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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

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 비판ㅡ들어가는 글4

   

 

 

따라서 필자가 이번 연재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현재의 결과를 초래한 진보의 낙관론이 어떻게 형성됐으며 일반화됐는지 밝히는 총체적인 작업이다. 인류 전체의 부와 권력이 상위 0.1%에게 몰리고, 기회가 박탈된 자유를 근거로 저임금의 굴레를 강요하고, 장기간에 걸친 실업을 당연시 여기게 만들고, 부의 불평등을 전 지구적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한 파국적 위험들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전 지구적 특권(관리 또는 지배)그룹의 탐욕적이고 악마적인 행태를 고발하는 작업이다.

 

 

부의 불평등과 위험의 불평등이 중첩되는 한계상황에서 이중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국가와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 죽음으로 내모는 자들이 누구인지, 누가 그리고 무엇이 그들에게 신(악마가 맞는 표현이지만)에 버금가는 힘을 주었는지, 그 과정에서 남을 부추겨 자신의 사상과 이론을 검증하는 강단과 현장의 지식인과 전문가, 적이면서도 친구이기도 한 과학과 기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철학과 문화와 종교가 어떻게 작용했는지 밝히는 작업이다.

 

 

 

전 세계를 공포와 죽음으로 몰고 가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있는 미국적인 것들이 어째서 가장 악마적인 것인지, 미국에 정착해 인류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극소수의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들ㅡ이들의 행태를 고발한 유대인 학자들도 상당히 많지만ㅡ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그들의 앞에서 인류를 끝없는 파멸로 내몰고 있는 군산복합체와 세계를 분할해서 지배하고 있는 초국적기업과 개별 국가의 지배 계층이 거대 언론(그룹)과 국제기구들을 앞세워 지구와 인류를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지 밝히는 작업이다. 

 

 

 

 

또한 이 책은 인류에게 무한한 진보가 가능함을 선언하고 약속한 근대이성이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와 자유시장이라는 ‘탐욕의 삼위일체’를 탄생시킨 것에 대한 비판서이다. 근대이성의 결과물인 '탐욕이 삼위일체'가 전 지구적 시장을 구축하는 중에 세계적 특권그룹에게 부와 권력의 독점을 부여하고 ‘초위험사회’를 초래한 것에 대한 비판서이다. 그들이 폭주하는 중에 발생한 혼돈과 파멸의 징후들이 빈곤과 불평등이라는 이중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현대(성)에 대한 비판서이다.

 

 

 

이 책은 육체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인간쓰레기’였고, 지금도 그 주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필자가, 깊은 참호 속에 들어가 격한 언어들을 쏟아내거나, 돈과 권력의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며 급진적 선동을 하거나, 동굴로 들어와 철저한 침묵 속에 빠져든 지식인을 대신해서ㅡ그것이 가능하다면, 아니 터무니없을 정도로 가능하지 않더라도ㅡ매일같이 불어나는 수없이 많은 잉여들과, 잉여에서도 삭제되는 ‘쓰레기가 되는 삶’에게 말을 건내는, 삐걱거리면서도 서툴지만 돌아가지 않는 소통의 몸짓이다. 

 

 

이 책은 또한 ‘인간의 조건’ 중에서 사회경제적 평등이 실종되면서 생존의 위기에 처한 모든 패자와 주변인 및 아웃사이더의 삶에 대한 기록이다. 1899년 키플링이 ‘백인의 짐’을 선언하며, 경제와 폭력과 착취에 관한 한 언제나 지구의 다른 지역보다 앞섰던 서구의 모델이, 미국을 거쳐 전 지구로 퍼지면서 발생한 민주주의와 사회 및 공동체의 파괴에 대한 기록이다. 최종 목표가 인류의 종말인 것으로 보이는 부정적 세계화가 폭력과 착취와 불평등을 항시적 조건으로 만들면서, 생존을 위해 정치적 자유마저 포기해야 하는 시민정신의 멸종과 인류 퇴행에 대한 기록이다.

 

 

 

이 책은 “일찍 산업화한 국가들이 화석 에너지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욕심 때문에 빚어낸 결과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지역들에 가장 혹독하게 닥치고 있는” 지구물리학적 피해들을 일으킨 주범들에 대한 기록이다. 인류의 발전을 견인했던 실물경제를 담보로 빚잔치를 벌인 자들이 이제는 실물경제마저 파괴시키고 있는 거대 금융자본의 끝없는 탐욕과 악마적 행태에 대한 기록이다. 

