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영워드

우영워드 ㅡ 수경의 결심2




                                           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수경은 창문을 관통한 햇볕이 여전히 따스했기 때문에 재우 오빠에게 주어진 에너지의 불균형이 결코 가혹하지 않은 것인 양, 신은 오빠의 얼굴에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있을 것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는 자신이 모든 이승의 생명에 대한 소유권을 자신이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엄혹한 상황에서도 태양은 빛나야 하고 바람은 불어야 하며 꽃은 피어야 하고 나무는 무성해야 하는 것이라 주장하는 신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쩌면 신은 자신의 영광을 찬양받기 위해서 자연을 만들고도 인간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소아병적 환자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수경은 몇 날을 고민한 끝에 한 가지 방법을 찾을 수 있었고 가능하면 오늘 그것을 실행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재우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다졌다. 그때 조금 열어 둔 문 틈 사이로 재영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형의 방에 이르는 재영이 천천히 방문을 연 다음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수경씨, 저 출근합니다. 오늘은 지방 취재가 있어서 들어오지 못할 것 같아요. 밤에는 제법 추워질 것 같으니 보일러 트시고요. 형님, 부탁드릴게요.”



재영은 수경에게 말한 다음 곤한 잠에 빠져 있는 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재영은 요즘 들어 형의 수면시간이 빠르게 늘어나는 것이 두려웠지만 수경 앞에서 드러낼 수는 없었다. 반면에 수경은 형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 다음부터 자신을 부를 때 반드시 존칭을 붙이는 재영이 못내 서운했지만 그녀 역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재영씨, 걱정하지 마세요. 형님이 늦게까지 작업을 하시느라 많이 피곤하셨던 모양이에요. 아마 몇 시간 정도는 더 주무실 것 같아요. 잘 다녀오세요. 제가 형님께 말씀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수경씨. 혹시 뭐 필요한 것 있나요?”

“요즘 배가 싱싱하고 달다고 하던데?”

“알겠습니다, 최고로 좋은 걸로 사올게요. 그거면 되나요? 야채는 충분하지요? 수경씨는 뭐 필요한 것 없으세요?”



재영은 재차 수경에게 물으며 형의 상태를 다시 한 번 살폈다. 수경은 그런 재영의 모습을 상상으로 떠올렸다. 혹시라도 형이 깨면 그냥 갈 수 없어서, 그런 형을 돌보는 자신에게 최대한 부담을 주지 않으려 아주 세세한 것까지 배려하는 그의 모습을 떠올려 봤다. 수경은 재우의 숨소리가 고른 것으로 봐서 깨어나려면 최소한 한 시간 정도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거면 충분해요.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알겠습니다, 수경씨. 그럼 다녀올게요.”



재영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마루를 지나 구두를 신고 현관문을 나섰다. 수경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으로 내려가는 재영의 구두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린 다음, 나지막한 음성으로 재우를 불러보았다.



“재우씨?”



그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수경은 그렇게 재우가 깨어나려면 대략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음을 확인해 본 다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오늘이 적기야. 더는 미룰 수 없어. 그건 모두를 망치는 일이야.’



수경은 마음을 다지며 입고 있는 옷을 하나씩 벗어 세탁기 위에다 올려놓았다. 브래지어와 팬티까지 벗은 후 조심스럽게 샤워기를 틀었다. 상당히 차갑게 느껴지는 물이 머리를 적시며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화들짝 놀란 피부가 자신의 마음처럼 수축되었다. 하지만 수경은 물의 온도를 조절하지 않았다. 마치 깨끗한 냉수에 영혼까지 씻어낼 듯이 차가운 물에 자신의 몸을 모두 내맡겼다. 물오른 24살 처녀의 탄력적인 신체가 가냘프게 떨렸다. 수경은 한동안 샤워기에서 나오는 차가운 물에 온몸을 맡기고 있다가 손을 내밀어 비누를 찾았다. 그 더듬거리는 손길이 그녀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떨리는 두 손으로 비누에 거품을 낸 후 온몸 구석구석을 정성 드려 닦고 닦았다. 물이 차가워 비누 기운이 쉽게 씻겨나가지 않았지만 그녀는 몇 번이고 손으로 문지르기를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샴푸로 머리를 감은 후에도 수경은 차가운 물이 한동안 더 자신의 몸을 타고 흘러내리도록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신녀가 세속의 모든 때를 씻어내기 위해 제욕의 의식을 떠올릴 정도로 숙연해 보였다. 



