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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있는 공간

영면에 든 박원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우리는 어느 맑은 새벽에 출발했다. 지난밤에 오랫동안 사색을 했기 때문에 지성은 몹시 피곤해서 아직까지도 잠을 자고 있었지만, 감각은 태양과 함께 번쩍 눈을 떴다. 이런 아침에는 한두 시간 동안 이 세상의 모든 소리와 냄새와 색깔이, 생각을 통해 여과되거나 정형화되지 않고 개별적으로 직접 우리에게 와 닿았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충분히 자족하며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신의 창조물들에서 모양의 결함이나 부주의한 면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안타까운 마음 같은 것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T.E.로렌스의 <지혜의 일곱기둥>에서 인용

 

 

저는 그래서 이렇게 썼습니다. 

 

 

만물은 아름답거나 초라하고 복잡하거나 단순했다.

날것 그대로의 세상에선 모든 것이 투명해 어떤 꾸밈도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배하는 관성의 법칙도, 거대한 거리에서 작용하는 중력의 힘도, 나노 세계보다 더 작은 극소의 공간에서 작동하는 양자역학의 에너지도, 질량불변의 법칙에 이르기까지 우주를 지배하는 모든 물리학 법칙마저도 사라져버렸다.

사실마저 왜곡하는 언론들의 승냥이 같은 물어뜯음도 없었고 욕망의 질주도 바람에 쓸려나갔다. 

모두가 침묵했고 모두가 꿈꾸었다. 

그렇게 시공을 뛰어넘어 내가 로렌스의 영적 경험에 빙의됐거나 아니면 로렌스가 내 몽상적 경험에 빙의됐거나, 그 꿀맛 같은 몇 분, 아니 몇 십 분, 몇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거듭 말하지만 시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깨달음이나 본질의 차원을 얘기할 때는 시간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정말 그 몇 분이 거짓말처럼 지나갔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

투명한 질서만이 혼돈처럼 자유로운 곳.

 

 

 

이성은, 죽음이란 단지 육체가 정신의 사슬을 끊고 자유롭게 풀려나는 것에 불과하다고 속삭였다.

 

인생이란 너무나 개인적인 것이어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다. 한 개인의 죽음은 그의 마지막 남은 자유의지이며, 견딜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이자 은총인 것이다.

 

 

T.E.로렌스의 <지혜의 일곱기둥>에서 인용

 

 

그래서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꿈꾸면서도 외치지 않는 자에게 용기를, 지켜보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자에게 투지를, 결말을 상상하면서도 처음에 저항하지 않은 자에게 결단을, 현실의 한계에 짓눌려 침묵하는 자에게 참여를, 개인의 자유와 견해의 다름을 주장하는 자에게 연대를 그리고 나에게는 죽음에 이르러 마침내 내려놓을 고뇌의 여정과 대가 없는 평화를.

 

 

그들은 출발의 민족이다.

그들에게 추상적인 것은 가장 커다란 동기였다. 그리고 무한한 용기와 다양한 변화의 과정을 거쳐서 끝내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물처럼 불안정하다. 그리고 아마도 끝내는 물처럼 모든 것을 극복할 것이다. 생명이 시작된 이래로 그들은 끊임없는 파도가 되어 육체의 해안에 스스로를 부딪치면서 살고 있었다.

 

언젠가는 걷잡을 수 없는 파도가 물질적인 세상이 자리 잡고 있던 그곳을 완전히 뒤덮어 버릴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신은 그 수면 위로 움직일 것이다.

 

세속적인 일의 저항을 받고 물러난 그 파도의 잔해를 씻어내는 것은 뒤를 이어서 밀려오는 파도가 할 일이다.

그래서 언제가 때가 무르익으면, 바다는 또다시 커다란 물결을 일으켜서 서서히 몸을 일으킬 것이다.

 

 

T.E.로렌스의 <지혜의 일곱기둥>에서 인용

 

 

 

 

그래서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aPe6RGsPQ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