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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

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 비판ㅡ현대성의 탄생2




우파 전체주의를 대표하던 시기에 좌파 전체주의를 대표하는 스탈린의 소련에서도 또다른 종류의 홀로코스트가 자행됐다. 나치의 아우슈비츠와 흡사한 스탈린의 소련에서는 굴락이라는 집단수용소가 있었는데, 전국에 퍼져 있던 이곳에서 최소 수십 만 명의 러시아인이 학살됐다. 굴락에서 벌어진 집단학살은 지금까지도 정확한 집계가 불가능한 상황으로, 국가사회주의적인 좌파 전체주의의 잔혹성이 히틀러의 나치에 비해 절대 뒤쳐지지 않았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를 통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좌우를 막론하고 파시즘을 동원한 전체주의는 권력의 강화와 제국의 건설을 위해 대량학살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인류의 집단기억과 공통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공포를 각인시킨 집단학살은 좌우의 전체주의 국가에서만 자행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는 민주주의적 사회들에서도 (나치가 유대인 말살을 위해 진행된 것처럼) 근본적인 해결책이 항상 하나의 옵션이었지만, 그러한 살인적인 과정들을 우리는 여전히 ‘정상적’사태 진행들로부터의 일탈로, 즉 ‘예외적인 특별한 경우들’이라고 쉽게 해석하는 경향이” 일반화될 지경에 이르렀다. 5.18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한 무력진압과 세월호 참사를 초래한 국가의 규제완화와 기업의 탐욕도 인류사에 기록될 집단학살의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특히 유일제국이자 스스로 예외국가임을 천명하던 미국은 자신들이 일으킨 베트남전쟁에서 패할 것이 분명해지자, 그 치욕을 견딜 수 없어 베트남을 아예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미군은 동원 가능한 모든 폭격기를 동원해 몇 달에 걸쳐 “제2차 세계대전 전체 기간 동안 투하된 양보다도 더 많은 80만 톤의 폭탄이 투하되었고, 정글에 고엽제를 뿌려 수풀 속을 더 잘 보이게끔 하려고 했으며, 이런 상황은 그 후 세대가 바뀌어도 베트남 국민들에게 커다란 후유증을 남겼다.” 네이팜탄과 고엽제의 피해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각국의 군인들에게도 일어났고, 그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미국 국방부의 공식문서인 <펜타곤 보고서>와 노엄 촘스키의 《여론조작》을 참조).   





만일 미군이 퍼부은 네이팜탄 때문에 “불타는 마을을 배경으로 몸에 불이 붙은 채 벌거숭이 상태에서 울고 있는 킬 폭의 사진이 공개‘되지 않았다면, 미국의 베트남 말살작전은 계속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인류를 공멸의 위기로 내몰 수 있는 핵폭탄을 유일하게 사용한 나라가 미국이라는 점에서 볼 때, 갈수록 첨단화하고 있는 신형무기의 발명과 실전 배치는 네그리와 하트가 《다중》에서 "1972년 5월26일, 즉 미국과 소련이 (이 두 초강대국의 핵무기 생산을 규제하는) 탄도탄요격미사일(ABM) 협정에 조인한 날" 이후로 전면전의 위협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이를 대체할 만한 다양한 형태의 소규모 전쟁들이 집단학살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이제 전쟁은 국가의 주권과 안보, 정의와 평화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적 이해에 따라 기획되기까지 하는 전 지구적 차원의 이햬관계에 따라 진행된다. 국지적 내전이나 테러리즘은 주로 군산복합체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난민과 불법이민자들을 향해 자행되는 각국 정부의 폭력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또한 1, 2차세계대전 사망자에 근접해가고 있는 소형살상무기에 의한 살인은 매년 50만 명을 넘어설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다. 현대의 홀로코스트는 무기소지자유화와 마약 밀매, 인신 매매, 폭력범죄 등의 대형화로 매년 천만 명에 근접하는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내몰고 있다.  



