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분란을 조장한 자라고 오유에서 차단당한 것을 어제야 알았습니다. 하도 오랫동안 글을 올리지 않아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찾는 작업 후에 글을 올리려 하니 분란조장자로 차단했다는 안내문이 뜨더군요. 오유는 문프를 돕고 이재명을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김어준 중심의 친목질 패거리들을 지키고 보위하기 위한 공간으로 변한 모양입니다. 손혜원과 이정렬을 옹호하는 글들의 홍수를 보면서 오유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오유에서는 정당한 비판도 갈등을 조장하는 행위가 되는 모양입니다.
문파를 자처하는 사이트들의 폐쇄성과 배타성이 도를 넘었습니다. 일베와 손가혁 같은 악질적인 네티즌들이 있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나가면 그들만의 반향실에 들어앉아서 확증편향과 집단극단화로 가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비판과 갈등, 분쟁을 두려워하면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음에도 이들은 정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노통과 문프의 위대함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누구보다 깊고, 지도자의 위치에서도 철저하게 실천했다는 것에 있음에도 이들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반댓말은 전체주의입니다. 민주주의가 다수의 독재나 이견을 허락하지 않을 때 전체주의의 초입으로 들어섰다고 하는데 사이버공간이 점점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포퓰리즘이 민주주의(특히 대의민주주의)의 반댓말이 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는데,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함께 인터넷과 SNS의 영향력이 가장 크게 작용했습니다. 인터넷과 SNS가 민주주의의 장이자 연습공간이 될 것이라는 많은 학자들의 예상은 완전히 폐기된 상태입니다.
최근에 들어서는 인터넷과 SNS의 부작용을 반성적으로 고찰하는 학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도 인터넷과 SNS를 활용해 불평등과 양극화를 늘리는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고사시키고 있습니다. 정치적 올바름에 반대하고 엘리트들을 무조건 저주하고,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당연시 여기고, 이민자나 외부자를 철저하게 배척하는 포퓰리즘(신포퓰리즘 포함)이 전 세계적으로 득세할 수 있었던 것도 인터넷과 SNS의 기술적 특성을 정확히 파고들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재벌은 상대도 되지 않는 독점체제를 구축한 IT공룡들로 인해 인류의 모든 자산이 하찮은 것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인터넷과 SNS는 정보통신업계와 엔터테인먼트 분야를 제외하면 모든 분야의 산업이 역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양질의 일자리가 줄어든 이유의 핵심에 자리하는 것이 정보통신기술의 폭주입니다. 노동자와 각종 전문직들을 기계와 로봇, 알고리즘으로 대체하는 것이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의 목표인데, 이는 하위 90%의 부와 기회를 상위 1%에 이전하는 신자유주의의 목표와 동일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미래세대는 물론 기성세대들마저 사람을 만나고 공동체에 참여해야 할 시간에 스크린이나 액정화면을 봅니다. 상위 10%와 하위 90%의 소통방식과 여가시간 활동에 대한 조사결과를 보면 양극화 현상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습니다. 상위 10%는 다양한 사람을 만남으로써 인맥을 구축하고, 좋은 음식과 여가활동으로 건강도 좋아지고 있으며, 그런 과정을 통해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부모의 학교행사 참여도 늘어났고, 그에 따라 자식들의 성공가능성은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습니다. 교육이 계층이동이나 계급구별의 기준으로 부상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위 90%는 사람을 만나야 할 때 스크린과 액정화면을 들여다 봅니다. 친구를 만나는 대신 게임을 하고 댓글을 답니다. 인간 대 인간의 소통이 갈수록 줄어듬에 따라 그들은 언어 활용과 이해도, 대인관계, 사회 적응, 인맥 확보 등에서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연구결과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뇌 발달에 결정적 차이를 보여준다)은 상위 10%에 속하는 가정이 아니면 보기 힘든 현실이 됐습니다. 사회를 살아감에 있어 불리한 것들만 늘어나는 것도 모자라 인스턴트 식품 위주의 불규칙한 식사 때문에 건강도 나빠지고 있습니다. 연인과 친구도 빅데이터가 정해줍니다.
