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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참사

세월호와 성탄절,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정확히 2년 전에 간암에 걸린 것을 확인한 날, 치료가 된다고 해도 5년 생존율이 40% 이하라는 말을 의사에게 들었을 때 큰 충격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온갖 통증과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살고 있어서 평균수명에 근접한 삶이란 오히려 지옥 같았기 때문에 낮은 생존확률에도 담담했던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5년 내 생존율이 40%라면 최소 2년은 더 살 수 있다는 뜻이 되어서, 마치 저에게 2년이란 시간이 보장된 것 같았습니다. 뭐, 그 정도면 아쉬울 것이 없을 것 같았고, 그 시간이나마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살 수 있다면 별 미련 없이 이승을 떠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의사도 놀라워한 화학치료에 성공해 암세포를 잡았고, 건강도 많이 호전되면서 잠시나마 욕심도 생겼습니다. 최소 5권의 책을 내겠다는 계획도 세울 수 있었고, 그에 맞춰 집필에 들어가는 등 나름대로 진전도 있었습니다. 제가 블로그에 연재하다, 건강이 악화돼 잠시 멈춘 것들과 소설이 그것들입니다.

 

 

 

 

어쨌든 확률적으로 제게 보장된 2년, 즉 100%의 시간을 무사히 넘기게 됐습니다. 지금 같아선 덤으로 주어진 1년도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만일 내년 말에도 이런 글을 다시 쓰게 된다면, 그것에 진정으로 감사하며, 그 이후의 삶은 확률적으로 볼 때 여분으로 주어진 삶이 됩니다.

 

 

 

 

그것은 축복일 것입니다. 확률이란 그저 확률에 불과하지만, 그 이후의 삶이란 확률적으로 제게 주어진 신의 선물일 것입니다. 그리고 미덥지 못한 저와 매끈하게 퇴고하지 못한 글의 가치를 인정해 저를 후원해주고 계신 분들과 지속적인 관심을 표명해주시는 독자분들의 선물일 것입니다.

 

 

 

 

그것에 감사합니다. 저를 살게 하고 힘을 내게 해주는 격려와 응원에 감사합니다. 아직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허리통증은 여전히 저를 괴롭히고 있지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에, 그래서 4분의 후원자들과 수많은 독자분들과 글을 통해 만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그러면서도 미안합니다. 보다 좋은 글로 화답하지 못하는 것이, 아직도 바다 속에 갇혀 있는 세월호 실종자와 그들을 두고 떠날 수 없는 가족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IMF 외환위기 때보다 더한 어려움에 있다는 것이, 청춘들의 숱한 미생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2015년 전, 서로 사랑하라 또 사랑하라고 설파할 인간의 아들이 가장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났습니다. ‘네가 남에게 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행하라’고 했던 그분의 제자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직자들이 인간의 아들의 삶과 가르침에서 멀어지면서 15가지 병에 걸렸다고 질타했습니다.

 

 

 

 

요즘처럼 하루하루가 소중한 적이 없지만, 슬픈 적도 없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쓸 때는 그 순간들이 너무나 소중하면서도, 최악의 한 해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글에 담을 때마다 그보다 더 슬플 수 없습니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더 좋은 글로 담아야 한다는 것은 참혹한 일이기도 합니다.

 

 

 

 

제게 허락된 글쓰기가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지만, 이 정부의 임기가 끝나는 2년 후까지는 살아서 보다 정의로운 세상이 실현되는 것을 지켜보고 싶습니다. 어떤 이유를 든다고 해도 차별이 늘어나고 불평등이 커지는 세상은 불의한 것을 넘어 예수가 이 땅에 온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는 평등을 통해 자유를 지향했기에, 폭력혁명이 아닌 사랑의 혁명을 얘기했기에 가장 민주적인 지도자였습니다. 높고 커다란 성전을 짓고 그 안에서만 번성하지 말고 낮은 대로 임해서 사랑을 실천하라 했습니다. 공동체를 형성해 서로 도와주라고 했으며, 모두가 동등한 하느님의 아들이며, 모두가 선민이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본질을 왜곡합니다. 차별과 불평등이 만연하는 현실에서 무한경쟁의 통치술로 변질된 자유민주주의를 민주주의와 동일시합니다. 최상위 0.1와 상위 1%에게는 국가와 체제 등 모든 것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전락했지만, 하위 90%에게는 탄생의 불평등을 삶의 멍에처럼 짊어진 채 최소한의 자유만 가지고 힘겹게 출발합니다. 

 

 

다양한 가치를 선택하고 즐길 수 있는 선택의 기회마저 봉쇄돼 길은 많지만 들어서지도 못하는 길이 대부분입니다. 예수는 2015년 전 목수의 아들로, 가장 비천한 장소인 마구간에서 태어났습니다. 죽음에 이르러 부활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가장 비천한 여인인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했습니다. 그것이 예수가 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나라고, 99마리의 양보다 홀로 떨어진 1마리 양을 돌보는 모세를 선택한 이유이며, 그것이 예수가 꿈꾸었던 민주주의였습니다. 

 

 

 

 

2015년의 크리스마스 초야에서 ‘세월호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를 생각해봅니다. 병원에서 죽을 때까지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을 타오면서 무겁게 내려앉은 회색빛 하늘을 봤습니다. 거기에는 250명의 아이들이 안산과 팽목항을 오가며 차가운 바다 속에 갇혀 있는 친구들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단원고 아이들처럼 인간의 아들로 태어나 신의 아들로 부활했습니다. 그 사이에는 사랑과 구원의 약속이 있었고, 십자가 못 박힌 모두를 위한 죽음과 부활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모든 이들의 원죄를 대속하였고, 사랑의 위대함을 가르쳐주었고, 영원한 삶으로 들어설 수 있었고, 세월호 아이들과 함께 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안산과 팽목항을 떠도는 아이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였습니다. 그들은 제가 어떻게든 살아서 대속해야 할 원죄와 같은 존재가 됐습니다. 제 가슴 속의 분노는 가장 초라한 모습의 사랑입니다, 아이들이 숨을 쉬기 위해 최소한의 공간이라도 찾았을 마지막 순간의 공포와 절망처럼. 

 

 

 

 

모태 천주교 신자로서 2015년의 크리스마스는 가장 감사하고도 가장 슬픈 하루입니다.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이란 아무것도 꿈꿀 수 없는 지옥이고, 고통과 아픔이 없는 삶이란 허구에 불과하지만, 영원한 미생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할 아이들에게는 예수의 탄생마저도 멀게만 느껴집니다.  

 

 

 

 

사랑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을. 단원고 생존학생들과 유족분들을. 누군가를 떠나보냈다 해도 오늘 만큼은 행복할 자격이 있는 모든 분들을. 2015년 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모든 이들에게 사랑이라는 구원을 선물하신 분의 탄생으로 인해, 세월호참사 같은 비극 앞에서 중립이란 없다고 말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으로 인해.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