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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

대박이란 없다, 나의 사업이야기ㅡ3



사기는, 어차피 칠거면 크게 처야 먹히는 법입니다. 나중에 담당자였던 김 과장과 김 대리가 저에게 해준 얘기로는 자신들에게 하루에도 10개 이상의 사업계획서가 도착하는데, 그중에서 극히 일부만 미팅을 잡는다고 했습니다. 그냥 묻혀버리는 것들의 80~90%를 넘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한테 운 좋은 줄 알라는 것이었지요. 



헌데 그들이 만난 수백 명에 이르는 벤처기업 사장이나 임원과는 180도 다른 제가 천하의 사기꾼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답니다. 동시에 정말로 상상을 불허하는 인맥을 갖고 있으나 아직까지 사업 경험이 없는, 그래서 현실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 찬 휘귀동물로 봤다고 합니다. 또한 광적인 열정에 걸맞게 제법 뛰어난 상상력과 영업력을 갖춘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이를 테면 구라가 무지무지하게 세거나 그것 때문에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특이한 별종이라고 생각했었다더군요.

 

 

어차피 공동사업 MOU란 얼마든지 파기할 수 있는 것이니, L통신사 입장에선 시간 말고는 특별히 손해날 것도 없는 일이어서, 일단 미친 척하고 사업을 진행해보자고 내부에서 결정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제가 제시한 인맥들은 그들에게도 절실히 필요했던 부분이기 때문이었고, 이후의 제 행보가 무척 궁금했다고 합니다. 세상에 공짜점심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탁월한 배포가 있거나 사기꾼 기질이 남다르면 공짜를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최종 결과가 어떠하던 간에 당시에는 대기업으로부터 공짜점심 비슷한 것을 선불로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자식들, 그때 저의 미친 제안을 냉정하게 거절했으면 제가 이렇게까지 재기불능의 몸으로 망가지지는 않았을 텐데. 어쩌겠습니까, 그것이 무모하기 이를 데 없었던 저의 만용이자 운명이었다면. 문제는 그 빌어먹을 운명이라는 것이 한참은 지나고나서야 혹시 운명이 아니었나, 그런 어리석기 그지없는 변명을 갖다 붙이게 만들어서 탈이지요. 인간이란 자살을 선택할 때조차도 자기합리화를 해내는 특출난 유전자를 갖고 있는 기만적 동물입니다.   

 

 

물론 안 그런 사람들도 많지만, 어쨌거나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직원 한 명에 사무실도 없고 자본금도 없고 투자도 받지 못한, 당시까지는 숫총각(혼자서 하는 놀이를 제외하면)이었던 놈이 자산이 몇 조에 이르는 대기업에 무작정 찾아가서, 내가 너희들도 먹여 살려줄 테니 공동사업계약서 한 장만 도장 콱 찍어달라고 한 것이었으니까요. 게다가 도장만 찍어 주면 모든 것을 알아서 해낼 테니 무조건 믿어달라고 큰 소리까지 뻥뻥 쳤으니 말입니다. 



이런 뻥이 가능했던 것은 돌아가신 아버님이 유산으로 물려주신 수천 권의 책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책과 함께 하는 삶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어떤 상황에서도 그때의 분위기에 가장 적절해 보이는 얘기를 끄집어낼 수 있었으니까요. 무엇이든 일정 이상의 노력이 투자되면 반드시 결실을 맺기 마련이고, 특히 상대의 기분을 꿰뚫으며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말발에 관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어쨋거나 들어보기나 하셨습니까, 대한민국에서 저같이 정신 나간 사람의 얘기를? 아마 평생을 살아도 저 같은 미친 놈, 만나기는커녕 좀처럼 보기도 힘들 겁니다. 뭐, 제 무모한 계획이 성사가 안 되면 L통신사 직원을 두 번 다시 보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는 생각으로 부딪쳤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일종의 도박에 가까운 사업적인ㅡ사기적인ㅡ방식의 원나잇 스탠드 정도라고 하면 적할하게 비유한 것일까요?  

