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히브리인 예수는 선과 정의감에 대한 증오, 히브리인의 눈물과 슬픔을 알고 있을 뿐이었는데, 어느새 죽음의 동경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그가 만약 선과 정의에서 멀리 떨어진 사막에 남아 있었다면 아마도 그도 사는 것을 배워 대지를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웃는 것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ㅡ 리드리히 빌헬름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하늘 아래 유일한 것은 “우주의 에너지 총합은 일정하며 에너지를 사용하면 엔트로피 총량, 즉 무질서도는 계속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1법칙과 제2법칙뿐이다. 아인슈타인도 인정했듯이, 부분적으로 닫힌 세계인 지구에서 이 두 가지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에너지는 입자로 전환될 수 있고, 그 입자들이 모여 존재를 이루기 때문에 우주의 에너지 총합은 존재하는 모든 입자들의 총합과 같다. 또한 자연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위는 에너지를 사용해야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따라서 에너지의 총합이 일정한 안정된 상태에서 어떤 존재가 생존이나 기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정량의 에너지를 사용해야만 한다.



그럴 경우 다른 존재들은 그만큼 무질서해진 상태(엔트로피)에 노출되기 때문에, 그들이 생존에 필수적인 질서 있는 상태를 유지하려면 그만큼의 에너지를 사용해야만 한다. 결국 모든 존재는 생존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만큼의 에너지를 확보해야만 한다. 물론 모든 사용된 에너지가 100% 엔트로피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어서 쓸모없이 소비되는 에너지도 있다. 따라서 에너지 총합이 일정한 지구에서 에너지 사용은 평균적인 수준이라도 그 이상의 엔트로피를 발생시킨다. 게다가 지구는 부분적으로 닫힌 세계, 즉 에너지가 입자로 전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세계여서 모든 존재들이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은 한정돼 있다. 결국 모든 존재들이 에너지 확보와 사용을 위해 득달같이 달려든다면, 그 빌어먹을 홉스의 명언처럼 세상은 에너지 사용을 위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비록 그의 명언이 열역학 법칙에 내재된 심오한 원리, 특히 엔트로피에 대한 이해에서 한참 벗어나 있지만, 그 두 개의 법칙은 인간의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즉, 입자로 이루어진 내가 부와 권력 따위를 얻기 위해 에너지를 사용하면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그만큼 늘어난 엔트로피에 노출되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같은 양의 에너지가 허용되지 않으면 그들은 생존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부터 불평등에 처하게 된다. 이런 논리는 나를 넘어 가족, 사회, 세대, 국가 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래서 평균 이상의 에너지를 사용해야만 얻을 수 있는 모든 부와 권력에는 그만큼의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 것이고, 아예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고 거대한 부와 권력을 획득하고 세습하는 불로소득은 반드시 막아야 할 최악의 범죄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최대한 평균에 수렴하는 부와 권력의 재분배는 지극히 당연한 우주의 법칙이며, 인간에 의한 의도적이고 불순한 개입만 없다면 그렇게 이루어진다. 



내 삶도 여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0년 전, 창백할 정도로 투명한 창 너머로 가을 단풍이 붉은 노을에 속절없이 젖어들 때, 한창 때인 아버지와 어머니가 번개처럼 눈이 맞아 그 뜨겁고 끈적끈적한 욕망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자지러지듯 아버지 몸에서 어머니 자궁으로 자리를 옮긴 나는, 어머니 배속에서 10개월을 머물렀던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이 건강하게 태어났다. 그리고 동생이 태어나기까지 4년 동안 (가끔은 어머니의 사랑을 아버지에게 양보했을 경우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처럼 어머니와 가끔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으로 추정되는 나는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그분들의 말에 따르면, 아무 탈 없이 무럭무럭 자랐다고 한다. 



