어리를 토하듯 하품을 내뱉었다. 아직도 숙취의 나른함이 남아 있던 세포 하나하나에 서서히 산소가 공급되더니 잃었던 활력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천추 2015.06.03 08:31 신고

    재미있게 잘보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시작하세요 ^^

  2. 참교육 2015.06.03 09:13 신고

    처음부터 읽어야 하는데...
    잘 보고갑니다.

    • 늙은도령 2015.06.03 13:28 신고

      그냥 즐기시기만 하면 됩니다.
      아직 완성되지도 탈고도 안한 소설이니까요.



MBC 경영진의 막장행태가 언론사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은 수준의 금도를 넘었습니다. 유능한 인재를 시설관리부서로 돌리고, 공영매체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던 직원들은 무차별적으로 해고하거나 보복인사를 가하고 있습니다. 사회 전체가 보수화되자 슈퍼갑질의 온상인 권위주의적 폭력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MBC 경영진은 이런 분위기를 악용해 시민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를 유린하고, 시청자를 볼모로 권력과 자본에게 극도의 아부를 내보이고 있습니다. 임기제 사장과 경영진에 불과한 그들은 국민의 재산인 주파수를 이용해 사리사욕만 채우고 있습니다. 영혼이 타락한 그들은 조현아도 울고 갈 슈퍼갑질을 끊임없이 벌이고 있습니다.





샤를리 에브도가 이슬람교의 예수인 마호메드를 도를 넘은 만평을 통해 지속적으로 폄하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테러를 받았을 때, 어떤 경우에도 표현의 자유가 침해받아선 안 된다며 맹비난을 퍼부었던 MBC 경영진이 권성민 PD의 자조적인 만평이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해고를 강행했습니다.





MBC 경영진은 권성민 PD가 자신의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편향적이고 저속한 표현을 동원해 회사에 대한 명예훼손을 한 행위로 중징계를 받은 뒤 또다시 같은 해사행위를 수차례 반복”한 것을 해고사유로 들었는데,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도 편향적이고 저속한 표현으로 가득합니다.






특히 MBC 경영진이 내놓은 보도자료의 제목이 ‘회사를 향한 근거 없는 반복 비방 등 해사행위는 엄단하겠습니다’여서, 사측의 입장만 대변한 그 편향성과 저속함이 극에 이르러 있습니다. MBC를 몇 개의 드라마와 오락프로를 앞세워 탐욕만 쫓는 방송사로 전락시킨 경영진이야말로 해고돼야 할 자들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행태를 떠올리는 MBC 경영진의 권 PD 해고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이중 잣대와 이율배반적 논리 때문에 정당성을 상실했습니다. MBC 노조도 권 PD의 해고가 ‘표현의 자유에 재갈을 물리는 반민주적인 폭거’라며, ‘해고는 직원에게 가해진 사형선고와 다름없기에 경영진의 행태가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테러와 무엇이 다르냐’며 강력한 투쟁을 예고했습니다.





김재철 사장의 부활을 보는 듯한 MBC 경영진의 슈퍼갑질에 맞서기에는 MBC 노조가 너무나 무력해져, 길고긴 법정 싸움을 거치지 않는 한 괘씸죄로 해고된 권성민 예능국 PD는 재심을 통해 해고가 확정됐습니다. 정수장학회와 여당 추천 이사들이 방문진을 장악하고 있어, 무력화된 노조의 투쟁이 성공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무한도전의 광팬이나 ‘떳다 장보리’처럼 드라마 시청자들이 MBC 경영진들의 폭거와 테러에 맞서 시청을 거부하지 않는 한, 지상파 지위를 악용해 종편과 케이블을 넘나들며 공영방송의 역할을 포기한 채 탐욕만 추구하는 MBC 경영진은 민영화의 날까지 줄기차게 달려갈 것입니다.





열악한 제작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MBC 직원들과 협력사들의 노력을 이익만 탐하는 행위로 만드는 MBC 경영진은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테러를 일삼는 권력과 자본의 개로서 대한민국을 천민자본주의가 횡행하는 나라로 만들 것입니다.