 

 

그렇게 해서 본격적으로 저의 통신사업이 시작됐고 L통신사로부터 모뎀과 그것에 대한 기술 자료를 받았습니다. 직원이 없는 관계로 개발은 당연히 아웃소싱으로 진행했습니다. 그것도 최소 비용만 지불한 상태에서, 처음 만난 나를 믿고 장비 개발부터 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들을 설득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최소비용만 지불한 채 아웃소싱으로 초기 모델의 개발에 들어갔고, 저는 대기업에 있는 친구와 친척, 지인들을 만나 사전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실제로는 완성된 전송장비도 하나 없이.. 아, 허접하기 이를 데 없는 테스트 장비 하나는 일주일만에 개발회사에서 만들어 주었군요. 그것을 가지고 영업을 하고 다녔으니, 해당 대기업에 있는 친구와 지인들도 어이없을 것이었습니다. 뭐, 무슨 상관 있겠습니까? 테스트 장비로 시연이 가능했으니.   

 

 

어쨌든 그건 다 일종의 쇼에 불과했고 오직 그럴싸한 비즈니스 모델만 제시되어 있는 영업제안서와 거창하지만 그럴싸한 언변으로 이루어진 영업이었습니다. 저는 친구와 친지들에게 반강제적 구매를 요청하거나 애걸복걸해서 기어코 떠넘기고 마는 이상하고도 말도 안 되는 영업을 해서 완제품을 생산하기도 전에 판매실적을 거두었습니다. 지금에 생각해보면 흔히들 말하는 ‘맨땅에 헤딩’이 바로 저의 영업방식이었지만, 맨땅이 오히려 뚫리 것이었습니다. 



물론 친구와 지인들이 제가 사업을 한다니까 서로 도와주겠다고 한 것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솔직히 전 열심히 살았고, 착하게 살았고, 소아마비였지만 전혀 장애인 티를 내지 않을 정도로 밝았기 때문에 인간관계는 누구보다도 좋았던 사람이어서 그런 것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혼맥으로 얽혀있는 우리나라 최상류층이나, 최고의 권부까지 영업하러 갈 수 있는 인맥이 수두룩했으니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로 밀어붙일 수 있었고, 실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냉정하기 그지없는 비즈니스 업계에서,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하기 그지없던 영업이자 완전 미친 짓의 연속들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L통신사 담당자의 눈에는 달리 보였던 모양입니다. 수많은 벤처기업의 임원이나 사장이 영업을 하기 위해 찾아와도 좀처럼 만나주지 않는, 심지어 L통신사 직원들이라 해도 좀처럼 만나주지 않는 대한민국 대기업 임원이나 중역들을 가족 만나듯 만나서는, 거침없는 구라를 풀어대니 저를 따라 다니던 L통신사 담당자들이 이에 탄복했고, 가끔은 뒤집어질 정도로 저를 따라다니며 실적을 올렸습니다. 



한 마디로 L통신사 직원들은 저에게 흠뻑 빠졌고, 윈윈하는 영업 실적들이 쌓여갔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순탄해서 사업이 이렇게 쉬원 것인지 몰랐습니다, 그때까지는.   




                                               프로그램 CD이미지입니다. 




그렇게 L통신사 직원들과 믿음을 쌓아 갔을 수 있었는데 그렇다고 저를 만나 준 대기업 관계자들이 모두 아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제가 직접 전화를 걸어, 그것도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 한 번만 시간을 내달라고 설득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아는 분이라도 최선을 다했고, 일의 전후로 감사함을 표했고, 가능하면 자주 얼굴도장을 찍었습니다. 이렇듯 모든 것들은 노동의 대가입니다, 심지어 글이나 지식의 생산도. 

 

 

인맥이요, 그거 만들고 관리하고 유지하는 거지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미인도 용자가 얻듯이(요즘은 스토커로 잡혀가지만) 인맥 타령하며 사업에 실패한 자들의 푸념은 부딪쳐보지도 않은 채 지례 겁먹고 하는 말들입니다. 두드리지 않으면 스스로 열리는 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특히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것이 사기성 짙다고 해도 세 치 혀를 통해 나오는 말도 진심과 열정, 가능할 법한 미래의 표상과 가치를 담아내면 상당한 파괴력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저는 전력으로, 온몸과 마음, 감성과 열정, 분석과 판단, 구체적인 비전과 윈-윈하는 이익으로 하나하나 부딪쳐나갔습니다. 절뚝절뚝 걸어가면서도 한 번도 뒷걸음치지 않았고 부딪쳐보지 않은 채 지레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무소의 뿔처럼 홀로 걸어갔습니다. 일본을 가장 잘 파악한 책으로 유명한 《국화와 칼》에서 "내가 가는 길에 부처가 있으면 그의 목을 배라"는 말처럼.