헌데 나에게 허락된 평균적인 삶은 그로부터 3년 후까지만 허락되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유난히 건강한 신체를 물려받은 동생이 약 먹은 콩나물처럼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것에 비해, 7살이 된 나는 아주 조금씩 성장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대신 나의 뇌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발전을 거듭했다. 육체적 성장이 둔해지면 둔해질수록 이놈의 뇌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행보를 거침없이 보여줬다. 한 번 보거나 들은 것은 자동 저장돼 삭제되지 않는 것은 기본이었고, 특히 수학적인 지능과 추상적인 직관, 논리적인 상상력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명석해졌다. 대략 100억 개에 이르는 뉴런과 무려 30개조 개에 이르는 시냅스가 연결돼 대뇌피질에 셀 수 없이 많은 이랑과 고랑을 만들었다. 그렇게 3년이 더 흐르자 육체와 뇌의 발전을 위한 에너지 사용의 균형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하지만 양자역학에 관한 최신 물리학 이론이나 방정식도 쉽게 풀어내는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어떤 목적으로든 뇌를 사용할 때마다 평균 이상의 에너지가 소비된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마치 제국주의시대의 강국들이 주변의 약소국들을, 내부의 강자들이 지방을 식민지화한 것처럼 뇌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육체가 사용해야 할 에너지를 일방적으로 착취하는 방식이었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괴이한 현상만 놓고 볼 때, 나는 마치 고성능 뇌의 활동을 위해, 육체적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최대한 억제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인조인간을 연상시켰다. 뻥의 대가인 할리우드에서도 나 같은 인간은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육체적 기능이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급속히 퇴화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뇌의 기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육체적 기능과 움직임이 느려졌을 뿐, 생존을 위한 근본적인 역할은 제대로 이행됐다. 오감도 살아 있으며 피를 공급하는 심장도 산소를 제공하는 허파도, 음식으로부터 각종 영양분을 축출하는 위와 장의 작용도, 소화효소를 분비하고 각종 독성을 걸러내는 간의 작용도 제대로 이루어졌다. 당연히 땀과 각질도 오줌과 똥도 제대로 나왔다. 이 모든 것들이 평균보다 느리게 나왔을 뿐이고, 평균적인 인간보다 상당히 적은 에너지로 실행됐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모든 신체적 작용이 뇌의 발달을 제외하면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 사용을 최소화하는데 최적화되어 간 것이었다. 이는 마치 음식과 인조 영양제를 통해 얻게 된 신생 에너지와 육체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기본 에너지 총량을 생존에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배분하는 살아 있는 컴퓨터를 방불케 했다. 자연선택에 의해 생존에 적합한 유전자를 후대에 전하는 진화처럼, 나라는 존재는 한정된 에너지를 이용해 최적의 생존 방식을 찾아가는 뇌에 의한 육체의 착취사였다. 그것은 세상이 에너지 사용에 따른 엔트로피의 증가를 최대한 조절해 전체적 균형과 생명을 연장하는 것과 동일했다. 



가끔씩 감기나 상처 때문에 육체적 문제가 발생해 에너지 배분에 일시적 문제가 생기거나, 유리처럼 섹시한 가수나 상하의가 실종된 채 선정적인 춤으로 도배하는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를 보거나, 그것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데 구태여 꿈에까지 찾아온 그들이 고맙게도 나를 유혹하는 등의 돌연변이적 사건 때문에 과도한 에너지 사용을 감당하지 못해 제어의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끊임없이 이어진 음양의 피드백을 통해 에너지 제어의 효율성은 높아져 갔다. 인류의 역사가 지구적 차원의 에너지와 물질의 끊임없는 프로세싱과 그에 연관된 정보의 피드백 및 재프로그래밍의 과정인 것처럼 나의 삶이란 뇌의 발전에 사용될 에너지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육체의 기능을 최소의 에너지로 수행하고 늘어난 엔트로피를 최대한 통제하는 제어 혁명의 역사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게 몇 년이 더 흘러 온라인상에서 접할 수 있는 모든 수학문제를 풀어낸 15세에 이르러서는 내가 나의 상태를 인체공학적으로 반영한 의자에 앉아서도 채 10분도 버텨낼 수 없을 만큼 육체적 기능에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어쩌면 ‘급격히 줄어들었다’보다는 ‘철저하게 제한됐다’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의자에 앉아 있는 10분 동안에도 자세를 유지하는데 사용될 에너지가 뇌의 활동에 동원됐기 때문에 근육에 사용될 에너지는 철저하게 제한될 수박에 없었다. 그렇다고 육체의 기능이 루게릭병처럼 무력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오감에 가해진 자극이 뇌에 전달되는 속도가 에너지 사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인지 갈수록 느려졌을 뿐이다. 즉, 피부나 신체에 가해진 자극이 신경망을 타고 뇌로 전달되는 속도가 굼벵이 기어가듯 느려서 에너지 소모가 최소화됐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외부 자극에 대한 뇌의 인지과정에 상당한 시간차를 보이게 돼 신체적 반응이 갈수록 느려졌다.



