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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왜 필리버스터 중단이 3.1절 아침이어야 하는가?



필자는 4일 전 '이종걸은 왜 필리버스터를 멈출 수 있다고 했을까?'란 글을 통해, 야당이 테러방지법과 선거구획정안 처리 중에 하나(당연히 국회선거구획정안)를 선택해야 하는 외통수에 걸렸다는 것을 말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더불어민주당과 녹색당 의원들이 필사적으로 이어가고 있던 필리버스터의 열풍이 최고조에 이를 때여서 글을 쓰면서도 분노하는 마음은 냉정한 추론을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내가 나에게 묻고 추론한 것을 부정하고 싶은 내적 갈등은 총선의 날까지 전략적인 글쓰기를 이어가겠다는 다짐을 지키기 위해 두 번째의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4월13일의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압승하면 그 다음은 없다는 자기강박적 열망이 두 번째 글로 이어졌다면, 그 다음의 글들에서는 야당의 역할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필리버스터보다 정치경제적 약자의 아우성에 '테러'라는 검붉은 낙인을 찍을 수 있는 테러방지법에 초점을 맞췄다.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있는 한, 멍청한 김무성이 교활한 이한구에게 끌려다니는 한, 나라를 팔아먹어도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35%가 투표날만 벼르고 있는 한, 직권상정된 테러방지법의 독소조항들을 수정할 수 없다는 현실적 한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야당의 존재와 역할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필리버스터의 강행을 밀어붙이기 위해 논리적으로 빈약한 테러방지법 폐지를 외쳤고, 총선 연기라는 비현실적 주문도 마다하지 않았다.



김종인 위원장이 '공천에서 정무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비상대권을 요구하고, 박근혜의 경제실패와 전면전을 벌이겠다'고 말했을 때 필리버스터 중단이 결정된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부인하는 자기기만적 최면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다.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키느니 총선도 연기할 수 있다는 결기를 보여줄 수 있어야 박근혜와 새누리당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 채 총선 승리라는 기적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핵포기와 체제 보장이 포함된 평화협정 체결'이 아니면, '박근혜 임기 동안 3차세계대전의 단초가 될 수 있는 한반도의 돌발상황을 관리하는 것'이 목표로 보이는 미국-북한-중국의 삼각협상이, 김정은보다 종잡을 수 없는 박근혜의 승부수(사드의 한반도 배치)에 가로막힌 것에서 보듯이, 상승세로 접어든 지지율을 더욱 높이고 있는 필리버스터를 통해 더불어민주당이 박근혜로부터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이중 삼중의 확인을 거쳐야 하는 쓰레기들의 보도에 따르면 이종걸이 이끄는 원내대표단이 아니라, 김종인이 이끄는 비대위가 필리버스터의 중단을 밀어붙였다고 하는데, 이는 전형적인 정치적 립서비스로 치부하기에는 외통수에 걸린 더불어민주당의 입장이 곤혹스럽기만 하다. 개별적인 의원들로서는 필리버스터를 이어가는 것이 유리하지만 총선 결과를 책임져야 하는 비대위로서는 50%대의 투표율과 의제 전환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비박에 대한 진박의 일방적인 승리를 말해주는 김무성의 살생부 논란 사과가 생각보다 일찍 나온 것, 백의종군을 선택한 문재인의 영향력이 제2의 노풍으로 이어질 수 있는 확률의 불확실성, 박근혜의 3.1절 대국민담화를 기점으로 총선 패배가 곧 사망선고인 쓰레기들의 대대적인 반격, 김부겸의 중대결단으로 대표되는 컷오프의 후폭풍이 공천과정 전체를 망쳐버릴 수 있다는 현실적 고민 등이 필리버스터 중단이란 항복선언을 3.1절 아침에 발표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총선까지는 43일이 남았다. 정치적 이슈에 쉽게 달아올랐다 그보다 쉽게 식어버리는 냄비근성과 2주를 넘긴 적이 없는 단기적 기억상실증을 고려할 때,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던 일제의 강제점령에 대항해 전국적으로 광복을 선언한 3.1절 아침에 친일수구세력과 분단고착세력, 친일부역의 족벌언론에게 항복문을 받쳐야 하는 것이 무려 43일이나 남은 총선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냉정하게 계산하는 것은 필자의 능력 밖이고 본성에도 맞지 않는다.



김대중과 노무현이었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지 추론해보는 것은 폭발하는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격이지만, 산산히 타버린 다음에 무엇을 할 수 있고, 총선 승리에 일조하기 위한 전략적 글쓰기를 계속할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생각도 하기 싫다. 굴욕적인 위안부협상을 폐기시키고, 소녀상으로 대표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원혼과 70년의 통한을 풀어드리고, 역사마저 친일부역과 유신독재를 미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 3.1절의 아침에 항복선언을 내놓은 것만은 결단코 동의할 수 없다.





총선에서 승리하거나 선전하지 못하면 대선도 기대할 수 없을지라도, 친일수구세력에게 항복을 받치는 것이 3.1절 아침 9시라면 박근혜의 대국민담화를 무력화시키는데 최소한의 도움이 될 수 있을지언정, 지지자들의 거대한 분노와 폭발하는 항의마저 최소화하겠다는 얄팍한 계산에 무게를 둔 것이 아닌지 김종인 위원장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3.1절 아침을 선택하면 총선 승리에 도움이 된다는 보장은 무엇으로도 입증할 수 없지 않은가.   



해외언론들의 관심이 늘어나고 있고, 박근혜의 권위주의적 독재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한국정치를 외면했던 해외동포와 수많은 기업의 주재원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유권자들이 투표 참여를 독려하고 있는 와중에 사전 조율도 없는 3.1절 아침에 필리버스터 중단을 발표한다면 득보다 실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정권 교체를 바라는 유권자를 투표장으로 이끌어내려면 정무적 판단 이상의 무엇이 있어야만 한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거나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이라는 정치적 계산이 무엇에도 앞선다고 확신한다면, 이명박근혜 8년의 실정과 폭정이 단 하루라도 연장되는 것 자체가 지옥인 필자의 조급함과 어리석는 분노를 유신공주의 살인적인 물대포라도 빌려서 제압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3.1절 아침의 항복선언이란 결단코 받아들일 수 없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