현재 아랍과 아프리카, 남미 등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과 국지전은 군산복합체와 민간군사 용역업체를 위한 폭력시장의 확대라는 것을 넘어, 현대성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아이슈비츠의 홀로코스트가 21세기 버전으로 변형된 채 전 지구적 지배세력의 지휘 하에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홀로코스트는 "늘 경제적 생산과 결합되었고 아마도 시간이 갈수록 더욱 더 단단히 결합되었기 때문에, 경제적 생산에서 일어난 변화들과 매우 분명하게 연결"됐다는 점에서 영원히지속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극에 달한 체제인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바우만 등의 분석이 옳다면 일본의 한반도 강제합병처럼 현대성을 탄생시킨 근대이성의 모든 것들은 기득권의 이익을 지키고 늘려가기 위해 경제적으로 몇십 년 정도 앞선 선진국의 일방적인 후진국 침탈(외부의 정치경제적 식민지)의 역사였다. 칼 포퍼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정치권력의 역사는 국제적 범죄와 집단학살의 역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근대이성이 만들어놓은 현대성이란 모든 물리력을 합법적이고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국민(민족)국가, 자연 대한 이성의 우위,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올려놓은 공리주의, 철학 및 도덕과 분리되면서 사이비 가치중립성을 획득한 과학의 무한 폭주, 비용편익만 중시하는 기술공학적이고 상명하달을 통해 자체의 추진력을 강화하는 거대관료제, 인간의 조건을 자본주의에 최적화시킨 신자유주의의 일방적 득세 등을 말한다. 





나치의 독일도, 군국주의의 일본도 근대이성이 탄생시킨 현대성의 보편적인 탐욕과 비도덕성이 초래한 인류 역사의 산물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다양한 형태의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국가나 정부의 출현을 사전에 막을 수 없었던 것ㅡ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ㅡ은 다원적 가치를 인정하는 민주주의의 부재나 파시즘의 발흥을 조기에 제압하지 못한 민주주의의 미성숙이 근원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통념과는 다르게 유럽까지도 2차세계대전 이전에는 현재의 제3세계와 다를 것이 없었다는 점에서 홀로코스트를 막을 수 있는 민주적인 지배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샌드라 핼퍼린의 《유럽의 자본주의》를 참조하라). 



어쩌면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자기조정 능력이 있는 자유시장의 핵심 메커니즘인 ‘사탄의 맷돌’을 끝없이 돌리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는지도 모른다. 인류가 추구할 수 있는 모든 가치를 맷돌로 갈아 단 하나의 가치ㅡ부의 창출과 독점ㅡ만 산출하려면 자유방임적 시장경제에 맞춰 국가와 전 세계를 재편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2차세계대전 이후 부의 재분배를 통해 압도적인 성장을 이룩한 미국과 유럽, 재무장이 가능해진 일본 등이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을 통해 폭력시장의 확대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인간사에 별로 관심이 없는 신과 잔혹한 대참사를 만들어내는 자연에서의 해방과 구원을 약속했던 근대이성이, 국가와 전 지구적 특권그룹에 의한 홀로코스트라는 현대성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자유방임적 시장경제의 자유방임적 확장을 위해신자유주의의 탄생했고, 그것이 만들어낸 새로운 형태의 통치술로 국가이성이나 정치경제학이 변형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전 지구적 시장 구축에 성공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주축세력에 의해 민주주의가 축소되고 위협받게 되었다는 푸코의 성찰(특히 《안전, 영토, 인구》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을 참조하라)은 여전히 유효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개인들의 도덕적 양심의 목소리는 정치적·사회적 불화의 소란 속에서 가장 잘 들린다”라는 바우만의 주장처럼, 민주주의의 보편적인 성공은 다원적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모든 행위에 일정한 제약을 가할 수 있는 초사회적 도덕관념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믿음으로,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에 맞서 어떤 형태의 대항권력을 형성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개개인이 권력에서부터 자유로워지고, 중위소득에 국민의 대다수가 몰려 있는 사회경제적 평등만이 민주주의를 공고히 할 수 있다는 믿음에 더 많은 동의를 표하고 실천할 때, 근대이성이 약속한 죽음에 대한 인간의 행방과 구원이 실현될 수 있다.  