그렇게 40분이 넘도록 몸을 닦은 수경은 약간의 화장까지 한 후에 자신이 가장 아끼는 연분홍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그녀는 곧장 부엌으로 가 재우가 먹을 과일즙을 내고 각종 영향보충제를 섞은 고기죽을 끓였다. 과일즙을 유리컵에 담아 빨대를 꼽고 고기죽을 그릇에 옮겨 담아 입으로 불어 알맞게 식힌 후 쟁반에 담아 조심스럽게 재우의 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수경이 아점 밥상을 차리는데 또 다시 30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깊고 깊은 잠에 빠졌던 재우가 엄혹한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과정을 밟고 있었다. 제일 먼저 그의 입에서 힘겨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고 눈을 뜨지 않은 상태에서 눈 부위의 근육을 찡그렸다. 그리고 난 다음, 채 흘러내리지 않은 채 입안에 고여 있던 침으로 마른 목을 축이며 눈곱이 가득한 눈썹을 위아래로 힘들게 띄어내었다. 물론 멍 때리기의 친구이며 죽음의 사생아인 깊은 잠에서 깨어난 뇌는 이럴 때면 한결같이 일어나는 육체의 반응인 하품과 부수적인 말들을 이미 몇 초 전에 하달했다. 소원이 있다면 단 한 번만이라도 뇌와 육체의 시계가 일치하거나, 일단 저지르고 난 뒤에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으아아하함! 아, 잘 잤다. 오늘도 죽지 않고 깨어났으니, 많이 먹고 힘내야지. 수경아, 나 배고파. 얼른 먹을 거 줘.”



3년 전부터 시작된 여느 날처럼, 아침과 점심 사이에서 깨어난 재우는 늘어지게 하품을 한 다음, 수경을 향해 똑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재우는 그렇게 함으로써 오늘의 자신이 어제의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수경과 자신에게 인식시키려 했다. 그것은 또한 수경의 보살핌이 자신을 살게 하는 원동력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재우는 그런 간접적인 방식으로 수경에게 고마움을 표했으나 수경에게는 그런 배려가 지난달부터는 감당하기 힘든 마음의 짐으로 쌓이고 있었다. 수경은 오늘 그것을 풀어낼 생각이었다.



“오빠도 참! 세수부터 해야지, 깨끗하게.”

‘새신랑처럼.’



수경은 마지막 말을 마음으로만 했다. 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그 말이 왠지 가슴을 설레게 했다. 사랑은 폭풍처럼 다가오는 격정 같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보다도 더 큰 의미의 사랑도 있을 것이다. 수경은 그렇게 믿고 싶었고, 자신의 선택을 실행할 오늘만이라도 그래야만 했다.



“세수부터? 너무 배고파 다시 잠들 것 같은데? 백만 둘, 백만 셋, 나도 에너자이저가 필요해. 배가 등에 붙을 정도로 배고픈 지금은.”



재우는 농담 반 억지 반, 수경에게 떼를 썼는데, 이건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오늘 따라 수경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눈이 부실 정도가 아닌가?



‘화장까지 했어!’



재우는 본능적으로, 생각보다 몇 초 후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것이 아니라 위장 쪽으로 수평 이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하던 간에 그것이 자신에게 일어났건, 타인에게서 일어났건, 환경에서 일어났건 간에 모든 변화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이유로 비롯됐던 간에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죽음이 그랬고, 에너지 불균형의 시작과 심화가 그랬고, 자신의 삶을 포기한 동생의 변화가 그랬고,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일어난 친척들의 연락두절이 그랬다. 자신에게 변화란 어김없이 적용되는 자연의 법칙처럼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잔혹한 삶의 폭력이자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재우는 심장박동이 기억 속의 어떤 순간보다 더 빠르게 뛰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 어, 어.. 수경아? 무, 무슨 일이..”



재우는 차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뇌에서 떠올라 제멋대로 휘도는 불길한 생각들이 광란의 질주를 멈추지 않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입 밖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지랄 맞은 것은 이 긴박한 상황에서도 수경은 또 몇 초를 기다린 후에야 말하는 것이었다. 언제나 그 시간차란 재우와 상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절대 피해갈 수 없는 것이었고 그 때문에 좀처럼 감정에 휩쓸린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격정은 몇 초 사이에도 차갑게 식어버린다. 수경은 그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목소리에 최대한 비음을 포함시켰다.