이런 MBC 경영진의 일방적 해고가 치명적인 것은, 표현의 자유가 극도로 위축되는 것과 함께 상시적 해고가 가능하고 비정규직을 무한대로 늘릴 수 있는 노동유연화가 타 방송사로, 타 분야로 확대될 수 있는 선례를 축적한다는 것입니다. 강정마을에서 이루어진 국방부의 행정대집행도 시민의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는 초법적 노동유연화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남의 일이라고 외면하고, 내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침묵할 때 악은 번성하고 기득권은 부와 기회와 권력을 손쉽게 늘려가며, 세습할 수 있게 됩니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에서 소수의 과두정치로 변질되고 있으며, 그것이 권성민 PD의 해고에서 확연하게 드러났습니다. 





타락할 대로 타락한 MBC의 직원으로서 ‘세월호 보도 참사’에 대해 사과의 글ㅡ이것 때문에 괘씸죄에 걸린 권 PD는 정직 6개월과 비제작부서인 경기지사 수원총국으로 유배를 당했다ㅡ을 올린 권성민 PD의 해고가 다른 직원들에게 내적인 검열로 작용하지 않기를 바라며, 수원 바로 옆의 용인에 사는 늙은도령이 진심에서 우러나는 격려와 위로의 말을 보냅니다.





《지혜의 일곱기둥》의 로렌스와 《나는 고발한다》의 에밀 졸라의 말을 빌리자면 “성공이 확실히 보장되는 곳에 명예 따위는 있을 수 없으며, 진실은 항상 의지가 몸을 뒤척거리며 터져 나가려고 기다리는 곳에 숨어 있습니다. 이제 진실이 전진하기 시작했으니 무엇도 그것을 막을 수 없으며, 그 선두에 권성민 PD가 있을 것입니다. 힘내십시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저녁노을* 2015.01.23 05:58 신고

    씁쓸하군요.
    노을이두..응원하고 갑니다.^^

    • 늙은도령 2015.01.23 15:23 신고

      정말 MBC 개판됐습니다.
      김재철부터 시작해 현 경영진에 이르기까지 사후 피해를 받아내야 합니다.

  2. 참교육 2015.01.23 06:47

    찌라시의 전형이 된 MBC...이제 몇 안남은 양심까지 청소하고나면.... 박근혜와 함께 곤두박질칠게 뻔합니다.

  3. 꼬장닷컴 2015.01.23 08:00 신고

    저도 이 기사 보고 열받아서 한참을 씩씩거렸는데요.
    저 같은 경우 뉴스는 물론 드라마/예능도 MBC는 아예 안 봅니다.

    지난 18대 대선 때 공정성 위반으로 선거방송심의위원회로부터 각
    방송사가 경고를 받았는데 지상파 중 MBC(8건) SBS(2건) KBS(1건)
    종편은 채널별로 채널A(10건) MBN(7건) TV조선(6건) JTBC(4건) 순입니다.
    가장 심각한 곳이 MBC와 채널A였습니다.
    그런 MBC가 이번에 권성민 PD가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해고했는데 MBC에 과연 더 실추될 명예 따위가 남아 있긴 했을까요?
    영혼없는 권력의 나팔수가 감히 명예를 입에 올리다니 구역질 납니다.

    • 늙은도령 2015.01.23 15:25 신고

      저도 MBC는 안 보는데 토토가는 재방송으로 봤습니다.
      하도 토토가 하길래 대체 무엇인가 확인하고 글로 옮기려 봤는데 비판 거리가 없어서 그냥 즐겁게 시청했습니다.

  4. Arthur Jung 2015.01.23 09:15 신고

    4대강, 자원외교 등과 함께 이명박의 업적 중 하나죠..

    • 늙은도령 2015.01.23 15:26 신고

      가장 악랄한 업적이지요.
      방송을 장악하면 국민의 언로가 막히는 세상이니까요.

  5. 공수래공수거 2015.01.23 09:18 신고

    MBC 노조가 왜 이리 무기력해졌습니까?ㅡ.ㅡ:

    정말 기레기 방송입니다

  6. 耽讀 2015.01.23 09:57 신고

    요즘도 뉴스데스트를 하는지 궁금합니다. 엠비씨라는 방송 자체를 안 본지 오래되었습니다.

    • 늙은도령 2015.01.23 15:27 신고

      저도 기사를 보고 관련 기사들을 모두 다 검색해봤습니다.
      그간의 과정도 다 확인해 보고요.
      엠병신을 어떻게든 제자리로 되돌리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엠병신에 대한 감시는 계속될 것입니다.

  7. 바람 언덕 2015.01.23 12:09 신고

    MBC는 김재철 이후로 완전히 엠병신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혹독한 댓가를 치르도록 해야 합니다.

