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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워드

우영워드 ㅡ 소셜테이너, 동철




                                               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드드드드득! 드드드드득! 드드드드득!



책상 위에 놓아둔 갤럭시2가 빛을 뿜어내며 자지러졌다. 연신 수증기를 뿜어내던 커피포트의 스위치도 약속이나 한 듯이 탈칵하며 떨어졌다. 그것들에 의해 다시 현실로 돌아온 재영은 머그잔에 끓은 물을 따른 후 천천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걸어가는 동안에도 『미디어 이해』에서 읽은 문구를 떠올렸다. 



기술의 영향력은 의견이나 개념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향력은 인식의 방식을 꾸준히, 아무런 저항 없이 바꾸어놓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인간이 일상이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정보사회에서 TV와 컴퓨터, 휴대기기 없이 누군가와 소통하는 일이란 생각하기 힘들다. 첨단 전자기술의 총화인 미디어의 힘이란 그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는 테크놀로지 자체의 속성에 있는 것처럼, 활자문화를 과거의 경험과 지식 전달자의 위치에서 밀어낸 방송ㆍ통신기기들은 우리의 인식과 삶 자체를 통째로 재편성하고 있다.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휴대폰이나 모니터, 평면 또는 3DTV가 전하는 각종 메시지를 통해 세상을 보고 접촉하며, 구분 짓고 저장하다 삭제한다. 디지털 미디어가 관여하지 않는 것은 삶의 공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미디어는 세상을 뒤덮은 촘촘한 그물망이야. 거길 통과한 메시지만 전달돼. 그물망은 거대 미디어가 독점하고 대안 언론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해. 진실은 고사하고 사실조차 편성, 조작될 수 있어. 그물망을 조금만 변화시키면 되니까.’



재영은 비슷한 뉴스와 비슷한 드라마, 비슷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비슷한 공개 오디션을 보지 않으면 대화에도 낄 수 없는 세상을 떠올렸다. 플라톤에서 시작해 하이데거를 거쳐 히틀러가 실현했던 전체주의는 한나 아렌트의 예언대로 사라지지 않았고 그 모습을 바꿔, 좀 더 소프트하고 기술적으로 살아남아 세상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다. 개인은 미디어가 전하는 정보와 메시지를 각각의 관점에서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받아들인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정보와 메시지는 무차별적이고 방대하며 연속적으로 던져지기 때문에 즉각적인 판단을 하지 않으면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시청자들은 오늘의 뉴스라는 형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까? 다음 뉴스는, 다음 뉴스는 하면서 몇 분이나 몇 십 초 정도로 편집된 뉴스를 연속적으로 내보내는 게, 국가나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뉴스 다음에 흥미 위주의 가벼운 뉴스를 배치하는 게 우리의 판단 기준을 얼마나 흐려놓는지 알까?’



뇌에 대한 각종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작업(또는 단기) 기억 안에 담아둘 수 있는 정보의 양은 한정된다. 그 정보를 번역해 가중치를 부여하고 선택적으로 저장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정보의 바다에 수장되지 않으려면 앞서 들어온 정보의 대부분을 작업 기억의 공간에서 그냥 내보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나마 마련될 수 있다. 디지털 미디어의 세계에서 정보의 대부분을 기억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개인은 결국 미디어가 제공하는 네트워크(그물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여러 가지 기사를 계속해서 내보내는 ‘오늘의 뉴스’의 진행 방식이다. 뉴스를 보고 있는 동안 (또는 보고 난 이후에도) 시청자는 뉴스가 전해준 십여 개의 기사 중 특별히 기억나는 게 없는 현상에 직면한다. 이는 앵커가 ‘자 다음은’ 하는 식으로 하나의 기사 꼭지가 끝났음을 알려줘, 다음 기사를 위해 터무니없이 부족한 작업 기억의 용량을 얼른 비워두라는 암시에 의해 발생한다.



‘결국 깨어 있어야 한다는 진부한 격언에 귀착돼. 그건 쿨한 세대에겐 최악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디어가 전하는 콘텐츠(내용)가 중요하지 미디어 자체(기술)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선택은 각자 개인이 내리는 것이고 각각의 인식과정도 다르며, 자신이 처한 삶의 필요에 따라 정보를 취사선택하므로 정보의 홍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설사 거기에 빠진다 해도 쿨하고 개념만 있으면 흔들리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미디어는 콘텐츠를 전달만 하는 매체일 뿐이 삶의 지배자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재영은 마샬 맥루한이 말한 또 다른 문구가 떠올랐다.



미디어의 내용이란 실제로는 정신의 입구를 지키는 개의 주의를 끌기 위해 강도가 손에 들고 있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코기와 같은 것이다.



‘거기에 미디어 소유권의 집중까지 더하면, 민주주의는 질식할 수밖에 없어. 소유권이 분산되지 않고 이익에 집착하며, 엘리트 위주의 당파적 성격이 강한 미디어는 칼을 든 친구가 될 수 있어. 우리는 원수에는 최대로 주의하지만 친구에는 쉽게 속아 넘어가기 일쑤 아닌가?’



재영은 자리 앉아 머그잔을 내려놓고 두 번째 연결을 시도하고 있는 슈퍼아몰레드 액정화면 속의 상대를 확인했다. 재영은 취재와 관계된 인물이 아니면 좀처럼 전화를 받지 않는 경향이 있어 그와 통화하려는 사람은 보통 두 번은 연속해서 전화를 걸어야 했다. 그는 그것이 불필요한 통화를 하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통화 지연에 따른 오해야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었다.



