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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

대박이란 없다, 나의 사업이야기ㅡ1


글이나 쓰면서 살았으면 충분했을 필자가 사업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단순했습니다. 저의 사업이야기를 하려면 저의 멍에부터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부산 동래에서 태어난 필자는 백일 직후에 소아마비에 걸렸습니다. 외국인이 들여온 소아마비 바이러스에 걸렸던 것이지요. 부모님 말씀에 따르면 당시에 많은 아이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됐다고 합니다.



헌데 그 후유증 때문인지 저는 어려서부터 신경성 수면장애가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 그 증상이 악화돼, 항우을제 계통의 수면유도제를 복용해야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수면유도제를 장기 복용하게 됐습니다. 그것 때문인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게 정말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저에게 '아침형 인간'이란 먼 나라 이야기에 불과했고 그에 맞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제가 지체 장애인(오른쪽 다리가 불편한 소아마비)인 것을 떠나서 정상적인 취업이 불가능했고 결국 30세에 이르렀을 때 오후에만 출근하는 작은 신문사에 취직할 수 있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과외를 통해 돈을 벌었는데 돈이란 기준으로 보면 신문사에 취직한 것이 몇 배는 손해였습니다. 당연히 비정규직이었고요. 

 

 

어쨌든 정부로부터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대한민국 전체를 대박의 소용돌이 속으로 미쳐 날뛰게 한 벤처광풍이 빠르게 식어가던 시기였으며,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는 거품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꺼져가던 시기였습니다. 한 마디로 파장의 분위기였고 광기의 끝물이었습니다.





헌데 운명인 듯 신문사의 조그마한 사무실에 얹혀 지내던 프로그래머가 한 명 있었습니다. 저의 눈에는 그가 신기하면서도 처량해보였지만 세상에 있는 모든 컴퓨터를 바다 속에 수장시켜버리고 싶을 정도로 컴퓨터를 싫어하고 멀리했던 저로써는 신세계를 보는 듯한 기분이 더 강했습니다. 



사실 저는 대학교에 다닐 때 카드를 천공해 프로그램을 짜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당시 과제로 주어진 프로그램을 완벽하게 작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오류가 나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의 천공 카드를 사용하는 컴퓨터의 오작동율이 8만분의 1인데 하필 제가 그 확률에 걸려든 것이었죠.

 

 

컴퓨터와의 악연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재수까지 해서 치른 대학입학시험 성적이 최초의 컴퓨터 채점의 결과 때문인지 가채점보다 20여 점이 나쁘게 나왔습니다. 집권을 위해 죄 없는 국민을 수천 명이나 사살한 독재자인 전두환 전 대통령이 대학정원을 거의 두 배에 조금 못 미치기게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오류가 많았던 시절의 컴퓨터 채점 때문에 전국 등수는 고3 때보다 2배 이상 떨어져 대학을 하향 지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삶이 이러했으니 컴퓨터에 대한 불신이 이만저만한 상태가 아니었는데, 대학시절부터 8만분의 1에 해당하는 오작동이 저에게서 일어났으니 돌아버릴 지경이었죠. 그런 이유들로 해서 저는 컴퓨터란 단어만 나와도 치를 떨었고 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컴퓨터를 모조리 수장시켜버리겠다고 말하곤 했었습니다. 

 

 

컴퓨터에 대한 극한의 혐오증이 있던 저는 그 사람을 통해 눈부시게 발전한 컴퓨터 세계에 대해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됐습니다. 경제적 개념에 남다른 재능이 있던 저는 본능적으로 돈 냄새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정치와 함께 경제 분야 기사를 다루기로 마음먹었고 S텔레콤과 K통신사를 취재를 빌미로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정보통신 관련 기사를 쓰면서 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인간에게 시간적 한계를 극복하게 해준 문자와 함께 공간적 한계를 뛰어넘게 해준 핸드폰을 모든 사람들이 갖게 될 것이며, 따라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두 가지를 결합하면 최고의 사업이 될 것이라는 그런 깨달음 말입니다. 눈에 돈이 아른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정보통신업체들을 취재하던 중에 몇몇 벤처기업가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중에서 저의 깨달음을 이미 실현해낸 기업을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매우 실망이 컸지만 어쨌든 저는 그 장비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습니다. 그 회사의 사장을 만났고, 인맥이 풍부한 관계로 해당 벤처기업의 영업을 도와주게 됐습니다. 100억 원에 가까운 투자를 받은 그 회사는 방송3사의 메인뉴스에 나올 정도로 유망한 벤처기업으로 손꼽혔는데 막상 안에서 그 기업을 들여다보니 엉망진창도 이런 엉망진창인 기업이 없었습니다.