    • 늙은도령 2015.01.23 15:28 신고

      네, 반드시 혹독한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반드시!!!!!!!!!!!!!!!!!

  8. 다노시무 2015.01.23 12:14 신고

    쥐새끼두 그랬다지요
    당선 되자마자 언론부터 제끼라구..씁씁하네..요..ㅠ

    • 늙은도령 2015.01.23 15:28 신고

      네, 보수놈들의 전형적인 통치방식입니다.
      TV가 없는 집이 없고 모두가 시청하니까요.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하고, 단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이지만 ‘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는 하나의 목표로 귀결된다. 강자와 승자 위주로 쓰인 역사와 세계사를 조금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것을 통해,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깔려 죽은 이름 모를 수많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희생과, 단 한 번도 제값을 받지 못한 피와 땀을 되살리는 것이다. 



나의 능력과 건강, 나이에 비해 도무지 이루기 힘든 지난한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인류의 위대한 현인인 중 두 명의 입을 통해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길에 나서려 한다. 내가 이 두 사람을 인용하는 것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미셀 푸코와 발터 벤야민과는 달리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회의주의자이자, 타협을 모르는 진정한 용기 때문이다. 그 처음은 『열린사회와 그 적들2』의 저자 칼 포퍼의 말이다.

 

 

“사람들이 인류의 역사라고 말할 때 그들이 생각하며 그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은 정치권력의 역사이다...정치권력의 역사는 국제적 범죄와 집단학살의 역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도대체 인류의 구체적 역사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의 역사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희망과 투쟁 그리고 수난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의 신봉자이자 확장자였던 칼 포퍼는 마르크스로 대표되는 역사주의 학자들의 역사결정론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갔다. 비록 그는 마르크스 비판에서 지나칠 정도로 과학적 잣대를 들이대 사회학적 오류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최소한 역사의 주인에 대한 그의 인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 또한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2』에 나오는 다음의 인용문들을 보자.

 

 

“신이 보통 <역사>라고 일컫는 국제적 범죄와 대량학살의 역사에 자기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신을 모독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잔인하며 치졸하기도 한 짓거리에 대한 이야기가, 인간의 삶의 영역 안에서 참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제대로 말해줄 수 있겠는가. 잊혀진 사람들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슬픔과 기쁨, 그들의 수난과 죽음, 이것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진 인간경험의 참된 내용이다.”

 


인류의 역사는 모든 시대에서 평범하게 살다간 고달픈 삶을 반영해야 하며, 온갖 피해를 감내했던 대다수 인류를 포괄하는 우리 모두의 역사가 돼야 한다. 승자나 강자의 역사는 극소수의 영웅적인 신념에 의해 절대다수의 약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집단 최면의 거짓되고 희생을 강요하는 죽음의 역사였다. 성공한 사람의 기억만이 유효하다면 인류는 동물 중에 가장 천박한 동물에 다름 아니다.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짐승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빌 브라이슨이 『거의 모든 것의 역사』에서 “만약 우리의 외로운 우주에서 생명이 어디를 지나왔는가를 기록하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감시할 일을 맡길 수 있는 생물을 디자인하려고 한다면, 그런 일을 절대 인간에게 맡기면 안 된다”고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명에 의해서나, 신에 의해서나, 아니면 당신이 무엇이라고 부르고 싶은 바로 그 존재에 의해서 선택”됐다고 말했다. 미우나 고우나 인간만이 우주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류와 우주의 탄생과 역사, 미래에 대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자, 그런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에서의 삶이 행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그리하여 인류가 공존과 상생의 진정한 가치에 눈을 뜰 수 있도록 “우리는 열린사회를 위하여, 이성의 지배를 위하여, 정의와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그리고 국제적 범죄의 통제를 위하여 우리가 벌이는 투쟁의 관점에서 권력정치의 역사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역사가 그 자체로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의 이러한 목적들을 역사에 부여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가 자체로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역사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것이며, 기록은 그 이후에나 필요한 것이다.



극소수의 승자나 강자의 입장에서 역사가 기술되면 인류는 언제나 집단학살과 전쟁범죄의 역사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어떤 형태로든 탐욕과 죽음의 역사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 역사가 만인의 것이 되지 못할 때, 역사는 그 자체로 승자와 강자의 권력의 도구로 전락한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니, 이제 우리가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이자 검열관이 되어야 한다.

