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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 진정한 생명의 나무는 하나
진화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생물은 유일하고 정확한 계통도를 갖는다...분지분류학에서는 생물을 그룹으로 나누는 궁극적인 기준을 유연관계가 가까운 정도, 다시 말하면 공통 조상의 상대적인 가까움에 두고 있다...모든 파충류의 가장 최근의 공통 조상은 일부 비 ‘파충류’, 즉 조류나 포유류의 조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어떤 생물이 서로 아무런 유연관계도 없는 경우는 결코 있을 수 없다. 어쨌든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생명이 탄생한 곳이 지구밖에 없다는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분지분류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계층적이다. 내가 계층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생물의 분류 체계는 끊임없이 분지를 계속 할 뿐 두 번 다시 수렴하는 일이 없는 가지를 가진 나무로 표현된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오직 진화가 전해 내려오는 모양이 계층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복이란 없다. 완전한 겹쳐짐이 발견된다. 포유류나 조류의 중간형으로 보이는 외관은 대부분 착각에 불과하다. 진화론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런 식의 중간형 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멸종된 동물을 고려에 넣은 순간, 어떠한 중간형도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진실이 아니게 된다. 우리는 이제 연속된 것으로 보이는 일련의 중간형들과 싸워야만 한다. 현생 조류와 포유류 같은 현생 비조류 사이에 서 구별이 명확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공통 조상으로 수렴되는 중간형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완전한 화석 기록이 없는 것은 오히려 축복이다. 인간의 정신은 하나하나 구분할 수 있는 이름을 대단히 선호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화석 기록이 풍부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간 중심적 사고(필요하다면 침팬지를 난도질할 수 있다는 사고) 때문에 이중 기준에 안주하고 있는 유일한 이유는 사람과 침팬지의 중간형이 남김없이 사멸했다는 것뿐이다. 단속론자는 종을 실재하는 ‘무엇’으로 간주하고 그 자체가 명확한 정체성을 가지기 때문에 ‘종’을 진정한 ‘실체’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단속평형론자가 일반적인 개체 수준에서 나타나는 다윈의 자연선택에 비유되는 종 수준의 자연선택을 믿는 경향이 있다.
한때 생존했던 거의 대부분의 종이 멸종했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새로운 종이 최소한 절멸하는 속도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정도로 새로 태어나서 결과적으로 그 구성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한 종의 ‘풀’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종의 풀이 보충되거나 제거되는 것이 임의적인 과정이라면 이론적으로는 한 종에 대한 고차 수준의 자연선택 조건이 성립하게 된다. 어떤 종이 가지는 특징이 멸종이나 새로운 종을 태어나게 할 확률 중 한쪽으로 치우치게 될 가능성은 있다. 우리가 현재 세계에서 관찰할 수 있는 종은, 그 종이 최초로 이 세상에 나타나는, 즉 ‘종 분화하는’데 필요한 종은, 그 종이 최초로 이 세상에 나타나는, 즉 ‘종 분화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 또는 멸종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는 경향이 있는 종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원한다면 그것을 자연선택의 한 형태라고 불러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누적적인 자연선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1단계 선택에 가깝지 않을까?
종 선택이 복잡한 적응의 진화를 설명하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복잡한 적응은 거의 대부분 종의 성질이 아니라 개체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종이 눈이나 심장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은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 영향을 주는 총합으로 환원될 수 없는 방식으로 종의 생존과 번식에 영향을 주는 특성이어야 한다.
개체의 이익과 종의 이익이 대립할 때, 개체의 이익(단기적 이익)이 반드시 우선하지만, 종의 생존을 위해서는 개체의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에 종의 이익을 위해 이타적인 개체의 유전자가 종 선택에서는 환영을 받는다...진정한 종 수준의 특성으로서는 가장 극적인 예가 유성 생식 대 무성 생식이라는 번식 양식과 관련된 예일 것이다...무성적인 종이 출현했다고 하더라도 멸종하는 경향을 갖는 이유는 변화하는 환경에 뒤지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진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에 비해 유성 생식을 하는 종이 멸종하지 않는 경향을 갖는 것은 환경의 변화를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만큼 빠른 속도로 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종 선택은 오직 두 가지 특성, 즉 무성 생식과 유성 생식, 느린 속도의 진화와 빠른 속도의 진화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단순한 1단계 선택이다. 유성 생식의 도구인 생식 기관 및 생식 행동, 생식 세포의 분열을 위한 세포 내 기구, 이 모든 것들이 종 선택이 아닌 표면적인 저차원의 다윈식 누적 선택을 통해 하나로 결합될 수밖에 없었다.