하지만 인지와 반응 사이의 시간차라는 그 지랄 맞은 느낌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이해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정상인데 신경이 전달되는 속도가 느려서 평균보다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반응이 일어난다는 것은, 한 마디로 사람을 미치고 환장하게 만든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뇌는 이미 그 다음 반응을 하달했지만 앞에 보낸 내용이 아직 현실 세계에 반영된 상태가 아니었으니, 오감에 작용하는 모든 것에서 나는 상당한 지체현상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몇 초 전의 과거를 현재처럼 사는 사람이 되었다. 이를테면 내가 실제로 귀신을 봐도 몇 초 후에나 귀신인줄 알고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눈에서 시상하부로 전달된 시각 정보가 느려서 뇌에서 이루어진 반응이 현실화되는 데는 것까지 몇 초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물론 귀신에 대한 두려움의 크기는 똑같다. 다만 인지하고 반응하는 것이 느릴 뿐이다, 귀신의 체면이 말이 아닐 정도로.



어떤가? 상상만 해도 지랄 맞지 않은가? 귀신은 또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내가 놀라야 자신의 존재 가치가 입증되는 것인데, 죽어서도 풀지 못한 이승의 한 덕분에 얻게 된 차원 이동과 두려움 유발 능력의 결정체인 자신을 보고도 심하게 골골해 보이는 내가 몇 초 후에나, 마지 못 해 놀라는 표정이나 반응을 보인다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는가? 이것은 그래도 양반 측에 속한다. 문득 과일을 먹고 싶어 과도를 들었는데, 어 이거 거꾸로 잡았네? 그것도 시퍼렇게 날을 세운 후 처음으로 잡았다면 가뜩이나 약한 피부에 상처가 나고 거기서 피가 흘러나오는데, 그제야 거꾸로 잡은 걸 알 수 있다면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니겠는가? 엉덩이에 욕창이 생겨 이불에 피고름이 베 나와도 그것이 아픈 것임을 알기까지 몇 초간의 시간이 걸린다면, 게다가 그것을 눈으로 지켜보고도 즉각적인 인지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 지랄 맞은 시간차에 돌아버리지 않겠는가?



또 이것은 어떤가? 등산을 하는데 앞선 놈 때문에 수박만한 돌이 떨어져 머리가 깨지고 난 뒤에야 ‘어, 내 머리가 깨지겠는데?’ 해봤자, 앞선 놈이 고의로 그랬는지 단순한 사고인지 살아서 밝힐 수나 있겠는가? 사랑하는 여인과의 키스는 상상할 수도 없다. 상대는 달아올랐는데 나는 몇 초 뒤에야 키스했다는 것을 알고 그제야 달아오르면 상대의 입장에서 얼마나 무안하겠는가? 내 반응에 실망한 상대가 입술을 떼는데, 뒤늦게 달아오른 내가 설왕설래를 시도라도 했다면.. 아, 그 다음의 상황은 생각하기도 싫다. 키스를 네이버나 구글에서 배운 놈도 나 같지는 않을 것이다. 상상 속에서도 몇 초 전의 생각에 반응하는 육체란 정말 지랄 맞은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4.12.05 08:03 신고

    시작부터 좀 난해하긴 하지만
    열심히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4.12.05 09:53 신고

      네, 앞 부분이 많이 난해합니다.
      퇴고를 해야 하는데 그럴 시간과 체력이 안 돼 그냥 올리니 이해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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