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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

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 비판ㅡ들어가는 글3




물론 이에 대한 반론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인류는 지금까지 당면한 문제를 풀어왔으며, 정보통신과 창조적 융합산업, 생명공학과 뇌과학, 웰빙산업과 신재생에너지 사업, 우주산업과 제약산업 같은 ‘가벼운 경제’와 발전 가능성이 무긍무진한 미개척 분야들이 부정적 세계화를 견인하며 온갖 부작용을 양산했던 ‘무거운 경제’를 성공적으로 대체하지 말란 법도 없다. 기적은 찾아내는 것이며, 인간의 능력 중에 아직도 개발되지 않은 것이 많을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빌 브라이슨이 《거의 모든 것의 역사》에서 내린 결론처럼 희망적인 견해에 동의할 수도 있다. 작금의 상황이 너무나 엄중하고 절망적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 수 있다.




두 책을 동시에 보면 이해가 깊이가 커질 것이다.

물론 컨트롤 레벌루션이 조금 더 어렵고 전문적이다.




우리가 지구에 존재한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우주에서 어떤 형태이거나 상관없이 생명을 얻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성과이다. 물론 인간인 우리는 두 배의 행운을 얻은 셈이다. 우리는 존재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 가치를 인식할 수 있고 다양한 방법으로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이제 겨우 이해하기 시작한 능력이다.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짧은 시간에 이렇게 훌륭한 위치에 도달했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고, 예술작품을 만들어내고, 복잡한 활동을 조직적으로 할 수 있게 되어 행동적으로 현대화된 기간은 지구 역사의 0.0001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렇게 짧은 순간 동안 존재하는 데에도 무한히 많은 행운이 필요했다. 우리는 사실 이제 막 시작한 셈이다. 물론 우리는 종말이 찾아오지 않도록 하는 비결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단순한 행운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거의 확실하다.



인류가 ‘이제 막 시작한 셈’이라는 브라이슨의 말은 40억년에 이르는 지구의 역사를 감안하면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다윈의 진화론(뉴턴역학과 함께 진보의 낙관론과 결과의 숙명론이 대세를 이루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에 대해서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을 참조하라. 근대과학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한 물리학과 생물학, 정신분석학의 문제에 대해서는 푸코의 저작들을 참고하라)에 따르면, 원시스프에서 최초의 복제자가 나온 이래(대략 10억 년 전쯤으로 추정된다), 수없이 많은 재복제와 돌연변이를 통해 복잡한 생존기계로 진화한 최초의 인간들이 바다를 나와 대지에 적응한 것이 5만 년에 불과하다. 



따라서 최초의 공동체를 이룬 것은 진화의 역사를 놓고 볼 때 ‘이제 막 시작한 셈’이다. 최초의 문명으로 기록된 것들만 따지면 기간은 더욱 줄어든다. 특히 석탄을 에너지로 바꿀 수 있게 만들어준 화학의 발전으로 내연기관이 등장했고, 그것이 놀라운 성장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산업혁명으로 이어진 것이 겨우 250년에 불과하니, 인류의 문명은 이제야 걷는 것에서 달릴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물론, 2차세계대전까지는 특권층에게만 적용된 발전이었지만).



따라서 아직도 어린아이에 불과한 인류의 문명에 대해 비관적으로만 볼 일도 아닐 수 있다. 오류를 바로잡을 시간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작금의 위기만 넘기면, 더 좋은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류의 성장을 이룩해낸 진보라는 개념 자체가 지독할 정도의 낙관론에 근거하기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위험이라도 그것이 일상화되면 이 또한 지나가거나, 늘 그래왔듯이 가뿐하게 극복할 것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지구온난화와 대지의 사막화, 물 부족 사태가 별것 아니라는 부류(회의적 환경주의자로 불리는 이들의 주장의 핵심은 지구가 1,500년 단위로 지구온난화가 발생했다는 것에 있다. 하지만 이들도 남극과 북극이나 시베리아 같은 영구동토층이 녹아내릴 정도에 이르면 종말의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가 있듯이, 작금의 위험을 선정적인 언론들과, 일부 비관적인 과학자와 급진적인 환경운동가들의 호들갑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또는 재기불능으로 무너져 내린 진보좌파 세력이 권력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음모론을 양산한 결과라고 폄하하거나 비난할 수도 있다. 아니면 자신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불평등과 위험 앞에서 체념하거나,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개개인은 하루하루의 삶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좋은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결국 인류는 아무리 거대한 난제들이라고 해도 풀어낼 것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이 보여주는 것들은 그렇게 만만한 것들이 아니다. 이윤 추구가 유일한 목적인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환경보호에 나서고, 대체에너지 개발에 매진하고, 심지어는 이익의 사회 환원에 나설 만큼 이율배반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에서 보듯 인류가 처한 상황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제는 진보에 관한 어떤 낙관론도 통하지 않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두 권을 같이 봐야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숱한 석학들과 전문가들이 지적했듯이, 성장 일변도의 진보가 초래한 당면한 위협들은 서로를 강화하고 중첩됨에 따라 파국적 종말을 걱정해야 할 만큼 거대해졌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최근에 들어 핵폭탄의 위협을 넘어설 만큼 치명적인 단계에 이른 지구온난화인데, 이에 대해 하랄트 발처는 《기후전쟁》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전체적으로 기후정책의 일대 전환이 즉각적으로 선언된다면 서방에 유리한 경제적 기회가 전망된다. 더욱 개선된 방식의 에너지 획득, 에너지 고효율 장비, 하이브리드 자동차(전기 자동차도 있다), 바이오 연료, 태양열 집열장치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이 미래를 밝힐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를 제3차 산업혁명이라고까지 부르지만, 이는 현재의 문제들의 원인이 제1차·제2차 산업혁명이란 점을 간과한 인식이다...(20세기가 폭력의 세기였듯이) 21세기의 미래도 폭력이다...식수 고갈, 대홍수에 의한 파괴, 정화되지 않은 오폐수에 의한 오염, 거대한 쓰레기더미, 팽창하는 유전개발에 의한 환경파괴 등은 말할 필요조차 없고, 분쟁상황 자체가 가히 파국적이다. 여기에는 기후변화와 전쟁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있다. 현재의 수단을 보면 인류의 미래가 보인다.