“무슨 일은? 왜, 내가 너무 예뻐서? 나도 화장하면 경국지색이 따로 없어. 오빠는 그 사실을 몰랐지?”

“뭐, 환장했다고?”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 비음을 섞은 수경의 의도는 실패했다 - 수경의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서 재우는 크게 안도하며 소심한 농담으로써 자신을 나락까지 떨어뜨렸다가 건져 올려 준 수경에게 복수했다. 그렇다고 고약한 유령처럼 자신의 뇌에서 떠나지 않는 일말의 불길한 생각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이, 오빠는? 환장이 아니라 화장! 화장 말이야, 흥!”

“아, 화장? 어쩐지 미의 여신이 나타났다 했어! 야, 이렇게 예쁠 수가! 이 정도면 이거, 범죄 아니야?”



재우는 작은 양 주먹을 옆구리에 댄 채 콧소리를 내며 살짝 얼굴을 찡그리는 수경의 반항에 대적할 수 없었다. 그 귀엽고 앙증맞은 모습이란 아침 햇빛을 담고 있는 이슬방울에 살짝 젖어 있는 붉은 장미를 연상시켰다. 그런 모습을 나 같은 비리비리한 남자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차라리 범죄였다.



“범죄라니? 오빠 그게 무슨 말이야?”



재우는 자신의 말에 뾰로통한 음성으로 물어보는 수경의 입술을 그대로 덮치고 싶었다. 그것이 마음으로든 상상으로든 그래서 또 몇 시간을 피로감에 시달릴 지라도 단 한 번의 입맞춤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암!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지!’

“다른 모든 여자들이 너의 미모에 밀려 실의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을 텐데, 그건 여자들만이 아닌 모든 남자들에게도 최악의 범죄야, 범죄!”

“호호호! 그런가?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그러니 오빠는 복 받은 줄 알아, 호호호.”

“하하하! 그럼, 난 복 받은 놈이지! 암, 그렇고말고!”



오늘 따라 유난히 밝은 표정의 수경이 마음에 걸렸지만 재우는 오랜만에 웃을 수 있어서 좋았다.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까닭에 사용 가능한 에너지도 상당히 충전돼 있었으니 수위를 조절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봤자 몇 십분도 가지 못하는, 지독히도 허탈해질 상황에 불과하지만.



“그러니까 오늘 아점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야 해. 이처럼 예쁜 내가 정성들여 만든 거니까, 알았지?”



수경이 오늘 따라 양이 많은 과일즙과 향이 기막힌 고기죽이 한 그릇 가득 담겨 있는 쟁반을 내밀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마님?”

“자 그러면 과일즙부터 먹어볼까, 돌쇠야?”



재우는 오늘 따라 자신의 농담에 신명나게 반응해주는 수경을 보면서 그녀가 차려온 음식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그는 에너지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 다른 장기처럼 느리게 작동해 그 본래의 소화 기능이 떨어진 위장의 포만감에 연신 트림을 해댔다. 그것도 수경의 면전에 대고.



‘이런!’

“수경아 이건 고의가 아니야! 그냥 자연스러운 육체의 반응일..”



후환이 두려운 재우는 말끝을 흐리며 한껏 움츠린 시선으로 수경을 힐끔 봤다. 육체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그로써는 말끝을 흐리는 것으로 이해를 구하는 것이 최선의 대응이었고, 지금까지는 효과 만점이었다. 헌데 그 가늘고 비스듬한 시선에 걸려 있는 수경의 표정이 뭔가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일생의 중대사를 목전에 두고 있는 사람처럼 제법 결연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였다. 천사의 의상 같은 연분홍색 원피스도 마음에 걸렸고 일 년에 한 번 내 생일 때만 했던 화장(그녀는 그것이 선물이라고 했다!)까지 한 상태에서, 탐스러운 머릿결에서는 샴푸 특유의 향기마저 후각을 자극하니 재우의 뇌가 심장보다 빠르게 덜컹거리고 허파보다 빠르게 벌렁거렸다. 분명 그녀의 모습은 달랐다. 지난 3년 동안 수경은 이런 모습을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건 나쁜 결과로 귀결되는 급격한 변화가 분명했다. 그녀의 면전에 트림을 해댄 것은 아예 문제조차 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