‘이 번호는?’



재영은 상대를 인식하는 첫 단계가 11자리에 이르는 수의 조합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 못내 불편했다. 사진(또는 아이콘)도 함께 뜨게 하는 것도 통화량을 늘리려는 미끼상품, 즉 이익 창출을 늘리려는 불필요한 기능일 뿐이었다. 수의 조합과 아이콘은 한 명의 인물을 기억에서 불러냈다. 동철이었다, 아니 그임을 증명하는 전화번호와 정형화된 메시지였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재영은 캘럭시2를 들어 귀로 가져갔다. 동철은 요즘 들어 사회참여에 적극적인 소셜테이너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정현 선배의 소개로 알게 된 유일한 연예인, 그 역시 미디어의 명암에 대해 여러 가지 의문을 제시하던 차였다. 타고난 말솜씨만큼 생각의 깊이도 충실한 그는, 재영이 갖지 못한 이 시대 최고의 무기(유머, 재치)를 장착한 사람이었다. 재영이 그에게 끌린 것은 자신과 비슷한 아웃사이더적인 기질 때문이었다. 그가 본 세상도 합리적이거나 질서정연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형의 계획을 실현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동철씨, 웬일이세요?”

“너무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죄송합니다. 느닷없지요, 제가?”



왠지 슬픔이 묻어 있는 듯한 동철 특유의 음성이 조심스러우면서도 정겹게 다가왔다. 통신망의 용량 부족으로 통화품질이 떨어지는 차에, 여러 가지 음성이 섞여 들리는 것을 보면 여러 사람이 동시에 떠드는 술집이나 포장마차 같은 곳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한 잔 하신 모양입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전화를 다 주시고?”

“노총각이 다 그렇죠, 크큭. 공장 대신에 사원을, 하늘의 길에 포장마차를, 호수 속에 응접실을! 한 잔 했습니다, 이런 이른 시간부터요.”

“랭보 좋지요. 환각제나 술이나 별반 다르지 않으니 세계적인 시인이 되신 모양입니다, 하하. 마침 저도 한 잔 하고 있는데, 종류는 다르지만. 아뜨뜨!”

“아뜨뜨? 뭘 마시.. 아, 커피 마시는군요. 그것도 아주 뜨거운. 입술만 랭보가 되겠네요? 크크큭!”

“동철씨 때문에 입술 다 뎄어요!. 책임지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고소할 거예요.”

“저보고 재영씨 입술을 책임지라고요? 저 남자는 별로인데요. 못 생긴 남자의 입술은 더더욱. 유리로 뺐지 못한 입술인데, 어딜 감히. 크크큭!”

“사돈 남 말하십니다! 어디십니까?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온통 여자목소리뿐인 것 같은데? 혹시 전설의 아방궁인가요?”

“크큭. 귀는 밝으셔서. 오실 수 있으세요?”



동철이 전화한 이유를 밝혔다. 재영이 동철의 제의를 기꺼이 수용했다.



“그래서 전화한 거 아닙니까? 전에 만났던 곳입니까?”

“네, 그곳이에요. 엄청 예쁜 연예인들이 수두룩해요. 반쯤 맛이 간 상태에서, 그것도 예쁘고 어린 순서대로. 크크큭!”

“총알같이 날아가겠습니다! 제가 갈 때까지 그분들 붙들어 매놓으십시오. 알겠습니까?”



재영은 좀처럼 하지 않는 농담을 던질 만큼 동철의 초대가 고마웠다. 울고 싶은 놈 때려준다고, 타이밍도 적절했다. 공복에 마시는 술, 그것은 마약과도 같은 진통해열제였다. 이성이 지나치게 고양될 때면 감정은 탈출구를 찾기 마련인데, 재영에게는 공복에 마시는 술이 그랬다. 재영은 취재기획안을 저장한 후 노트북을 가방에 넣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갤럭시2도 가방에 밀어 넣은 후 어깨에 걸쳤다. 자리를 정리하지도 않은 채, 서둘러 자리를 떴다. 아마도 동철은 술과 여자 연예인을 핑계로 자신이 추천한 책, 『죽도록 즐기기』나 정치경제학의 기념비적인 서적, 『거대한 전환』에 대해 토론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 죽을 때까지 한 번 마셔보자. 술에 죽나 취재기획안 때문에 죽나, 어차피 한 번은 죽는 거, 당근 술이지!”



재영은 누구에라도 보이려는 듯이 손바닥으로 가슴을 탕탕 쳤다. 그것은 마치 팀장이건 국장이건, 거대 언론이건 그 뒤의 시스템이건, 심지어 세상 모든 곳에 편재해 있는 신에게라도 위세를 떠는 것 같았다. 오늘은 실컷 퍼 마시리라, 재영은 스스로의 전의를 불태웠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꾸 튀어나오려는 일말의 두려움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문제는 1%도 안 되는 취재기획안의 승인 여부였지만 지금 당장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가는 거야!”



재영은 이번의 취재기획안이 진실을 향한 길고 험한 여정이 될지, 아니면 죽음을 향한 무모한 출정식이 될지 알 수 없었지만 당장은 한 잔의 술이 너무나도 필요했다. 지금은 그 누구의 한 마디 격려의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