미래세대일수록 대화를 나누는 대신 짧은 문자를 선택합니다. 심지어 마주앉은 상태에서도 문자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같이 있다고 해도 그들 모두는 분리된 타자처럼 행위합니다. 문자 대화의 특성상 글의 순서가 뒤틀리는 것을 막기 위한 수많은 신조어와 단축어들의 양산은 정상적인 언어 사용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미래세대일수록 독해력이 떨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세대간 대화가 불가능해진 것도 이 때문입니다. 다양한 집단에 가입했다는 초연결성을 주장하지만 온라인 상태로 있어야 배제를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장년층과 노년층까지 넓어지고 있습니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이런 행태를 보이고 배제와 차별, 분리, 낙인찍기, 범주화를 당연시하니 정치인과 언론도 그에 맞춰 세분화되고 차별적이며 배타적인 접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지부조화의 폭발적 증가와 우울증의 확산, 확증편향과 집단극단화의 번성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대 기업들이 인류를 멸종으로 내몰 수 있는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것도 공통의 합의를 끌어낼 수 없는 현실 때문입니다.
악순환의 고리가 강고해졌습니다. 사이버공간은 초연결성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제는 배제하고 범주화하고 분류해서 낙인찍는 초단절성 때문에 사이버공간이 분열과 혐오, 폭력의 장으로 변질돼버렸습니다. 모든 견해들이 양극화로 치닫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이분법이 범람해 인종차별, 성차별, 계급차별, 민족차별, 학력차별 등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갈등이 없는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의 다른 말인데, 인터넷과 SNS에 포획된 현재의 상황은 정치적 용어로 말하면 '전도된 전체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집필 중인 책에서 인류가 처한 3가지 절대 위기를 다루었는데, 지구온난화와 함께 민주주의의 위기와 인공지능의 폭주를 다룬 부분에서 이런 현실을 있는 그래도 담아내기 위함입니다. 모두가 어떤 필터링도 거치지 않은 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치의 폭발적 과잉은 세계 최고의 항공모함이라고 해도 산으로 끌고갈 수 있을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갈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민주적 토론도 불가능합니다. 그들만의 룰을 정해서 어떤 갈등과 반박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전도된 전체주의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전처럼 블로그와 아고라에만 글을 올렸을 때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인터넷과 SNS의 보편화로 인해 디지털 따돌림(사이버 불링)과 확증편향, 집단극단화가 일상화됐습니다. 이런 현상은 문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보고 싶은 것과 듣고 싶은 것만 허용됩니다. 격렬한 토론이 벌어지면 분열조장자가 돼 차단됩니다. 개인의 블로그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여러 명이 글을 올리는 사이트라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자체정화라는 유일한 방어막이 일방적인 도구로 전락해버렸습니다.
노통과 문프의 정신과 가치에도 맞지 않는 일들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실관계는 알아보지도 않은 채, 대부분의 경우에는 글도 읽지 않은 채,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에게 한 답글을 캡쳐해 다른 상황에서 이용해먹는 왜곡과 따돌림의 악마화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신의 눈이나 귀에 거슬리면 욕부터 퍼붓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한두 번의 호흡만 거르고, 해당 글들의 전후관계를 확인하는 조금의 노력만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들이 악마화의 증거로 악용됩니다.
제가 방송을 선택한 것은 이런 현상에서 한 발 떨어져 제가 공부하고 성찰한 것들을 풀어놓기 위함입니다. 영상이라고 해서 여러 조각(짤)으로 잘려 왜곡과 배제의 악마화에 악용될 수 있지만, 블로그에 올리는 짧은 글보다는 종합적인 대응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 정도의 위험은 감수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첫 번째 방송에서 저의 일생을 담아내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굴곡을 겪었지만, 이렇게 살아서 방송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얘기하려 합니다. 저처럼 모든 것에서 실패한 놈도 해냈는데 저보다 나은 분들이 해낼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지요.
통신사업을 할 때 문자메시지의 장단점을 파악했는데 단점이 극대화된 현실을 보니 참으로 씁쓸합니다. 제가 하고자 했던 일들이 구글과 애플 등을 통해 거의 다 실현됐지만 기술 발전과 정반대로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소확행의 대유행은 희망이 사라진 세상의 전형적 사례여서 인류문명은 나아지고 있는지 나빠지고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우리는 누구와도 연결될 수 있지만 누구와도 함께 하지는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현실을 견딜 수 없으니 가상세계로 빠져들고요.
시간에 의한 공간의 실종은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든 연결돼야 고립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그러나 여전히 홀로 떠돌아다니는 점이자 섬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1인가구의 증가와 혼밥, 욜로의 대유행은 인간의 진화과정을 역으로 돌리는 후퇴의 과정이 아니면 무엇일까요?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합의는커녕 가장 기본적인 민주주의라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누가 친구이고 가족이고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누가 이방인이고 외부자일까요?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연결된 상태인 당신, 스크린과 액정화면에서 벗어나면 당신의 곁에는 누가 함께 하고 있나요?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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