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치

왜 신좌파는 손가혁을 일베처럼 보는 것일까?


이재명 시장은 자신에는 한없이 관대하면서도 상대에게는 지독할 정도로 가혹한 자기방어기제의 폭력성이 강합니다. 탄핵소추안의 국회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며, 통과되더라도 헌재에서 인용될 가능성이 제로이기 때문에 박근혜 탄핵에 반대한다고 했다가, 분노한 시민의 움직임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자 재빠르게 변신하는 기회주의적 처신(정통의 회장이었던 것도 마찬가지)도 능란합니다. 자신의 범죄경력을 불의한 자와의 투쟁에서 얻은 훈장 정도로 취급하는 것도 목적을 위한 수단에는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중에서 세 번째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입니다. 노동자와 환경에 대한 어떤 안전장치도 없었고, 각종 폐해를 막을 어떤 규제도 없었던 산업혁명 초기의 런던ㅡ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수라장이었다ㅡ을 바탕으로 자본주의를 추상해낸 마르크스의 위대함을 부정할 사람은 없겠지만, 프롤레타리아(남성노동자)의 폭력혁명을 통해 결과의 평등(절대적 물질주의)에 이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목적론적 확증편향 때문에 수단과 과정에서의 폭력성과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배제(플라톤, 니체, 히틀러, 스탈린의 유사점)하는 도덕과 정의에 반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위 99%의 부를 상위 1%에 이전하는 역계급혁명적 성격이 강한 신자유주의로 인해 마르크스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지만(너무나 당연한 현상),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는 개인의 선호와 지향을 무시하는 절대적 물질주의, 보편적 도덕과 공정한 정의에 반하는 폭력성, 위계서열을 중시하는 보수적 성향, 인간의 자기결정권과 정치의 역할을 배제한 변증법적 유물론(진보에 끝이 있다는 결정론적 역사주의), 진화론과 만유인력에 경도된 과학적 오류 등으로 인해 주류가 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역사를 계급투쟁의 장으로 접근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네그리와 하트(푸코의 성찰에서 비롯된)는 노동자의 폭을 전업주부 같은 재생산을 담당하는 분들(무임금노동으로 이반 일리치는 그림자노동이라고 했다)을 포함해 비정규직과 파트타임 등까지 확대한 비물질노동자로, 정치의 역할을 배제한 것에서 대해서는 자유자재로 네트워크적 이합집산을 하는 다중이란 개념을 들고나왔고, 코헨 등은 수단의 폭력성을 완화해서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기 위한 노력으로 도덕과 정의와의 화해를 추구했지만, 68혁명의 등장과 함께 신좌파(유럽의 신좌파와 미국의 신좌파는 조금 다르다. 조기숙 교수는 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문재인 지지자들은 신좌파에서 진보적 자유주의자, 이중개념자, 합리적 보수에 이르기까지 이념의 스펙트럼이 넓거나 이념적 구분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번 글에서는 신좌만로 통칭했다)와 구별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경제적 안정을 중시하지만 그렇다고 절대적 물질주의보다는 탈물질주의적 가치(특히 정의와 도덕, 공정과 평화를 실현하는 규범과 체제로서의 민주주의)를 추구하며,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에 열려있어 자아 실현과 자기 표현, 사회적 평등과 인권, 양성평등, 소수자권리, 재미와 축제로서의 집회, 환경과 생태(동물권 포함)라는 삶의 질을 위해 경제성장도 일정 부분 포기할 수 있는 신좌파와 구별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좌파는 구좌파와 우파를 모두 다 비판했고, 삶 전반에서의 총체적 혁명을 중시했지만 진보적 성향은 분명히했습니다.

 




노동문제에서는 노조보다 급진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신좌파는 극우와 마찬가지로 구좌파의 수단적 폭력성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삶과 사회적 관계 전반에서 공정한 정의와 헌법적 가치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적 평등주의자'로서의 신좌파는, 합법적 폭력(공권력)을 독점하고 언론마저 장악한 독재정부에 맞서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폭력성과 강력한 위계서열이 필요했던 민주화운동 세대와는 달리 비폭력적인 저항으로서의 시민불복종과 자발적 참여를 선호합니다. 민주주의 이해가 대단히 높고, 정보접근력과 처리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에 이런 창조적 진화가 가능했습니다. 



불의와 부정의에 분노하는 이들이 진보민주진영의 다수가 되면서 광장과 거리에서의 민주주의가 가능해졌고, 4개월 동안 연인원 16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였지만 어떤 폭력도 일어나지 않은 촛불집회가 가능했습니다. 인류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같은무혈혁명이자 명예혁명으로서의 정치혁명이 성공을 거둔 적이 없었기에 전 세계적 주목을 받은 것입니다. 신좌파의 다수는 진보적 자유주의자이며, 정치학적으로 보면 노사모가 최초였다 할 수 있습니다. 



조기숙 교수에 따르면 진보적 자유주의를 추구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 중에는 자신이 신좌파에 속한다는 것을 몰랐다고 하는데, 퇴임시 지지율이 30%대였던 노무현이 대통령선호도에서 박정희를 멀찌감치 제치고 50%에 근접하는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는 것도 신좌파가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민주적이었으며, 진보적이었으며, 동시에 자유주의적이었던 노무현의 인기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목적을 위해 수단의 폭력성에 반대하는 신좌파의 눈으로 보면 극우적인 일베나 극좌적인 손가혁이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수단의 폭력성과 비민주성을 인정하지 않는 신좌파로서는 목적의 절대성을 내세워 도덕과 정의를 거추장스럽고 위선적인 것으로 여기는 일베와 손가혁의 폭력적 행태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손가혁에 둘러쌓인 이재명이 박사모에 둘러쌓인 박근혜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존중과 배려가 없는 이런 행태는 확장성에서 치명적이며,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와 수단으로서의 헌법정신을 훼손시킵니다. 최소한의 민주주의, 정경유착을 선호하는 작고 강한 정부, 위계서열을 강조하는 재벌, 권위주의적 문화, 기득권에 유리한 자유시장 등으로 구성된 신자유주의를 폭력으로 지키거나 무너뜨리려는 일베와 손가혁의 방법은 민주주의와 헌법, 정의와 도덕에 반한다고 믿는 것이 신좌파의 공통점입니다. 갑질만이 아니라 을질에도 거부감을 표시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신좌파의 목표는, 특히 진보적 자유주의자의 목표는 이념의 분포상에서 좌우의 양극단을 최대한 줄이고, 민주주의와 헌법에 근거한 시민주권을 최대화하는데 있습니다. 목적이 정당하면 수단은 어떠하든 상관없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기본이며, 그럴 때만이 실질적 민주주의도 실현된다고 믿습니다. 신좌파, 특히 진보적 자유주의가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을 때 선진민주복지국가는 모두의 현실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노무현의 꿈이었던 사람사는 세상이 바로 그러하며, 촛불집회의 시대정신이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