미래에 대한 발처의 경고처럼, 우리가 진보라 믿었던 것들이 실제로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따른 퇴행의 과정이었다. 영원한 진보를 선언한 근대이성이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산업사회의 폭주는 지구 표면을 빠른 속도로 점령했지만, 성장과 개발의 역설은 곳곳에서 회복불가능한 상처를 남겼다. 인류는 거의 모든 면에서 퇴화했고 분자 단위로 분열됐으며, 이보다 더 할 수 없을 만큼 무력해졌다. 





이런 현상은 무려 120여 년 전에 위대한 프랑스 학자인 알렉시스 토크빌이 「빈민에 대한 연구보고서」에서 이미 예상했던 것 중에 하나였다. 그는 ‘사회가 생겨난 이후 벌어진 일들을 깊게 들여다보면, 평등은 오직 문명의 양 극단에만 있고, 그 사이에 있는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 부, 지식의 불평등이 팽배해져, 소수의 사람들만 권력을 갖고 나머지 사람들은 가난과 무지, 나약함에 시달린다’고 밝힘으로써, 진보와 미래에 대한 낙관론이 얼마나 위험한 인식인지 분명하게 경고했다. 또한 각종 통계로 불평등의 문제를 확실하게 보여준 리처드 윌킨슨과 케이트 피켓의 《평등이 답이다》를 보면 토크빌의 예언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선진국 시민들은 어떻게 더 먹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덜 먹을까를 고민한다. 그리고 우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평균적으로 더 뚱뚱한 시대에 살고 있다. 진보의 동력이던 경제성장은 많은 선진국에서 이미 그 임무를 마쳤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평안과 행복이 증대되던 시대도 끝났다. 뿐만 아니라 부유한 사회가 더 부유해질수록 스트레스와 우울증 및 각종 사회문제가 장기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선진국 국민들은 긴 역사의 여정 막바지에 다다른 것이다.



현실이 이러하기에 우리는 성장과 개발 위주의 진보의 낙관론에 대해 정확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이제는 땜질식 처방이 먹힐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결과의 운명론을 낙관적으로 펼쳐온 진보 개념에 대한 총체적 해체와 분석이 확실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세상이 이렇게 흘러온 것이 필연적인 결과였는지, 아니면 잘못된 믿음과 인식에 편승한 일부 세력들이 추동해온 허상의 구축이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온갖 부작용들을 양산하는 불평등을 인정하게 됐는지, 배제와 소외와 차별을 공고히 하는 온갖 논리와 이론들이 세상을 지배하도록 방치했는지, 그래서 체념과 불안과 공포가 만연한 세상에 살게 됐는지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원인을 모르고 내리는 처방이란 땜질에 불과하다. 원인을 알아야 인식의 변화가 가능하고, 그럴 때만이 반전의 기회가 생긴다. 그것이 너무 늦었다거나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회피하면 할수록 더 빠른 파국만이 있을 뿐이다. 원인을 알아야 책임을 물을 수 있으며,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을 수도 있다. 여성과 아이, 약자의 희생 속에 이루어진 성장이란 진보라 할 수 없고, 승자가 독식하는 발전이란 미래세대를 더한 질곡 속에 빠뜨리는 것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