유전자적 사전에서 나타나는 거의 완전한 문자 그대로의 보편성은 분류학자에게 있어서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다른 분자 정보를 사용하면, 완전한 동일성이 아니 다양한 정도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각각의 단백질 분자는 하나의 문장, 즉 사전에 실려 있는 아미노산 단어의 사슬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장을 번역된 단백질로도 또는 원래의 DNA로도 읽을 수 있다. 모든 생물은 같은 사전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들이 그 공통 사전을 사용해서 동일한 문장을 만드는 것을 결코 아니다. 이것이 여러 가지 다른 수준의 유연 관계를 해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단백질 문장은 세부적으로는 다르지만 전체의 패턴으로서는 매우 흡사한 경우가 많다. 어떠한 두 생물에서도 같은 선조의 문장을 조금 ‘손질한’ 수정판이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날 만큼 충분히 유사한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단백질과 DNA 문장이 아주 비슷하면 유연관계가 가깝고 그 문장이 다를수록 유연관계는 더 멀다...현대 분자생물학의 우수한 점은 두 동물이 정확히 어느 정도 다른가를 그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어느 특정한 문자의 각 수정판 사이에서 몇 개의 몇 개의 단어가 다른가를 가지고 측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중립론자들의 주장은 분자 수준에서 진행되는 진화적 변화의 대부분은 ‘중립적’이라는 것이다. 즉 그 변화는 자연선택에 따른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무작위적이며, 따라서 우연히 운이 나쁜 경우를 제외한다면 분류학자를 잘못된 판단으로 이끌 수렴이라는 도깨비는 없다는 뜻이 된다. 결국 모든 종류의 분자가 광범위한 동물군에 걸쳐 대략 거의 일정한 속도로 진화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비교 가능한 분자의 숫자로부터 공통 선조가 살고 있던 때 이래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분자시계’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대부분의 분자 진화가 중립적이라면 서로 관계없는 두 동물이 우연히 단어 하나, 글자 하나까지 동일한 배열을 가질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수렴 진화는 특수한 종류의 우연의 일치이다. 이 우연의 일치에서 중요한 점은, 비록 한 번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두 번 계속해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세 번 일어나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점차 다른 단백질 분자의 숫자를 늘릴수록 우연의 일치는 거의 배제할 수 있게 된다.
제11장 – 경쟁 이론들의 최후
다윈주의의 설명에도 돌연변이라는 형태의 우연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우연은 여러 세대에 걸친 자연선택을 통해 한발 한발 누적적으로 여과된 것이다.
현대의 ‘신라마르크주의자’에게만 적용되는 요소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획득 형질의 유전이고, 다른 하나는 용불용의 원리이다. 용불용의 원리는 생물의 몸 중에서 자주 사용하는 부분이 점차 커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빈번하게 사용하지 않는 부분은 쇠퇴할 것이다. 용불용의 윈리를 통해 동물들은 그 세계에서 살아남는다는 임무를 보다 잘 수행하게 되고 그 결과로서 생애 동안 차츰 능력이 향상될 수 있게 된다. 획득 형질의 유전과 용불용의 원리를 하나로 합치면 진화적 개선에 기여할 수 있는 훌륭한 비결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이 이론의 장점은 누적적이라는 점에 있다...라마르크주의는 인간성의 개량이라는 문제와 관련해 그런 식의 긍정적인 희망을 준 것 같다.
진실은 아니지만 가능한 이론과, 성공적이며 위대한 정통 과학 체계를 뒤집는다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서야 만이 진실일 수 있는 이론 사이에는 여러 이론들의 연속체가 있다.
어느 ‘특정’ 세포가 그 세포 안에 들어 있는 유전자에 의존해 행동하지 않고 그 세포 속에서 유전자의 부분 집합에 스위치가 켜지는 것을 통해 작동할 수 있는 이유는 몸의 세포가 모두 동일한 유전자 집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발생 중의 어느 시점이든, 발생 중인 몸의 어느 장소든 극소수 유전자의 스위치밖에 껴지지 않을 것이다. 배아의 장소가 다르거나 발생시기가 틀리면 스위치가 켜지는 유전자의 부분 집합 역시 달라질 것이다.