 

 

합리적 보수(유럽의 경우, 미국에서는 진보, 한국에서는 중도)의 가치를 드러내는 다음과 같은 그의 주장들도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는 휴머니즘의 본질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철학자로 내가 꿈꾸는 역사의 재구성에 모범적 예다. 역사의 주인은 강자나 승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만인의 행복을 위해 '사회계약론'의 필요성을 제시한 루소의 『인류 불평등기원론』의 핵심 주제도 이와 비슷하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사회를 이루는 일반의지를 부정하고, 인류 이성의 포기까지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과 역사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평등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이 평등권을 위한 투쟁을 벌일 것을 결정할 수 있다. 국가와 같은 인간의 제도들은 그 자체로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보다 합리적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을 벌일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프랑스의 행동하는 자유주의자였고 급진적 진보주의자였던 『분노하라』는 소책자로 널리 알려진 고 스테판 에셀을 떠올리는 칼 포퍼의 외침은, 발터 벤야민과 미셀 푸코, 칼 폴라니와 한나 아렌트처럼 ‘신은 승자와 언제나 함께 한다’는 통념을 철저하게 배격한다. 동시에 그는 모든 것을 한 번에 이루려는 폭력적인 혁명도 반대한다. 열린사회라는 것이 꾸준한 변화들이 쌓여 점진적으로 이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칼 포퍼의 열린사회가 마르크스의 '자유의 왕국'과 다른 점은 최종적인 모습이 결정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생산관계인 체제의 하부구조가 정치와 문화 및 교육과 예술 같은 체제의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궁극의 유토피아를 확정할 수 있었지만, 어떤 결정론도 거부하는 칼 포퍼는 인류의 역사를 열린 상태로 나두었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그것이 사회경제적 약자와 이름 모를 무명용사들의 것이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자유주의적 이상론에 빠지지 않고 열린 세상을 위한 정의로운 투쟁을 역설한  것으로 이어졌다. 바로 이 점에서 칼 포퍼와 칼 마르크스는 '극과 극은 통한다'는 벤야민의 성찰처럼, 서로간에 사상의 소통이 가능하다.      

 

 

“우리는 열린사회를 위한 투쟁과 그 적들(궁지에 몰리면 이들은 파레토의 충고에 따라 인도주의적 정감을 앞세운다)과의 항쟁을 벌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 우리는 역사를 해석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무엇이 삶의 목적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에게 달렸다. 사실과 결정의 이러한 이원론은 아주 근본적인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실 그 자체는 아무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은 우리의 결정을 통해서만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이는 사회적 생산관계의 산물인 특정 제품이 자신의 삶과 관계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고 말한 마르크스의 물신주의 비판과도 일맥상통한다. 언제나 결정권은 인간의 주체성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긴 칼 포퍼는 마르크스의 역사적 결정론을 비판한 것이지, 그의 휴머니즘적인 신념과 과학적인 분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철저한 위선자였고 차별주의자이자 인종주의자였던 플라톤과 기득권을 옹호하는데 자신의 능력을 쏟아부은 헤겔을 맹렬히 비판했던 것과 비교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리처드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도 초기 기독교의 이론을 제공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으며, 월가의 현인으로 등장한 탈래브의 《블랙스완》을 관통하는 주장도 플라톤의 주름지대(권위가 만들어낸 단순성, 다양한 토론이 가능한 것을 원천 봉쇄하는 것)를 극복하는 것에서 출발하지 않았던가. 플라톤의 주장처럼 변화 자체가 부패라면 열린사회는 애당초 불가능하고 인류의 진보도 불가능하다. 플라톤은 이것을 막으려 했기 때문에 열린사회의 적이 된 것이고, 전체주의의 기원이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를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논리처럼 이용하는 자들이 얼마나 저자의 의도를 왜곡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같은 책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함으로써, 인간의 이타성에 대해 분명히 하고자 한다. 도킨스가 이기적이라고 한 것은 유전자 차원에서 적용되는 논리로 그들 또한 무한경쟁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과 공존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기도 한다는 사실도 아울러 상기하고자 한다.  