 

 

물론 저를 처음 보는 당시에는 모든 대기업 담당자들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표정이 스쳐갔지만 그들에게 분명한 비전을 제시하며 서로 윈-윈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설득해나가면 육체적 장애는 높은 벽으로 둘러쌓인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저의 비즈니스 모델의 바탕에는 윈-윈이라는 공생의 법칙이 견고히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업제안서를 만들 때 상대편의 입장에서 작성했고, 그럴 때만이 상대를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뇌물이나 술자리 같은 것을 만들지 않고서도. 


 

제 자랑 같지만 대부분의 영업에서 저는 긍정적 답을 이끌어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장비를 개발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저는 가진 돈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동생과 친구에게 계속해서 손을 벌릴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제법 부자에 속했던 삼촌이나 숙모님처럼 친척들에게 손을 벌리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그분들과 금전적으로 얽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개발과 영업, 특허등록 작업 및 사무실 임대 등을 하나씩 해결해가면서, 동시에 개인과 벤처캐피탈의 투자를 받아 내거나 아니면 기술신용기금이나 은행 등에서 대출을 받기 위해 전국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때 절실히 느꼈죠. 사업은 자금이 마련된 다음에나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을. 대한민국에서의 사업은 다 날려도 될 자신의 돈이 있거나(0.1%도 안 될 것입니다) 철저히 남의 돈으로 하는 것이지, 자금을 만들어가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와중에도 매일 같이, 많게는 하루에 세 번 정도 L통신사 담당자들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들이 내 전화를 습관처럼 받도록 만들 때까지 그 짓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들과의 벽을 허물어가며 영업을 통해 미래의 비전에 대한 확고한 기반을 다져나갔습니다. 또 그들이 제 사업과 상관없이 어떤 대기업이나 관공서에 들어가고 싶어 하면 제 인맥을 총동원하거나, 아니면 직접 부딪치고 부딪쳐서라도 다음날이나 그 다음날까지는 반드시 대기업과 관공서 담당자를 연결시켜주었습니다.

 

 

그렇게 L통신사와 담당자들과의 신뢰도는 높아져 갔습니다. 나중에는 그들이 ‘루팡’ 직원인지 L통신사 직원인지 헷갈린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나중에는 그것 때문에 더 비참하게 무너지면서도 L통신사와 L전자와 재판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저와 일했던 L통신사 직원은 이제 임원이 돼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연락을 하고 지냅니다. 과거란 과거일 뿐 현재의 삶을 구속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완성된 장비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L통신사와 한 몸처럼 움직였고 제대로 된 사무실이 없어 L통신사 건물에서 투자설명회도 여러 차례 열기까지 했습니다. 그것도 공짜로요. 그들은 L통신사 창사 이래 전무후무한 기록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립서브스 아니었나 생각되기는 합니다.

 

 

헌데,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당시에는 벤처열풍이 급격히 꺼져 가는 중이어서 투자나 대출을 받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특히 투자는 대표이사를 보고 40%가 결정된다고 하는데 제가 지체장애인인 게 결정적인 흠결로 작용했습니다.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고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스처가곤 했습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돈은 알게 모르게 세나갔고 가족들과 친구들이 마지막으로 모아 준 돈마저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아웃소싱 개발비를 완불하지 못해 장비도 나오지 않았는데 사전 영업한 대기업들이 장비를 사겠다며 장비를 가져오라고 재촉했지만 막상 팔아먹을 장비조차 없으니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습니다.  

 

 

제가 영업을 대행해준 기업과 비슷하면서도 분명히 다른 결과에 속만 새까맣게 타들어갔지요. 돈이 눈 앞에서 날아다니는 데도 손을 뻗어서 움켜쥘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죽을 맛이었습니다. 저도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어머님과 저의 명의로 된 아파트를 팔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허허, 하루하루가 지옥같이 지나가곤 했습니다. 갈수록 희망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저는 사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어디든지 달려가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