 

 

 

 

2008년 금융 붕괴의 주범들이 공적자금과 중하위층의 지갑을 탈탈 털어 거뜬하게 부활한 뒤, 이제는 대놓고 해적질을 해대는 ‘사탄의 맷돌’에 대한 기록이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이용해, 진공이 불러올 혼란을 잠재우겠다며 질서의 이름으로 그들만의 리그를 구축한 세계적 특권그룹의 만행과 자기기만에 대한 기록이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전 지구적 시장이란 탐욕의 네트워크를 구축해 모든 경쟁자를 따돌린 후, 지금 가진 것만으로도 턱없이 부족하다며 지적재산권과 특허권의 이름으로 인류의 마지막 자산마저 약탈하는 자들에 대한 기록이다. 

 

 

동시에 칼 마르크스의 부분적 오류ㅡ너무나 위대해서 오류조차도 그 울림의 휴머니즘이 한 치도 줄지 않는ㅡ가 또다시 보편적 진리로 되살아나는 21세기의 초반부에서, 몰락한 것을 넘어 극도로 타락한 정치(철학)의 진정한 부활을 염원하는 어리석은 자들에 대한 기록이다. 필자는 이를 위해 권력의 감시자 역할을 내던져버린 채 권력의 충견 노릇에 급급한 방송의 편향성에 주목할 것이고, 정치의 실종과 철학의 부재와 사이비 담론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언급할 생각이다. 

 

 

어느 때보다 ‘종합적인 비판이론’이 필요한 시대적 현실을 고려해 지적 탐구를 업으로 삼고 있는 아마추어 비판가ㅡ그래서 오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ㅡ의 역할에 충실하려고 한다. 나치의 준동과 전체주의적 억압을 막지 못한 니뫼러의 고백이 도출해낸 명제 ‘처음에 저항하라(Principiis obsta)’ 그리고 ‘결말을 생각하라(Finem respice)’는 비판이론의 절대명제이지만, 비판은 언제라도 유효하고 너무 늦었다 해도 하지 않음보다 낫기에 그 자체만으로도 여전히 유효하다. 

 

 

마르크스는 《자본론》과 《정치경제학 비판》 등을 통해 비판의 작업을 마친 후, “어쨌든 나는 말했고, 그래서 내 영혼은 구원받았다”고 했지만, 필자는 그처럼 위대하거나 철저하지도, 포괄적이거나 추상적이지도 못해서 영혼의 구원은 바라지도 않는다. 더구나 필자는 인격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음을 알 정도는 되기 때문에, 내가 공부하고 성찰한 내용을 건내고ㅡ너무 작아 듣는 사람이 없을지라도ㅡ동시대와 미래세대에게 진실의 일단을 전하는 자로서 만족하려고 한다.

 

 

 

비록 소수에 그칠 독자와의 여행이지만, 끝에는 흐릿하게나마 성지의 모습이 보이기를 바란다. 여행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목적지를 정하는 것에서부터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전 과정이 여행자를 더욱 들뜨게 하는 것처럼, 필자와 여러분의 여행도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대한 쉬운 언어로, 평이하게 풀어가도록 노력하겠지만, 혹시라도 그에 미치지 못했다면 모든 것이 필자의 모자람에 있지 여러분의 사유의 깊이와 넓이에 있지 않음을 밝힌다. 

 

 

 

 

다음의 인용문은 미셀 푸코와 함께 필자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발터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 나오는 글이다. 진보라는 과정이 역사의 시작부터 존재했기에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으며, 오직 미래를 향해서만 달려가는 진보의 여정에서, 이름없는 자들로 스러져간 절대 다수의 영혼들과 그들이 남긴 처참한 잔해들을 위로할 수도, 되살릴 수도 없어서 절망에 찬 눈으로 세상을 보는 무기력한 천사와 다를 것이 없다. 진보를 추동해온 ‘탐욕의 삼위일체’가 전체주의적 성향을 더 이상 숨기지 않는 시점에서, 위대한 현인 벤야민의 고뇌에 찬 공포는 지금에서야 더욱더 유효하다.

 

 

 

파울 클레어가 그린 「새로운 천사」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의 천사는 마치 자기가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금방이라도 떨어지려고 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 천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고, 입은 벌어져 있으며 또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도 바로 이렇게 보일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천사는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은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러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