 


“30억 년 전부터 이 지상에서 언급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자기 복제자는 DNA였다. 그러나 DNA가 그 독점권을 영원히 가지리란 법은 없다. 새롭게 시작된 진화가 이미 낡은 유형이 된 진화를 답보할 이유는 없다. 유전자를 선택의 단위로 하는 낡은 유형의 진화는 뇌를 만들어 냄으로써 최초의 밈이 등장하면서 이들은 낡은 유형의 진화보다 훨씬 빠른 독자적 진화를 시작했다......일단 유전자가 재빠른 모방 능력을 가진 뇌를 그 생존 기계에게 만들어 주면, 밈은 자동적으로 세력을 얻을 것이다...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 뇌가 모방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뿐이다. 그러기만 하면 밈은 그 능력을 십분 이용하면서 진화해 나갈 것이다......우리는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의 기계로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참으로 멋진 표현들이 많습니다.

철저한 실처하는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았던 로렌스(아라비아의 로렌스 라는 영화의 실제 주인공)는 저의 롤모델 중 한 명입니다.

책이 세 권으로 나왔는데 독서가 삶의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가 아니면 도전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국의 정보요원으로 아랍의 독립을 위해 이중스파이를 했던 로렌스가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았는지, 세상을 보는 눈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문학이나 철학에 매달렸으면 역사상 최고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삶 자체를 행위하는 것에 두었던 사람이라 그 뛰어난 재능을 후대에 남기지 못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좋은 문장들을 일부만 발췌해서 올립니다.

블로거 여러분들이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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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극한에 도달하게 되면, 정신은 숨이 탁 막혔다.

이런 식으로 정신이 고양될 때마다 영혼이 비정상적으로 우위를 점령하고 육체는 지금까지의 온건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삶에 대한 비탄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고통에 대한 무자비한 태도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실패한 종교들의 잔해가 사막과 정착지가 만나는 지점에 남아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그 모든 교의들의 발생이 그곳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예언자의 삶은 모두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다. 예언자의 탄생은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장소로 정해져 있으며, 예언자들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난폭한 사람들에 의해 사막으로 쫓겨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얼마 동안 명상과 금욕의 생활을 한다. 마침내 사람들에게 전할 계시를 깨달은 예언자는 다시 도시로 돌아와서 설교를 한다. 세계 3대종교의 창시자들은 모두 이 과정을 충실히 따랐다. 이 놀라운 우연의 일치는 그들의 뒤를 따라간 무수한 사람들에 의해서 일종의 법칙처럼 굳어졌다.


 

마을의 명상가들에게 있어서 니트리아 사막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충동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말로 그곳에 신이 머물러 있기 때문이 아니라, 완전한 고독 속에 파묻혀 있으면 그들에게 전해지는 계시의 말씀을 더욱 확실히 들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랍의 사막은 영적인 얼음집이었다.


 

신을 한 번 대면한 예언자들은 사막에서 돌아온 후에 (검은 유리처럼) 오염된 매개체를 통해서나마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그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그의 충만한 비전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멀게 하며 입을 막아버린다. 그리고 베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또한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황량한 곳을 찾아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 자신과 이웃들로 하여금 세속적인 모든 것들을 던져버리게 하려는 노력은 인간적인 약점에 걸려서 실패하고 만다.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촌사람이나 도시 사람이나 날마다 획득과 축적이라는 기쁨으로 자기 자신을 채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반동적으로 물질적인 환경이 인간의 가장 추잡하고도 가장 소중한 조건이 된다.


 

다른 사람들을 가장 철저한 금욕주의로 이끌었던 삶에 대한 자랑스러운 멸시가 오히려 그를 더욱 커다란 절망으로 이끌었다. 그는 부주의하게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고 어서 빨리 마지막 순간이 오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육체를 탕진하는 것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이 가장 아름다운 천국으로 올라가는 방법을 발견했다. 결국 셈족은 욕정과 자기부정 사이를 끊임없이 오고 갔다.아랍인들은 그네를 타듯이 하나의 이상 위에서 얼마든지 왕복할 수 있었다. 충성스러운 정신은 그들을 순종적인 노예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상이 사라질 때 위대한 과업은 끝이 난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이상에 관한 한 아랍인들은 맹목적이고 단순하고 고집불통의 어린아이였다.그들에게 육체와 영혼은 영원히 필연적으로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정신은 낯설고 어두웠으며 절망과 환희로 가득 차 있었고 질서가 없었다.