어떤 시기에, 어떤 세포에, 어떤 유전자의 스위치가 켜질 지의 여부는 그 세포의 화학적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또 화학적 조건은 배아의 해당 부분의 이전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더욱 유전자의 스위치가 ‘켜져 있을 때’ 그 유전자가 어떤 영향을 받을지는 정확하게 배아의 해당 장소에 효과를 미치는 무엇이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발생 개시 후 제3주에 척추 기저부의 세포에서 수위치가 켜진 때와는 전혀 다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처럼 어떤 유전자가 미치는 효과란, 만약 그런 효과가 있다면, 단순히 유전자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배아 속에서 그 유전자의 국부적 환경을 이루고 있는 장소의 최근 역사와의 상호 작용에 따라 결정되는 유전자의 성질인 것이다.
따라서 유전자와 몸의 일부 사이에는 단순한 일대일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요리법에 들어 있는 설명과 케이크 조각 사이에 일대일 대응이 성립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청사진을 보고 무엇인가를 만드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요리법의 경우와 달리 그 과정이 가역적이라는 점이다...대장장이의 아들은 자기 부친의 노동의 결과로 단련된 근육을 이어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이런 일이 불가능하다.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유전자가 청사진이 아니라 요리법이기 때문이다.
성체가 주사되고, 그 주사 결과의 기록이 유전자에 피드백되는 따위의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굳은살이 박힌 ‘좌표’는 유전적 기록 속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그에 ‘대응하는’ 유전자가 변화할 수도 없다. 배 발생은 하나의 과정이고 기능하는 유전자는 모두 그것에 연관되어 있다. 그것이 올바른 전진 방향으로 추진되면 그 결과로 성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비가역적인 과정이다. 획득 형질의 유전은 단지 ‘일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배 발생이 전성적이 아니라 후성적인 한, 어떤 생명 형태에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획득 형질의 거의 대부분은 손상이기 때문에 만약 획득 형질이 무차별적으로 유전된다면 진화가 일반적인 적응적 개선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임은 자명하다.
용불용의 원리의 큰 문제란 다른 문제가 전혀 없다 하더라도 이 원리는 우리가 실제 동물이나 식물에서 관찰할 수 있는 대단히 정교한 적응을 설명하기에는 지나치게 투박하다. 눈 등의 복잡한 기관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아무리 정교하고 내부 조직 깊숙이 묻혀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눈의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개선은 동물의 생존과 번식의 성공에 공헌하고, 나아가 그 개선을 낳은 유전자의 증식에 공헌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윈 선택은 개선을 초래하는 진화를 설명할 수 있다. 다윈주의는 생존에 성공적인 장치의 진화를 그 성공의 직접적인 귀결로 설명하고 있다. 설명과 설명이 되는 대상 사이의 연결 관계는 극히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직접적이다.
라마르크설은 설명과 설명이 되는 대상 사이의 부정확하고 느슨한 연관 관계, 즉 자주 사용하는 부분이 점차 커진다는 식의 규칙에 의존하고 있다. 이것은 특정 기관의 크기와 그 효과 사이의 상관 관계에 의존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설령 그런 종류의 상관 관계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극히 미약한 관계임이 분명하다. 다윈주의는 기관의 ‘유효성’과 그 효과의 상관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완벽한 상관 관계이다.
중립설에 따르면 진화는 무작위적이다. 하지만 적응적 개선은 무작위적이지 않다. 따라서 중립설은 적응적 복잡성을 설명할 수 없다.
돌연변이는 무작위적인 것이 아니다. 돌연변이가 진정한 의미에서 무작위적인 경우는 ‘무작위적’이라는 말을 ‘몸의 개선되는 방향을 향한 일반적인 경향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의미로 정의할 때에만 해당한다.
변이와 선택이 공동 작업을 한 결과 진화가 일어난다. 다윈주의자의 주장에 따르면 변이의 방향은 개선을 향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무작위적이다. 진화에서 개선을 향한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선택을 통해서이다.