따라서 파편화된 개인에게 '유동하는 상시적인 공포'를 안겨주는, 꾸준히 늘어나 어떤 것이 진정으로 중요한 자유인지 모르고, 갑자기 늘어난 신자유주의적 정보와 신호의 홍수에 속아서 두려움에 빠져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현재의 기득권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헤겔처럼, ‘사회는 인간에 우선한다’며 인간 행위의 규범적 강제인 초사회적 도덕성을 인간 생존의 본질적 필요와 욕구를 담당하는 사회적 필요에 귀속시켜, 최종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사회통합이었던 뒤르켐이 개인에 비해 사회의 우위를 선언한 유사 전체주의적인 사상이 현대성을 대표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를 경우 신자유주의 통치엘리트들은 이중의 권력을 구축해, 개인과 사회를 그들의 목적에 따라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다.  



이는 위대한 사회학자, 칼 마르크스가 정치와 제도, 문화 등의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하부구조ㅡ자본주의의 특징인 사회적 생산방식과 노동 착취를 통한 잉여가치의 독점ㅡ에 집중하는 바람에, 무한경쟁에서 자유의 왕국으로 가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권위주의적 독재가 되풀이해서 출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극우적 성향의 파시스트들의 제도권 정치로의 진입이 늘어나고,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 권위주의적 정부(소프트 전체주의)가 득세하는 것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좌우의 전체주의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ㅡ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하이이만ㅡ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에서 최초로 제기했고, 밀그램이 전기충격실험을 통해, 짐바르도가 스텐퍼드대학에서의 교도소 실험에서 재확인한 압도적인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그로부터 탄생하는 사회적 악의 보편성을 《루시퍼 이펙트》에 담았다ㅡ정부를 지배하는 지배 엘리트들의 내부적인 협력과 다양한 상징조작을 통해 ‘사회도 틀릴 수 있다’는 전제를 시민의 의식 속에 심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조차도 틀린다면 절대적이거나 보편적인 가치가 존재할 수 없고, 언제나 상대적인 가치만이 권력과 부에 의해 얼마든지 정치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   



근대이성이 창출한 현대성이 나치의 홀로코스트나, 세르비아와 우간다 등지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제노사이드(인종청소라는 현대성의 단면)들로 이어진 것도, '사회도 틀릴 수 있다'는 전제에서 기원한다. 국민적 동의를 받고 있는 지배 엘리트들의 결정이 거대한 행정조직과 압도적인 국가공권력을 동원한 일방통행으로 이어지는 경향이 전 세계적으로 늘어나는 것도, '사회도 틀릴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결과들이다. 민주주의는 이렇게 축소되고 재해체되며 회복되지 못한 채 역사의 비극을 되풀이한다.     



이런 현대성의 병폐는 임계점 근처에 이르렀음을 입증하는 증후들이 갈수록 강력해지고 있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상이변과 초미세먼지의 잦은 공습은 물론 이 모든 것을 초래한 끝을 보이지 않는 경제위기가 그렇다. 이제는 눈을 두는 어디서나 눈에 보일 정도로 현대성의 병폐가 심각한데도, 정부도 언론도 이런 징후들의 본질을 빗겨가기에 급급하다. 오히려 그 정치적인 수사와 선정적인 보도는 인류에게 끝없는 공포와 체념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고 있다. 어차피 지구온난화가 초래할 각종 피해에 속수무책으로 놓였다면, 그때까지만이라도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유혹이 더욱 강력해진다. 이로써 소규모 정치경제적 전쟁들이 자행될 분위기는 완벽하게 조성된다.   



몰락한 제국 미국의 부진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고, 해체된 소련연방의 부활이란 정치경제적 이해관계 뒤에 숨은 세일가스와 천연가스 간의 에너지전쟁이 우크라이나에서 막을 올렸고, 유럽에서는 독일 위주로 재편성되는 경제위기의 결과가 나치라는 제3제국의 악몽으로 되살아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독일에서 유대인이 쓸어내는 것’이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극대화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히틀러의 아이디어가 모든 과학기술과 거대 관료제, 유대인 엘리트들의 자발적 협조ㅡ이들도 단계적으로 제거될 운명이었고 그렇게 됐지만ㅡ로 ‘유럽에서 유대인을 쓸어내는 것’으로 발전했던 과정을 되풀이하는 일이 무려 60년 만에 ‘독일 중심의 유럽’이라는 현실로 구체화될 조짐이 높아지고 있다(울리히 벡의 《경제위기의 정치학》을 참조하라. 난민사태를 이해하려면 하랄드 벨처의 《기후전쟁》을 참조).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