 

하지만 신앙에 대해서는 이 세상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더욱 커다란 열정과 메마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출발의 민족이다. 그들에게 추상적인 것은 가장 커다란 동기였다. 그리고 무한한 용기와 다양한 변화의 과정을 거쳐서 끝내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물처럼 불안정하다. 그리고 아마도 끝내는 물처럼 모든 것을 극복할 것이다. 생명이 시작된 이래로 그들은 끊임없는 파도가 되어 육체의 해안에 스스로를 부딪치면서 살고 있었다.


 

언젠가는 걷잡을 수 없는 파도가 물질적인 세상이 자리 잡고 있던 그곳을 완전히 뒤덮어 버릴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신은 그 수면 위로 움직일 것이다.


 

세속적인 일의 저항을 받고 물러난 그 파도의 잔해를 씻어내는 것은 뒤를 이어서 밀려오는 파도가 할 일이다. 그래서 언제가 때가 무르익으면바다는 또다시 커다란 물결을 일으켜서 서서히 몸을 일으킬 것이다.


 

그들은 출발의 민족이다. 그들에게 추상적인 것은 가장 커다란 동기였다. 그리고 무한한 용기와 다양한 변화의 과정을 거쳐서 끝내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물처럼 불안정하다. 그리고 아마도 끝내는 물처럼 모든 것을 극복할 것이다. 생명이 시작된 이래로 그들은 끊임없는 파도가 되어 육체의 해안에 스스로를 부딪치면서 살고 있었다.


 

언젠가는 걷잡을 수 없는 파도가 물질적인 세상이 자리 잡고 있던 그곳을 완전히 뒤덮어 버릴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신은 그 수면 위로 움직일 것이다.


 

 

마치 물이나 혹은 기름처럼 모든 일에 조용히 그리고 끈기 있게 스며들었다.


 

Non nobis, Domine.  시편 115 1. 주여, 우리에게 영광을 돌리지 마옵소서.


 

언제나 진실보다 약간 더 높은 목표를 좇으려고 애를 쓰다가 자신을 소모해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있었다.


 

강철이 자신을 담금질하는 불길에 대해 고맙게 생각할 것 같소?


 

과연 우리가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한 가지 목표물을 너무나 오랫동안 바라본 결과 내 눈이 흐려진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견해란 얼마든지 말로 논쟁할 수 있는 문제이며, 확신 또한 수정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투쟁은 오직 비물질적인 논리의 옹호자들이 다른 논리의 옹호자들을 맞서서 저항할 만한 수단이 더 이상 없을 때 비로소 끝날 수 있다.


 

한 개인의 죽음은 수면 위에 떨어진 작은 돌멩이처럼 순식간에 물 밑으로 가라앉고 말지만 그것을 일으킨 슬픔의 파문은 한참 동안이나 멀리 퍼져나간다.


 

지식을 통해 얻은 사기는 무지에 의해 무너질 수 있다.


 

극단까지 치열하게 살게 하는 젊은 시절의 낭만은 사라지고 마는 법이다......그리고 우리 대부분이 그렇듯이 육체보다 더 빨리 죽을 것이다.


 

신이란 확신은 다른 모든 희망을 죽여버리는 독약 같은 것이었다.


 

사막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목표를 표현하기에는 너무 초연했고, 이상을 전달하기에는 물질적으로 너무 가난했으며, 복잡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장 남쪽에 위치한 예루살렘은 비록 더럽고 누추한 도시였지만 셈족의 모든 종교가 이곳을 거룩한 성지로 만들어놓았다. 기독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은 과거의 유물을 직접 관찰하고 또한 역사의 전통을 실질적으로 체험하기 위해서 해마다 이곳으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 일부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의 정치적인 미래를 위하여 예루살렘을 보고 싶어 했다. 이렇듯 과거와 미래의 단합된 힘이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에 이 도시에는 거의 현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극히 일부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예루살렘 사람들은 마치 호텔에서 일하는 심부름꾼처럼 아무런 개성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오가는 여행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살아갈 뿐이었다.


 

우리 영국인들은 모방을 풍자로 여기지만, 프랑스인들은 칭찬으로 여겼던 것이다.


 

감각은 앞으로도 뒤로도 도달할 수 없다. 일단 느낀 감정은 정복된 감정이며 이미 죽어서 사라져버린 경험이다. 우리는 그것을 표현함으로써 죽은 감정을 매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에 육신보다는 영혼이 훨씬 더 일찍 늙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그 오랜 수고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얻는 것이 없었다.