다윈주의자 입장에서 보면, 돌연변이가 적응적 개선의 방향으로 규칙적으로 편향되어 발생하는 경우란 없다는 뜻에 불과하다. 모든 변화가 ‘똑같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미래를 내다보고 그 동물에게 무엇이 유리한지 미리 알 수 없다는 의미에서 무작위적이라는 뜻이지. 절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느 유전자가 언제든 돌연변이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해도, 그 돌연변이로 인해 몸이 받는 결과는 배아 발생의 과정에 엄격하게 제한된다...날개라는 장치는 발생 과정이 그것을 허용할 때에만 진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무엇도 마술처럼 날개를 ‘돋게’할 수는 없다. 그것은 배아의 발생 과정에 따라 형성될 수 있을 뿐이다. 가능한 진화 중 극소수만이 기존의 발생 과정 당시의 상황에 따라 실제로 현실화될 수 있다...유전자는 지칠 때까지 무수하게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지만, 배아 발생 과정이 그러한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 한 포유류가 천사와 같은 날개를 돋게 할 수는 없다...배아의 발생 과정이 진화에 부여하는 제약을 무시할 수 없다.
돌연변이는 ‘이미 존재하는’ 배아 발생 과정에 변화를 더할 수 있을 뿐이라는 의미에서 무작위적이지 않다. 아무리 자연선택에 유리한 변화라 할지라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이루어진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자연선택에 따라 가능한 변이는 실제 이미 존재하는 배아 발생의 과정을 통해 제약을 받는다.
무작위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돌연변이를 유도하는 어떤 메커니즘도 (온전하게 표현하자면)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돌연변이는 다른 모든 측면에서 무작위적이지 않지만 적응적 유리함이라는 측면에 대해서만 무작위적인 셈이다. 진화를 유리함이라는 측면에서 무작위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는 힘은 선택, 오직 자연선택뿐이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진화 경로 중에서 극소수가 현실에서 일어난 경로이다...자연선택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동물의 계통수 속에서 길을 선택해 소수의 생존 가능한 길만을 발견할 수 있는 과정이다...끊임없이 계통수 가지의 대부분을 쳐 내는 것이 자연선택 이론의 본질이다.
신화들은 모두 어떤 종류의 초자연적인 존재의 사려 깊은 의도에 기대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돌연변이가 무작위적이지 않는 첫 번째 측면은 다음과 같다. 돌연변이는 분명 물리적 사건에 따라 야기된다. 다시 말해서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돌연변이는 이른바 ‘돌연변이원’(간혹 암의 원인이 되기도 해서 위험하다.) 때문에 유발된다.
두 번째로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모든 생물이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염색체 내의 모든 유전자 자리는 저마다 특정한 ‘돌연변이율’을 가지고 있다...염색체의 어느 부분은 높은 유전자 전환율을 가진 소위 ‘핫 스폿’이어서 국부적으로 극히 높은 돌연변이율을 가지고 있다.
세 번째로 염색체상의 각 유전자 자리에서는, 그곳이 핫 스폿이든 아니든 간에, 특정 방향의 돌연변이가 그 역방향의 돌연변이에 비해 쉽게 일어날 것이다. 이것은 동시적인 현상을 일으키거나 혹은 인도된 진화라는 형태에서 이 장에서 고려되었던 다른 이론들에 돌연변이설이 합류하도록 만들었다.
(결론) 생명의 본질은 거대한 척도에서 볼 때 통계적인 불가능성에 있다. 따라서 생명에 대한 모든 설명은 우연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존재에 대한 진정한 설명은 분명 우연에 대한 반명제를 구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연에 대한 반명제는 무작위적이지 않은 생존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무작위적이지 않은 생존은 우연의 반명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우연이 될 것이다. 이러한 양극을 연결하는, 즉 1단계에서 누적적인 자연선택에 이르는 연속체가 있다. 1단계 선택이란 순수한 우연의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바로 이것이 내가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무작위적이지 않은 생존이라는 것이다. 느리고 점진적인 ‘누적적인 자연선택’이야말로 생명이 가지는 복잡한 설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으며, 더욱이 지금까지 제안된 이론 중에서 유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설명이다.
느리고 점진적인 누적적 자연선택이야말로 우리 존재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이라는 것이 다윈주의에 토대를 둔 세계관의 주장이다. 느린 속도의 점진설을 부정하고 자연선택의 중심적인 역할을 부정하는 진화론의 이설이 있다면 그런 변종들은 특정한 경우에는 사실일 수 있지만, 결코 완전한 진실은 아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이설들이 진화론의 핵심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진화론의 힘은 천문학적인 불가능성을 해소하고 믿을 수 없고 기적처럼 보이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P.S. 리처드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은 그의 주저인 <이기적인 유전자>보다 더욱 철학적이고 과학적입니다. 이 책을 반드시 구입해 읽기 바라는 마음에서, 또는 책장에라도 진열하시라고 주요 부분만 요약해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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