 

 

특히 사장이라는 작자가 개차반이었습니다. 분명 문자메시지 장비를 팔아먹을 곳이 수두룩해 보이는데 기술적 한계와 영업력 부족, 사장의 무능력 때문에 투자비를 거의 다 날리고 장비 한 대 제대로 팔지도 못한 상태였습니다. 제가 여러 군데 기업을 소개해주었는데도 전혀 추가영업을 진척시키지 못하더라고요. 직원들은 월급이 몇 달째 밀려 있었고 핵심 프로그래머와 영업사원들이 속속 이탈하는 와중에도 사장은 룸살롱이나 드나드니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러갔고 회사가 자본잠식을 넘어 언제 망할지 모르는 상태까지 추락하자 사장 놈이 저에게 영업권을 상당 부분 양도할 테니 대리점 계약을 맺자고 하더라고요. 대리점 가맹비는 그들이 월세조차 못내는 방치된 사무실의 빚을 해결해주는 조건으로 대체하자고 했는데, 영업을 해주면서 이리저리 얽혀있던 저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저는 사장의 제의에 동의했습니다. 그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회사를 하나 차리게 됐습니다. 몇 명이지만 저의 영업력을 믿고 직원으로 합류한 사람들도 있었고요.

 

 

헌데 영업을 해도 이놈의 전송장비가 수없이 오작동을 일으켜 단 한 대도 팔 수 없었습니다. 얼마 안 되지만 어머님의 쌈짓돈이었던 무려 400만원에 이르는 돈만 하릴없이 까먹게 됐습니다. 현재로 따지면 몇 천 만원에 이르는 돈이었고 당시의 저로써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습니다. 슬슬 열이 나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문자메시지 전송장비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고, 아무튼 뭔가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하면 저까지 빈털터리가 되버릴 상황에 처했습니다.

 

 

헌데 직원으로 합류한 사람 중에 S물산 출신 엔지니어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문자메시지 대량전송장비의 신뢰성에 대해 물었고, 판매가 쉽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듣게 됐습니다. 그의 말에 분통이 터졌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비슷한 장비를 만들 수 있느냐고 물었고, 그는 가능할 거라고 하더군요. 그것이 무엇이냐 물었더니 전송장비 속에 넣은 핸드폰을 모뎀으로 바꾸면 가능할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저는 모뎀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습니다.

 

 

그럼, 모뎀은 어느 회사에서 만드는 것이냐 물었더니 대한민국 최고의 전자기업 두 군데서 만든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두 전자 기업을 만나 모뎀을 받아내면 만들 수 있느냐 물었더니, 그건 불가능하고 통신사를 통해 접근해야 할 거라고 말하더군요. 그때 그의 말을 듣지 말아야 했는데 이미 어머님 쌈짓돈도 다 말라버리고 저의 인맥을 보고 합류했던 직원들이 알아서 떠나 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와 형의 압력이 가중되기 시작했습니다. 과외나 다시 하라고요. 결국 사고를 치지 않는 한 방법이 없겠더라고요. 해서 ‘루팡’이란 회사를 차려 문자메시지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동생과 친구들의 도움과 법무사의 요술까지 더해, 서류상으로만 자본금 5,000만원인 법인을 대략 400만 원 정도 들여 만들 수 있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동생과 친구들의 도움(즉, 날릴 각오를 하고 무작정 빌린 것이지요)으로 자본금을 다 채웠지만. 어쨌든 미친 짓이었죠, 그것도 한참이나. 벤처광풍이 끝물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정말 미친짓이었습니다.

 

 


P.S. 제가 설립한 회사에서 만든 원 포트 서버입니다. 문자메시지 대량전송 장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