 

성공이 확실히 보장되는 곳에 명예 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


 

우리의 경직된 눈에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이상이란 개인적인 차원의 것들을 초월하는 듯이 보이기 마련이다. 그런 이상은 우리의 일상적인 세상의 잣대보다 선행하는 것이다.



일단 열광적인 흥분의 순간이 사라지고 나면, 비로소 우리는 고단한 육체를 돌아보았다. 그럴 때마다 육체는 단순히 영혼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가장 고귀한 목적을 달성했다는 주제넘은 만족함에 가득 차오르곤 했다.


 

언젠가 닥칠 최후의 심판일을 위해서 선악의 대차대조표를 딱 맞춰놓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맑은 새벽에 출발했다. 지난밤에 오랫동안 사색을 했기 때문에 지성은 몹시 피곤해서 아직까지도 잠을 자고 있었지만, 감각은 태양과 함께 번쩍 눈을 떴다. 이런 아침에는 한두 시간 동안 이 세상의 모든 소리와 냄새와 색깔이, 생각을 통해 여과되거나 정형화되지 않고 개별적으로 직접 우리에게 와 닿았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충분히 자족하며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신의 창조물들에서 모양의 결함이나 부주의한 면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안타까운 마음 같은 것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이성은, 죽음이란 단지 육체가 정신의 사슬을 끊고 자유롭게 풀려나는 것에 불과하다고 속삭였다.


 

인생이란 너무나 개인적인 것이어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다. 한 개인의 죽음은 그의 마지막 남은 자유의지이며, 견딜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이자 은총인 것이다.


 

근시안적인 군중들이 여러 해 동안 헌신해 온 희망에 다 함께 올라타다 보면, 결코 원하지 않는 우상에게조차 신성(神性)을 씌우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 침묵 속에서 기도할 때마다, 그것의 존재는 점점 더 강력해지는 것이다.


 

자기희생을 하는 자들은 희생을 자신이 가진 고귀한 재능으로 간주한다. 이 세상에 자아를 완성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불행을 자발적으로 떠맡는 것보다 더욱 기쁘고 풍요로운 쾌락은 없다. 그 안에는 철저한 완벽주의와 상통하는 숨겨진 이기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고통을 당할 기회를 가로채는 것은 상대방으로부터 그가 당연히 받아야 할 정당한 고통을 빼앗는 것이다.


 

나에게 완벽한 응답이란 나와 똑 같은 이유에서, 똑 같은 방법을 통해서, 똑 같은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다.


 

부디 물질의 우위 속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기를. 또한 나의 생각을 고요히 잠재워서, 어떤 연상이라도 자유롭게 떠오를 수 있게 되길. 그래서 언제나 바싹 깨어 있을 수 있길.



진실은 항상 의지가 몸을 뒤척거리며 터져 나가려고 기다리는 곳에 숨어 있었다.


 

아무런 고통 없이 행동의 망각 속에 빠져듦으로써 의지와 인격을 차갑게 보관할 수 있었다.


 

용기처럼, 독자적으로는 온전히 존재할 수가 없고, 선하거나 약한 매개물이 있어야만 발현되는 자질들이 있다.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운 저녁이었다.


 

군복이라는 것이 평범한 대중들을 얼마나 냉정하고 딱딱하고 비인간적인 존재로 보이도록 만드는지, 또한 얼마나 그들에게 단일성과 질서를 부여하고 있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몸에 걸치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을 민간의 일상생활로부터 완전히 차단되도록 만드는 이 죽음의 제복은, 그것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와 몸을 국가에 팔았다는 표시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비록 처음에는 자발적인 계약이었다고 하지만, 그런 전제 때문에 그 계약자들이 덜 비참한 존재가 된다거나, 혹은 자발적이고 독립적인 인격을 가진 자가 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는 바보나 보통 사람이나 대등해지는 법이다.


 

길을 가던 순례자들은 이곳에 돌탑을 세웠다......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 탑 위에 돌 하나를 더 얹어놓곤 했다. 어떤 특별한 이유나 알려진 동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남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고 그 중 누군가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꿈을 꾼다그러나 그 꿈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밤에 꿈을 꾸는 사람은 밝은 아침이 되면 잠에서 깨어나 그 꿈이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내 깨닫는다반면에 낮에 꿈을 꾸는 사람은 몹시 위험하다그런 사람은 눈을 활짝 뜬 채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려고 행동한다그렇다나는 낮에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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